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18.03.31 성령의 충만함
  2. 2018.03.30 자연 속에 계신 하나님
  3. 2018.03.29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었는가?
  4. 2018.03.28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셔야 했는가?
  5. 2018.03.27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6. 2018.03.24 죄를 죽이기 위한 3가지 지침
  7. 2018.03.23 믿음의 항해
  8. 2018.03.22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예수의 생명 회복 행위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가?
  9. 2018.03.21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왜 사람이 되셨는가?
  10. 2018.03.20 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서 쉬고 계시는가?
  11. 2018.03.16 구약시대의 성전과 신약시대의 교회
  12. 2018.03.15 죄를 사해 주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이 예수님이 하나님되심을 증거하는가?
  13. 2018.03.14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은 과연 누구인가?
  14. 2018.03.13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면 어떻게 성도들과 항상 함께 하실 수 있는가?
  15. 2018.03.09 큐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십시오
  16. 2018.03.08 예수님의 권세와 통치를 통하여 그분께서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는가?
  17. 2018.03.07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18. 2018.03.06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19. 2018.03.03 거듭난 신자도 타락할 수 있는가?
  20. 2018.03.02 분별하는 법
  21. 2018.03.01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천지 창조 사역에도 동참하셨는가?

성령충만또는성령세례그리고기름부으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난해한 구절이기 때문에 극단적 칼빈주의(Hyper Calvinism) 신앙을 가진 자들 중에는것이 오용될 우려가 있다고 느낀 나머지 그냥 회피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방언이나 성령이 임할 나타나는 격렬한 감정의 표출, 특히지식의 말씀예언같은 새로운 형태의 계시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사실 어떤 교리가 오용될 우려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무시하거나 부인할 없는 이유는 모든 교리가 지금까지 그런 과정을 통해 바로 잡아지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여전히 오용되고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러한 교리는 방언과 예언, 나아가 눈에 거스리는 성령 안의 안식거룩한 웃음’,  그리고 흐느낌몸의 진동등등 하나님께 대한 비이성적인 접근 방법에 관련되어 왔기 때문에, 오랫동안 제도주의와 교회질서를 강조하는 종교적 전통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무시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교리와 관련하여 도에 지나친 행동들, 예를 들어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사람이 다른 형제에게 오만하거나 편협한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만이 가장 성경에 근접한 순복음적이라고 주장할 , 바로 이러한 행동에 근거하여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좋지 않은 고정관념이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것이 우리의 상상력을 왜곡시킨 나머지 교리에 대한 건전하고도 균형 잡힌 이해와 실천이 어떤 것인지를 마음속으로 그려볼 없을 정도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모두는 성경 전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성령충만에 관한 교리뿐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가 에베소서 518절의 말씀처럼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충만한 삶을 살기를 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비성경적이고 균형 잡히지 않은 신앙, 비록 그것이성령충만이라는 미명하에 행하여지는 어떤 것도 가령 그것으로 인해 오만하고 사랑이 결여된 행동을 한다면 그 성령의 충만함은 본인 자신에게는 신비스러운 충만(?)이 될지 모르겠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순수한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고전 13:1-3).  다시 말해 성령충만했다고 해서 우리가 전보다 더 완벽해지는 것도 아니고, 지식의 말씀이나 주어지는 모든 예언들이 항상 옳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고전 14:29), 만일 누군가가 성령충만함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원래부터 감정적이었던 사람은 더욱 감정적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굳이 전보다 더 신령한 인간이 된 것 같이 외식적이고 과장된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의 충만함 혹은 누군가를 통해 기름부으심을 받은 것을 가지고 거만하게 행동하거나 떠벌이고 다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오직 겸손과 사랑 가운데서 모든 면에 더욱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2:5).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베푸시고 사역자로 써주시는 것이 우리가 선하거나 잘나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고전 1:26-29).

 

먼저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단지 구하기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11:13),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8:2), 구원의 주로 영접할 (10:9), 성령은 우리의 입술을 통해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16:16-17), 예수님을 진정 로 시인하도록 도와주십니다(고전 12:3).  그러나 우리의 연약한 인성으로 인해 성령충만이 방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오순절날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베드로와 같이 일단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16:17), 어느 때인가 성령께서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주시기를 간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2:1-4).  더 나아가 성령충만은 예수님을 닮아가고(5:18-21), 그 분처럼 사역을 행할 있는 능력을 가져다주는 것이지만(14:12, 1:8), 여기서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외부로부터 부어지는 것인지( 3:16, 2:2-3, 4:31), 아니면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름 부음(딤후 1:6, 요일 2:20, 27)분출되는 현상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든지 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성령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특별한 방식으로 임해 주시기를 기대할 있습니다( 5:17).  그리고 이 성령충만은 회심의 체험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에게는 사도 바울처럼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다주는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9), 또 다른 사람에게는 디모데 같이 매우 부드럽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딤후 1:5-6).

