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에 해당되는 글 23건

  1. 2018.05.31 재림이 어떻게 높아지신 신분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 행하는 사역의 최종 단계가 될 수 있는가?
  2. 2018.05.30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하나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인간의 몸을 입으셨는데도 죄인이 아닐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3. 2018.05.29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시라는 말은 그가 인간 인격을 가지셨다는 의미인가?
  4. 2018.05.26 균형 잡힌 신학과 신앙
  5. 2018.05.25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6. 2018.05.24 그리스도의 재림이 성경에서 강조되고 있는 주요 주제인가?
  7. 2018.05.23 예수님의 육신적 어머니인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은 과연 올바른 일인가?
  8. 2018.05.22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이 단 하나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9. 2018.05.19 양심으로 느껴라
  10. 2018.05.18 감사하는 마음을 배우십시오
  11. 2018.05.17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2. 2018.05.16 성자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의 몸을 입도록 하신 것은 마리아인가?
  13. 2018.05.15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을 가졌다면 이러한 양성은 상호간에 변화를 주지 않는가?
  14. 2018.05.12 천상의 언어 '방언'
  15. 2018.05.11 안수
  16. 2018.05.10 높아지심, 즉 승귀의 신분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네 번째 사역은 무엇인가?
  17. 2018.05.09 인류 최대의 사건인 성육신이 실제로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인가?
  18. 2018.05.08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인격을 가졌다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19. 2018.05.05 사악함을 항상 인식하라
  20. 2018.05.04 부흥, 성령의 축제
  21. 2018.05.03 천국에 다녀왔다는 간증은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22. 2018.05.02 구약과 신약을 구분 짓는 기준이 무엇인가?
  23. 2018.05.01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인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인격을 가지셨는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초림은 낮아지신 신분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첫 번째 사역이었습니다.  반면 동일하게 이 땅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높아지신 신분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의 마지막 단계가 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심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초림은 지극히 자기를 낮추사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온 것이지만(2:7), 그리스도의 재림은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만유의 시며 심판주로서 영화롭게 이 땅에 오신다는데 있습니다(살후 1:7-8).  즉 재림을 통하여 악한 세력이 파멸되며 그리스도의 영원한 통치가 이루어지므로(20:7-10), 이는 실로 높아지신 신분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사역의 최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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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제3위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마리아의 태중에서부터 그리스도를 성결하게 보호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리스도는 비록 죄인의 몸속에 있었으나 죄에 오염되지 않는 인간으로 출생하였을 뿐 아니라 죄악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에도 계속 성령의 보호하심으로 성결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9:14).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거룩한 분이라 고백하며(1:35),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죄의 문제를 해결하며(요일 1:7), 그 거룩함을 본받아 우리 역시 거룩한 무리 즉 성도(聖徒)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고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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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인간 인격을 가지신 것이라면 그는 온전한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신성은 주장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인간 인격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으셨던 로고스όγος)가 단지 인성을 취하였을 뿐입니다(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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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오늘날에도 모세에게 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시고( 3), 초자연적인 기적을 초대교회 때와 같이 일으키시며( 3:1-10), 예언을 하거나( 11:28), 방언기도로 말한다면(고전 14:39), 교회 전통과 질서를 강조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당혹스럽고 교리적으로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므로 성령이 머무를 가장 안전한 장소는 오직 성경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사실 개신교 주류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신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은사들이 오늘날 교회에서 나타날까 봐 무척 두려워하거나 이미 사도시대에 이런 은사들은 다 소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처럼 조상의 전통에 묶혀 공통적으로 한결 같이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는다는 말을 누가 하면 심기가 불편하고 극도로 의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John Wesley 18세기에 같은 말을 했을 때 런던 주교가 겁을 먹고 공포에 질린 것처럼 질서에 집착하여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죽은 전통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질서가 아닌 인간이 만들어 낸 질서와 제도 때문에 성령께 자유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우시며 동시에 질서가 있으시므로 모든 사람이 무질서하게 동시에 이야기하도록 하시는 분이 아니며, 방언을 할때 통역을 할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도록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고전 14:26-33).

 

