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거리/성도의 견인(안전)'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8.06.23 끝까지 믿는 자
  2. 2018.03.03 거듭난 신자도 타락할 수 있는가?
  3. 2017.11.18 칼빈주의 v 웨슬리주의
  4. 2017.10.07 한 번 구원 받은 사람

오래 전 어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한 교인이 죽어 장례식을 치르는데 예배를 인도하던 목회자가 죽은 교인과 성도들을 앞에 놓고 이 성도는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실 그때에는 신앙이 초보인지라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말이 다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Jonathan Edwards가 말한 것처럼 이미 고인이 된 그 사람에 대해 비록 그가 외형적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한 것처럼 보였을지는 모르지만 내적으로 중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례를 맡은 목사가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 천국에 갔다, 안 갔다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최종판결을 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8, 20:11-15).  예를 들어 어떤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설교를 할 때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을 듣는 사람 전체가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분명 그 말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지옥에 갈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7:21).  사실 구원의 문제만큼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고, 사람들 마음에 들려는 인간적인 욕망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른 생명의 복음을 싸구려 다른 복음으로 대처하지 말아야 합니다(1:8).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성경에 보면 한 때 믿음 생활을 잘하다가 타락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칼빈주의자들이나 웨슬리주의자들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들을 내놓고 있지만,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이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회심의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유다는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삼년 동안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생활을 하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9:1-6).  나아가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 7:21-23)바울의 동역자이며( 24), 사랑을 받았던 데마는( 4:14), 세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헌신짝처럼 버렸고(딤후 4:10), 마술사 시몬 역시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8:13), 성령의 능력을 주고 사려다 베드로 사도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8:18-23), 이들의 공통점은 한결 같이 한 때 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칼빈주의자들 입장에서 보면 구원은 예정의 토대에 의존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은 처음부터 참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고, 반면 웨슬리주의자들 입장에서 보면 구원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들이 처음에는 참된 신자였지만 죄로 인해 타락의 길을 갔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회심의 증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먼저 로마서 815-16절에서 나오는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의 자녀임을 보여주는 성령의 주관적인 증거가 있는데(요일 4:13), 이 증거는 대체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로 성령께서 인도하신다는 느낌을 수반하지만( 8:14), 만일 성령께서 진정으로 개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신다면 그는 소위 바울이 말한 성령의 열매라고 부른 성품들을 형성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5:22-23).  물론 문제는내가 이러한 특징들을 가운데 완전하게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나의 삶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다른 사람들이 이런 특징들을 나의 가운데서 보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신약성경에는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성품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럴듯하게 속일 있었다는 예를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 안에는 후메네오와 빌레도처럼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고 혼란과 분열을 야기 시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딤후 2:17-18), 이들의 사역의 결과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대화를 하든, 기도를 하든, 어떤 사역을 하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처럼 삶의 열매를 통해 그들을 있다는 것입니다( 7:16-20). 

 

이러한 성령의 열매와 관련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의 중요한 부분은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요일 2:4-6).  물론 완벽한 삶을 살거나 혹은 완전한 삶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삶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더 나아가 말하고 행동하는 일에 그분의 형상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4:25-32).  다시 말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 같이( 2:17-22), 진정으로 회심했다면 삶 가운데 분명히 순종의 결과가 나타나야 하고(요일 3:9-10, 24, 5:18), 무엇보다도 그 순종의 결과를 보일 수 있는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가 다른 형제들에 대한 사랑입니다(요일 3:14, 25:31-46).  따라서 누군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구절 중에 하나인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계속 믿을 것이며, 또한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고( 1:23), 처음 시작할 때 믿은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을 것입니다( 3:14).  반면에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은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7:21), 삶이 불의로 가득하거나(13:23-27), 주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저버린(14:21), 가룟유다, 혹은 데마와 같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세상으로 돌아간다면(딤후 4:10), 그는 실제로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딤후 4:10).   

