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한국에 전쟁 소문을 퍼트린 어떤 여성이 자신의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거역하거나 믿지 않으면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감을 조성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 여성은 귀신에게 순간순간 조종 당하고 있기에 구약 선지자와 신약 선지자의 차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보낸 참선지자가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9:1, 삼상 10:18)라고 말할 그 당시에는 선지자가 전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같았고(18:19, 33:7), 자신의 개인적인 해석과 적용 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 그대로를 전하고 선포했습니다( 22:38).  따라서 하나님의 보낸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고(삼상 8:7), 그의 말에 불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과 같았습니다(왕상 20:35-36).  그러나 D.A. Carson이나 Wayne Grudem이 말한 것처럼 신약의 예언자는 예언의 내용을 조심스럽게 점검 받을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신약의 예언은 구약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 같이 하지 말아야 하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고 있는 신구약 성경에 의해 분별하고 확인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신약의 예언은 얼마든지 틀릴 수 있기 때문에 기록된 성경을 통해 다른 지체들에게 확증을 받고 시정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고전 14:29).

 

무엇보다도 그녀의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고린도전서 143말씀처럼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소망과 기쁨을 주어야 정상인데( 1:5), 문제는 이 여성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마음에 소망이 일어나기 보다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거나 마음에 안정을 갖지 못하고 생업을 내려놓고 교회만 매달리는 일들이 일어났고, 심지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피신하는 현상들이 생기는 것을 볼 때 그 여성의 메시지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분명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말미암는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데( 10:17), 하나님의 메시지를 통해 소망을 주기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생겨 믿음이 흔들리거나 파선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딤전 1:19). 물론 하나님의 메시지 속에는 죄를 깨닫게 하거나(58:1), 죄인을 심판하는 경고성 말씀(33:7-9), 그리고 책망과 바르게 하는 것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딤후 3:16),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시지도 않고(딤후 1:7), 인내하는 가운데 소망을 갖도록 은혜를 주실 아니라( 15:4), 어려운 환경 속에 흔들리지 않도록 든든하게 세워주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20:32).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메시지를 무시할 필요는 없고, 그가 전한 메시지 속에서 헤아려 좋은 것만을 취하면 되는데(살전 5:20-22), 예를 든다면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성의 문제점을 조금 더 살펴보면 예언은 성령의 깊은 감동 속에 전해지는 메시지인데(벧후 1:21), 이 사람은 입만 열면 마치 자신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직통으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말하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약성경 시편의 기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중단 없는 메시지를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3:1, 28:1, 39:12, 83:1, 89:46, 109:1).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요구하거나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예언을 수시로 수가 없었습니다( 42:1-7).  신약에 와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종종 답답한 일을 당하더라도 낙심하지 않았다고 했고(고후 4:8),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을 한다고 말합니다(고전 13:9).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수시로 메시지가 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참고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누군가 분별하거나 토를 달면 그 상대방(목사)을 향해 언성을 높여가며 회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볼 때(고전 13:2), 사람은 이미 성경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이고, 이미 점치는 귀신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신약의 예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가능한 것이지만( 2:17-18), 역대상 252절에 보면 사람들이 아삽의 지휘 아래 예언을 하고, 아삽은 왕의 지위 아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 지도자(담임목사) 권위 아래서( 13:1), 예언이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일들을 통해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적대적이고 회의적인 사람들의 반응인데, 이들은 공격할 빌미를 잡고 은사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봐라! 저게 무슨 예언이냐, 무당 점치는 것이 아니냐!”  마치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미끼로 해서 고소할 조건을 찾으려는 바리새인처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8:1-11).  물론 이것이 공갈과 협박(왕하 18:17-37), 그리고 비판과 논쟁을 좋아하는 이단(사냥꾼)들처럼(딤전 6:4), 거짓말을 밥 먹듯이 잘하는 영이 비틀어져 있는 마귀의 습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8:44), 좋은 빌미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예언이 어떤 미숙한 사람에게는 마음에 상상일 수도 있고( 13:17), 사탄이 인간을 속이려하는 것도 있기 때문( 23:13)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요일 4:1).  그러나 이것을 모르고 미혹의 영에게 속아(요일 4:6), 메시지를 여과 없이 그냥 전하는 사람이나 이 일을 통해 성령의 은사인 예언에 대해 줄기차게 비판하는 일에 앞장선 목사들이 있는데, 이들 역시 마귀에게 충동질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고전 12:7), ‘영들 분별함의 은사에 대한(고전 12:10), 절실함입니다.  특히 이 은사는 말씀이 혼탁하고(고후 11:4, 딤후 4:3-4), 온갖 잡다한 영들이(왕상 22:21-23, 12:43, 6:12, 딤전 4:1, 18:2), 판치는 이 세대에 반드시 필요한 은사인 것만은 사실이기에 현대 교회는 이 은사를 기도하는 가운데(고후 1:11), 간절히 사모하며 구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14:1,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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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아일랜드 Kalapana 지역에 있는 Lava를 보기 위해 6개월 전부터 인터넷 자료와 여행자 후기를 보면서 준비를 했습니다.  용암을 보는 방법은 세 가지인데, 하나는 헬리콥터를  타고, 다른 하나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또 다른 하나는 왕복 8마일을 걷지만 차를 몰고 가서 보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용암이 눈 앞에서 흐르는 것을 직접 보고 싶어 차로 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1 gate에서 차를 주차하고 자전거를 빌리거나 아니면 셔틀 버스로 이동하지만, 저희는 시간을 단축하고 걸어가는 것을 줄이기 위해 인터넷에서 구글링하는 가운데 그곳에 사는 원주민과 연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후 330분쯤 도착하여 1Gate를 거쳐 2Gate를 지나 약속한 원주민 사유지에 짚차를 주차하고 10분 정도 걸어 3Gate에서부터 Lava 하이킹을 시작했습니다.  용암이 흐르는 곳까지 걸어서 2시간, 그곳에 도착해서 1시간 정도 구경하고 다시 돌아오는 데만 3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전날 우리가 가려던 곳에서 어느 한 사람이 유황가스에 질식되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뉴스에 아랑곳 하지 않고 용암으로 굳은 땅을 걸으면서 그곳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와 유황 냄새, 그리고 바로 1미터 앞에서 흘러 내리는 시뻘건 용암을 눈으로 직접 볼 때 현장에서 느끼는 경험은 인터넷을 통해 지식적으로 알았던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솔직히 이런 예화를 드는 것은 방언 하지 않는 목사나 신학자가 방언에 대해 많이 아는 것처럼 입을 가볍게 나불거리는 것은 한 마디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939 Sweden 수도 Stockholm에서 열렸던 The European Pentecostal Conference에서 매우 획기적이고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길 방언성령의 사역과 별도로 일어날 있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말의 의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방언의 표적이 없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아직도 방언을 성령세례의 육체적인 증거 보고 있는 반면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에 대해 다소 유연한 입장, 성령세례를 받을 방언을 수도 있고 수도 있지만 방언은 여전히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하며 성령충만한 삶의 일상적인 부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 그리고 은사주의 갱신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 특히 메마른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학으로 물든 사람들 중에는 오늘날의 방언은 귀신에게 미혹되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소리를 옹알거린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은사들은 초대교회 사도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사악한 궤변을 늘어 놓기도 합니다.  사실 방언이 추잡하고 거짓된 소리 현상이라고 부정하거나 무엇보다도 방언하는 사람은 미혹을 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을 가졌다고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16:20), 말씀을 전해도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죽은 말씀만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4:12).

 

사실 방언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입만 열면 얄팍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공격을 하는데, 이런 무경험자들은 Lloyd Jones가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서 한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해야만 하며 그 중에 한 가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방언을 고려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이 소책자와 논문집을 발간했는데, 그들 중에 한 저자가 오늘날 모든 방언은 마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그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 매우 주의해야 하며 이 문제에 대해 개방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그런즉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강조하기를우리가 어떤 사건의 보고를 들을 때면 이를 무시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고성령의 주권 가운데 그분은 어느 시대라도 이 은사들 중에 어떤 것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방되어 있어야 하고 또한 신중하고 주의 깊게 범사에 헤아려 오직 좋은 것을 취하여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 방언보다 더 오용되기 쉬운 은사는 없는데(고전 14:16-17), 만일 교회 내에서 지혜롭게 관리만 잘한다면(고전 14:27),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에 방언을 금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고전 14:39).  한마디로 지옥의 자식 바리새인처럼 성령을 대적하지 말아야 하고(12:22-36), 그렇다고  무작정 모든 것을 수용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살전 5:21).

 

그리고 방언을 타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인옹알거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은사를 주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고전 12:11), 대단한 모욕이라고 생각하고( 12:10), 떡을 달라는 자녀에게 뱀을 줄 아버지가 없듯이( 7:9-11), 신자들 중에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그분께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11:13).  비록 그리스도인들 중에 고린도 교인들처럼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고전 3:3)에 성령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할 때(고전 12:11),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눈에 거슬리게 행동할 수도 있겠지만(고전 13:1-3), 그렇다고 그 모든 성령의 역사를 가짜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놓고 Jonathan Edwards는 『부흥론』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가지 신중하지 못한 행위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일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신중하지 못한 처신들뿐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기준에 정말 반대 되는 일이 많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그러면서 그는 성령이 역사하실 때 비상식적으로 처신한 고린도교회와 거룩하고 영감을 받은 사도 베드로의 예를 듭니다.  다시 말해 경건한 사람들 중에도 베드로처럼 무지와 부패가 남아 있어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는 것처럼(2:11-14), 은사 받은 사람들이 신중하게 행동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일어난 초자연적인 역사 전체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18:7),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영광스럽게 나타내신 때 걸림돌이 생기지 않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20:17).  Jonathan Edwards걸림돌이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결코 기대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마태복음 1222-32절을 인용하여 성령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성령을 대적하는 죄만큼 인간 영혼에 해롭고 위험한 죄는 없다. 성령이 인간들의 마음에 행하시는 은혜로운 역사를 대적하여 말하는 것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대적하여 말하는 것이 낫다. 그 어떤 것도 대적하는 것만큼 우리 영혼이 그분의 역사의 은택을 받는 것을 영원히 방해하는 것은 없다.”  한 마디로 가마리엘처럼 지혜롭게 행동하고( 5:33-39), 성령을 모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2:10).  더 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가 마시는 식수(食水)가 환경오염을 통해 더러워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평생 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신자들 중에 은사를 사용하다가 실수나 눈에 띠게 거스리는 행동, 혹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해서(5:22-23), 그 일로 인해 성령의 역사 전체를 귀신의 역사라고 치부하지 말아야 하다는 것입니다( 3:22).  방언기도하는 목회자로서 한 가지만큼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오늘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6:18),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방언이 개인의 기도생활에 있어 유익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고전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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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앙의 초보인 자매가 성령의 은사 방언’(고전 12:10)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면서 방언 받지 말 것을 강조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 자매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자기 자신의 잘못된 영적체험에 대해서만 신뢰할 뿐, 과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검증하지 않은 채(고전 14:27-29, 살전 5:21, 요일 4:1), 무조건 방언 받지 말 것을 주장하는 것은 성령이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신 귀중한 은사(고전 12:7)을 심히 거역하고( 7:51), 소멸하는 것으로 좋은 태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살후 5:19).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방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귀한 선물이고( 1:17), 믿는 자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자기 덕을 세우는 은사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고전 14:4, 26),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신자의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에게 잘못된 것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신뢰해야만 합니다( 7:9-11, 8:32).  그리고 누구든지 독단적인 말을 하거나 어떤 주장을 내세우기 전에 그것에 대한 연구조사를 미리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2때 분별력 없어 귀신이 주는 방언인지 아니면 자기 도취에 빠져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방언 받은 것으로 착각하며 쓴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의 저자처럼 이 자매 역시 성령의 은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부터 차분하게 배우지 않았기에 일어난 문제인 것 같습니다(딤후 3:14).  그러므로 자신의 분별력 없는 무지하고 미련하게 행동한 것을 하나님과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19:3).