 

그리고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방언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지만( 2:4, 19:6),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은사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고전 12:30)에 그리스도인들 중에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 방언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10:46).  또한 어떤 사람은 사역자로부터 안수를 받음으로 성령충만을 받기도 하는데( 9:17), 사실 이러한 방식이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 아닌 이유는 고넬료 가정처럼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0:44-48).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영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 주변에 영적인 삶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도 성령충만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구함으로써 성령충만을 받게 되는 것이고( 11:13), 결코 영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해서 받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이란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지( 15:5), 이러한 삶이 성령충만의 전제조건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빚진 자에게 빚을 요구한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고전 12:11), 결코 사역자의 의로움이나 공로에 의해 주어지는 일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4:4-5).  그렇지만 이 성령충만은 도덕적인 자질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엡 5: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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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은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천둥과 번개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있으며,

햇빛과 미풍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있다.

무르익은 곡식 가운데서

하나님의 풍부하고도 

세밀한 은혜를 있다.


산봉우리와 계곡을 바라볼

아름다움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있으며,

아름답게 꽃을 때에 

하나님의 기쁨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통해

무한하신 선과 지혜,

그리고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C. H. 스펄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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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제사장을 비롯하여 서기관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26:57-68).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고(14:61),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비난하며 죽이려고 했습니다(5:18).  이처럼 유대인들은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예수님의 주장을 황당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8:58).  그들이 보기에 나사렛 예수는 한낱 과대망상증의 미치광이 젊은이에 불과했습니다(7:1).  따라서 그들은 예수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11:53).  스스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 받았던 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몰라보고 박해하며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고전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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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제 2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지 않았다면(1:14), 결코 인간 구원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범한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 죄의 형벌로 죽음을 선언하셨고(3:19, 5:12), 이것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엄정한 선언이기 때문에 그냥 취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를 대신 받을 무죄한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4:15).  따라서 아담이 지은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시므로(벧전 2:22), 무죄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2:6-8), 인간을 대신하여 스스로의 몸을 받쳐 산 제사를 드리시므로(히 9:26), 인간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던 것입니다(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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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증거하도록 역사하십니다(14:26).  이것이 선지자로서의 사역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택한 백성들에게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도록 간구하고 계십니다(7:11, 요일 2:1).  이것이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아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1:20-22, 2:9-11).  이것이 왕으로서의 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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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

일반적으로 죄를 죽이는 사람을 위한 지침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죄를 죽이기 위한 지침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타락한 죄의 습관을 무력화시켜라

사람이 항상 한 가지 정욕만을 추구하지 않은 이유는 그 속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정욕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는 다양한 형태를 띤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자아 만족을 지향한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은 항상 악을 품고 있으며 그들의 정신은 악을 향해 기울여져 있고 육체에게 자양분을 제공한다(3:4).  타락한 죄의 습관은 다른 천성적 습관이나 도덕적인 습관과는 다르다.  특별히 천성적인 습관은 영혼으로 하여금 부드럽게 자신의 원하는 바를 행하도록 유도하는 반면, 죄의 습관은 폭력과 충동을 통해 영혼에게 강요한다는 데서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은 영혼을 거스러 싸운다(벧전 2:11).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인간의 영혼을 포로로 잡는데 성공한다.  즉 폭력과 충동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한 가지 주의할 점을 이야기 하면 모든 정욕이 균등하게 그리고 보편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강요하고 유혹하지만 때로 특정 정욕이 다른 정욕보다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그런 경우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로 어떤 사람에게 있는 특정 정욕이 우연히 계속적으로 활력을 얻고 힘을 얻어 다른 정욕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또한 다른사람에게 발휘되는 것보다 훨씬 그 사람에게 더 큰 활력과 생기를 가지고 영향을 미치는 경우이다.  어떤 정욕이 당사자의 기질과 삶의 방식과 잘 막거나 사탄이 그 정욕의 핸들을 쥐고 조종할 때 그 정욕은 다른 정욕들보다 더 훨씬 그에게 폭력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동일한 정욕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 이상으로 더 격렬하게 그에게 역사한다.  그 결과 정욕의 물줄기는 그 사람의 생각을 어둡게 하고 그가 이전에 가졌던 지식들은 그의 의지에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  대신 타락한 감정과 열정들이 죄로 인해 고삐가 풀린 채로 불출된다.  특별히 정욕은 유혹을 통해 힘을 얻는다.  그래서 적당한 유혹이 정욕과 합세하게 되면 정욕은 새로운 힘과 활력을 얻어 이전과 달리 더욱 폭력적으로 광포하게 날뛰게 된다. 

