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18.07.31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2. 2018.07.28 깨닫고 겸손하라
  3. 2018.07.27 그리스도의 ‘사역의 전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4. 2018.07.26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징조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5. 2018.07.25 큐티 어떻게 할 것인가?
  6. 2018.07.24 양성 교리가 확정되기 이전 이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
  7. 2018.07.21 기도생활에 유익한 방언
  8. 2018.07.20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특성들의 전달’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경우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9. 2018.07.19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 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인가?
  10. 2018.07.18 기름부으심
  11. 2018.07.17 그리스도의 양성은 교리적으로 왜 중요한가?
  12. 2018.07.14 결사적으로 대항하라
  13. 2018.07.13 그리스도의 ‘특성들의 전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4. 2018.07.12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재림의 날과 때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마 24:36).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전지하신 하나님이란 사실과 모순되는 주장이 아닌가?
  15. 2018.07.11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16. 2018.07.10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란 사실은 칼케돈 회의에서 확정되었는가?
  17. 2018.07.07 성화란?
  18. 2018.07.06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상호 결합하여 발생하는 ‘삼중 전달’이란 무엇인가?
  19. 2018.07.05 성도들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는데 재림의 시기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20. 2018.07.04 정서적 균형을 유지하기
  21. 2018.07.03 칼케돈 공회에서 확정된 양성 교리의 내용은 어떠한가?

가장 큰 이유는 오직 성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란 편협한 견해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다만 세례를 받을 때(1:9), 성령이 강림하여 메시야의 자격을 얻게 되었고, 그때야 비로소 신과 같은 탁월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예수는 태초부터 계셨으며(1:2), 천지를 창조하신 제2위 하나님이시나(1:3), 인간 구원을 위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1:18-21), 이 땅에 오셨다는(2:14), 성경의 일관된 주장에 어긋나는 이단이므로 마땅히 배격되어야 합니다(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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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사악함을 깨닫고 겸손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다음과 같은 사실을 묵상하라.

 

하나님의 탁월한 위엄을 묵상하라

하나님의 탁월한 위엄을 묵상하면서 그것에 비해 너무나 동떨어진 당신의 초라한 모습을 생각하라.  이와 같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자신의 사악함을 깨닫고 되고 속에 거하는 죄의 뿌리를 잘라낼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탁월하심을 마침내 목도하게 되었을 때 수치심 속에서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42:5-6).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중에 깨달았던 하박국 선지자는 어떠했는가?  하박국 316절을 보라.

성경은 사람의 비천한 상태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과 비교하여 이 땅의 인간들을 메뚜기’, ‘헛된 것또는 띠끌로 비유했다(40:13-15).  마음의 교만을 제거하고 영혼을 겸손케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비천함을 많이 생각하라.  죄의 속임수에 항거할 때 이와 같은 생각만큼 큰 힘을 발휘하는 것도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위대함을 깊이 묵상하라.   

 

자신의 지식이 미천함을 묵상하라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지식이 미천하다는 사실을 많이 생각하라.  비록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할 정도의 지식은 있다고 할지라고 그분에 대한 당신의 지식을 정말로 초라한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와 같은 성찰을 통해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30:2-4).  이와 같은 성찰을 함으로써 교만한 마음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라.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정말로 당신의 지식을 빈약하기 짝이 없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계속적으로 경외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가장 최고의 업적을 성취하며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교제를 나눈 위인들일지라도 그들이 세상에서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매우 보잘것 없었음을 숙고하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셨고, 언약을 통해 자신의 가장 영광스러운 속성들을 계시하였다.  그럼에도 모세가 본 것은 모두 하나님의 뒷 모습에 불과했다(34:5-6).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모세의 지식은 그분의 온전한 영광과 비교하면 매우 미소한 것이다.  우리가 하루 종일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그분과 그분의 일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실로 그분에 대해 아는 것은 매우 적다.  그분에 대해 우리의 생각과 묵상 그리고 표현들은 천박해서 그분의 온전함에 크게 못 미치기 때문에 그분의 영광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바울은 율법의 영광에 비교해서 복음의 빛의 영광을 높이 칭송하고, 지금 어두움을 일으켰던 수건이 사라져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수건 벗은 얼굴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 같이그분을 본다고 말했다(고후 3:18).  거울을 보는 것 같이 본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온전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본다는 뜻인가?  분명히 그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여기서 거울은 우리가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망원경이 아니다.  이 거울은 사물을 뚜렸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 없다.

