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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실제로 그를 믿는 자들의 죄 값만을 지불하셨는가 아니면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죄 값을 지불하셨는가?”  “오직 선택받은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인가?”  만약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면 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가?”라고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그에 대한 답변은 ‘전택설’ 견해를 취하는가 아니면 ‘후택설’ 견해를 취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먼저 전택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할 것을 작정하시기 전에 이미 일부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따라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하셨다는 ‘이중예정론’을 주장한다.  반면에 후택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전택설적 예정론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 얻을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을 미리 알고 그 사람의 믿음을 조건으로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전택설 입장은 하나님의 절대 예정을 강조하고, 후택설 입장은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선택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믿음이나 선행에 대한 예지와 무관하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선택했는지 아니면 하나님은 유기될 자들의 죄(불신앙)에 대한 예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을 정죄받도록 예정했는지에 대한 Calvin의 ‘이중예정론’은 오늘날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Calvin이 그리스도가 택한 자들만을 위해 죽었다는 ‘제한속죄’를 믿었는지 혹은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위해 죽었다는 ‘보편속죄’를 믿었는지에 대해서도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Calvin의 속죄 범위에 대한 논쟁은 크게 두 부류로 갈라진다.  하나는 제한속죄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W. R. Godfrey, R. A. Muller, J. H. Rainbow)과 다른 하나는 보편속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B. G. Amstrong, R. T. Kendall, J. B. Torrance)이다. 

이러한 Calvin의 속죄론을 가지고 Augustus H. Strong은 『Systematic Theology』에서 “Calvin은 그의 초기저서 『기독교강요』에서 속죄의 범위에 관한 자기의 결정적인 견해를 피력해 왔으나, 그의 후기 저서인 ‘주석’에서 보편적 속죄설에 동의를 표했다. 그런즉 전택설은 단순한 칼빈주의적이라기보다는 초극단적인 칼빈주의적이다”라고 말했다.  보편속죄론을 주장하는 B. G. Amstrong도 Calvin이 보편적 속죄교리를 강조하지만, Theodore Beza와 16-17세기 강성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제한속죄를 말하는 것처럼 잘못 해석되었다고 주장한다.

먼저 보편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다(요 1:29).  하지만 그 효과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의 주로 영접하고(요 1:12),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막 16:16).  이들은 많은 성경구절들 중에 중요한 두 구절 디모데전서 4장 10절과 요한일서 2장 2절을 내세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에게 충족하나(고후 5:14), 제한된 수의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택함 받은 자의 구원을 보충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구원을 효과적으로 보증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롬 10:1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롬 10:13). 

이러한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모든’(all)이란 단어와 ‘전체’(whole)라는 말은 언제나 그 의미대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가이사가 다스렸던 당시에 온 천하 사람들에게 호적등록 할 것을 명령했을 때(눅 2:1-5), 여기서 말하는 ‘온 천하’란 로마제국 전역을 말하는 것이지(행 11:28),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두 구절에서 나온 ‘모든 사람’과 ‘온 세상’은 지리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히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것처럼(신 7:8, 암 3:2),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 모든 지역에 있는 택함 받은 자들을 향한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제한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 역시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사람을 위해 죽지 않을 것을 강조한다(요 6:37-40).  이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자기 백성(마 1:21)과 자기 양(요 10:15), 그리고 자기 피로 산 교회(행 20:28)만을 구원하셨다고 주장하면서 로마서 9장 11-13절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들고 나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의 소망으로 이끌지 않으시고(요 6:44), 오직 창세전에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엡 1:4), 구원을 허락하시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그 구원에서 제외시키셨다고 주장한다.  즉 속죄의 적용은 오직 하나님의 소요된 백성만을 위한 것이지(벧전 2:9), 유기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 6장 37-40절에 나오는 말씀은 제한속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특정 수효만이 택함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으나 모든 사람에게는 유효한 것은 사실이고(요 12:32),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지만(딛 2:11), 구원은 실제로 정한 수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보충설명을 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과 유일한 관계이기 때문에(히 2:9), 이 관계를 거부하거나 거스리는 자는 그 결과를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양쪽 견해를 살펴보면 서로 간의 동의하는 부분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 것(막 16:15-16)과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것이다(행 1:8).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죽으심이 충분한 지불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는지,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의 죄 값만을 지불하였는지(마 1:21), 아니면 모든 사람들의 죄 값을 지불하였는지를 놓고 볼 때(딤전 4:10), 이것은 각 개인의 성경해석과 판단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롬 12:3). 