 

오늘날 성령의 은사에 대해 체험이 없는 사람은 방언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에 잠재의식에서 올라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특히 Nils Bloch Hoel의 저서 『Pentecostal Movement』에서 말한 것처럼 방언을 심리학적 질병으로 진단하고 방언을 말하는 자를 일종의 변종으로 진단합니다.  그의 의학적 견해는 들어보면 “진정한 Xenolalia(외국어란 뜻)는 일시적인 정신적 현상으로서 환자가 황홀경에 들어가거나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때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외국어를 근육 운동을 통해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상태인 기억증진증(Hypermnesia)과 과거의 경험을 회상했을 때에 그것이 미경험인양 느껴지는 정신병리학에서 말하는 잠복기억(Cryptomnesia)이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만족스럽고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이 방언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Hoel의 이런 주장은 오늘날 방언하는 사람이 황홀경이나 정신적 충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상태가 온전한 가운데 방언한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나온 잡설(雜說)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된 대로 방언하는 자는 몰아지경에 들어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식이 있어 방언을 통제할 수 있고(고전 14:27-32), 성령이 역사하실 때 비합리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제하고 중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행 2:4, 14).

 

물론 고전적 신비주의 경건과 다른 일부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 예를 들면 혼자만이 성령의 은사를 독점적으로 체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이 예배나 기도 중에 광적이거나 자제력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무질서한 행동을 통해 일부 사람들의 마음속에 방언은 일종의 무아지경의 언어라는 생각을 심어주는데 일조했는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신앙의 초보이거나 말씀으로 무장되기보다는 은사를 먼저 받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묘사하는 바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오순절날 강한 능력으로 임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방언을 그치고 베드로가 모인 군중들에게 설교를 할 수 있었고( 2:1-21), 사도 바울도 방언을 순서에 따라하고 세 사람이 넘지 않게 하라고 명함으로서 방언을 말한 사람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과 스스로 자제할 수가 있고 아무도 방언하지 않을 때나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만 방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4:27).  더 나아가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할 것과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을 고린도 신자들에게 가르친 것으로 볼 때에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은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심리적인 방언이나 귀신이 주는 방언과 달리 충분히 자제력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고전 14:26-33)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바울이 방언을 일종의 무아지경(無我之境)의 말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방언의 은사에 대해 Peter Wagner는 “자신이 배우지 않는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역량이고, 그분께 받은 즉각적인 메시지를 자신이 배우지 않는 하나님의 성별된 언어로 그분에게 전달하는 역량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방언을 사적방언공적방언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먼저 사적방언은 흔히 기도의 언어로 간주하고 방언통역의 은사가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428절의 말씀을 제시합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통역이 없는 방언은 교회에서 활용되면 안 되고 그 은사를 가진 사람은 다만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공적방언은 방언통역의 은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통역이 없으면 공적방언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교회에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고전 14:27-28).  요약하면 사적방언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기도의 언어로서 자기의 덕을 세워주기 때문(고전 14:4)에 통역할 필요가 없지만 공적방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교회 공동체에 전달하는 것으로 반드시 통역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고전 14:23).  따라서 바울이 말한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는 말은 교회에 와서 개인적으로 방언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회중 가운데 통역하는 사람이 없을 때 즉, 예배 중에 통역이 없는 방언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 성령의 열매인 절제를 빼놓고 신앙생활을 한다면(5:23), 이런 초보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인해 고린도교회처럼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에 기록된 방언(고전 12-14)은 성령 하나님이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허락하신 귀한 은사이기(고전 12:11)에 누군가 방언을 금하거나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고 또한 방언은 남용이나 오용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지혜로운 관리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고전 14:40).  그리고 성경 어디에도 방언의 은사가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고전 13:8-10)에 오늘날 방언이 존재하느냐에 대해선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고, 방언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누리는 유익한 은사로(고전 14:14)서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는 놀라운 그분의 선물이기도 합니다(1:17).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모를 때 돕는( 8:26), 은사이기에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20).  물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6:18)과 로마서826절의 말씀을 해석할 때, 이 구절들은 방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도생활에서 발생하는 일반적인 체험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지만, 아무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에게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합니다(고전 14:18).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방언 말한 것보다 훨씬 많이 했다고 고백하는 이 말속에 그가 지녔던 영적인 권능의 비밀이 여기에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따라서 누군가 '방언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방언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신자들만이 말하는 천상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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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골프 선수가  한 가지 종류의 골프채 만을 가지고 18홀 정규 코스를 돌면서 골프를 친다면 좋은 성적을 거두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골프를 치는 사람에게 있어 어떤 골프채를 특별히 선호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사용하는 골프채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골프를 잘 치게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문제들에 있어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게 사역과 거룩한 삶을 위해 여러 가지 능력과 책임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즉 성경과 예배와 세례, 그리고 성찬과 친교, 더 나아가 기도라는 놀라운 특권과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가령 성령의 나타나는 표적을 통해 주님을 믿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놀라운 기적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훈련과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탐구하는 방법을 갖추지 못한다면 다른 형제들을 도와주어야 할 현실적인 필요성이 발생했을 경우에도 오직 한 가지 골프채만을 고집하게 될 것입니다.  요지는 말씀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방식에 대한 편견을 깨고 그분의 나타나심을 환영하는 가운데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Jack R. Taylor의 말을 인용한다면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이 아닌 죽은 말씀만을 강조하는 사람들, 특히 성령의 은사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이지 성령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의 저자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수십 년 동안 방언을 하다가 거짓방언을 미화하는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방언은 성경의 방언과 무관하다고 확신하며 수련회에서 받았던 방언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은사에는 방언기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누군가 방언을 하면 사탄에게 속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 분이 영분별의 은사가 있거나 축귀사역에 경험이 있으면 귀신방언이 어떤 것인지 쉽게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 2 때 방언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 분별력 없이 귀신이 주는 방언을 성령이 주시는 방언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분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방언 이야기가 전혀 없었던 학생회 수양회에서 마지막 날 혼자 산 속 바위 옆에서 기도하다가 방언을 했으므로 ‘내가 받은 방언은 성령이 주신 참 방언이다’라고 굳게 믿었다.  이 글을 읽고 생각나는 것은 교육전도사 시절에 중고등부 학생들이 수련회에 가면 믿음도 없는 상태에서 겁없이 혼자서 기도하다가 귀신이 들리거나 헛소리하는 아이들을 많이 보아온 나로서는 처음부터 이 분이 정상적인 방언을 받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William Sargent가 『Battle for the Mind』에서 이야기 했듯이 자기도취에 빠져 심리적인 현상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성령이 주신 방언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 분 말대로 “성령의 은사에는 방언기도가 없는가?, 그리고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은 사탄에게 속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많은 은사들을 나열하면서 그 중에 방언과 방언통역함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고전 12:10), 이 방언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송이며(고전 14:2, 15, 28), 통역이 없으면 골방에서 개인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덕을 세울 수는 있지만(고전 14:3),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고전 14:11-13), 마음이 아닌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로(고전 14:14-15), 얼마든지 자제력이 가능하고(고전 14:27-28), 모든 신자가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고전 12:30),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말합니다(고전 14:39).  달리 말하면 신약정경이 완성됐다고 해서 은사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일시적으로 주신 것들 중 하나가 방언의 은사라는 것입니다(고전 13:10).  더 나아가 고린도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바울이 그들을 향해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사람 중에( 10:9), 누군가 방언을 한다면 그 사람 안에 역사하시는 분은 귀신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고전 12:7). 