두 번째는 일반적인 견지에서 어떤 정욕이 다른 정욕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폭력적인 경우가 있다.  바울은 정결하지 못한 음행을 그 밖의 다른 죄들과 구별하여 따로 명시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여기서 음행의 죄는 다른 어떤 죄보다 더 쉽게 분별될 수 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죄도 이것 못지 않게 위력적인 죄의 습관이지만 그런 것들은 음행처럼 사람에게 전인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다.  따라서 죄를 죽이기 위해 첫 번째 할 일은 이런 습관을 약화시키고 죄의 습관이 전처럼 우리에게 강요하거나 소동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 이상 우리를 유혹하고 마음 속에 평화를 빼앗지 못하도록 죄의 활력과 기운을 죽이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행위를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말합니다(5:24).  이것이 바로 죄에게 힘을 공급하는 피와 정신을 차단하는 행동이며 매일매일 우리가 우리의 죽을 몸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이다(고후 4:16).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면 그는 처음에는 고통 속에서 온 힘을 다해 절규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의 피와 정신이 쇠하게 되면 그의 노력은 기운을 잃고 희미해진다.  그리고 그의 울부짖음도 잠잠해져 쉰 소리를 내고 거의 들리지 않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죄를 죽이려고 할 때 죄는 더욱 폭력을 휘두르며 발광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울부짖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죄를 계속 죽이게 되면 죄의 피와 정신은 소진되고 무기력하게 된다.  그래서 울부집음도 거의 들리지 않게 된다.  때때로 죄가 죽어가는 힘을 다해 발악하며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그 죄를 제지한다면 그것은 곧 소멸하게 된다(6:6).

 

2. 죄의 힘을 억제하라

죄가 강력하고 원기왕성하면 우리의 영혼은 죄와 대항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우리 영혼은 다윗처럼 한숨을 쉬고 신음하게 된다.  그리고 죄를 추적해서 물리치려는 의지를 상실하게 된다.  다윗은 시편 4012절에서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불 소도 없다고 고백했다.  실로 그는 죄 앞에서 정말로 무력했다.  이제 죄의 힘과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먼저 사람은 자신이 싸워야 하는 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실로 무엇보다 적을 주목하고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 적을 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사람은 격렬하며 위험한 투쟁이다.  참으로 이것은 영원과 관련된 싸움이다.  사람이 자신의 정욕을 일단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자체는 정욕을 죽이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 행위이다.  이와 같은 행위가 없다면 결코 죄를 죽일 수 없다.  하지만 두렵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적을 잘 알지 못한다.  그 결과 쉽게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자신들이 처해 있는 위험을 모른 채 타인의 충고나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대하 16:10).

둘째, 죄와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죄가 취하는 방법과 계책을 알고 죄에게 유리한 상황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 적과 싸울때에도 마찬가지다.  전쟁터에서 장수는 먼저 싸우기 전에 적군의 전술과 전략을 파악하고 적군이 전에 어떤 방식으로 싸움에서 이겼는지를 연구한다.  이것이 바로 지혜이다.  만약 이런 행동이 없다면 싸움은 엉망이 될 것이다.  정욕과 싸워서 그것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은 행동이 필요하다. 

셋째, 그 다음으로 죄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죄를 향해 필살의 일격을 가할 수 있는 무기들로 자신을 항상 무장해야 한다.  이것이 죄와의 싸움에서 가장 큰 핵심이다.  이렇게 무장한 사람은 죄가 잠잠할 때에도 죄가 죽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죄에 대해 새로운 일격을 가하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예였다(3:5).  만약 당신의 영혼이 이와 같은 자세로 죄와 싸우고 있다면 확실히 당신은 이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셈이다.  그래서 결국 죄는 공격을 받고 죽어가게 될 것이다.