 

이처럼 신앙을 저버리고 떨어져 나간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은 애초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혹은 이 사람은 한 때 그리스도인이었으나 더 이상은 아니다라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견해 모두 믿다가 타락한 사람에게 주는 메시지는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그리고 웨슬리주의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의 과거에 대한 해석에는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 당신의 구원을 위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라는 말에는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 복음적인 교회에서 균형 있는 교리를 가르치는 대신 목회자들이 변질된 교리, 즉 한번 신앙을 고백하거나 물세례 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식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11:52).  그 결과 전혀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도 물세례를 받을 때 입술로만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7:21), 그렇지 않다는 거짓된 확신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 지금 현대 교회의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가?”라는 질문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를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믿고 견디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0:22,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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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전해질 때 구원을 받는 사람과 정죄를 당하게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데( 16:16), 이것은 복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영원한 시간을 천국에서 보낼 것인지 아니면 지옥에서 보낼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5:24-29).  그래서 성경은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는 심판이 있으리니’( 9:27)라고 말합니다즉 모든 인간은 다 죽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고후 5:10).  성경에 보면 바울 같은 사람은 복음에 반응하지 못했던 종교적 데러범이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9:15),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만난 행악자 중의 한 사람은 낙원에 들어가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23:43).  반면에 열 둘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서 사도의 직분을 받은 선택 받은 가룟 유다( 6:12-16)는 돈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1:18), 복음 전파사역을 도왔던 데마 역시 바울의 조력자이며 필요한 존재였지만( 4:14),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신앙을 저버리고 세상에 속한 자로 전락했습니다(딤후 4:10).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구원을 받는 것에 있어서는 죽는 날까지 혹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래서 Martin Luther는 천국에 가면 세 가지 놀라운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첫째는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이 그곳에 없는 것이고, 둘째는 천국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그곳에 있는 것이며, 셋째는 자신이 천국에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4-6절은 다양하게 이해되고 해석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해석하기가 난해하기 때문에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지금까지 치열한 논쟁을 일으켜 왔습니다.  오늘날 신학자와 목사들 사이에서도 당황하게 만드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단락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이 구절을 놓고 대략 다섯 가지 해석을 제시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해석  존재하는 일이 없는 상황을 가설적으로 설정해 놓고 가상적인 배교를 경고한다는 해석  외관상으로 보면 그리스도인에 가깝지만 실제로는 거듭난 신자가 아닌 거짓된 회심자라는 해석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잃는다는 해석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말씀이지 오늘날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해석으로 나누어집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나름대로 일리는 있지만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최우선적인 임무는 본문 말씀이 그것을 대하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먼저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본래의 의미에서 현재, 즉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해 나가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서 기자는 박해의 압력 속에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구절은 그리스도와 잠시 동안 동행하다가 고의적으로 돌아서서 주님을 거부하고 상반된 방향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배교하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10:26).

 

그런데 이 구절을 놓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처하던 이들이 믿음에서 떠날 때, 그 이후에 원래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와 같은 문제를 두고 논쟁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정말 거듭난 신자도 타락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John Calvin은 본문 구절을 이렇게 주석합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치명적인 타락의 위험이 면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맡기신 이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신 분이시므로 그는 택한 자들을 한 사람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셨다( 17:12). 확실히 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중생의 영을 부어주시며 택함을 받은 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서 버림을 받은 자들과 구별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다시 만들어지고 장차 상속의 소망을 가지고 성령의 보증을 받으며 똑같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복음이 그들의 마음속에 인쳐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기독교강요』에서는 주님이 보호 하에 선택된 자들의 견인이 확실하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 예를 들면서( 22:32), “한 번 선택된 사람은 떨어져 나갈 위험성이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말을 요약하면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타락해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 신학자 Michael S. Horton 역시 한번 구원받은 자가 항상 구원 받은 것이라는 원리 때문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주님께서 이를 완성시키실 것이라는 약속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반면에 John Wesley는 본문을 주해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고히 했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독자들은 분명히 전향한 그리스도인이며 그들이 기독교 신앙과 체험을 배반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따랐던 공허하고 무의미한 유대교 형식주의 되돌아가려는 것은 결코 구원받을 길이 없는 의도적인 배교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희망 없는 버림받은 상태에 이른다고 말하면서 『Explanatory Note Upon the New Testament』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놀라운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부터 타락한 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가정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사도는 고의적으로 경건의 능력과 모양을 다 버리고 믿음과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10-11), 경우를 기록하고 있다( 10:2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으로부터 타락한 것이 고의적이며 완결된 행위였듯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계속된 그들의 배교 행위도 고의적이며 지속적인 행위였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한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는 것이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구원의 서정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일지라도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누구든지 어떤 시점이나 상황에서도 가룟유다나 데마처럼 신앙을 배반하고(딤후 4:10), 타락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주의 신학자 Steven Harper도 구원의 소유가 하나님의 작정보다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강조합니다.

