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정욕에 동반되는 여러 위험한 징후들을 숙고홰 보라.  즉 그 정욕이 치명적인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 조사하라.  만약 그것이 치명적이라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죄를 죽이려는 노력은 효과를 거둘 수 없다.  당신은 다음과 같이 물을지 모른다.  우리 속에 거하는 죄가 치명적임을 보여주는 위험한 징후들은 어떤 것인가?

 

고질적인 습관

어떤 죄가 당신의 마음을 오랫동안 타락시켜 왔는데 그것의 위력을 물리치고 거기서 치유받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죄의 병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다윗의 경우가 그러했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38:5).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정욕은 사람을 타락시키며 곪게 하고 짓무르게 하여 영혼을 비참한 상태로 만든다.  이러한 경우 일반적인 처방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한, 그러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결코 평화를 맞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로 특정한 정욕을 오랫동안 죽이지 못한 것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죄의 노예 상태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수많은 세월 동안 죄의 특정 정욕이 여러 모양으로 역사하여 마치 요지부동인 것처럼 역사하고 있을 때 그 정욕이 더 이상 자기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딴 사람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각종 은사들의 도전 앞에서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은 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고질적인 습관처럼 영향력을 행사하는 죄를 사람이 제거한다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다.  오앳동안 방치된 상처들은 종종 치명적이며 항상 위험하다.  속에 거하는 병은 계속 아무런 장애 없이 거하면서 더욱 난폭하고 완고해진다.  정욕은 그러한 속병으로 일단 사람 속에 습관으로 자리잡게 되면 발본하기가 어려워진다.  그것은 스스로 죽는 법이 없기 때문에 매일매일 우리가 그것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 위력은 점점 더 커진다.

 

죄와 타협하려는 마음

내주하는 졍욕의 힘 앞에서 복음의 방법으로 그것을 죽이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명목으로 그것과 은근히 타협하려는 것은 마음속에서 그 죄가 치명적인 수위로 발전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이러한 타협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첫째, 죄로 인한 생각으로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파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런 죄의 속성 외에 다른 좋은 면이 있는지를 찾아보고 그것을 찾게 되면 죄에 대해 관용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가졌던 경험들을 다시 생각하고 기억하며 그것들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이것은 모든 성돌들의 마땅한 의무로서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권고하는 행동이다.  다윗도 이와 같은 일을 했다.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며 마음에 묵상하여’(77:6-9).  이렇게 해서 다윗은 주님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이전의 은혜들을 기억했다.  이와 같은 행위를 바울도 우리에게 권면했다(고후 13:5).  하지만 그와 같은 기억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즉 죄로 고통당하는 양심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한다면 그것은 죄의 계책에 넘어가는 것이다.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죄성이 꾸짖음을 받을 때, 그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용서받고 성령으로 죽이기보다 오히려 전에 가졌던 좋은 경험들을 생각하며 위안을 얻고 하나님이 자신의 목에 놓은 멍에를 회피하는 것은 실로 위험한 행동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상처는 거의 치료가 불가능해진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찔림을 받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때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백성들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합리화했다.  그 결과 온갖 불경스러운 죄악으로 그들은 파멸하게 되었다. 

둘째로 죄를 죽이기 위해 신실하게 노력하는 대신에 죄를 은혜와 자비의 논리로 합리화하는 것도 죄와 타협하는 행위이다.  림몬의 당에서 경배해야 하는 나아만처럼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다른 경우들은 하나님과 동행하겠지만 이 경우만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은밀히 말한다면(왕하 5:15-18), 그는 곧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실로 자비라는 핑계로 죄에 계속 안주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실성에 위배되는 것으로 위선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만드는 셈이다(4). 

이처럼 속에서 죄를 합리화하는 사람은 결국 마음속에서 죄를 은밀히 좋아하게 된다.  그래서 비록 그의 의지는 전적으로 죄를 향해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그것에 기울어져서 조건만 맞으면 쉽게 죄를 짓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사함을 받고 죄를 죽이려 하기보다 그는 다른 방법을 통해 죄의 고통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결국 이런 사람의 상처는 악취를 내고 썩게 되어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   

 