기독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Charles H. Spurgeon은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진리를 옹호하는 일에는 두려움을 몰랐던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때 잠시 설교를 멈추고 어떤 사람을 가리키며젊은 청년, 자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장갑은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서 훔친 것이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예배가 끝나고 난 뒤에 얼굴이 창백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한 청년이 Spurgeon에게 다가와 개인적인 상담을 요청했고, 그 청년은 장갑 한 쌍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 물건을 손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목사님만 아시는 비밀로 해주신다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도둑질 했다는 말을 들으면 충격으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C. H. Spurgeon, Autobiography, Volume 2: The Full Harvest 1860-1892』에서 나오는 것으로 Spurgeon은 이러한 사실을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거나 조직신학을 잘 배워서 알아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이러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 나오는데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라는 말을 했고(왕하 5:26), 아람군대 왕의 신복 중 하나가 왕에게 한 말(왕하 6:12)중에도 선지자 엘리야에게 초자연적인 지식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엘리사가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통달했기 때문에 이런 정보를 얻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은사 중지론자들은 성령이 모든 육체에게 전례 없이 부어질 것이라는 요엘서 2장의 약속이 성취 결과( 2:17)( 12:6)예언( 21:9) 그리고 환상( 9:10-12) 등의 계시적 활동과 더불어 은사는 오로지 기초적이고 일시적인 방식으로만 기능했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20세기에 정경이 완성된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정경 이외의 예언적 계시나 은사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 Richard Gaffin그리스도의 단회적 창설사역은 그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교회 창설기 시대에 일시적으로 주어진 은사들은 사도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영구적으로 철수되었다.  계시가 종결되었기 때문에 계시에 수반하는 모든 은사들도 종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러한 예언적 계시에 대해 D. A. Carson은 조직 신학자가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계시와 성경이 말하는 넓은 의미의 계시의 정의를 혼돈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Carson의 주장에 대해 Gaffin은 매우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사실 그가 은사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는 것은 만약 예언이 지금도 계속된다면 정경이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계시가 올 때마다 정경의 또 단위가 보완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기에,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모든 계시의 언약성(covenantal nature)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이런 기능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된다는 것은 지나친 견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계시라는 말을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의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일 뿐, 은사주의자들은 성경 66권이 기록된 이후에 신약의 예언이 성경과 동일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은사중지론자들이 말하는 계시에 대한 해석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온 신학적 편견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계시를 받았거나 예언을 하면 자라보고 놀란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라는 속담처럼 성경말씀에 무엇인가 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심각한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말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모든 결정을 내리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확실하고 완벽하게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주 안에서 결혼할 것을 말하지만(고전 7:39), 어느 지역에 사는  누구와 어떻게 결혼을 하라고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 것처럼 누구를 인도하기 위해서( 16:13), 또는 권면하거나 위로하기 위해(고전 14:3), 때로는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16:9), 하나님이 성경을 초월하여 말씀하실 가능성은 성경이 그 자체에 대해 주장하는 충분성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Wayne Grudem이 말한 것처럼 순간적 계시에 근거한 예언을 통해 드러내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점을 인정하거나, Spurgeon이 설교 시간에 성령의 은사인지식의 말씀을 사용한다고 해서(고전 12:8), 이것이 성경의 충분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익을 주는(고전 12:7), 다양한 은사들( 12:6-8, 고전 12:8-10, 12:29-30, 4:11)이 초대교회가 사라진 뒤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거나 혹은 하나님이 입을 닫으셨다고 믿게 만드는 내용은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1세기 교회에서 성령께서 불신자의 죄를 드러내어 회개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초월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중요했다면(고전 14:24), 21세기에는 왜 그것이 덜 중요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은사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신비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기에 반드시 건강한 영성을 유지하려면 지적인 것과 체험적인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J. I Paker“The Holy Spirit and His Work” in Applying the Scriptures: Paper from ICBI Summit III』에서 한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믿는 기독교의 일부 가지들은 은혜 언약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의 구원적 사랑은 분명하고 건전하게 취급하는 것 같은데도, 활력을 주시는 성령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경건면에서 메마른 것 같다. 반면에 은사주의적 기독교의 일부는 그 모든 넘쳐흐르는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성자보다는 성령에 관심을 집중하고 사실상 성부를 무시한 탓으로 김이 빠져 버리고 스스로의 진흙 속에 빠져서 위축되고 미숙한 것처럼 보인다.”  간추려 요약하면 말씀만 강조한다면 방자한 지성주의자가 될 우려가 있고, 은사만 강조한다면 천박한 감성주의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에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균형 잡힌 신학과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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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과 “쥐와 고양이 게임”을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넌 절대 모를 거야”라고 약 올리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을 좀 더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친구처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 당신을 지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당신에게 말씀하기도 하시고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기도 하시는 것은 처음부터 하늘 아버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지으시되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1:27).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고, 실제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자신의 창조 세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분께서 지금도 당신과 교제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교제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실 것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맏형님 되시는 예수님께서도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해할 때까지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발표하시기 전 밤을 세워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했습니다( 6:12-13).  예수님께서는 새벽미명마다 한적한 곳으로 나가사 하루의 인도를 구하며 기도하셨습니다( 1:35).  여기서 “기도하시더니”라는 동사는 습관을 나타내는 미완료과거시제입니다.

 

2.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일거야”라며 추측하지 마십시오.  

한 방에는 엄마들로 꽉 차있고 마당에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을 때 만일 어떤 엄마가 자기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과연 몇 명의 아이들이 쳐다볼까요?  단 한 명만이 대답할 것입니다.  만일 그 아이의 이름이 '소망'이었고, 그 뜰에 세 명의 '소망'이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오직 한명의 '소망'이만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 '소망'이만이 자기 엄마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추측하지 않으셨으며,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확신을 갖고 사역과 삶의 현장으로 나가셨습니다.  하나님과 일치되어 온전히 모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에게 좌절이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하실 때 권위를 갖고 행하셨는데, 그것은 그 모든 일이 다 하나님 아버지의 승인을 받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분명하고 선명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3. 조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마음에 평안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조건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성령께서 주시는 깊은 평강이 없다면 절대로 행동하지 마십시오.  그 결정과 관련한 하나님의 평강이 당신의 마음을 주장하기 전까지는 주 앞에서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에 그분의 방법대로 응답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을 늦추시지만 그분의 시간에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응답을 주실 분만 아니라 늦어진 이유까지도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  다니엘도 하나님이 그의 요청에 응답하시기 까지 21일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말씀하시는 것을 막는 두 가지 장애물은 자신의 생각과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사탄도 우리 마음 가운데 어떤 인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탄의 목소리는 강하고 급하며 강요합니다.  사탄은 늘 어떤 위기 상황으로 우리를 몰고 가서는 우리로 어떤 행동을 급히 하도록 만듭니다.  반면 하나님의 음성은 조용하지만 일관성이 있고, 우리에게 잠시 물러나 조용히 기다리며 듣도록 권면합니다.

