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25.03.29 Piper의 불만 1
  2. 2025.03.22 믿음과 행위의 관계
  3. 2025.03.15 행위에 따른 심판
  4. 2025.03.08 행위에 의한 칭의
  5. 2025.03.01 신자들이 받을 심판 1

Piper의 불만

최후의 심판 2025. 3. 29. 10:44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인물은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 두 명의 저명인사, 영국 신약학자 N. T. Wright와 미국 목사 John Piper다.  비록 마지막 최후의 심판에서의 행위의 역할이 두 사람 사이에 드러난 견해 차이의 핵심은 아니지만, 상당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음 확실하다.  문제는  The New Perspective(새관점) 보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인물 중 한 사림인 Wright가 최후의 심판에서 신자에게 주어질 최종의 칭의는 그가 살아온 삶 전체 기초하여, 또는 어느 정도 그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는 사실을 거듭 주장해 왔다.  다시 말해 칭의는 행함(performance)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자 Piper는 The Future of justification: A Response to N. T. Wright에서 Wright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Piper가 가장 크게 우려한 것 중의 하나는 “Wright가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질 칭의가 행위에 기초하여 이루어질 것이라는 취지의 깜짝 놀랄 만한 주장”을 천명했다는 것이었다. 

Piper는 다시 한번 The Purifying Power of Living by Faith in Future Grace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념을 밝힌다.  “우리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법정에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공적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에 대한 증거다. 따라서 바울이 ‘각각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고 말할 때, 그는 우리가 받을 상이 우리의 행위에 따라 주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행위에 따라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런데 Wright에 대한 Piper의 불만은 Wright가 ‘오직 믿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칭의에 대한 Catholic의 해석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놓았다는 것이 Piper의 불만이었다.  Piper에 따르면 “Wright는 내가 우리의 선한 행위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한 필수적 증거라고 말할 때 의미한 바와 다를 바 없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랬을 것 같다. 그런데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따라서 Piper는 “나는 Wright가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사실은 이것이 그가 믿고 있는 바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라고 썼다.  

이미 살펴봤듯이, Piper는 심판뿐 아니라 심지어 행위가 한 사람의 최종적 구원에도 필수적이라는 점을 전혀 문제를 삼지 않는다.  그가 가장 크게 우려한 부분은 Wright가 최종적 구원의 궁극적 기초 혹은 근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및 그의 완성된 십자가 사역에 대한 믿음에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행위에 있다고 간주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었다.  Piper는 The Future of Justification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칭의에 대한 근거로서의 율법 준수로부터 자유롭다”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 말을 들은 Wright도 꿀 먹은 벙어리가 아니었다.  그는 Justification God’s Plan and Paul’s Vision』이라는 책으로 Piper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자신은 우리가 구원을 우리의 힘으로 얻는다거나 구원을 위해서는 완전한 삶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롬 6:1-11)과 성령의 내주 하심(롬 2:25-29)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고(롬 6:6-11), 율법에 순종할 수 있으며(롬 8:4), 몸의 행실을 죽이고(롬 8:13), 마침내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롬 8:13).  한 마디로 자신의 견해는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연이어 말한다.  “인간은 성령이 그들 안에 역사하실 때에는 진정한 인간,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존재가 될 수 있으며,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율법이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들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최후의 심판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최종 판결을 이끌어내는 삶이다.  이것은 믿음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에 앞서 현세에서 사람들을 의롭다고 칭하신다면, 그것은 믿음이 그렇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이들의 특성을 잘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Wright의 답변은 그를 비판하는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에는 불충분했다.  최종적 구원에 대한 근거가 여전히 모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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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에서의 행위 역할을 설명하는 방법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하지만 그 뉘앙스(nuance)는 매우 다양하다.  Paul Barnett은 최후의 심판을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도 하고(고전 4:5) 책망을 받는 자리로 보면서(마 25:24-30),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신자는 무조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고전 3:10-15).  반면에 George Eldon Ladd는 로마서 2장 5-16절과 같은 본문들은 실제적 상황보다는 이론적/가설적 상황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Samuel L. Hoyt는 최후의 심판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영생이 아니라 상이며(계 22:12), 신자들은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과연 어느 사람의 말이 맞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Martin Luther의 신학사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Luther는 행위가 은혜보다 앞서더라도 그것이 구원/영생을 얻기 위한 공로가 된다는 Catholic Church의 행위 개념을 전면 거부했다.  그는 칭의(Justification)는 행위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Luther’s Works에서 “칭의는 기독교 교리 가운데 가장 참되고 주요한 조항으로서 결코 취소불가능하며, 최후의 심판 때까지 지속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Roman Catholic Church만이 Luther의 유일한 적수는 아니었다.  Catholic 사상이 행위에 깊이 몰두했다면 반(反) 율법주의자들은 행위를 완전히 무시했다.  따라서 Luther는 비록 행위가 칭의를 가져다주지는 못하지만, 믿음이 실제임을 증명해 준다는 차원에서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약 2:14-26).  그는 선한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은 우리 마음속에 거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면서(약 2:26), 믿음과 행위 사이의 긴장 관계를 놓고 씨름하면서도 믿음에 우선권을 주려고 애썼다. 

