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에 해당되는 글 22건

  1. 2017.11.30 그리스도는 중보직을 감당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가?
  2. 2017.11.29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기 위해서는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3. 2017.11.28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신 하늘은 어떤 곳인가?
  4. 2017.11.25 그리스도의 십자가 4
  5. 2017.11.24 Pandita Ramaba 8
  6. 2017.11.23 중보자 그리스도의 삼중 직임에 대한 증거가 신약성경에 있는가?
  7. 2017.11.22 인간 예수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가?
  8. 2017.11.21 주님께서 하늘로 가셨다면 어떻게 세상 끝날까지 성도들과 함께 계실 수 있는가?
  9. 2017.11.18 칼빈주의 v 웨슬리주의
  10. 2017.11.17 계시하신다
  11. 2017.11.16 중보자 그리스도의 삼중 직임에 대한 증거가 구약성경에 있는가?
  12. 2017.11.15 인간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사실은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진리인가?
  13. 2017.11.14 주님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나님이 우편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이 아닌가?
  14. 2017.11.11 유대인들의 바벨론 유수(幽囚) 및 귀환의 역사
  15. 2017.11.10 기독교의 기본진리
  16. 2017.11.09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세 가지 직무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17. 2017.11.08 기록된 복음서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잘 나타나 있는가?
  18. 2017.11.07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처소는 과연 무엇인가?
  19. 2017.11.04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20. 2017.11.03 무장
  21. 2017.11.02 그리스도의 세 가지 기능을 직임으로 표현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가?
  22. 2017.11.01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사람으로 태어나 자의식을 가질 때까지 성장해야 했습니다( 2:40).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인간이 되시지 않는다면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2:14-15).  그것은 인간이라야 인간의 죄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0:10-14).  그리고 죄에 대한 의식을 가질 때까지 자라야 했습니다( 2:52).  어린 아이가 중보사역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는 평생 동안 율법을 지키는 수고를 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하여 계속 시험하였는데( 4:1-11, 4:15), 만일 예수님께서 한 번이라도 시험에 넘어가서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였다면 그는 중보자의 자격을 상실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잘 아시는 그리스도는 각고의 노력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바른 길로 행하신 것입니다( 4:1-13).  끝으로 그리스도는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또한 죽으신 것입니다( 3:13).  비록 부활을 믿을지라도 인간이라면 죽음 앞에 장사가 없습니다.  완고하여 하나님을 두려운줄 모르던 사람들도 죽을 병에 걸리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중보사역을 위해 그리스도는 이 힘든 일을 겪으셨습니다( 12:2).  따라서 그리스도는 중보직을 감당하기 위하여 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고통과 시련을 통과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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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수년을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증거하는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그분이 하나님이신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5:39).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영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3:1-15).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 14:16), 성령이 오시면 자신을 증거하며( 15:26),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6:13).  또한 성령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른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도록 해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4:26).  과연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임하였고( 2:1-4), 성령의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제일 먼저 예수님이 하나님되심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고 증거했습니다( 2:23).  이처럼 우리에게 있어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려면 그 사실이 깨달아지도록 도와주시는 분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1:17-18).  모든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 성령의 깨우침과 권고를 받지 않고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 수 없으며 구원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고전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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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땅에서 하늘로 오르셨으며, 얼마 후 구름이 가리워 승천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1:9).  이로 보건대 그리스도는 천상 어느 곳으로 가셨음은 분명하나 그곳이 어느 곳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 의하면 하늘에는 하나님이 거하시며( 6:9, 11:2), 성령( 139:7-8)과 하나님을 수종드는 천사( 18:10)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곳으로 묘사( 12:22-23, 21:22)된 바 그리스도께서도 바로 이러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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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없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말씀은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는 말씀 후에 하셨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인가?

예수님은 가지 모두가 이유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할 없음”과 “하고자 하지 않음” 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궁극적인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진술하든

우리는 어느 쪽도 무시해서는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책임은

인간 존엄성과의 양도할 없는 측면이다.

책임은 심판 날에 마침내 드러날 것이다.

재판을 거치지 않고 형을 선고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가 위해하든지 미미하든지에 관계없이

사회적 계급을 무론하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억압적으로 짓눌려서 끓어 엎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에 대한 최후의 존경의 표시로

각자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진술할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다 책임은 인간에 있다.

가장 우매한 죄인에게도 일말의 결정 능력은 여전히 있으며,

실로 하나님을 향한 방자한 반항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근거로

책임을 벗어날 없다.

운명이니 형이상학적 구조나

그의 연약한 본성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의 중심인 인간 자신이

자기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얼버무림으로써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도 죄다.

나치 전범들이 가장 자주 내세우는 변명은

단지 명령만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정은 언제나 동일하게 책임을 그들에게 물었다.

실로 십자가의 본질적인 배경은

인간의 , 책임, 죄책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반응

그분의 거룩과 진노도 포함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은 성경적 종교의 기초다.

따라서 죄가 하나님의 거룩과 양립할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그것도 희생의 피를 들고 들어가는 외에는

어떤 사람도 휘장 속으로 들어갈 없었으며

만약 들어간다면 그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을 건너서

언약의 땅으로 들어가려는 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엄밀한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너희가 사이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언약궤) 가까이 하지는 말라’( 3:4).