그러므로 이 거울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물에 대해 여전히 부족한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높은 업적을 쌓아 스스로 자부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은  그분의 무한한 온전하심에 비해 비추어 보면 정말로 유치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장 정확한 개념들 조차도 대부분 매우 불안전한 것이다.  그럼에도 고난 중에 우리가 힘을 얻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 때문이다(요일 3:2).     

 

하나님의 무한하신 속성을 묵상하라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리지어다’(딤전 6:16).  하나님께 접근하여 그분을 볼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둠이 조금도 없는 하나님의 빛은 피조물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다.  빛나는 태양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너무나도 연약한 우리가 어떻게 무한한 광명의 빛을 볼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런 연유에서 잠언의 지혜자는 자신을 짐승이라고 고백했고 자신에게 사람의 총명이 없음을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일반 사물에 대한 표현 방식대로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개념을 형상화한다면 결국 우상을 만드는 꼴이 되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기보다 우리 자신이 만든 하나님을 숭배하는 셈이 된다.  마음속에서 우리의 이해에 걸맞는 존재로 하나님을 형상화 하는 것은 나무와 돌로 하나님을 맏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때 최선책은 그분의 존재에 대해 우리가 아무런 생각도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들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 광대하심, 무한하심 그리고 그분의 영원성에 대해 토론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말과 개념들을 가지고 이야기할 뿐이며 우리가 실제로 그것들을 아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것을 이해하려 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의 마음은 무한한 심연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기에는 우리의 이해력이 너무나 조잡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온전한 지혜의 모습이다.

같은 본질 속에서 세 개의 다른 인격이 존재하는 삼위일체교리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진리는 아무도 이해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부인해 왔던 신비였다.  실로 그말 하나하나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다.  성자 하나님의 나심(generation), 성령의 나오심(procession) 그리고 그 둘 간의 차이를 누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 말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식은 그분의 존재 상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즉 그분의 본질적인 선하신 속성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신 선하심을 통해서 그분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식도 욥이 말한 것처럼 매우 보잘 것이 없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과 그분의 경륜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뿐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그분을 알고 그분에게서 상을 받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믿음은 우리가 믿는 바를 잘못 형상화하고 표현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11:1).  우리의 믿음은 전도를 통해 우리가 보지 못한 주님을 증거받을 때 일어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믿음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주님에 대한 증거의 말씀을 통해 생겨난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알게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며, 믿고 순종하면서, 죄를 용서하는 창조자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영광과 존귀를 돌리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지식만큼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으로 철저하게 변화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은사들을 제대로 사용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신뢰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 자신에 속한 영혼들에게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모든 필요한 방법을 동원해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순종해야 할지를 가르치신다.  그리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품안으로 인도하고 나중에 천국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영원까지 살 수 있게 하신다.  하지만 여전히 다음과 같은 한계가 있다.  그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매우 적다.  우리는 그분의 뒷 모습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의 계시는 단순히 믿음, 사랑, 순종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계시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계시의 목적은 유혹 가운데 있는 가련한 인생들에게 합당한 믿음과 사역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지식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천국에서 영원히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할 때는 하나님이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을 보여주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 모든 것들은 그림자처럼 사라질 것이다.   

둘째, 우리의 마음은 우둔하고 더뎌서 계시된 말씀 안에 있는 실체들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드시고, 그분의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 영혼들에게 이 세상에서 모든 지식을 깨닫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복음의 계시 방법이 명확하고 분명하지만 그 계시를 통해 갖는 우리의 지식은 매우 연약할 수 밖에 없다. 

