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17.12.30 죄를 죽이기 위해 힘써야 할 이유
  2. 2017.12.29 능력
  3. 2017.12.28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우리에게 어떤 확신을 주는가?
  4. 2017.12.27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처음 소개한 사람은 누구인가?
  5. 2017.12.26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 성도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6. 2017.12.23 육체적 행위를 죽이는 일
  7. 2017.12.22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8. 2017.12.21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9. 2017.12.20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되심을 무엇이라고 증거했는가?
  10. 2017.12.19 그리스도의 승천과 편재(偏在), 즉 어디나 계시는 것과는 어떤 관계를 지녔는가?
  11. 2017.12.16 선견자와 선지자
  12. 2017.12.15 기다림이 필요하다
  13. 2017.12.14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그의 승천과 함께 끝났는가?
  14. 2017.12.13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했는가?
  15. 2017.12.12 그리스도의 승천이 보장하는 성도의 미래는 어떠한 것인가?
  16. 2017.12.08 다른 훈련생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으려면
  17. 2017.12.07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하여 중보사역을 수행하셨는가?
  18. 2017.12.06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했던 제자들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는가?
  19. 2017.12.05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심으로 완성하신 사역은 무엇인가?
  20. 2017.12.02 방언, 불편한 진실인가?
  21. 2017.12.01 우선순위의 법칙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바울의 말은 사실상 나는 그와 같은 일을 매일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하루도 빠짐없이 한다는 말이다.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고 확신하는 아무리 훌륭한 성도일지라도 항상 자신의 속에 거하는 죄의 힘을 죽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죽여라.  실로 죄를 죽이기 위해 매일 노력하라.  그리고 항상 살아 있는 동안 죄를 이기는 삶을 목표로 삼으라.  만약 죄를 계속 죽이지 않는다면 죄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

 

죄의 활동성

죄는 우리 속에 거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활동하여 육체의 행실을 행하도록 자극한다.  죄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우리도 죄를 방치할 수 있다.  하지만 죄는 겉으로 조용한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매우 활동적이다. 

또한 죄는 우리 속에 거할 뿐만 아니라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의 법과 싸운다(7:23).  그래서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린다’(5:17).  욕심은 우리를 속이고 유혹하는 죄이다(1:14).  욕심은 도덕적으로 항상 선한 것을 방해하고 악한 행동을 유도하며 우리의 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제하는 것을 막는다.

결론적으로 말해 죄는 항상 우리 속에서 활동하며 항상 우리를 속이고 유혹한다.  자신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 속에 거하는 죄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죄는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의 행동을 오염시키려고 발악한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죄가 항상 활동하고 있을 때, 그런 죄를 죽이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패배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죄를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로마서 813절에서 말한 의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죄는 항상 극단을 추구한다.

죄는 항상 극단을 추구한다.  즉 우리를 유혹할 때 그 유혹과 같은 노선에서 가능한 한 더 큰 죄를 짓도록 유혹한다.  그 결과 불결한 생각은 나중에 우상숭배가 되고, 탐심의 욕구는 탄압으로 변하게 된다.  또한 처음에 불신앙적인 생각을 갖게 하고서 나중에 무신론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죄는 우리 마음 속에 정욕을 자극해서 그 경로를 통해 더욱 큰 죄의 최고봉에 오르도록 유도한다.  그것은 마치 무덤과 같아서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죄의 거짓됨이 드러난다.  죄가 승리할 때 인간은 강퍅해져서 파멸하게 된다(3:13).

이처럼 죄는 서서히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 영혼은 마음속에 처음 들어온 죄가 나중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복음이 요구하는 바대로 우리가 아무리 작은 죄라도 분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강퍅해질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죄의 세력은 계속해서 우리를 압박하게 된다.  죄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을 포기하고 대적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죄를 막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죄를 죽이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나 매 시간마다 죄의 뿌리를 마르게 하고 그것의 머리를 쳐서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의무를 우리가 저버린다면 아무리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성도라 할지라도 결국 온갖 종류의 저주스러운 죄에 빠지고 말 것이다.

 

죄를 대적하는 성령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라는 말 다음으로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5:17).  육체가 성령을 거스르는 것처럼 우리 속에 주어진 성령, 또는 새로운 영적성품은 육체를 거스르는 성향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 베드로후서 14-5절에서는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기위해서 우리에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특권을 주셨다고 말씀한다.  그 결과로 우리 속에는 육체 속에 거하는 죄의 법뿐만 아니라 마음의 법이 생기게 된다(7:23).  이 두 개의 법이 서로 싸울 때 마음의 법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그것을 가두고 죄의 법을 자유롭게 활개치도록 내러벼 둔다면 그처럼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영적싸움은 우리의 삶과 영혼이 달려 있는 싸움이다.  매일매일 죄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의 새로운 품성과 성령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적과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훌륭한 자원을 경홀히 여기는 셈이다.  실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많은 것을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뿐만 아니라 은사를 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사용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매일매일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 자비, 지혜, 은혜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정면으로 도전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

 