웃사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주제넘은 행동의 위험에 관한

분명한 교훈을 배경으로 하여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피난처와 정결케 됨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말보다도 가장 두려운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것이다.

내게서 떠나가라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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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ita Ramaba

기도의 사람 2017. 11. 24. 13:38

Ramabai는 남부 인도의 신분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Sanskrit의 대가이자 힌두교 경전교사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물욕이 없는 인물이었고,

급기야는 빈털터리가 되어 마을 전전하는 음송 시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Ramabai도 고통에 찬 유년을 보내야 했고,

잇달아 부모형제를 잃고는 더욱 암담한 현실에 처하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그녀의 뛰어난 지성과 위트,

즉흥적인 Sanskrit 시작(詩作) 능력은 당시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녀는 결국 학자협회로부터교사라는 칭호까지 얻었는데,

그녀의 이름의 ‘Pandita’는 다름 아니라 

교사를 의미하는 ‘Pandit’의 여성형 표현이다.

그러나 유명세도 잠시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남자와 결혼하면서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그 남편마저 이내 병사한 후에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던져지고야 만다.

힘든 상황과 불확실한 미래는 

그녀로 하여금 힌두교 신앙에 대해 회의하게 만들었으며

앞날을 약속해 줄 진정한 신을 찾게 했다.

그녀는 결국 예수님의 품에서 참 안식을 얻었고,

그로부터 완전히 다른 삶을 추구하게 된다.

1889 가난한 영송과 고아들을 위한 쉼터를 설립한 Ramabai

그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동시에 교육과 직업 훈련의 기회 또한 베풀었다.

그녀는 인도 전통사회의 억압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 노력했고,

과부들의 권익 옹호와 아동의 결혼 금지를 위해 싸웠다.

그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민간인이 읽을 수 있는 인도어 성경 번역에도 시간을 쪼개어 냈다.

그녀의 믿기 힘든 불굴의 의는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기도와 성경공부에서 나온 것이었다.

격무의 연속이었던 그녀의 하루는 

언제나 새벽 4시의 간절한 기도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성경교사이자 약한 자들의 자애로운 어머니였던 Ramabai

소박하고 순전하게 간구함으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부유하거나 위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가 사랑의 손으로 매일 양식을 주시기에 행복합니다.

하루하루 필요한 것 이상은 

조금도 받지 못하고, 은행 통장도 없고, 수입도 전혀 없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기에 두려울 것도 잃을 것도 후회할 것도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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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자신을 선지자라고 칭하셨습니다( 13:57).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사람들도 그를 선지자로 알았습니다( 4:19).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4:14).  그리스도는 현재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고 계십니다( 8:17).  우리는 이러한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5-16).  또한 그리스도는 왕으로 세상에 왔습니다(요 18:37).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라고 말했습니다( 2:2).  예수님 자신도 왕이라고 시인했습니다( 23:3).  이와 같이 신약성경에서도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 이름을 부를 때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해 이 세 가지 직임을 수행하셨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또 그분께 경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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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고전 1:21).  인간이 스스로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전도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역사하여 믿어지게 하시는 것이 바로 그 방법입니다(1:17).  예를 들어 햇빛이 비치면 안개가 물러가고 시야가 훤히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할 때 의심의 안개가 거치고 성경의 증거하는 신비로운 진리가 밝히 깨달아집니다(14:26).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이고 이를 입술로 고백하며 심지어 이를 위해 순교의 피까지 흘리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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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승천 하시기 직전에 세상 끝날까지 성도들과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마 28:20).  그리고 얼마 후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행 1:11).  이때 제자들은 아쉬움과 당혹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해 보면 항상 함께 있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단지 떠날 사람의 위로하는 말에 불과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성령이 오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고전 3:16).  그리스도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14:16-17, 24:49, 1:4-5).  이 약속대로 그리스도는 영으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16:7).  따라서 그리스도는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실 뿐 아니라(행 7:55), 성령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계십니다(고후 13:5).  또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돌보고 지키시며 역사하신다는 의미에서 언제나 성도와 함께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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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과정을 웨슬리 계통 신학교에서 마치고 박사과정을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그 당시 Calvinism 신학사상으로 무장된 교수들로부터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배운 개혁주의 신학만이 정통 신학입니다. 이 신학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다른 신학을 가진 사람들을 비판하는 가운데 오직 칼빈주의만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신학이라고 주장하십시오.”라고 말하는 정신나간 석두(石頭)교수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었습니다사실 구 프린스톤 학파인 Charles Hodge B. B. Warfield, 웨스터민스터 학파인 John Gresham MachenCornelius Van Til, 그리고 Abraham Kuyper, Herman Bavinck, W. G. T. Shedd 등등 개혁주의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교만의 성()을 높게 쌓아갈 때 겸손과 남에 대한 배려를 가르친 사람들이 개혁주의 신학 교수들이었습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만 열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지 만났던 모든 교수들은 겸손과 학식을 겸비한 진정한 칼빈주의자들로서 오늘날 같이 비루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 사이비 칼빈주의자들과 다르게 교리적 논쟁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문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훼손하면서까지 거만한 신학적 추론을 그럴듯하게 내세우는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목사들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들은 종교적인 신학적 자긍심으로 인해 다른 교파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해로운 논쟁을 일삼는 정통 칼빈주의가 아닌 골빈(?)주의사람들로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성도의 견인’(영원한 안전)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예정에 의해 선택을 받고 성령의 의해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보장된다는 칼빈주의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교리로 Calvin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 견인교리을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을뿐더러 끝까지 보존되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 성도의 견인에 대해 Saint Augustine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로 철저하게 보호받는 것을 『Of the Gift of Perseveranc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기업이 되도록 하셨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도록 역사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그분을 떠나지 못하도록 역사하신다.  우리의 택하심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영원 전부터 이루어진 것이고(딤후 1:9), 그 놀라운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며( 17:4, 10:14),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 2:8)은 바울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11:29), 말한 것처럼 그분의 특권과 초대는 결코 취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칼빈주의자들은 성도의 견인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온전하고( 10:14)도 충분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요일 2:2).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는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고전 15:3),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속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 죄는 없다고 강조하면서( 3:23-2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어떠한 정죄 아래에 놓여 있지 않고( 8:1-2),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성경의 많은 증거들을 내세웁니다( 22:32, 5:24, 6:37-40, 10:27-29, 17:6-11, 8:29-33, 35-39, 11:29, 고후 5:17, 1:4-5, 13-14, 1:6, 살전 5:23, 살후 3:3, 딤후 1:12, 4:18, 7:25, 10:14, 벧전 1:4-5, 요일 3:9, 유다서 24).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인간은 전적으로 죄로 부패되어 있고( 17:9), 영적으로 죽어 있으며( 6:44), 복음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 2:1-3)에 타락한 인간의 중생 이전의 어떤 반응에 대한 논의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봅니다.  그러나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들( 13:48), 즉 바울( 9)이나 자주장사 루디아처럼( 16:14),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을 갖고 자신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이끌어 중생하도록 하는데( 2:8), 이렇게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부르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 안에서 끝까지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러한 성도의 견인John Wesley궁극적인 구원이라고 불렀는데, 그에 설교 『The lord Our Righteousness』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행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행하고 고난 받는 이유 때문에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용납 된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칼빈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Wesley전가된 의라는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성령의 유효적인 부르심을 통해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끝까지 타락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성경에 지적한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궁극적인 구원의 교리를 성경을 통해서 거부했는데 『The Works of John Wesley Volume 10』에서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는 말씀( 18:24)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후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10:26-29),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견인 교리를 부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참된 포도나무의 가지인 신자들( 15:4-6), 즉 거룩함을 입은 자들(벧전 2:9)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얼마든지 타락할 가능성이 있고( 4:1-2), 영원히 멸망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11:22).