 

그러나 이창모 목사는 현대교회의 방언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는 사탄에게 속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속단합니다여기서 나에 대한 신앙고백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셨고(17:5),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 1:3)에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2:7).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고( 28:19), 특별히 제2위 성자(聖子)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명칭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었는데( 3:22), 이 명칭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성자의 신분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하는 모든 구원받은 자의 구주되심을 보여줍니다( 5:31). 또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여호와’란 명칭은 오직 절대자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고유명사이지만( 3:14), 이 명칭이 그리스도에게도 직접 사용된 것은( 26:4), 이는 예수님께서 영원 자존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시고( 22:13),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언약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처음과 마지막’이시며( 1:17), ‘알파와 오메가’이신 구속사역을 완성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9:12).  그렇다면 이러한 진솔하게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무조건 방언기도를 한다고 해서 사탄에게 철저하게 지배를 받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고 싶은 것은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스스로 헷갈려 알지도 못하는 헬라어와 영어를 들먹거리고 횡성수설 하며 말에 핵심이 없는 것을 볼 때 방언기도를 하는 나로서는 이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사실 기도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나의 연약함과 초라함, 그리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 안타까움에 대한 회개가 알아듣는 기도보다 방언으로 기도할 때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마귀의 주술에 걸렸거나 귀신에게 미혹을 당해 옹알거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은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목사들 중에 누가 방언에 대해 말만하면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로 병적인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단이 아닌 이상 성경이 진리의 말씀인 것을 부정하는 이단적 사상을 가진 정신나간 목회자는 없습니다.  반쪽짜리 메마른 말씀(골프채 하나)만을 강조하면서 방언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은 성경은 복음을 통해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1:16),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다 고치셨다라고 증거하고 있는데( 8:16), 왜 하나님의 말씀은 지겹도록(그토록) 강조하면서 교회 안에 귀신에게 눌리고 병든 자들이 많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4:18).  사족이긴 하지만 가 그것을 알리가 없겠죠?  자기가 게거품을 물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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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의 빛 월간지를 발행하는 안식교 출신 손계문 목사, 구약의 율법적인 음식물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혼합율법주의자인 노우호 목사, 한국교회의 대안으로 목사가 없는 교회를 주창하면서 집사 직분을 늘 달고사는 신성남 집사,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방언할 줄을 모르면서 방언에 대해 많이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들이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를 어떻게 잘 아는 것처럼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의 말을 빌려 말하면 자신이 왜곡한 사실을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는 공상허언증에 걸린 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잡설(雜說)에 가깝고, 한국 속담으로 표현하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목사는 이미 논할 가치도 없는 영이 잘못된 사람들이지만, ‘랄랄라 현상과 방언장사라는 글을 통해 현대방언은 거의 가짜라고 주장하는 신 집사의 글입니다.  사실 시간이 아깝지만 이 분의 글을 10편 정도 읽어보는 가운데 한 결 같이 느끼는 것은 마음이 비틀어져서 그런지 아니면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인지 돈키호테처럼 교회개혁에 앞장 선 조폭(?)해결사 같이 쓴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나만 느끼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 분의 글을 읽다 보면 목이 곧고 눈에 할례를 받지 못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교회와 목사를 비판만 하려고 했지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골병든 글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비판적인 글을 계속 읽는다면 머지 않아 영혼이 병들고 믿음이 파선될 것입니다.   

 

“뜻 모를 이상한 말을 쏟아내며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교리를 주장하는 신흥종교 단체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되었다. 아주사 스트리트의 다 쓰러져 가는 건물 안에서 연일 집회가 열리고” 이 글은 1906 418일 수요일자 Los Angeles Times에 실린 기사로 The 100 Most Important Events in Christian History』란 책에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부정적인 언론보도는 오히려 사람들을 집회로 끌어들이는데 도움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침례교 목사 그것도 방언을 유난히 강조하다가 쫓겨난 William J. Seymou를 사용하여 아주사의 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방언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Stanley H. Frodsham은 『With Signs Following』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보거나 배워보지 못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용했고, 노르웨이의 학자이며 『성경문고』의 국제판 편집자인 Thoralf Gilbrant 1985년 세계 오순절 대회에서 이탈리어를 하나도 모르는 자신의 할머니가 유창한 이탈리어로 이탈리아 선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간증합니다.  물론 방언의 은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육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릴 것입니다(고전 1:14).  사실 오랜 세월에 걸쳐 방언은 지나치게 논란이 되어왔기 때문에 모든 은사들 가운데 방언만큼 가장 큰 관심을 끄는 은사도 없었고 반대 의견도 가장 많았던 은사이기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먼저 “오늘날 각종 방언 말함이 과연 성경적인가?(고전 12:10)라는 것에 대해 Gordon Fee는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방언은 사도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논란이 많은 것으로 바울의 논증 배후에는 고린도교인들이 특별히 방언과 방언통역을 선호했다는 것이 깔려있는데 바울이 말한 방언은 성령에 감동된 발언이고(고전 12:7), 화자(話者)가 몰아지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있으며(고전 14:27-28), 통역되지 않는 한 화자(고전 14:14)나 다른 청자(聽者)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이지만(고전 14:16),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언어이므로(고전 14:2, 14-15, 28), 통역되는 내용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하는 신비들이었다.”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Richard Gaffin과 Robert Reymond는 방언의 은사는 교회 창설적 성격을 띤 것으로 이미 중지된 계시은사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은사들이 계속된다고 할 때에 교회로 하여금 공상적인 각종 주장들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것 이외에 성경 교훈과의 모순을 유발한다는 문제를 지적합니다.  Anthony A. Hoekema 역시 Tongues and Spirit-baptism』에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외에 신약의 어떤 서신에도 방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방언이 교회 안에 계속될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고 AD 100년에서 1900년까지 교회사에 방언이 거의 전적으로 부재한 것은 하나님께서 방언을 교회 안에 계속 시키실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는 주장과 거의 양립될 없다.