의무를 소홀히 했을 때

마음속에 주어진 은혜를 잘 간직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성취라는 두 개의 축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 은혜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은혜는 부패해서 썩고 만다.  그리하여 죄가 세력을 얻어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든다(3:2, 3:13).  다시 말한다면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 때 은혜는 시들게 되고 대신 죄의 욕망이 번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마음이 점점 악화된다.  죄를 죽이는 의무를 소홀히 해서 결국 세상적이고 육적이며 차갑고 화를 잘 내며 세상의 사람들과 사물에 동화되어 신앙을 저버리고 무서운 유혹에 빠져드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죄를 죽이려는 노력에는 두 극단이 있다.  한 극단은 굳은 결의로 죄를 이기려는 자세인데 이것은 결국 율법적인 태도로 남의 흠을 잡고 분노와 시기 그리고 악독과 교만함을 낳는다.  또 다른 극단은 자유함과 은혜라는 핑계로 죄를 죽이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죄를 이기는 삶과 관련해서 진정으로 복음적 입장은 양극단을 회피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우리의 모습 속에는 이 중용의 입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우리의 의무

우리의 의무는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거룩을 온전히 이루는 일이다(고후 7:1).  또한 우리는 매일 은혜 안에서 자라나야 하는 의무가 있다(벧전 2:2, 벧후 3:18).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우리의 속사람은 새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후 4:16).  하지만 이와 같은 의무들은 매일 죄를 죽이지 않고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죄는 거룩한 모든 행동을 방해하고 성도의 성장을 막기 위해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다.

죄의 소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거룩함에서 진보를 이룰 수 없다.  죄의 공세를 느끼지 못하고 죄를 이기기 위해 자신을 자제하지 않은 사람은 죄에 대해 죽었다기보다는 죄와 타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모든 죄를 죽일 수 있고, 처음 회심해서 죄의 자각과 수치심을 느끼고 죄와 대항하는 새로운 원리를 마음속에 심어 죄를 이기는 보편적인 삶의 토대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성도의 마음속에는 죄가 거하며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매일매일 끊임없이 죄를 억제하고 극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오늘날 자칭  신앙인이라고 공헌하는 일반 사람들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이들의 삶을 보면 죄를 죽이는 자세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실로 이 세대의 사람들은 광명의 빛을 받았고 그것과 함께 영적인 은사들을 얻었다.  따라서 다른 여러 가지 원인들과 결합해서 오늘날에는 신앙을 공개적으로 공표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종교와 종교적 의무에 관한 이야기들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이전처럼 경박하고 텅 빈 헛된 설교가 아닌 영적은사를 쏟아내는 설교들을 많이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세대의 빛을 통해 회심을 했고 이전보다 영성에 대해 더욱 많은 말을 하며 주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을 공표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거의가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는다.  오히려 헛된 시간낭비, 게으름, 비생산적인 자세, 시기, 싸움, 알력, 경쟁, 분노, 교만, 세속적인 생각, 이기심 등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지표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자신도 그와 같은 죄의 요소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을 구원하는 빛을 소요한 사람들이 이 지경이라면, 종교심은 있지만 복음의 빛을 경멸하며 죄를 죽여야 할 성도의 의무를 단순히 외형적 오락에서 스스로를 자제하는 행위 정도로 축소시키는 사람들의 경우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선하신 주님은 이런 우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죄를 이기는 성령을 보내주신다.  죄를 죽이지 않는 신앙인들에게서 다음 두 가지 악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당사자 자신에게 있는 것이고, 다음은 타인과 관련된 것이다.

 

1) 자신에게 있는 악    

일반적으로 죄를 죽이지 못하는 원인은 마음속에서 죄의 쓴 맛을 음미하지 않고 그 죄를 그대로 삼키기 때문이다.  은혜와 자비에 대한 생각에 자신의 상상력을 고정시켜 일상적인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통 없이 그대로 소화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음탕한 것으로 바꾸고 죄의 속임수로 인해 그 마음이 강퍅해지게 된다. 

신앙을 공헌했지만 결국 배교를 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와 같은 경로로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한때 그들은 죄를 자각하고 그 자각속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자신들의 자각을 사람들에게 공표도 했다.  실로 그들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벧후 2:20).  하지만 복음의 교리를 알았지만 자신들이 왜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그 원리를 알지 못한 탓에 은혜의 교리로부터 도태되어 의무를 소홀히 하는 모습으로 전략하게 되었다.

 

2) 타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악

죄를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도 선한 상태에 있다는 잘못된 선입관을 갖고 자신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죄를 이기려는 노력이 없는 신앙인의 내부는 모두 오염되고 무가치한 것이다.  이런 자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면 종교에 열심은 가질 수 있지만 그 열심에 인내와 보편적인 의가 함께 동반되지 못한다. 

