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과 양심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변함없는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죄의식

사람이 정욕의 지배를 받을 정욕은 사람에게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도록  속인다.  그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우상 신에게 경배를 하나님도 정도는 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왕하 5:18).  또한 이것은 나쁘지만 다른 악에 비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구실을 대도록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도 이런 생각의 속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윗은 율법의 아래서 수많은 변명을 통해 자신의 혐오스런 죄의 추악함과 죄성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분명한 죄의식을 가졌었다면 그처럼 오랫동안 죄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죄를 질책할 먼저 다윗의 모든 변명들과 구실들을 비유를 통해 일축했다.  그러자 비로소 다윗은 온전히 자신의 죄를 인식할 있었다(삼하 12:1-15).  이처럼 정욕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종말에 그리스도는 타락한 자녀들을 다루실 ( 3:15), 그들의 뿌리를 감찰하시고 겉으로 하는 그들의 신앙고백을 무시하신 내가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마음이 입으로 말한 것과 다름을 지적하시고, 그들을 향해 스스로 가증스러운 존재가 되었음을 꾸짖을 것이다.  당신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자신 속에 거하는 죄성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갖기 위해 노력하라.  그래서 마음을 약화시키거나 변명하게 만드는 생각들을 청산하고 죄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라.

 

죄의 위험들

히브리서 312-13절에서 바울은 죄의 속임수로 인해 우리가 강퍅해질 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바울의 요지는 주의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시험을 깊이 생각하고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강퍅함이란 완고함이라는 뜻이다.  실로 죄의 지향점은 바로 이런 완고함이다.

그러므로 모든 정욕들은 발전해서 사람을 완악하게 만든다.  한때 온유했고 하나님의 말씀과 고난을 통해서 부드러워졌던 사람이 정욕으로 인해, 불경스러운 표현을 빌리자면 이상 설교 말씀이나 질병 앞에서도 찔림을 받지 않고 완고해 진다.  또한 과거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했고 죽음에 대한 생각과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서는 일로 두려워했던 사람이 마음에 완악함으로 인해 이상 그런 생각들에 동요죄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 상태와 죄에 대한 지적을 당해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기도, 설교, 말씀 읽기와 같은 책임을 유기한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은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죄가 이렇게 자라나면 종착지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참담한 상태이다.  다시 말해 , 은혜, 그리스도의 , 율법, 천국과 지옥 등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고 말은 사실이다( 8:1).  하지만 누구나 이와 같은 주장을 통해 위로를 받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런 주장을 있는가?  해답은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는 사람이다’( 8:5-8).  여기서 혹자는 로마서81절의 말씀은 결국 사람들에게 불신앙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가지 측면에서 스스로를 판단한다.  첫째는 자신의 인격이고 둘째는 자신의 행동 양식이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격이 아니라 행동 양식에 관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인격에 대해 좋은 증거들을 가지고 호의적인 판단을 내릴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자신의 사악한 행동 양식이 파멸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판단할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판단 능력이 없다면 그는 무신론자이다. 

 

죄의 사악함

정욕을 죽이지 못하 부수적으로 동반하는 많은 악들에 대해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죄는 성도의 마음속에 거하도록 보내진 성령을 근심케 한다( 4:25-30).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는 이유는 성령을 통해 우리가 수없이 좋은 혜택을 받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혜택 중에 가장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혜택은 구속의 날까지 성령이 우리에게 인치심을 주는 은혜이다( 1:13). 

부드러운 사람이 친구의 무례함을 보고 근심하는 것처럼 성령은 죄의 정욕을 보면 근심하게 된다.  성령은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모습으로 우리의 영혼들에게 소원들을 이루어 주기 위해 우리 속에 내주하신다.  이때 우리가 물리쳐야 대적들을 여전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성령은 그것을 보고 근심하게 된다.  우리에게 어떤 고통과 근심도 주지 않는 성령( 3:33) 우리가 매일 삶속에서 근심시킨다면 정말 배은망덕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마음과 생각을 항상 정결케 하고 모든 영역에서 거룩함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가장 이유는 그들 속에 거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고 그들과 만나주시는 성령 때문이다.  성령은 사람들 속에 거하여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즐거워하는지를 주시한다.  이때 그들이 자신들의 성전을 정결케 한다면 성령은 그것을 보고 크게 기뻐한다. 

구약에서 시므리는 모세와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 창녀를 회중 가운데로 데려와 이스라엘을 근심케 적이 있었다.  이것은 시므리가 저지른 가장 죄악이었다( 25:6).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령이 성도의 마음에 있는 성전을 정결케 하기 위해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고 있을 , 우리가 죄의 정욕을 마음속에 데려와 마치 성도에게 당연한 일인 죄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면 이것은 정말 악이 아닐 없다. 

둘째, 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 상처를 입히는 악을 행한다.  실로 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을 빼앗고 대적자인 마귀의 욕망을 채워준다.  죄의 속임수를 통해 주님을 완전히 저버리는 행위는 주님을 다시 박는 행위와 같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멸하기 위해 왔던 죄를 다시 마음에 품는 행위도 분에게 상처를 주고 분을 근심케 한다. 

죄는 세상에서 사람의 유용성을 말살시킨다.  그래서 죄에 지배 아래에 놓인 사람은 아무리 노력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거의 받지 못하게 된다.  만약 그가 설교자라면 하나님은 그의 사역의 훼방꾼이 되어 결국 그를 불구덩이 속에서 사역하도록 만드실 것이다.  결과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그는 실제로 아무런 성취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실로 세상은 신앙을 공헌하지만 스스로를 괴멸시키는 불쌍한 영혼들로 가득 있다.  정말로 아름다운 영광의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매우 극소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폐하여 거의 쓸모없는 사람들이다.  특별히 우려되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자신들의 영을 삼키는 정욕들을 계속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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