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죄를 죽이는 성령의 사역에 관해 몇 마디 덧붙여 말하겠다.  지금까지 우리의 의무로 죄 죽이는 일은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통해 영향을 받고 수행되며 완성되는 것이다.  이 점을 좀 더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성령만이 죄를 깨닫게 해준다.

성령만이 분명하게 우리의 마음속에 죽어야 할 악과 죄, 타락과 정욕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깨닫게 해준다.  만약 이런 죄의 깨달음이 없다면 그리고 비록 있다손 치더라도 너무 미약해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한다면 우리는 죄를 철저하게 죽일 수 없다.  일반적으로 신앙이 없는 마음은 죄에 대한 분명한 자각을 갖기까지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상황을 회피한다.  따라서 성령의 일차적 사역은 먼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데 있다(16:8).  실제로 이 일은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다.  우리 스스로 말씀을 듣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죄를 우리는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설교를 통해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 사실과 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의 빛은 강력하지 못해 삶의 실제적인 원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런 깨달음이 있다 할지라도 사람은 거기에 자신의 생각과 뜻을 맞출 수 없기 때문에 합당한 결과를 도출해 내지 못한다.  지혜와 학식은 있지만 성령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정욕의 활동을 죄로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오직 성령만이 주실 수 있다.  실로 성령은 모든 정욕을 죽이기 위해 먼저 죄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죄에 대해 변명하지 못하도록 죄의 속임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죄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모든 통로를 차단한다.  그리하여 영혼들로 하여금 죄를 혐오케 만들고 죄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성령을 통해 우리가 죄를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결국 헛수고로 돌아갈 것이다.

 

둘째, 성령만이 풍성한 은혜를 보여준다.

성령만이 우리를 돕기 위해 예비된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거짓된 길과 낙담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후 12:8-9).

 

섯째, 성령만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

성령만이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도움을 기대할 수 있도록 붙들어 준다.  실로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도움은 이미 밝히 바와 같이 죄를 죽이기 위한 주님의 주권적 수단이다(고후 1:21-22).

 

넷째, 성령만이 십자가의 능력을 갖게 해준다.

성령만이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져다주고 죄를 죽이는 십자가의 능력을 베풀어 준다.  또한 이 성령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세례를 받는다.

 

다섯째, 성령은 성화의 저자이자 완성자이다.

성령은 우리의 성화의 저자이자 완성자이다.  다시 말해 성령은 거룩과 성화를 위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은혜들을 공급한다.  이때 성화와 반대되는 다른 원리들은 힘을 잃고 수그러지게 된다(3:16-18). 

 

여섯째, 성령만이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기도의 능력과 활기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기도의 효능의 근원은 무엇인가?  바로 성령이다.  주님은 자신을 찌른 자들에게 간구의 영으로 성령이 임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21:10).  그러므로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에게 간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이다(8:26).  이러한 간구는 하나님과 함께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위대한 방편이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에 대해 그것이 떠나 가도록 성령을 의지하며 간구했던 것이다(고후 12:8).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죄를 죽이기 위한 앞의 방법에 대해 당신도 경험 상 많은 증거들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그런 기대를 통해 확실히 큰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이 사실에 대해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할 사항들을 다음에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스도의 죽음과 십자가 그리고 보혈의 토대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십자가 그리고 보혈의 토대 위에서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멸할 수 있는 토대이다.  실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은 죄를 죽이기 위함이다.  주님은 사탄의 일을 멸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즉 자신이 첫 시험을 당할 때 경험했던 우리의 죄성과 현재 계속되는 죄의 힘을 멸하기 위해 돌아가셨던 것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14). 

주님은 바로 이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  다시 말해 우리로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모든 더러운 정욕에서 정결케 하는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씽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도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5:25-27).

사람의 정결함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다양한 정도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깨끗함과 정결함은 오로지 그분의 보혈로 기인된 것이다(요일 1:7, 1:3, 1:5).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뿌려질 때 그것은 우리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만든다(9:14).  양심이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되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일이자 목표이다.  그래서 죽은 행실을 근절시키고 파괴시켜 더 이상 우리 속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목표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거기에서 나오는 효능만이 그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령의 공급하심과 은혜와 능력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나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2절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에 죽었다고 공언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며 죄를 죽일 수 있는 능력에 참여하여 죄에 대해 죽었고, 더군다나 죄를 죽인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우리가 어떻게 다시 죄 안에서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바울은 같은 장에서 이 점을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여러 가지 측면으로 고찰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3).  우리의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표시이다.  세례는 그분 안으로 우리가 들어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분의 어디로 들어간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 바울은 그의 죽으심 안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그분 안으로 들어가는 연합의 세례는 그분의 죽으심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음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4-5).  한 마디로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는 행위로서, 주님이 죄에 대해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해 죽어 우리의 타락한 성품을  이긴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영광으로 부활했던 것처럼 우리도 은혜와 새로운 삶으로 다시 부활하게 됨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는 그 원천이 그분의 죽으심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  여기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라는 말의 본 뜻은 시간적 차원의 어느 시점을 가리키기 위함이 아니라 인과율의 차원에서 공로와 효능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죄를 죽일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신 예수님의 공로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못 박힘으로서 일어나는 효능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 자신도 십자가에 죽일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데 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 죄에 대해 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의미한 핵심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마귀의 일을 멸하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도들 안에서 죄가 더 이상 왕노릇하지 못하도록 죄를 죽이셨던 것이다. 

'내 안의 죄 죽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를 죽이기 위한 성령의 사역  (0) 2018.10.14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죽여라  (0) 2018.08.25
평안하다고 말하지 말라  (0) 2018.08.11
깨닫고 겸손하라  (0) 2018.07.28
결사적으로 대항하라  (0) 2018.07.14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지금까지 앞에서 논의한 것들은 결론적으로 죄를 죽이기 위해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다시 말해 핵심으로 들어가기 전 적당한 마음의 준비 상태가 무엇인지를 논의했던 것이다.  그러면 죄를 죽이기 위해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죽여라.

예수님의 보혈의 피는 죄로 병든 영혼들을 위한 그분의 주권적인 위대한 치료제이다.  그분의 피 안에서 당신이 산다면 당신은 죽지만 결국에 가서는 승리자가 될 것이다.  확실히 당신은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통해 당신의 정욕이 발밑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죽이는 일에서 믿음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행동과 방법을 취해야 하는가?  실로 그 행동과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일들을 기억하라.

믿음 안에서 당신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일들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 목적은 당신을 얽어매는 정욕을 믿음을 통해 죽이는데 있다.  스스로 죄를 극복할 수 없고, 죄와 싸우는 일에도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8:1, 7),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충분히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4:13).

탕자가 거의 쓰러질 상황에서 그를 버티게 했던 힘은 아버지 집에 먹을 것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비록 집과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지만 그 사실로 인해 그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극도의 고통과 고난 속에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위해 예비된 풍부한 은혜, 힘의 보고, 그리고 도움들을 바라보라(1:16, 1:19, 40:28-31).  그리고 그것들을 마음속에 간직하라.

회개케 한다는 것은 죄를 죽이게 한다는 의미이다.  죄의 죽임이 없는 회개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정결케 되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15:3).  그리스도가 공급해 주는 풍성한 은혜 위에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우리가 접붙임을 통해 주님께 거하는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이다(11:19-20). 

비록 여전히 대적자에게서 우리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싸움터에서 전차를 타고 싸울 수 있는 힘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결코 낙심이 있을 수 없다.  만약 당신이 불신앙으로 주저 앉고 주님에게서 떠나 거짓된 치료책을 구한다면 당신은 결국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은혜의 효과는 오직 믿음의 훈련을 통해서만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도움의 은혜를 기대하라.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도움의 은혜는 마치 하박국 선지자가 보았던 묵시와 같은 것이다(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고통가 당혹감 속에 있는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약각 더디 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은 예수님이 정하신 가장 좋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위로를 고대한다면 다시 말해 당신의 눈이 마치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향하듯이(123:2), 주님께 무엇을 받고자 하는 태도로 그분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분명 만족함을 얻게 될 것이다(7:4, 7-9).  확실히 주님은 당신을 구원해 주실 것이고 당신의 더러운 정욕을 죽여주실 것이며, 그 결과 당신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의 도움만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분의 손을 통해 그것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올 것인지 기대하라(7: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사람이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우리 영혼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고는 우리의 폐부를 관통하기 때문에 그 음성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 평안하다고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실로 스스로 평안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해서 자신을 높이는 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의 위대한 특권이자 주권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 사람에게 은혜를 주는 것은 그분의 위대한 특권이자 주권이다(9:16).  마찬가지로 그렇게 부름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또한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평화를 말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베푸는 정도도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성도들을 대할 때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위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선한 은혜 중에 하나이다.  이 은혜를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뜻에 따라 자녀들에게 베푸신다.  성경에서 주님은 이것을 자신의 특권이라고 주장하셨다(57:16-18).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유대의 상처와 위로받지 않은 상태를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전적인 특권임을 다음과 같은 말로 암시하였다.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57:19).  이 말의 의미는 상처받은 피조물에게 하나님이 찬양의 입술을 창조하시고 그분의 주권에 따라 그것을 이루어 주신다는 뜻이다.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일반은총의 경우도 하나님은 자신의 방법으로 역사하시며 그 과정도 외형상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은혜의 상태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특별 은총인 평화와 기쁨을 주실 때에도 마찬가지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특별 은총을 베푸는 것이다.

 

평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특권이기도 하다.

성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따라 평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것처럼 성자이신 그리스도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평화를 말할 수있는 특권이 있다.  라오디아교회가 스스로 자신의 상처들을 거짓되게 치료하고 자신들에게 평화를 말할 때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아멘이며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셨다(3:14). 

실로 주님은 우리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증거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실수하고 헛되게 수고할 수 있다.  또한 거짓된 이유로 스스로 우쭐할 수 있다.  하지만 주님은 아멘이시며 신실한 증인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황과 상태에 대해 그분이 하신 말씀은 실로 참되고 신실하다.  주님은 우리처럼 눈에 보이는 외모로 판단하시는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모든 원인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판단하신다(11:3).

당신이 이상의 두 가지 점을 주목했다면, 이제 우리의 평화가 스스로 지어낸 평화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평화인지를 분별해 주는 몇 가지 규칙들을 소개하겠다.     

 

평화를 분별하는 몇 가지 규칙

규칙 1. 자신의 죄를 증오하지 않는다면 결코 참된 평화는 오지 않는다.

확실히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평화를 말한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죄를 가증이 여기지도 않고 그렇게 하는 자신을 혐오하지도 않는다.  죄로 인해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며 당혹해 할 때, 보통 우리는 그 죄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언약의 약속을 의지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확실한 은혜를 주실 것이며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마음의 동요를 가라 앉힌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여전히 우리가 우리를 괴롭히는 죄를 증오하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에 의해 치유받기보다는 스스로를 치료하는 셈이 된다.  이런 인간적 치유는 엘리야가 경험했던 것과 같이 크고 강항 바람이기는 하지만 그 곳에는 하나님이 없는 바람이다.  이에 반해 치유와 평화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님을 찔렀다는 사실을 알고 애통하게 된다(12:10).   심지어 그분을 위해서 애통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분에게 상처를 준 자신들의 죄를 증오하게 된다.  

 

규칙 2. 자신의 신념과 원리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평화를 선언한다면 그것은 거짓 평화이다.

죄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그 죄 때문에 마음에 가책을 느낀다.  복음에 합당하게 올바로 살지 않았다는 자책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신의 영혼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았음을 자각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심사숙고 한다.  그때 그는 빛 속에서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전에 어떻게 치료를 받았는지도 생각해 낸다.  하나님의 약속들만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약임을 알고, 그는 그 약속들을 의지하며 좇아간다.