죄를 죽이지 않는 사람들은 방탕함을 부인하지만 실제로 매우 세속적이다.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면서 전적으로 자신들만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랑의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또한 그들의 말은 영적이자만 실제의 삶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언급하지만 철저하게 세상과 영압한 삶을 운위한다.  죄로부터 용서받은 사실을 자랑할 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중적 언행을 통해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죄를 죽이지 못한 신앙인들은 타인들에게 그들도 자신들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어 그들을 속인다.  그래서 이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외형적으로 더 높은 경지에 이른다 할지라도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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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진리의 성령 2017. 12. 29. 13:28

교회 성장학 교수였던 피터 와그너 박사의 『능력으로 기도하라』란 책에 보면 중국의 한 마을 전체가 주님께로 돌아오게 된 능력 사역의 본보기가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 양 형제가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 그 지역 불량배들이 집회를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본 양 형제는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능력을 나타내주시길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의 능력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낀 양 형제가 말했습니다.  ”여기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슨 말을 했는지 못 알아듣는 귀머거리 여인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양 형제는 낫기를 기도했고 즉석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귀먹은 사람들을 다 나오라고 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나온 사람 모두가 회중이 보는 앞에서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날 밤이 지나기 전에 여섯 명의 병든 사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불량배들도 이것을 보고 놀라 자기들 집으로 가서 아픈 가족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날 밤의 기적은 불량배들을 포함한 마을 전체가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선교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형적인 간증입니다.  지금은 중국의 5천만 내지 7 5백만 신자들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목격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신약시대 사역의 형태였습니다.  로마서 1519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사 일어난 표적과 기사를 통해 전도했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그의 지성을 사용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고전 2:4-5).  바울의 사역에 능력을 주셨던 동일한 성령님이 오늘날에도 우리를 돕기 위해 옆에 와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입기 전에는 사역을 시작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24:49).  비록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임재하시지만(고전 12:3), 하나님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고자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만 합니다(행 1:4, 8).  그러면 능력사역이란 무엇입니까?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가 초자연적인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무장시키는 사역을 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초자연적인 자원으로 우리를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당신은 요한복음 1412절 말씀을 의심없이 믿는지요?  정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확실하게 거짓 없이 믿는다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히 4:12).  만약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박스 안에 갇힌 하나님, 즉 메마른 말씀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요한복음 1412절의 말씀처럼 우리도 그분의 능력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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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으로 말미암아 사죄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요일 4:10).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5:1).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하여 우리의 허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시고 구원을 보증해 주십니다(9:28).  다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으로 말미암아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13-14).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간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14-16).  또한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8:2-6, 27).  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잘못을 범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어 우리를 위해 변론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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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3:15).  이때 세례 요한이 등장하여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주자 혹시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닌가 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 왔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1:20).  어느 날 세례 요한이 평소처럼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을 때 한 젊은이가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3:13).  그때 그 젊은이에게 성령이 임하고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3:17).  이 사건을 목격한 세례 요한은 그 젊은이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란 사실을 깨닫고 오시리라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했습니다(1:29-34).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성실히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며 선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이를 확실하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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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모여서 기도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 조차 너희가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나’( 26:40)라고 책망을 받았으나 승천을 목격한 후에는 많은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는신앙을 가졌습니다( 1:14).  둘째, 기다리며 순종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때라 성령 임재가 있기 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며 열심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행 1:4).  셋째, 널리 전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승천을 목격하고 성령을 받은 후 성도들은 기도히가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4:18-21).  마지막으로 담대한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과거에 제자들은 체포 당하는 주님조차 버리고 도망하는 비겁한 모습을 보였으나 이제는 박해자들의 칼날을 두려워 하지 않고 순교조차 불사하는 담대한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7:59-60).  이처럼 그리스도의 승천을 믿는 자는 이전의 비굴하고 나약한 모습을 벗어 버리고 그 모습이 신앙적으로 변하였는바, 오늘날 성도 역시 그리스도의 승천을 믿는 자로서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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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3).

로마서 8장 서두(1-3)에서 사도 바울은 이신칭의의 교리와 그 은혜에 참여한 자들의 축복을 재요약해서 말한 후, 같은 장에서 그것을 더욱 확대 설명하면서 성도들이 갖는 거룩과 위로에 초점을 맞춘다.  거룩을 위한 바른 동기들을 주장할 때, 바울은 죄의 반대편 관점에서 그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여기서 육신대로 살면이라는 말과 죽는다라는 말은 확실히 성도가 추구해서는 안되는 삶을 가리킨다.  죽음은 육적인 동시에 영적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13절 하반절의 말씀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13절의 후반부를 분석하면 첫째, 우리가 행해야 할 의무에 대해 먼저 말한다.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의 자격 조건을 언급한다.  구체적으로 여기서는 너희들이다.  셋째로 이 구절은 그 의무를 수행할 때 어떤 약속이 따르는지를 보여준다.  한 마디로 그렇게 되면 산다는 약속이다.  넷째로 이 의무 수행의 원천과 수단은 성령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영으로써라는 말을 언급한다.  다섯째로 이 하반절에서 제시되는 명제는 모두 조건부라는 점이다.

 

그러나 만약

13절 하반절에서 조건부로 제시된 명제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말은 그러나 만약이라는 문구이다.  일반적으로 조건부 명제에서 나오는 조건들은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약속의 조건으로 제시된 의무를 수행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의무를 수행하여 약속을 받는 일은 매우 불확실하다.  그가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의무 조항을 절대적으로 충족시키야 하는데, 실상 그에게는 그런 의무를 충족을 확실히 보장해 줄 수 있는 원천이나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서 813절에서 제시된 조건적 표현은 다르다.  이미 81절에서 바울은 13절의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사람들로 묘사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확실히 그 의무를 충족시켜 약속을 성취한 자들이다.