 

4. 사소한 일부터 먼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만 한다면 내가 귀 기울여 들을 텐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도 순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소한 일에 계속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큰 사역의 문을 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사소한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좌우하는 위기 상황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즉각적으로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만을 행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8:29).  큰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하나님의 음성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고 따라서 그분의 음성을 더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기억 하십시오.  많은 경우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미 밝혀진 진리에 대한 순종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 들으셨습니까?  이제 당신은 평범하게 살기에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든 것입니다.  주님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한 주간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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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이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신약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 성경 가운데 교회에서 행하는 중요한 일인 세례 19회 가량 언급되며, ‘성찬4회 가량 언급되는데 반해 그리스도의 재림은 300여회 언급되고 있다는데서 증명됩니다.  또한 그리스도 초림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던 구약에서부터 그리스도 재림이 암시되며(19:25-26, 7:13-14, 14:4, 3:1-2) 신약의 경우에는 장 전체(24-25, 13, 21, 고전 15)나 책 전체(살전, 살후, 요한계시록)가 재림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에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 주요 주제인 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며 또한 철저히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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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에서는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를 아무 죄도 없으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아 하늘에 올라 천상과 지상의 모후(母后)가 되셨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마리아를 성모(聖母)라고 부르고 각별한 공경과 기도를 드리며 모든 위험과 어려움에서 도와주기를 청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를 힘입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구원에 이르지도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카톨릭의 주장은 너무나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헌신하였던 자세(1:38)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성육신의 공로가 마리아에게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더군다나 마리아는 다른 인간과 구분될 수 없는 죄인이므로 예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도 아니며 예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자도 절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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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근거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증거입니다(20:31).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가지셨으나 그 인격이 하나라는 사실은 인간의 추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바울은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1:3-4)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한 인격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 모두를 가지신 것을 너무나 분명히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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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죄의식을 가졌다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죄의 분출과 동요를 보고 당신의 양심은 괴로워야 한다.  이 점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구제적으로 죄를 느껴라

첫째, 정직하고 거룩한 율법의 관점에서 당신 속에 나타나는 죄를 양심으로 느껴라.  하나님의 율법을 당신의 양심에 가져와 타락한 성품을 율법 아래에서 점검하라.  그리고 그 율법을 통해 자극 받기를 기도하라.  율법이 갖는 거룩함, 영성, 불 같은 엄격함, 절대성, 내면성을 생각하고 당신이 그 앞에서 어떻게 설 수 있는지를 살펴라.  율법 안에서 주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지를 양심으로 크게 느껴라.  그리고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당신의 범죄가 마땅히 응분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양심으로 깨달으라. 

아마도 당신의 양심은 그러한 생각을 회피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변명과 핑계들을 늘어 놓을지 모른다.  즉 율법의 정죄 능력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율법에서 자유롭다는 주장이다.  또한 율법에 순응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속에 정욕이 아직 죽지 않는 한, 당신의 양심을 정죄하는 죄의 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율법은 당신에게 그 동안 속여 왔던 죄의 정체를 보여줄 것이다.

더욱이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죄인들을 잡아 내고 하나님 보좌 앞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때 보좌 앞에서 죄인들은 자신들을 변론해야 한다.  이것이 당신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다.  율법이 당신을 발견하게 되면 하나님 앞으로 당신을 끌어놓을 것이다.  거기서 당신이 용서를 구한다면 잘 한 것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율법은 자신의 사명에 따라 당신을 정죄하게 될 것이다.  율법의 목적은 당신 속에 죄를 발견하고 그 죄에 대해 당신 영혼을 일깨워 겸손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한마디로 그것은 죄를 반사시켜 주는 거울이다.

실로 신앙을 공언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배교했다.  그들은 율법에서 자신들이 해방된 사람처럼 자부하고 율법의 안내를 전혀 받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판단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이런 태도를 통해 조금씩 죄의 원리가 그들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실제적인 이해력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사로잡게 되자 그들의 의지와 감정은 불경한 모든 죄에 노출되게 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나는 정욕과 타락에 대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율법의 소리에 당신의 양심이 부지런히 귀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둘째, 당신의 정욕을 복음이 빛 속에서 조명해야 한다.  이것은 복음에서 위안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더욱 자신의 죄를 인식하기 위함이다.  당신이 찌른 주님을 바라고 비통해 하라.  그리고 당신의 영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  내가 어떻게 그 큰 사랑과 자비, 보혈, 은혜를 경멸하고 짓밝았는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피, 그리고 성령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 이런 것이었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씻음을 받고 성령이 내주하게 된 나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내가 더럽혔단 말인가?  사랑의 주 예수님께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분과의 교제를 너무나 소홀히 다루어 나의 정욕으로 인해 나의 마음속에서 그분의 설 자리가 거의 사라졌던 것은 아닌가?  이 큰 구원을 무시한 내가 어떻게 심판을 회피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주님께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마음속에 정욕을 품기 위해서 사랑, 자비, 은혜, 선하심, 평화, 기쁨 위로 등을 모두 저버렸고 그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말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을 훼손시키는 행동들을 나는 계속할 것인가? 나의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주는 성령을 매일 근심시킬 것인가?”  매일 당신의 양심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지키게 하라.  즉 죄로 악화되기 전에 죄에 맞서 양심을 세우겠다는 다짐이다.  그렇게 다짐 하지 않는다면 두렵건대 당신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있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은혜와 죄를 숙고하라