 

이렇게 웨슬리주의자들은 교회에서 물세례를 받고 중생한 가운데 거룩한 삶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타락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기독교 신자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결국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나오는 많은 구절들을 제시합니다( 7:21-23, 10:33, 12:31-32, 24:13, 8:13-15, 8:31-59, 15:4-6, 고전 3:11-17, 9:27, 15:2, 5:4, 살후 2:3, 딤전 4:1-2, 5:15, 딤후 2:12, 2:1, 3:6-14, 6:4-8, 10:26-39, 12:14, 2:14-26, 벧후 2:20-22, 3:17, 요이 8, 3:5, 15-16, 22:19).  물론 이러한 구절들이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리주의자들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경우에 대해 신자가 죄(알려진 죄보다는 의식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짓는 죄)를 고백하지 않거나( 3:13),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통해( 3:12), 그분에게서 떠나는 배교의 행위가 있을 때( 26:14-16, 딤후 4:10)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구원을 잃어버린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철저히 회개를 하더라도( 13:3-5, 요일 1:9), 웨슬리주의자들은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다시 회복되거나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두 부류의 견해를 요약한다면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말한 것처럼 타락한 인간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선택되었지 거룩하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예정과 선택에 있어 인간의 공로를 철저하게 제거해 버렸고, 더 나아가 구원의 진행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결정하여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하는 가운데( 9:11-13), 이 구원의 교리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Wesley는 『The Works of John Wesley』에서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고상하게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는 기계에 불과한 타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의적인 존재로 자기 자신에게 부여된 어떤 일을 실행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16:16),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이 질문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환언하면 Calvin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는 것이고( 1:17), Wesley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만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기 때문에 구원 문제에 대해 인간 책임을 강조합니다( 3:36).  이러한 견해들을 살펴볼 때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다는 점에 대해서는 서로간의 의견을 일치하지만, 그분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여 구원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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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알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할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일에 동참하게 하시려고