둘째, 일반적으로 조건으로 제시된 의무와 약속 사이에는 논리적 응집력이 있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몸의 행실을 죽이는의무와 산다는 약속 사이에 확실한 관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죄를 죽이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하면서(6:23), 영생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의 관계는 수단과 목적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자유롭게 약속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미리 정하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13절 하반적의 조건적 명제에서 제시하는 바는 죄를 죽이는 것과 영생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연관 관계가 있다.”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런 수단을 사용한다면 그 목적을 선물로 얻게 된다.  다시 말해 죄를 죽이면당신은 살게 된다는 논리이다.  13절에서 제시된 의무에는 바로 이런 동기가 효력이 있다.

 

너희가

그 다음으로 이 조건적 명제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점은 그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당사자들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당사자들은 너희가 죽이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성도들을 가리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1) 사람들로서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5),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살려진자들이다(10-11).  바울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의무를 규정했다.  이 의무를 성도가 아닌 사람들이 억지로 수행한다면 그 결과는 이 세상에서 만연된 미신과 자기 의로 귀착될 것이다.  즉 복음을 외면하고 경건하려는 사람들의 인간적 업적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10:3-4, 15:5).  결국 죄의 지배에서 자신이 해방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아무리 훌륭한 성도일지라도 그는 마음 속에 거하는 죄의 힘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으로써

이 의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원천은 성령이다.  영으로써  여기서 영은 바로 11절에 언급한 영인 그리스도의 영’,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다(9).  이 영을 통해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이다(11).  또한 이 영은 양자의 영으로(15)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는 영이다(26).  성령 외에 다른 방법으로 죄를 죽이는 것은 헛된 일이다.  다른 모든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이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그 의무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스스로 고안한 방법을 가지고 자신의  힘으로 죄를 죽이고자 하는 노력은 세상의 모든 거짓된 종교의 본질이며 그것의 결국은 자기의 의이다.

 

몸의 행실을 죽이는

여기서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몸의 행실이라는 뜻은 무엇인가?  또한 그 행실들을 죽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첫째, 13절 하반적에서 나오는 이라는 단어는 상반적에 있는 육신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따라서 몸은 우리의 타락한 품성과 관련해서 우리 속에 그것이 자리 잡고 있는 좌소이며 도구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몸의 지체는 불의를 섬기는 종들이라고 할 수 있다(6:19).  결국 몸이 의미하는 바는 타락한 육체 또는 정욕으로서 우리 속에 거하는 죄의 속성이다.

둘째, 몸의 행실, 여기서 행실은 외적인 행동으로 갈라디아서 519절에서 현저하다고 명명한 육체의 일이다.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이 행실은 또한 인간 속에 거하는 내적인 원인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로마서 7장과 8장의 초두에서 인간 속에 거하는 죄의 정욕을 모든 죄의 행동의 토대이자 원리라고 지적한 후, 813절에 와서 죄로 인한 결과라는 측면에서 그 파괴력을 언급했다.  여기서 몸의 행실은 육신의 생각(8:6)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의 행실은 육체의 열매와 행동의 원천이 되는 ‘’육체의 정과 욕심과 동일한 의미이다(5:24).  이 몸에 대해 로마서 810절은 그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셋째, ‘죽인다  이 비유적 표현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음의 상태로 놓는다는 뜻을 함축한다.  사람이나 생물체를 죽인다는 것은 그 힘과 활력의 원리들을 제거해서 더 이상 행동하거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죽인다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바울은 우리 속에 거하는 죄를 살아 있는 인격체인 옛 사람으로 비유한다.  그 옛 사람은 자신만의 기능, 자질, 지혜, 통찰력, 힘을 가지고 있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이 옛 사람을 죽여서, 즉 죽음의 상태로 놓아서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옛 사람을 완전히 죽이고 극복한 모범적인 예이다. 

그 결과 비록 우리 마음속에 부활에 반대하는 파괴적인 소욕들이 여전히 공존하지만(5:17), 성도인 우리는 이제 주님의 부활에 처음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6:3-5).  이 부활의 완성은 점진적으로 우리의 일생을 통해 성취되어 간다.

 

살리니

이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약속이 주어진다.  이 약속된 생명은 앞의 상반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는 말에서 언급된 죽음의 위협과 대조를 이룬다.  바울은 이 죽음의 위협을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것을 거두고’(6:8).  여기서 썩어진 것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멸망의 심판을 뜻한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38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 살리라고 말한 것처럼 이제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우리는 삶 속에서 기쁨과 위안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한 마디로 너희가 살리니라는 말은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선하고 활력 있는 안락한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저 세상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육신의 행실을 죽일 때 우리는 영적 삶의 활력, , 그리고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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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L. 무디는 학벌도 없고,

목사 안수도 받지 못한 신발 외판원이었는데

복음을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그와 몇몇 친구들은 기도와 회개와 성화의 모임을 갖기 위해서

어느 풀밭에 모였습니다.

헨리 바알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아직 온전히 헌신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만 온전히 헌신된 사람 한 사람이 나타나면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그와 함께 그를 위해

그 안에서 얼마나 큰일을 하실지 세상은 알지 못합니다

 

무디는 그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훌륭한 설교자인 찰스 스펄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후세의 전기 작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래, 세상은 아직 사람을 보지 못했어!

그를 통해서, 그와 함께, 그를 위해, 그 안에서 얼마나 큰일을 하는지를,

바알리는 누구든 가능하다고 했어,

바알리는 그 사람의 교육수준이 높아야 한다든지,

뛰어나야 한다듣지 하는 그 어떤 조건도 말하지 않았어!