문제는 신학과 신앙에 균형 잡히지 않는 사람과 마귀에게 쉽게 충동질당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학적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거나 쓸데없는 논쟁을 야기시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편을 갈라 분쟁을 일으키게 만든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Wayne A. Grudem이 말한 것처럼 성경은 이 난해한 교리를 매우 중요하게 따로 취급하거나 명백하게 신학적으로 자세하게 설명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보편속죄론보다 제한속죄론이 좀 더 강력한 논리적 기반을 가진 듯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다른 교리적 혹은 실제적 문제들을 다루는 구절들에서 추론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질문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안에 일어나는 일을 파고드는 것이기 때문에 단정해서 결론지을 수 없는 문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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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전

논쟁거리/속죄 2024. 7. 14. 17:17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대화는 참으로 중요하다.  인간은 대화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고, 마음의 문을 열고 진지하게 나눈 대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감정이나 의견의 대립을 해소시켜 준다.  무엇보다도 서로 간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보다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해 준다.  이런 유익을 주는 대화와 달리 성도로서 해서는 안 되는 대화가 있다(딤전 6:4-5).  그것은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무식한 논쟁적 대화이다(딤후 2:23). 

예를 들어 중세에는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물에 파리가 빠졌을 때 물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류와 파리가 거룩해졌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었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일삼았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신앙의 유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문제만을 발생케 하는 내용을 가지고 백해무익한 헛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영혼구원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이들은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상실하고 신앙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로 신학적 논쟁이 그칠 날이 없다’(딤전 6:5).

어느 신학자가 ‘유보적 칭의론’을 강론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판의 신학적 칼날을 세워가지고 공격하는 진영이 있었다.  이들이 누군가 보았더니 다름 아닌 Calvin의 살인적인 비판정신을 이어받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유보적 칭의론은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이 주창한 전통적 구원론 하고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교리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무익한 변론들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교리를 잘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Lloyd Jones는 정통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매우 흔한 함정 가운데 하나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완벽한 정통적이면서도 죽어있는, 즉 영혼구원에 아무 쓸모없는 메마른 교리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를 다시 한번 들어보자.  로마서 14장에 보면 고기 먹는 문제 외에 다른 것은 전혀 문제가 삼을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대화의 핵심 주제로 삼고 시도 때도 없이 밤낮 고기 먹는 문제만을 가지고 교회를 나누고 서로 정죄하며 비판을 했다.  이렇게 만날 때마다 먹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자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7)고 일깨워 준다.  

지금은 불신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롬 2:24) 악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이 메마르고 패역한 세대에 잃어버린 영혼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막 16:15).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길 바란다.  관종(關種)이 너무나 많다.  로마 교인들이 먹는 문제로 서로 실랑이를 벌인 것처럼 신학적 무식한 논쟁을 통해 자기 좀 알아달라는 목사들 말이다.  이들은 어떤 교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서로 헐뜯고 비난할 시간은 있어도 영혼 전도나 기도에는 관심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논쟁은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성령을 근심시키고(엡 4:30) 소멸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살전 5:19).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짓을 일삼는 목사치고 죽은 정통 신앙에 묶여있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님이 맡겨주신 목회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기름부으심이 없는 메마른 설교를 가지고 앵무새처럼 나불거린다.  이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목회에 모범을 보이며 맡겨진 양들에게 헌신하는 올바른 목회자를 만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무식한 변론이나(딤후 2:23), 논쟁을 일삼는(딤전 6:3-5), 바리새인 목사의 가르침을 받거나 추종하는 것은 가룟유다와 같이 귀중한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먹는 것과 같다(요 13:2).

