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T. Wright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죽음의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어 칭의를 설교하는 것은 할 일의 절반 밖에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구속구원에 대해 혼동하거나 로마서 425, 109절과 베드로전서 13절 말씀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오직 십자가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들에게 있어 칭의란 판결을 내리는 행위, 즉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의로운 자라는 법적 선언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의 말을 인용한다면 칭의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옛 사람은 죽고 그와 함께 새 사람을 입은 현재 완료형 사건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롭다는 선언이 종말적 선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을 바르게 공부한 사람이라면 Calvin에게 있어 칭의가 종교개혁의 핵심적 교리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신앙의 목표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칭의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가운데 일부이지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하는 칭의를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행함은 인간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니지만 행함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2:26).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윤리와 도덕적(순종) 열매가 전혀 없더라도 처음 믿을 때 얻은 의는 나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이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 때까지 지켜주시는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거룩한( 19:6), 성도( 30:4), 성별( 3:1), 성화(살전 5:23)라는 단어를 발견한다면 이는 대부분 ‘분리’, ‘따로 데어냄’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번역일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뜻을 지닌 모든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은 ‘잘라내다’, ‘이별하다’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나 장소 혹은 사물이 ‘거룩하다’라는 것은 그들이 세속으로부터 또는 속된 것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거룩함은 단지 무엇으로부터의 분리만을 뜻하지 않고 무엇을 향한 성별’(따로 떼어내어 거룩하게 준비함)의 의미도 담겨져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찾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이 거룩함을 재생산한다는 것입니다(20:7-8).  예를 들어 출애굽기 3113절과 히브리서 211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성품, 즉 그분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와 같이 거룩해질 수 있도록 그의 거룩하심( 11:44-45)을 알리시는데, NIV 성경은 이 구절을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who makes you holy)이라고 번역을 해놓았지만 원문 그대로 번역한다면 너희를 성화시키는’(who sanctifies you)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성화’란 사람, 장소, 사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행위, 즉 사람, 사물, 장소가 본연의 목적으로부터 결별한 뒤 또 다른 차원의 목적과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출애굽기에 보면 땅(호렙산)이 거룩해진 사건이 나오는데, 사실 그곳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계시하시기 위해 따로 구별하신 장소였고( 3:5),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시기 전( 19:10-14)에 시내산은 사람이나 짐승을 성결케 하신 곳이었습니다( 13:2).  성결은 다른 여러 방면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안식일( 5:12)과 성막과 기구( 30:25-29), 성전(대하 7:16)과 도피성( 20)과 가옥(27:14)을 구별시켰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거룩은 사람이나 장소를 구별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예루살렘이라는 도성 역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교통하시는 장소(11:1)였기에 거룩한 곳이었습니다(4:5).  그리고 베드로전서 215-16절의 말씀처럼 ‘거룩’이란 단순히 도덕성의 성격만을 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은총임을 알 수 있는데(고전 6:11), 그 이유는 인간이 자력으로 성결해지기 전에 그분이 먼저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2:11-14).  사실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장소나 성전의 기물들 그리고 성전은 본래 평범한 것들이었지만, 이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시려고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따로 구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하여 성별된 사람은 Martin Luther가 말한 것처럼 비록 죄인이긴 하지만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28:9).

 

이렇게 구별되고 거룩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장차 올 세대의 생명을 맛본 사람들로서 그 미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실현이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양자 됨( 8:15)과 칭의( 5:1)가 그러하듯이 구속이란 이미’( 1:7)이며 동시에 ‘아직’인 것입니다( 4:30).  그러나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를 라고 진정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살아가는 동안 천국 시민권을 가진 하늘에 속한 자들입니다( 3:20).  이런 우리들에게 성경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벧전 1:15-16),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 1:27)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영적으로 흠이 없는 삶( 5:27)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벧후 3:14).  비록 성경에는 실질적으로 신자들이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고 선언하지만( 6:6-9),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일매일 죄와의 전쟁( 6:10-19)에서 주님의 승리( 8:37)를 개인적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대해 현실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회심 후에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탄의 실질적인 공격은 줄어들지 않았기(벧전 5:8)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할 책임( 12:14)과 죄를 정복함에 있어( 12:4),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있습니다( 1:6).  그러기에 성화가 없는 칭의는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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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습니다.

그것은 정해진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면 좋겠는데

성경은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심판은 누구나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를 성경은지옥이라고 합니다.

지옥은 사람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입니다.