 

3. 죄의 정욕과 싸워 승리하라

정욕과 번번히 싸워 승리하는 모습은 죄를 죽이는 삶의 증거이다.  여기서 승리라는 말은 단순히 죄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패퇴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망가는 죄를 추적해서 완전히 쳐부순다는 뜻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죄가 활동해서 우리를 유혹하고 육체의 정욕을 채우도록 육신적인 생각을 부추길 때, 즉시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깨닫고 그 죄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 앞으로끌어내어 정죄한 다음 끝까지 따라가 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이른 사람은 정욕을 그 원리와 뿌리까지 약화시킬 수 있다.  이상의 것을 종합하면 우리의 타락한 품성을 부추기는 죄를 죽이는 일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죄를 죽이는 사람의 핵심은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도록 강요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든 죄성을 무력화시키는데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와 직접 대항해서 그것을 파괴시키는 은혜의 원리들을 마음의 습관으로 간직하고 그것을 통해 죄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을 겸손의 마음으로 물리치고, 흥분을 인내로, 불결함을 청결한 마음과 양심으로 누그러뜨려야 한다.  또한 세상에 대한 욕구를 천국에 대한 생각으로 무력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은혜의 원리들은 성령의 은혜로서 성령을 통해 역사하는 습관적 은혜이다.

둘째, 성령 또는 우리 속에 새 사람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기미함과 활력을 가지고 죄와 대항해서 기쁘게 싸운다.  그러므로 죄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우리에게 제공된 이러한 자원들을 계속해서 활용하는 일이 두 번째로 중요하다.

셋째는 바로 앞에서 말한 그 두 가지 사실로 인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타락한 성품은 난공불락처럼 극복될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며 보편적인 의미에서 이미 정복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영혼은 죄의 저항을 어느 때보다 더 잘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죄가 나타날지라도 적어도 은혜 언약으로 인해 그 죄는 우리의 양심에 있는 평화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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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2 9과에서는 중생에 대해 배우게 된다.  훈련생들은 이 과를 통해 중생이 무엇이며, 어떻게 중생 받을 수 있는가를 이해하게 되며, 믿음과 중생의 관계, 중생의 확실성에 대해 배우게 된다.  나아가 중생 받은 증거와 함께 삶의 열매로서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각자의 삶 속에 지금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배우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믿음의 향해』2 9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이 책을 통해 훈련생들은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다.  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고, 만족할 수 없는 하나님이 빚으신 공백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알도록 지음 받았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이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알도록 네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첫째는 만물로, 모든 사람이 이것을 본다.  둘째는 인간의 양심으로, 모든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있다.  셋째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다른 모든 것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모른다면 다른 어떤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문제는 죄로,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죄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에 반하는 것으로, 우리의 말이나 행동, 생각이나 상상, 계획, 그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완전한 기분에 미달하는 것은 다 죄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는 단 한사람의 의인도 없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모두 썩어 있다죄는 우리를 무력하게 하고, 노예 되게 하였으며,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무능하게 만들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삶은 절대 진정으로 변할 수 없다.  죄가 영혼의 암이라면 복음은 하나님의 신적인 치료법이며 유일한 치료법이다. 분명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먼저 나쁜 소식이 얼마나 나쁜지 깨닫기 전에는 그 좋은 소식이 왜 그처럼 좋은 것인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은혜란 우리가 완전하고도 절대적으로 우리 죄로 인해 죽게 되었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기로 결정하셨다는 의미다.  은혜란 우리가 받기에 마땅하지 않은 것(구원)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은혜는 공로나 종교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오며, 은혜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한다.  은혜는 원천이고, 믿음은 수단이며, 구원은 결과인 것이다.  은혜는 당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소식의 중심에 있다.


성경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유일하게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예수님에 대해 좋은 감정을 느낀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엄청난 한 가지 진리를 고백하는 남녀들로 구성된 공동체로 이 진리는 바로 나사렛 예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복음을 들은 많은 사람은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지 의아해한다.  전지하고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해 어떻게 자기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살해당하도록 허용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처벌하지 않고 내버려두실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공의는 모든 죄에 합당한 처벌을 요구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죄인들을 위해 죽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에 대한 공정한 처벌이 이루어졌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죄인들은 자유로이 용서받을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있었다.

 

우리의 노력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신뢰다.  그것이 전부다.  신약성경에서 믿음과 신뢰와 신앙은 모두 잠잘 때 체중 전체를 침대에 싣는 것처럼 완전히 기대다는 의미를 지닌 동일한 단어의 어근에서 파생한 단어다.  세상의 종교들을 비교해 보면 기독교의 단순성을 볼 수 있다.  세상의 종교는 두 글자로 설명된다.  하라’.  세상의 종교란 하나님께 용납 받기 위해서 해야만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들의 목록인 것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네 글자로 설명할 수 있다.  이루었다’  기독교는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루신 일에 근거한다.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하라이루었다’.  당신 스스로 불가능한 것을 헛되게 열심히 하든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이미 이루셨음을 믿든지 둘 중 하나다.  구원 얻은 참 믿음은 지성과 감성, 의지를 포함한다.  믿음은 지식에서 출발하여 확신으로 옮겨가서 의탁으로 끝마친다.  지식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기초를 가리킨다.  확신은 어떤 사실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납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탁은 믿음의 적극적인 부분으로, 완전히 의지함이라는 의미로 신뢰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예수님이 공적 사역에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였다.  회개는 문자적으로 마음을 바꾸다는 뜻이다.  진정한 회개와 구원 얻는 믿음은 붙어 다닌다.  회개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마음 상태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분을 당신의 구주와 주로 삼기 위해 전심을 다해 믿음으로 그분께 손 내미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일곱 개의 간단한 진술로 복음의 메시지 전체를 요약할 수 있다.