서론이 너무 길었던 것 같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고 증거 한다(롬 5:8).  문제는 속죄의 범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의 양적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것을 놓고, 한 부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의 죽으심은 오직 한정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어느 주장이 성경적이고 맞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보편속죄론’과 택한 사람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제한속죄론’이 있다.  먼저 보편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지옥에 떨어질 불신자들을 위해서도 속전(贖錢)을 지불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1장 29절, 3장 16절, 6장 51절, 12장 32절, 로마서 8장 32절, 고린도전서 15장 22절, 고린도후서 5장 14절, 디모데전서 2장 6절, 디도서 2장 11절, 히브리서 2장 9절, 베드로후서 2장 1절, 3장 9절, 요한일서 2장 2절, 4장 14절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이들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딴 길로 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도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제한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반면에 제한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영원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장 21절, 20장 28절, 눅 19장 10절, 요한복음 6장 37-39절, 10장 15절, 26-28절, 17장 9절, 15-17절, 20절, 사도행전 20장 28절, 로마서 3장 26절, 8장 32-33절, 에베소서 1장 4절, 11절, 5장 25절, 디모데전서 4장 10절, 디모데후서 1장 9절, 히브리서 9장 15절을 제시한다. 

여기서 ‘제한’은 구원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대상의 양적제한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택하신 자기 백성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구원을 가능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실제로 구원해 주신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교리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작정 순서에 대한 신학적 견해와 결부된다.  먼저 개혁파의 유명한 신학자들인 Martin Luther, John Calvin, John Owen, Theodore Beza와 같이 전택설(Supralapsarianism)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반대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직 선택한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반면에 같은 개혁파 안에서 이름난 신학자들인 Augustine, Charles Hodge, Louis Berkhof은 후택설(Infralapsarianism) 견해를 취한다.  이들도 상대방 입장을 무시하고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주장한다.  두 부류 중 한 부류는 잘못된 것인가?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신약 성경의 어느 누구도 “누구에게 속전이 지불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질문이 불합리한 것은 신약성경의 기자들의 모든 관심이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얻은 값진 것이라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었다(마 20:28, 롬 3:23-26, 벧전 1;18-21).  다시 말해 그 값을 누가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문제에 쏠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속죄의 범위에 대한 양대 견해는 성경에 나와 있는 구절을 가지고, Lloyd Jones의 말대로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변론과 논쟁하기를 좋아하는(딤전 6:4), 사람들이 언어적 유의를 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고전 1:12-13).  이것은 각 사람이 어떤 신학적 혹은 신앙 배경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행 23:8).  따라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된다(롬 12:3).  무식하게 내 신학이나 신앙만이 맞은 것처럼 우겨대지 말아야 한다.  사실 의견 차이가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서로 비방과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면 둘 다 멸망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다(갈 5:15).

그러나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이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셨다(엡 2:16).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롬 5:8)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만(요 3:15)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롬 5:1).  하지만 누구든지 원수 관계를 청산하고 구원으로 초청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절한다면(눅 14:15-24), 그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로 남아 있게 된다(요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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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논쟁거리/속죄 2024. 6. 2. 15:56

마가복음에 보면 고질적인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여자가 나온다(막 5:26).  이 여자는 자신이 가진 고질적인 병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당하면서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탕진할 정도로 많은 의사들을 만났다.  하지만 병이 더 호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그런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고통을 당하다가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다(막 5:34).  또 다른 여성이 요한복음에 나온다(요 4:7).  이 여자 역시 오랫동안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왔다.  문제는 조상들을 잘못 만나 평생을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우물가에서 만났을 때,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죽은 전통에서 놓여남을 받았다(요 4:20-24). 