복음의 일반적인 은혜 가운데에는 구원, 칭의 등과 같은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그 은혜들이 구체적으로 당신이 영혼에서 어떤 사랑을 베풀었으며, 그 사랑을 저버린 당신의 타락한 죄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첫째, 특별히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와 참으심을 고찰하라.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보고 이 세상의 수치거리와 영원한 분노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하셨다면 어떤 조치를 취하셨을지를 숙고해 보라.  또한 당신이 때때로 그 분에게 어떻게 거짓 행하며 반역했는지, 그리고 당신의 입술로 하나님께 아첨하면서 지금 추구하는 죄를 통해 그 모든 약속과 맹세를 어떻게 저버렸는지 생각하라.  실로 당신은 아직도 그 분에 대항해서 죄를 지을 것인가?  여전히 그 분을 싫증나게 하고 주님에게 당신의 타락한 행위에 동조하도록 계속 종용할 것인가?

당신은 종종 주님이 더 이상 당신을 참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가?  그분이 당신을 버리고 더 이상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며, 그분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해 이제 지옥과 분노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예상을 깨고 사랑으로 그런 당신을 지금까지 대해주셨다.  이런 은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은 그분의 영광의 눈을 화나게 하는 일을 계속 할 것인가?      

둘째, 죄의 속임수로 인해 거의 강퍅해진 당신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하고 풍부한 은혜로 자주 당신을 회복시키고 그분과 다시 교제할 수 있도록 그동안 역사하셨다.  그동안 당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점점 쇠퇴해 갔고, 당신은 의무, 규율, 기도, 그리고 명상과 같은 일에 흥미를 잃었었다는 사실을 당신도 인정하지 않는가?  또한 무절제하고 방탕한 삶이 기승하고 거의 회복 불가능한 정도로 당신이 죄에 얽매였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마음을 강퍅하기 위해 그런 일을 대범하게 계속할 것인가?

하나님이 은혜의 섭리 가운데 당신에게 베푼 구원, 고통, 자비, 즐거움 등은 모두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당신의 양심에 죄의식의 짐을 지워야 한다.  그리고 당신 속에 거하는 타락한 죄들로 인해 그 상처를 인식하고 주님 앞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석고대죄하며 철저히 괴로워 하라.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양심이 죄의식을 희석시킨다면 당신의 영혼은 죄를 죽이려고 결코 힘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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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진실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장하고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외형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우리의 품성 자체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훈련은 우리의 품성에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감사는 우리의 품성 중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철학자 키케로는감사는 가장 위대한 품성일 뿐 아니라 다른 모든 품성의 어머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만큼 감사는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다른 품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삶 속에 내적 평안을 경험하게 하고 인내심을 갖게 하고 긍휼한 마음을 갖게 하며 이외에도 여러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훈련을 통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감사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을까요?  마이클 지가렐리는 『예수의 품성을 가진 크리스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사물을 균형 있게 보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자신이 소유한 것보다 아직 소유하지 못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즉 사물을 균형 있게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늘만약 무엇을 했더라면 더 나은 인생이 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갈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미 허락하신 것을 순간순간 기억하고 분명하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무엇을 필요로 하든지 간에 이미 우리의 삶은 윤택하다는 사실을 부단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궁핍함 못지않게 풍요로움을 볼 줄 아는 사물을 균형 있게 보는 습관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2. 구체적인 감사의 습관을 기르십시오.

단순히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는 결심만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익힐 수는 없습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습관을 통해 감사가 몸에 베이도록 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성품을 성장시키고 유지하기 위한 실제적인 습관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 감사 일기를 사용해 보십시오.  이것은 오로지 당신의 인생 가운데 내려진 축복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다시 집중하게 만들 것입니다.  당신이 잊고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던 수많은 축복들을 기억나게 것입니다.  둘째, 정기적으로 금식하고 죄를 고백하십시오.  금식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육의 음식과 더불어 영의 양식을 선물로 주심에 대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정기적으로 고백하는 일은 우리의 허물과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켜 주는 좋은 수단입니다.  셋째, 연약한 자들을 위한 기도를 습관화하십시오.  주변의 연약한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가를 떠올리게 되고 이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감사할 이유를 발견하게 만들 것입니다.  연약한 자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그분의 눈부신 섭리의 가운데 우리 자신의 존재를 조명해 보는 연습이 것입니다.

 

3. 개인적인 감사의 습관을 기르십시오.