확실히 하나님의 형용할 수 없는 위대하심과 그분과 우리 사이에 있는 엄청난 괴리감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그분에 대해 거룩하고 두려운 경외심으로 채워져 모든 정욕과 맞서 싸울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소부재하심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항상 잃지 말라.  또한 하나님을 묵상하라.  실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당신의 비천함을 알고 당신의 천성이 그분의 본질적인 영광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왜소하다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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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전달은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신성과 인성을 가짐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된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이것은 신성과 인성을 가진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을 화해시키는 중보자로서 신적 사역과 인간적 사역을 동시에 수행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신성) 천국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칠 수 있었으며, 또한 인간으로서(인성) 죄를 담당하고 죽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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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여러 가지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를 말함으로써 재림을 준비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징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는 것입니다(24:14).  즉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성도가 될 기회를 가진 후에야 그리스도 재림이 이루어집니다(11:25).  둘째,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 후에야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집니다(11:25-26).  셋째, 진리를 거스르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며(24:11, 24), 자칭 구주라는 거짓 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24:5, 23).  넷째,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딤후 3:4), 경건의 모양이 있으나 그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 생겨나고(딤후 3:5), 참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게 됩니다(18:8).  다섯째, 기근과 전쟁과 지진(24:6-8), 같은 자연 재해가 자주 일어나게 됩니다.  이상과 같은 징조가 있을 때,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줄 알며 더욱 경성하며 그날을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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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큐티는 개인성경연구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훈련생의 영성 유지와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훈련 기간 중 꾸준한 큐티 습관을 익히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럼 큐티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시간과 장소를 정하십시오.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를 위한 특별한 법칙은 없습니다.  다만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에 따라 집중하기 좋은 시간과 장소가 다르므로, 각자의 상황에 맞게 정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특별히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방해 받기 쉬운 시간과 장소를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큐티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면, 가족에게 미리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큐티 중일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이 알도록 하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예를 들면 방문 앞에 큐티 중이라고 메모를 붙여 놓을 수도 있습니다.

 

2. 본문을 정하십시오.

큐티를 시작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본문을 어떻게 정할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정하는 방법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훈련 받기 전부터 꾸준히 큐티를 해 온 훈련생이라면 자신이 해오던 본문을 꾸준히 하는 것도 좋지만 만약 이전에 큐티를 해 보신 경험이 없으신 분들이라면 성경읽기 과제로 나가는 본문 중 한 본문을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훈련이 시작되면 매주 제출해야 하는 과제물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읽기와 매일 하는 큐티, 주별로 제출해야 하는 D형 큐티 본문이 다 다르다면 너무 분산되어 큐티의 효과가 반감될 수 있습니다.

 

3. 큐티의 방법을 명확히 하십시오.

훈련생이라면 제자훈련 13과에서 큐티의 4가지 영역과 4가지 종류의 큐티 법에 대해 배웠을 것입니다.  큐티의 방법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을 경우, 큐티가 느낌 위주로 흐를 가능성이 커, 큐티가 주는 유익은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이 부분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다면 다시 한 번 큐티의 4가지 영역과 종류가 어떻게 다른지 충분히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큐티의 4가지 영역은 개인 성경연구와 소그룹 성경연구의 가장 기초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에 큐티의 방법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하는 큐티는 A형 큐티로 하고, D형 큐티는 한 주에 한 번만 하는 것이 좋습니다.  D형 큐티는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매일 D형 큐티를 하는 것은 다른 훈련의 요소에 장애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자칫 하면 D형 큐티가 A형 큐티가 될 우려가 있습니다.

 

4. 삶의 변화를 주목하십시오.