지옥에 거라면 차라리 네가 사람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았을 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돈 욕심 때문에 지옥에 간 가룟 유다라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지옥은 사람이 양심의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서 살래야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끝없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 무서운 고통을 당하는 곳,

죽어버렸으면 좋겠는데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은 그곳에 갑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신 여러분!

그 심판을 어떻게 받으시려고 하십니까?

그 참극의 자리와 무서운 심판의 자리를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하십니까?

정다운 부모 형제에게 아직 예수님을 권하지 않고 계신 여러분!

그 아비규환의 자리에 여러분의 부모와 형제가

처참하게 슬피 울며 이를 갈며 있는 것을 어떻게 보시려고 합니까?

지옥이 있다고 하면 어떤 사람은 유치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유치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있는 지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지옥에 가야 지옥이 있는 줄 안다면

그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그때서야아 지옥이라는게, 정말 있었구나하면

그 인생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간 것입니다.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 떠들지 마시고

먼저 예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지금 당신에게지옥이 있습니다해도 믿어지지 않을 겁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으로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헛되이 들으시면 안 됩니다.

 

만약 지옥이 없다면 다행이겠지만

성경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때 가서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예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저를 구원해 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주 진실 되게 고백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다른 일에는 실패를 해도 기회가 여러 번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면 그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면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때 가서야 울고불고 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누구한데 도움을 요청할 수 없습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의 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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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그리스도의 기도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요일 2:1-2).  우리가 범죄했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용서해 주시도록 간구드리며(눅 23:34), 이것은 믿는 사람들이 멸망 당하지 않도록 그들을 위하여 아버지의 은혜를 간구하기 때문입니다(요 17장).  둘째, 그리스도의 기도로 인하여 우리 역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4:14-16).  우리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요 16:23-24).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기도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7:19).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우리의 변호자가 되시기 때문(요일 2:1)에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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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몸은 출생하실 때 지니신 고난과 죽음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그 몸과는 분명히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 이전의 몸은 땅에 속한 것으로 썩어질 것인 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몸은 신령한 것으로 하늘에 속한 영원한 몸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몸을 지니셨으나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았습니다(20:19-21).  그러므로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몸은 낮아지신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귀하심을 회복하여 높아지신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16:19).  감사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도 장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같이 재림의 그날에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할 것입니다(8:11, 23).  따라서 성도는 신령한 것으로 변화되어(고전 15:44), 아픈 것이 다시 없는(21:4), 영광스러운 육체(고전 15:43)로 부활할 장차 임할 그 날을 기대하며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는 성숙한 신앙이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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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은 서로 다른 두 신이 아니라 한 분이라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10:30).  그러나 유대교의 잘못된 유일신 사상은 성부 하나님 한 분만을 참 신으로 경배합니다.  이처럼 그들이 예수의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시리라는 성경의 예언(9:6)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심을 용납치 못했습니다(5:39).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삼위일체이신 자신의 존재와 뜻과 계획을 계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편협된 종교 사상 때문에 성경의 예언과 가르침을 배격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자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울의 경우를 통해 잘 알 수 있겠습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9:1-9).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만난 후 그는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며 이를 전파하는 복음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9: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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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정욕에 동반되는 여러 위험한 징후들을 숙고홰 보라.  즉 그 정욕이 치명적인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 조사하라.  만약 그것이 치명적이라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죄를 죽이려는 노력은 효과를 거둘 수 없다.  당신은 다음과 같이 물을지 모른다.  우리 속에 거하는 죄가 치명적임을 보여주는 위험한 징후들은 어떤 것인가?

 

고질적인 습관

어떤 죄가 당신의 마음을 오랫동안 타락시켜 왔는데 그것의 위력을 물리치고 거기서 치유받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죄의 병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다윗의 경우가 그러했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38:5).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정욕은 사람을 타락시키며 곪게 하고 짓무르게 하여 영혼을 비참한 상태로 만든다.  이러한 경우 일반적인 처방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한, 그러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결코 평화를 맞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로 특정한 정욕을 오랫동안 죽이지 못한 것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죄의 노예 상태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수많은 세월 동안 죄의 특정 정욕이 여러 모양으로 역사하여 마치 요지부동인 것처럼 역사하고 있을 때 그 정욕이 더 이상 자기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딴 사람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각종 은사들의 도전 앞에서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은 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고질적인 습관처럼 영향력을 행사하는 죄를 사람이 제거한다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다.  오앳동안 방치된 상처들은 종종 치명적이며 항상 위험하다.  속에 거하는 병은 계속 아무런 장애 없이 거하면서 더욱 난폭하고 완고해진다.  정욕은 그러한 속병으로 일단 사람 속에 습관으로 자리잡게 되면 발본하기가 어려워진다.  그것은 스스로 죽는 법이 없기 때문에 매일매일 우리가 그것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 위력은 점점 더 커진다.