여러분에게 감사를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최근에 가장 감사하다고 느꼈던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감사의 감각을 발동시키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능한 한 여러 순간들을 회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순간들을 통하여 감사의 단서들을 찾아보십시오.  이런 과정을 통해 여러분들은 여러분만의 감사의 통로가 무엇인지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통로를 통해 개인적인 감사의 습관을 기르십시오.  자신만의 감사의 습관은 여러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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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2:6-8), 율법에 복종하시고(5:17), 수난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27:46), 결국 죽어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27:62-66).  이렇게 낮아지신 신분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이러한 일들은 이미 과거 역사 가운데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사실도 이미 과거의 일이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은 오늘날에도 계속 진행 되고 있는 일입니다.  반면 재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이므로 역사적인 증거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이 성경에는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풍부한 예언이 나오며(14:4, 13:26), 성경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점에서 재림 역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1:7).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 증언의 확실성을 믿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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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신 것은 사실이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간이 되도록 근본 원인을 제공하신 분은 결코 인간 마리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동정녀 마리아로 하여금 남자와 관계 없이 초자연적으로 잉태를 하게 하신 분은(1:35), 바로 어떤 자연법칙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19:26).  즉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아들을 내어주셨고(1:20), 성자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순종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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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원래 하나님으로 완전한 신성을 가지셨고(20:31), 인간으로 완전한 인성을 가졌지만(5:52), 인성은 신성에게, 또한 신성은 인성에게 어떠한 변화도 주지 않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한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주종(主從) 관계가 아닌 상태로 연합하여 신의 특성과 인간의 특성을 모두 드러내 보이시되 전혀 혼란은 없으셨던 것입니다(2:13).  이처럼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혼란없이 공존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신비입니다(4:4).  따라서 이는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신뢰함으로써 믿을 수 밖에 없는 신비로운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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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앙의 초보인 자매가 성령의 은사 방언’(고전 12:10)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면서 방언 받지 말 것을 강조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 자매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자기 자신의 잘못된 영적체험에 대해서만 신뢰할 뿐, 과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검증하지 않은 채(고전 14:27-29, 살전 5:21, 요일 4:1), 무조건 방언 받지 말 것을 주장하는 것은 성령이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신 귀중한 은사(고전 12:7)을 심히 거역하고( 7:51), 소멸하는 것으로 좋은 태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살후 5:19).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방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귀한 선물이고( 1:17), 믿는 자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자기 덕을 세우는 은사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고전 14:4, 26),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신자의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에게 잘못된 것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신뢰해야만 합니다( 7:9-11, 8:32).  그리고 누구든지 독단적인 말을 하거나 어떤 주장을 내세우기 전에 그것에 대한 연구조사를 미리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2때 분별력 없어 귀신이 주는 방언인지 아니면 자기 도취에 빠져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방언 받은 것으로 착각하며 쓴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의 저자처럼 이 자매 역시 성령의 은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부터 차분하게 배우지 않았기에 일어난 문제인 것 같습니다(딤후 3:14).  그러므로 자신의 분별력 없는 무지하고 미련하게 행동한 것을 하나님과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19:3).

 

오늘날 성령의 은사에 대해 체험이 없는 사람은 방언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에 잠재의식에서 올라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특히 Nils Bloch Hoel의 저서 『Pentecostal Movement』에서 말한 것처럼 방언을 심리학적 질병으로 진단하고 방언을 말하는 자를 일종의 변종으로 진단합니다.  그의 의학적 견해는 들어보면 “진정한 Xenolalia(외국어란 뜻)는 일시적인 정신적 현상으로서 환자가 황홀경에 들어가거나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때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외국어를 근육 운동을 통해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상태인 기억증진증(Hypermnesia)과 과거의 경험을 회상했을 때에 그것이 미경험인양 느껴지는 정신병리학에서 말하는 잠복기억(Cryptomnesia)이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만족스럽고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이 방언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Hoel의 이런 주장은 오늘날 방언하는 사람이 황홀경이나 정신적 충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상태가 온전한 가운데 방언한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나온 잡설(雜說)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된 대로 방언하는 자는 몰아지경에 들어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식이 있어 방언을 통제할 수 있고(고전 14:27-32), 성령이 역사하실 때 비합리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제하고 중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행 2:4, 14).

 

물론 고전적 신비주의 경건과 다른 일부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 예를 들면 혼자만이 성령의 은사를 독점적으로 체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이 예배나 기도 중에 광적이거나 자제력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무질서한 행동을 통해 일부 사람들의 마음속에 방언은 일종의 무아지경의 언어라는 생각을 심어주는데 일조했는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신앙의 초보이거나 말씀으로 무장되기보다는 은사를 먼저 받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묘사하는 바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오순절날 강한 능력으로 임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방언을 그치고 베드로가 모인 군중들에게 설교를 할 수 있었고( 2:1-21), 사도 바울도 방언을 순서에 따라하고 세 사람이 넘지 않게 하라고 명함으로서 방언을 말한 사람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과 스스로 자제할 수가 있고 아무도 방언하지 않을 때나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만 방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4:27).  더 나아가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할 것과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을 고린도 신자들에게 가르친 것으로 볼 때에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은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심리적인 방언이나 귀신이 주는 방언과 달리 충분히 자제력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고전 14:26-33)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바울이 방언을 일종의 무아지경(無我之境)의 말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방언의 은사에 대해 Peter Wagner는 “자신이 배우지 않는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역량이고, 그분께 받은 즉각적인 메시지를 자신이 배우지 않는 하나님의 성별된 언어로 그분에게 전달하는 역량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방언을 사적방언공적방언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먼저 사적방언은 흔히 기도의 언어로 간주하고 방언통역의 은사가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428절의 말씀을 제시합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통역이 없는 방언은 교회에서 활용되면 안 되고 그 은사를 가진 사람은 다만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공적방언은 방언통역의 은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통역이 없으면 공적방언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교회에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고전 14:27-28).  요약하면 사적방언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기도의 언어로서 자기의 덕을 세워주기 때문(고전 14:4)에 통역할 필요가 없지만 공적방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교회 공동체에 전달하는 것으로 반드시 통역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고전 14:23).  따라서 바울이 말한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는 말은 교회에 와서 개인적으로 방언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회중 가운데 통역하는 사람이 없을 때 즉, 예배 중에 통역이 없는 방언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 성령의 열매인 절제를 빼놓고 신앙생활을 한다면(5:23), 이런 초보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인해 고린도교회처럼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에 기록된 방언(고전 12-14)은 성령 하나님이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허락하신 귀한 은사이기(고전 12:11)에 누군가 방언을 금하거나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고 또한 방언은 남용이나 오용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지혜로운 관리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고전 14:40).  그리고 성경 어디에도 방언의 은사가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고전 13:8-10)에 오늘날 방언이 존재하느냐에 대해선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고, 방언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누리는 유익한 은사로(고전 14:14)서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는 놀라운 그분의 선물이기도 합니다(1:17).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모를 때 돕는( 8:26), 은사이기에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20).  물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6:18)과 로마서826절의 말씀을 해석할 때, 이 구절들은 방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도생활에서 발생하는 일반적인 체험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지만, 아무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에게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합니다(고전 14:18).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방언 말한 것보다 훨씬 많이 했다고 고백하는 이 말속에 그가 지녔던 영적인 권능의 비밀이 여기에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따라서 누군가 '방언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방언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신자들만이 말하는 천상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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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

