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앞에서 논의한 것들은 결론적으로 죄를 죽이기 위해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다시 말해 핵심으로 들어가기 전 적당한 마음의 준비 상태가 무엇인지를 논의했던 것이다.  그러면 죄를 죽이기 위해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죽여라.

예수님의 보혈의 피는 죄로 병든 영혼들을 위한 그분의 주권적인 위대한 치료제이다.  그분의 피 안에서 당신이 산다면 당신은 죽지만 결국에 가서는 승리자가 될 것이다.  확실히 당신은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통해 당신의 정욕이 발밑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죽이는 일에서 믿음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행동과 방법을 취해야 하는가?  실로 그 행동과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일들을 기억하라.

믿음 안에서 당신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일들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 목적은 당신을 얽어매는 정욕을 믿음을 통해 죽이는데 있다.  스스로 죄를 극복할 수 없고, 죄와 싸우는 일에도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8:1, 7),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충분히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4:13).

탕자가 거의 쓰러질 상황에서 그를 버티게 했던 힘은 아버지 집에 먹을 것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비록 집과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지만 그 사실로 인해 그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극도의 고통과 고난 속에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위해 예비된 풍부한 은혜, 힘의 보고, 그리고 도움들을 바라보라(1:16, 1:19, 40:28-31).  그리고 그것들을 마음속에 간직하라.

회개케 한다는 것은 죄를 죽이게 한다는 의미이다.  죄의 죽임이 없는 회개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정결케 되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15:3).  그리스도가 공급해 주는 풍성한 은혜 위에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우리가 접붙임을 통해 주님께 거하는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이다(11:19-20). 