자신의 목적을 계시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꿈을 꾸는 것은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성취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자신의 길을 계시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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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에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역할을 수행한 자들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왕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에는 사독 제사장(삼하 15:24)과 나단 선지자가 있었습니다(삼하 7:2).  그런데 구약성경은 이 세 가지 직임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장차 백성 가운데서 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백성들을 위하여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8:18).  여기서 선지자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시편에서 메시야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증거했습니다( 110:4).  여기서 메시야는 물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가 역시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왕이 출생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5:2).  여기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은 그리스도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성경에 선지자요, 영원한 제사장이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증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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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인간이 자기의 지혜만으로는 이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고전 1:21-24).  그것은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즉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고 역사 비평적으로 검증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 육신을 가지지 않은 영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과학을 초월하는 것이며, 역사 가운데 이와 유사한 사례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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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경을 읽다보면 그리스도의 승천과 관련하여 모순되는 듯한 표현 때문에 당혹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28:20).  그런 후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16:19).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하신 후 승천하셔서 제자들을 떠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것이 사실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도 신실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므로 사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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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세계에서는 보통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한 집단이나 한 민족과 같은 공동체를 국외로 추방하는 일이 있었는데이를 일명 유수 정책’(幽囚 政策)이라고 한다.  이러한 정책은 흔히 적대시 하는 민족의 세력을 분쇄하거나 또는 어느 한 지역을 식민지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 일례 중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이 곧 유대인들의 베벨론 유수 사건이다(대하 36:20).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고 그 살아남은 자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된 긍극적인 원인은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었다(대하 36:11-2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찍부터 이스라엘을 보존하시며 여호와 신앙을 지속시키려고 계획하셨으니(참조/ 44:24-28), 때가 이르자 그 경륜을 따라 유대인들은 포로로 억류되어 있던 바벨론에서 팔레스틴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대하 36:22-23). 역대하 36장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바 이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려 한다.

 

1. 바벨론 유수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간 최초의 경우는 애굽과의 갈그미스 전투를 끝낸 느부갓네살 2, (B.C. 605-562)가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던 B.C. 605년의 일이다.  이때 느부갓네살은 자기를 배신한 여호야김(B.C. 608-597) 왕의 목숨을 살려주었지만 유다의 방백 중 몇 사람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등이 있다(왕하 24:1-16).  두 번째의 경우는 B.C. 597년에 발생하였는데(왕하 24:1-16), 여호야김을 징벌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쳐들어왔던 느부갓네살은 죽은 여호야김의 뒤를 이은 여호야긴(B.C. 597) 왕과 그의 어머니 및 유다의 고위 관리들을 바벨론으로 잡아갔다.  세 번째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유수된 사건은 B.C. 586년에 일어났다.  이때 예루살렘은 황폐화되고 빈민들을 제외한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 갔다(왕하 25).  이로써 북이스라엘의 멸망(B.C. 722). 이후 그나마 국권을 수호해 오던 남유다마저도 멸망하게 되었으며 유대인들은 1948년에 이스라엘 공화국을 수립하기까지 식민지인으로 서러움을 겪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연유로 인해 바벨론에 잡혀간 유대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남쪽지방에 정착하게 되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동남쪽 Nippur 근처에 있던 그발 강가의 Tel-Abib에 유대인들이 정착하고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기도 하다( 3:15).  그런데 유대인들은 일반 전쟁포로와 달리 바벨론 왕실의 보호를 받았으며 자유롭게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며 종교적인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예배와 친교를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모임에 의해서였는데 저들은 이러한 집회를 통하여 더욱더 믿음을 굳게 하며 고국 땅으로 돌아갈 소망을 날로 불태웠다(참조/ 137).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토지를 일구어 농작물을 경작하거나( 29:5), 사업에 종사할 수도 있었으므로(참조/ 17:4), 어느 정도 물질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생활을 통하여 일부 일부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관습에 동화되기도 하였는데, 그들은 이람어를 사용하고 우상을 용납하며 이교 의식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에스겔과 같은 인물을 중심하여 단합한 유대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조국을 재건할 날만을 소망하였으니 그 같은 희망이 성취할 전조(前兆)로 옥에 갇혀 있던 여호야긴 왕의 석방이 이루어졌다(B.C. 560, 왕하 25:27).  그리고 마침내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된 날이 왔으니 그것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 2세가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이다.

 

2. 귀환

B.C. 539년에 바벨론을 명망시킨 고레스는 같은 해에 유대인들의 본국 귀환을 허용하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1:1-4).  이에 스룹바벨이 이끄는 최초의 유대인 귀환자들과 예수아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 건축을 위한 지대(地臺)를 놓았다( 3:8-13).  그 후 계속되는 성전 건축 공사는 방해자들의 책동에 의해 일시 중단되는 등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다가 B.C. 517년에야 겨우 완공을 보게 된다( 6:15).  한편 에스라가 이끄는 두 번째 귀환자들은 B.C. 457년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 하였다( 7:7-8).  예루살렘에 돌아온 에스라는 당시 그곳에 만연해 있던 죄악의 요소를 제거하는 부흥 운동을 일으켰는데 그 일환으로 백성들이 이방인과 결호하는 것을 금하며 안식일 준수를 꾀하였다( 8-10).  이뿐 아니라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1, B.C. 464-423) 밑에서 관리로 있던 느헤미야도 B.C. 444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였다( 3).  이처럼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당시의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베발론 유수 이후의 유대인 사회를 재정립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였다.  한편 이스라엘인이 유다(Judah)의 단축형인 유대인’(Jew)으로 불려지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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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책은 많다그러나 존 스토트가 쓴 『기독교의 기본진리』는 그 많은 책들 가운데서도 단연코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 책의 초판이 나온 1958년 이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문판은 수백만 부가 팔렸으며, 한국에서도 30년 넘게 10만부 이상 팔린 최장기 스테디셀러 가운데 한 권이다그만큼 이 책은 기독교의 복음에 대하여 체계적이며 설득력 있게 쓰여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이 책을 통해 훈련생에게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크게 세 가지이다첫째는 기독교가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대하여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둘째는,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셋째는 불신자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할 수 있는 핵심적인 교리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교리를 배우고 깨닫는데 그치지 않는다끊임없이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  이 책을 통해 훈련생들은 기독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교리를 정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진리 앞에서 끊임없이 삶의 결단을 요청을 받게 될 것이다.

