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우리 영혼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고는 우리의 폐부를 관통하기 때문에 그 음성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 평안하다고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실로 스스로 평안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해서 자신을 높이는 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의 위대한 특권이자 주권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 사람에게 은혜를 주는 것은 그분의 위대한 특권이자 주권이다(9:16).  마찬가지로 그렇게 부름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또한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평화를 말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베푸는 정도도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성도들을 대할 때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위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선한 은혜 중에 하나이다.  이 은혜를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뜻에 따라 자녀들에게 베푸신다.  성경에서 주님은 이것을 자신의 특권이라고 주장하셨다(57:16-18).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유대의 상처와 위로받지 않은 상태를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전적인 특권임을 다음과 같은 말로 암시하였다.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57:19).  이 말의 의미는 상처받은 피조물에게 하나님이 찬양의 입술을 창조하시고 그분의 주권에 따라 그것을 이루어 주신다는 뜻이다.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일반은총의 경우도 하나님은 자신의 방법으로 역사하시며 그 과정도 외형상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은혜의 상태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특별 은총인 평화와 기쁨을 주실 때에도 마찬가지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특별 은총을 베푸는 것이다.

 

평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특권이기도 하다.

성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따라 평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것처럼 성자이신 그리스도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평화를 말할 수있는 특권이 있다.  라오디아교회가 스스로 자신의 상처들을 거짓되게 치료하고 자신들에게 평화를 말할 때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아멘이며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셨다(3:14). 

실로 주님은 우리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증거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실수하고 헛되게 수고할 수 있다.  또한 거짓된 이유로 스스로 우쭐할 수 있다.  하지만 주님은 아멘이시며 신실한 증인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황과 상태에 대해 그분이 하신 말씀은 실로 참되고 신실하다.  주님은 우리처럼 눈에 보이는 외모로 판단하시는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모든 원인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판단하신다(11:3).

당신이 이상의 두 가지 점을 주목했다면, 이제 우리의 평화가 스스로 지어낸 평화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평화인지를 분별해 주는 몇 가지 규칙들을 소개하겠다.     

 

평화를 분별하는 몇 가지 규칙

규칙 1. 자신의 죄를 증오하지 않는다면 결코 참된 평화는 오지 않는다.

확실히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평화를 말한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죄를 가증이 여기지도 않고 그렇게 하는 자신을 혐오하지도 않는다.  죄로 인해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며 당혹해 할 때, 보통 우리는 그 죄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언약의 약속을 의지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확실한 은혜를 주실 것이며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마음의 동요를 가라 앉힌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여전히 우리가 우리를 괴롭히는 죄를 증오하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에 의해 치유받기보다는 스스로를 치료하는 셈이 된다.  이런 인간적 치유는 엘리야가 경험했던 것과 같이 크고 강항 바람이기는 하지만 그 곳에는 하나님이 없는 바람이다.  이에 반해 치유와 평화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님을 찔렀다는 사실을 알고 애통하게 된다(12:10).   심지어 그분을 위해서 애통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분에게 상처를 준 자신들의 죄를 증오하게 된다.  

 

규칙 2. 자신의 신념과 원리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평화를 선언한다면 그것은 거짓 평화이다.

죄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그 죄 때문에 마음에 가책을 느낀다.  복음에 합당하게 올바로 살지 않았다는 자책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신의 영혼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았음을 자각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심사숙고 한다.  그때 그는 빛 속에서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전에 어떻게 치료를 받았는지도 생각해 낸다.  하나님의 약속들만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약임을 알고, 그는 그 약속들을 의지하며 좇아간다.

인생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생계를 유지하는 삶, 감정적인 삶, 그리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삶이다.  오로지 생계만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정적인 사람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감정적인 삶에도 생계를 유지의 삶이 필수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사람도 앞의 두 유형의 삶을 전제 한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이성의 원리 뿐만 아니라 앞에서 말한 나머지 두 종류의 삶의 원리도 따르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는 점점 자라나면서 분별력을 갖게 된다.

이런 이치는 하나님의 세계와 관련해서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이성을 가진 자연인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깨달음 속에서 마음에 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더 나아가 진실로 거듭난 성도들도 있다.  진실로 중생한 사람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유형의 모습을 모두 공유한다.  그 결과 그는 때때로 이성적 원리에서 그리고 깨달음을 가지고 행동한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영적 삶은 감정의 원리에 지배 받지 않는다.  그는 결코 감정에 죄우되는 법이 없으며 그의 열매는 그런 뿌리와는 상관이 없다.

스스로 평강을 말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서 악을 제거할 수 없다.  그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더욱 뒷걸음치도록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치유함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의 죄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죄와의 싸움만 격렬해진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배제한 채, 스스로 자신의 영혼에게 평강을 말한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행동은 수일 못가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즉 새로운 상처를 받게되어 다시 씨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평강의 말씀을 들은 영혼은 더 이상 완악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소유하게 된다.  또한 그 의지만큼 그의 영혼은 감미로운을 맛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규칙 3. 자신에게 평안을 말하는 것은 경박한 행동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당시의 지도자들의 그런 행동을 크게 비판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6:16).  실로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들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가볍게 생각한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흘긋 보기만 하면 치유가 된다고 여기고 그것이 전부인 양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하기때문에(4:2),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익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듣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비의 말씀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씀이 믿음 안으로 융화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 말씀을 영혼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다.  한때 양심의 상처로 불암감 속에서서 비틀거렸던 당신이 자유함을 얻었다고 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그 자유함을 어떻게 얻었는지 묻고 싶다.  이 물음에 당신은 나는 사죄와 치유의 약속을 보고 평강을 발견했습니다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성급하게 매우 피상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실로 당신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효과를 온 영혼에 퍼지지 못하도록 훼방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당신의 처신은 매우 경박한 행동이다.  따라서 당신의 상처는 멀지 않아 재발할 것이며, 당신은 치유받지 않은 자신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규칙 4. 죄를 해결하지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의 평화는 거짓 평화이다. 

무슨 이유든 간에 스스로에게 평강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에 있는 심각한 악의 문제를 하나님을 의지하며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말하는 평강은 실제로는 공허한 것이다.  이 의미를 좀 더 설명하겠다.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어떤 사람이 반복해서 태만히 한다면 나중에 그의 양심은 당혹감을 느끼고 그의 영혼은 상처를 받게 된다.  또한 그의 죄로 인해 그의 뼈를 쑤시는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약을 바르고 평강을 찾는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결국 성령을 근심시키는 세속적 생각과 교만 또는 다른 어리석은 생각들이 그의 마음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된다.  그래서 그는 죄로 인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죄와 싸우려 하지도 않게 된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의 영혼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을 똑같이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죄에 있는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우리 속에 있는 극히 작은 죄라도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눈은 매우 정결해서 그 앞에서는 부정이 설 수가 없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하나님이 가장 괴로워 하는 부분은 우리의 불신앙적인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강력한 위로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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