죄의 유혹에 동조하려는 태도

사람의 의지가 죄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동조할 때, 비록 그 죄를 외형상 실제적으로 범하지 않을지라도 죄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셈이 된다.  외형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야고보가 114-15절에서 말한 바처럼 실제로 죄를 짓지는 않지만 사람은 마음속에서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과 성향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죄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정욕에 휘말리는 일을 의도적으로 하든 무심코 하든 그 결과는 동일하다. 무심코 한다는 자체도 어는 정도 선택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계하고 주의할 부분에서 의무를 게을리 하고 무심코 행한다면 그런 무심한 행동은 일부러 하는 행위와 같다.  즉 일부러 의무를 소홀히 하고 부주의한 것이 아닐지라도 부주의 하게 행동하도록 상황을 몰아간 것이기 때문에 그 선택의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죄악은 대부분 무심결에 갑자기 들어와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동조한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그 악이 어느 정도 경감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무심결에 기습적으로 악이 들어오게 된데에는 마음을 지켜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죄와 싸우지 않고 논쟁하는 자세

사람이 죄와 싸워야 할 때 앉아서 죄의 문제와 죄의 심판에 대해 논쟁만 한다면 그것은 죄가 그의 의지를 사로잡은 증거이며, 그의 마음속에는 사악함이 가득 차 있다는 징후이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성도는 복음의 원리에 기초해서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죽음,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죄의 혐오스런 속성을 깨달아 하나님과 동행하며 죄를 죄로 여기고 경멸한다.  그래서 모든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마음속에 정욕과 투쟁한다. 

요셉이 바로 그러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39:9).  이런 맥락에서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또한 그는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라고 말했다.  반면 정욕의 힘에 이끌리는 사람이 복음의 무기가 아닌 율법만으로 정욕과 싸운다면 다시말해 전적으로 율법의 무기인 지옥과 심판을 가지고 죄와 싸운다면 죄가 그의 의지와 감정을 사로잡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새롭게 하는 은혜를 저버린다.  그가 아직 파멸되지 않는 것은 그를 지탱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하지만 은혜에서 멀어지게 된 사람은 결국 율법의 권세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가볍고 온유한 멍에를 팽캐치고 철로 만든 무거운 율법의 멍에 아래로 들어가 정욕의 방탕함을 억제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행위이다.

 

징계의 심판에 대한 무감각

당신이 정욕으로 인한 강퍅함 또는 적어도 징계의 심판을 느끼지 못하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을 때 이것은 죄의 또 다른 위험한 징후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죄나 정욕을 허락해서 그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그들이 가졌던 죄, 태만, 그리고 어리석음을 교정하신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63:17).  의심에 여지없이 하나님은 이와 같은 방법을 중생하지 못한 불신자에게도 사용하신다.

그러면 죄로 인한 찔림이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자신의 마음과 행동 양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죄의 덧에 걸려 괴로워하기 전 당신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당신은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과도하게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  당신에게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지는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옛 죄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공통을 주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전혀 새로운 죄를 짓도록 허락하시기도 한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상태였다면 깨어서 하나님을 구하라.

 

죄를 교정하려는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

죄를 교정하려는 하나님의 방법을 정욕을 통해 방해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죄의 징후이다.  이런 상태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57:17).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교정하기 위해 고통을 주고 유기(遺棄)하는 방법들을 사용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그 모든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하고 오히려 저항했다.  이것은 정말 슬픈일이다.  왜냐하면 18절의 하나님의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통해서만 인간은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셉을 애굽에 판 요셉의 형제들의 경우가 그런 예이다.  이때 당사자는 자신의 죄를 숙고하게 되고 스스로를 판단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말씀하실 때 보통 위험, 고통, 고난, 질병 등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신다.  어떤 때는 사람에게 성경을 읽는 중에 어떤 구절을 동해 마음에 찔림을 주시기도 한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일어서도록 역사하신다.  또한 매우 자주 하나님은 말씀 전파, 죄를 자각케 하는 성찬식, 회심, 그리고 덕을 세워주는 훈계의 방법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신다.  그리고 종종 말씀의 칼을 통해 사람들을 다듬어 가신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심장에 있는 정욕을 향해 직접 칼을 들이대며 죄인들을 놀라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의 죄악을 죽이도록 이끄신다. 

주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면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라고 하신 말씀은 정욕을 죽이는 문제에서도 적용된다.  일상적인 방법으로 죄를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만 죄를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죄와 싸울 때 앞에서 말한 그러한 위험한 징후들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성도라는 증거를 가지기를 원한다면 성도의 속성을 가져야 한다.  이런 속성을 가진 사람만이 비록 성도이지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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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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