비록 여전히 대적자에게서 우리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싸움터에서 전차를 타고 싸울 수 있는 힘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결코 낙심이 있을 수 없다.  만약 당신이 불신앙으로 주저 앉고 주님에게서 떠나 거짓된 치료책을 구한다면 당신은 결국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은혜의 효과는 오직 믿음의 훈련을 통해서만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도움의 은혜를 기대하라.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도움의 은혜는 마치 하박국 선지자가 보았던 묵시와 같은 것이다(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고통가 당혹감 속에 있는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약각 더디 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은 예수님이 정하신 가장 좋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위로를 고대한다면 다시 말해 당신의 눈이 마치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향하듯이(123:2), 주님께 무엇을 받고자 하는 태도로 그분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분명 만족함을 얻게 될 것이다(7:4, 7-9).  확실히 주님은 당신을 구원해 주실 것이고 당신의 더러운 정욕을 죽여주실 것이며, 그 결과 당신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의 도움만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분의 손을 통해 그것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올 것인지 기대하라(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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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찬양하고 그에게 경배 드리는 것은 결코 인간 숭배는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인성 그 자체는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은혜의 전달의 원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찬양하되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간 구원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지극하신 사랑을 감사함으로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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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로 〈카르크미스〉라 불리우는 이 지명의 뜻은 그미스의 신전이다.  이곳은 고대 헷 제국의 수도 중 하나로서 주요한 전략 지대인 동시에 B.C. 18세기경의 무역 중심지였다.  이곳은 Aleppo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의 서편에 위치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Jerablus (이 말은 그리스어 Hieropolis가 와전된 것임)로 불리운다.  갈그미스는 무엇보다도 격전지로 유명하였는데, 성경은 물론 일반 역사서들도 이곳을 전쟁터로 기록하고 있으며, 고고학적 사료(史料)들은 특별히 갈그미스 전투’(the battle of Carchemish, B.C. 605)의 기록을 입증하고 있다.  본래 갈그미스는 ShakhurunuwaTalmi Teshub 같은 헷 족속의 왕들에 의해 다스려졌었는데, Pisiris 왕 때에 이르러 앗시리아의 지배하에 예속되어 버렸다(B.C. 717/ 참조 사 10:19).  그러나 앗시리아는 베벨로니아의 침략을 받고 이때 앗시리아를 도우러 왔던 이집트의 바로느고 2세는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전하므로써 갈그미스는 새로이 바벨로니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참조/ 대하 35:20).  그후 이 도시는 급격히 쇠퇴해 버리고 말았으니 1912년 영국의 고고학 탐사반에 의해 이곳의 발국 작업이 시작됨으로써야 비로소 유적으로나마 당시의 영화를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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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과 같은 완전한 인간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라면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죄인일 수 밖에 없다는 입장에서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아폴나리안파).  즉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체를 가지신 것은 사실이나 인간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영() 대신에 다른 인간이 갖지 못한 로고스(logos)를 가졌으므로 순수한 의미에서 인간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는 물론 영을 가지신 완전한 인간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과는 달리 동정녀를 통해 탄생함으로써 죄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차이점만을 지녔을 뿐입니다(히 4:15).  이처럼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므로 인간의 대표가 되셔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며(마 20:28), 또한 시험받는 인간을 도우시고(2:17-18), 이상적인 삶의 모범을 보이실 수 있었던(2:5-8), 사실에 대해 모든 성도들은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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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예기치 않은 때 갑자기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는(24:27),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지는 등 전체가 흔들리는 큰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24:29).  이때 그리스도는 구름을 타고(24:30), 사람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상태로 하늘에서 내려 오실 것입니다(3:4, 벧전 5:4).  그때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장엄하게 울려펴지고 수많은 천사들이 출현할 것입니다(24:31).  또한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이 부활의 몸을 입고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24:40-41).  이런 일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이 심판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높아지신 신분으로 아루어질 것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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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에게 있어 ‘경건’이란 거룩한 삶과 세속적인 삶을 분리해서 인간이 세속적인 삶에서 떠나 있는 소위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경건주의 또는 은둔적 신령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는데,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경건에 대해 이렇게 강조합니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은 그분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 오는 것이다.  …완전한 행복을 하나님 안에 두지 않는 한 진정으로 그리고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경외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구별된 삶’, 즉 신앙생활에 있어 믿는 것과 삶의 방식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세상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고(벧전 2:9), 이렇게 그분의 은혜로 부름 받은 성도들은( 2:8), 이 세대을 본받지 말고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2:1-2).  물론 우리는 금욕적인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삶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 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도 아니고(고전 5:10),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정하신 때까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운데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5:13-16).

 

다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것은 세상 속에서 살라는 말씀이 음란하고 죄 많은( 8:38), 세상의 원리에 순응하고 부패한 세속적인 문화를( 2:2),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적당히 타협하고( 5:11), 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4:4).  다시 말해 도살의 날을 위해 사치와 방종과 쾌락을 즐기며 살지 말아야 하고( 5:5), 무엇보다도 어두운 세상 속에서 살기는 살되 세상 풍속을 본받거나( 12:2),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2:2), 즉 악한 영향을 받고 사는 것이 아니라(벧전 4:3), 오히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2:15-16), 특히 불신자들 앞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라는 것입니다(벧전 2:12).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처럼 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과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으로 살아가라는 것인데(11:33-36), 이를 위해서 절대 요구되는 삶의 원리가 있다면 바로 경건과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말을 인용하면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만이( 1:27), 타락한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연예인들처럼 특별한 몸짓이나 행동을 통해서 남들에게 주목 받는 신앙을 가진다든지 혹은 세상과 단절하여 산 속 깊숙이 들어가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삶의 자리에서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이행하며 사는 생활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인 것입니다( 14:21).