 

올바른 접근

저자는 성경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신 창조와 말씀, 그리고 행하심에 대한 진술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영역 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영역에 본서의 관심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지혜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며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선언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것도 확언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두 가지 방법으로 주도권을 행사하신 것은 인간의 필요의 특성 때문이다.  우리는 무지하기도 하지만 또한 죄에 빠져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셔서 우리의 무지를 몰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직접 행동도 하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기독교에 대한 탐구가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주된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한 일은 기독교 신앙이 기초하고 있는 반석이다.  둘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을 지닌 유일한 분이라는 것이 증명되면 대부분의 다른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가 신이라면 그의 가르침도 사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를 모으는 것이며 우리가 확증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는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과 그가 나타낸 특성, 그리고 죽음에서의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뚜렷한 특징은 그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가 하신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을 인간의 신앙과 사랑의 합당한 대상이라고 했다.  이러한 직접적인 주장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방법으로도 그는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셨다.  죄를 용서하고, 생명을 주고, 진리를 가르치고, 세상을 심판한다는 그의 주장은 하나님께만 속한 일들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무죄성에 의해 뒷받침되며 그 증거는 네 가지이다.  첫째는 예수님 자신의 견해로 그는 자신의 죄를 시인한 적도, 용서를 구한 적도, 도덕적 과오를 자각한 적도, 죄의식을 느끼신 적도 없으셨다고 하셨다.  그가 ‘회개의 세례’를 받은 것 역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였고, 또 자기를 세상의 죄인들과 동일시하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제자들의 견해이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아주 가까이 살면서 자신들끼리는 많은 다툼도 하였지만 자신들에게서 발견되는 죄를 예수님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한 어릴 때부터 구약의 교리에 젖어 있던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죄의 보편성을 가르치는 구약교리에 의해서도 예수님의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대적들의 견해로 그들은 최소한 예수님에 대한 어떠한 호의적인 편견도 없었고 오히려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제기할 수 있었던 유일한 비난마저도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심문을 받을 때도 언제나 자신의 의롭다함을 주장하였고 빌라도도, 헤롯도, 배반자 유다까지도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시인하고 있다.  넷째는 우리 자신의 평가이다.  우리는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묘사된 예수님의 포괄적인 모습을 통해 그의 무죄성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신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그 증거는 네 가지이다.  첫째는 시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며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에 대해 여러 다른 주장들이 존재하지만 어느 하나 만족할 만한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한 것들이다.  둘째는 수의가 헝클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대해 특별히 강조한 사람은 요한으로 그가 직접 경험한 버려진 수의의 모습이 갖는 세 가지 특징은 부활의 진실성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는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부활한 예수님이 10회에 걸쳐 소위 베드로가 말한 ‘택하신 증인’들에게 나타나셨음을 알고 있다.  넷째는 제자들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제자들의 변화는 부활에 대한 그 어떤 증거보다도 귀한 증거일 것이다.  왜냐하면 전혀 꾸밈이 없기 때문이다.  복음서들에 나타나는 사람들과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부활로 그들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다.

 

인간의 상태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가 누구시냐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가 하신 일도 설명하고 있다.  그가 이루신 일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실제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과 우리에게 제공하고 계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게 된다.

 

죄의 실상과 인격

성경은 죄가 보편적이라고 단호하게 밝힌다.  죄는 그 성격에 따라 적극적인 죄인 위반과 소극적인 죄인 결함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러한 죄들은 어떤 도덕적 기준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그 기준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며 자신의 법을 어기고 있다.

 

죄의 결과

죄의 또 다른 측면인 그 결과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로 이것은 죄의 결과 중 가장 무서운 것이다.  인간 최고의 복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단절을 가져오게 된다.  나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그리스도를 배척하면 영원히 죽게 된다.  둘째는 자기에의 속박으로, 죄는 우리로 노예가 되게 한다.  이는 죄가 내적 부패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범하는 범죄는 내적이고 보이지 않는 병이 외적으로 드러난 증상일 뿐이다.  우리는 내적 타락으로 인해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셋째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으로 이는 죄의 필연적 결과이다.  우리의 자기 중심성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영향을 미쳐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유발시킨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며 구원에는 죄의 세 가지 중요한 결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포함된다.  구원을 가능케 한 방법으로는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이고, 둘째, 성령을 주심을 통해서이고, 셋째 그의 교회를 세우심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예수님께서 죄를 위한 제물로 죽으신 사건은 성경의 중심주제이다.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베드로는 첫째, 본으로서 죽으셨고, 둘째, 죄를 담당한 자로서 죽으셨다고 지적하고 있다.  억울한 고난은 그리스도인이 부름 받은 내용의 일부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본을 보여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그러나 단순한 본만을 보이신 것은 아니었다.  본에는 속죄가 없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한 결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죄를 연결시키고 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켰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로 복귀시키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고 죄가 없으신 구주께서 범죄 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구원'이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사함과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첫째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다음 점진적으로 자기중심이라는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사함과 화목함을 얻었으나, 자기로부터의 해방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의 교제로의 연합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 자체까지도 변화시켰다.  이러한 내적변화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이 감면되었다.  그러나 죄의 권세가 무너지는 것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해서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은 우리와 하나님은 물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사이도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몸이 하나 되게, 즉 교회의 연합을 이루게 하신다.  성령의 본질이자 첫째 열매는 사랑이다.  죄는 분리와 분열을 가져오지만 사랑은 연합시키고 화해케 한다.