단지한 사람이라고만 했지.

성령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면 나 무디도 그런 사람이 되는 거야

 

갑자기 무디는 지금까지 한 번도 깨닫지 못했던 무언가를

그 교회당에서 보았습니다.

그것은 스펄전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하고 계신 분,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펄전 목사를 쓰신다면

그 외의 사람들을 안 쓰실 리 없다.

주님의 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나를 보내주세요. 나를 써주세요라고 말씀드리자.”

 

무디는 예수님께 온전히 헌신되기를 원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평범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특별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무디는 근대의 가장 훌륭한 복음 전도자 중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과 영국에서 복음전도 집회를 열고 설교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당신은글쎄, 나는 무디가 아닌데…”라고 말하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무디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무디가 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자신이길 원하시고

당신을 통해서 그분이 선택하신 것을 하기 원하십니다.

당신이 그 어떤 중요한 일도 당신을 통해서는 일어날 수 없다고 얘기할 때,

그것은 당신 자신에 대한 얘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 중요한 일을 하실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평범한 한 사람이 헌신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어떤 일도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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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자의 존재는 하나님의 무자비성을 나타내기 보다 그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또한 죄인을 직접 상대하지 않으시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이란 죄가 없는 것을 말하며 죄를 용납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되 죄인만은 사랑하는 바 중보자를 내세워 인간이 간구를 들으시고 그 필요를 채워주시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죄를 사함받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그 아들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케 함으로써 인간에게 진노의 형벌을 내리는 대신 구원의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무자비한 분이셨다면 인간은 이미 형벌을 받아 이 땅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우사 인간과 만나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날마다 찬송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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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16:15-16).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과 비교할 때 베드로의 대답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이심을 정확하게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에 관하여 많은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하였습니다(20:31).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왔으며(14:24), 하나님은 자기의 아버지라고 주장한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17).  그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생명이라고 증거했습니다(요일 5:20).  도마는 누구보다도 확실한 증거에 기초한 믿음을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였다는 동료의 목격담을 듣고도 자신이 직접 부활한 예수님을 볼 뿐만 아니라 만져봐야만 믿을 수 있겠노라고 말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20:24-29).  열렬한 바리새파 율법학자였던 바울은 예수님의 생전에는 그를 믿지 않았으며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제사장에게 넘긴 사람이었습니다(9:1-2).  그런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9:20).  네 사람 외에 다른 제자들 역시 예수님께서 주이심을 믿었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하였습니다(20:2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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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원래 제2위 하나님으로 하나님이 가지신 편재, 즉 다른 피조물처럼 공간에 제한을 받으시지 않고 어디에나 임재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23:24).  그러나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낮추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심으로 편재의 능력을 잠시 보류하셨습니다( 2:6-8).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 하시지 않고 이 땅에 계속 머무셨다면 그는 처소에 제한을 받으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때로는 예루살렘에, 때로는 다른 곳에 계시지만 동시에 여러 곳을 계시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승천하심으로써 세상 끝날까지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자와 함께 있으며( 28:20),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도 함께 계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20).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도들에게는 큰 축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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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견자와 선지자

연구자료 2017. 12. 16. 13:48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삼상 9:9)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선견자(先見者)와 선지자(先知者)는 별개의 사역을 하는 자로 구분될 필요가 없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었다.  성경에는 이들을 일컫는 여러 개의 명칭이 나오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견자(seer)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로는 〈호제〉와 〈로에〉가 있다.  한글개역 성경에는 〈호제〉라는 말이 선견자’(삼하 24:11, 왕하 17:13, 대상 2:9, 7:12)살피는 자’( 47:13)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로에〉라는 말은 성경에서 단 한 차례 나오는데 선견자로 번역되어 있다(삼상 9:9).  둘째, 선지자(prophet)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로는 〈나비〉, 〈나타프〉, 〈느비아〉가 있다. 이중 〈느비아〉는 여자 선지자를 가리키는 여성 명사이다.  한글개역 성경에는 여선지자’( 15:20, 4:4, 왕하 22:14, 6:14)로 번역되어 있다.  〈나타프〉라는 단어는 미가서 2 11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나비〉라는 단어와 의미상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  한편 〈나비〉라는 단어는 한글개역 성경에서 다양한 용어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가 창세기 207, 민수기 1129, 신명기 131, 열왕기상 134, 예레미야 281절 등에서는 선지자, 출애굽기 71절에서는 대언자, 그리고 에스겔서 132절에서는 예언하는 자로 번역되었다.  이상의 예언자들은 왕이나 제사장들과는 달리 그 직분이 세습되지 않았으며 대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고 비로소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하였다(참조/ 1:4-19, 1:1-2).  이들은 장차 일어날 일을 예견하거나 예언하는 것에 주력하였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그 뜻을 좇아 살도록 사람들을 계도(啓導)하는 일에 주력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예언 활동도 실제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을 때에 어떠한 결과가 따를 것인지를 보여주는 계도적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참조 렘 4: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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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우리가 정한 신학적 궤도에 들어맞게

찾아오시는 분이 아니므로

우리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행위에 만족해왔기 때문에

자아가 낮아지려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타락을 다시금 똑바로 보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

깨어지고 통회하는 마음을 얻으려면 기다려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기다려야 한다.