인생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생계를 유지하는 삶, 감정적인 삶, 그리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삶이다.  오로지 생계만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정적인 사람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감정적인 삶에도 생계를 유지의 삶이 필수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사람도 앞의 두 유형의 삶을 전제 한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이성의 원리 뿐만 아니라 앞에서 말한 나머지 두 종류의 삶의 원리도 따르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는 점점 자라나면서 분별력을 갖게 된다.

이런 이치는 하나님의 세계와 관련해서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이성을 가진 자연인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깨달음 속에서 마음에 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더 나아가 진실로 거듭난 성도들도 있다.  진실로 중생한 사람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유형의 모습을 모두 공유한다.  그 결과 그는 때때로 이성적 원리에서 그리고 깨달음을 가지고 행동한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영적 삶은 감정의 원리에 지배 받지 않는다.  그는 결코 감정에 죄우되는 법이 없으며 그의 열매는 그런 뿌리와는 상관이 없다.

스스로 평강을 말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서 악을 제거할 수 없다.  그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더욱 뒷걸음치도록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치유함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의 죄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죄와의 싸움만 격렬해진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배제한 채, 스스로 자신의 영혼에게 평강을 말한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행동은 수일 못가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즉 새로운 상처를 받게되어 다시 씨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평강의 말씀을 들은 영혼은 더 이상 완악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소유하게 된다.  또한 그 의지만큼 그의 영혼은 감미로운을 맛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규칙 3. 자신에게 평안을 말하는 것은 경박한 행동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당시의 지도자들의 그런 행동을 크게 비판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6:16).  실로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들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가볍게 생각한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흘긋 보기만 하면 치유가 된다고 여기고 그것이 전부인 양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하기때문에(4:2),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익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듣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비의 말씀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씀이 믿음 안으로 융화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 말씀을 영혼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다.  한때 양심의 상처로 불암감 속에서서 비틀거렸던 당신이 자유함을 얻었다고 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그 자유함을 어떻게 얻었는지 묻고 싶다.  이 물음에 당신은 나는 사죄와 치유의 약속을 보고 평강을 발견했습니다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성급하게 매우 피상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실로 당신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효과를 온 영혼에 퍼지지 못하도록 훼방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당신의 처신은 매우 경박한 행동이다.  따라서 당신의 상처는 멀지 않아 재발할 것이며, 당신은 치유받지 않은 자신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규칙 4. 죄를 해결하지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의 평화는 거짓 평화이다. 

무슨 이유든 간에 스스로에게 평강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에 있는 심각한 악의 문제를 하나님을 의지하며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말하는 평강은 실제로는 공허한 것이다.  이 의미를 좀 더 설명하겠다.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어떤 사람이 반복해서 태만히 한다면 나중에 그의 양심은 당혹감을 느끼고 그의 영혼은 상처를 받게 된다.  또한 그의 죄로 인해 그의 뼈를 쑤시는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약을 바르고 평강을 찾는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결국 성령을 근심시키는 세속적 생각과 교만 또는 다른 어리석은 생각들이 그의 마음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된다.  그래서 그는 죄로 인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죄와 싸우려 하지도 않게 된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의 영혼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을 똑같이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죄에 있는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우리 속에 있는 극히 작은 죄라도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눈은 매우 정결해서 그 앞에서는 부정이 설 수가 없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하나님이 가장 괴로워 하는 부분은 우리의 불신앙적인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강력한 위로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자신의 사악함을 깨닫고 겸손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다음과 같은 사실을 묵상하라.

 

하나님의 탁월한 위엄을 묵상하라

하나님의 탁월한 위엄을 묵상하면서 그것에 비해 너무나 동떨어진 당신의 초라한 모습을 생각하라.  이와 같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자신의 사악함을 깨닫고 되고 속에 거하는 죄의 뿌리를 잘라낼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탁월하심을 마침내 목도하게 되었을 때 수치심 속에서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42:5-6).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중에 깨달았던 하박국 선지자는 어떠했는가?  하박국 316절을 보라.

성경은 사람의 비천한 상태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과 비교하여 이 땅의 인간들을 메뚜기’, ‘헛된 것또는 띠끌로 비유했다(40:13-15).  마음의 교만을 제거하고 영혼을 겸손케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비천함을 많이 생각하라.  죄의 속임수에 항거할 때 이와 같은 생각만큼 큰 힘을 발휘하는 것도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위대함을 깊이 묵상하라.   

 

자신의 지식이 미천함을 묵상하라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지식이 미천하다는 사실을 많이 생각하라.  비록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할 정도의 지식은 있다고 할지라고 그분에 대한 당신의 지식을 정말로 초라한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와 같은 성찰을 통해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30:2-4).  이와 같은 성찰을 함으로써 교만한 마음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라.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정말로 당신의 지식을 빈약하기 짝이 없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계속적으로 경외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가장 최고의 업적을 성취하며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교제를 나눈 위인들일지라도 그들이 세상에서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매우 보잘것 없었음을 숙고하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셨고, 언약을 통해 자신의 가장 영광스러운 속성들을 계시하였다.  그럼에도 모세가 본 것은 모두 하나님의 뒷 모습에 불과했다(34:5-6).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모세의 지식은 그분의 온전한 영광과 비교하면 매우 미소한 것이다.  우리가 하루 종일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그분과 그분의 일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실로 그분에 대해 아는 것은 매우 적다.  그분에 대해 우리의 생각과 묵상 그리고 표현들은 천박해서 그분의 온전함에 크게 못 미치기 때문에 그분의 영광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바울은 율법의 영광에 비교해서 복음의 빛의 영광을 높이 칭송하고, 지금 어두움을 일으켰던 수건이 사라져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수건 벗은 얼굴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 같이그분을 본다고 말했다(고후 3:18).  거울을 보는 것 같이 본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온전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본다는 뜻인가?  분명히 그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여기서 거울은 우리가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망원경이 아니다.  이 거울은 사물을 뚜렸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 없다.

그러므로 이 거울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물에 대해 여전히 부족한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높은 업적을 쌓아 스스로 자부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은  그분의 무한한 온전하심에 비해 비추어 보면 정말로 유치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장 정확한 개념들 조차도 대부분 매우 불안전한 것이다.  그럼에도 고난 중에 우리가 힘을 얻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 때문이다(요일 3:2).     

 

하나님의 무한하신 속성을 묵상하라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리지어다’(딤전 6:16).  하나님께 접근하여 그분을 볼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둠이 조금도 없는 하나님의 빛은 피조물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다.  빛나는 태양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너무나도 연약한 우리가 어떻게 무한한 광명의 빛을 볼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런 연유에서 잠언의 지혜자는 자신을 짐승이라고 고백했고 자신에게 사람의 총명이 없음을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일반 사물에 대한 표현 방식대로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개념을 형상화한다면 결국 우상을 만드는 꼴이 되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기보다 우리 자신이 만든 하나님을 숭배하는 셈이 된다.  마음속에서 우리의 이해에 걸맞는 존재로 하나님을 형상화 하는 것은 나무와 돌로 하나님을 맏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때 최선책은 그분의 존재에 대해 우리가 아무런 생각도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들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 광대하심, 무한하심 그리고 그분의 영원성에 대해 토론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말과 개념들을 가지고 이야기할 뿐이며 우리가 실제로 그것들을 아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것을 이해하려 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의 마음은 무한한 심연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기에는 우리의 이해력이 너무나 조잡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온전한 지혜의 모습이다.

같은 본질 속에서 세 개의 다른 인격이 존재하는 삼위일체교리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진리는 아무도 이해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부인해 왔던 신비였다.  실로 그말 하나하나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다.  성자 하나님의 나심(generation), 성령의 나오심(procession) 그리고 그 둘 간의 차이를 누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 말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식은 그분의 존재 상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즉 그분의 본질적인 선하신 속성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신 선하심을 통해서 그분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식도 욥이 말한 것처럼 매우 보잘 것이 없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과 그분의 경륜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뿐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그분을 알고 그분에게서 상을 받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믿음은 우리가 믿는 바를 잘못 형상화하고 표현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11:1).  우리의 믿음은 전도를 통해 우리가 보지 못한 주님을 증거받을 때 일어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믿음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주님에 대한 증거의 말씀을 통해 생겨난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알게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며, 믿고 순종하면서, 죄를 용서하는 창조자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영광과 존귀를 돌리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지식만큼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으로 철저하게 변화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은사들을 제대로 사용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신뢰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 자신에 속한 영혼들에게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모든 필요한 방법을 동원해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순종해야 할지를 가르치신다.  그리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품안으로 인도하고 나중에 천국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영원까지 살 수 있게 하신다.  하지만 여전히 다음과 같은 한계가 있다.  그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매우 적다.  우리는 그분의 뒷 모습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의 계시는 단순히 믿음, 사랑, 순종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계시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계시의 목적은 유혹 가운데 있는 가련한 인생들에게 합당한 믿음과 사역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지식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천국에서 영원히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할 때는 하나님이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을 보여주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 모든 것들은 그림자처럼 사라질 것이다.   

둘째, 우리의 마음은 우둔하고 더뎌서 계시된 말씀 안에 있는 실체들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드시고, 그분의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 영혼들에게 이 세상에서 모든 지식을 깨닫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복음의 계시 방법이 명확하고 분명하지만 그 계시를 통해 갖는 우리의 지식은 매우 연약할 수 밖에 없다. 

확실히 하나님의 형용할 수 없는 위대하심과 그분과 우리 사이에 있는 엄청난 괴리감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그분에 대해 거룩하고 두려운 경외심으로 채워져 모든 정욕과 맞서 싸울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소부재하심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항상 잃지 말라.  또한 하나님을 묵상하라.  실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당신의 비천함을 알고 당신의 천성이 그분의 본질적인 영광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왜소하다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라.

'내 안의 죄 죽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죽여라  (0) 2018.08.25
평안하다고 말하지 말라  (0) 2018.08.11
결사적으로 대항하라  (0) 2018.07.14
항상 깨어 있으라  (0) 2018.06.30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라  (0) 2018.06.1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죄의 모습이 처음 나타날 때 당신은 그것에 대해 결사적으로 대항해야 한다.  그 죄가 당신의 마음 밭에 결코 서지 못하도록 항거하라.  이 죄는 여기까지만 진행되고 더 이상 진척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속이지 말라.  죄는 일단 한 걸음을 내딛으면 그 다음 발걸음을 취한다.  죄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그것을 묶어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강바닥에 흐르는 물과 같다.  그래서 일단 자리를 잡게 되면 물줄기처럼 자신의 경로를 따라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른다.  그러므로 분출된 죄를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는 일보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것을 원천 봉쇄하는 일이 더 쉽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죄를 처음부터 막아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죄가 어떻게 단계적으로 진행되는지를 잘 설명해 주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4-15).

혹시 당신의 생각이 타락한 죄로 인해 물들려는 조짐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죄가 목적을 달성할 때 나타나는 결과를 생각하고 사력을 다해 싸우라.  당신에게 정결하지 못한 생각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숙고하라.  획실히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어리석음과 더러움에 처하도록 만들 것이다.  또한 시기심과 종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결국 그 종착지는 살인과 파괴이다.  이런 죄가 당신을 비천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더욱 기운을 차려 그것에 대항 하라.  이런 투쟁의 자세 없이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죄가 일단의 감정을 사로잡아 당신이 죄를 기뻐하게 된다면 죄는 다시 이성에 침투하여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만들 것이다.