큐티를 하면서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는 큐티가 큐티로 끝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묵상이 묵상에서만 멈추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진정한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오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큐티가 삶의 변화로 이어지도록 하는 방법 중 하나는 소감을 적어 보는 것입니다.  큐티를 통해 삶의 적용 점을 찾았다면 이를 실천한 후 소감을 적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소감을 적다 보면 왜 삶에 적용이 되지 않는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적용 자체가 구체적으로 될 수 있도록 돕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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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유형별로 나누어보면 첫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부정하는 견해가 있었습니다(에비온파, 알로기파).  둘째, 그리스도께서 인간이심을 부정하는 견해가 있었습니다(영지주의, 사벨리안파).  셋째,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신성은 절대적 신성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었습니다(아리안파).  넷째,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인성은 완전한 인성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었습니다(아폴리나리안파).  다섯째,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지니셨으나 이러한 양성이 단일 인격을 이루지는 않았다는 견해가 있습니다(네스토리안파).  여섯째,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구별되어 존재함을 부정하고 심지어 인성을 흡수하여 제3성을 이루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유티키안파).  이러한 여러 견해는 모두 잘못된 것으로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배척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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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아일랜드 Kalapana 지역에 있는 Lava를 보기 위해 6개월 전부터 인터넷 자료와 여행자 후기를 보면서 준비를 했습니다.  용암을 보는 방법은 세 가지인데, 하나는 헬리콥터를  타고, 다른 하나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또 다른 하나는 왕복 8마일을 걷지만 차를 몰고 가서 보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용암이 눈 앞에서 흐르는 것을 직접 보고 싶어 차로 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1 gate에서 차를 주차하고 자전거를 빌리거나 아니면 셔틀 버스로 이동하지만, 저희는 시간을 단축하고 걸어가는 것을 줄이기 위해 인터넷에서 구글링하는 가운데 그곳에 사는 원주민과 연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후 330분쯤 도착하여 1Gate를 거쳐 2Gate를 지나 약속한 원주민 사유지에 짚차를 주차하고 10분 정도 걸어 3Gate에서부터 Lava 하이킹을 시작했습니다.  용암이 흐르는 곳까지 걸어서 2시간, 그곳에 도착해서 1시간 정도 구경하고 다시 돌아오는 데만 3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전날 우리가 가려던 곳에서 어느 한 사람이 유황가스에 질식되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뉴스에 아랑곳 하지 않고 용암으로 굳은 땅을 걸으면서 그곳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와 유황 냄새, 그리고 바로 1미터 앞에서 흘러 내리는 시뻘건 용암을 눈으로 직접 볼 때 현장에서 느끼는 경험은 인터넷을 통해 지식적으로 알았던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솔직히 이런 예화를 드는 것은 방언 하지 않는 목사나 신학자가 방언에 대해 많이 아는 것처럼 입을 가볍게 나불거리는 것은 한 마디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939 Sweden 수도 Stockholm에서 열렸던 The European Pentecostal Conference에서 매우 획기적이고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길 방언성령의 사역과 별도로 일어날 있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말의 의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방언의 표적이 없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아직도 방언을 성령세례의 육체적인 증거 보고 있는 반면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에 대해 다소 유연한 입장, 성령세례를 받을 방언을 수도 있고 수도 있지만 방언은 여전히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하며 성령충만한 삶의 일상적인 부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 그리고 은사주의 갱신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 특히 메마른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학으로 물든 사람들 중에는 오늘날의 방언은 귀신에게 미혹되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소리를 옹알거린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은사들은 초대교회 사도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사악한 궤변을 늘어 놓기도 합니다.  사실 방언이 추잡하고 거짓된 소리 현상이라고 부정하거나 무엇보다도 방언하는 사람은 미혹을 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을 가졌다고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16:20), 말씀을 전해도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죽은 말씀만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4:12).

 

사실 방언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입만 열면 얄팍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공격을 하는데, 이런 무경험자들은 Lloyd Jones가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서 한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해야만 하며 그 중에 한 가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방언을 고려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이 소책자와 논문집을 발간했는데, 그들 중에 한 저자가 오늘날 모든 방언은 마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그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 매우 주의해야 하며 이 문제에 대해 개방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그런즉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강조하기를우리가 어떤 사건의 보고를 들을 때면 이를 무시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고성령의 주권 가운데 그분은 어느 시대라도 이 은사들 중에 어떤 것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방되어 있어야 하고 또한 신중하고 주의 깊게 범사에 헤아려 오직 좋은 것을 취하여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 방언보다 더 오용되기 쉬운 은사는 없는데(고전 14:16-17), 만일 교회 내에서 지혜롭게 관리만 잘한다면(고전 14:27),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에 방언을 금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고전 14:39).  한마디로 지옥의 자식 바리새인처럼 성령을 대적하지 말아야 하고(12:22-36), 그렇다고  무작정 모든 것을 수용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살전 5:21).

 

