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어느 칼빈주의자들 못지않게 진리의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하던 나에게 영적체험을 하고 나서 성령의 사역을 교회에 접목시켜 사역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받은 은사들은 비록 성숙하고 잘 다듬어지는 과정이 없었지만 예배 때마다 교회 성도들이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집사님 한분이 다리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데 목사님께 기도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일찍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눈으로 볼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기도가 끝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집사님이 어느 동양인 여성 한 분을 데리고 들어오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저 휘어지고 걸을 때마다 온 몸이 휘청거리는 저 사람이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집사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니, 병자를 데려오려면 감기에 걸린 사람이나 발목이 삔 사람 아니면 기도해도 쉽게 날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오지, 어떻게 저런 사람을 데려 왔을까 오늘 기적이 일어날까?” 이렇게 그 동양인 여성을 앉혀놓고 기도를 하는데 입으로는 하나님께 기적을 간절히 구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믿음이 생기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치료되지 않았고 이 단어가 점잖은 표현은 아니지만 표준어이기 때문에 사용하는데 그날 ‘쪽팔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성경에는 비록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이사야는 이집트와 구스에 대한 예표로서 삼 년 동안 벗은 몸으로 지냈고(사 20:3), 호세아는 창녀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호 1:2), 엘리사의 유골은 실제로 죽은 자를 살려냈고(왕하 13:21), 베드로의 그림자는 병자를 치료했으며(행 5:15), 바울의 몸에 있던 손수건과 앞치마는 귀신들을 쫓아냈습니다(행 19:12). 그리고 이것들보다 훨씬 더 이상한 일들이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가령 누군가가 하나님의 보좌에 관한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그 환상 속에서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를 닮은 네 가지 생물들이 있는데 각각은 여섯 개의 날개가 있고 그 날개들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 차 있어 이 생물들이 하나님의 보좌 주변을 주야로 날아다니면서 거룩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계 4:6-8), 아마 주변 사람들은 이 사람이 귀신이 들렸거나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환청에 시달리는 증세가 심한 병자로 판정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이치에 맞는 성경적 환상이라고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눈으로 보고 들려오는 모든 이상한 것들을 다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일 4:1), 그러나 이것이 단지 이상하고 황당무계한 일들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든지 비성서적이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것은 “과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구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기적을 구하는 동기와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린 것인데(출 10:2), 예를 든다면 세례요한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의 창을 닫아버린(눅 3:18-20), 헤롯처럼 눈으로 보고 그냥 즐기기 위해서인지(눅 23:8), 아니면 마술사 시몬같이 개인의 능력이나 인기를 얻기 위해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행 8:14-24). 그러므로 하나님의 건전한 목적을 위해 기적을 구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닌 것은(요 2:11), 복음 메시지의 진실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요 4:29, 행 8:4-8, 9:35, 42, 히 2:4), 혹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거나(마 14:14, 20:29-34, 눅 7:11-17), 복음사역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마 8:15, 행 9:36-43, 빌 2:25-30), 얼마든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9:8, 요 9:3). 사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구하며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요 6:1-5), 주님은 그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고(막 6:30-44, 눅 9:10-11),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면서(눅 9:1), 그들에게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7-8).
뿐만 아니라 오순절 이후에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담대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막 16:20), 기적이 나타나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행 4:29-31). 더 나아가 룻다에 있던 제자들 역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던 다비다가 죽은 후 그녀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베드로에게 요청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구했던 적이 있으며(행 9:36-43), 야고보 역시 교회의 장로들에게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으면 서로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 병 낫기를 위해 간구하라고 권했습니다(약 5:14-16).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기적적인 응답이 언제나 일반적인 방편, 즉 의술을 통한 치료보다(사 38:21), 더 낫다고 가정해서는 안 되겠지만(눅 5:31), 무엇보다도 특별한 도움을 위한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2:6-7).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절실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히 4:16)라는 말씀처럼 응답에 대한 약속을 주신(시 91:15), 하나님께 나아가 끈질긴 과부의 기도처럼 응답해 주실 때까지 간절히 구해야 하겠지만(눅 18:1-8), 여기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기적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방법을 통해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시는지 다윗처럼 신중하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삼상 23: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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