죄가 지배하는 시대에

자기 자신의 노력이 무익한 것을 깨닫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슬픔 중에 죄를 고백하고 보혈을 통해 정결함을 얻으려면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잘못된 것을 고치고

그분 뜻에 복종하겠다고 서약할

비로소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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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경험한 영원하신 그리스도께서 항상 살아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증거했습니다( 7:24-25).  사도 바울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분명하게 증거했습니다( 8:34).  요한 역시 누가 범죄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했습니다(요일 2:1).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서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사역을 수행하신 것처럼 지금은 하나님 곁에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으로 중보사역을 수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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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신적 존재임을 분명하게 증거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믿도록 하려고 애썼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아들이라고 표혔습니다(17:1).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는 것과는 의미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보냄을 받고 세상에 온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11:42, 17:3,7).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7:21).  예수님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뿐만 아니라 공개석상에서 복음을 가르치실 때에도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내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이러한 주장은 몹시 기분 나쁜 것이었습니다(5:18).  더 나아가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을 하나라고 주장했습니다(10:30).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 하여 자기를 본 것이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4:9).  또한 그는 자기를 알았다면 하나님을 안 것이며(14:7), 자기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5:23).  이와 같은 예수님의 주장은 그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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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에게는 죄악으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신음하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 세상( 8:22)에 사는 것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영광스러운 미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을 위한 처소를 예비하실 아니라(요 14:3), 승천하신 모습대로 다시 오셔서(살전 4:17), 죄의 아비이며 온갖 불행을 우리에게 미치게 하는 사단의 세력을 척결하시고 의의 나라를 건설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0).  따라서 그리스도의 승천을 통하여 피조물이 고대할 있는 미래의 세계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죄와 죽음이 없는 세계, 이상 불의와 억압과 불평 등이 없는 세계,   이상 정치적 탄합과 경제적 소외와 인권의 유린이 없는 세계입니다( 21:4).   나아가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미래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것처럼 성도들이 얼굴로 주를 대하여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지며(고전 13:12), 모든 피조물이 주의 은혜를 누리는 세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안에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미리 소유하였으며( 3:20), 성령 안에서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믿음은 소망을 싹트게 하며 소망이 있기 때문( 8:24-25)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세상에서도 사랑과 선으로 악을 이길 있는 것입니다( 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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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기간 동안에 훈련의 내용만큼이나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다른 훈련생들과 관계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실 훈련의 성패는 다른 훈련생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느냐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훈련이 끝난 뒤 많은 사람들이남는 것은 함께 훈련했던 동역자들이라고 고백하는 것만 봐도 훈련기간 중에 다른 훈련생들과 건강한 관계를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훈련생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적극적으로 다가가라

훈련 기간 동안에 다른 훈련생들과 좋은 교제를 나누기 원한다면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겠다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이서 늘 함께 삶을 나누는 이웃이 더 가까운 관계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같은 집에서 살면서 심지어 바로 앞집에 사는 사람들과도 전혀 교제를 나누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누군가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데 서로 똑같이 먼저 다가와 주기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 올 때 한번 얼굴 보고 이사 갈 때 두 번째로 얼굴을 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합니다.  물론 함께 훈련 받다 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관심을 표현하게 됩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내가 먼저 다가간다면 건강하고 깊은 관계가 보다 빨리 세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2. 자신을 솔직히 오픈하라

건강한 관계를 세우는데 자신을 오픈하는 것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오픈하는데 익숙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작은 교회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삶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누구나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내면의 깊은 아픔과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꽁꽁 숨기고 있었던 이야기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훈련은 자신이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남모르는 아픔과 문제들을 계속 나만 가지고 씨름하면 그 씨름은 매우 힘든 싸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훈련받는 지체들과 그 문제를 나누게 되면 그 부담감이 반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건강한 관계란 이렇게 다른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문제를 함께 나눠지려는 마음과 태도를 갖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내 문제로 인식하고 함께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때 그 사람과 깊은 관계성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당신도 그렇게 당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만 진정으로 건강한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들어줄 줄 알면서 자신의 이야기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건강한 관계를 세우지 못합니다. 건강한 관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당신도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솔직히 오픈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3. 상호 책임을 지라