그러나 Michael Green은 『I Believe in the Holy Spirit』에서 방언의 종료 문제에 관해 “성령은 교회 밀실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다. 사도시대가 끝났다고, 신약의 정경이 완성됐다고 해서 예언과 방언이 소멸된 것이 결코 아니다. 방언은 인간의 언어라기보다는 사람과 천사가 속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자유함 가운데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게 해주는 성령의 언어이다.”라고 말합니다.  D. A. Carson도 방언의 은사가 계속된다는 측면에서 방언 논쟁에 있어 관건되는 몇 가지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는데, 먼저 방언에 ecstasy(황홀경)이 포함되느냐는 여부에 대해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Walter J. Hollenweger는 『The Pentecostals』에서 정신이완이 고양된 상태에서의 뜨거운 방언과 화자(話者)가 정신적으로 깨어서 통제할 수 있는 상태인 '차가운 방언을 구분하여 전자는 ecstasy가 포함되고 후자는 ecstasy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는데, Carson은 현대의 압도적 다수의 방언하는 사람들이 차가운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의 방언이 '실제(외국어)의 언어'인가 혹은 인간 언어와 동일시 될 수 없는 언어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Carson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실제적인 언어들, 즉 사람들의 언어들이건 천사들의 언어들이건 간에 인식적인(cognitive) 언어들의 은사라고 말하며, 현대 방언에 대한 언어학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현대의 방언현상 수천 건을 테이프에 담아 분석한 언어학자들 간에 그것이 어떠한 인간 언어가 아닌 보편적인 합의가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학자들의 여러가지 견해가 있는 반면 주로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줄기차게 내세우는 말은 교회사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은 방언을 하지 않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사도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주후 4세기의 성경주석가였던 John Chrysostom은 방언은 이미 그쳤으며, 5세기의 Augustine도 방언은 초기의 표적으로 사라졌고,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도 은사들은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다고 가르쳤습니다.  Calvin 역시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 247문』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 즉 방언기도는 유희(遊戱)와 같은 것에 불과하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46절을 주해하면서 로마서 1129절의 말씀과 상반되게 하나님께서 과거에 허용하셨던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빼앗아 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강요』에서는 고린도전서 1415절 말씀을 가지고 또 다른 주장을 펼칩니다.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 사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외가 있다면 마음속에 감동되는 힘이 부족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압도적이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느낌이 격동된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제네바 교리문답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은 Calvin 자신도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Lloyd Jones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서 방언은 우리가 주도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원하는 대로 방언을 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방언'이 아니라 '심리적인 방언'이라고 말하면서 은사는 성령이 통제하는 것이지(고전 12:11), 사람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가짜와 진짜의 구분은 여기에 있고 모든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 좋은 것을 붙잡으라고 말합니다(살전 5:21).  이렇듯 오늘날 방언이 논쟁이 심한 것처럼 고린도교회의 문제도 방언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고(고전 14:23), 그 당시 그들은 방언을 최고로 생각했으며(고전 12:30), 누구나 다 방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고전 12:30), 자랑하려다가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은사 목록에서 의도적으로 방언을 마지막에 둔 것(고전 12:8-10)은 고린도교인들이 그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또한 그들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 방언보다는 예언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고전 14:5).  사실 방언은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정령주의자들도 흉내낼 수 있지만 우리 믿는 자에게 있어 방언의 은사를 주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에(고전 12:7), 성령이 하시는 일을 금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통역이 없는 방언을 회중 예배 때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고(고전 14:28), 교회 내에서 질서 있게 관리만 잘한다면(고전 14:40), 방언기도만큼 개인의 덕을 세워주는 소중하고 유익한 은사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아야 합니다(고전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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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한 인격체라는 사실은 믿으나(엡 4:30),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된 존재이거나 피조된 인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단)들도 있지만,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창 1:2)란 사실이 진리의 말씀인 성경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령을 직접 ‘하나님’이라 호칭하고 있으며(행 5:3-4, 고전 3:16), ‘주’라고 부르기도 하고(살후 3:5),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게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신적속성’, 즉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영원성’(히 9:14)과 ‘전능성’(눅 1:35), 그리고 ‘전지성’(고전 2:10-11)과 ‘편재성’(시 139:7-10), 더 나아가 ‘거룩성’(롬 1:4)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처럼 창조(창 1:2, 욥 26:13, 시 33:61)와 섭리(시 104:30), 그리고 인간 구원의 주체이심을 보여주는데(요 3:5-6, 딛 3:5), 이는 결국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지니신 존귀함을 성령에게도 그대로 적용하는 것으로써 성령 역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으로서 예배를 받아야 할 분이심을 말해줍니다(마 28:19, 고후 13:13).  James I. Packer는 성부와 성자에게 초점을 둘 때 성령을 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성령에게 초점을 둘 때 성부와 성자를 잊어서도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이 이 점에 있어 균형을 잃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성령의 은사’라고 해서 삼위 중에 성령에게만 국한되는 사역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공동사역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끝이 없고 유한하지 않으신 것처럼 하나님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다양성의 하나님이신데(시 145:3), 우리의 인간적인 성향은 우리 자신이 만든 인위적인 틀 안에 제한하거나 또는 경험과 사역 양쪽에서 융통성이 없는 고정 관념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눈송이를 제각각 다르게 만드신 무소불능하신 창조의 하나님(욥 42:2)은 영적은사들의 풍부한 다양성, 즉 그 전체적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여러 가지 색깔로 된 다양한 실들이 섞여 수놓은 양탄자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각 사람이 받은 은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롬 12:6), 우리가 받은 은사를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사용해야 합니다(벧전 4:10).  여기서 궁금한 것은 “얼마나 다양한 은사들이 존재하는가?”라는 것인데, 이 문제를 놓고 John Stott고린도전서 12장8-10, 29-30절(열세 개의 은사)과 로마서 12장6-8절(일곱 개의 은사), 에베소서 4장11절(다섯 개의 은사)과 베드로전서 4장11절에서 나오는 두 개의 은사, 즉 ‘만일 누가 말하려면’ ‘누가 봉사하려면’이라는 구절을 제시하면서『성령세례와 충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성경에 명기된 스무 가지의 은사가 있으며, 다양성을 사랑하시고 후히 주시는 분인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은사들을 주실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성경에 기록된 이 목록들이 성령의 모든 은사들을 다 망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은사가 다양하다면 이 은사의 본질을 규명함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고린도전서 12장 4-6절에서 나오는 ‘은사’‘직임’‘역사’를 비교해 보는 것인데, 사도 바울이 본문에 나오는 이 세 가지 단어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각 다른 위격과 연관시켜 기술하고 있는 것을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병행을 이루고 있는 ‘성령은 같고’, ‘주는 같으며’, ‘하나님은 같으니’라는 말은 주체적 성격을 띠고 있는 ‘동일한 성령’, ‘동일한 주’, ‘동일한 하나님’을 뜻하는 것으로 이것은 은사의 삼위일체성,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공동적 토대를 가지고 사역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문제를 놓고 Richard Gaffin『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성령은 성부의 약속이며(눅 24:49, 행 1:4), 성부도 로마서 12장3절과 고린도전서 12장28절 말씀을 근거해 은사(봉사를 위한 능력)들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면서(롬 12:6-8), 승천하신 그리스도 역시 은사(사역의 직분)들을 주시며(엡 4:7-11), 성령도 다양한 은사들을 주시기 때문에(고전 12:11), 이러한 은사의 삼위일체성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고전 12:4-6), “은사는 성령 것만이 아니라 성자의 것이요 성부의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성도는 한 성령의 은사를 받아 일(사역)을 하지만 그 직무와 직무를 수행하는 양상이 각기 다른 것처럼 ‘은사들’은 성령이 주도권을 가지고 나타나시는 은사들이고, ‘직임들’은 예수님이 주도권을 가지신 봉사들이고, ‘역사들’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신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한 가지 확실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령이 은사를 주시고, 예수님은 직임을 주시고, 하나님은 역사를 주신다는 식으로 구분해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모든 은사는 성령이 중심이지만 성부와 성자와 무관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 14장17절에서 ‘성령의 내주’14장23절에서는 ‘성부와 성자의 내주’로 되어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동일하신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동일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봉사, 그리고 동일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은사’ ‘직임’을 관련시켜 보면 은사는 과시나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도하시는 ‘봉사’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고, 결국 은사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되어 있는데, Stott는 이 세 가지 단어를 종합해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립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사람들이 특정하게 각자에게 맞는 봉사의 일을 하는데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여하신 일정한 재능들이다.”  그러면서 성령이 삼위 중에 실행자이시며 오늘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성령으로 행하시는 것이 사실이지만(요 15: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은사들에서도 그것들을 전적으로 성령께만 돌려서는 안 되고 삼위의 세 위격이 모두 참여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성령의 은사가 단순히 성령 활동의 표현이 아니라 성자와 성부의 주도적 활동과도 직결되어 있으며 은사는 봉사와 역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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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Charies H. Spurgeon이 설교를 하다가 말고 잠시 멈추고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젊은 청년, 자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장갑은 돈을 주고 산 게 아니라 주인에게서 몰래 훔쳤지”  예배가 끝난 뒤 얼굴이 창백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한 젊은이가 Spurgeon에게 다가와 개인적인 신앙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그 청년은 가지고 있던 장갑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 물건에 손을 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목사님만 아시는 비밀로 해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도적질을 했다는 말을 들으면 충격을 받아 돌아가실 지도 모릅니다.” 이 간증 이야기는 『C. H. Spurgeon, Autobiography, Volume 2, The Full Harvest』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것은 Spurgeon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거나 신학과 교리를 잘 알아서 이런 초자연적인 정보(지식)를 알아낸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의 자서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들도 있습니다.  “언제가 음악당에서 설교하고 있을 때 나는 의도적으로 군중들 가운데 있는 한 사람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 제화공 한 분이 앉아 있습니다. 그는 주일마다 가게 문을 엽니다. 그 가게는 지난주일 아침에도 문을 열었고 그는 9펜스를 벌어 그 중에 4펜스를 이윤으로 남겼습니다. 그의 영혼은 4펜스에 사단에게 팔렸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음악당에서 나의 말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 외에는 어떤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나 내가 말한 것이 옳은지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누군가를 지목해서 말한 그와 비슷한 수십 번의 사례를 더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런 Spurgeon의 체험들이 ‘사적인 계시’와 ‘성경의 계시’를 혼동하는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지속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전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항5조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의 충분성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계시’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데서 나온 신학적 편견이고, 더 나아가 Wayne Grudem과 D. A. Carson이 말하는 것처럼 조직신학의 용어와 성경의 용어를 혼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설교할 때 사용했지만 그것을 ‘지식의 말씀’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고 해서 성령께서 그를 통해 이루신 일의 실체를 바꾸어 놓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Spurgeon의 신학과 사역을 후세의 전기 작가들이 기록한 내용과 함께 살펴본다면 대부분의 칼빈주의 신학자나 목사들은 지식의 말씀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이런 은사가 초대교회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는 잡설에 가까운 결론을 내리겠지만, 사실 그의 자서전에서 말했듯이 Spurgeon 자신의 증언은 우연히도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드러내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의 충분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사의 똑같은 기간 어떤 영적인 은사가 상대적으로 흔하지 않았거나 없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그 은사의 사용에 반대하셨거나 은사의 유효성을 부정하셨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보지는 말아야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고 근심케 만드는데 기여하는 불신과 배교, 그리고 신학적 무지와 개인적인 부도덕으로 인해 교회사의 시기에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자주 나타나지 않은 것이지 성경에 기록된 은사가 중단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오늘날 자기 백성들에게 은사를 베푸시기를 원하시는지 판단하기 위한 최종적 기준은 성경말씀이지만(계 22:18-19), 문제는 교회사의 어떤 사람들, 예를 들어 Augustine, Luther, Calvin, 등등의 생애 속에 특별한 체험(방언, 예언, 환상)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그런 경험이 현재적 유효성을 의심하기 위한 이유로 언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바리새인 같은 신학적 편견과 무지에서 나온 것이지(눅 11:52),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은사들이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않을 뿐더러(고전 14:39),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방언을 말하거나 다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2:29-30).  그러기에 과거 그리스도인들의 실패나 성공이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궁극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노시스’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비해 신약성경에서는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지만(눅 11:52, 롬 11:33, 15:14, 고전 8:1, 엡 3:18, 빌 1:9, 3:8, 딤전 6:20, 벧후 1:6, 3:18), 사도 바울이 고린도신자들에게 ‘지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고전 12:8), 이 은사가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아홉 가지 은사들을 기록하면서(고전 12:8-10), ‘지식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신자들이 하나님의 신비인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가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골 2:3)에 대해 풍성하고 온전히 이해하는 가운데 믿는 자에게 주어진 계시된 비밀, 즉 지식 안에서 자라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고전 1:5, 엡 4:13-16).  하지만 바울이 이 지식을 성령의 은사에 포함시켰을 때는 무엇인가 더 큰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13장2절 말씀인 ‘내가 …모든 지식을 알고’(고전 13:2)라는 구절과 고린도전서 14장6절 말씀 ‘지식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이 유익하리요’라는 두 구절을 비교해보면, 여기서 말하는 ‘지식’(고전 12:8)이란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적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지식의 말씀의 은사란 이 은사를 받은 자안에서 자리 잡은 특징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와서 듣는 이의 마음을 쪼개는 사적인 특별한 계시, 즉 초자연적인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의 성품을 알아보셨을 때(요 1:48)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웠고 그 물을 떠서 연회장으로 가져다주라고 하인을 명하셨을 때(요 2:1-12), 분명 예수님께서는 이 은사를 가지고 사용하셨고(요 4:18), 베드로에게도 이 은사가 있었으며(행 5:3-4, 9),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사 역시 이런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왕하 5:20-26).  따라서 이 은사는 일반적으로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성령께서 즉각적으로 주시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 은사를 소유한 사람은 개인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고전 12:7).  그리고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성령께서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중요한 은사이고(고전 12:11), 오늘날에도 이 은사를 받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를 받고 오랫동안 진리의 말씀을 통해 잘 다듬어지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하나님의 말씀과 열매 맺는 삶을 통해 훈련되어 있지 않는 미성숙한 사람이 무분별하게 시행하거나 혹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 없이 사용한다면 매우 위험할 수 있는 은사이기도 합니다(고전 13장).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위험부담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선물(약 1:17)인 은사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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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저술했을 당시 이미 고린도 교회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행 18:1-17), 교회 신자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확실한 성경의 원칙에 입각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활용이었지만(고전 12:3-7), 정작 이들은 성령께서 교회를 연합하기 위해 주신 은사를 가지고(고전 1:6),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하는데(엡 2:22),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나누는 일에 사용했습니다(고전 1:13).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는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고전 12:7), 은사의 목적은 예배 안에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고전 14:26), 덕을 세우며 서로 격려하는 것인데(고전 14:3-4),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문제는 성령께서 허락해 주신 은사(고전 12:11)를 공동의 유익을 위해 활용하지 않았고(고전 13:1-3), 오직 자신만이 특별하다는 느낌을 주는 은사들에 대해서만 많은 관심을 가지고 구했으며(고전 12:29-31), 은사를 받은 교회 지도자들 역시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듯 예배를 인도했을 뿐 로마 교회처럼 그 누구도 조용하게 섬기는 일은 원치 않았습니다(롬 12:7).  즉 이들은 은사를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잘못 사용하여 교회 내에 갈등과 혼동 속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고(고전 3:3), 그 결과 감동적인 연설가인 아볼로파와 사람을 낚는 어부 출신인 베드로파, 그리고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바울파, 심지어 자신들만이 거룩하고 오직 예수만을 섬긴다는 그리스도파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고전 1:10-13).