'내 안의 죄 죽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안하다고 말하지 말라  (0) 2018.08.11
깨닫고 겸손하라  (0) 2018.07.28
항상 깨어 있으라  (0) 2018.06.30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라  (0) 2018.06.16
해방되기를 끊임없이 갈망하라  (0) 2018.06.0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당신은 죄가 어떨 때 힘을 발휘하고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세력을 펼치는지를 고찰하고 항상 죄에 대항해 깨어 있어야 한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13:37)고 당부하신 말씀처럼 깨어 있는 것은 실로 우리의 의무이다.  누가복음 2134절은 깨어 있는 사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한 마디로 타락한 성품의 분출을 막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다윗은 이 의무를 스스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18:23).  그는 자신의 부정한 모든 행동 양식과 죄들을 대적하기 위해 깨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행위를 돌아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이다.

당신은 죄가 활개를 칠 때는 어떤 상황이며 그것이 어떤 요소와 어떤 기호를 만날 때 그리고 어떤 조건이 충족될 때 유리하게 전개되는지를 생각하라.  그래서 그런 것들을 주시하고 대항하라.  육체의 질병을 당할 때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해로운 음식이나 공기 그리고 계절들을 피한다.  영혼의 질병은 육체의 병보다 더 중요하지 않는가?  죄의 상황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히려 즐기는 사람은결국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죄의 유혹의 모험에 빠져드는 사람은 결국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하사엘은 처음 선지자 엘리야의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이 그렇게 잔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선지자는 그를 확신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왕하 8:13).  결국 잔악한 행위의 유혹을 가지고 있었던 하사엘은 이스라엘에게 잔악을 행했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죄를 지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그 말을 듣고 처음에 놀란 것이다.  그 때 당신이 그의 속에서 대범하게 가지고 있는 유혹들을 지적해 주면 그는 곧 누그러져서 당신의 말에 수긍하게 될 것이다.

'내 안의 죄 죽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닫고 겸손하라  (0) 2018.07.28
결사적으로 대항하라  (0) 2018.07.14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라  (0) 2018.06.16
해방되기를 끊임없이 갈망하라  (0) 2018.06.02
양심으로 느껴라  (0) 2018.05.1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당신을 혼란에 빠뜨리는 죄가 당신의 성품 속에 침투하여 뿌리를 내리고 당신의 체질로 정착하여 세력을 확산시키고 있는지 살펴라.  확실히 어떤 죄들은 사람들의 기질과 성향으로 굳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하라. 

 

무조건 죄를 자신의 기질 탓으로 돌리지 말라

어떤 사람들은 불경스럽게도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자신들의 기질이나 성향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그들이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 지는 두고 볼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의 성품이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우리의 천성적인 기질에 죄의 자양분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줄어들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짓는 이유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51:5).  당신이 특정한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신의 성품 속에 정욕이 특정한 모습으로 분출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분툴로 인해 당신은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죄의 성향은 사탄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과 관련해서 주시해야 할 점은 이와 같은 당신의 죄의 기질과 성향으로 인해 사탄과 죄가 매우 유리한 상황을 선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각별한 경각심과 주의, 그리고 부지런함이 없다면 그들이 당신의 영혼을 확실히 잡아 삼킬 것이다.  실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서둘러 지옥에 떨어졌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옥으로 가는 그들의 행보는 하나님을 덜 자극하고 어느 정도 해악을 덜 끼치면서 천천히 진행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몸을 복종시켜라

몸을 복종시키는 행위는 죄를 죽이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것은 죄의 천성적인 뿌리를 역제하고 죄의 기름진 토향을 제거하여 그덜을 시들게 만든다.  로마 가톨릭 교도들은 죄를 죽이는 문제를 오로지 봉사와 고행을 자청하여 자신들의 육체를 복종시키는 것으로만 해석한다.  때문에 이들의 유혹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직접 행하신, 소위 미련한 방법들을 무시한다.  하지만 몸을 복종시키기 위해 금식과 철야 등과 같은 방법으로 천성적인 욕구를 죽이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자신의 몸을 외형적으로 손상시키고 약화시키는 행위 자체가 어떤 위력이 있거나 그런 행위를 통해 자동적으로 죄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대신 우리는 그런 행위가 죄의 천성적인 뿌리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단순한 수단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인식하지 않을 때 사람은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쇠약하게 만들 수 있다.

둘째, 금식이나 철야기도와 같은 수단들이 그 자체에 어떤 마술적인 힘이 있기 때문에 죄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정말로 그러한 효과가 있다면 이 세상의 중생하지 않은 사람도 성령이 도움 없이 죄를 죽일 수 있게 된다.  이런 수단들은 성령이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 때때로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가톨릭 교도들은 올바른 인식의 부재 속에서 그와 같은 사실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죽이기 위해 취하는 행동들은 성도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보다 들판의 말이나 짐승들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앞의 논의를 요약한다면 죄가 우리의 천성적인 기질이나 성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영혼이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와 같은 죄의 천성적인 뿌리들을 억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안의 죄 죽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사적으로 대항하라  (0) 2018.07.14
항상 깨어 있으라  (0) 2018.06.30
해방되기를 끊임없이 갈망하라  (0) 2018.06.02
양심으로 느껴라  (0) 2018.05.19
사악함을 항상 인식하라  (0) 2018.05.0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일단 죄를 심각하게 인식하게 되면 그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기 위해 끊임없이 갈망해야 한다.  한 순간이라도 당신의 마음속에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안 된다.  세상적인 갈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투구하는 대상에 이르도록 자극할 뿐 그 외에는 아무런 가치나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영적인 갈망은 다르다.  영적인 구원을 바라고 갈망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은혜가 되어 영혼으로 하여금 그것이 추구하는 대상을 닮도록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고린도교인들이 행하는 회개와 슬픔을 언급할 때 그들의 갈망은 그 자체가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했다(고후 7:11).  자신 속에 거하는 죄와 그 능력에 대해서 바울은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실로 그의 마음은 구원을 받기 위한 열렬한 갈망으로 충만해 있었다.  위대한 성인들은 이처럼 자신들의 죄와 대항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있었다.  그런데 특정한 정욕의 광기와 권세로 당신이 그런 영적 열망을 희석시킨다면 어떻게 강력한 열망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죄에서 해방하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결코 당신은 구원받을 수 없다.  이 점을 진실로 깨닫는다면 당신의 마음은 경계심을 갖고 대적자와 싸우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모든 수단과 기회들을 강구할 것이다.  그리고 적을 물리치기 위해 주어지는 모든 도움들을 사용할 것이다.  강력한 열망은 성도들에게 명령으로 주어진 항상 기도하라는 말의 본뜻이기도 하다.  강력한 열망을 가져야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열망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힘을 발휘하게 되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속에서 항상 갈망하는 자세를 견지하라.   바라고 울부짖으라.  당신은 그런 다윗의 예를 잘 알고 있을 것이기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갰다.  

'내 안의 죄 죽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항상 깨어 있으라  (0) 2018.06.30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라  (0) 2018.06.16
양심으로 느껴라  (0) 2018.05.19
사악함을 항상 인식하라  (0) 2018.05.05
위험한 징후들을 살펴라  (0) 2018.04.2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단순히 죄의식을 가졌다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죄의 분출과 동요를 보고 당신의 양심은 괴로워야 한다.  이 점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구제적으로 죄를 느껴라

첫째, 정직하고 거룩한 율법의 관점에서 당신 속에 나타나는 죄를 양심으로 느껴라.  하나님의 율법을 당신의 양심에 가져와 타락한 성품을 율법 아래에서 점검하라.  그리고 그 율법을 통해 자극 받기를 기도하라.  율법이 갖는 거룩함, 영성, 불 같은 엄격함, 절대성, 내면성을 생각하고 당신이 그 앞에서 어떻게 설 수 있는지를 살펴라.  율법 안에서 주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지를 양심으로 크게 느껴라.  그리고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당신의 범죄가 마땅히 응분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양심으로 깨달으라. 

아마도 당신의 양심은 그러한 생각을 회피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변명과 핑계들을 늘어 놓을지 모른다.  즉 율법의 정죄 능력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율법에서 자유롭다는 주장이다.  또한 율법에 순응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속에 정욕이 아직 죽지 않는 한, 당신의 양심을 정죄하는 죄의 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율법은 당신에게 그 동안 속여 왔던 죄의 정체를 보여줄 것이다.

더욱이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죄인들을 잡아 내고 하나님 보좌 앞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때 보좌 앞에서 죄인들은 자신들을 변론해야 한다.  이것이 당신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다.  율법이 당신을 발견하게 되면 하나님 앞으로 당신을 끌어놓을 것이다.  거기서 당신이 용서를 구한다면 잘 한 것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율법은 자신의 사명에 따라 당신을 정죄하게 될 것이다.  율법의 목적은 당신 속에 죄를 발견하고 그 죄에 대해 당신 영혼을 일깨워 겸손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한마디로 그것은 죄를 반사시켜 주는 거울이다.

실로 신앙을 공언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배교했다.  그들은 율법에서 자신들이 해방된 사람처럼 자부하고 율법의 안내를 전혀 받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판단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이런 태도를 통해 조금씩 죄의 원리가 그들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실제적인 이해력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사로잡게 되자 그들의 의지와 감정은 불경한 모든 죄에 노출되게 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나는 정욕과 타락에 대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율법의 소리에 당신의 양심이 부지런히 귀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둘째, 당신의 정욕을 복음이 빛 속에서 조명해야 한다.  이것은 복음에서 위안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더욱 자신의 죄를 인식하기 위함이다.  당신이 찌른 주님을 바라고 비통해 하라.  그리고 당신의 영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  내가 어떻게 그 큰 사랑과 자비, 보혈, 은혜를 경멸하고 짓밝았는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피, 그리고 성령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 이런 것이었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씻음을 받고 성령이 내주하게 된 나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내가 더럽혔단 말인가?  사랑의 주 예수님께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분과의 교제를 너무나 소홀히 다루어 나의 정욕으로 인해 나의 마음속에서 그분의 설 자리가 거의 사라졌던 것은 아닌가?  이 큰 구원을 무시한 내가 어떻게 심판을 회피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주님께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마음속에 정욕을 품기 위해서 사랑, 자비, 은혜, 선하심, 평화, 기쁨 위로 등을 모두 저버렸고 그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말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을 훼손시키는 행동들을 나는 계속할 것인가? 나의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주는 성령을 매일 근심시킬 것인가?”  매일 당신의 양심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지키게 하라.  즉 죄로 악화되기 전에 죄에 맞서 양심을 세우겠다는 다짐이다.  그렇게 다짐 하지 않는다면 두렵건대 당신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있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은혜와 죄를 숙고하라

복음의 일반적인 은혜 가운데에는 구원, 칭의 등과 같은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그 은혜들이 구체적으로 당신이 영혼에서 어떤 사랑을 베풀었으며, 그 사랑을 저버린 당신의 타락한 죄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첫째, 특별히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와 참으심을 고찰하라.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보고 이 세상의 수치거리와 영원한 분노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하셨다면 어떤 조치를 취하셨을지를 숙고해 보라.  또한 당신이 때때로 그 분에게 어떻게 거짓 행하며 반역했는지, 그리고 당신의 입술로 하나님께 아첨하면서 지금 추구하는 죄를 통해 그 모든 약속과 맹세를 어떻게 저버렸는지 생각하라.  실로 당신은 아직도 그 분에 대항해서 죄를 지을 것인가?  여전히 그 분을 싫증나게 하고 주님에게 당신의 타락한 행위에 동조하도록 계속 종용할 것인가?