이러한 문제를 놓고 개혁주의 신학자이며 목회자인 Sinclair B. Ferguson은 “성화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면(고후 5:17),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가운데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라고 말합니다( 3:10).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도 주님을 닮아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화에 대해 Abraham Kuyper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영혼에게 있어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의 거룩함이다.”라는 말한 것처럼 히브리서 기자( 12:1, 14)와 야고보( 1:22), 그리고 베드로 역시 독자들에게 모든 행실로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벧전 1:15).  이렇게 신약성경은 많은 부분을 여러 교회에 있는 신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가운데 자라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2:22, 4:13-15).  이 모든 도덕적인 권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성화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한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한결 같이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신자의 삶이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모든 행실에있어 더 거룩해져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벧전 2:15).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우리의 마음속에 아직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6:12-13),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동안은 온전한 성화가 완성될 수는 없겠지만( 3:13-14), 만약 우리가 죽어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때에(고후 5:1-7), 우리의 영혼이 죄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해지므로 우리의 성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완성될 것입니다(고전 15:40-44).  예를 들어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믿는 자는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에게로 나아온다고 했는데( 12:23), 이는 거룩한 성 하나님 앞에는 부정한 것은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요한계시록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21:27), 만일 성화가 우리의 육체까지 포함한 전인적인 것임을 인정한다면(고후 7:1, 살전 5:23), 이 성화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부활의 육체를 입을 때까지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고전 15:49).  다시 말해 회심 이전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6:20), 회심하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분명히 성화가 시작되었고(고전 6:11), 이 성화는 그리스도인 삶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가운데 죽음의 순간에 완전해 진다는 것입니다( 3:21).  따라서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능력과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죄와 일평생 싸워야 할 존재일 뿐 아니라( 6:10-18), 매일매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고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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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되었고 만물이 그를 '주'로 받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2:9-11).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시고 주가 되심으로써 그의 인성 역시 존귀케 된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고 증거했습니다(2:9-10).  이로써 그리스도의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그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에 오르셨고(1:9-10), 스테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7:56).  여기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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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을 진솔하게 반성해보면 우리가 속해 있는 어떤 공간에서도 갈등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갈등 그 자체입니다.  제자/사역 훈련을 받는 소그룹에서도 갈등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갈등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사역 훈련을 받는 우리는 이 갈등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성경은 갈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갈등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갈등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갈등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갈등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다르게 지으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존재의 특성입니다.  따라서 갈등 자체를 죄악시한다든지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훈련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갈등이 생겼으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임을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처리되기를 소망하십시오.

 

2. 갈등은 사람의 약점을 드러냅니다.

갈등은 두 사람간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갈등이 생긴다는 것은 어떤 한 사람만의 잘못일 수 없습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대부분의 당사자들은 상대방을 탓합니다.  상대방의 단점이나 문제 때문에 이 갈등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갈등은 두 사람 모두의 약점을 드러낸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원인이 누구에게 있느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두 사람이 그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했느냐 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갈등을 통해서 자신의 약점을 발견하도록 하십시오.

 

3. 문제보다 사람에 집중하십시오.

갈등을 일으킨 문제는 되 돌이키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엎질러진 물처럼 다시 담기가 어렵습니다.  쉽게 해결되는 문제도 있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도 있습니다.  따라서 갈등을 완벽하게 해결하기가 어려운 상황도 있음을 감안하십시오.  따라서 문제 자체보다는 사람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갈등의 당사자인 그 사람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에 집중하십시오.  그 사람을 정말 수용하고 있는지 점검하십시오.  용납할 수 있는지 돌이켜 보십시오.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기억하십시오.

 

4. 용서보다 용납이 먼저입니다.