Luther’s Works』에서 말한 것처럼 행위는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 못한다.  예를 들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행위가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하다(요일 4:16-18).  하지만 행위 자체는 두려움을 완화시켜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Paul Althaus가 『The Theology of Martin Luther』에서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에 근거하여 값없이 받는 선물이기 때문이다”(딛 3:5).  

만약 누군가가 행위 없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면, 그는 다시 말한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믿는 것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만약 당신에게 행위가 없다면 절대로 믿음 없이 심판대 앞에 서지 말라”(약 2:22).  그 이유가 무엇일까? 

20세기 후반에 와서 수많은 학자들이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행위에 따른 심판을 서로 조화시키려는 연구에 많은 애를 썼다.  또한 이 연구들은 아무래도 바울에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이 두 주제가 바울 서신 안에서 매우 날카롭게 서로 대립했기 때문이다.  

1997년에 출간된 E. P. Sanders의 기념비적인 저서인『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는 바울 연구에 있어 새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Luther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유대교가 사실은 행위에 의한 의로 규정되는 종교가 아니었음을 밝히는 Sanders의 연구는 차후 The New Perspective(새 관점)으로 불리게 된 견해를 지지하는 수많은 문헌을 마구 쏟아내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새 관점이 그동안 저술된 수많은 책 역시 이 문제의 행위의 역할에 집중함에 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지난 세기에도 어떤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여전히 안갯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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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서로를 향한 분노와 미움에 관계된 행동이 지속될 경우 심판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경고한다.  만약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어떤 심판이 내려질 것인가?(약 5:9).  정한 날이 다가오고 있겠지만, 심판자는 이미 문 밖에 서 계신다(계 3:20). 

Donald Bloesch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신자들은 최후의 심판을 받겠지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분임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약 2:12).  따라서 끝까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무한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요 10:28).  다시 말해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되지만, 긍휼을 베풀면 그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기뻐한다’는 것이다(약 2:13).  그런데 명목상 교인이나 신실하지 못한 ‘나일론’(nylon)  신자들에게는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를 보면 ‘옷을 더럽히지 않고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니는 자들이’ 나온다(계 3:4).  사실 이들은 은혜와 순종의 응답 사이에 정교한 균형을 유지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옷은 은혜로 값없이’ 주어졌지만(롬 3:24),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함과 충성으로 혼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예비하였기 때문이다(계 3:5).   따라서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계 19:8)인 것처럼 모든 사람은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는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계 22:12). 

이 심판은 언제나 행위에 근거해서 진행된다(마 25:41-46, 고후 5:10, 히 4:12-13).  행위는 마음에 대한 충성의 틀림없는 증거이며, 행위를 보면 믿음과 불신, 충성과 불충성을 알 수 있다.  믿음과 믿음의 행위와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한 사도 요한의 이론은 예수님과 바울의 이론과도 동일하다((요 5:29, 롬 2:6).

사도신경(Apostle's Creed)은 400년 동안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정통 교리를 믿어왔던 내용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 심판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받을 심판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믿는 자들의 상급 심판을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심판이란 개념 자체가 사랑의 하나님(요일 4:9-10)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한 명이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Karl Barth다.

William J. Dalton 역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영원한 심판’은 그와 조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Aspects of New Testament Eschatology』에 나온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은 무엇보다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부당한 결론을 피하려면, 미래의 심판을 배경으로 하는 종말론적 진술이야말로 무조건 이런 배경의 부적합성을 감안하고, 이 부적합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빗나간 태도는 반세기 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신약 성경은 정직하게 읽어보면 이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롬 3:24).  여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롬 2:6), 즉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고후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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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실제로 비유가 아니라 예수께서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구성하기 위한 은유(metaphor)다.  마태는 인자를 양과 염소로 구분하는 심판을 위하여 오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먼저 예수님은 양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그리고 염소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마 25:41-42).