 

인간이 해야 할 일

기독교 신앙이란 단순히 일련의 제안에 대해 수동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비록 진정으로 그렇게 한다 해도)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 즉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겨 그를 우리 구주와 주님으로 모셔야 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비용을 계산할 것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데는 주는 것과 요구하는 것이 있음을 밝히셨다.  실제로 주는 것이 값없이 제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구하는 것도 전제였다.  주님께서는 처음 부르신 제자들로부터 그 이후의 모든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깊이 생각한 다음 그들의 모든 것을 바치도록 요구하셨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면 ‘나를 따르라’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충성과 더불어, 자기에게서 배우고 자기 말을 순종하며 자기의 목적을 그들의 목적으로 삼으라고 권면하셨다.  그러자면 먼저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죄를 버려야 한다.  회개는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는데 있어서 첫째 요소이다.  둘째는 자기를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모든 행위의 근원인 자기 의지도 부정해야 한다.  삶의 모든 부분을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시인하라는 명령도 받았으며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해 이를 보여주어야 한다.

 

결정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한다.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결정을 해야 한다.  진정한 믿음은 지적인 믿음을 신뢰의 단호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지적인 확신이 인격적인 의탁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를 영접하면 그는 그의 죽음으로 인한 모든 혜택을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며 우리의 삶이라는 집은 그리스도의 관리 하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그리스도께 귀를 막고 그의 간절한 호소를 묵살해 버리는 일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면 그의 두드리심에 응답하여 문을 열어야 한다.  문을 여는 것은 분명한 행동으로 자신 밖에 할 수 없는 개인적인 행동이자 의도적인 행동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당신은 거듭났을 때 이미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는 특권과 책임이 뒤따른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 태어난 사람의 독특한 특권은 그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는 우리도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인 그리스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친밀할 뿐만 아니라 확실하기도 하다.  이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안전한 관계이며 성경은 이 관계가 영원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특권과 아울러 책임을 가지는데 가장 큰 책임은 성장이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해야 할 영역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지식이고, 둘째는 성결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이 성장하여 더욱 더 친밀하게 자신을 알기를 원하신다.  성장의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이외에도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대한 의무, 즉 충성과 세상에 대해 의무, 즉 봉사와 증거를 가진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갈등을 동반한다.  그리스도께로 도피하여 세상을 무시해 버리거나 세상에 빠져서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면 여러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택할 해결책이 아니다.  균형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 안’과 ‘세상 안’에서 동시에 똑같이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결코 어느 하나만을 택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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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세 가지 직무는 성격상 구분될 수 있으나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가지신 중보자로서의 직임은 하나로서 세 가지 직무를 수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선지자(왕상 19:16), 제사장( 30:30), (삼상 15:1)을 기름부어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각기 자기의 역할만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딤전 2:5), 이 세 가지 기능을 한 몸으로 다 수행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중보자의 세 가지 기능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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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1-18).  먼저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 가운데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특성을 지녔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했고( 10:30), 자신이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17:5),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세상에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17:3).  다음으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도 주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특성을 지녔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많은 이적들을 행하였는데( 14:25, 11:20-25, 2:1-12), 이러한 역사들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신적인 사역이었습니다( 21:18-22).  이처럼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들은 그분의 신성을 잘 나타냅니다( 20:31).  이상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은 그가 사람인 동시( 2:8)에 신적인 위엄과 능력을 가진 하나님임을 나타냅니다(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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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시기 전에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나라에 제자들이 거할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그들과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3, 23).  이 처소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환상 중에 본 계시는 이 처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그는 환상 중에 처음 하늘과 처음 땅과 바다는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난 것을 보았으며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21:1-2).  그러나 우리는 그 처소가 예비되는 방법과 완료될 시기를 알지 못합니다.  또한 그 처소가 어떤 곳일지 다 알 수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부분적인 것뿐입니다(고전 1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처소는 사단이 왕노릇하며 온갖 불법과 거짓이 역사하고(살후2:9-12), 의롭게 살려는 사람은 핍박 받을 수 밖에 없는 이 세상과는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15:18-20).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다는 것은 믿는 자에게 비할 바 없는 위로와 큰 소망이 됩니다(고후 5:1-4).  그리스도께서 처소를 마련하고 세상에 다시 와서 사단의 모든 세력이 척결되면 우리는 영원히 고통과 질병과 죽음이 없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화롭게 살게 될 것입니다(21:4).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성도들을 위해 이와 같은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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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의 빛 월간지를 발행하는 안식교 출신 손계문 목사, 구약의 율법적인 음식물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혼합율법주의자인 노우호 목사, 한국교회의 대안으로 목사가 없는 교회를 주창하면서 집사 직분을 늘 달고사는 신성남 집사,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방언할 줄을 모르면서 방언에 대해 많이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들이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를 어떻게 잘 아는 것처럼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의 말을 빌려 말하면 자신이 왜곡한 사실을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는 공상허언증에 걸린 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잡설(雜說)에 가깝고, 한국 속담으로 표현하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목사는 이미 논할 가치도 없는 영이 잘못된 사람들이지만, ‘랄랄라 현상과 방언장사라는 글을 통해 현대방언은 거의 가짜라고 주장하는 신 집사의 글입니다.  사실 시간이 아깝지만 이 분의 글을 10편 정도 읽어보는 가운데 한 결 같이 느끼는 것은 마음이 비틀어져서 그런지 아니면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인지 돈키호테처럼 교회개혁에 앞장 선 조폭(?)해결사 같이 쓴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나만 느끼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 분의 글을 읽다 보면 목이 곧고 눈에 할례를 받지 못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교회와 목사를 비판만 하려고 했지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골병든 글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비판적인 글을 계속 읽는다면 머지 않아 영혼이 병들고 믿음이 파선될 것입니다.   