 

죄와 타협하려는 마음

내주하는 졍욕의 힘 앞에서 복음의 방법으로 그것을 죽이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명목으로 그것과 은근히 타협하려는 것은 마음속에서 그 죄가 치명적인 수위로 발전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이러한 타협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첫째, 죄로 인한 생각으로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파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런 죄의 속성 외에 다른 좋은 면이 있는지를 찾아보고 그것을 찾게 되면 죄에 대해 관용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가졌던 경험들을 다시 생각하고 기억하며 그것들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이것은 모든 성돌들의 마땅한 의무로서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권고하는 행동이다.  다윗도 이와 같은 일을 했다.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며 마음에 묵상하여’(77:6-9).  이렇게 해서 다윗은 주님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이전의 은혜들을 기억했다.  이와 같은 행위를 바울도 우리에게 권면했다(고후 13:5).  하지만 그와 같은 기억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즉 죄로 고통당하는 양심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한다면 그것은 죄의 계책에 넘어가는 것이다.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죄성이 꾸짖음을 받을 때, 그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용서받고 성령으로 죽이기보다 오히려 전에 가졌던 좋은 경험들을 생각하며 위안을 얻고 하나님이 자신의 목에 놓은 멍에를 회피하는 것은 실로 위험한 행동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상처는 거의 치료가 불가능해진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찔림을 받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때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백성들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합리화했다.  그 결과 온갖 불경스러운 죄악으로 그들은 파멸하게 되었다. 

둘째로 죄를 죽이기 위해 신실하게 노력하는 대신에 죄를 은혜와 자비의 논리로 합리화하는 것도 죄와 타협하는 행위이다.  림몬의 당에서 경배해야 하는 나아만처럼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다른 경우들은 하나님과 동행하겠지만 이 경우만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은밀히 말한다면(왕하 5:15-18), 그는 곧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실로 자비라는 핑계로 죄에 계속 안주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실성에 위배되는 것으로 위선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만드는 셈이다(4). 

이처럼 속에서 죄를 합리화하는 사람은 결국 마음속에서 죄를 은밀히 좋아하게 된다.  그래서 비록 그의 의지는 전적으로 죄를 향해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그것에 기울어져서 조건만 맞으면 쉽게 죄를 짓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사함을 받고 죄를 죽이려 하기보다 그는 다른 방법을 통해 죄의 고통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결국 이런 사람의 상처는 악취를 내고 썩게 되어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   

 

죄의 유혹에 동조하려는 태도

사람의 의지가 죄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동조할 때, 비록 그 죄를 외형상 실제적으로 범하지 않을지라도 죄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셈이 된다.  외형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야고보가 114-15절에서 말한 바처럼 실제로 죄를 짓지는 않지만 사람은 마음속에서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과 성향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죄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정욕에 휘말리는 일을 의도적으로 하든 무심코 하든 그 결과는 동일하다. 무심코 한다는 자체도 어는 정도 선택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계하고 주의할 부분에서 의무를 게을리 하고 무심코 행한다면 그런 무심한 행동은 일부러 하는 행위와 같다.  즉 일부러 의무를 소홀히 하고 부주의한 것이 아닐지라도 부주의 하게 행동하도록 상황을 몰아간 것이기 때문에 그 선택의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죄악은 대부분 무심결에 갑자기 들어와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동조한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그 악이 어느 정도 경감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무심결에 기습적으로 악이 들어오게 된데에는 마음을 지켜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죄와 싸우지 않고 논쟁하는 자세

사람이 죄와 싸워야 할 때 앉아서 죄의 문제와 죄의 심판에 대해 논쟁만 한다면 그것은 죄가 그의 의지를 사로잡은 증거이며, 그의 마음속에는 사악함이 가득 차 있다는 징후이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성도는 복음의 원리에 기초해서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죽음,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죄의 혐오스런 속성을 깨달아 하나님과 동행하며 죄를 죄로 여기고 경멸한다.  그래서 모든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마음속에 정욕과 투쟁한다. 