나의 필요함 :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임 : 유죄 선고

진실을 직면함 : 스스로 구원하기에 무력함

하나님의 해결책을 인정함 :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함 : 십자가와 빈 무덤

당신의 신뢰를 이전함 : 나에게서 그리스도께로

영원한 구원을 받아들임 : 나의 죄를 위한 그분의 의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만 거기에는 자기 신뢰와 자기 확신에서 돌이켜 온전하고 철저하게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그리스도를 구세주요 주인으로 신뢰해야만 한다.  요한복음 1 12-13절은 구원을 바라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술하고 있다.  첫째는 간단한 첫 걸음으로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놀라운 결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신비한 진리로 하나님께로 난 자라는, 이 모든 것, 즉 구원이 주님께 속한다는 것이다.  마침내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각자 개인적으로 예수를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만 한다.  당신은 복음에 대해 말할 수도 있고, 토론할 수도 있고, 논쟁할 수도 있고, 비평할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는 그것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초청이자 명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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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지만 스스로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다스릴 능력이 없습니다(9:27).  물론 과거에 비하여 의학은 눈부시게 발달했으나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지는 못합니다.  더욱이 죽은지 나흘이 되어 시체가 부패했다면 그 죽은 사람을 회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7:11-17)외에는 어느 누구도에게도 불가능한 일입니다(32:39, 삼상 2:6, 10:27).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려냈습니다(11:39-44).  따라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역사는 하나님으로 하신 것이었으며(14:11), 그러한 생명 회복 행위는 예수님께서 신성을 지녔음을 분명히 입증해 줍니다(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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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죄를 범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20:28).  이러한 사실은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확인됩니다(8:3, 4:4).  만일 제 2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지 않았다면 결코 인간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범한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 죄와 형벌로 죽음을 선언하셨고(5:12), 이것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엄정한 선언이기에 그냥 취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를 대신 받을 무죄한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4:15).  따라서 아담이 지은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시므로 무죄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2:14), 인간을 대신하여 스스로의 몸을 바쳐(10:17), 산 제사를 드리시므로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하셨던 것입니다(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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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그리스도의 승천은 구속 사역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고(히 9:26,10:12), 그의 재림으로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질 때까지 중간에 있는 하나님 우편(행 7:55)에 앉으신 기간은 쉬는 기간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뿐 아니라(엡 4:8), 하나님 우편(막 16:19)에서도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마 10:19-20, 14:26, 히 7:24-25, 8:1-2, 9:11-12, 10:19-20, 요일 2:1-2, 엡 1:20-22, 계 17:14).  요한복음 517절에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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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의 성전과 신약시대의 교회는 모두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하셔서 함께 하신다는 점은 같지만 다른 점이 있다.  즉 구약시대에 있어선 성전 내의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그리고 성소에는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으며 일반백성들은 성전 바깥 뜰에 서 있어야만 했다( 9:6-7).  따라서 백성들은 제사장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고 제사장은 중재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이르러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27:52), 더 이상 건물이나 장소적인 의미에서의 성전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4:22-24, 12:1-2).  즉 성도들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4:14), 더구나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 거하시므로(고전 3:16), 성도들 자신이 성전이 되었다(고전 6:19).  교회라는 말의 헬라어는 에클레시아로서 이같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을 뜻한다.  한편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신자들이 예배당성전이라고 하거나 예배하는 행위제단을 쌓는다라고 칭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는 일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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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죄의 종 노릇을 하기 때문(6:12)에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권세가 인자에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9:6).  그리고는 어느 중풍병자(2:5)와 한 여인에게 죄사함을 받았노라고 선언했습니다(7:48).  이에 대하여 서기관들은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의아스러워했습니다(2:7).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믿지 못했지만(8:24),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사해줄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만은 옳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해주는 권세가 있으며(9:2), 또한 그의 사죄 행위는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점에서(5:21),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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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은 다름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증거되어 있습니다(3:16, 8:3, 4:4).  또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말했습니다(1:14).  따라서 우리는 성육신하신 분, 곧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은 바로 제1위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신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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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 하늘에만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특정한 장소에 제한되어 머무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권한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뜻입니다(28:18).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공간적 의미로 이해한다면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는 성도와 함께 있으며(28:20),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도 함께 계실 것이라는 성경 구절과도 모순이 됩니다(18:20).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과 다른 말이 아닙니다(8:9).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성도들과 함께 하실 수있는 신적 권능을 회복하셨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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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시 해야 하는 숙제들 가운데 또 가장 힘들어하는 숙제는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생활숙제를 꼽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독후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큐티역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숙제 중 하나입니다.  큐티가 사람들에게 힘든 이유는 적용과 결단을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입니다.  흔히 ‘D형 큐티라고 하는 사역 훈련 큐티는 기존에 성경을 읽고 그 본문에 대한 자신의 간단한 느낌을 적는 방식에서 자신의 느낀 점을 토대로 하여 그 날 혹은 그 주간에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할 부분을 결단하도록 요구합니다.  문제는 이런 식의 큐티 방법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1. 큐티가 어려운 이유