진리의 성령 2018. 5. 11. 14:28

성령의 내주사역은 자동적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살기를 간구할 필요가 없고, 그분의 내주 임재를 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에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거처를 정하시고 내주하십니다(고전 3:16).  이와는 달리 성령의 능력은 자동적일 때가 거의 없고, 보통 기도의 응답과 안수를 통해 임하는데 그 예를 신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때( 20:19-23), 이것은 이미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주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물론 여기서성령을 받으라는 말씀만큼 논쟁과 토론의 대상이 된 구절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제자들이 성령을 두 번에 걸쳐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한번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찾아오셔서 성령을 주시고, 오순절 날에 다시 한번 성령충만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 대해 칼빈은 성령의 뿌림과 오순절의 흠뻑 적심으로 구분하고, 웨스트코트는 요한복음에서는 새 생명이 주어졌고, 사도행전에서는 사역을 위한 권능이 주어졌다고 해석합니다.  반면에 F. F 부르스는 웨스트코트와는 정반대로 해석하는데, 사실 이런 신학적 논쟁은 신앙생할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아무튼 성령은 제자들에게 이미 내주하셨고( 16:16, 고전 12:3), 그로부터 한 달 반이 조금 지난 후 오순절 날에 성령의 강한 능력이 입혀지는데( 2:1-4), 열흘 간 걸친 기도의 준비로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24:49).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할 때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8:12-13).  그리고 며칠이 지나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와 믿는 자들에게 안수할 때 그들이 성령의 능력을 입게 됩니다(8:14-17).  사도행전 19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나오는데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제자들을 만나 안수할 때 그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습니다(1-6).  마지막으로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나 믿었을 때 성령은 이미 내주를 하셨으나 그로부터 삼 일이 지나 아나니아란 사람이 바울에게 와서 안수할 때 성령의 능력을 받습니다( 9). 이처럼 초대교인들에게 있어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대부분은 성령의 능력 입힘은 구원받은 때가 아니고, 구원받은 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특별한 기도 응답으로 임할 때가 많습니다.  어거스틴이 살던 4세기 당시에는 새 신자가 교회에 나오면 장로들이 안수하고 성령받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은 자동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의 능력받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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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낮아지신 그리스도께서는(2:8), 잠시 보류해 두셨던 제2위 하나님으로서 신분을 회복하시게 됩니다(6:62, 17:5).  이와 같이 높아지신 신분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는(1:8), 다음과 같은 4가지 사역을 단계적으로 행하십니다.  부활(2:23-24), 승천(16:19),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3:1), 재림(24:30)이 바로 이러한 단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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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 사건의 유일하고도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이 절대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이를 긴 세월에 걸쳐 거듭 반복하고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구약은 그 초두에서부터 인류 구원자가 여자의 후손으로(3:15), 오실 것을 예언하기 시작하여 구약 전체를 통해 오실 메시야에 대한 대망으로 가득차 있으며(7:14), 특히 이는 구약 예언자들의 예언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9:6, 5:2).  그러나 신약 성경에는 실제로 구약 예언이 성취되어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활동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10:30),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본래는 하나님이셨으나(1:1), 사람이 되어 세상에 왔다고 친히 주장하는 것입니다(11:42, 14:19, 16:28, 17:16).  이처럼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전대 미문의 대사건은 유일하게 성경만이 증언하고 있지만(21:31), 이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며(5:39), 성경 전체가 이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므로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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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이란 한 개인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인 면을 총괄할여 일관성 있게 움직이게 하는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두 인격을 가지셨다면,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두 분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한 존재 안에 두 인격이 있다는 것은 의식이 통일되지 않고 이중의식 체계를 가진 정신병적 변태의 하나인 이중 인격자란 말이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두 인격이 있다면 우리는 행동에 일관성을 잃은 정신병자를 구주로 섬기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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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음과 양심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변함없는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죄의식