당신은 종종 주님이 더 이상 당신을 참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가?  그분이 당신을 버리고 더 이상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며, 그분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해 이제 지옥과 분노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예상을 깨고 사랑으로 그런 당신을 지금까지 대해주셨다.  이런 은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은 그분의 영광의 눈을 화나게 하는 일을 계속 할 것인가?      

둘째, 죄의 속임수로 인해 거의 강퍅해진 당신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하고 풍부한 은혜로 자주 당신을 회복시키고 그분과 다시 교제할 수 있도록 그동안 역사하셨다.  그동안 당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점점 쇠퇴해 갔고, 당신은 의무, 규율, 기도, 그리고 명상과 같은 일에 흥미를 잃었었다는 사실을 당신도 인정하지 않는가?  또한 무절제하고 방탕한 삶이 기승하고 거의 회복 불가능한 정도로 당신이 죄에 얽매였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마음을 강퍅하기 위해 그런 일을 대범하게 계속할 것인가?

하나님이 은혜의 섭리 가운데 당신에게 베푼 구원, 고통, 자비, 즐거움 등은 모두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당신의 양심에 죄의식의 짐을 지워야 한다.  그리고 당신 속에 거하는 타락한 죄들로 인해 그 상처를 인식하고 주님 앞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석고대죄하며 철저히 괴로워 하라.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양심이 죄의식을 희석시킨다면 당신의 영혼은 죄를 죽이려고 결코 힘쓰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당신의 마음과 양심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변함없는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죄의식

사람이 정욕의 지배를 받을 정욕은 사람에게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도록  속인다.  그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우상 신에게 경배를 하나님도 정도는 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왕하 5:18).  또한 이것은 나쁘지만 다른 악에 비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구실을 대도록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도 이런 생각의 속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윗은 율법의 아래서 수많은 변명을 통해 자신의 혐오스런 죄의 추악함과 죄성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분명한 죄의식을 가졌었다면 그처럼 오랫동안 죄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죄를 질책할 먼저 다윗의 모든 변명들과 구실들을 비유를 통해 일축했다.  그러자 비로소 다윗은 온전히 자신의 죄를 인식할 있었다(삼하 12:1-15).  이처럼 정욕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종말에 그리스도는 타락한 자녀들을 다루실 ( 3:15), 그들의 뿌리를 감찰하시고 겉으로 하는 그들의 신앙고백을 무시하신 내가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마음이 입으로 말한 것과 다름을 지적하시고, 그들을 향해 스스로 가증스러운 존재가 되었음을 꾸짖을 것이다.  당신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자신 속에 거하는 죄성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갖기 위해 노력하라.  그래서 마음을 약화시키거나 변명하게 만드는 생각들을 청산하고 죄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라.

 

죄의 위험들

히브리서 312-13절에서 바울은 죄의 속임수로 인해 우리가 강퍅해질 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바울의 요지는 주의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시험을 깊이 생각하고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강퍅함이란 완고함이라는 뜻이다.  실로 죄의 지향점은 바로 이런 완고함이다.

그러므로 모든 정욕들은 발전해서 사람을 완악하게 만든다.  한때 온유했고 하나님의 말씀과 고난을 통해서 부드러워졌던 사람이 정욕으로 인해, 불경스러운 표현을 빌리자면 이상 설교 말씀이나 질병 앞에서도 찔림을 받지 않고 완고해 진다.  또한 과거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했고 죽음에 대한 생각과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서는 일로 두려워했던 사람이 마음에 완악함으로 인해 이상 그런 생각들에 동요죄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 상태와 죄에 대한 지적을 당해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기도, 설교, 말씀 읽기와 같은 책임을 유기한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은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죄가 이렇게 자라나면 종착지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참담한 상태이다.  다시 말해 , 은혜, 그리스도의 , 율법, 천국과 지옥 등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고 말은 사실이다( 8:1).  하지만 누구나 이와 같은 주장을 통해 위로를 받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런 주장을 있는가?  해답은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는 사람이다’( 8:5-8).  여기서 혹자는 로마서81절의 말씀은 결국 사람들에게 불신앙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가지 측면에서 스스로를 판단한다.  첫째는 자신의 인격이고 둘째는 자신의 행동 양식이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격이 아니라 행동 양식에 관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인격에 대해 좋은 증거들을 가지고 호의적인 판단을 내릴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자신의 사악한 행동 양식이 파멸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판단할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판단 능력이 없다면 그는 무신론자이다. 

 

죄의 사악함

정욕을 죽이지 못하 부수적으로 동반하는 많은 악들에 대해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죄는 성도의 마음속에 거하도록 보내진 성령을 근심케 한다( 4:25-30).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는 이유는 성령을 통해 우리가 수없이 좋은 혜택을 받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혜택 중에 가장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혜택은 구속의 날까지 성령이 우리에게 인치심을 주는 은혜이다( 1:13). 

부드러운 사람이 친구의 무례함을 보고 근심하는 것처럼 성령은 죄의 정욕을 보면 근심하게 된다.  성령은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모습으로 우리의 영혼들에게 소원들을 이루어 주기 위해 우리 속에 내주하신다.  이때 우리가 물리쳐야 대적들을 여전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성령은 그것을 보고 근심하게 된다.  우리에게 어떤 고통과 근심도 주지 않는 성령( 3:33) 우리가 매일 삶속에서 근심시킨다면 정말 배은망덕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마음과 생각을 항상 정결케 하고 모든 영역에서 거룩함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가장 이유는 그들 속에 거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고 그들과 만나주시는 성령 때문이다.  성령은 사람들 속에 거하여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즐거워하는지를 주시한다.  이때 그들이 자신들의 성전을 정결케 한다면 성령은 그것을 보고 크게 기뻐한다. 

구약에서 시므리는 모세와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 창녀를 회중 가운데로 데려와 이스라엘을 근심케 적이 있었다.  이것은 시므리가 저지른 가장 죄악이었다( 25:6).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령이 성도의 마음에 있는 성전을 정결케 하기 위해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고 있을 , 우리가 죄의 정욕을 마음속에 데려와 마치 성도에게 당연한 일인 죄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면 이것은 정말 악이 아닐 없다. 

둘째, 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 상처를 입히는 악을 행한다.  실로 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을 빼앗고 대적자인 마귀의 욕망을 채워준다.  죄의 속임수를 통해 주님을 완전히 저버리는 행위는 주님을 다시 박는 행위와 같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멸하기 위해 왔던 죄를 다시 마음에 품는 행위도 분에게 상처를 주고 분을 근심케 한다. 

죄는 세상에서 사람의 유용성을 말살시킨다.  그래서 죄에 지배 아래에 놓인 사람은 아무리 노력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거의 받지 못하게 된다.  만약 그가 설교자라면 하나님은 그의 사역의 훼방꾼이 되어 결국 그를 불구덩이 속에서 사역하도록 만드실 것이다.  결과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그는 실제로 아무런 성취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실로 세상은 신앙을 공헌하지만 스스로를 괴멸시키는 불쌍한 영혼들로 가득 있다.  정말로 아름다운 영광의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매우 극소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폐하여 거의 쓸모없는 사람들이다.  특별히 우려되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자신들의 영을 삼키는 정욕들을 계속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당신의 정욕에 동반되는 여러 위험한 징후들을 숙고홰 보라.  즉 그 정욕이 치명적인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 조사하라.  만약 그것이 치명적이라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죄를 죽이려는 노력은 효과를 거둘 수 없다.  당신은 다음과 같이 물을지 모른다.  우리 속에 거하는 죄가 치명적임을 보여주는 위험한 징후들은 어떤 것인가?

 

고질적인 습관

어떤 죄가 당신의 마음을 오랫동안 타락시켜 왔는데 그것의 위력을 물리치고 거기서 치유받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죄의 병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다윗의 경우가 그러했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38:5).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정욕은 사람을 타락시키며 곪게 하고 짓무르게 하여 영혼을 비참한 상태로 만든다.  이러한 경우 일반적인 처방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한, 그러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결코 평화를 맞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로 특정한 정욕을 오랫동안 죽이지 못한 것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죄의 노예 상태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수많은 세월 동안 죄의 특정 정욕이 여러 모양으로 역사하여 마치 요지부동인 것처럼 역사하고 있을 때 그 정욕이 더 이상 자기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딴 사람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각종 은사들의 도전 앞에서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은 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고질적인 습관처럼 영향력을 행사하는 죄를 사람이 제거한다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다.  오앳동안 방치된 상처들은 종종 치명적이며 항상 위험하다.  속에 거하는 병은 계속 아무런 장애 없이 거하면서 더욱 난폭하고 완고해진다.  정욕은 그러한 속병으로 일단 사람 속에 습관으로 자리잡게 되면 발본하기가 어려워진다.  그것은 스스로 죽는 법이 없기 때문에 매일매일 우리가 그것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 위력은 점점 더 커진다.

 

죄와 타협하려는 마음

내주하는 졍욕의 힘 앞에서 복음의 방법으로 그것을 죽이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명목으로 그것과 은근히 타협하려는 것은 마음속에서 그 죄가 치명적인 수위로 발전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이러한 타협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첫째, 죄로 인한 생각으로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파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런 죄의 속성 외에 다른 좋은 면이 있는지를 찾아보고 그것을 찾게 되면 죄에 대해 관용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가졌던 경험들을 다시 생각하고 기억하며 그것들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이것은 모든 성돌들의 마땅한 의무로서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권고하는 행동이다.  다윗도 이와 같은 일을 했다.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며 마음에 묵상하여’(77:6-9).  이렇게 해서 다윗은 주님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이전의 은혜들을 기억했다.  이와 같은 행위를 바울도 우리에게 권면했다(고후 13:5).  하지만 그와 같은 기억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즉 죄로 고통당하는 양심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한다면 그것은 죄의 계책에 넘어가는 것이다.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죄성이 꾸짖음을 받을 때, 그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용서받고 성령으로 죽이기보다 오히려 전에 가졌던 좋은 경험들을 생각하며 위안을 얻고 하나님이 자신의 목에 놓은 멍에를 회피하는 것은 실로 위험한 행동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상처는 거의 치료가 불가능해진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찔림을 받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때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백성들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합리화했다.  그 결과 온갖 불경스러운 죄악으로 그들은 파멸하게 되었다. 

둘째로 죄를 죽이기 위해 신실하게 노력하는 대신에 죄를 은혜와 자비의 논리로 합리화하는 것도 죄와 타협하는 행위이다.  림몬의 당에서 경배해야 하는 나아만처럼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다른 경우들은 하나님과 동행하겠지만 이 경우만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은밀히 말한다면(왕하 5:15-18), 그는 곧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실로 자비라는 핑계로 죄에 계속 안주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실성에 위배되는 것으로 위선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만드는 셈이다(4). 

이처럼 속에서 죄를 합리화하는 사람은 결국 마음속에서 죄를 은밀히 좋아하게 된다.  그래서 비록 그의 의지는 전적으로 죄를 향해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그것에 기울어져서 조건만 맞으면 쉽게 죄를 짓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사함을 받고 죄를 죽이려 하기보다 그는 다른 방법을 통해 죄의 고통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결국 이런 사람의 상처는 악취를 내고 썩게 되어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   

 

죄의 유혹에 동조하려는 태도

사람의 의지가 죄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동조할 때, 비록 그 죄를 외형상 실제적으로 범하지 않을지라도 죄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셈이 된다.  외형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야고보가 114-15절에서 말한 바처럼 실제로 죄를 짓지는 않지만 사람은 마음속에서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과 성향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죄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정욕에 휘말리는 일을 의도적으로 하든 무심코 하든 그 결과는 동일하다. 무심코 한다는 자체도 어는 정도 선택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계하고 주의할 부분에서 의무를 게을리 하고 무심코 행한다면 그런 무심한 행동은 일부러 하는 행위와 같다.  즉 일부러 의무를 소홀히 하고 부주의한 것이 아닐지라도 부주의 하게 행동하도록 상황을 몰아간 것이기 때문에 그 선택의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죄악은 대부분 무심결에 갑자기 들어와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동조한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그 악이 어느 정도 경감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무심결에 기습적으로 악이 들어오게 된데에는 마음을 지켜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죄와 싸우지 않고 논쟁하는 자세

사람이 죄와 싸워야 할 때 앉아서 죄의 문제와 죄의 심판에 대해 논쟁만 한다면 그것은 죄가 그의 의지를 사로잡은 증거이며, 그의 마음속에는 사악함이 가득 차 있다는 징후이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성도는 복음의 원리에 기초해서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죽음,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죄의 혐오스런 속성을 깨달아 하나님과 동행하며 죄를 죄로 여기고 경멸한다.  그래서 모든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마음속에 정욕과 투쟁한다. 