큐티를 통해 이런 맛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인도자가 D형 큐티를 계속 강조하면 훈련생이 큐티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큐티에 두려움을 갖는 사람들은 큐티를 하면서 결단과 적용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큐티를 한 가지 적용점(예를 들면 전도)으로 결론 짓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가지 결단과 적용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적용할 거리가 없다며 큐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훈련만 제대로 되어 있으면 훈련생들은 날마다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며 말씀이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훈련생들이 이렇게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결단하는데 익숙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입니다.

 

2. 큐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라

큐티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 시작하면 큐티를 하는 목적뿐만 아니라 사역 훈련의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하루 속히 큐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만이 큐티를 통해 사역 훈련의 은혜를 체험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큐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다음의 방법들을 따라해 보면 여러분 안에 있는 큐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큐티를 통해 날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큐티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라

제자훈련 12과에는 하나님과 교제하기(경건의 시간을 갖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이 얼마 없는데 큐티를 하는 것은 대충 읽어 보겠다라고 작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라

올바른 결단과 적용은 올바른 연구와 묵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않고,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본문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본문을 제대로 이해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본문의 내용과 연관된 자신의 삶을 생각하라

사실 훈련생들이 큐티를 하면서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의 내용과 연관된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정확하게만 이해하면 반드시 내 삶에서 그 말씀의 내용과 연관된 일이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일어난 본문과 연관된 사건들을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큐티를 하면서오늘(혹은 이번 주에) 내게 일어난 사건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혹은오늘(혹은 이번 주에) 내가 해야 할 일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꼼꼼히 적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에 대하여 오늘 본문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결단하라

삶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당신이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을 결단하십시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가령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요구를 깨달았다면 당신은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오늘(혹은 이번 주에) 내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지 그 사람에게 형제 사랑을 실천하려면 어떤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형제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결단으로 끝나는 큐티는매우 좋아 보이지만 변화를 이끌지 못하는큐티입니다.

 

반복을 조심하라

구체적인 행동을 결단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반복적으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물론 태도의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결단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만 같은 행동을 반복적으로 결단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훈련생들의 큐티를 살펴보면 언제나 적용과 결단을 “000에게 복음을 증거 하겠다로 끝내는 큐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큐티하는 사람들은 결단만 하고 실제로는 그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복적인 결단으로 인해 마치 자신이 그것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큐티를 나누라