훈련이 계속되다 보면 어떤 훈련생의 태도가 전체 사역 반을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대부분은 문제를 일으키는 그 사람에게 진지하게 충고하고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합니다.  그러나 사역훈련의 목적에 의한 건강한 관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상호 책임을 지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상호 책임을 지려는 자세는 문제의 원인을 어떤 한 사람에게로 돌리지 않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의 책임을 함께 지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훈련시간에 자꾸 늦는 어떤 훈련생의 문제는 그 사람만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호 책임 의식이 없는 반이라면 그 구성원 가운데저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호 책임 의식을 갖는 반에서는 그 훈련생이 늦는 이유를 찾아보고 늦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함께 취합니다.  어느 사역반의 훈련생들이 더 깊은 관계를 맺을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입니다. 상호 책임을 지는 자세는 다른 사람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려는 자세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내 문제로 인식함으로써 문제 해결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통해 서로가 함께 세워져가는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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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죄인을 위한 것입니다( 53:12).  예수님께서는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6).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과 직접 상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1:15).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중보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다시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5:10).  또한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시험받는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22:32).  그리스도께서는 대적들에게 잡히시기 전에 사탄의 시험에 대비하여 시몬 베드로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17:9).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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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후부터(4:18-22), 오랜 기간 동안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신적 능력을 지켜 본 사람들이었습니다(2:1-12).  따라서 그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편으로 과연 예수님이 누군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날 것을 여러차례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9:22), 제자들은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16:22). 그러던 그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한 후(2:1-5)부터는 박해와 위험을 감수하고 대담하게 예수님의 주되심을 전했습니다(2:29-36).  이것은 단지 육신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해서 그의 하나님되심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1:12-13).  따라서 성경은 예수를 주시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고전 12:3).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역시 예수님이 하나님되심을 믿고 구원에 이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능력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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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원래 왕직, 선지직, 제사장직을 지녔으나 특히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제사장직을 완성하셨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유대력 710)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백성들에 대한 속죄의 제사를 드렸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셔서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 제사장의 사역을 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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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골프 선수가  한 가지 종류의 골프채 만을 가지고 18홀 정규 코스를 돌면서 골프를 친다면 좋은 성적을 거두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골프를 치는 사람에게 있어 어떤 골프채를 특별히 선호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사용하는 골프채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골프를 잘 치게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문제들에 있어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게 사역과 거룩한 삶을 위해 여러 가지 능력과 책임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즉 성경과 예배와 세례, 그리고 성찬과 친교, 더 나아가 기도라는 놀라운 특권과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가령 성령의 나타나는 표적을 통해 주님을 믿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놀라운 기적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훈련과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탐구하는 방법을 갖추지 못한다면 다른 형제들을 도와주어야 할 현실적인 필요성이 발생했을 경우에도 오직 한 가지 골프채만을 고집하게 될 것입니다.  요지는 말씀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방식에 대한 편견을 깨고 그분의 나타나심을 환영하는 가운데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Jack R. Taylor의 말을 인용한다면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이 아닌 죽은 말씀만을 강조하는 사람들, 특히 성령의 은사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이지 성령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의 저자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수십 년 동안 방언을 하다가 거짓방언을 미화하는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방언은 성경의 방언과 무관하다고 확신하며 수련회에서 받았던 방언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은사에는 방언기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누군가 방언을 하면 사탄에게 속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 분이 영분별의 은사가 있거나 축귀사역에 경험이 있으면 귀신방언이 어떤 것인지 쉽게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 2 때 방언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 분별력 없이 귀신이 주는 방언을 성령이 주시는 방언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분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방언 이야기가 전혀 없었던 학생회 수양회에서 마지막 날 혼자 산 속 바위 옆에서 기도하다가 방언을 했으므로 ‘내가 받은 방언은 성령이 주신 참 방언이다’라고 굳게 믿었다.  이 글을 읽고 생각나는 것은 교육전도사 시절에 중고등부 학생들이 수련회에 가면 믿음도 없는 상태에서 겁없이 혼자서 기도하다가 귀신이 들리거나 헛소리하는 아이들을 많이 보아온 나로서는 처음부터 이 분이 정상적인 방언을 받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William Sargent가 『Battle for the Mind』에서 이야기 했듯이 자기도취에 빠져 심리적인 현상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성령이 주신 방언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 분 말대로 “성령의 은사에는 방언기도가 없는가?, 그리고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은 사탄에게 속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많은 은사들을 나열하면서 그 중에 방언과 방언통역함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고전 12:10), 이 방언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송이며(고전 14:2, 15, 28), 통역이 없으면 골방에서 개인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덕을 세울 수는 있지만(고전 14:3),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고전 14:11-13), 마음이 아닌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로(고전 14:14-15), 얼마든지 자제력이 가능하고(고전 14:27-28), 모든 신자가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고전 12:30),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말합니다(고전 14:39).  달리 말하면 신약정경이 완성됐다고 해서 은사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일시적으로 주신 것들 중 하나가 방언의 은사라는 것입니다(고전 13:10).  더 나아가 고린도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바울이 그들을 향해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사람 중에( 10:9), 누군가 방언을 한다면 그 사람 안에 역사하시는 분은 귀신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고전 12:7). 

 