요셉이 바로 그러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39:9).  이런 맥락에서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또한 그는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라고 말했다.  반면 정욕의 힘에 이끌리는 사람이 복음의 무기가 아닌 율법만으로 정욕과 싸운다면 다시말해 전적으로 율법의 무기인 지옥과 심판을 가지고 죄와 싸운다면 죄가 그의 의지와 감정을 사로잡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새롭게 하는 은혜를 저버린다.  그가 아직 파멸되지 않는 것은 그를 지탱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하지만 은혜에서 멀어지게 된 사람은 결국 율법의 권세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가볍고 온유한 멍에를 팽캐치고 철로 만든 무거운 율법의 멍에 아래로 들어가 정욕의 방탕함을 억제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행위이다.

 

징계의 심판에 대한 무감각

당신이 정욕으로 인한 강퍅함 또는 적어도 징계의 심판을 느끼지 못하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을 때 이것은 죄의 또 다른 위험한 징후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죄나 정욕을 허락해서 그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그들이 가졌던 죄, 태만, 그리고 어리석음을 교정하신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63:17).  의심에 여지없이 하나님은 이와 같은 방법을 중생하지 못한 불신자에게도 사용하신다.

그러면 죄로 인한 찔림이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자신의 마음과 행동 양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죄의 덧에 걸려 괴로워하기 전 당신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당신은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과도하게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  당신에게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지는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옛 죄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공통을 주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전혀 새로운 죄를 짓도록 허락하시기도 한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상태였다면 깨어서 하나님을 구하라.

 

죄를 교정하려는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

죄를 교정하려는 하나님의 방법을 정욕을 통해 방해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죄의 징후이다.  이런 상태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57:17).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교정하기 위해 고통을 주고 유기(遺棄)하는 방법들을 사용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그 모든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하고 오히려 저항했다.  이것은 정말 슬픈일이다.  왜냐하면 18절의 하나님의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통해서만 인간은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셉을 애굽에 판 요셉의 형제들의 경우가 그런 예이다.  이때 당사자는 자신의 죄를 숙고하게 되고 스스로를 판단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말씀하실 때 보통 위험, 고통, 고난, 질병 등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신다.  어떤 때는 사람에게 성경을 읽는 중에 어떤 구절을 동해 마음에 찔림을 주시기도 한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일어서도록 역사하신다.  또한 매우 자주 하나님은 말씀 전파, 죄를 자각케 하는 성찬식, 회심, 그리고 덕을 세워주는 훈계의 방법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신다.  그리고 종종 말씀의 칼을 통해 사람들을 다듬어 가신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심장에 있는 정욕을 향해 직접 칼을 들이대며 죄인들을 놀라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의 죄악을 죽이도록 이끄신다. 

주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면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라고 하신 말씀은 정욕을 죽이는 문제에서도 적용된다.  일상적인 방법으로 죄를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만 죄를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죄와 싸울 때 앞에서 말한 그러한 위험한 징후들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성도라는 증거를 가지기를 원한다면 성도의 속성을 가져야 한다.  이런 속성을 가진 사람만이 비록 성도이지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의 죄 죽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심으로 느껴라  (0) 2018.05.19
사악함을 항상 인식하라  (0) 2018.05.05
죄를 죽이기 위한 기초와 원리  (0) 2018.04.07
죄를 죽이기 위한 3가지 지침  (0) 2018.03.24
죄를 죽인다는 의미  (0) 2018.02.1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3:5).

죄를 죽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성도들이다(3:1).  중생하지 못한 사람도 죄를 죽이는 일을 흉내 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방법대로 그 일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것을 하기에 앞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순서에 따라 먼저 해야 할 다른 의무가 있다.

 

1. 성령을 소유한 자만이 죄를 죽일 수 있다

성령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죄를 죽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차라리 장님이 보고, 벙어리가 말을 하는 것이 성령 없이 죄를 죽이는 일보다 더 쉽다.  사람이 죄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8:9).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분에게 관심을 갖는 자는 성령을 소유한 자이다.  그런 자만이 죄를 죽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 점을 바울은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8). 

타락한 상태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8:9).  즉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성도만이 육신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당신 안에 있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물론 여전히 당신의 몸은 죄로 인해 죽은상태에 놓이게 된다(8:10).  하지만 죄를 죽이는 삶을 계속 수행하게 되어 새로운 속사람이 의를 위해 살아나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 811절에서 이 진리를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연합 교리로 설명한다.  이 연합을 통해 그 분에게 이루어졌던 역사가 우리 안에서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 정욕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망상이다.

 

2. 죄를 죽이는 일은 거듭남과 관련이 있다.

죄를 죽이는 일은 기본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  실로 하나님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처음부터 죄를 죽이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먼저 해야할 일은 회심이다.  즉 전 영혼의 회심이지 특정한 정욕을 죽이는 일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말을 듣고 자신들의 죄를 자각했을 때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2:37).  그래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울부짖었다.  이때 베드로가 그들에게 내린 지침은 무엇이었는가?  베드로는 그들에게 교만, 분노, 악의, 잔인함 등과 같은 죄를 죽이라고 말했는가?  아니다.  그는 죄를 죽이는 일이 지금 당장 그들의 할 일이 아님을 알았다.  대신 배드로는 그들에게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했다(2:38).  그들의 영혼이 먼저 완전히 변화되어 자신들이 찌른 부님을 진정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그들이 낮아져서 죄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요점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 성도가 아닌 사람은 아무리 그럴듯한 노력으로 죄를 죽이려고 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열심과 열정, 그리고 세심함으로 마음과 생각에 대항해서 싸울이지라도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정욕을 허락하신 이유

특정한 정욕이 활개치며 당신을 지배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주의 깊게 동행하지 않는 데서 파생된 결과이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일반적인 의미에서 죄의 정욕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심지어 믿음이 좋은 휼륭한 사람일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진실로 정욕은 교활하고 간교하며 반항하여 사람을 유혹한다.  사람이 정욕의 뿌리이자 근원인 자신의 마음을 부지런히 성찰하고 무엇보다도 생명과 죽음의 원천인 마음을 다스린다면 정욕은 시들해져서 죽게 된다.  하지만 방심하게 되면 정욕은 특정한 방법으로 붙출되어 우리의 감정을 통해 생각 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를 짓도록 유혹한다.

둘째,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정욕을 허락해서 우리의 태만을 징계하시기도 한다.  악인인 경우 하나님은 그들이 짓는 특정한 죄를 징벌하기 위해 다른 죄를 짓도록 하신다(1:26).  즉 조그만한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더 큰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이와 같이 행동하신다.  그래서 믿는 자들의 나쁜 점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목적으로 여러 난처한 상황들을 허락하신다.  바울에게서 사탄의 가시는 그로 하여금 충분한 영적계시를 통해 자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후 12:7).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그의 헛된 자만심을 교정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결론적으로 죄의 정욕의 위력은 이와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정욕의 지배를 잠시 허락하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부주의한 신앙생활을 징계하며 교정하신다.  이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전체적인 삶이 개혁되지 않은 상황에서 특정한 정욕을 죽이려는 인간적 시도는 분명히 잘못된 발상이다.  지금 자신을 괴롭히는 정욕을 철저하게 죽이고자 한다면 모든 부분에서 부지런하게 순중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

일반적으로 죄를 죽이는 사람을 위한 지침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죄를 죽이기 위한 지침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타락한 죄의 습관을 무력화시켜라

사람이 항상 한 가지 정욕만을 추구하지 않은 이유는 그 속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정욕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는 다양한 형태를 띤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자아 만족을 지향한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은 항상 악을 품고 있으며 그들의 정신은 악을 향해 기울여져 있고 육체에게 자양분을 제공한다(3:4).  타락한 죄의 습관은 다른 천성적 습관이나 도덕적인 습관과는 다르다.  특별히 천성적인 습관은 영혼으로 하여금 부드럽게 자신의 원하는 바를 행하도록 유도하는 반면, 죄의 습관은 폭력과 충동을 통해 영혼에게 강요한다는 데서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은 영혼을 거스러 싸운다(벧전 2:11).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인간의 영혼을 포로로 잡는데 성공한다.  즉 폭력과 충동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한 가지 주의할 점을 이야기 하면 모든 정욕이 균등하게 그리고 보편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강요하고 유혹하지만 때로 특정 정욕이 다른 정욕보다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그런 경우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로 어떤 사람에게 있는 특정 정욕이 우연히 계속적으로 활력을 얻고 힘을 얻어 다른 정욕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또한 다른사람에게 발휘되는 것보다 훨씬 그 사람에게 더 큰 활력과 생기를 가지고 영향을 미치는 경우이다.  어떤 정욕이 당사자의 기질과 삶의 방식과 잘 막거나 사탄이 그 정욕의 핸들을 쥐고 조종할 때 그 정욕은 다른 정욕들보다 더 훨씬 그에게 폭력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동일한 정욕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 이상으로 더 격렬하게 그에게 역사한다.  그 결과 정욕의 물줄기는 그 사람의 생각을 어둡게 하고 그가 이전에 가졌던 지식들은 그의 의지에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  대신 타락한 감정과 열정들이 죄로 인해 고삐가 풀린 채로 불출된다.  특별히 정욕은 유혹을 통해 힘을 얻는다.  그래서 적당한 유혹이 정욕과 합세하게 되면 정욕은 새로운 힘과 활력을 얻어 이전과 달리 더욱 폭력적으로 광포하게 날뛰게 된다. 

두 번째는 일반적인 견지에서 어떤 정욕이 다른 정욕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폭력적인 경우가 있다.  바울은 정결하지 못한 음행을 그 밖의 다른 죄들과 구별하여 따로 명시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여기서 음행의 죄는 다른 어떤 죄보다 더 쉽게 분별될 수 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죄도 이것 못지 않게 위력적인 죄의 습관이지만 그런 것들은 음행처럼 사람에게 전인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다.  따라서 죄를 죽이기 위해 첫 번째 할 일은 이런 습관을 약화시키고 죄의 습관이 전처럼 우리에게 강요하거나 소동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 이상 우리를 유혹하고 마음 속에 평화를 빼앗지 못하도록 죄의 활력과 기운을 죽이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행위를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말합니다(5:24).  이것이 바로 죄에게 힘을 공급하는 피와 정신을 차단하는 행동이며 매일매일 우리가 우리의 죽을 몸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이다(고후 4:16).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면 그는 처음에는 고통 속에서 온 힘을 다해 절규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의 피와 정신이 쇠하게 되면 그의 노력은 기운을 잃고 희미해진다.  그리고 그의 울부짖음도 잠잠해져 쉰 소리를 내고 거의 들리지 않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죄를 죽이려고 할 때 죄는 더욱 폭력을 휘두르며 발광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울부짖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죄를 계속 죽이게 되면 죄의 피와 정신은 소진되고 무기력하게 된다.  그래서 울부집음도 거의 들리지 않게 된다.  때때로 죄가 죽어가는 힘을 다해 발악하며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그 죄를 제지한다면 그것은 곧 소멸하게 된다(6:6).