사람이 정욕의 지배를 받을 정욕은 사람에게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도록  속인다.  그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우상 신에게 경배를 하나님도 정도는 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왕하 5:18).  또한 이것은 나쁘지만 다른 악에 비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구실을 대도록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도 이런 생각의 속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윗은 율법의 아래서 수많은 변명을 통해 자신의 혐오스런 죄의 추악함과 죄성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분명한 죄의식을 가졌었다면 그처럼 오랫동안 죄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죄를 질책할 먼저 다윗의 모든 변명들과 구실들을 비유를 통해 일축했다.  그러자 비로소 다윗은 온전히 자신의 죄를 인식할 있었다(삼하 12:1-15).  이처럼 정욕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종말에 그리스도는 타락한 자녀들을 다루실 ( 3:15), 그들의 뿌리를 감찰하시고 겉으로 하는 그들의 신앙고백을 무시하신 내가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마음이 입으로 말한 것과 다름을 지적하시고, 그들을 향해 스스로 가증스러운 존재가 되었음을 꾸짖을 것이다.  당신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자신 속에 거하는 죄성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갖기 위해 노력하라.  그래서 마음을 약화시키거나 변명하게 만드는 생각들을 청산하고 죄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라.

 

죄의 위험들

히브리서 312-13절에서 바울은 죄의 속임수로 인해 우리가 강퍅해질 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바울의 요지는 주의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시험을 깊이 생각하고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강퍅함이란 완고함이라는 뜻이다.  실로 죄의 지향점은 바로 이런 완고함이다.

그러므로 모든 정욕들은 발전해서 사람을 완악하게 만든다.  한때 온유했고 하나님의 말씀과 고난을 통해서 부드러워졌던 사람이 정욕으로 인해, 불경스러운 표현을 빌리자면 이상 설교 말씀이나 질병 앞에서도 찔림을 받지 않고 완고해 진다.  또한 과거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했고 죽음에 대한 생각과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서는 일로 두려워했던 사람이 마음에 완악함으로 인해 이상 그런 생각들에 동요죄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 상태와 죄에 대한 지적을 당해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기도, 설교, 말씀 읽기와 같은 책임을 유기한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은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죄가 이렇게 자라나면 종착지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참담한 상태이다.  다시 말해 , 은혜, 그리스도의 , 율법, 천국과 지옥 등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고 말은 사실이다( 8:1).  하지만 누구나 이와 같은 주장을 통해 위로를 받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런 주장을 있는가?  해답은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는 사람이다’( 8:5-8).  여기서 혹자는 로마서81절의 말씀은 결국 사람들에게 불신앙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가지 측면에서 스스로를 판단한다.  첫째는 자신의 인격이고 둘째는 자신의 행동 양식이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격이 아니라 행동 양식에 관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인격에 대해 좋은 증거들을 가지고 호의적인 판단을 내릴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자신의 사악한 행동 양식이 파멸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판단할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판단 능력이 없다면 그는 무신론자이다. 

 

죄의 사악함

정욕을 죽이지 못하 부수적으로 동반하는 많은 악들에 대해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죄는 성도의 마음속에 거하도록 보내진 성령을 근심케 한다( 4:25-30).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는 이유는 성령을 통해 우리가 수없이 좋은 혜택을 받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혜택 중에 가장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혜택은 구속의 날까지 성령이 우리에게 인치심을 주는 은혜이다( 1:13). 

부드러운 사람이 친구의 무례함을 보고 근심하는 것처럼 성령은 죄의 정욕을 보면 근심하게 된다.  성령은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모습으로 우리의 영혼들에게 소원들을 이루어 주기 위해 우리 속에 내주하신다.  이때 우리가 물리쳐야 대적들을 여전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성령은 그것을 보고 근심하게 된다.  우리에게 어떤 고통과 근심도 주지 않는 성령( 3:33) 우리가 매일 삶속에서 근심시킨다면 정말 배은망덕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마음과 생각을 항상 정결케 하고 모든 영역에서 거룩함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가장 이유는 그들 속에 거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고 그들과 만나주시는 성령 때문이다.  성령은 사람들 속에 거하여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즐거워하는지를 주시한다.  이때 그들이 자신들의 성전을 정결케 한다면 성령은 그것을 보고 크게 기뻐한다. 

구약에서 시므리는 모세와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 창녀를 회중 가운데로 데려와 이스라엘을 근심케 적이 있었다.  이것은 시므리가 저지른 가장 죄악이었다( 25:6).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령이 성도의 마음에 있는 성전을 정결케 하기 위해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고 있을 , 우리가 죄의 정욕을 마음속에 데려와 마치 성도에게 당연한 일인 죄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면 이것은 정말 악이 아닐 없다. 

둘째, 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 상처를 입히는 악을 행한다.  실로 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을 빼앗고 대적자인 마귀의 욕망을 채워준다.  죄의 속임수를 통해 주님을 완전히 저버리는 행위는 주님을 다시 박는 행위와 같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멸하기 위해 왔던 죄를 다시 마음에 품는 행위도 분에게 상처를 주고 분을 근심케 한다. 

죄는 세상에서 사람의 유용성을 말살시킨다.  그래서 죄에 지배 아래에 놓인 사람은 아무리 노력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거의 받지 못하게 된다.  만약 그가 설교자라면 하나님은 그의 사역의 훼방꾼이 되어 결국 그를 불구덩이 속에서 사역하도록 만드실 것이다.  결과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그는 실제로 아무런 성취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실로 세상은 신앙을 공헌하지만 스스로를 괴멸시키는 불쌍한 영혼들로 가득 있다.  정말로 아름다운 영광의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매우 극소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폐하여 거의 쓸모없는 사람들이다.  특별히 우려되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자신들의 영을 삼키는 정욕들을 계속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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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 노르웨이의 오슬로가 그랬다.