이것은 마태복음에만 나오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평행구절들을 기초로 하여 본문을 비평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비유적인 요소들은 단지 목자, 양들, 염소들, 그리고 양들과 염소들의 실제적인 구분뿐이다.  이 본문에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가?  죄 사함 혹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교리의 흔적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저주받은 자에게 베푸는 자비도 없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에 대한 흔적도 나타나 있지 않다.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이 본문은 개혁주의 신학 노선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골칫덩어리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험천만하게도 바울과 Augustine, 그리고 Luther의 신학에 반대하는 ‘행위에 의한 칭의’처럼 위험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Graig Keener는 The Gospel of Matthew: A Socio-Rhetorical Commentary에서 이렇게 말한다.  “본문은 이 심판이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한다”  물론이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행위의 역할은 정확히 어떤 것인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세상이 끝나는 날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단 말인가?” 

그런데 마태복음 25장뿐만 아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이 성경 구절 역시 선한 일을 통한 구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선한 일을 통한 구원의 증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여 생명과 정죄 둘 중 한 결말을 맞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 지역의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는 것을 알기 원했다(롬 2:5-7).  이 구절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엡 2:8-10),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행한대로 받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계 20:13).  진실을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진리와 그 진리를 따라 행한 것에 대해 ‘해명’(解明)을 해야 한다(욥 34:11, 시 61:12, 잠 24:12, 렘 17:10, 마 16:27, 계 20:12). 

만약 ‘무익한 말’(마 12:36)이 마지막 날에 심판에 근거가 된다면, 우리가 삶 가운데 실제로 행한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근거가 된다(고후 5:10).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에스겔 33장 30-33절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치우침이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주어질 것이다(고후 5:10).       

야고보 역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여기서 야고보는 독자를 ‘형제’로 부르는데, 이들은 곧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 앞에는 분명히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다.  하나는 신랄하게 불평하고 원망하며 심판을 받는 것이고(마 12:36), 다른 하나는 오래 참으며 원망하지 않고 심판을 면하는 것이다.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심판을 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야고보가 결코 의미하는 바가 아닌 것은 그야말로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아직 미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심판과정에서 완전히 면제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야고보는 분명히 여기서 심판의 최종 결과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신자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심판의 결과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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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이 받을 심판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행한 일들을 근거로 하여 보상을 받기 위한 심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나는 각 사람이 ‘믿음의 분량대로’(롬 12:3) 믿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리스도인들도 심판을 받을까?”  나에게 있어 이 질문의 대한 대답은 ‘그렇다’라고 확신 있게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민의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히 12:23).  따라서 주께서는 ‘그의 백성을 심판하실’ 것이며(히 10:30),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벧전 4:17).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히 9:27).  상급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위에 따른 심판 사상은 구약과 신약 전반에 나타나는 주제다(시 62:12, 렘 17:10, 단 7:10, 마 16:27, 롬 2:6, 14:10-21, 고전 3:12-15, 고후 5:10, 벧전 1:17).

그렇다면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와 신학자들도 심판을 받는가?  이들은 일반 신자와 다르게 ‘더 호되고 엄격한’(NRSV) 심판을 받을 것이다(약 3:1).  만약 이들이 무서운 심판을 받는다면 그 이유는 하나다.  잘못된 가르침을 전했을 경우에 자비 없는 심판을 받는다(눅 11:52).  개종을 주도하는 선생들이 ‘지옥의 자식’이라면 개종자들은 말한 것도 없다(마 23:15).  따라서 가르치는 권세를  가진 자는 더 큰 책임을 수반한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바울은 복음의 메시지를 최초로 전달하는 ‘씨 뿌리는 역할’을 맡았고, 아볼로는 계속해서 교육하는 ‘물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동일했다.  즉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끄는 것과 그들이 믿음 안에서 성숙하도록 돌보는 일이었다.  각각의 종들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여전히 책임을 지고 있었다.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는다’(마 12:36).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날 내가 평상시에 내뱉은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마 12:37).  산 자와 죽은 자와 상관없이 자신들이 삶에서 행한 대로 판단을 받는 곳이 심판대다(벧전 4:5).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선물(엡 2:8)이 그리스도께 믿음의 순종을 해야 하는 의무를 면제시켜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아야’(고후 5:10)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롬 14:10).  그러므로 우리는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야 한다’(벧전 1:17).     

여기까지 분명한 사실은 “앞으로 오실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것이다(행 10:42).  그러면 이 심판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떠한 사람들이 받는 것인가?  성경은 다른 사람에 대해 비평적이거나 정죄하는 태도를 가진 위선적인 비판자(마 7:1-2), 결혼 관계를 파괴시키는 ‘음행 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히 13:4), 갑질을 밥먹듯이 하는 ‘긍휼히 행하지 아니하는 자’(약 2:13), 오래 참지 못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약 5:9)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신약 윤리에 대한 탁월한 진술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딛 3:5)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입으로만 믿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마 7:21).  그들은 구원을 받지만 ‘불 가운데서 받은 것’(고전 3:15)이라 자신들의 상을 잃어버린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심판에 관해서 조금 더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는 몇몇 본문을 살펴보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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