 

2. 죄의 힘을 억제하라

죄가 강력하고 원기왕성하면 우리의 영혼은 죄와 대항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우리 영혼은 다윗처럼 한숨을 쉬고 신음하게 된다.  그리고 죄를 추적해서 물리치려는 의지를 상실하게 된다.  다윗은 시편 4012절에서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불 소도 없다고 고백했다.  실로 그는 죄 앞에서 정말로 무력했다.  이제 죄의 힘과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먼저 사람은 자신이 싸워야 하는 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실로 무엇보다 적을 주목하고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 적을 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사람은 격렬하며 위험한 투쟁이다.  참으로 이것은 영원과 관련된 싸움이다.  사람이 자신의 정욕을 일단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자체는 정욕을 죽이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 행위이다.  이와 같은 행위가 없다면 결코 죄를 죽일 수 없다.  하지만 두렵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적을 잘 알지 못한다.  그 결과 쉽게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자신들이 처해 있는 위험을 모른 채 타인의 충고나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대하 16:10).

둘째, 죄와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죄가 취하는 방법과 계책을 알고 죄에게 유리한 상황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 적과 싸울때에도 마찬가지다.  전쟁터에서 장수는 먼저 싸우기 전에 적군의 전술과 전략을 파악하고 적군이 전에 어떤 방식으로 싸움에서 이겼는지를 연구한다.  이것이 바로 지혜이다.  만약 이런 행동이 없다면 싸움은 엉망이 될 것이다.  정욕과 싸워서 그것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은 행동이 필요하다. 

셋째, 그 다음으로 죄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죄를 향해 필살의 일격을 가할 수 있는 무기들로 자신을 항상 무장해야 한다.  이것이 죄와의 싸움에서 가장 큰 핵심이다.  이렇게 무장한 사람은 죄가 잠잠할 때에도 죄가 죽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죄에 대해 새로운 일격을 가하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예였다(3:5).  만약 당신의 영혼이 이와 같은 자세로 죄와 싸우고 있다면 확실히 당신은 이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셈이다.  그래서 결국 죄는 공격을 받고 죽어가게 될 것이다.

 

3. 죄의 정욕과 싸워 승리하라

정욕과 번번히 싸워 승리하는 모습은 죄를 죽이는 삶의 증거이다.  여기서 승리라는 말은 단순히 죄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패퇴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망가는 죄를 추적해서 완전히 쳐부순다는 뜻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죄가 활동해서 우리를 유혹하고 육체의 정욕을 채우도록 육신적인 생각을 부추길 때, 즉시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깨닫고 그 죄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 앞으로끌어내어 정죄한 다음 끝까지 따라가 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이른 사람은 정욕을 그 원리와 뿌리까지 약화시킬 수 있다.  이상의 것을 종합하면 우리의 타락한 품성을 부추기는 죄를 죽이는 일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죄를 죽이는 사람의 핵심은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도록 강요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든 죄성을 무력화시키는데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와 직접 대항해서 그것을 파괴시키는 은혜의 원리들을 마음의 습관으로 간직하고 그것을 통해 죄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을 겸손의 마음으로 물리치고, 흥분을 인내로, 불결함을 청결한 마음과 양심으로 누그러뜨려야 한다.  또한 세상에 대한 욕구를 천국에 대한 생각으로 무력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은혜의 원리들은 성령의 은혜로서 성령을 통해 역사하는 습관적 은혜이다.

둘째, 성령 또는 우리 속에 새 사람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기미함과 활력을 가지고 죄와 대항해서 기쁘게 싸운다.  그러므로 죄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우리에게 제공된 이러한 자원들을 계속해서 활용하는 일이 두 번째로 중요하다.

셋째는 바로 앞에서 말한 그 두 가지 사실로 인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타락한 성품은 난공불락처럼 극복될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며 보편적인 의미에서 이미 정복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영혼은 죄의 저항을 어느 때보다 더 잘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죄가 나타날지라도 적어도 은혜 언약으로 인해 그 죄는 우리의 양심에 있는 평화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12:4).

죄를 죽이는 일은 죄를 완전히 도말하거나 근절시키고 파괴시켜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힘을 밝휘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죄를 죽이는 삶은 그런 목표를 지향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 목표를 완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진실로 죄를 완전히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마음속에 죄가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것을 억제하는 것뿐이다. 

 

죄를 죽인다는 의미

사람은 죄를 죽여서 더 이상 활동하지 않고 다시는 유혹하지 않도록 영원히 잠잠히 있어 주기를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은혜로 우리는 죄에 대해 괄목할만한 승리를 거두고 엄청난 성공과 함께 죄를 거의 계속해서 죽일 수 있지만, 그것을 완전히 죽이고 제거하는 일은 이 땅의 삶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3:12).  그는 훌륭한 사도였고 성도들의 모범이었으며 믿음과 사랑, 그리고 성령의 열매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연유에서 그는 심지어 다른 성도들과 비교해서 자신을 온전한 사람으로 말하기까지 했다(3:15).  그렇지만 그도 모든 것을 다 이룬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썼던 자였다.  그는 여전히 우리처럼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씻김을 받아야 하는 더러워진 몸을 가진 자였다(3:21).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몸으로 온전치 않는 것이 오히려 유익이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일에 우리를 위해 최선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온전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2:10).

 

죄를 숨기려는 것은 위선이다.

죄를 죽인다는 것이 죄를 감춘다는 의미는 아니다.  외형적으로 죄의 행동을 포기하는 외식자를 보고 우리는 그를 변화된 사람으로 칭송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그는 이전의 죄에다 저주스러운 위선 죄를 덧붙인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전보다 훨씬 지옥의 문에 더 가까워진 셈이다.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거룩한 새로운 마음보다 더욱 교활한 마음이 자리잡게 된다.


차분한 품성이 죄를 죽였다는 증거는 아니다.

죄를 죽인다는 것은 침착하고 고요한 성품을 더욱 함양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들 중에는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다혈질적인 기질이나 참을 수 없는 격정 등이 없이 고요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품을 계속 훈련을 통해 계발하고 단점들을 고쳐 나간다면 비록 그들의 마음속에는 온갖 불경한 것들이 내재해 있을지라도 겉으로는 타인들이 보기에 죄를 극복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또 개중에는 일생동안 화를 거의 내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심지어 그는 한번도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사람보다 오히려 때때로 화를 내는 사람이 죄를 죽이는 삶을 더욱 잘 실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천성적으로 나쁜 기질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마치 그 기질을 죽이기 위해 노력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분명한 외식이다.  이런 사람이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솔직하게 자신 속에 있는 불신, 시기, 또는 그밖에 영적인 죄를 시인해야 할 것이다.   

 

일시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마술사 시몬은 잠시 자신의 일을 청산하고 떠났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탐심과 야심이 계속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것들은 다른 방식으로 분출되고 말았다.  베드로는 그런 그에게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8:23)라고 지적했다.  당신이 아무리 신앙을 고백하고 모든 불의의 행위를 버렸다 할지라도 여전히 당신 마음속에는 이전처럼 정욕이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 정욕의 물줄기를 잠시 딴 곳으로 전환시켰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시 다른 형태로 위력을 발휘하며 나타날 것이다.

사람은 자신 속에 있는 특정한 형태의 정욕을 분별하고 그것의 분출을 막이 위해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그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정욕의 습관에 굴북하게 된다.  그는 퍼져 가는 자신의 상처를 치료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는 동안 타락한 죄의 기질은 그의 육체에서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여러가지 형태로 죄가 전환되어 나타나는 까닭은 은혜에서 떠난 인간의 속성 때문이다.  죄의 전환은 인간의 생활 방식, 관심, 관계, 그리고 계획에 영향을 받아 여러 형태를 취한다.

세월이 가면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신체의 변화도 전환되어 나타나는 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든 사람은 젊었을 때의 졍욕을 가지고 있지만 확실히 그 때처럼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처럼 나이가 들면서 정욕의 형태가 바뀌는 것도 일종의 죄의 전환이다.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세속적인 사람에서 교만한 삶을 살거나, 바리새적인 삶 대신에 외설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자신이 특정한 죄의 형태를 피했다고 다른 모든 죄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는 단지 자신의 주인을 바꾸었을 뿐 여전히 죄의 종이다.

 

순간적으로 죄를 이기는 것에 대하여

때때로 죄를 이겼다고 죄를 죽인 것은 아니다.  사람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죄와 싸우고 그 싸움을 통해 자신이 죄를 이겼다고 쉽게 착각한다.

첫째 상황은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보고 극도의 슬픔을 느끼고 마음의 평화가 깨지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이 그 죄를 인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 염려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가 되면 그는 자신을 일깨우고 죄와 자신에 대해 혐오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 생명을 위해 울부짖는다.  또한 자신의 정욕을 증오하고 그것과 싸우려는 자세를 취한다.  이처럼 사람이 깨어 있을 때 죄는 고개를 숙이고 마치 죽은 것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고린도교회의 죄상을 보면 그들이 처음에 얼마나 일치단결해서 죄를 무너뜨리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후 7:11).  사람도 이와 같다.  정욕이 틈새를 통해 양심에 침범해 죄를 짓도록 만들 때 사람은 죄를 물리치려고 분노와 두려움, 복수심, 그리고 세심함을 가지고 죄와 대항하게 된다.  그러면 죄는 잠시 몸을 낮추어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야단법석이 사라질 때 이 도둑 같은 죄는 다시 살아나서 이전처럼 활동을 개시한다.   

둘째는 재난과 고통의 압박, 그리고 심판을 받는 상황이 올 때 그런 현재의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경우이다.  이 때 당사자는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죄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행동을 한다면 자신이 하나님과 다시 화평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의 분노로 벌을 받는 일을 가장 두려워 한다.  그래서 분노를 피하기 위해 그는 죄와 대항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더 이상 죄가 자신 속에 발을 내딛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더 이상 죄에 자신이 종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이 때 죄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죽은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죄가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 영혼이 죄와 대적하려고 하기 때문에 죄의 도구로 사용되던 그의 기능들이 일시적으로 다시 회복된 것 뿐이다. 

그러므로 앞의 다짐들이 사라지게 되면 죄는 다시 등장하여 이전의 활력을 되찾는다.  시편 7832-37절에서 언급한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확실히 시편78편의 이들은 처음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진실된 마음으로 죄를 죽이려고 했었을 것이다.  이것은 돌이켜라는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기억하라! 

주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죄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처음에 그들은 열심과 성의를 다해 주님께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는 죽지 않았다(78:36-37).  고통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수치스런 모습은 계속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은 거짓됨이 도사리고 있다.  결국 가련한 영혼들은 자신들을 계속적으로 속인다.  그래서 자신들 속에 죄가 강력하게 살아 있고 틈만 나면 자신들을 괴롭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죄의 정욕을 죽였다고 착각한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88:1-2).

우리가 죄를 죽이는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죄를 죽이는 삶은 은혜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결정적 원인은 신분상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죄를 죽이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결과

첫째, 죄는 영혼을 약하게 만들고 그 힘을 빼앗는다.  다윗이 잠시 마음속의 욕정을 이기지 못했을 때 그의 욕정은 그의 뼈를 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영적 힘을 앗아가 버렸다.  그 결과 그는 병들고, 약하고, 상처 입은 나약한 자가 되었음을 고백했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38:3).  내가 피곤하여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38:8).  정욕을 죽이지 못할 때, 그 정욕은 영혼을 삼키고 영혼의 기운을 빼앗아 약하게 만든다.