그녀는 내가 그곳의 교회에서 설교한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오슬로에 그녀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즉시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방문 약속을 잡았다.

친구들이 그녀를 집회 장소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테레시아는 돈을 모아서 왕복 비행기 표를 샀다. 

떠나기 전에 나이로비의 모든 친구들이 그녀와 함께 기도했고,

그녀가 갈망하는 성령의 불을 받아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오슬로의 교회가 문을 열자마자 테레시아가 먼저 들어갔다.

교회에 사람들이 가득 때까지 테레시아는 앉아서 기다렸다.

그때 지역에 사는 자매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했다.

“당신이 하나님께 받기 원하는 어떤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당신에게 주시겠다고 제게 말씀하셨어요”

그것은 놀라운 확증이었다.

테레시아는 자매에게 감사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끝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어 강대상에 올라간 나는 테레시아의 존재를 금세 알아챘다.

노르웨이 교회에서 아프리카 여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아프리카 전통 의상을 입은 그녀는 눈에 띄었다.

내가 병자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면

그녀는 기도를 받으러 쏜살같이 달려 나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이미 8년이란 시간을 기다렸지만 다음 초청까지 20분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내가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앞으로 달려 나와 앞에 서서 기대감에 떨고 있었다.

 

다음에 일어난 일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고

테레시아는 결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내가 그녀의 머리에 안수했는지 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그것을 인식할 겨를이 없었다.

하나님의 불은 손의 안수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여하간 나는 그녀의 머리에 안수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강력한 힘에 의해 아래로 밀려 넘어져 공중으로…

힘이 너무나 강력해서 그녀의 신발이 양쪽 벗겨졌다.

한쪽 신발은 노르웨이 청중들 한가운데 떨어졌는데 다시 찾을 없었다.

 

오슬로의 집회가 끝났고 나는 독일로 돌아갔다.

그때 테레시아는 교회 바닥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의식을 되찾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다리가 너무 후들거려서 친구들이 그녀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

그리고 그날 신었던 신발 짝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밤에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기 위해

신발 짝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테레시아에게 부으신 기름부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녀는 축복을 헛되이 받지 않았다.

테레시아는 사역의 능력을 받으려고 왔기에 사역을 것이었다.

1988 우후루 공원에서 울던 여자 테레시아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었다.

“오 하나님, 본케 목사님에게 10 명의 영혼들을 주실 있으시다면

제게 100명을 100명이라도 주세요.

주여, 그러면 저는 행복한 여자가 되겠습니다”

 

테레시아는 오늘날 매우 행복한 여자가 되었다.

아프리카 사람들 입에 그녀의 이름이 회자된다.

나는 그녀의 승리를 전해 듣고 주님께 물었다.

“왜 주님께서는 위대한 사역에 이혼녀를 선택하셨습니까?

우리 성경학교에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많은 훌륭한 남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대신 테레시아를 선택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말씀을 내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테리시아를 선택한 것은 내가 깨어진 그릇을 취하여

영광의 그릇으로 만들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말씀이 나를 얼마나 겸손케 했는지 모른다.

 

오슬로 집회 2 그리고 내가 우후루 공원에서 설교한지 정확히 10 후인 1998

나는 아내 아니와 나이로비를 방문했다.

우리는 공원 옆의 호텔에 묵었다.

나는 일부러 첫째 주일에 그곳에 찾았다.

그날 우후루 공원에는 20 명이 모였다.

테레시아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설교했고,

수천 명이 주님께로 돌아왔다.

마치 사도행전이 계속되고 있는 같았다.

 

라인하르트 본케 『부흥, 성령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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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8:1)에 그와 같은 간증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에 대한 확증을 더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객관적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영적체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가능한 일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마귀가 성도들을 미혹해서 그러한 영적체험을 하게도 할 수 있기 때문(살후 2:9-12)에 성경 외에 그 어떤 것도 객관적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고전 4:6).  전도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한 체험이나 간증은 사실상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죽은 자가 살아나 증거하여도 결국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16:31).  따라서 개인의 체험이나 간증은 당사자에게 믿음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겠으나 객관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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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 사건을 기준으로 구약과 신약이 구분됩니다.  즉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과 그 성취를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구약이 구원의 약속에 대한 기록이고 신약이 구원의 성취에 대한 기록인바 약속된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속사를 구획짓는 큰 사건인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받고 기다리는 구약의 역사였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그 이후의 역사는 구원의 성취와 완성을 향하여 진행하는 신약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신실하게 이루어짐을 확증하는 실로 놀라운 인류 최대의 사건이므로 구약과 신약을 구분 짓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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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인격만을 가지셨는데, 이를 우리는 그리스도 인격의 단일성이라고 부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의 진술에 의하면  “두 개의 전체적이며 완전하고 구별된 본성들, 곧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은 분할할 수 없게 한 인격 안에 결합되어 변질되거나 혼란되거나 혼동될 수 없게 되었다. 이 분은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사람이며 한분이신 그리스도요 사람 사이에 있는 유일한 중보자시다. 즉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완전한 인성(1:25)과 하나님으로서 완전한 신성(1:1-3, 18)을 가지신 것은 사실이나, 이 두 가지는 모두 한 인격 안에서 완전히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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