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8-10장에 보면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것이 그 우상 예배에 참여한 것이 되지 않는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음식 예비와 특별한 유대인의 절기 준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 어떤 이방인들은 특별한 날이나 음식 예비에 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내놓는 음식이 시장에서 팔리기 전에 우상에게 바친 것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고기들이 이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것은 매우 특별한 관심 사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로마서 14장에서 나오는데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이슈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는 음식 규제와 다른 하나는 특별한 날의 준수 문제였는데 사실 음식과 날의 준수는 할례 문제 다음으로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가장 큰 민감한 이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대화의 핵심 주제로 삼고 시도 때도 없이 밤낮 음식 규제인 고기 먹는 문제만을 가지고 교회를 나누고 서로 정죄하며 비판하는 가운데 싸웠습니다. 이렇게 만날 때마다 먹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자 사도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이런 말로 일깨워 줍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롬 14:4).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남깁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오늘날에는 그 이슈가 다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는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데, 교회는 성경이 분명히 금하고 있는 죄들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되지만(고전 6:9-10), 추가 규범이나 규칙과 제도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법과 똑같은 비중을 두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 중에 간혹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개인적인 견해나 취향 혹은 문화적인 선입관에 근거하여 자신의 도덕적인 판단을 쉽게 내리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 간에 분쟁과 분열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면 중세에는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물에 파리가 빠지면 물이 오염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파리가 거룩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이 문제를 가지고 밤낮으로 논쟁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신앙의 유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문제만을 발생케 하는 내용을 가지고 헛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구원의 절대적이지 않는 이슈(성령세례, 칭의, 예정, 은사들, 천년왕국, 기름부음, 삼위일체)들을 가지고 거의 예외가 없이 자신의 신학과 신앙으로 고린도교회나 로마교회처럼 서로 비방하는데 온 시간을 보냅니다. 솔직하게 말해 이러한 논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주로 복음 전도에는 관심이 없고 편파적이고 단편적인 메마른 성경지식을 가진 목사와 신학자들인데, ’교리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에 대해 성경적인 부분에서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쓸모 없는 교리는 개나 돼지에게 던져주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택함 받은 사람의 믿음이나 선행에 대한 예지와 무관하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무조전적으로 선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중예정론’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오직 택자들만을 위한 ‘제한속죄’인지 혹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충족하지만 제한된 수의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는 ‘무제한속죄’인지에 대해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의견 일치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6세기 스위스의 종교개혁자인 Calvin의 사상에 기원을 둔 강성 칼빈주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택자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한 번 구원 받은 사람”, 즉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19 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침례교의 다수의 견해가 되었던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전적인 타락과 견인론에 있어 완화된 견해를 수용하면서 ‘칼빈주의 5대 논점’인 TULIP의 다섯 가지 조항 중 가운데에 놓인 세 가지 논점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강성 칼빈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를 재해석합니다. 이들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올바른 확신과 안전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이 거져 주시는 은혜에 저항할 수 있는 회심 이전의 인간의 자유와,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개인의 영원한 안전(견인)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와 달리 알미니안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에 대해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될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이미 예정된 길을 따라가면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조종을 받는 로봇이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기에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믿음을 지키지 않는다면 타락하여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점에 대해 웨슬리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점을 조금 지적한다면 웨슬리주의자들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불신앙이나 고백하지 않는 죄, 즉 의식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짓는 죄로 인해 얼마든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배교는 갱신된 회개를 통해 다시 치료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신자가 죄로 인해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배교를 나타내는 결단적인 행위, 즉 불신앙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저버릴 때만 구원이 상실된다고 강조하면서 배교는 다시 회복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양쪽 학파들 모두 자신들의 논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요약하면 강성 칼빈주의자들과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 보존됨을 기뻐하고, 알미니안주의자들과 웨슬리주의자들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사실 견인(안전) 교리가 구원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겁게 논쟁을 일으킨 주제이기 때문에 오늘날 이러한 해석의 난점은 신학자와 목회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논쟁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 간의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견인 교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이지 피구원자인 인간이 확실하게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정권은 요나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욘 2:9), 하나님에 속한 비밀이기에 누가 예정되었거나 내적부르심을 입었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개혁주의 신학자 R. C. Sproul이 『Willing to Believe: The Controversy over Free Will』에서 한 말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자 사이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논쟁 속에 엉뚱한 그룹들이 종종 서로를 잘못 설명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들어 놓고 잘못된 이해를 근거 삼아 돈키호테들처럼 논쟁의 칼을 휘둘러 댄다. 나는 칼빈주의자로서 종종 그것이 진정 칼빈주의를 묘사한 것이라면 기꺼이 동의하겠지만 그것과 무관하기에 동의할 수 없어 그들로부터 비판을 듣는다. 따라서 나는 알미니안주의를 따르는 사람들도 피할 수 없는 동일한 상황을 겪으면서 똑같이 당혹스러워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 마디로 칼빈주의 신학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교리적 논쟁을 일삼는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스펙트럼과 해석하는 방법론에 있어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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