내가 누구를 만나느냐가 참으로 중요하다.  가령 신학생이 교수를 잘못 만나면 평생 그 교수로부터 배운 것이 최고의 학문인양 나팔을 불어댄다.  더 큰 문제는 잘못 배운 신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심지어 영적으로 죽이기까지도 한다(사 9:16).  신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가르치는 선생을 잘못 만나면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가르치는 선생보다 갑절이나 더 지옥자식이 될 가능성이 많다(마 23:15).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면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당시 율법학자들, 오늘날로 말하면 가르치는 목사와 신학자를 잘못 만나면 영혼이 파멸될 수 있다(눅 11:52).  어감이 최악이긴 하지만 표준어이기에 사용한다.  한 마디로 가룟 유다처럼 인생을 ‘조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고(요 17:5),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요 1:3)에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실 하나님으로 예언되었다(사 11: 1-5, 40:3).  그분은 사망의 권세를 극복하신 ‘하나님’으로 호칭되었고(요 20:28)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나(마 28:19), 특별히 제2위 성자(聖子)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명칭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었다(눅 3:22).  이 명칭이 예수님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성자의 신분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모든 구원받은 자의 구주 되심을 보여준다(행 5:31). 

또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여호와’란 명칭은 오직 절대자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고유명사이다(출 3:14).  그러나 이 명칭이 예수님에게도 직접 사용된 것(사 26:4)은 그리스도께서 영원 자존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계 22:13).  특별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 언약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처음과 마지막’이시며(계 1:17), ‘알파와 오메가’이신 구속사역을 완성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히 9:12).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히 1:2)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히 1:3) 만물의 창조자이시고(골 1:16), 우주를 통치하시는(요 17:2), 율법의 제정자이시다(마 5:22-32).  이러한 성자 하나님께서 대속물(속전)이 되기 위하여(마 20:28), 자신의 신적위엄을 보류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어(빌 2:6-8), 율법의 저주 아래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요 10:18).

이렇게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였다.  그것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생긴 원수 된 것을 제거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였다(엡 2:16).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자원해서(요 10:17), 자신이 저주의 대상이 되시고 그 십자가에서 처형의 형벌을 견디신 것이다(히 12:3).  이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으신 것이고(엡 1:7), 베드로전서 3장 18절 말씀처럼 단 한 번의 죽으심을 통해 인간을 향한 구속사역이 완성이 된 것이다(히 10:14).  이러한 예수님의 죽으심이 죄와 율법의 노예 된 상태에 있는 우리를 속량함으로써 대속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갈 3:13).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부활을 빼놓고 십자가를 믿는 믿음 외에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 의하면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내세우는 주장이 마치 성경에 가장 근접한 것처럼 다른 형제를 향해 신랄하게 비판한다(약 4:11-12).  그런데 이들은 ‘구속’과 ‘구원’에 대해 혼동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으심(행 5:30)은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는 구속을 위한 속죄사역이다(롬 3:23-26).  타락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고후 5:18-19).  그러나 이  십자가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막 16:16).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게 물렸을 때,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자 물린 자들마다 살아났다(민 21:6-9).  그렇다면 오늘날도 그저 십자가만 바라보면(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요 3:14-16).  먼저 영혼이 사늘한 시체처럼 죽어 있는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엡 2:8)와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요 6:37).  더 나아가 개인 스스로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롬 1:16)을 믿고 받아들여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막 16:16).  여기에 ‘불가향력적 은혜’라는 신학적 용어를 끌어다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얼마든지 복음을 거부할 수 있다(행 26:24-29).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룬다.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는 이 놀라운 복음(약 1:21)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증거 한다(롬 1:2).  복음의 핵심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하는 구절이 성경에 나온다.  이 구절은 기독교 변증을 위한 핵심 본문이기도 하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 말씀이다.  그런데 부활을 빼놓고 오직 십자가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온전한 복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어떻게 설교하였는가?  오직 십자가만 믿으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목소리 높여 메시지를 증거 했는가?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행 2:22-36).  그가 고넬료 가정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같이 증거 했다(행 10:39-41).  그리고 10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 총의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자 자신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이야기했다(행 15:7).  또한 로마서 10장 9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복음은 바울이 아그립바와 베스도 앞에서(행 26:23), 그리고 총독 벨릭스에게 증거 한 것처럼(행 24:21), 십자가의 사건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사건까지 포함시켜야 온전한 복음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갈 1:4)과 부활(롬 5:10)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신다(벧전 1:3).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동시에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고(마 16:21, 막 8:31, 눅 9:22),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롬 1:16).  만약 부활을 빼놓고 십자가만을 증거 한다면 그것은 복음도 다르고, 영도 다른 짝퉁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고후 11:4).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은 십자가보다 부활을 더 강조했다.  그가 십자가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나팔을 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고전 15:17).  따라서 누군가 십자가만 믿고 부활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성경에도 없는 사악한 궤변이기 때문에 참 복음이 될 수 없다.  이런 반쪽짜리 복음을 전하면서 그것이 마치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증거 하는 목사들이 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가 거짓을 일삼는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것이다(딤전 4:1). 