 

한 가지 분명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믿다가 타락하면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할 때 가졌던 믿음에 대해 칼빈주의자는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했지만 거듭난 신자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고, 웨슬리주의자는 그가 거듭난 신자이지만 믿다가 타락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여기서 신학자/목사들이 솔직해야 할 것은 믿다가 타락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Jonathan Edwards의 말을 빌리면 누가 참되게 믿는 자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구원을 받았는지 십원(?)짜리 동전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신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고후 13:5), 그것에 대한 최종 결정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2:9).  따라서 히브리 신자들이 유대교로 되돌아감으로써 배교의 위험성을 심각하게 경고하듯이, 오늘날에도 어떤 경우이든 신앙생활을 하다가 타종교로 개종하던지 혹은 믿다가 포기하거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16:16).  결국 누가 진실로 영생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인간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구원에 있어 성화와 순종을 강조한 Andrew Murray는 『The Holiest of All』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구원의 확증은 필요시 사용하도록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기차표와 같은 것이 아니다. 내 구원의 확증은 오직 사랑과 순종(계명)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 속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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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과정을 웨슬리 계통 신학교에서 마치고 박사과정을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그 당시 Calvinism 신학사상으로 무장된 교수들로부터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배운 개혁주의 신학만이 정통 신학입니다. 이 신학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다른 신학을 가진 사람들을 비판하는 가운데 오직 칼빈주의만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신학이라고 주장하십시오.”라고 말하는 정신나간 석두(石頭)교수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었습니다사실 구 프린스톤 학파인 Charles Hodge B. B. Warfield, 웨스터민스터 학파인 John Gresham MachenCornelius Van Til, 그리고 Abraham Kuyper, Herman Bavinck, W. G. T. Shedd 등등 개혁주의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교만의 성()을 높게 쌓아갈 때 겸손과 남에 대한 배려를 가르친 사람들이 개혁주의 신학 교수들이었습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만 열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지 만났던 모든 교수들은 겸손과 학식을 겸비한 진정한 칼빈주의자들로서 오늘날 같이 비루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 사이비 칼빈주의자들과 다르게 교리적 논쟁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문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훼손하면서까지 거만한 신학적 추론을 그럴듯하게 내세우는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목사들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들은 종교적인 신학적 자긍심으로 인해 다른 교파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해로운 논쟁을 일삼는 정통 칼빈주의가 아닌 골빈(?)주의사람들로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성도의 견인’(영원한 안전)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예정에 의해 선택을 받고 성령의 의해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보장된다는 칼빈주의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교리로 Calvin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 견인교리을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을뿐더러 끝까지 보존되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 성도의 견인에 대해 Saint Augustine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로 철저하게 보호받는 것을 『Of the Gift of Perseveranc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기업이 되도록 하셨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도록 역사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그분을 떠나지 못하도록 역사하신다.  우리의 택하심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영원 전부터 이루어진 것이고(딤후 1:9), 그 놀라운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며( 17:4, 10:14),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 2:8)은 바울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11:29), 말한 것처럼 그분의 특권과 초대는 결코 취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칼빈주의자들은 성도의 견인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온전하고( 10:14)도 충분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요일 2:2).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는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고전 15:3),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속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 죄는 없다고 강조하면서( 3:23-2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어떠한 정죄 아래에 놓여 있지 않고( 8:1-2),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성경의 많은 증거들을 내세웁니다( 22:32, 5:24, 6:37-40, 10:27-29, 17:6-11, 8:29-33, 35-39, 11:29, 고후 5:17, 1:4-5, 13-14, 1:6, 살전 5:23, 살후 3:3, 딤후 1:12, 4:18, 7:25, 10:14, 벧전 1:4-5, 요일 3:9, 유다서 24).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인간은 전적으로 죄로 부패되어 있고( 17:9), 영적으로 죽어 있으며( 6:44), 복음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 2:1-3)에 타락한 인간의 중생 이전의 어떤 반응에 대한 논의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봅니다.  그러나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들( 13:48), 즉 바울( 9)이나 자주장사 루디아처럼( 16:14),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을 갖고 자신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이끌어 중생하도록 하는데( 2:8), 이렇게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부르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 안에서 끝까지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러한 성도의 견인John Wesley궁극적인 구원이라고 불렀는데, 그에 설교 『The lord Our Righteousness』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행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행하고 고난 받는 이유 때문에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용납 된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칼빈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Wesley전가된 의라는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성령의 유효적인 부르심을 통해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끝까지 타락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성경에 지적한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궁극적인 구원의 교리를 성경을 통해서 거부했는데 『The Works of John Wesley Volume 10』에서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는 말씀( 18:24)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후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10:26-29),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견인 교리를 부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참된 포도나무의 가지인 신자들( 15:4-6), 즉 거룩함을 입은 자들(벧전 2:9)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얼마든지 타락할 가능성이 있고( 4:1-2), 영원히 멸망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11:22).