둘째, 죄는 우리의 마음을 희미하게 하고 무력화시킨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필요한 영적 틀에서 마음을 떼어놓는다.  죄는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사랑을 내쫓고 죄를 짓도록 부추키고(요일 2:15, 3:17), 영혼에게 다른 것을 사모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 영혼은 하나님께 똑바로 진실하게 주님은 나의 기업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셋째, 죄는 영혼의 생각을 죄에 대한 나쁜 생각으로 채운다.  보통 영혼은 생각이라는 통로를 통해 자양분을 얻는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죄를 죽이지 않게 되면 우리의 생각들이 오히려 육체를 위한 공급원이 되어 육체의 정욕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들이 육체를 윤택하게 하고 육체를 만족시킨다.  실로 죄로 인해 우리의 생각들이 더러운 추한 상상력을 위해 사용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죄는 우리로 하여금 경건한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순간에 다른 것을 연구하며 일하거나 이니면 허황된 생각을 갖도록 만든다.

넷째, 죄는 영혼을 어둡게 만든다.  죄는 영혼 위에 드리워져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의 광채를 차단하는 빽빽한 구름이다.  그것은 우리의 양자됨의 특권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영혼들이 위로의 생각들로 자양분을 받으려는 순간 죄는 재빨리 그 생각들을 흩어뜨린다.

 

죄를 죽이기 위해 필요한 희생과 경계

죄를 죽이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서 더욱 번성할 수 있도록 때때로 은혜의 가지를 자른다.  영적인 삶의 생명과 기운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나무가 얼마나 활력을 갖고 번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당신이 정원에 귀중한 화초를 심고 땅을 일구었지만 주위에 있는 잡초를 방치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되면 화초는 여전히 살아 있었도 시들어져서 쓸모었게 된다.  그래서 화초를 감상하려면 그것을 찾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이다.  때때로 그것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을 찾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화초는 아닐 것이다.  이에 반해 같은 종류의 또 다른 화초가 비슷한 토양에 심겨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당신이 주위에 해로운 것들과 잡초를 제거해 주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화초는 확실히 번성하며 자랄 것이다. 

우리 마음에 심겨진 성령의 은혜도 이와 마찬가지다.  사실 성령의 은혜는 죄를 죽이는 의무를 태만히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속 존재한다.  하지만 그 은혜들은 거의 죽은 상태나 다름없다(3:2).  그래서 그것들은 시들어 썩어간다.  그러한 마음 밭은 게으른 농부의 밭처럼 잡초로 무성해서 그 곳에서 좋은 알곡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이런 사람은 믿음, 사랑, 그리고 열심을 자기 속에서 찾아보려고 하지만 그것들을 거의 발견하지 못한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진배없는 은혜들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죄를 죽임으로써 마음 밭을 정결하게 하고 장욕의 잡초들이 생겨날 때마다 계속해서 뿌리를 뽑았다고 하자.  그리고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자라나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되면 속의 은혜들은 각자의 역활을 수행하여 유용한 목적으로 사용받게 된다.  죄를 죽이지 않는다면 신실할 수가 없다.  죄를 죽이는 사람만이 가장 확실한 신실함의 증거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신실함은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커다란 기초가 된다.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영혼이 자아와 격렬하게 싸워야 한다.  그런 싸움에서 신실함이 나오는 것이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11:19).

실제로 죄를 죽이는 일은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다.  성령을 배제한 모든 방법과 수단들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성령만이 이 사역을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원천이다.  성령은 자신의 기뻐하는 뜻대로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죄를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죄를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이 죄를 죽이는 일을 위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완악하고 교만하고 반항하며 불신적인 돌과 같은 마음을 제거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죄를 죽이는 사역에 속한다.  실로 이런 일은 성령에 이해서만 가능하며 다른 방법은 실패한다(11:19, 57:17-18).

둘째, 우리가 죄를 죽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사로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15:5).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은사를 베풀고 그것을 더욱 넘치도록 하며 효율적으로 적용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일을 하신다.  그리스도는 오직 이 성령을 통해서만 성도 안에 들어와 역사하신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 자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그리스도 때문이다( 5:31).

그러면 성도는 죄를 어떻게 이기는가?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죄를 이기도록 우리에게 그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2:33).  Tertullian의 말처럼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들은 성취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여러 군데에서 약속하셨다. 

 

성령이 죄를 어떻게 죽이는가?

첫째,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은혜로 넘치게 하고 육체의 열매에 반하는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게 함으로써 죄를 이기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멸매를 서로 대조시켰다.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는 서로 다른 차원이다(5:19-23).  그런데 이 두 열매가 우리 안에 넘치도록 함께 공존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과연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함께 거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함으로써일어난다는 것이다(5:25).  즉 우리 안에 내주하는 성령의 풍성한 은혜에 따라서 행할 때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같은 곳에서 똑같은 강도로 함께 공존할 수 없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야말로 죄를 이기는 가장 위대한 방법이다.  성령은 육체의 열매들과 우리 속에 거하는 죄의 활동을 무너뜨리고 그것들을 대적하게 하여 주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자라나고 성장하도록 역사하신다. 

둘째, 성령은 실제적인 효력을 발휘하여 죄의 뿌리와 습관을 무력화시키고 파괴하고 제거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은 성령을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이라고 말씀한다(4:4).  성령은 돌 같은 우리 마음을 전능한 능력으로 없애주신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을 하실 때 강도를 점점 높여 실행하신다.  실로 성령은 정욕의 근원을 소멸시키는 불이다.

셋째, 성령은 믿음으로 성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져다 주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분의 고난에 동참케 한다(8:17).

 

죄를 죽이는 것이 오직 성령의 사역이라면 왜 성경은 인간인 우리에게 죄를 죽이라고 권면하는가?  하나님의 성령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전적으로 성령에게 맡기는 것이 옳지 않는가?

첫째, 성령의 사역 방식은 우리 안에 은혜를 주고 그 은혜를 통해 우리로 선행을 하도록 역사하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는 분이다(2:13).  그래서 성경은 성령이 우리의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다고 말씀한다(26:12).  또한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시는 분이시다(살후 1:11, 2:12).  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는 간구의 영이기도 하다(8:26, 12:10).  그러면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그 모든 일을 하라고 권면하신다.

둘째, 성령은 우리 안에서 죄를 이기도록 역사하실 때 죄를 이기는 행위를 여전히 우리의 순종의 행동으로 간주하신다.  성령은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받기에 적합할 때만 우리에게 간섭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역사하신다.  순종을 위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의 지혜, 의지 , 양심, 그리고 감정을 우리의 인품에 따라 사용하신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와 협력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를 꺽지 않는다.  성령이 우리를 도아주시는 방식은 우리에게 용기를 복돋아 주어 태만하지 않고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죄를 이길 수 없다.

실로 여기서 가련한 영혼들이 끊임없이 어리석은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다시 한 번 지적하고 싶다.  죄를 자각하지만 그 죄를 대항할 힘이 없는 이 가련한 영혼들은 죄를 죽이기 위해서 수많은 방법들(맹세, 계율, 금식, 고행)과 의무(전통)들을 지어내어 자신들을 속박으로 얽어맨다.  하지만 그 결과는 헛된 것이기에 결국 하나님의 영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된다.  그들의 싸움은 승리 없는 싸움이며, 평화 없는 전쟁이다.  실로 이들의 삶은 항상 노예와 같다.

율법에 이끌려 살아가는 이들은 결국 죄의 세력에 굴복하고 만다.  때때로 이들은 죄를 이겼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죄의 실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실상 이들은 단순히 죄의 겉 먼지만 털어낼 뿐이다.  두려움, 슬픔, 그리고 고뇌들을 일부러 외면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죄를 죽였다고 믿는다.  하지만 결국 죄를 죽이겠다는 그들의 열기는 곧 식어지고 다시 죄와 대면하게 된다.  이 때 그들이 이미 죽였다고 생각했던 육체의 욕심은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은 채 다시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바울의 말은 사실상 나는 그와 같은 일을 매일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하루도 빠짐없이 한다는 말이다.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고 확신하는 아무리 훌륭한 성도일지라도 항상 자신의 속에 거하는 죄의 힘을 죽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죽여라.  실로 죄를 죽이기 위해 매일 노력하라.  그리고 항상 살아 있는 동안 죄를 이기는 삶을 목표로 삼으라.  만약 죄를 계속 죽이지 않는다면 죄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

 

죄의 활동성

죄는 우리 속에 거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활동하여 육체의 행실을 행하도록 자극한다.  죄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우리도 죄를 방치할 수 있다.  하지만 죄는 겉으로 조용한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매우 활동적이다. 

또한 죄는 우리 속에 거할 뿐만 아니라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의 법과 싸운다(7:23).  그래서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린다’(5:17).  욕심은 우리를 속이고 유혹하는 죄이다(1:14).  욕심은 도덕적으로 항상 선한 것을 방해하고 악한 행동을 유도하며 우리의 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제하는 것을 막는다.

결론적으로 말해 죄는 항상 우리 속에서 활동하며 항상 우리를 속이고 유혹한다.  자신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 속에 거하는 죄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죄는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의 행동을 오염시키려고 발악한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죄가 항상 활동하고 있을 때, 그런 죄를 죽이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패배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죄를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로마서 813절에서 말한 의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죄는 항상 극단을 추구한다.

죄는 항상 극단을 추구한다.  즉 우리를 유혹할 때 그 유혹과 같은 노선에서 가능한 한 더 큰 죄를 짓도록 유혹한다.  그 결과 불결한 생각은 나중에 우상숭배가 되고, 탐심의 욕구는 탄압으로 변하게 된다.  또한 처음에 불신앙적인 생각을 갖게 하고서 나중에 무신론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죄는 우리 마음 속에 정욕을 자극해서 그 경로를 통해 더욱 큰 죄의 최고봉에 오르도록 유도한다.  그것은 마치 무덤과 같아서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죄의 거짓됨이 드러난다.  죄가 승리할 때 인간은 강퍅해져서 파멸하게 된다(3:13).

이처럼 죄는 서서히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 영혼은 마음속에 처음 들어온 죄가 나중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복음이 요구하는 바대로 우리가 아무리 작은 죄라도 분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강퍅해질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죄의 세력은 계속해서 우리를 압박하게 된다.  죄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을 포기하고 대적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죄를 막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죄를 죽이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나 매 시간마다 죄의 뿌리를 마르게 하고 그것의 머리를 쳐서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의무를 우리가 저버린다면 아무리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성도라 할지라도 결국 온갖 종류의 저주스러운 죄에 빠지고 말 것이다.