솔직히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싸움은 현재까지 지속되어 교회 안에서 ‘은사주의파’, ‘개혁주의파’, ‘경건주의파’, ‘복음주의파’, ‘오순절주의파’, ‘의식주의파’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천년 전의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은 교회연합을 위해 은사를 허락해 주신 것이고(고전 12:7), 결코 교회를 나누기 위해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고전 12:12-27).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심각한 문제를 알고 진정한 사랑의 개념을 지적하고 있는데(고전 12:31), 먼저 신자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은사들을 놓고 라이벌 의식이나 질투 혹은 교만 따위를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사랑의 필요성에 대해서, 그다음 13장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14장은 사랑의 실행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은사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고전 13:1-3).  이런 의미에서 J. I. Packer“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윤리적인 것이 은사적인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그 어떤 은사들도 사랑에 기초하거나 사랑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추구하고 행사되지 않는다면 그 은사는 교회 안에서 소리만 요란할 뿐(고전 13:1),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은사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닮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엡 3:14-19).


사실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똑같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엡 2:20-22)데는 은사들에 대한 많은 가르침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성경을 읽고 권면하며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야 하며(딤전 4:13-16),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데 동일한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고전 12:18-21).  쉽게 말하면 교회 식당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나 주일학교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 혹은 강단에서 설교하는 사람 모두가 한 몸에 속해 있을 뿐 아니라 명백한 사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 12:27).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은사를 활용하라고 강권하고 있으며(고전 14:1),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획을 올바르게 이행하기 위해서는 에베소 신자들을 가르친 것처럼(엡 4:11-16),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은사 활용이 절대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고전 14:39).  따라서 교회 안에 이기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각 사람이 은사별로 섬기는 것이고(롬 12:4-8), 협력해야 할 메시지를 몸에 비유한 것같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몸이 완전하게 서로 조화되고 각 지체가 그 기능대로 다른 지체를 도움으로 건강하게 자라고 사랑으로 그 몸이 세워지는 것입니다(엡 4:16).  즉 은사의 일차적 목적은 다른 지체들을 돌봄으로(고전 12:25),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골고루 세워나가는 것처럼 자기 유익이 아닌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고전 12:7, 엡 4:7-12).


여기서 성령의 은사들(고전 12:8-10, 29-30, 롬 12:6-8, 엡 4:11)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은 결국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Yves Congar“성령론 없이는 기독론은 없고 기독론 없이는 성령론은 없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성자가 성부의 뜻을 따라(요 7:16-18), 성부의 영광을 드러내는데(요 8:50), 초점을 두었던 것처럼 성령도 예수의 영으로(행 16:7), 성자의 말씀과 행위를 생각나게 하고(요 14:26), 성자의 영광만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요 16:13-14).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를 통해 어떤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면 그 사건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나타내야 하고,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처럼(행 3:7),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행 3:12).  그러므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의 목적은 동일한 한 성령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는 것이고(고전 12:11),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에(고전 12:7), 성령의 은사로 인해 교회 안에 계층이 생기거나 분쟁이나 분열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를 구실삼아 은사론 전체를 부정함으로 성령의 은사들의 다양성을 의도적으로 적대시하거나 Lloyd Jones, R. T. Kendall, Wayne Grudem, D. A. Carson, Jack Deere, Vern Poythress, Gordon Fee, Sam Storms, Michael Green 등등 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염병처럼 멀리해야 할 마귀의 능력”이라고 단정 짓지는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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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으리라는 예감이 든 적이 있다.  우리는 따로따로 미국에서 남아메리카에 있는 볼리비아로 가야 했다.  아내는 브라질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친 뒤 북으로 방향을 틀어 볼리비아로 비행기를 타고 갈 예정이었으며, 나는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몇 나라, 베네주엘라, 콜롬비아, 그 외 나라들에 들러 학생 사역을 격려하고 볼리비아에서 아내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우리가 헤어지기 직전에 그 예감은 고통스럽도록 분명하게 다가왔다.  왜 되돌아가서 아내에게 비행기 표를 취소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왜 나는 이 예감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는가?  나는 예감이란 것을 믿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지식의 말씀’ 이라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는 터였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나는 비참한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물론 나는 기도했다.  믿음으로 그것을 물리치려 했다.  그토록 강력한 예감이 있는데?  내 입은 바짝 말랐다.  하나님은 까마득히 먼 곳에 계신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냐? 너는 나를 신뢰할 수가 없느냐?”  나는 깜짝 놀랐다.  “예, 주님을 믿습니다. 아내와 아들을 내게로 되 돌려보내 주시겠다고 약속만 하신다면.”  침묵이 흘렀다.  그러고는 “내가 그렇게 약속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네게 되 돌려보내주지 않는다면 이제 나를 신뢰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오! 하나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너는 그들을 삶에서 뿐 아니라 죽음에서도 내게 맡길 수 없단 말이냐?”  나는 그분 앞에서 울며 떨리는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예, 그들을 주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에서나 생명에서나 그들을 돌보아 주실 것을 압니다.”  그러자 떨림이 가라앉았다.  믿음으로 나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나 그들에게 어떠한 대가를 요구할지라도 그것을 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겠습니다.”  그들이 탄 비행기는 추락했다.  그리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다.  하지만 아내 역시 어떤 예감을 느꼈고 여행을 갑자기 중단하여 그 참사가 일어나기 바로 전 비행기에서 내렸다.  이 간증은 의료선교사와 목회자의 길을 걸었던 정신과 의사 John White 박사의 저서 『The Cost of Commitment』에서 나온 내용인데, 이 간증을 다시 요약한다면 하나님께서 White 박사에게 아내와 아들이 비행기를 타서는 안 된다는 예감(지식의 말씀)을 주셨지만, 그는 아내에게 그 말을 미처 전달하지 못했고 그들이 탄 비행기가 이륙했다는 말을 듣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뇌에 사로잡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만을 신뢰하라고 분명히 말씀해주셨지만 결국 비행기는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 그의 아내에게도 지식의 말씀이 있었기에 그 비극이 일어나기 직전 착륙한 공항에 내려 그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는데(고전 12:7), 여기서 ‘나타남’이란 말은 각 신자 안에 계신 성령께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영광을 산출하는 것으로, Tom Smail은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성령은 신령화 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몸(body)안에서 일하신다. 그분이 거기서 하시는 일은 실재를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성령께서는 열매(갈 5:22-23) 은사(고전 12:8-10)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어 알려지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이 모든 신자들 속에서 역사하시되 개별적으로 각자에게 나타나시는 것이 성령의 은사라는 차원에서 볼 때 신자들 중에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은 신자는 없습니다(고전 12:11).  그리고 은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행 1:6-8), 복음을 전하며(롬 15:18-19),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막 16:20), 건축자에게 주신 연장(도구)인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이고, 이토록 소중한 성령의 나타나심인 은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고전 14:1), 무엇보다도 은사는 개인의 만족이나 이기주의를 위한 것이 아닌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각 신자에게 주어진 은사는 기록된 말씀 밖에서 역사하지 않고(고전 4:6), 언제나 신자의 유익, 즉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공적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때문(엡 4:7)에 직간접적으로 성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성령의 나타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식의 말씀’의 은사인데(고전 12:8), Bruce B. BartonNeil Wilson은 이 은사에 대해 “영적인 실체들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의미할 수도 있고(고전 13:2, 8-12, 14:6), 또는 기독교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훈련하는 교사들에게 주어지는 지식”이라고 말하는 반면 이런 양면성을 가진 견해와 달리 주로 칼빈주의 신앙으로 철저하게 물들어 있는 사람은 Richard Pratt이 말한 것처럼 오직 한 가지만을 주장합니다.  “바울이 초자연적 수단을 통해 사실적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증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아마 직접적인 계시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이나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을 것이다.”  즉 지식의 말씀이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지 비밀스러운 것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John Archer“지식의 말씀은 구속계획에 실재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표현하는 교육의 은사”라고 말하면서 “이 은사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이상적인 유추나 설명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라고 강조합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 은사는 진리의 말씀을 잘 고찰하여 거기서 얻어진 진리를 교회에 전달하는 은사일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주시는 예언과 깊이 관련된 초자연적인 지식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에 대해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롬 12:3), 사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려 있지 않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지식에 대해 거부하겠지만, John Archer는 지식의 말씀은 다양한 방법으로 계시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오감을 통해 사용된다고 말하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복음전도자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A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여자가 지금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붉은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목신경이 손상되어 있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이 순간 당신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에서 나오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는 사건처럼(눅 7:1-10), 시공간을 초월한 즉각적 계시, 즉 신비스러운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때 오늘날도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강하게 부인하는 부류는 “이런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르기 때문에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하면서 이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을 향해 사탄에게 미혹당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려 있고 열정적으로 수용하는 부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리감을 두고 신중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부류는 “사실 나도 그런 은사를 체험하고 싶은데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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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후 방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그분은 내 마음에 그날 밤 한 젊은이가 예배에 참석할 뗀데 그의 이름이 John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께 그 도시에 살고 있는 남자들 중 절반의 이름이 John이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이름은 John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은 바로 그날 아침에 한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고, 성령께서 그녀에게 “네 아들 John에게 예배에 함께 가자고 말하라.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실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같이 가자고 간청했고, 그는 불신으로 가득 찬 채 “좋아요. 엄마 제가 가도록 하지요, 만일 하나님이 저의 이름을 부른다면 제 인생은 그의 것이 될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저녁예배 때 나는 성령께서 내게 주신 그 말씀을 전하고 John이라는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당연히 John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그것은 성령의 나타나심이었고 지식의 말씀이었다.  그는 그날 그의 삶을 예수님께 드렸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 엄마의 편지를 파일에 보관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Mighty Manifestation』에 나오는 복음전도자 Reinhard Bonnke의 간증인데, 사실 지식의 말씀은 성경 어느 곳에도 언급한 적이 없는 은사로 성경이외의 다른 초대기독교 문서에도 이 구절을 사용한 기록이 없음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 은사에 관한 유일한 자료는 고린도전서 12장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 지식의 말씀은 다른 은사와 달리 전후 문맥에 따라 이해해야 하는데, 모든 성경주석가들은 위의 구절만 가지고 연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확실히 이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의 말씀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이 은사가 신자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줄 수 있는 능력, 즉 사전에 미리 알 수 있는 자료에 근거하지 않는 지식이라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성령께서 즉각적으로 주시는 계시에 근거한 것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열성을 보이는 교사들에게 있는 지식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은사에 대한 신학자들의 여러 견해를 살펴본다면 Calvin은 골로새서 2장3절 말씀에 근거하여 지혜와 지식은 서로 관련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지식은 거룩한 것들에 대한 이해”로 해석했고, John Archer는 『Charisma and Christian Life』에 실린 글을 인용하여 성령께서 어떤 숨겨진 사실이나 상황을 계시하시는 정신적 인상, 그림 혹은 비전이라고 규정하면서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이상적인 유추나 설명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은사이고, Peter Wagner는 “지식의 말씀은 몸에 성장과 여러 가지 정보와 사상을 발견하고 쌓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는 역량이다.”라고 하며, Bruce B. Barton은 “이것은 영적인 실체들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의미할 수 있다.”라고 강조하는 반면 Richard L. Pratt, Jr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 속에서 한 가지 공통점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의 말씀이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아는 것이란 일상적으로 배워서 얻어지는 지식, 즉 배우는 일에 열성을 보이고 장시간에 걸친 집중력을 가지고 놀라운 양의 지식을 습득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고찰하여 거기서 얻어낸 진리를 교회에 전달하는 것으로 모든 신자들이 다 같이 알아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다는 지식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사전에 미리 알 수 있는 자료에 전혀 근거하지 않는 즉각적으로 주어진 초자연적인 지식, 즉 인간의 이성이나 합리적 판단과 추론에 의해 도출된 자연적인 지식이 아닌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신비스러운 지식을 말하는 것인지?  먼저 신구약 성경에서 그 실례를 찾아본다면 하나는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하나님과 주인의 이름을 도용하여 나아만에게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예물로 받아 자기 집에 감추어두는 파렴치한 죄를 지었을 때 엘리사가 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되고(왕하 5:20-26), 다른 하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동기가 정직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즉각적이고 가혹한 심판이 내려졌는데(행 5:1-11),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이때 베드로에게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은사는 배워서 얻어지는 지식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지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조금 더 찾아본다면 먼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난 예수님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사람의 외모에 의해 판단하시지 않고(사 11:3), 성령에 의해서 판단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셨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이 여인의 영적인 갈증과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는 것과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함께 부도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요 4:10-26).  이런 초자연적인 지식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전형적인 본보기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이미 그의 성품을 훤히 아셨던 것과(요 1:46-48), 처음 만난 삭개오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일들을 통해(눅 19:1-10), 이 지식의 말씀이 현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므로 전지하셨다고 말하겠지만, 사실 예수님은 그 당시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요 10:30),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눅 2:52).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속성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고 가르쳐 주는데(빌 2:6-11), 예를 들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함께’ 할 때까지 기다리셨고(눅 5:17),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능력의 근원은 그의 신성이 아니라 성령에 의존함이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눅 4:14-21).  즉 인성의 한계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신적능력을 빌어 사역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마 12:28).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제한 없이 받아들이는 교회나 집회에서 종종 누군가가 “주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물론 ‘분변하라’는 말씀(고전 14:29)과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1), 그리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는 말씀을 읽어본 적이 없거나 잊고 사는 사람은 “스쳐 지나가는 생각도 성령의 음성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모든 은사는 본래 교회의 유익과(고전 12:7),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인데(엡 4:12), 사실 몸의 필요성이 다양하기 때문에 초자연적으로 아는 것도 지식의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이렇게 볼 경우 신비스러운 지식과 성경 계시와의 관계 면에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데, 이것은 ‘계시’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사가 교회를 건강하게 자라나도록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할 때에 신중해야하는 이유는 지나가는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세 있는 말씀처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은 Charles Spurgeon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과 반대로 나오는 계시가 없듯이 한 개인을 위한 지식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직간접적으로 성경과 관련되어 있다.”  즉 성령의 은사가 교회의 각 지체에게 유익하고 조화롭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는 가운데 바르게, 그리고 분별하는 가운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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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도 현대교회에서 과연 예언이 필요한가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주기 위해서 먼저 성서적인 희랍 어원에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어휘들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성경 속에는 두 개의 희랍어가 영어 단어로는 ‘말씀’(word)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하나는 ‘로고스’이고(마 8:16), 다른 하나는 ‘레마’(마 4:4)입니다.  신학자들 가운데는 이 단어들을 가지고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서로 다른 의미를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Bill Hamon 박사는 희랍어 학자들과 성서 신학자들 간에 이러한 단어들이 동의어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논의가 벌어졌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두 단어가 각자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말하면서 ‘로고스’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영원히 변하거나 폐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인(요 1:1, 14), 성경 전체를 의미하고(딤후 2:15), 반면에 ‘레마’를 사용할 때는 개별적으로 그 말씀을 적용할 수 있는(롬 10:17),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한 구체적인 말씀을 뜻한다고 주장합니다(엡 6:17).  즉 로고스(빌 2:16)는 우물 안에 물과 같고, 레마(엡 5:26)는 우물에서 길어낸 한 통에 담긴 물과 같기 때문에 W. E. Vine 박사가 말한 것처럼 로고스는 절대로 변하거나 폐하지 않지만(요 4:50), 레마는 항상 로고스에 의존하고 “말씀에서 나온 한 말씀”으로 성령께서 믿는 자들 속에 가져다주는 개별적 성경구절이라는 것입니다(행 11:15).