 

이렇게 웨슬리주의자들은 교회에서 물세례를 받고 중생한 가운데 거룩한 삶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타락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기독교 신자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결국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나오는 많은 구절들을 제시합니다( 7:21-23, 10:33, 12:31-32, 24:13, 8:13-15, 8:31-59, 15:4-6, 고전 3:11-17, 9:27, 15:2, 5:4, 살후 2:3, 딤전 4:1-2, 5:15, 딤후 2:12, 2:1, 3:6-14, 6:4-8, 10:26-39, 12:14, 2:14-26, 벧후 2:20-22, 3:17, 요이 8, 3:5, 15-16, 22:19).  물론 이러한 구절들이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리주의자들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경우에 대해 신자가 죄(알려진 죄보다는 의식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짓는 죄)를 고백하지 않거나( 3:13),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통해( 3:12), 그분에게서 떠나는 배교의 행위가 있을 때( 26:14-16, 딤후 4:10)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구원을 잃어버린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철저히 회개를 하더라도( 13:3-5, 요일 1:9), 웨슬리주의자들은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다시 회복되거나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두 부류의 견해를 요약한다면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말한 것처럼 타락한 인간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선택되었지 거룩하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예정과 선택에 있어 인간의 공로를 철저하게 제거해 버렸고, 더 나아가 구원의 진행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결정하여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하는 가운데( 9:11-13), 이 구원의 교리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Wesley는 『The Works of John Wesley』에서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고상하게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는 기계에 불과한 타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의적인 존재로 자기 자신에게 부여된 어떤 일을 실행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16:16),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이 질문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환언하면 Calvin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는 것이고( 1:17), Wesley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만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기 때문에 구원 문제에 대해 인간 책임을 강조합니다( 3:36).  이러한 견해들을 살펴볼 때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다는 점에 대해서는 서로간의 의견을 일치하지만, 그분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여 구원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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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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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8-10장에 보면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것이 그 우상 예배에 참여한 것이 되지 않는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음식 예비와 특별한 유대인의 절기 준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 어떤 이방인들은 특별한 날이나 음식 예비에 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내놓는 음식이 시장에서 팔리기 전에 우상에게 바친 것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고기들이 이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것은 매우 특별한 관심 사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로마서 14장에서 나오는데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이슈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는 음식 규제와 다른 하나는 특별한 날의 준수 문제였는데 사실 음식과 날의 준수는 할례 문제 다음으로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가장 큰 민감한 이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대화의 핵심 주제로 삼고 시도 때도 없이 밤낮 음식 규제인 고기 먹는 문제만을 가지고 교회를 나누고 서로 정죄하며 비판하는 가운데 싸웠습니다.  이렇게 만날 때마다 먹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자 사도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이런 말로 일깨워 줍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14:4).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남깁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오늘날에는 그 이슈가 다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는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데, 교회는 성경이 분명히 금하고 있는 죄들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되지만(고전 6:9-10), 추가 규범이나 규칙과 제도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법과 똑같은 비중을 두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 중에 간혹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개인적인 견해나 취향 혹은 문화적인 선입관에 근거하여 자신의 도덕적인 판단을 쉽게 내리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 간에 분쟁과 분열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면 중세에는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물에 파리가 빠지면 물이 오염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파리가 거룩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이 문제를 가지고 밤낮으로 논쟁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신앙의 유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문제만을 발생케 하는 내용을 가지고 헛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구원의 절대적이지 않는 이슈(성령세례, 칭의, 예정, 은사들, 천년왕국, 기름부음, 삼위일체)들을 가지고 거의 예외가 없이 자신의 신학과 신앙으로 고린도교회나 로마교회처럼 서로 비방하는데 온 시간을 보냅니다.  