갈등은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문제라기보다는 누군가를 용납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용서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용납이 용서보다 선행되어야 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용납이란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기질이나 경험 그리고 가치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용납하지 않은 채 용서했다면, 그것은 사실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온전한 용서는 온전한 용납이 이루어졌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역훈련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시켜 가십니다.  그리고 훈련 중에 항상 갈등을 사용하십시오.  큰 갈등이든 작은 갈등이든, 표면적인 갈등이든 드러난 갈등이든 갈등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성숙한 대인관계를 계발시켜 나가십니다.  이 신비하고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지도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갈등의 경험 없이 주어지는 리더십은 없습니다.  갈등의 고통이 리더십의 영광을 가져다줌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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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 가운데 하나님인 육체를 지니신 것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견해가 있었습니다(아리안파).  즉 그들은 예수를 단순히 신적 능력을 지닌 피조물로 봄으로써 완전한 하나님되심을 부인하는 이단입니다.  실로 이들은 단지 쉽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인간적 측면만 바라봄으로써 구원의 길에서 멀어진 불쌍한 자들입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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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직접적으로 거짓의 아비 사탄의 역사입니다만(계 12:12),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이기도 합니다(시 103:19).  거짓 그리스도는 사탄의 능력을 받아 표적과 기적을 일으켜 마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것처럼 기만전술을 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미혹하여 멸망시키려고 할 것입니다(살후 2:9-10).  그러나 이 사탄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욥 2:6).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역사의 흐름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유혹을 허용하시어(욥 1:12),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로 유혹에 넘어가 심판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살후 2:1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성경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표적과 기사를 일으켜 믿는 자라도 미혹하려는 사탄의 세력에 넘어갈 틈을 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신자만이 종말에 득세할 거짓 그리스도의 유혹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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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우리 영혼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고는 우리의 폐부를 관통하기 때문에 그 음성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 평안하다고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실로 스스로 평안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해서 자신을 높이는 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의 위대한 특권이자 주권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 사람에게 은혜를 주는 것은 그분의 위대한 특권이자 주권이다(9:16).  마찬가지로 그렇게 부름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또한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평화를 말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베푸는 정도도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성도들을 대할 때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위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선한 은혜 중에 하나이다.  이 은혜를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뜻에 따라 자녀들에게 베푸신다.  성경에서 주님은 이것을 자신의 특권이라고 주장하셨다(57:16-18).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유대의 상처와 위로받지 않은 상태를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전적인 특권임을 다음과 같은 말로 암시하였다.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57:19).  이 말의 의미는 상처받은 피조물에게 하나님이 찬양의 입술을 창조하시고 그분의 주권에 따라 그것을 이루어 주신다는 뜻이다.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일반은총의 경우도 하나님은 자신의 방법으로 역사하시며 그 과정도 외형상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은혜의 상태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특별 은총인 평화와 기쁨을 주실 때에도 마찬가지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특별 은총을 베푸는 것이다.

 

평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특권이기도 하다.

성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따라 평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것처럼 성자이신 그리스도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평화를 말할 수있는 특권이 있다.  라오디아교회가 스스로 자신의 상처들을 거짓되게 치료하고 자신들에게 평화를 말할 때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아멘이며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셨다(3:14). 

실로 주님은 우리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증거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실수하고 헛되게 수고할 수 있다.  또한 거짓된 이유로 스스로 우쭐할 수 있다.  하지만 주님은 아멘이시며 신실한 증인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황과 상태에 대해 그분이 하신 말씀은 실로 참되고 신실하다.  주님은 우리처럼 눈에 보이는 외모로 판단하시는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모든 원인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판단하신다(11:3).

당신이 이상의 두 가지 점을 주목했다면, 이제 우리의 평화가 스스로 지어낸 평화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평화인지를 분별해 주는 몇 가지 규칙들을 소개하겠다.     

 

평화를 분별하는 몇 가지 규칙

규칙 1. 자신의 죄를 증오하지 않는다면 결코 참된 평화는 오지 않는다.

확실히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평화를 말한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죄를 가증이 여기지도 않고 그렇게 하는 자신을 혐오하지도 않는다.  죄로 인해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며 당혹해 할 때, 보통 우리는 그 죄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언약의 약속을 의지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확실한 은혜를 주실 것이며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마음의 동요를 가라 앉힌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여전히 우리가 우리를 괴롭히는 죄를 증오하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에 의해 치유받기보다는 스스로를 치료하는 셈이 된다.  이런 인간적 치유는 엘리야가 경험했던 것과 같이 크고 강항 바람이기는 하지만 그 곳에는 하나님이 없는 바람이다.  이에 반해 치유와 평화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님을 찔렀다는 사실을 알고 애통하게 된다(12:10).   심지어 그분을 위해서 애통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분에게 상처를 준 자신들의 죄를 증오하게 된다.  