오늘날 “신약의 예언은 설교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떠한 사람들은 “신약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사역이다” 또는 “신약 선지자의 기능이 오늘날 설교와 근본적으로 유사하다”라고 말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 “당시 성경이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언이 설교의 기능을 대신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구절인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여’라는 구절을 가지고(행 15:32),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믿음을 장려하고 격려하는 말씀이 설교라고 강조합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Robertson and Plummer“예언은 반드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능력으로 설교하는 것을 가리킨다.”라고 말하면서 고린도전서 14장 3, 24, 30절 말씀을 제시하는데, 한 마디로 신약의 예언은 설교와 같은 것이지 별도로 구별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 일곱 집사 중에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있을 때 유대로부터 한 선지자 아가보가 내려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행 21:8-11), 이것도 설교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라 앞으로 당할 일을 예언한 것이고, 바울도 성령을 통해 자신이 결박과 환난을 당할 것을 이미 알았다는 것입니다(행 20:22-23).


이 신약의 예언이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Dennis and Benett“설교는 미리 준비할 수 있고 영감 받은 지성과 훈련에 근거하지만 예언은 그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직접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의 출처는 영이지 지성이 아니라.”라고 말하며, Michael Haper도 예언과 설교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예언이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마음에 떠오르게 하심으로 예언하는 사람이 자기의 말로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것을 ‘계시’라고 말하는데(고전 14:30-31), 여기서 말하는 계시는 꼭 성경을 기록하거나 아니면 그 권위에 있어 성경과 동등한 말을 의미하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고(빌 3:15, 마 11:27), Wayne Grudem이 말한 것처럼 단지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생각 혹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의식 속에 심어주신 생각을 가리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생각은 한 개인의 평소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확실한 느낌을 갖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 말하는 사람의 나름대로의 이해와 해석도 포함되어 있기에 판단과 분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고전 14:29), 바울은 이러한 느낌이나 본능을 ‘계시’라고 칭하고(엡 1:17), 하나님께서 촉구하신 것을 교회의 회중에게 보고하는 행위를 ‘예언’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4:26).


그러므로 신약 성경의 모든 예언은 성령의 즉각적인 역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행 11:28, 21:4, 10-11, 요 11:51),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즉각적인 계시를 받지 않았다면 거기에는 예언이 없다고 보아야 하고, 반면에 예언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본문해석(설명)과 삶의 적용이 있다면 그것은 신약성서의 용어로 ‘성경의 가르침’ 혹은 ‘설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Grudem의 말을 인용한다면 가르침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행위나 교사가 하는 일 등에서 ‘가르치다’라는 동사가 묘사하는 어떤 활동도 신약에서는 계시에 근거해서 했다는 기록이 없고, 오히려 가르침이란 단지 성경에 대한 설명이나 적용(행 15:35, 11:26, 롬 2:21, 15:4), 또는 사도들의 교훈의 반복내지는 설명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롬 16:17, 딤후 2:2, 3:10), 우리는 이것을 ‘가르침/설교’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가르침은 성경에 근거하여 준비에 의한 것이고, 예언은 즉각적이고 자발적인 계시에 근거한 것이기에 가르침과 예언은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편적이고 범위가 한정되어 있는 신약의 예언(고전 13:9)은 권위에 있어 회중 설교보다 앞서지 않고, 더 나아가 교회에서의 회중 예언(고전 14:26)은 언제나 성경의 권위 있는 가르침 아래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을 명령하였고(딤전 4:11, 6:2),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예언을 굳게 잡으라고 교훈하지 않고 자신이 가르친 진리의 말씀을 굳게 잡으라고 말했습니다(살후 2:15).