심각하는 것은 이런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복음을 증거 하지 않고 신학적 논쟁이나 정치, 혹은 ‘개콘’을 보는 것처럼 떠드는 것 말이다.  Calvin은 설교하는 강단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불렀다.  이게 무슨 말인가?  강단 위에서 복음을 증거 하지 않는 모든 말은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듯이’(마 7:16) 이들은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딤전 4:2).  그런데 정작 자신은 정상적인 목사라고 착각을 한다.  누구든지 영혼이 살아나려면 개 짖는 소리가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요 5:25).

예를 들어 초대교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그릇된 견해를 가진 수많은 이단들, 즉 예수님의 신성은 믿지만 인성을 부인하고(Docetists), 인성은 믿지만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Ebionites), 또는 위격의 통일(Nestorians)과 양성의 구별을 부인하는 자들(Eutychians), 심지어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도 무조건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계 22:18-19).  누구든지 성경을 편리한 대로 골라서 믿는 사람은 이단이나 사이비가 될 가능성이 많다(딤후 2:16-18).  성령의 역사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만(갈 5:22-23), 귀신들이 역사하는 곳에는 신학적 비방과 이간질이 난무하고 시기와 다툼과 요란함 밖에 없다(약 3:14-16).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논쟁이 아니라 논쟁의 영이다.        

성경에서 증거 하는 구원받는 믿음이란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일어난 일련의 모든 과정과 사건들, 출생, 고난,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믿는 믿음이다(계 22:18-19).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한 영원한 제사’(히 10:12)를 드리신 것은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시기 위한 구속이다(벧전 1:18-19).  만약 누군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부인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빼놓고 오직 십자가를 믿는 믿음 외에 구원이 없다고 강조하는 것은 한 마디로 ‘잡소리’다.  개혁주의신학자 R. C. Sproul 박사의 말이다.   “가르치는 자가 ‘지식’을 나누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데 덕이 된다.  하지만 ‘무지’와 ‘무식’을 나누는 것은 교회를 허물고 분쟁과 분열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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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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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논쟁거리/속죄 2024. 5. 5. 14:49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속죄가 반드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역사적으로 세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 Anselmus는 범죄 한 인간의 구원여부와 구원방법의 결정은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사역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둘째, Augustine은 택한 자의 구원에는 속죄나 공의의 만족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상대적 필요성만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속죄의 필연성을 부인하는 견해로서 속죄는 본래 필요치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그렇게 결정하신 것뿐이라고 Schleiermacher는 주장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속죄’(atonement) 사역이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죄가 속해지도록 인간의 죄책에 해당하는 형벌을 대신 담당하시는 행위를 가리킨다(히 9:11-14).  이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법적으로 연합하기 위해(롬 6:5), 인간의 몸을 취하심으로 단순히 낮추신 정도가 아니라(빌 2:6-8), 아예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요 1:29),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며(요 19:34), 아버지께 버림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마 27:46). 