 

규칙 2. 자신의 신념과 원리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평화를 선언한다면 그것은 거짓 평화이다.

죄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그 죄 때문에 마음에 가책을 느낀다.  복음에 합당하게 올바로 살지 않았다는 자책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신의 영혼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았음을 자각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심사숙고 한다.  그때 그는 빛 속에서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전에 어떻게 치료를 받았는지도 생각해 낸다.  하나님의 약속들만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약임을 알고, 그는 그 약속들을 의지하며 좇아간다.

인생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생계를 유지하는 삶, 감정적인 삶, 그리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삶이다.  오로지 생계만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정적인 사람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감정적인 삶에도 생계를 유지의 삶이 필수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사람도 앞의 두 유형의 삶을 전제 한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이성의 원리 뿐만 아니라 앞에서 말한 나머지 두 종류의 삶의 원리도 따르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는 점점 자라나면서 분별력을 갖게 된다.

이런 이치는 하나님의 세계와 관련해서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이성을 가진 자연인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깨달음 속에서 마음에 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더 나아가 진실로 거듭난 성도들도 있다.  진실로 중생한 사람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유형의 모습을 모두 공유한다.  그 결과 그는 때때로 이성적 원리에서 그리고 깨달음을 가지고 행동한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영적 삶은 감정의 원리에 지배 받지 않는다.  그는 결코 감정에 죄우되는 법이 없으며 그의 열매는 그런 뿌리와는 상관이 없다.

스스로 평강을 말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서 악을 제거할 수 없다.  그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더욱 뒷걸음치도록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치유함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의 죄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죄와의 싸움만 격렬해진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배제한 채, 스스로 자신의 영혼에게 평강을 말한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행동은 수일 못가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즉 새로운 상처를 받게되어 다시 씨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평강의 말씀을 들은 영혼은 더 이상 완악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소유하게 된다.  또한 그 의지만큼 그의 영혼은 감미로운을 맛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규칙 3. 자신에게 평안을 말하는 것은 경박한 행동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당시의 지도자들의 그런 행동을 크게 비판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6:16).  실로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들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가볍게 생각한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흘긋 보기만 하면 치유가 된다고 여기고 그것이 전부인 양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하기때문에(4:2),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익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듣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비의 말씀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씀이 믿음 안으로 융화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 말씀을 영혼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다.  한때 양심의 상처로 불암감 속에서서 비틀거렸던 당신이 자유함을 얻었다고 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그 자유함을 어떻게 얻었는지 묻고 싶다.  이 물음에 당신은 나는 사죄와 치유의 약속을 보고 평강을 발견했습니다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성급하게 매우 피상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실로 당신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효과를 온 영혼에 퍼지지 못하도록 훼방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당신의 처신은 매우 경박한 행동이다.  따라서 당신의 상처는 멀지 않아 재발할 것이며, 당신은 치유받지 않은 자신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규칙 4. 죄를 해결하지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의 평화는 거짓 평화이다. 

무슨 이유든 간에 스스로에게 평강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에 있는 심각한 악의 문제를 하나님을 의지하며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말하는 평강은 실제로는 공허한 것이다.  이 의미를 좀 더 설명하겠다.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어떤 사람이 반복해서 태만히 한다면 나중에 그의 양심은 당혹감을 느끼고 그의 영혼은 상처를 받게 된다.  또한 그의 죄로 인해 그의 뼈를 쑤시는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약을 바르고 평강을 찾는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결국 성령을 근심시키는 세속적 생각과 교만 또는 다른 어리석은 생각들이 그의 마음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된다.  그래서 그는 죄로 인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죄와 싸우려 하지도 않게 된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의 영혼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을 똑같이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죄에 있는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우리 속에 있는 극히 작은 죄라도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눈은 매우 정결해서 그 앞에서는 부정이 설 수가 없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하나님이 가장 괴로워 하는 부분은 우리의 불신앙적인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강력한 위로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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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전달이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으로 하여 인간됨까지 영광을 입게 된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원래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부요와 영광으로 충만한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요하고 영광스러운 은혜가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에게까지 미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 그 자체에는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았지만, 인성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연합함으로써 은혜와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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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란 숨은 비밀