큐티는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삶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 큐티를 하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큐티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sharing) 더 큰 효과가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과 큐티를 나누는 시간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며 삶의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결해가는 과정을 간접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의 삶을 나누다보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나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되고 옆에 동역자가 있다는 사실에 위로와 힘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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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권세는 다 창조주이시며 섭리주이신 하나님께 속하여 있습니다(13:1).  세상의 권세자들 역시 그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19:11).  이처럼 만물을 다스리며 섭리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2:21).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께서도 만물을 주관하며(2:11), 그분에 의하여 만물이 유지되고(1:17),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되어 있다고 증거합니다(1:22).  이런 의미에서 만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예수님의 통치 행위는 바로 하나님으로서 행하신 것이었습니다(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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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이후에 기록된 신양성경에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을 보여주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행하신 사역을 기록한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직접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반드시 믿어야 할 너무나 중요한 사건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구절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요한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요일 4:2-3).  바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했습니다(2:6-8).  이와 같이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세상에 오실 것이 예언된 반면 신약성경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말씀하신 대로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실 자체(4:4)는 물론 이것을 믿는 것은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함을 확실하게 증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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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제 2위 하나님으로서 본래 위치를 회복하신 예수님의 직위와 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즉 하나님의 우편 자리에 앉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권(全權)을 행사하는 그리스도의 주권 행사를 나타냅니다(2:9-11).  따라서 낮아지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2:7), 십자가의 고난과 조롱을 당하던 그리스도께서(27:38-44), 지금은 높아지셔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누리고 있음을 나타냅니다(4:14).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나 모든 피조 세계를 친히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작된 것을 의미합니다(1:10).  이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사(16:19), 창조주와 섭리자로서의 권세로 교회는 물론 온 온주를 다스리시는 분이 되셨습니다(1: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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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전해질 때 구원을 받는 사람과 정죄를 당하게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데( 16:16), 이것은 복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영원한 시간을 천국에서 보낼 것인지 아니면 지옥에서 보낼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5:24-29).  그래서 성경은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는 심판이 있으리니’( 9:27)라고 말합니다즉 모든 인간은 다 죽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고후 5:10).  성경에 보면 바울 같은 사람은 복음에 반응하지 못했던 종교적 데러범이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9:15),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만난 행악자 중의 한 사람은 낙원에 들어가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23:43).  반면에 열 둘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서 사도의 직분을 받은 선택 받은 가룟 유다( 6:12-16)는 돈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1:18), 복음 전파사역을 도왔던 데마 역시 바울의 조력자이며 필요한 존재였지만( 4:14),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신앙을 저버리고 세상에 속한 자로 전락했습니다(딤후 4:10).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구원을 받는 것에 있어서는 죽는 날까지 혹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래서 Martin Luther는 천국에 가면 세 가지 놀라운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첫째는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이 그곳에 없는 것이고, 둘째는 천국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그곳에 있는 것이며, 셋째는 자신이 천국에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4-6절은 다양하게 이해되고 해석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해석하기가 난해하기 때문에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지금까지 치열한 논쟁을 일으켜 왔습니다.  오늘날 신학자와 목사들 사이에서도 당황하게 만드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단락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이 구절을 놓고 대략 다섯 가지 해석을 제시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해석  존재하는 일이 없는 상황을 가설적으로 설정해 놓고 가상적인 배교를 경고한다는 해석  외관상으로 보면 그리스도인에 가깝지만 실제로는 거듭난 신자가 아닌 거짓된 회심자라는 해석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잃는다는 해석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말씀이지 오늘날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해석으로 나누어집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나름대로 일리는 있지만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최우선적인 임무는 본문 말씀이 그것을 대하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먼저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본래의 의미에서 현재, 즉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해 나가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서 기자는 박해의 압력 속에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구절은 그리스도와 잠시 동안 동행하다가 고의적으로 돌아서서 주님을 거부하고 상반된 방향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배교하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10:26).

 

그런데 이 구절을 놓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처하던 이들이 믿음에서 떠날 때, 그 이후에 원래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와 같은 문제를 두고 논쟁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정말 거듭난 신자도 타락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John Calvin은 본문 구절을 이렇게 주석합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치명적인 타락의 위험이 면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맡기신 이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신 분이시므로 그는 택한 자들을 한 사람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셨다( 17:12). 확실히 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중생의 영을 부어주시며 택함을 받은 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서 버림을 받은 자들과 구별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다시 만들어지고 장차 상속의 소망을 가지고 성령의 보증을 받으며 똑같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복음이 그들의 마음속에 인쳐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기독교강요』에서는 주님이 보호 하에 선택된 자들의 견인이 확실하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 예를 들면서( 22:32), “한 번 선택된 사람은 떨어져 나갈 위험성이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말을 요약하면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타락해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 신학자 Michael S. Horton 역시 한번 구원받은 자가 항상 구원 받은 것이라는 원리 때문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주님께서 이를 완성시키실 것이라는 약속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반면에 John Wesley는 본문을 주해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고히 했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독자들은 분명히 전향한 그리스도인이며 그들이 기독교 신앙과 체험을 배반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따랐던 공허하고 무의미한 유대교 형식주의 되돌아가려는 것은 결코 구원받을 길이 없는 의도적인 배교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희망 없는 버림받은 상태에 이른다고 말하면서 『Explanatory Note Upon the New Testament』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놀라운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부터 타락한 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가정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사도는 고의적으로 경건의 능력과 모양을 다 버리고 믿음과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10-11), 경우를 기록하고 있다( 10:2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으로부터 타락한 것이 고의적이며 완결된 행위였듯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계속된 그들의 배교 행위도 고의적이며 지속적인 행위였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한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는 것이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구원의 서정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일지라도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누구든지 어떤 시점이나 상황에서도 가룟유다나 데마처럼 신앙을 배반하고(딤후 4:10), 타락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주의 신학자 Steven Harper도 구원의 소유가 하나님의 작정보다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강조합니다.