이 속죄와 관련된 용어로 ‘구속’이라는 단어가 있다(롬 3:24).  이것은 속죄가 죄를 속하는 행위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면(엡 1:7), 구속은 속죄행위는 물론 이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구원을 이루게 하는 일련의 모든 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성경에서 속죄라고 할 때는 죄인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사역을 말하는(벧전 1:18-21), 반면에 구속은 속죄에 비해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구속’이란 넓게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사역 전 과정을 가리키고(롬 3:24-26), 좁게는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여 구금된 자리에서 해방시키는 것으로 ‘속량’을 가리킨다(갈 3:13).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구속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때 구속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구속의 성격을 갖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하여 내셨기 때문이다(마 20:28).  이것은 구약 희생 제사에서 대속교리를 잘 증명해 주고 있는데, 하나님은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하는 동물의 희생 제사를 받으시고 그의 형벌을 면해주셨다(레 9:7).  즉 예물을 드리는 자가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 자신의 죄를 그 제물에 전가한 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으시고 그 사람의 죄를 사해 주셨던 것이다(레 1:4). 

이러한 구약의 동물 제사는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에 대한 예표이기에(히 10장), 하나님은 생명이 피 속에 있으므로 동물의 피로 죄를 사하셨다(레 17:11).  하지만 동물의 피가 죄를 영원히 깨끗하게 할 수 없기에(히 10:11),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인을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인간의 죄를 속하게 하셨다(히 10:4-18).  실제로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시었고(요 1:29),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 제물로 삼으셨던 것이다(고후 5:21).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드리신 제사는 제사장들에 의해 드려 지는 것들과는 구별된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영 단번의 성격을 띠는 완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히 10:10-14).  아론의 뒤를 이은 대제사장은 매년 지상의 지성소에서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다(히 9:1-7).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 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히 9:12).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고통의 순간에 ‘다 이루었다’(요 19:30)는 외침과 동시에 자신의 사역이 완성되었다.  이는 온전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손으로 만든 성소가 아닌 참 하늘에 들어가 하나님의 존전에 서신 것이다(히 9:24). 

따라서 그 자신의 피로 지성소에 들어가신 그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영원한 속죄를 이룰 수 있었다.  그가 문자 그대로 피를 가지고 들어가신 것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구속에 필요한 모든 결과를 성취할 수 있었다(벧전 3:18).  그런데 Gore Charles는 『The Body of Christ』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십자가 위에서가 아니라 하늘에 들어가실 때 완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마다 대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드렸던 모든 제사장과 달리 그리스도는 단번(once for all)에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대제사장의 희생 제사가 완료되었다(히 10:12).  이제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히 1:3).  실제적인 제사가 십자가에서 드려졌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완전하고 반복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영원하다’(히 10:18).

비록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하신 어떤 일에 근거를 두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를 가지고 하늘로 들어가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헬라어 원문 하고는 거리가 멀고 성경적이지 않다.  심지어 RSV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자기의 피를 가지고’라고 번역하므로(히 9:12), 마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여전히 그분은 지상의 대제사장들이 속죄일이면 지성소에 피를 가지고 들어가듯 하늘에서도 그런 대속적 행위를 하셔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단 번에 제사를 드림으로(히 7:27), 대제사장의 희생 제사가 완료된 것이고(히 10:12),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한 것이지(히 9:12, 24), 그 뒤에 일어난 일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제사를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제물,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기의 피(골 1:20)를 가지고 옛 지성소의 원형인 ‘참 하늘’(히 9:24)에 들어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존전에 서셨고, 지금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계신다(히 9:24).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사역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이고(요 19:30), 참 하늘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속죄사역의 단회성은 속죄의 완전성과 종결성, 즉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히 10:14).  따라서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며(히 10:18),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다(히 7:27).  무엇보다도 이 속죄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그 일에 관여하신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안전한 인간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닌 완전하신 하나님의 계획(갈 4:4-5) 속에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히 9:14),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은 율법을 어김으로 받게 될 형벌로부터 벗어났을 뿐 아니라(갈 3:13), 의식적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어졌다(갈 4:4-5).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력을 받지 못한 자들 위에 왕 노릇 하던(요 12:31), 이 세상 임금, 즉 사탄으로부터 구속을 받았으며(요일 3:8),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근본책임이 그리스도에게 다 전가된 것이다(롬 3: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죽으심으로 인간의 구속사역이 성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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