또는 신비 밝히는 것을 뜻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종류의 깨달음을 얻는다.

하나는 하나님께 관한 것으로

하나님의 덕과 삼위일체의 가르침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관한 것이다.


그중에 특히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인간의 몸을 입고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신 일들을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굳이

그러실 필요도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히 자신을 보이셨고, 자신을 알도록 하셨으며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셨던 것이다.

 

-윌리암 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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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생이 길어야 칠 팝십인 우리는 곧 오시리라는 주의 약속이 200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더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직까지 다시 오시지 않는 이유는 오직 더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벧후 3:9).  그런데 우리는 주의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면서도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율 배반적인 태도는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만일 지금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흰 보좌에 앉아 심판하신다면 칭찬들을 수 있을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실 주님이 바로  재림하시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천국 채비를 잘 하도록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은 주의 약속이 신실치 못하다가기 보다 우리를 배려해 주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벧후 3:8).  즉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우리 인간과 동일하지 않는 바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도 이런 측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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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이유는 물질은 악하다는 잘못된 견해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시다면 물질의 하나인 인간의 육체를 입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목격한 예수님의 육체는 진정한 육체가 아니라 하나의 환영(幻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의 대표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실 자격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구주가 되실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인간임을 부정하는 사상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으로서의 온갖 경험을 하시고 인간의 구주가 되셨다는 성경의 일관된 주장에 어긋나는 이단이므로 마땅히 배격되어야 합니다(요이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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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대제사장’, ‘ 새 언약의 중보라고 증거했습니다(9:11-15).  이러한 표현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음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는 중보시며 사람들을 위하여 속전(贖錢)으로 자신을 주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딤전 2:5-6).  또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사람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한편만의 중보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양편 모두의 중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3:20).  원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이러한 사역의 전달을 위해 반드시 인간의 몸을 입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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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세대가 지나가긴 전에종말이 오고 인자가 다시 올 것처럼 말씀하셨고(13:30), 승천하신 후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천사를 보내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22:20).  실제로 제자들과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이 곧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주의 재림이 점점 늦어지게 되자 일부 성도들은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했습니다(벧후 3:9).  그러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문자 그대로 임박한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단정할만한 근거는 없었고, 실제로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들 생전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단정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조급해 하는 성도들에게 주의 재림이 더딘 것이 아니고 더 많은 사람이 회개하도록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벧후 3:9).  바울은 혹 누가 영으로나 예언으로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주장할 때 쉽게 마음이 넘어가지 말라고 경계했고, 그는 주의 재림 전에 배도하는 일과 불법의 사람이 먼저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살후 2:2-3).  예수께서는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더디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셨습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25:5)와 달란트 비유에서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등의 구절은 재림이 더디고 오래 진난 후에 이루어 질 것을 시사해 줍니다.  따라서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것처럼 기대한 것은 곧 이루어질 것인지의 여부를 떠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할 결과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도록 가르치셨기 때문에 그들은 재림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었습니다(24:42, 25:13, 13: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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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32과에서는 봉사에 대해 배우게 된다.  훈련생들은 이 과를 통해 왜 봉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와 봉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배우게 된다.  또한 봉사를 하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과 봉사를 기피하게 되는 원인을 함께 찾아보고, 가이오와 같은 성경이 보여주는 봉사의 모델을 통해 봉사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깨닫고 봉사의 열망을 새롭게 다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소책자 『겸손』 (앤드류 머레이) 3 2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왜냐하면 겸손이야 말로 봉사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인 겸손은 인생의 첫째 되는 의무요, 또 가장 고상한 덕행이요, 동시에 모든 도덕의 기초가 된다.  모든 죄악의 근원은 바로 교만과 이 겸손을 잃어버리는 곳에서 시작된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오심도 겸손을 회복시키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겸손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그 겸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함이었다.  겸손은 다른 여러 가지의 은혜나 미덕들 중의 하나라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은혜와 미덕의 뿌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겸손만이 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올바른 태도요, 또한 겸손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행사를 우리에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식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겸손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우리 인간의 지위를 옳게 똑바로 인식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임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비참한 현실과 또 모든 전쟁과 민족간에 피 흘리는 일과 모든 이기심과 고통과 모든 야심과 질투와 아픈 마음과 고달픈 생활은 우리가 매일 만나는 모든 불행들과 더불어 그 근원이 저 저주받은 악마가 불어넣어준 교만, 즉 우리 자신의 교만과 또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교만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만은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계속해서 이겨낼 수 없고 청산해 버릴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면 구속주 그리스도의 특성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곧 그의 겸손이다.  그는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었고 죽기까지 순종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주 가르쳤던 교훈,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요라고 하셨던 말씀이 진리였음을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특히 자기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는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는 말씀을 하였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5:19)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역사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의사와 능력은 물론 자기 자신을 온전히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전적인 자기 부인과 절대적인 복종, 그리고 아버지께 의지하는 생활이 온전한 평안과 기쁨의 근원임을 그리스도는 아셨던 것이다.  예수님는 우리에게 진정한 겸손이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이며, 또 그 힘은 어디에서 나는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확실히 아는 지식과 또 우리 자신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니요, 또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우리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께만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그 지식에서 진정한 겸손과 그 힘은 생기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겸손하셨던 것과 같이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겸손하셨다.