그리고 방언을 타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인옹알거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은사를 주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고전 12:11), 대단한 모욕이라고 생각하고( 12:10), 떡을 달라는 자녀에게 뱀을 줄 아버지가 없듯이( 7:9-11), 신자들 중에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그분께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11:13).  비록 그리스도인들 중에 고린도 교인들처럼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고전 3:3)에 성령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할 때(고전 12:11),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눈에 거슬리게 행동할 수도 있겠지만(고전 13:1-3), 그렇다고 그 모든 성령의 역사를 가짜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놓고 Jonathan Edwards는 『부흥론』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가지 신중하지 못한 행위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일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신중하지 못한 처신들뿐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기준에 정말 반대 되는 일이 많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그러면서 그는 성령이 역사하실 때 비상식적으로 처신한 고린도교회와 거룩하고 영감을 받은 사도 베드로의 예를 듭니다.  다시 말해 경건한 사람들 중에도 베드로처럼 무지와 부패가 남아 있어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는 것처럼(2:11-14), 은사 받은 사람들이 신중하게 행동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일어난 초자연적인 역사 전체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18:7),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영광스럽게 나타내신 때 걸림돌이 생기지 않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20:17).  Jonathan Edwards걸림돌이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결코 기대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마태복음 1222-32절을 인용하여 성령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성령을 대적하는 죄만큼 인간 영혼에 해롭고 위험한 죄는 없다. 성령이 인간들의 마음에 행하시는 은혜로운 역사를 대적하여 말하는 것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대적하여 말하는 것이 낫다. 그 어떤 것도 대적하는 것만큼 우리 영혼이 그분의 역사의 은택을 받는 것을 영원히 방해하는 것은 없다.”  한 마디로 가마리엘처럼 지혜롭게 행동하고( 5:33-39), 성령을 모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2:10).  더 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가 마시는 식수(食水)가 환경오염을 통해 더러워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평생 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신자들 중에 은사를 사용하다가 실수나 눈에 띠게 거스리는 행동, 혹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해서(5:22-23), 그 일로 인해 성령의 역사 전체를 귀신의 역사라고 치부하지 말아야 하다는 것입니다( 3:22).  방언기도하는 목회자로서 한 가지만큼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오늘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6:18),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방언이 개인의 기도생활에 있어 유익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고전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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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것으로는 풍랑을 잔잔케 한 사건(4:35-41)과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한 일(4:, 17-18), 그리고 그리스도의 체포됨(26:47-53)과 대제사장의 고소 사건 등이 있습니다(26:57-68).  첫째, 그리스도는 배를 타고 가다 피곤하여 잠을 자던 중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는 바람과 바다를 명하여 잠잠케 하셨는데,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피곤하여 잠을 잔 것은 인간으로서의 특성을 나타내고,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하신 것을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사미리아 지역을 지나가시다가 피곤하여 어느 우물가에서 쉬던 중에 과거가 복잡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피곤하여 쉬셨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특성을 나타내며, 이 여인을 처음 만났음에도 그 여자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신 것은 하나님으로서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사람들에 의하여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항거하려던 제자들에게 당장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있으나 성경에 응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만류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사람처럼 체포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특성을 나타내며,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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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언제일지 그 정확한 시기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24:36), 주께서는 재림이 가까워졌을 때 일어날 시대의 표징에 대하여 재난의 징조(24:3-14)와 무화과 나무의 비유(21:29-33),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가장 큰 환난(13:14-27)을 예고해 주셨습니다(13).  따라서 우리는 이 예고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21), 재림의 때를 대략적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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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부으심

진리의 성령 2018. 7. 18. 13:16

예수님의 사역의 원천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61:1).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는 아무 역사도 행하지 않으셨고, 그 전에 사역을 하셨다는 기록이 하나도 없습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성령의 기름부음 없이는 사역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24:49).  사역하는데 한 가지 필수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입니다.  기름부음이 없는 사역은 없고, 사역을 하고자 한다면 기름부음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입니다.  흔히 우리는 기름부음이란 단어를 들으면 사람의 머리에 감람유를 붓는 성경적인 장면을 생각하곤 합니다( 8:12).  하지만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이 아닌 더 깊은 실제의 세계를 풀어놓아주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믿음으로 상대방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은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어주셔서 아픈 곳이 치유되거나 사역을 위해 준비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의 진정한 결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0:38).  예수님은메시야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4:27).  우리는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붓지만(삼상 16:13), 성령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을 부을 수 있습니다( 3:22, 4:18).  성령충만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입게 되는데, 이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손으로 느낄 수 있는 실체입니다. 믿음으로 얻어지는 영적인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가 그녀를 치료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흘러나가 역사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름부음은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전달되는데 물처럼, 전기처럼 몸의 접촉을 통해 이쪽에서 저쪽으로 흘러갑니다( 14:35-36, 5:27-31).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6:19).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생명이 없는 물체에도 한시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데, 죽은 시체가 기름부음을 받았던 엘리사의 뼈에 닿자 희생한 일도 있었고(왕하 13:21), 바울의 옷자락만 만져도 사람들의 병이 나아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바울의 옷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12).  이런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능력을 안 사람들이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림자라도 덮이길 바랬던 것입니다( 5:15).  만약 이런 성령의 능력전이가 이상스럽게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의 죽은 정통에 매여 있었거나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적이 없는 목사와 신학자들의 반쪽짜리 가르침을 통해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잘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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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양성론이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은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의 양성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양성이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 신앙은 불가능한 것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구원 역시 헛된 망상이 될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양성은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신비를 성경말씀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양성론에 대해 이해가 지금은 희미하지만 때가 되면 밝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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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모습이 처음 나타날 때 당신은 그것에 대해 결사적으로 대항해야 한다.  그 죄가 당신의 마음 밭에 결코 서지 못하도록 항거하라.  이 죄는 여기까지만 진행되고 더 이상 진척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속이지 말라.  죄는 일단 한 걸음을 내딛으면 그 다음 발걸음을 취한다.  죄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그것을 묶어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강바닥에 흐르는 물과 같다.  그래서 일단 자리를 잡게 되면 물줄기처럼 자신의 경로를 따라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른다.  그러므로 분출된 죄를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는 일보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것을 원천 봉쇄하는 일이 더 쉽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죄를 처음부터 막아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죄가 어떻게 단계적으로 진행되는지를 잘 설명해 주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4-15).