또한 디모데전서 5장17절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장로들 중에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예언하는 장로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었고, 또 이들이 예언하기를 잘하며 확실한 예언에 견고하게 선 자들이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바울은 장로들이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딤전 3:2, 딛 1:9).  그리고 디모데는 지도자로서 자기 자신과 가르침을 잘 살피라는 권면을 바울에게서 받았지만(딤전 4:16), 예언을 삼가라는 권면을 받은 적은 없었고, 더 나아가 야고보는 예언하는 자들보다는 가르치는 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을 경고했습니다(약 3:1).  쉽게 말하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설교 혹은 가르침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골 3:16, 히 5:12), Dennis and Benett가 말한 것처럼 “예언은 영감 받은 설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언과 설교, 이 둘은 명백하게 구분이 되어 있고, 만일 전하는 메시지가 본문에 대한 해석과 적용을 포함한 의식적인 사고의 결과라면 그것은 신약성경의 용어대로 하면 가르침이지만(행 19:8-10, 딤후 2:2), 만일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갑자기 마음에 주신 어떤 것에 대한 보고라면 그것은 예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눅 1:67).  물론 잘 준비된 설교에 전혀 계획에도 없었던 성령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마음속에 주시는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예언적 요소가 혼합된 설교/가르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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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 가족 중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와 가족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하루아침에 잃었을 때 그 마음의 슬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들 중에 신앙의 회의를 느끼거나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실망을 가지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으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악한 마음을 품고’(히 3:12),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비슷하게 성령의 은사인 방언(고전 12:10)을 받은 사람들 중에 오랫동안 방언을 하다가 어느 신학자/목사가 쓴 빈약하고 허접한 글이나 책을 읽고 지금까지 해오던 방언기도를 하루아침에 과감하게 포기해 버리고 자기 자신이 미혹의 영에게 속아 초대교회 때 끝난 방언을 지금까지 한 것에 대해 원망하며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것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마귀는 인간의 영혼을 도적질하고 미혹하는데 있어(요 10:10), 간교하기가 그지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요 8:44), 무엇보다도 균형 잡힌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늘날 은사에 대한 신학자/목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겠지만(히 5:14), 만약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는다면(엡 6:10-18), 거짓선생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각양 좋은 은사들(약 1:17)을 초개와 같이 버리게 될 것이고, 계속해서 귀신의 가르침이나 미혹케 하는 영(딤전 4:1)에게 충동질 당하게 된다면 아마 예수님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릴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방언을 포함한 모든 은사는 믿는 자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지만(고전 12:4-11), 경험으로 봤을 때 지성주의에 묶여 있는 사람이 거의 방언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너무 지적으로 만들어 버렸기에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의심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인데, 이런 지식인은 이성에 초점을 너무 맞추고 있어 자신의 혀를 성령에게 순복시키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사실 방언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며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의식과 통제력을 갖은 상태에서 방언을 할 수 있고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시작하고 원하는 때 끝낼 수도 있습니다(고전 14:27-32). 여기서 성령이 주시는 방언(고전 12:11)을 노래 부르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능력은 늘 우리에게 있듯이 노래를 하고자 할 때에 노래할 수 있고 일단 노래를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과 같이 방언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고전 14:15).  물론 방언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사탄은 처음 몇 주 동안 거짓말로 “진짜가 아니야, 네가 가짜로 하는거야!”라고 의심을 심어줄 수 있지만 방언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열매를 보는 것입니다(마 7:20).  다시 말해 얼마동안 방언기도를 드리고 나면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며 성령께 민감해지고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고픈 소원이 더 크게 일어나는 것을 본인 자신이 느끼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의 주된 목적은 내 영이 주님과 긴밀한 소통을 하는 기도의 언어라고 볼 수 있고(유 20절), 이 은사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로 성경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말하는데(고전 14:15), 이 말은 일반적인 기도는 마음의 기도의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입술을 열고 마음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목소리를 통해 전달을 하는 반면에 영으로 기도할 때는 기도 내용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 영으로부터 오는데 이때에도 말하는 것이 내 의지이고 마음도 깨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는 말씀처럼 열매는 없기 때문에(고전 14:14), 이때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우리의 목소리는 영혼의 표현으로 우리의 영이 마음의 제한과 미혹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직접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고(고전 14:2), 만약 여기서 통역이 있다면 교회에 덕을 세우게 됩니다(고전 14:12-13).  이렇게 방언은 귀중한 은사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위험성이 따르기 때문에 경계해야 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방언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준다거나 억지로 따라서 할 것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는 어떤 종교적 분위기에 의해 은근히 강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은사를 사모하되(고전 14:1), 성령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그분 앞에서 겸손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고전 12:11).


다른 하나는 방언의 은사가 신자의 영적수준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되거나 아니면 방언을 한다고 해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무슨 은사가 나타나면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고 높일 때가 있는데 물론 은사는 귀한 선물이긴 하지만(엡 4:8), 베드로처럼 은사를 주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오직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행 3:12).  한 마디로 은사는 교회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지(고전 12:7), 영적수준을 재는 잣대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도의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은 귀신들이 자신들에게 굴복한 것에 대해 무척 흥분하고 있을 때, 그들이 자칫 교만해질 수도 있다고 판단하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17-20). 무엇보다도 성령의 은사를 받고 오랫동안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다듬어지는 훈련을 받지 않는 미성숙한 사람이 은사를 무분별하게 남용할 때 분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데, 사실 방언을 포함하여 모든 은사들의 경우 억지로 흉내 내도록 부담감을 주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역자 들 중에 은사 때문에 교만하게 행동하면서도 정작 본인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위험이 있다고 해서 성령의 은사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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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은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 참으로 유익한 은사이긴 하지만(고전 14:3), 잘못 사용되면 주관론에 빠지기 쉬운 은사이기도 합니다.  2세기 말에 Montanism이 일어나면서 예언의 은사는 일반적인 가르침을 전달하는 측면에 있어 많은 제한을 받게 되었는데, 사실 Montanism은 지하 운동으로서 특히 기성교회에서 만연해 가는 형식주의와 세속성에 대해 저항하며 존속하였지만 문제는 이것이 너무 지나쳐 성경의 교훈보다 더 나아가게 되는 잘못된 실수를 범했던 것입니다.  또한 Edward Irving은 탁월한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이며 유능한 설교자이었으나 그가 1820년에 런던에 센세이션을 일으킬 때 Robert Baxter는 영적인 사람으로 한동안 Irving Movement에 참여했던 핵심 인물이었지만 무엇인가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어느 날 성령의 메시지를 전달하라는 계시를 받았으나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아내와 자식과 직업을 버리라는 하나님의 음성(계시)을 듣고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도 없이 떠나 버렸을 당시 그가 고백하기를 주님의 사랑이 과거보다 뜨거웠고 행복이 더 컸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예언들이 성취되지 않는 것을 보고 결국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와 후회를 하면서 자신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속죄 등을 다 고백했지만 자기 속에 있는 영이 성령이 아니라 악령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고 그로부터 구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특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언을 하는 사람 중에 마치 자신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권위적이며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대화를 언제든지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자신을 대단히 신령한 사람으로,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만을 특별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비록 크게 소리를 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느끼는 감정이나 느낌, 혹은 모든 생각을 성령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가정 하에 행동하거나 말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육적인 연약함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계획이나 마귀의 탓으로 돌릴 뿐 자신의 인간적인 요소를 조금도 참작하지 않는 믿음 같지 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매 순간 자신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씀해 주시므로 자신은 아무런 결정을 내릴 이유가 없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가장 심각하고 위험한 문제점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의 경험을 초월하거나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능가할 정도로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시편 기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중단 없이 메시지를 받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말한 것처럼(시 13:1),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기간을 참고 견디어내야 했으며(시 28:1, 39:12, 83:1, 89:46, 109:1), 무엇보다도 구약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요구를 받는 대로 예언을 수시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라가 혼란한 시기에 군대장관들과 백성들은 자기들이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바벨론 왕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피난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알아봐 달라고 예레미야에게 부탁했지만 기도한지 열흘 후에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렘 42:1-7).  그리고 신약시대의 사도들 역시 오늘날 주님의 음성을 항상 듣는다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메시지를 원할 때마다 받으면서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종종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았다고 했고(고후 4:8),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3:9).  이것은 사도들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다 분명한 지시를 받고 싶지만 어느 정도 참고 기다리는 시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음성을 언제든지 듣는다고 주장하거나 자신만이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람에게 있어 또 다른 문제점은 자신의 주장과 실제의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사람은 자신의 예언사역 안에서 진정한 열매를 나타내고 있지 않으며(마 7:15-20), 오히려 자신이 가는 곳마다 분쟁과 혼란을 야기 시키고 최악의 경우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하고 자기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나누었다는 의심쩍은 대화들을 교묘히 사용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은 한 교회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만약 자신의 신뢰성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교제하는 중에 상실하게 되면 그 즉시 자신의 예언사역을 인정해 줄 사람들이 있는 다른 교회로 옮겨갑니다.  사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마음이 열린 교회의 지도자(목사)로부터 권면과 조언을 받아야 하며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음의 상처와 거부감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만약 이들이 자신의 내면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는 영적교만을 철저히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통로가 된다면 교회 안에서 유익한 사람이 되겠지만(고전 10:24, 12:7),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그 귀중한 예언사역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어 그분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이고, 더 심하면 귀신에게 철저하게 조종당하는 가운데 교회에 덕을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해를 끼치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자신만이 항상 하나님을 음성을 듣고 예언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일단 그를 경계하는 가운데 분별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사들을 막무가내로 비판하기 전에 먼저 분별해야 하는 이유는(요일 4:1), 교회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지만 정령주의와 체면술의 영향, 그리고 악령도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의지하거나 보도된 내용이 놀라움을 줄지라도 흔들리거나 주변사람들의 평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성령의 지시적인 인도함을 받아(행 8:26, 13:2), 성령께서 무슨 행동을 금지하시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바울은 성령의 직접적인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옳은 줄 알고 전하려고 했지만 성령은 그것을 금지하셨습니다(행 16:6-7).  이것은 바울이 이성과 지성을 사용하고 행동했지만 그것이 성령의 뜻이 아니었기에 막으신 것이고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일에 있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되 진리의 말씀 위에 견고히 서서 영들을 분별하는 가운데(요일 4;1),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되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히 물리쳐야 하며(살전 5:21), 무엇보다도 말을 조심하는 가운데(마 12:32),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하겠지만(살전 5:19), 항상 하나님의 음성만을 듣고 움직이겠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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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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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처음 방언을 받았을 때 신기하기도 하고 너무 좋아 흥분된 가운데 교회에서 기도모임이 있을 때마다 곁에 있는 형제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가장 큰소리를 내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끔찍했던 것은 내가 하는 방언기도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다른 사람의 기도소리가 내 기도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골방(옷장)에 들어가서 기도한 것보다 교회모임에서 기도한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늘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다른 형제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 내 마음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무지와 무식이 조합을 이루어 깨닫지 못해서였지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교만이 하늘을 치솟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기도모임이 있을 때마다 하던 일을 마다하고 득달같이 달려가서 성령이 허락해 주신 귀한 선물인 방언으로 마음껏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가끔 신비(?)주의적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방언을 받고 아무것도 모르는 신앙의 초보상태에서 교회에 아름다운 덕을 세우지 못하고 심각한 해를 끼쳤던 사건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때에 누군가가 성령의 은사(방언)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면 그렇게 무식하게 공식석상에서 방언을 남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방언기도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통역 없이 공적인 자리에서는 하지 않습니다.


방언을 옹알거리는 현상으로 치부하거나 방언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외국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의 방언은 귀신의 장난이거나 마귀가 가져다주는 거짓된 은사라고 주장을 하면서 역사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주의 종들 가운데 방언을 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을 줄기차게 내세웁니다.  여기서 한 가지가 궁금한 것은 정말 그리스도인들 중에 “방언하는 사람은 귀신에 들렸거나 미혹을 당한 사람인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를 믿기 전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들을 향해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을 향해 방언을 말할 때 귀신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 것을 경고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이 할 수만 있으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고전 14:5).  무엇보다도 바울은 영적인 은사를 다루기 전에 신전에서 귀신을 섬겼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일부 고린도 신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만일 성령의 능력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을 저주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먼저 강조하면서(고전 12:3), 한 가지 기본 원칙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자(롬 10:9), 즉 그리스도인 중에 누군가 방언을 한다면 그 사람 안에 역사하시는 분은 귀신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2:7).