 

“뜻 모를 이상한 말을 쏟아내며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교리를 주장하는 신흥종교 단체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되었다. 아주사 스트리트의 다 쓰러져 가는 건물 안에서 연일 집회가 열리고” 이 글은 1906 418일 수요일자 Los Angeles Times에 실린 기사로 The 100 Most Important Events in Christian History』란 책에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부정적인 언론보도는 오히려 사람들을 집회로 끌어들이는데 도움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침례교 목사 그것도 방언을 유난히 강조하다가 쫓겨난 William J. Seymou를 사용하여 아주사의 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방언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Stanley H. Frodsham은 『With Signs Following』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보거나 배워보지 못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용했고, 노르웨이의 학자이며 『성경문고』의 국제판 편집자인 Thoralf Gilbrant 1985년 세계 오순절 대회에서 이탈리어를 하나도 모르는 자신의 할머니가 유창한 이탈리어로 이탈리아 선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간증합니다.  물론 방언의 은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육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릴 것입니다(고전 1:14).  사실 오랜 세월에 걸쳐 방언은 지나치게 논란이 되어왔기 때문에 모든 은사들 가운데 방언만큼 가장 큰 관심을 끄는 은사도 없었고 반대 의견도 가장 많았던 은사이기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먼저 “오늘날 각종 방언 말함이 과연 성경적인가?(고전 12:10)라는 것에 대해 Gordon Fee는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방언은 사도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논란이 많은 것으로 바울의 논증 배후에는 고린도교인들이 특별히 방언과 방언통역을 선호했다는 것이 깔려있는데 바울이 말한 방언은 성령에 감동된 발언이고(고전 12:7), 화자(話者)가 몰아지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있으며(고전 14:27-28), 통역되지 않는 한 화자(고전 14:14)나 다른 청자(聽者)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이지만(고전 14:16),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언어이므로(고전 14:2, 14-15, 28), 통역되는 내용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하는 신비들이었다.”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Richard Gaffin과 Robert Reymond는 방언의 은사는 교회 창설적 성격을 띤 것으로 이미 중지된 계시은사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은사들이 계속된다고 할 때에 교회로 하여금 공상적인 각종 주장들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것 이외에 성경 교훈과의 모순을 유발한다는 문제를 지적합니다.  Anthony A. Hoekema 역시 Tongues and Spirit-baptism』에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외에 신약의 어떤 서신에도 방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방언이 교회 안에 계속될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고 AD 100년에서 1900년까지 교회사에 방언이 거의 전적으로 부재한 것은 하나님께서 방언을 교회 안에 계속 시키실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는 주장과 거의 양립될 없다.


그러나 Michael Green은 『I Believe in the Holy Spirit』에서 방언의 종료 문제에 관해 “성령은 교회 밀실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다. 사도시대가 끝났다고, 신약의 정경이 완성됐다고 해서 예언과 방언이 소멸된 것이 결코 아니다. 방언은 인간의 언어라기보다는 사람과 천사가 속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자유함 가운데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게 해주는 성령의 언어이다.”라고 말합니다.  D. A. Carson도 방언의 은사가 계속된다는 측면에서 방언 논쟁에 있어 관건되는 몇 가지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는데, 먼저 방언에 ecstasy(황홀경)이 포함되느냐는 여부에 대해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Walter J. Hollenweger는 『The Pentecostals』에서 정신이완이 고양된 상태에서의 뜨거운 방언과 화자(話者)가 정신적으로 깨어서 통제할 수 있는 상태인 '차가운 방언을 구분하여 전자는 ecstasy가 포함되고 후자는 ecstasy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는데, Carson은 현대의 압도적 다수의 방언하는 사람들이 차가운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의 방언이 '실제(외국어)의 언어'인가 혹은 인간 언어와 동일시 될 수 없는 언어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Carson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실제적인 언어들, 즉 사람들의 언어들이건 천사들의 언어들이건 간에 인식적인(cognitive) 언어들의 은사라고 말하며, 현대 방언에 대한 언어학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현대의 방언현상 수천 건을 테이프에 담아 분석한 언어학자들 간에 그것이 어떠한 인간 언어가 아닌 보편적인 합의가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학자들의 여러가지 견해가 있는 반면 주로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줄기차게 내세우는 말은 교회사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은 방언을 하지 않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사도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주후 4세기의 성경주석가였던 John Chrysostom은 방언은 이미 그쳤으며, 5세기의 Augustine도 방언은 초기의 표적으로 사라졌고,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도 은사들은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다고 가르쳤습니다.  Calvin 역시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 247문』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 즉 방언기도는 유희(遊戱)와 같은 것에 불과하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46절을 주해하면서 로마서 1129절의 말씀과 상반되게 하나님께서 과거에 허용하셨던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빼앗아 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강요』에서는 고린도전서 1415절 말씀을 가지고 또 다른 주장을 펼칩니다.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 사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외가 있다면 마음속에 감동되는 힘이 부족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압도적이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느낌이 격동된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제네바 교리문답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은 Calvin 자신도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Lloyd Jones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서 방언은 우리가 주도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원하는 대로 방언을 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방언'이 아니라 '심리적인 방언'이라고 말하면서 은사는 성령이 통제하는 것이지(고전 12:11), 사람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가짜와 진짜의 구분은 여기에 있고 모든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 좋은 것을 붙잡으라고 말합니다(살전 5:21).  이렇듯 오늘날 방언이 논쟁이 심한 것처럼 고린도교회의 문제도 방언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고(고전 14:23), 그 당시 그들은 방언을 최고로 생각했으며(고전 12:30), 누구나 다 방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고전 12:30), 자랑하려다가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은사 목록에서 의도적으로 방언을 마지막에 둔 것(고전 12:8-10)은 고린도교인들이 그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또한 그들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 방언보다는 예언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고전 14:5).  사실 방언은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정령주의자들도 흉내낼 수 있지만 우리 믿는 자에게 있어 방언의 은사를 주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에(고전 12:7), 성령이 하시는 일을 금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통역이 없는 방언을 회중 예배 때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고(고전 14:28), 교회 내에서 질서 있게 관리만 잘한다면(고전 14:40), 방언기도만큼 개인의 덕을 세워주는 소중하고 유익한 은사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아야 합니다(고전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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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진리의 성령 2017. 11. 3. 11:52