 

우리는 예수가 선택한 열두 제자들에게서 겸손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는 가장 큰 은혜인 겸손이 부족하면서도 종교적 열심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모든 외부적 교훈과 모든 인간적인 노력으로서는 교만을 물리치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품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참 겸손이란 그 겸손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심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매일 매일의 우리의 사회생활이라는 현실적인 시험장에서 그 진실성이 증명되지 않는 한 그것은 거짓이다.  우리의 겸손 역시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자신을 낮춘다고 생각하기는 매우 쉽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생활만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하다는 유일한 증거가 된다.  우리의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심정은 사람과의 관계에서와 서로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이웃에게 나타내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겸손이란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겸손을 배워야 한다.

 

신앙과 겸손은 그 근본에 있어서 동일하며, 참된 겸손을 가지지 못하면 결코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마음속에 교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진리에 대한 강한 지적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적 확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산 신앙이 될 수는 없다.  신앙이란 나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요 전혀 무가치한 것임을 고백하고, 자기를 완전히 굴복시킨 후 하나님의 역사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겸손이란 바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도록 준비해 주는 것을 이름이다.  바울이 큰 은혜를 받으므로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육체에 한 가시를 주어 겸손을 유지하도록 했다.  바울의 첫 번 간구는 이 가시를 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세 번씩이나 그것을 위하여 간구했다.  드디어 그 응답은 왔다.  즉 그 가시야말로 오히려 하나의 축복이라는 것과 또 연약하고 겸손한 중에서 오히려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더 잘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응답이었던 것이다.  겸비의 자리 바로 그 자체가 축복의 자리요, 능력과 기쁨의 자리인 것을 바울은 분명히 배웠던 것이었다.  교만을 이기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자기를 낮추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시겠노라고 하신 그 약속을 믿고 그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 하나님께서 그대를 높이리라고 하신 그 말씀이다.  준비의 때가 있으면 성취의 때가 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이 말씀이 진리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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