혹시 당신의 생각이 타락한 죄로 인해 물들려는 조짐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죄가 목적을 달성할 때 나타나는 결과를 생각하고 사력을 다해 싸우라.  당신에게 정결하지 못한 생각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숙고하라.  획실히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어리석음과 더러움에 처하도록 만들 것이다.  또한 시기심과 종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결국 그 종착지는 살인과 파괴이다.  이런 죄가 당신을 비천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더욱 기운을 차려 그것에 대항 하라.  이런 투쟁의 자세 없이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죄가 일단의 감정을 사로잡아 당신이 죄를 기뻐하게 된다면 죄는 다시 이성에 침투하여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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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들의 전달은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이 연합됨으로써 두 본성 자체는 변질되지 않았으나, 인성에 속한 특성들과 신성에 속한 특성들이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서로 교차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슬픔, 제한된 지식, 피곤함 등과 같은 인간적 특성들과 전지, 전능 등과 같은 신적 특성들이 그리스도 안에 공존하게 된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능력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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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른다고 한 말씀 의도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무지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기 때문에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대답하신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1:7).  즉 여기서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다는 말은 때와 기한을 언급할 권한은 오직 아버지께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버지 외에는 누구도 이 사실을 언급할 수 없으며, 아버지 외에는 누구도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재림의 시기를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은 그의 무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자의 순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모순 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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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현재 땅에

이토록 놀랍고도 은혜롭게 나타나고 계신데도

신중함이라는 원리 위에서 행한다는 구실로

역사의 결과가 어떠한지,

그리고 역사의 영향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보기 위해

기다린다는 구실로 스스로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인정하기를 오랫동안 망설이는

정당한 구실이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일 그들이 보기에 장애요소가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자 기다린다면

그것은 마치 바보들이 강가에서 물이 모두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장애물이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면 됩니다( 18:7).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

항상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육적이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상하게 보이고

모순으로 보이고 어렵게 보이는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은 항상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으며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에 어떤 장애물을 주는 것은

사람들의 성향과 영적인 감각을 시험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마련하신 것입니다. 

부패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믿지 아니하고 성미가 비꼬이고,

트집 잡기를 좋아하는 영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보기는 보나 깨닫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마련한 것입니다( 13:13).

 

사람들의 영혼에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죄는

성령에 대해 짓는 죄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은혜롭게 역사하고 있는 성령을 대적해서 말하는 것보다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를 대적해서 말하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보다 우리의 영혼이

성령의 은택을 받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이러한 일들에 대해

경멸적으로 계속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을 훼방 놓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니

주의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령께서 평소와 같지 않게 많이 부어지고,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과 미적지근함과 위선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책망되었을 때가

바로 성령훼방 죄가 나타나기 쉬운 때입니다.

악의를 가지고 이러한 역사를 대적하고 책망하며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기 위해서는

다음 가지 요소만 갖추면 것입니다.