요셉이 바로 그러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39:9).  이런 맥락에서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또한 그는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라고 말했다.  반면 정욕의 힘에 이끌리는 사람이 복음의 무기가 아닌 율법만으로 정욕과 싸운다면 다시말해 전적으로 율법의 무기인 지옥과 심판을 가지고 죄와 싸운다면 죄가 그의 의지와 감정을 사로잡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새롭게 하는 은혜를 저버린다.  그가 아직 파멸되지 않는 것은 그를 지탱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하지만 은혜에서 멀어지게 된 사람은 결국 율법의 권세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가볍고 온유한 멍에를 팽캐치고 철로 만든 무거운 율법의 멍에 아래로 들어가 정욕의 방탕함을 억제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행위이다.

 

징계의 심판에 대한 무감각

당신이 정욕으로 인한 강퍅함 또는 적어도 징계의 심판을 느끼지 못하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을 때 이것은 죄의 또 다른 위험한 징후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죄나 정욕을 허락해서 그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그들이 가졌던 죄, 태만, 그리고 어리석음을 교정하신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63:17).  의심에 여지없이 하나님은 이와 같은 방법을 중생하지 못한 불신자에게도 사용하신다.

그러면 죄로 인한 찔림이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자신의 마음과 행동 양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죄의 덧에 걸려 괴로워하기 전 당신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당신은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과도하게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  당신에게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지는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옛 죄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공통을 주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전혀 새로운 죄를 짓도록 허락하시기도 한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상태였다면 깨어서 하나님을 구하라.

 

죄를 교정하려는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

죄를 교정하려는 하나님의 방법을 정욕을 통해 방해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죄의 징후이다.  이런 상태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57:17).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교정하기 위해 고통을 주고 유기(遺棄)하는 방법들을 사용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그 모든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하고 오히려 저항했다.  이것은 정말 슬픈일이다.  왜냐하면 18절의 하나님의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통해서만 인간은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셉을 애굽에 판 요셉의 형제들의 경우가 그런 예이다.  이때 당사자는 자신의 죄를 숙고하게 되고 스스로를 판단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말씀하실 때 보통 위험, 고통, 고난, 질병 등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신다.  어떤 때는 사람에게 성경을 읽는 중에 어떤 구절을 동해 마음에 찔림을 주시기도 한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일어서도록 역사하신다.  또한 매우 자주 하나님은 말씀 전파, 죄를 자각케 하는 성찬식, 회심, 그리고 덕을 세워주는 훈계의 방법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신다.  그리고 종종 말씀의 칼을 통해 사람들을 다듬어 가신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심장에 있는 정욕을 향해 직접 칼을 들이대며 죄인들을 놀라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의 죄악을 죽이도록 이끄신다. 

주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면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라고 하신 말씀은 정욕을 죽이는 문제에서도 적용된다.  일상적인 방법으로 죄를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만 죄를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죄와 싸울 때 앞에서 말한 그러한 위험한 징후들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성도라는 증거를 가지기를 원한다면 성도의 속성을 가져야 한다.  이런 속성을 가진 사람만이 비록 성도이지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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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악한 때가 도래하면

수백만의 사람들이 오른 손에나 이마에

적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힐 것이다( 13:16).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낙인이 찍힐 때에는 고통을 느끼는 법이다.

우리는 그 고통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낙인이 찍힌다는 것은

종의 수치의 표시를 지니고 다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과연 누구의 낙인이 찍힐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인가?

적그리스도의 낙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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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계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베드로가 사단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도록 아버지께 부탁드렸고(22:31-32),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고 믿음을 지켜 승리하도록 아버지께 간구하였습니다(17:9).  나아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자기를 박해하고 죽게 만든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시도록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였습니다(23:34).  이처럼 이 세상에 계실 때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뿐 아니라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는 지금도 대제사장으로서(9:24), 범죄한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대신 간구하는 대언자(代言者) 역할을 수행하십니다(요일 2:1).  또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곤경에 처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에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8: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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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전부터 계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하늘 보좌에 계셨던 그리스도께서(1:1-3), 고난과 죽음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비천한 인간의 몸을 취하신 것은 스스로 낮추신 것입니다(2:14-15).  성경은 이에 대하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2:6-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사 인간으로 오신 것은 하나님의 소중한 창조물인 인간을 구원키 위한 것입니다(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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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공자나 석가, 그리고 모하메트는 참으로 훌륭한 분들입니다.  진리를 추구한 그들이 한 평생의 삶이 그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신 반면 다른 이들은 모두 사람이란데서 결정적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자신을 가리켜 현명한 교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석가는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모하메트 역시 자신이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많은 훌륭한 일들을 하며 탁월한 가르침을 베풀었지만 그들의 인생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 하였습니다(10:30).  그리고 지상에서의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에 대해 거듭 강조하셨습니다(10:30, 14:7-11). 그리스도는 진리를 추구한 자가 아니라 진리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1:6).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란 사실은 부활을 통해서도 입증되었습니다.  그는 부활 후 500여명의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고전 15:4-8).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 그에게는 닫혀진 문을 통과할 수 있는 능력(20:19, 26)과 순간적으로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는 능력(6:21)을 지니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24:51, 1:9-11).  이처럼 공자와 석가, 그리고 모하메트는 하나의 종교를 창시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인간적인 제약을 극복하지 못한 피조물에 불과한 반면 진정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의 삶과 가르침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단지 훌륭한 선생이나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으로 믿고 따를 때 우리의 믿음은 곁길로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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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하루에 한 번, 혹은 하루에 세 번 식사 전에 해야 하는

