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es H. Kraft는 기적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는 기적이라는 것이 있는가? 아니다.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치유, 귀신축출, 천사의 보호,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의 말씀을 통한 계시와 인도, 원수를 사랑하는 일, 죄인을 용서하는 일, 원한을 품거나 복수하거나 세상사를 염려하지 않는 것, 세상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지 않는 것 등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한 일들은 오직 세상의 관점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만 기적으로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실재에 있어서는 서양적인 시계관이 그렇게 하듯이 우주를 몇 개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도 없으며 영적인 특면을 간과해 버릴 수도 없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해하고 계신 것과 같은 우주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기적의 개념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사물을 보고 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기준에 따라 무엇이 정상적인 것인지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그의 저서 『Christianity with Power』에서 나오는 이 말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우리가 소위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거리를 두고 계신 어떤 신비한 영역에서의 비정상적으로 개입하시는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적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교회를 통해 놀라운 기적적인 은사들을 사용하시고 계신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은사중지론의 선봉에 서있는 John MacArthur는 『Charismatic Chaos』에서 “성경 속에서 사도시대의 기적들이 다음 세대들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지 않는다. 혹은 성경은 신자들이 성령의 어떤 기적적인 표현들을 구하라고 권면하지 않는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말을 Richard B. Gaffin Jr의 말로 다시 인용하면 교회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그 창설시기에는 충분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한 것이지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기적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는 달리 성경에 의하면 은사들은 교회를 강화시키고(고전 14:4),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고(고전 12:7),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2:31, 14:1,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MacArthur는 다시 이런 주장을 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기적적인 은사들이 신자들의 강화를 위해 주어졌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가? 아니다. 사실상은 진실은 정반대의 것이다.”  사실 MacArthur의 이러한 주장은 은사가 교회를 강화하는 목적에 대해 성경적인 뒷받침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솔직히 그는 자신의 이론을 뒤집을 만한 관련된 성경본문인 고린도전서 12장7절과 14장3-5절에 관하여는 결코 논의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모호한 신학적인 추론들이나 단순한 주장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경의 진술에 의해 해결되어야만 하는데,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약성경에서 어떤 내용을 읽거나 고금을 막론하고 교회가 처한 상황 속에서 어떤 것을 발견해도 그 때문에 우리가 은사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거나(엡 4:13), 진보해 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따라하는 일에는 진리의 말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따르는 표적과 놀라운 능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고(막 16:14-20),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사역하면 안 된다는 명확한 성경적 그리고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요 14:12), 그분이 하신 일들이 바리새인처럼 눈에 아무리 낯설게 보일지라도(마 12:22-24), 그 일을 우리가 마땅히 행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행 5:12)과 예수님의 제자들(행 6:8, 8:6)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전하는데 있어 능력 나타남과 기적적인 은사가 필요했고(행 8:12-13), 교회의 탄생, 즉 성령의 은사들이 1세기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진리를 증거 하는데 필수적이라면(막 16:17-20), 오늘날처럼 죄악이 넘쳐나는 믿음이 없고 패역하고 악한 세대(마 17:17)에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엡 4:13),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더더욱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불어 오늘날 기적의 은사가 필요한 이유는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믿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요 14:11),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을 모르는 불신자에게는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확실한 표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행 9:36-42).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유대인을 상대할 때는 언제나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변론을 했고(행 9:29),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을 때는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여 그 뜻을 풀어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행 17:1-4).  구약성경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을 전도할 때(행 17:16-18), 바울은 어김없이 이런 방법을 사용했지만(행 18:19), 반면에 이방인을 다룰 때는 그들이 성경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롬 15:18), 말씀만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Palmer Robertson은 William Carey의 말을 인용하여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사람 마음 가운데 확신하는데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사역할 때 더 많은 기적들을 행한 것인데(행 8:4-8), 그 사례들을 찾아본다면 먼저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일어날 때(행 14장)와 귀신들린 여종 사건(행 16장), 그리고 바울이 이방인들 앞에서 손수건을 가지고 희한한 능을 행할 때였습니다(행 19장).  이렇듯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방인에게는 다른 권위와 증명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성령의 은사라는 것입니다(고전 14:24-25).


D. A. Carson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모든 보고는 허위이거나 마귀적인 활동의 열매이거나 심리적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익하다.”라고 상기시켰는데, 이 말의 의미는 성령의 은사들이 1세기에만 한정되어 있다거나 지금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라졌다는 또 다른 이유로 은사가 기록되지 않은 목회 서신이나 바울의 후기 서신을 내세우면서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을 전체로 취급해야 할 것과 신약성경의 기록의 모든 배경은 사도행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교리를 서신서 위에만 세워서는 안 되고 서신서들은 반드시 사도행전에 분명히 나타난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서 읽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표적과 기사들을 통해 그때나 지금이나 한 영혼을 구원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고(눅 17;17), 분명 타락한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있다면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고전 15:1-4), 역사하시는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고전 12:3).  하지만 복음의 메시지를 더 확실하게 증거 하기 위해서는 기적적인 은사들이 반드시 필요하고(막 16:20), 이렇게 교회 속에 나타난 은사들은 결코 진리의 말씀을 희석시키거나 복음의 능력을 상실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고전 2:4).  그 이유는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14: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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