리처드와 그렉은 경건한 젊은 선교사로 예수님을 진실로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그것을 사람들의 실생활의 필요에 적용시키는 것을 배웠습니다.  둘 다 뚜렷한 선교의 소명을 받았으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의 빛이 아직 들어가지 못한 아프리카의 한 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이들의 사역은 전망이 밝아 보였습니다. 성경공부 반을 세우자 원주민들은 진지하게 열심을 보였습니다.  추장과 많은 부족 어른들을 비롯하여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첫 학기 말이 다가올 때 쯤, 이들의 사역은 서서히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공부 참석자들의 수가 줄어들고 많은 원주민들이 이들과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원주민의 기분을 상하게 했거나 무슨 문화적인 금기를 범했는지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두 선교사는 추장을 설득하여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을 듣기로 했습니다.  추장은 입을 열어 말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화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경공부를 재미나게 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가 당신을 가르치는 것을 믿지 않으십니까?”  그 말을 들은 추장은우리는 당신들이 가르치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다녀온 밤에 우리를 고문하듯 괴롭히는 귀신을 처리하는 법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추장과 대화를 끝난 후 얼마가 되지 않아 두 선교사들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패배한 선교지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두 선교사는 성경을 가르치는 훈련은 배웠지만 그 마을에서 만난 어둠의 세력들과 싸우는 영적전쟁에 대해서는 준비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두 선교사가 겪은 것이 오늘날 현대교회가 겪고 있는 좌절감입니다.  교육과 열심히 사역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귀신에게 너무 시달려서 자살하고 싶다든지, 방금 암 진단을 받은 사람, 혹은 감정에 너무 큰 상처를 입어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 이런 문제에 봉착하면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신약에 보면 이런 문제의 답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행 10:38).  사도들의 사역은 어두움의 세력 때문에 막히지 않았습니다.  마귀의 힘이나 역경이 다가오면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갇힌 자를 자유케 했습니다( 3:2-10, 16:16-18, 23-28).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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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 의미에서 직임이란 다른 사람에 의하여 맡겨진 직책과 임무를 말합니다.  따라서 중보자의 세 기능을 삼중직임(三重職任)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임을 나타냅니다또한 직임이란 표현은 그 직책과 일이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임을 의미합니다실제로 그리스도는 구약의 계약을 갱신하는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 9:15, 12:24)로서 그의 사역은 공적인 성격의 것이었습니다끝으로 중보자의 세 가지 삼중직임으로 표현할 때 세 기능의 균등성이 잘 표현됩니다곧 중보자 그리스도의 세 기능은 수평적 관계이지 종속적인 것이 아닙니다한편 이러한 그리스도의 삼중직임은 구약시대의 선지자, 제사장, 왕 세 직임을 종합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구약의 약속에 대한 성취임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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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하기에 가장 적합한 분은 하나님 자신인데,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명확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31).  먼저 구약성경에는 오실 메시야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고 증거되어 있는데 이사야는 장차 태어날 아이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예언했습니다( 9:6).  예레미야 역시 다윗의 위()에서 일어날 의로운 가지가 여호와의 우리의 의로 불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3:5-6).  여기서 장차 태어날 아이의로운 가지는 메시야인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냅니다.  신약성경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사실이 증거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출생을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약속의 성취라고 증거했습니다( 1:23).  마가와 누가 역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했고( 1:1, 1:35), 요한도 예수님을 로고스’(말씀)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1:1, 14).  이상과 같이 우리는 복음서의 저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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