 

한 가지 분명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믿다가 타락하면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할 때 가졌던 믿음에 대해 칼빈주의자는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했지만 거듭난 신자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고, 웨슬리주의자는 그가 거듭난 신자이지만 믿다가 타락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여기서 신학자/목사들이 솔직해야 할 것은 믿다가 타락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Jonathan Edwards의 말을 빌리면 누가 참되게 믿는 자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구원을 받았는지 십원(?)짜리 동전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신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고후 13:5), 그것에 대한 최종 결정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2:9).  따라서 히브리 신자들이 유대교로 되돌아감으로써 배교의 위험성을 심각하게 경고하듯이, 오늘날에도 어떤 경우이든 신앙생활을 하다가 타종교로 개종하던지 혹은 믿다가 포기하거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16:16).  결국 누가 진실로 영생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인간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구원에 있어 성화와 순종을 강조한 Andrew Murray는 『The Holiest of All』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구원의 확증은 필요시 사용하도록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기차표와 같은 것이 아니다. 내 구원의 확증은 오직 사랑과 순종(계명)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 속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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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에 대해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몇 가지 힌트를 얻어 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뜻을 획일화시키지 마십시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인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모두가 기근을 만나 하나님께 간구했을 때 각각 다른 응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애굽으로 내려가도록 내버려두시며 침묵하셨습니다( 12:9-10).  이삭에게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6:1-2).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 해에 농사해 백배나 얻었습니다( 26:12).  야곱에게는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6:3-4).  그러므로 예전에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획일화시키지 마시고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반응을 원하시는지 확인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비슷한 상황에서 인도하심을 경험했더라도 나에게는 어떤 반응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 나아가 아뢰십시오.

 

2. 하나님의 뜻을 확정론적인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곳이냐저곳이냐이것이냐저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 이곳이냐, 왜 저 곳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있게 하시느냐?  아니면 저곳으로 옮기라 하시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야 하느냐?  가나안에 남아 있어야 하느냐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으로 간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며, 동행하시느냐?  가나안에 머문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며, 동행하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된 니느웨가 하나님을 향해 회개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은 유보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원한다면 일단 속도를 늦추십시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택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어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야할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때, 추측하면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놓으면 사고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차를 운전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안개지역으로 들어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차의 방향을 정하는 것보다 속도를 늦추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높은 사다리 하나가 벽에 세워져 있는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그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이 여러분의 인생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다리 꼭대기에 다 올라간 뒤 실수로 사다리를 다른 벽에 기대놓았음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비극일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할 상황에 이르면 일단은 속도를 늦추십시오.  아브라함도 기근을 만난 상황에서 속도를 내지 않고 여호와의 뜻을 구하며(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점점 남방으로 내려갔습니다( 12:8-9).

 

4. 너무 많은 것을 한 번에 요구하지 마십시오.

속도를 늦추었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 되어이끌어주시도록 간구해야합니다.  안개등(내 발의 등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켜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옮겨놓다 보면 안개 지역을 벗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즉각적인 필요)에 등이요 내 길(장래)에 빛이십니다( 119:105).

 

5. 실수하면 어떻게 할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은 기근(안개 지역)을 만난 상황에서 속도를 늦추고 점점 남방으로 내려갔습니다( 12:9).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지만 기근이라는 상황을 만나 하나님께 기도 드리면서 점점 남방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 결과 애굽으로 내려가 아내를 잃어버릴 위기를 겪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오히려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어 애굽을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12:16).  아직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아가야 할 단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해 생기는 여러 가지 실수들을 너무 염려하다보면 한 걸음도 옮겨놓지 못하고 꼼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8:29)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에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리는 결정도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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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 사역이었으므로(1:26), 2위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도 동참하셨습니다(1:2).  이러한 사실은 인간 창조시 하나님께서 가 아니라 우리라는 복수 명사를 사용하신 것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3:22).  또한 하자 하시고라는 말 속에 삼위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에 대하여 깊이 숙의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11:7).  따라서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말했고(1:3), 사도 바울 역시 만물은 다 예수님에게서 창조되었다고 증거했습니다(1:16).  이처럼 창조 이전에 이미 계셨으며 천지창조 사역에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동참하신 성자 그리스도(고전 8:6)는 이 세상 모든 만물에 대해 완전한 권리를 가지신 분이며(2:9-11), 진실로 우리가 믿고 의지하여야 하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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