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 교재 28과에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성령세례의 바른 의미에 대해, 성령 받은 사람의 인격과 삶에서 맺어지는 열매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개인적인 결단과 적용의 시간을 갖는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이러한 이해가 가져다주는 실천적인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존 스토트 목사의  『성령세례와 충만』은 28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저자는 성령 세례와 충만, 성령의 열매와 은사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역과 관련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해는 무엇인지, 그리고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우리의 삶 속에서 갖는 실천적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이해 하고픈 훈련생이나 성령의 사역에 대한 여러 오해들을 불식시키고 바른 이해를 돕기를 원하는 인도자들에게 좋은 참고도서가 될 것이다.

 

이 연구를 시작하면서 먼저 네 가지 서론적인 요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공통된 소원과 의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셋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보다 교훈하는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이는 성경에서 설명하는 부분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부분은 교훈하는 부분에 근거해서 해석될 때에만 유익하다는 것이다.  넷째,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배우려고 하는 우리의 동기는 학문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이며 개인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성령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거듭남은 성령으로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성령은 직접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다 이 내주하시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그 후에 성령을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주셔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바울의 경우 양쪽을 다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과 성령 안에 거하는 것,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을 모시는 것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바울의 생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이라는 이 약속된 선물은 성령의 세례와 동일한 것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사람들의 확신이 나뉜다.  성령의 선물과 세례는 다르다고 말하는 자들은 세례를 두 번째요 나중 경험이라고 가르친다.  반면에 두 가지가 같다고 보며 따라서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은 성령을 받은 것을 나타내는 생생한 수사학적 표현이라고 보는 자들은 이 세례를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것으로 여긴다.  사도행전 2장에 의하면 오순절에 서로 다른 두 그룹의 사람들이 성령의 세례또는 선물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두 그룹은 2장의 초두에 나오는 120명과 말미에 나오는 3000명이다.  이 두 그룹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120명은 이미 중생한 사람들로서 열흘 동안 하나님을 기다린 끝에 성령의 세례를 받은 반면, 3000명은 불신자들이었다가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았다.  이렇게 120명과 3000명의 두 그룹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령의 세례가 단회적인 선물을 말한다면, 성령의 충만은 이 선물이 지속적이며 갈수록 더 많이 충당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 세례의 결과였다.  세례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고, 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었다.  세례는 독특한 입문적인 경험이었고, 충만은 계속되는 영구적인 결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이 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입문의 경험으로서 세례는 반복될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충만은 반복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든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518절에서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보다 살펴보면, 첫째, 이 동사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성령의 충만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이다.  둘째, 이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성령 충만은 일부 사람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이 동사는 수동태로 되어 있다.  그 분의 충만함을 누리는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은 그 분에게 무조건 맡기는 것이다.  넷째,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헬라어에서 부정과거형으로 된 명령은 단회적인 행동을 가리키고, 현재형의 명령은 계속적인 행동을 가리킨다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령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성령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은사들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익어 가는 것이다.  요한복음 737-39절에서는 우리가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주 예수님께로 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나오는 동사들(목마르다, 오다, 마시다, 믿다)은 모두 현재형으로, 우리는 예수님께 회개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해서 와야 하고 계속해서 마셔야 한다.  성령 충만에 관한 신약성경의 두 번째 본문은 충만에 대한 명령도 담고 있지만 무엇 보다고 성령 충만의 증거를 강조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표지는 무엇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 가장 주된 증거는 기적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며, 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에 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성령 충만의 결과들을 묘사한 유일한 본문은 에베소서 518-21절인데, 여기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도덕적인 자질들이다. 

 