 

죄를 대적하는 성령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라는 말 다음으로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5:17).  육체가 성령을 거스르는 것처럼 우리 속에 주어진 성령, 또는 새로운 영적성품은 육체를 거스르는 성향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 베드로후서 14-5절에서는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기위해서 우리에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특권을 주셨다고 말씀한다.  그 결과로 우리 속에는 육체 속에 거하는 죄의 법뿐만 아니라 마음의 법이 생기게 된다(7:23).  이 두 개의 법이 서로 싸울 때 마음의 법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그것을 가두고 죄의 법을 자유롭게 활개치도록 내러벼 둔다면 그처럼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영적싸움은 우리의 삶과 영혼이 달려 있는 싸움이다.  매일매일 죄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의 새로운 품성과 성령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적과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훌륭한 자원을 경홀히 여기는 셈이다.  실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많은 것을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뿐만 아니라 은사를 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사용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매일매일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 자비, 지혜, 은혜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정면으로 도전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

 

의무를 소홀히 했을 때

마음속에 주어진 은혜를 잘 간직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성취라는 두 개의 축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 은혜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은혜는 부패해서 썩고 만다.  그리하여 죄가 세력을 얻어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든다(3:2, 3:13).  다시 말한다면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 때 은혜는 시들게 되고 대신 죄의 욕망이 번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마음이 점점 악화된다.  죄를 죽이는 의무를 소홀히 해서 결국 세상적이고 육적이며 차갑고 화를 잘 내며 세상의 사람들과 사물에 동화되어 신앙을 저버리고 무서운 유혹에 빠져드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죄를 죽이려는 노력에는 두 극단이 있다.  한 극단은 굳은 결의로 죄를 이기려는 자세인데 이것은 결국 율법적인 태도로 남의 흠을 잡고 분노와 시기 그리고 악독과 교만함을 낳는다.  또 다른 극단은 자유함과 은혜라는 핑계로 죄를 죽이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죄를 이기는 삶과 관련해서 진정으로 복음적 입장은 양극단을 회피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우리의 모습 속에는 이 중용의 입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우리의 의무

우리의 의무는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거룩을 온전히 이루는 일이다(고후 7:1).  또한 우리는 매일 은혜 안에서 자라나야 하는 의무가 있다(벧전 2:2, 벧후 3:18).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우리의 속사람은 새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후 4:16).  하지만 이와 같은 의무들은 매일 죄를 죽이지 않고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죄는 거룩한 모든 행동을 방해하고 성도의 성장을 막기 위해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다.

죄의 소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거룩함에서 진보를 이룰 수 없다.  죄의 공세를 느끼지 못하고 죄를 이기기 위해 자신을 자제하지 않은 사람은 죄에 대해 죽었다기보다는 죄와 타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모든 죄를 죽일 수 있고, 처음 회심해서 죄의 자각과 수치심을 느끼고 죄와 대항하는 새로운 원리를 마음속에 심어 죄를 이기는 보편적인 삶의 토대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성도의 마음속에는 죄가 거하며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매일매일 끊임없이 죄를 억제하고 극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오늘날 자칭  신앙인이라고 공헌하는 일반 사람들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이들의 삶을 보면 죄를 죽이는 자세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실로 이 세대의 사람들은 광명의 빛을 받았고 그것과 함께 영적인 은사들을 얻었다.  따라서 다른 여러 가지 원인들과 결합해서 오늘날에는 신앙을 공개적으로 공표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종교와 종교적 의무에 관한 이야기들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이전처럼 경박하고 텅 빈 헛된 설교가 아닌 영적은사를 쏟아내는 설교들을 많이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세대의 빛을 통해 회심을 했고 이전보다 영성에 대해 더욱 많은 말을 하며 주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을 공표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거의가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는다.  오히려 헛된 시간낭비, 게으름, 비생산적인 자세, 시기, 싸움, 알력, 경쟁, 분노, 교만, 세속적인 생각, 이기심 등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지표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자신도 그와 같은 죄의 요소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을 구원하는 빛을 소요한 사람들이 이 지경이라면, 종교심은 있지만 복음의 빛을 경멸하며 죄를 죽여야 할 성도의 의무를 단순히 외형적 오락에서 스스로를 자제하는 행위 정도로 축소시키는 사람들의 경우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선하신 주님은 이런 우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죄를 이기는 성령을 보내주신다.  죄를 죽이지 않는 신앙인들에게서 다음 두 가지 악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당사자 자신에게 있는 것이고, 다음은 타인과 관련된 것이다.

 

1) 자신에게 있는 악    

일반적으로 죄를 죽이지 못하는 원인은 마음속에서 죄의 쓴 맛을 음미하지 않고 그 죄를 그대로 삼키기 때문이다.  은혜와 자비에 대한 생각에 자신의 상상력을 고정시켜 일상적인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통 없이 그대로 소화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음탕한 것으로 바꾸고 죄의 속임수로 인해 그 마음이 강퍅해지게 된다. 

신앙을 공헌했지만 결국 배교를 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와 같은 경로로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한때 그들은 죄를 자각하고 그 자각속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자신들의 자각을 사람들에게 공표도 했다.  실로 그들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벧후 2:20).  하지만 복음의 교리를 알았지만 자신들이 왜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그 원리를 알지 못한 탓에 은혜의 교리로부터 도태되어 의무를 소홀히 하는 모습으로 전략하게 되었다.

 

2) 타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악

죄를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도 선한 상태에 있다는 잘못된 선입관을 갖고 자신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죄를 이기려는 노력이 없는 신앙인의 내부는 모두 오염되고 무가치한 것이다.  이런 자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면 종교에 열심은 가질 수 있지만 그 열심에 인내와 보편적인 의가 함께 동반되지 못한다. 

죄를 죽이지 않는 사람들은 방탕함을 부인하지만 실제로 매우 세속적이다.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면서 전적으로 자신들만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랑의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또한 그들의 말은 영적이자만 실제의 삶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언급하지만 철저하게 세상과 영압한 삶을 운위한다.  죄로부터 용서받은 사실을 자랑할 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중적 언행을 통해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죄를 죽이지 못한 신앙인들은 타인들에게 그들도 자신들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어 그들을 속인다.  그래서 이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외형적으로 더 높은 경지에 이른다 할지라도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3).

로마서 8장 서두(1-3)에서 사도 바울은 이신칭의의 교리와 그 은혜에 참여한 자들의 축복을 재요약해서 말한 후, 같은 장에서 그것을 더욱 확대 설명하면서 성도들이 갖는 거룩과 위로에 초점을 맞춘다.  거룩을 위한 바른 동기들을 주장할 때, 바울은 죄의 반대편 관점에서 그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여기서 육신대로 살면이라는 말과 죽는다라는 말은 확실히 성도가 추구해서는 안되는 삶을 가리킨다.  죽음은 육적인 동시에 영적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13절 하반절의 말씀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13절의 후반부를 분석하면 첫째, 우리가 행해야 할 의무에 대해 먼저 말한다.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의 자격 조건을 언급한다.  구체적으로 여기서는 너희들이다.  셋째로 이 구절은 그 의무를 수행할 때 어떤 약속이 따르는지를 보여준다.  한 마디로 그렇게 되면 산다는 약속이다.  넷째로 이 의무 수행의 원천과 수단은 성령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영으로써라는 말을 언급한다.  다섯째로 이 하반절에서 제시되는 명제는 모두 조건부라는 점이다.

 

그러나 만약

13절 하반절에서 조건부로 제시된 명제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말은 그러나 만약이라는 문구이다.  일반적으로 조건부 명제에서 나오는 조건들은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약속의 조건으로 제시된 의무를 수행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의무를 수행하여 약속을 받는 일은 매우 불확실하다.  그가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의무 조항을 절대적으로 충족시키야 하는데, 실상 그에게는 그런 의무를 충족을 확실히 보장해 줄 수 있는 원천이나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서 813절에서 제시된 조건적 표현은 다르다.  이미 81절에서 바울은 13절의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사람들로 묘사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확실히 그 의무를 충족시켜 약속을 성취한 자들이다.

둘째, 일반적으로 조건으로 제시된 의무와 약속 사이에는 논리적 응집력이 있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몸의 행실을 죽이는의무와 산다는 약속 사이에 확실한 관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죄를 죽이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하면서(6:23), 영생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의 관계는 수단과 목적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자유롭게 약속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미리 정하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13절 하반적의 조건적 명제에서 제시하는 바는 죄를 죽이는 것과 영생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연관 관계가 있다.”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런 수단을 사용한다면 그 목적을 선물로 얻게 된다.  다시 말해 죄를 죽이면당신은 살게 된다는 논리이다.  13절에서 제시된 의무에는 바로 이런 동기가 효력이 있다.

 

너희가

그 다음으로 이 조건적 명제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점은 그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당사자들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당사자들은 너희가 죽이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성도들을 가리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1) 사람들로서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5),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살려진자들이다(10-11).  바울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의무를 규정했다.  이 의무를 성도가 아닌 사람들이 억지로 수행한다면 그 결과는 이 세상에서 만연된 미신과 자기 의로 귀착될 것이다.  즉 복음을 외면하고 경건하려는 사람들의 인간적 업적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10:3-4, 15:5).  결국 죄의 지배에서 자신이 해방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아무리 훌륭한 성도일지라도 그는 마음 속에 거하는 죄의 힘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으로써

이 의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원천은 성령이다.  영으로써  여기서 영은 바로 11절에 언급한 영인 그리스도의 영’,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다(9).  이 영을 통해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이다(11).  또한 이 영은 양자의 영으로(15)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는 영이다(26).  성령 외에 다른 방법으로 죄를 죽이는 것은 헛된 일이다.  다른 모든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이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그 의무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스스로 고안한 방법을 가지고 자신의  힘으로 죄를 죽이고자 하는 노력은 세상의 모든 거짓된 종교의 본질이며 그것의 결국은 자기의 의이다.

 

몸의 행실을 죽이는

여기서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몸의 행실이라는 뜻은 무엇인가?  또한 그 행실들을 죽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첫째, 13절 하반적에서 나오는 이라는 단어는 상반적에 있는 육신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따라서 몸은 우리의 타락한 품성과 관련해서 우리 속에 그것이 자리 잡고 있는 좌소이며 도구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몸의 지체는 불의를 섬기는 종들이라고 할 수 있다(6:19).  결국 몸이 의미하는 바는 타락한 육체 또는 정욕으로서 우리 속에 거하는 죄의 속성이다.

둘째, 몸의 행실, 여기서 행실은 외적인 행동으로 갈라디아서 519절에서 현저하다고 명명한 육체의 일이다.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이 행실은 또한 인간 속에 거하는 내적인 원인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로마서 7장과 8장의 초두에서 인간 속에 거하는 죄의 정욕을 모든 죄의 행동의 토대이자 원리라고 지적한 후, 813절에 와서 죄로 인한 결과라는 측면에서 그 파괴력을 언급했다.  여기서 몸의 행실은 육신의 생각(8:6)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의 행실은 육체의 열매와 행동의 원천이 되는 ‘’육체의 정과 욕심과 동일한 의미이다(5:24).  이 몸에 대해 로마서 810절은 그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셋째, ‘죽인다  이 비유적 표현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음의 상태로 놓는다는 뜻을 함축한다.  사람이나 생물체를 죽인다는 것은 그 힘과 활력의 원리들을 제거해서 더 이상 행동하거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죽인다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바울은 우리 속에 거하는 죄를 살아 있는 인격체인 옛 사람으로 비유한다.  그 옛 사람은 자신만의 기능, 자질, 지혜, 통찰력, 힘을 가지고 있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이 옛 사람을 죽여서, 즉 죽음의 상태로 놓아서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옛 사람을 완전히 죽이고 극복한 모범적인 예이다. 

그 결과 비록 우리 마음속에 부활에 반대하는 파괴적인 소욕들이 여전히 공존하지만(5:17), 성도인 우리는 이제 주님의 부활에 처음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6:3-5).  이 부활의 완성은 점진적으로 우리의 일생을 통해 성취되어 간다.

 

살리니

이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약속이 주어진다.  이 약속된 생명은 앞의 상반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는 말에서 언급된 죽음의 위협과 대조를 이룬다.  바울은 이 죽음의 위협을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것을 거두고’(6:8).  여기서 썩어진 것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멸망의 심판을 뜻한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38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 살리라고 말한 것처럼 이제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우리는 삶 속에서 기쁨과 위안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한 마디로 너희가 살리니라는 말은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선하고 활력 있는 안락한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저 세상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육신의 행실을 죽일 때 우리는 영적 삶의 활력, , 그리고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