어떤 종교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한 인격체와의 관계입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상호교제입니다. 

당신이 기도할 때 

우주의 중심인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당신은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이 중보기도를 해주십니다. 

성령님은 당신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알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좇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무엇을 주기 원하시는지

혹은 하기 원하시는지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분의 임무는 

당신이 그 방향으로 기도하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종종 성경말씀을 사용하여 진리를 계시하십니다.

그러나 진리는 그저 어떤 개념이 아닙니다. 

진리는 인격체입니다.

성령님이 계시하시면

당신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조정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기도라는 관계성이 아마도 당신과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척도일 것입니다.

기도생활이 침체되었다면

아마도 사랑의 관계가 냉담해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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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역사 가운데 2천여 전에 나타나셨지만 실제로는 천지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계셨습니다(1:1-3).  이러한 사실은 성경 가운데서 풍부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1:1-18),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 되신다고 말했습니다(22:13).  바울 역시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만물보다 먼저 존재한 분이라고 말했습니다(1:15-17).  더 나아가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결과이며(1:4), 영원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3:11).  이처럼 그리스도는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계실 분으로서 우리가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하여 믿고 의지해야 할 유일한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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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인 아담의 혈통에 따라 태어난 자는 모두 죄인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3:23, 5:12).  즉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키 위해서는 죄가 없으셔야 하며(8:46), 죄가 없기 위해서는 아담의 혈통에서 벗어나야 하셨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인간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의 몸을 통해 태어나신 것입니다(마 1:18-20).  이처럼 죄인 구원을 위해 초자연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여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우리는 감사함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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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2:6).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입니다(1:3).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은 본래의 영광을 회복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신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2:9-10).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자기 우편에 앉으셨고(행 2:35),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 1:21), 모든 피조물이 그에게 굴복하게 했습니다(고전 15:27).  따라서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히 8:1)은 세상에 오시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하였던 그 영광의 자리로 되돌아 가신 것을 의미하며(요 20:17), 이것은 아버지께서 위임하신 구속사역을 완수한 그리스도에게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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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3:5).

죄를 죽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성도들이다(3:1).  중생하지 못한 사람도 죄를 죽이는 일을 흉내 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방법대로 그 일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것을 하기에 앞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순서에 따라 먼저 해야 할 다른 의무가 있다.

 

1. 성령을 소유한 자만이 죄를 죽일 수 있다

성령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죄를 죽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차라리 장님이 보고, 벙어리가 말을 하는 것이 성령 없이 죄를 죽이는 일보다 더 쉽다.  사람이 죄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8:9).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분에게 관심을 갖는 자는 성령을 소유한 자이다.  그런 자만이 죄를 죽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 점을 바울은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8). 

타락한 상태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8:9).  즉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성도만이 육신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당신 안에 있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물론 여전히 당신의 몸은 죄로 인해 죽은상태에 놓이게 된다(8:10).  하지만 죄를 죽이는 삶을 계속 수행하게 되어 새로운 속사람이 의를 위해 살아나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 811절에서 이 진리를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연합 교리로 설명한다.  이 연합을 통해 그 분에게 이루어졌던 역사가 우리 안에서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 정욕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망상이다.

 

2. 죄를 죽이는 일은 거듭남과 관련이 있다.