이러한 성령의 세례와 충만의 구별에 대한 반론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실패와 보잘것없는 성과는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들이 죄나 불신으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처럼 비영적인또는 육에 속한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성령의 충만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다.  두 번째 반론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상의 독특한 성령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사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과 관련해서 잊어서는 안 될 세 가지는 첫째, 이런 경험의 일부는 의심할 여지없이 마귀적이며, 진정한 영적 경험인 양 위장한 사단의 끔찍한 계략이다.  둘째, 그러한 경험 중 좀 더 많은 부분은 심리적인 것들이다.  우리가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경험들이 실상은 심리적인 것이다.  심리적인 것은 도덕적이나 영적으로 중립적일 수 있다.  셋째, 어떤 또 다른 경험들은 실제로는 회심의 경험인 듯하다.  그러나 마귀적이지도 않고 순전히 심리적인 것도 아닌, 그리고 회심의 경험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경험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참되고도 깊은 경험들이다.  이러한 경험과 관련해서 가장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제한할 수 없고, 성령은 때로는 그리고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일하시기도 하신다는 점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말한다.  바울이 열거하는 이 아홉 가지 특질들은 세 개씩 묶어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둘째,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셋째,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우리가 자신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특질 중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거나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함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진리는 성령의 열매는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육체의 일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원에만 의지해서 자연적으로 행하는 일들을 가리키고,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성령께 반응할 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만들어 내시는 특질들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충만한 내주하심의 가장 훌륭한 증거이다.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깊이 역사하시는 진정한 증거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이나 굉장한 표적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적 특질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다음 진리는 이러한 특질들이 성령의 열매라고 묘사된다는 점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름으로써 그것의 초자연적인 기원과 자연적인 성장을 둘 다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연적 성화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제대로 된 수확을 거두기 원한다면 제대로 된 밭에 제대로 된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거둔다는 말인가?  육체를 위해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되고, 성령을 위해 심으면 영생을 거두게 된다.  사도가 사용하는 이 열매의 비유로부터 배워야 할 세 번째 교훈이 있다.  성령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의 영혼에 즉각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심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많은 시간을, 아주 오랜 시간을 사용하셔서 이 생명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으로 키우신다.  하나님의 사역의 점진성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열매 맺는 일에서 더 적극적으로 성령과 협력하게 되고, 좋은 결실을 수확하기 위해 우리가 심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며, 공적, 개인적 경건의 삶의 습관을 위해 자신을 더 훈련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열매와 관련 적용할 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과 믿음이 모두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 스스로는 육체의 토양에서 이러한 결실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이 성령의 열매를 자라게 하실 수 있음을 믿는 믿음이 둘 다 필요하다.  둘째,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그 성장이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며, 생각하는 것과 사는 것 둘 다를 위한 훈련된 습관을 개발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그 성숙의 과정이 점진적이기 때문에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성령의 은사들도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사용되도록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주어진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쓸 때, 종종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대조시킨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령의 사역의 결과다.  교회는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다양한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에게 각각 다른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은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고,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의 사역을 다양하게 만든다.

 

영적은사와 타고난 재능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재능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새 창조, 즉 교회의 하나님은 그분의 구속 받은 자녀들에게만 영적은사들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구별하는 것은 영적은사이며, 몸의 각 지체는 서로 다른 은사나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사실로부터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 사이에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결론을 쉽게 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은사들은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며, 무척 평범하고 심지어는 단조롭게 보인다는 것들도 있다.  가르치는 은사나 권위 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나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또는 믿음등도 그 용어만 보아서는 그것들이 기적적이거나 기적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명백한 이유가 없다.  기적이란 그 정의상 비범함 사건으로서 하나님이 정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일하시는 방법에서 창의적으로 이탈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모두는 초자연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그리고 기적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우선적으로 일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계시를 바로 인식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제한하며 그분에게 어떤 것은 하실 수 있고 어떤 것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은사의 종류가 다양한 것처럼 그 분배 역시 다양하며, 은사는 선택된 소수의 특권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은사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무런 은사도 받지 못하고 간과되거나 뒤로 처지는 일이 없다는 사실은 교회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근본적인 것이다.  많은 지역 교회들은 회중이 평신도 지도력이 은사를 갖추지 못했다고 불평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아무것도 시도하려 하지 않고 또 그나마 겨우 시도되는 것들을 목회자가 손에 꼭 움켜쥐고 통제하려고 하는데 대한 전형적인 변명이다. 

 

영적은사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다. 첫째 영적은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카리스마타카리스를 부여하는 것인데, 카리스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호의다.  둘째 영적은사들은 하나님의 영의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은사들을 전적으로 성령께만 돌려서는 안 되고, 삼위의 세 위격이 모두 참여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영적은사들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이다.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주권적인 성령의 뜻에 달려 있다.  영적은사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물은 사용되기 위해 주어진다.  인간의 몸의 기관은 기능을 담당한다.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도 그들의 은사를 활용해야 한다.  영적 은사들은 우리 자신들(수혜자)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고, 강건하게 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우는 것의 의미이다.  모든카리스마타가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전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세우는 역할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그 가치는 더욱 커진다.  모든 카리스마타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다.

'평신도 훈련 > 참고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헌신  (0) 2018.06.01
믿음의 항해  (0) 2018.03.23
기독교의 기본진리  (0) 2017.11.10
부활의 증거  (0) 2017.08.19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0) 2017.05.1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