그러나 이창모 목사는 현대교회의 방언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는 사탄에게 속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속단합니다여기서 나에 대한 신앙고백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셨고(17:5),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 1:3)에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2:7).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고( 28:19), 특별히 제2위 성자(聖子)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명칭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었는데( 3:22), 이 명칭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성자의 신분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하는 모든 구원받은 자의 구주되심을 보여줍니다( 5:31). 또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여호와’란 명칭은 오직 절대자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고유명사이지만( 3:14), 이 명칭이 그리스도에게도 직접 사용된 것은( 26:4), 이는 예수님께서 영원 자존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시고( 22:13),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언약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처음과 마지막’이시며( 1:17), ‘알파와 오메가’이신 구속사역을 완성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9:12).  그렇다면 이러한 진솔하게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무조건 방언기도를 한다고 해서 사탄에게 철저하게 지배를 받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고 싶은 것은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스스로 헷갈려 알지도 못하는 헬라어와 영어를 들먹거리고 횡성수설 하며 말에 핵심이 없는 것을 볼 때 방언기도를 하는 나로서는 이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사실 기도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나의 연약함과 초라함, 그리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 안타까움에 대한 회개가 알아듣는 기도보다 방언으로 기도할 때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마귀의 주술에 걸렸거나 귀신에게 미혹을 당해 옹알거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은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목사들 중에 누가 방언에 대해 말만하면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로 병적인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단이 아닌 이상 성경이 진리의 말씀인 것을 부정하는 이단적 사상을 가진 정신나간 목회자는 없습니다.  반쪽짜리 메마른 말씀(골프채 하나)만을 강조하면서 방언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은 성경은 복음을 통해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1:16),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다 고치셨다라고 증거하고 있는데( 8:16), 왜 하나님의 말씀은 지겹도록(그토록) 강조하면서 교회 안에 귀신에게 눌리고 병든 자들이 많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4:18).  사족이긴 하지만 가 그것을 알리가 없겠죠?  자기가 게거품을 물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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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꼭 해야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미루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Q.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시는 편인가요?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을 하겠다.”는 말은 참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주변을 정리하고 싶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한두 번쯤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변화해가는 현대 사회에서 시간 관리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시간 관리에 관한 책들은 늘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을 살펴보면 일을 좀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에만 초점이 맞춰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이 일을 꼭 해야만 하는가?  나는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방법을 몰라서 시간을 관리하지 못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간 관리에 있어 획기적일 만큼 탁월한 방법이 나왔다면 이미 우리는 그것을 어떤 채널을 통해서라도 배웠을 겁니다.  사실 가만히 살펴보면 시간에 관련된 우리의 문제는 시간관리 방법 습득과 같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좀 더 본질에 부분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신이 중요하고 의미 있게 여기는 일에서 벗어나 그저 주어진 일들을 체계적인 방식에 따라 처리하는 것만을 반복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시간을 더욱 바쁘게 만들고 더 큰 좌절감에 빠지게 만들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 없는 반복을 통해서는 성취감을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꼭 살펴보아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삶의 우선순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생각하면서 시간과 관련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들을 풀어가는 지혜를 얻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어떠하던 우리 모두에게는 똑같은 양의 시간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두었으면 합니다.  이 문제는 ''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나는 늘 왜 이러지'라는 맥없는 태도를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양의 시간을 주셨다는 것은 이 부분의 해결을 위해 따로 특별한 은사를 사모해야 할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능력의 한계 안에서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삶의 우선순위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첫째,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면 낡은 것을 버려라.

계획하지 않은 시간은 나의 행동을 나의 약점의 구렁덩이에 빠지게 합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면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실패는 더 이상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낡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최고 우선순위는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5:8-10).  그러나 그들은 우선순위를 망각하였기에 애굽의 생활들을 그리워했습니다(16:3).  낡은 것들을 그리워한 겁니다.  그러나 낡은 것을 그리워한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광야에서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중단하고 의미 있는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삶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삶이 변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의 우선순위도 바뀌게 됩니다

 

둘째. 시간의 청사진을 그려라.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내가 속한 상황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좌우됩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보다 다른 사람의 우선순위에 이끌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 시간을 지배하기 전에 내가 독자적으로 내 시간을 통제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보다도 내 주위의 강한 사람들이 당신의 시간을 주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 사용에 있어서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십시오.  목표, 활동, 시간 등의 계획을 세우는데 들인 1분은 계획들을 실행하는 시간 10분을 절약하게 됩니다.  계획을 수립하는 행위 그 자체에 힘입어 하는 일 모두가 전보다 더 명석하고 정확해지기 때문입니다.

 

셋째,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가장 나쁜 시간 사용법은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을 매우 훌륭하게 하는 것입니다.  파레토 원칙에 따르면 20%의 활동이 당신의 활동에서 80%의 가치를 낳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만약 성취할 사항이 10가지 있다면 그 중 두 가지가 나머지 여덟을 합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일을 성취하려면 삶과 일에 가장 큰 가치를 주는 소중한 것에 전념해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질문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 있어서 내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당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제자훈련을 받는 여러분에게는 훈련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우선순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서 타협에서는 안 될 요소들, 즉 영적 훈련, 지성 훈련, 휴식 그리고 가족과 특별히 친구 관계를 위한 시간들을 먼저 배려하십시오.  또한 여러분에게 맡겨진 중요한 일들에 대한 일정, 즉 훈련에 집중하는 시간, 성경묵상, 기도, 암송, 생활전도 등을 우선순위로 배려하십시오. 정해 놓은 우선순위와 계획된 시간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작할 때 아무리 일등으로 뛴다 하더라도 끝까지 시합을 마칠 수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경주를 끝낼 때까지 뛰어야만 합니다.  최후의 승자는 경주의 모든 코스에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속도로 끝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훈련을 받는 훈련생 역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훈련을 잘 받기 위해서 우선순위를 세우셔야 합니다.  우선순위에 의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빠른 속도로 끝낼 수 있는 최후의 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망설이지 마십시오.  오늘 당신의 우선순위를 세우는데 방해되는 낡은 것은 무엇입니까?  과감하게 끊어버리십시오.  가장 효과적이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는 이성적인 분석보다 용기가 필요 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시간과의 전쟁에서의 최후 승리는 머리에서가 아니라 손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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