, 그것은 내적인 양심의 찔림과 상반되게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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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란 사실은 성경 기록으로 충분히 확인될 수 있는 것이며, 초대교회 시대부터 신실한 성도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다만 이 사실을 인간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므로 이와 관련된 잘못된 주장들이 계속 생겨났고, 교회는 이러한 이단적 주장을 근절시키기 위해 교회 회의를 통해 소집하고 이를 공식 교리로 확정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지니셨다는 사실은 인간들이 모여 결정하므로써 비로소 생겨난 교리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이미 사실 자체로서 그리고 성경의 말씀으로 분명하게 인간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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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란?

논쟁거리/성화 2018. 7. 7. 13:21

구약성경 이사야 61-7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름 받는 장면으로 이 본문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성화시키시는 사건인데, 이 환상의 장엄함은 보좌 주위를 날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외치는 스랍들의 모습을 통해 더욱 극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거룩’이라는 단어가 세 번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최고의 높은 차원임을 말해주는데, 사실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동시대에 살아가는 백성의 무가치함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스랍 중 하나가 제단에서 불타고 있는 숯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에 댈 때에 그는 깨끗함을 입었고 자신의 죄로부터 분리되어 이스라엘을 향해 거룩함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죄로부터 분리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를 성별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이사야가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성화되었다는 말은 성도들이 이제 새로운 삶의 목적을 발견하여 새 규범과 성령의 능력을 지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이지, 더 이상 죄를 한 번도 짓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7:20, 요일 1:8).

 

영국이 낳은 개혁주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John Owen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더욱 성결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의 교리와 삶의 방식이 서로 연결된 동반자로서 항상 성화의 중요성을 내세우지만 이 둘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2:26)처럼 신학과 실천, 즉 교리와 거룩한 삶이 반드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화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었다는 것(고전 1:30)과 그분과의 결합을 통해 우리 안에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2:19).  이 문제를 두고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와 떨어져 있는 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가 고난당하시며 행하신 일은 모두가 우리에게 무용, 무가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를 우리의 ‘머리’( 4:15),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라고 하였다( 8:29). 또 우리 편에서는 그에게 ‘접붙임’을 받으며( 11:17),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였다( 3:27)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첫 번째 성화된 분이자(요한 10:36), 완전히 거룩하신 분으로(17:19), 우리가 진리되신 그분을 구원의 주로 믿고 한 몸이 되기 전까지는 성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임신이 되는 그 순간부터( 1:34-35),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죄의 유혹( 4:1-11)과 사탄의 세계에 맞추어져 있는 인간의 연약한 육체에서( 2:14), 그분은 키와 지혜가 자라가며( 2:52),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뜻을 순종하는 가운데( 5:7-10), 흠도 없고 점도 없이(벧전 1:19), 지극히 거룩한 삶을 사셨습니다( 9:24).  또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19:20)라고 외치신 후에 왕의 존엄과 함께( 18:37),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신( 23:46),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 2:8)과 성화의 삶을 살았던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벧전 3:15).  그리고 삼일 만( 16:21)에 부활하셨을 때( 1:3), 성화된 예수님의 인간적 삶은 신약에서 말하는 무궁하고( 7:16), 불멸한 생명의 능력으로( 6:9), 물리법칙에 제한을 받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변모했는데( 20:19, 26), 이러한 놀라운 일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고전 15:20), 처음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13).  따라서 믿는 자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다면(8:9), 그들의 삶에서 성화가 진척되어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6:5), 그분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19).

 