솔직하게 말해 이러한 논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주로 복음 전도에는 관심이 없고 편파적이고 단편적인 메마른 성경지식을 가진 목사와 신학자들인데, ’교리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에 대해 성경적인 부분에서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쓸모 없는 교리는 개나 돼지에게 던져주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택함 받은 사람의 믿음이나 선행에 대한 예지와 무관하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무조전적으로 선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중예정론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오직 택자들만을 위한 제한속죄인지 혹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충족하지만 제한된 수의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는 무제한속죄인지에 대해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의견 일치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6세기 스위스의 종교개혁자인 Calvin의 사상에 기원을 둔 강성 칼빈주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택자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한 번 구원 받은 사람”, 즉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19 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침례교의 다수의 견해가 되었던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전적인 타락과 견인론에 있어 완화된 견해를 수용하면서 칼빈주의 5대 논점TULIP의 다섯 가지 조항 중 가운데에 놓인 세 가지 논점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강성 칼빈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를 재해석합니다.  이들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올바른 확신과 안전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이 거져 주시는 은혜에 저항할 수 있는 회심 이전의 인간의 자유와,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개인의 영원한 안전(견인)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와 달리 알미니안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에 대해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될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이미 예정된 길을 따라가면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조종을 받는 로봇이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기에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믿음을 지키지 않는다면 타락하여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점에 대해 웨슬리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점을 조금 지적한다면 웨슬리주의자들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불신앙이나 고백하지 않는 죄, 즉 의식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짓는 죄로  인해 얼마든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배교는 갱신된 회개를 통해 다시 치료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신자가 죄로 인해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배교를 나타내는 결단적인 행위, 즉 불신앙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저버릴 때만 구원이 상실된다고 강조하면서 배교는 다시 회복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양쪽 학파들 모두 자신들의 논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요약하면 강성 칼빈주의자들과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 보존됨을 기뻐하고, 알미니안주의자들과 웨슬리주의자들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사실 견인(안전) 교리가 구원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겁게 논쟁을 일으킨 주제이기 때문에 오늘날 이러한 해석의 난점은 신학자와 목회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논쟁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 간의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견인 교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이지 피구원자인 인간이 확실하게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정권은 요나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 2:9), 하나님에 속한 비밀이기에 누가 예정되었거나 내적부르심을 입었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개혁주의 신학자 R. C. Sproul이 『Willing to Believe: The Controversy over Free Will』에서 한 말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자 사이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논쟁 속에 엉뚱한 그룹들이 종종 서로를 잘못 설명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들어 놓고 잘못된 이해를 근거 삼아 돈키호테들처럼 논쟁의 칼을 휘둘러 댄다. 나는 칼빈주의자로서 종종 그것이 진정 칼빈주의를 묘사한 것이라면 기꺼이 동의하겠지만 그것과 무관하기에 동의할 수 없어 그들로부터 비판을 듣는다. 따라서 나는 알미니안주의를 따르는 사람들도 피할 수 없는 동일한 상황을 겪으면서 똑같이 당혹스러워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 마디로 칼빈주의 신학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교리적 논쟁을 일삼는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스펙트럼과 해석하는 방법론에 있어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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