죄를 죽이는 일은 기본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  실로 하나님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처음부터 죄를 죽이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먼저 해야할 일은 회심이다.  즉 전 영혼의 회심이지 특정한 정욕을 죽이는 일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말을 듣고 자신들의 죄를 자각했을 때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2:37).  그래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울부짖었다.  이때 베드로가 그들에게 내린 지침은 무엇이었는가?  베드로는 그들에게 교만, 분노, 악의, 잔인함 등과 같은 죄를 죽이라고 말했는가?  아니다.  그는 죄를 죽이는 일이 지금 당장 그들의 할 일이 아님을 알았다.  대신 배드로는 그들에게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했다(2:38).  그들의 영혼이 먼저 완전히 변화되어 자신들이 찌른 부님을 진정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그들이 낮아져서 죄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요점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 성도가 아닌 사람은 아무리 그럴듯한 노력으로 죄를 죽이려고 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열심과 열정, 그리고 세심함으로 마음과 생각에 대항해서 싸울이지라도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정욕을 허락하신 이유

특정한 정욕이 활개치며 당신을 지배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주의 깊게 동행하지 않는 데서 파생된 결과이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일반적인 의미에서 죄의 정욕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심지어 믿음이 좋은 휼륭한 사람일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진실로 정욕은 교활하고 간교하며 반항하여 사람을 유혹한다.  사람이 정욕의 뿌리이자 근원인 자신의 마음을 부지런히 성찰하고 무엇보다도 생명과 죽음의 원천인 마음을 다스린다면 정욕은 시들해져서 죽게 된다.  하지만 방심하게 되면 정욕은 특정한 방법으로 붙출되어 우리의 감정을 통해 생각 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를 짓도록 유혹한다.

둘째,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정욕을 허락해서 우리의 태만을 징계하시기도 한다.  악인인 경우 하나님은 그들이 짓는 특정한 죄를 징벌하기 위해 다른 죄를 짓도록 하신다(1:26).  즉 조그만한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더 큰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이와 같이 행동하신다.  그래서 믿는 자들의 나쁜 점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목적으로 여러 난처한 상황들을 허락하신다.  바울에게서 사탄의 가시는 그로 하여금 충분한 영적계시를 통해 자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후 12:7).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그의 헛된 자만심을 교정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결론적으로 죄의 정욕의 위력은 이와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정욕의 지배를 잠시 허락하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부주의한 신앙생활을 징계하며 교정하신다.  이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전체적인 삶이 개혁되지 않은 상황에서 특정한 정욕을 죽이려는 인간적 시도는 분명히 잘못된 발상이다.  지금 자신을 괴롭히는 정욕을 철저하게 죽이고자 한다면 모든 부분에서 부지런하게 순중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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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에게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영국을 뒤흔드는

영적 부흥을 준비하고 계셨고,

그 부흥은 영국을 불란서와 같은

피의 혁명에서 구원할 것이었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몇몇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영국을 완전히 뒤엎어 놓는

거대한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지금 속해 있는 지역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어떤 일이

막 일어나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들을 구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당신을 통해서 하시고자 한다고 가정합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당신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훈련이 되어 있어요.

저는 못 할 같아요. 그리고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초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에 들어오시는 것을 느끼는 순간,

당신은 왜 당신이 적격자가 아닌지

왜 시간이 안 맞는지 핑계를 대기 시작합니다( 3:11, 4:1).

저는 당신이 하나님의 관점을 찾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용하셔서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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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어떤 위해를 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원천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죽음 가운데로 스스로 내어 놓으신 것을 의미합니다(10:17-18).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어 스스로를 보호하실 수 있었으나(26:53),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서만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20:28), 구원의 길을 열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기꺼이 수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거짓으로 재판하고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26:57-68).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되심을 부인하며 그분의 영광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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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남자에 의해 잉태된 것이 아니라(1:18), 남자와 동침한 사실이 없는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성령이 수태케 함으로 출생하셨습니다(1:35).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고 생물학적으로도 불가능한 이러한 초자연적인 잉태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에게 말한 내용으로도 확인됩니다(1: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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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가운데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이 많이 나타나 있으나 그 대표적인 실례만을 찾아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승천하시긴 이전에 약속하신대로(1:5), 성령을 보내셔서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충만을 받도록 하셨습니다(2:4).  둘째,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셔서 교회를 부흥케 하셨습니다(2:47).  셋째,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들에게 권능을 주어 병자를 치유케 하셨습니다(3:16).  넷째,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로 하여금 복음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9:5).  다섯째, 시험을 받는 자를 도우십니다(2:18).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기 위하여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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