구약성경 이사야 6장1-7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름 받는 장면으로 이 본문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성화’시키시는 사건인데, 이 환상의 장엄함은 보좌 주위를 날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외치는 스랍들의 모습을 통해 더욱 극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거룩’이라는 단어가 세 번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최고의 높은 차원임을 말해주는데, 사실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동시대에 살아가는 백성의 무가치함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스랍 중 하나가 제단에서 불타고 있는 숯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에 댈 때에 그는 깨끗함을 입었고 자신의 죄로부터 분리되어 이스라엘을 향해 거룩함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죄로부터 분리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를 성별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이사야가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성화되었다는 말은 성도들이 이제 새로운 삶의 목적을 발견하여 새 규범과 성령의 능력을 지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이지, 더 이상 죄를 한 번도 짓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전 7:20, 요일 1:8).
영국이 낳은 개혁주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John Owen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더욱 성결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의 교리와 삶의 방식이 서로 연결된 동반자로서 항상 성화의 중요성을 내세우지만 이 둘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6)처럼 신학과 실천, 즉 교리와 거룩한 삶이 반드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화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었다는 것(고전 1:30)과 그분과의 결합을 통해 우리 안에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골 2:19). 이 문제를 두고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와 떨어져 있는 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가 고난당하시며 행하신 일은 모두가 우리에게 무용, 무가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를 우리의 ‘머리’(엡 4:15),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라고 하였다(롬 8:29). 또 우리 편에서는 그에게 ‘접붙임’을 받으며(롬 11:17),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였다(갈 3:27)”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첫 번째 성화된 분이자(요한 10:36), 완전히 거룩하신 분으로(요 17:19), 우리가 진리되신 그분을 구원의 주로 믿고 한 몸이 되기 전까지는 성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임신이 되는 그 순간부터(눅 1:34-35),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죄의 유혹(마 4:1-11)과 사탄의 세계에 맞추어져 있는 인간의 연약한 육체에서(히 2:14), 그분은 키와 지혜가 자라가며(눅 2:52),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뜻을 순종하는 가운데(히 5:7-10), 흠도 없고 점도 없이(벧전 1:19), 지극히 거룩한 삶을 사셨습니다(단 9:24). 또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20)라고 외치신 후에 왕의 존엄과 함께(요 18:37),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신(눅 23:46),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빌 2:8)과 성화의 삶을 살았던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벧전 3:15). 그리고 삼일 만(마 16:21)에 부활하셨을 때(행 1:3), 성화된 예수님의 인간적 삶은 신약에서 말하는 무궁하고(히 7:16), 불멸한 생명의 능력으로(롬 6:9), 물리법칙에 제한을 받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변모했는데(요 20:19, 26), 이러한 놀라운 일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고전 15:20), 처음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엡 4:13). 따라서 믿는 자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다면(롬 8:9), 그들의 삶에서 성화가 진척되어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롬 6:5), 그분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골 2:19).
신약성경은 이 성화에 대해 성령의 사역과 신자의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성화를 이미 완성된 사건으로 보았고(고전 6:11), 사도행전 20장32절에서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그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신자들을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라고 부릅니다. 이 성화의 처음 단계에서는 세상을 사랑하던 마음을 점령하고 있던(요일 2:15), 죄의 세력으로부터 확실하게 단절시킴으로 신자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못하게 하고(롬 6:6), 나아가 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생명의 능력이 신자의 삶을 죄에서 내어주는 것을 막아줍니다(롬 6:11, 18). 이것은 한 개인의 삶에 있는 죄악된 행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음을 말해주는데,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죄로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할 것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롬 6:12-13). 다시 말해 죄의 권세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신자가 성령의 능력과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부활의 생명에 힘입어(롬 6:5), 죄의 유혹과 시험을 뿌리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약 4:7).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사람은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죄 안에서 살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롬 8:12-17).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직접 성화되며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그 죄의 몸에서 나오는 몇 가지 정욕들이 점차 약해져 줄어지고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거룩한 생활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성경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말한 것처럼(딛 3:5), 성화는 거듭날 때부터 분명하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요 17:22), 우리는 죄의 통치에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롬 6:14),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죄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악은 최종적으로 파괴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계 12:12), Calvin은 “사탄은 성도가 절망으로 미치도록 유혹하고 있다”라고 말한 것 같이, 죄로부터의 우선적인 단절은 더 이상 우리의 삶 가운데서 죄를 사랑하지 않도록(히 12:1),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겠다는(히 12:4), 우리의 의지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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