신약성경은 이 성화에 대해 성령의 사역과 신자의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성화를 이미 완성된 사건으로 보았고(고전 6:11), 사도행전 2032절에서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그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신자들을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라고 부릅니다.  이 성화의 처음 단계에서는 세상을 사랑하던 마음을 점령하고 있던(요일 2:15), 죄의 세력으로부터 확실하게 단절시킴으로 신자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못하게 하고(6:6), 나아가 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생명의 능력이 신자의 삶을 죄에서 내어주는 것을 막아줍니다( 6:11, 18).  이것은 한 개인의 삶에 있는 죄악된 행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음을 말해주는데,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죄로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할 것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6:12-13).  다시 말해 죄의 권세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신자가 성령의 능력과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부활의 생명에 힘입어( 6:5), 죄의 유혹과 시험을 뿌리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4:7).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사람은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죄 안에서 살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8:12-17).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직접 성화되며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그 죄의 몸에서 나오는 몇 가지 정욕들이 점차 약해져 줄어지고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거룩한 생활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성경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말한 것처럼( 3:5), 성화는 거듭날 때부터 분명하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 17:22), 우리는 죄의 통치에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6:14),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죄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악은 최종적으로 파괴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12:12), Calvin은 “사탄은 성도가 절망으로 미치도록 유혹하고 있다”라고 말한 것 같이, 죄로부터의 우선적인 단절은 더 이상 우리의 삶 가운데서 죄를 사랑하지 않도록( 12:1),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겠다는( 12:4), 우리의 의지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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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 전달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신적인 인격 로고스 안에서 결합함으로써 발생한 양성간의 작용 세 가지를 가리킵니다.  그 세 가지는 첫째, ‘특성들의 전달’, 둘째, ‘사역의 전달’, 그리고 셋째, ‘은혜의 전달입니다.  이 삼중 전달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교리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면서도 무능하게 고난을 당하시는가 하면, 인간이시면서도 신적인 속성을 보이고 능력을 항하신 이치를 잘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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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의 시기를 아는 것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재림의 시기를 궁금해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대답하신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24:36, 1:7).  예수님께서 재림의 정확한 시기를 말씀해 주시지 않은 것은 재림의 정확한 시기를 아는 것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기 보다 해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생전 어느 시기에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할 때, 그 사실을 안 성도들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광적인 종말론자가 되기 쉽고, 사탄은 이것을 악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2:9-12).  또한 자기 생전에 주님이 오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성도들은 재림 신앙이 주는 영적 긴장감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이 오시지 않기로 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면 주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 늘 깨어 대비해야 한다는 성경의 권고는 별의미가 없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12:40).  이와 같이 성도들이 주의 재림의 시기를 아는 것은 신앙에 도움이 되기보다 해로울 가능성이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재림의 시기를 알려고 하기보다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그 앞에 서는데 부끄럽지 않도록 항상 준비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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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삶을 즐기고 만족해 하십니까?  스트레스와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삶의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신앙생활이나 제자/사역 훈련을 하다보면 때론 감정이나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질 수 있습니다. 정서적 안정과 균형을 유지하기 원하십니까?  아래 나와 있는 제안들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1. 먹는다.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카페인, 초콜릿이나 당을 줄이고 영양가 있는 채소나 과일을 많이 섭취합니다.  여러분은 다이어트 하는 사람이 우울한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2. 규칙적으로 운동을 한다.

헬스나 에어로빅 아니면 간단한 운동이라도 정기적으로 합니다.  점심을 먹고 걷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3. 정신적 휴식을 취한다.

독서나 자주 가는 서점을 들려서 잡지나 책을 읽어 본다거나 감명 깊은 영화를 보면서 정신적으로 휴식을 취합니다.

 

4. 남을 용서한다.

용서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과거의 실수를 바탕으로 배우는 것은 좋지만 그로 인해 맘에 후회나 분노를 품고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작은 일에 땀을 흘리지 말라는 격언이 있듯이 주변의 이웃을 용서할 때 우리는 더욱 정서적으로 건강해 집니다.

 

5. 남을 섬긴다.

교회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나가서 이웃을 섬기도록 합니다.  양로원, 고아원, 복지센터에 조용히 자원합니다.  몸이 좀 고단해도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6. 유머를 찾아라.

작은 웃음은 길을 간다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잠언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머 있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가족들과 함께 웃음을 나누십시오.

 

7. 충분히 취침하라.

충분한 취침은 스트레스를 이겨내는데 필수 조건입니다.  시간과 일들을 미리 잘 계획하면 잠을 줄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8. 실제적으로 행동하라.

사소하고 불필요한 걱정을 버립니다.  예를 들어 내가 완벽하지 못해서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는다거나 불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을 피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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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리스도의 양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의 동일한 아들이시고 신성에 있어서 완전하시고 인성에 있어서 똑같이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사람이시니,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시며 신성에 있어서 성부와 공동 실체적이시고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은 공동 실체적이시니 죄만 빼놓고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와 마찬가지시다.”  다음으로 신성과 인성이란 두 본성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혼동이 없고, 변화도 없고, 분활도 없고, 분리도 없고, 본성들의 차이는 연합 때문에 결코 제기되지 않으나 각 본성의 특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칼케돈 신앙고백은 그후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신학도 이때 확정된 양성론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에도 칼케돈 신앙고백의 전통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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