Jack Hayford는 이 방언에 대해 『The Beauty of Spirit Language』에서 “오늘날 영적인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저 신기함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원천을 간절히 구하는 것에 비롯된 것이고 그분에 마음에 더 가까이 가고자 더욱 성경적인 것을 찾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방언은 우리가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더 경건하게 높일 수 있도록 돕는 은사이다.”  Harold Horton 역시 『Gifts of the Spirit』에서 “구원받은 자의 내면에는 마음이나 생각으로 측량할 수 없는 깊이가 있다. …즉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늘의 언어를 통해 성령의 폭포수와 같은 물결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과 같다.”  이들의 말은 방언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위가 상하고 역겨운 말들로 들리지도 모르지만 방언은 성령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고전 12:10), 놀랍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지(약 1:17), 마귀에게 미혹을 당해 옹알거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은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된 예언의 은사와 다르게(고전 14:3),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송이며(고전 14:2, 15, 28), 통역이 없으면 골방에서 개인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덕을 세울 수는 있지만(고전 14:3),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고전 14:11-13), 마음이 아닌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로(고전 14:14-15), 얼마든지 자제력이 가능하지만(고전 14:27-28),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교회에 속한 모든 신자들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고전 12:30).


문제는 오늘날 방언을 허락하는 교회에서 공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 사람이 통역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조용히 기도하지 않고 옆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 내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경우인데 이는 사도 바울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이고 교회 안에서 다른 지체들에게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고전 13:1).  물론 바울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언하는 사람 중에 곁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한나가 기도하는 것처럼(삼상 1:13), 속삭임으로 방언하는 사람도 있지만 만약 공적으로 통역을 통해 전달할 메시지가 없으면 방언을 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14:28). 사실 방언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유는 방언하는 사람이 열매가 없는 삶이나 교회 내에서 신비주의적 행동을 보일 때, 혹은 주변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성령충만한 것처럼 통역 없이 큰소리로 방언을 하기 때문인데 이런 지혜롭지 못한 행동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독을 받는 것처럼(롬 2:24),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이 특히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온 회중이 방언으로 찬양할 수 있지만(고전 14:15), 그것은 고린도전서 14장27-28절에 기록된 순서를 따라야 하고, 무엇보다도 ‘영으로 찬미’ 하는 것은 믿는 자에게는 아름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고전 13:1), 불신자에게는 ‘미쳤다’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릅니다(고전 14:23).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면서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온 회중이 방언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찬양하는 것입니다(고전 14:26).  다시 말해 통역이 없는 방언을 일만 마디 하는 것보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다섯 마디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고전 14:19). 이 말은 방언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통역되지 않는 언어를 공적모임에서 사용하는 것을 바울이 비판하는 것인데, 사실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문제처럼 오늘날 누군가 개인적 가치를 그가 가진 은사로 평가할 위험이 있고 혹은 감정주의나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다 그렇다고 단정지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기초를 세우고(고전 3:11), 예수님의 인격과 삶에 초점을 맞추며(벧전 2:21),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 교만하지 않는다면(고전 10:12),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빌 2:13), 귀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요일 4:2).  그러므로 방언은 어떤 식으로든 사용자에게 덕을 세울 뿐 아니라(고전 14:4),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않는 한 미혹케 하는 영에게 속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요일 3:7).  더 나아가 방언을 통해 무엇인가 미혹을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성령의 은사인(고전 12:10), 방언사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4:5,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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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언자'라는 단어를 대할 때 신내림을 받은 무당을 연상하는 것 같고, 또 다른 사람들은 현대의 초자연적인 계시는 성경에 새 책들을 추가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력하게 반대를 하면서 예언자란 이사야나 예레미야, 아니면 사도 바울 같이 오류가 없는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구약시대 선지자들이나 신약시대 사도들이 지녔던 권위를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에 예언자들과 초자연적인 계시는 신약시대의 마지막 사도가 사라짐과 더불어 종식되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 신빙성이 있는 유일한 형태의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오직 ‘성경’이라고 강조합니다. 물론 이것이 곁길로 가지 않는 가장 안정하고 바람직한 형태의 길이긴 하지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이러한 형식적인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영역을 떠나 종교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10:27),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요 5:37), 성경을 연구했기 때문에 경건이 없는 지식의 영역으로 들어갔고(마 23:1-7), 이것은 이들의 편견과 종교적인 교만을 강화해 주는 지식이었기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냈습니다(마 23:13-15).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종교적 행위에 만족한다면 교만은 증가하고 편견이 강화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Paul Thigpen『Did the Power of the Spirit Ever Leaver the Church』에서 “신약시대의 교회가 출발한 이후로 하나님은 각 시대의 신자들에게 항상 복음 전도자들과 목사들과 교사들, 아울러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역자들을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에베소서 4장11절에 나오는 말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규칙적으로 장래 일을 예언하며 마음의 비밀을 말하고 정확한 느낌을 받고 꿈을 꾸며 정확한 환상을 본다는 것입니다(행 2:17).  만약 우리가 지혜롭게 이들의 사역의 가치를 인식하며 이들로부터 유익을 얻기만 한다면 이런 사람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문제를 삼는 것은 이들이 실수를 범하거나 한번 예언이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을 거짓 예언자로 낙인을 찍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단지 하나의 예언이 맞지 않았다고 해서 거짓 예언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 예언자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불순종하도록 충동질하거나 그 말씀을 벗어나게 만들려 하는 사람들이지(신 13:1-5), 예언이 틀렸다고 해서 거짓 예언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들의 사역의 결과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마 7:15), 이 말의 의미는 거짓 예언자에게는 비록 예언이 잘 맞더라도 나쁜 열매가 나오고 참 예언자에게는 좋은 열매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신명기 18장15-22절을 잘못 인용하여 예언하는 자가 실수하면 거짓 예언자이고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거나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사이비나 이단들처럼 성경 앞뒤 문맥을 다 빼버리고 해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신명기 본문을 전체적으로 보면 예언자를 대상으로 쓰여진 말씀이 아닌 것을 잘 알 수 있는데 15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와 같은’이라는 단어는 예언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데 모세는 성경의 모든 예언자들 중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유일한 사람이었고(민 12:6-8), 하나님의 언약을 깊이 묵상하는 자로 사람과 하나님을 대표하는 대변인이었습니다(신 34:10-12).  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주실 것이라고 했을 때(행 7:37), 그는 메시야를 뜻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예언자의 대표이시며(눅 24:19, 요 4:19),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지만(요 14:6, 16:13), 여기 신명기에 거짓 선지자들이 죽음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저지른 실수 때문이 아니라 감히 모세를 흉내 내어 백성들을 가짜 신들에게 인도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렘 23:9-32).  그래서 더 이상 예언자가 저지른 실수를 추궁하여 사형을 내렸다는 뒷받침이 될 만한 성경구절이나 실수한 예언자를 추궁하기 위해 신명기 18장15-22절 말씀을 인용한 예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지어도 좋다는 말을 전하는 실수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단지 나단의 말을 정정하셨을 뿐 그로 인해 나단을 거짓 선지자라 고 부르지도 않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려 하는 백성들도 없었습니다(삼하 7:1-17).  심지어 어떤 경우 하나님이 주신 예언이 사람들의 조건들을 충족시켜 그 결과를 바꾸게 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데, 하나는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에게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히스기야는 죽지 않고 십 오년을 더 살았고(왕하 20:1-7), 다른 하나는 니느웨 성에 대한 요나의 메시지가 성취되지 않은 경우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거짓 선지자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욘 3장).  그러기 때문에 예언을 할 때마다 정확하게 맞춘다고 해서 그를 참 선지자라고 할 수 없고, 반대로 예언이 틀렸다고 해서 거짓 선지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어떤 경우 예언이 맞았다고 하더라도 참 선지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거짓 선지자들도 강력하게 미래를 예언하고 증표를 보이기도 하며 각종 이적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 44:25, 렘 23:13, 마 7:21-23, 24:24).  따라서 누군가 예언을 할 때 그 예언을 틀린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열매를 봐야 하는데(눅 6:44), 만약 예언하는 사람이 발람처럼 돈을 사랑하거나(벧전 2:15-16),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을 진리인 것처럼 믿게 한다면 그를 거짓 선지자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렘 28:15).


한 가지 더 예를 든다면 사도행전 21장10-11절에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 예언은 맞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유대인들에게 결박당했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바울을 로마에 넘겼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아닌 로마인들이 두 번이나 바울을 결박했고(행 21:33, 22:29), 유대인들은 단순히 이방인에게 넘겨주려고 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게 그를 죽이려 했고(행 23:12-14),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천부장을 통해 여러 차례 무력으로 구출되어야만 했습니다(행 21:27-36, 22:22-24, 23:10, 16-36).  물론 이런 결과는 후에 로마인들에게 넘겨주는 계기가 되었지만(행 28:17), 이렇게 틀리게 예언을 한 아가보를 거짓 선지자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명기 18장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은 구약 선지자와 신약 선지자의 차이를 아직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예언자적 사역전체의 표본으로 삼고 오늘날 예언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만약 예언자의 실수가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면 분명 사도 바울은 예언을 분별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이고(고전 14:29), 베드로 역시 위선된 모습과 실수를 안디옥 교인들에게 저질렀지만 그를 거짓사도라고 말할지 않은 것처럼(갈 2:11-12), 우리도 예언자들에게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어야 하고 더 나아가 우리는 거짓 예언과 서투른 예언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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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어린 시절 집 근처 5분 거리에는 기차 길과 야산이 있어 자주 동네 아이들과 산에 올라가 ‘칡뿌리’와 ‘쑥’을 캐면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배가 고프면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개떡’을 먹을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야산에 올라가 개떡을 먹으면서 저 멀리 덜컹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달려오는 기차를 바라보고 있을 때 어디서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비쩍 마른 ‘똥개’ 두세 마리가 나와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쉬지 않고 짖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나이에 늘 궁금했던 것은 “개들은 왜 기차만 지나가면 짖어 되는 것일까?”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기차를 운전하는 기관사가 개들이 짖는 소리 때문에 기차를 세운 적이 없었습니다.  워낙 기차소리가 커서인지 아니면 너무 빨라서인지 개가 짖어 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차는 정해진 선로를 따라 목적지를 향해 달렸지 개들이 짖는다고 해서 기차를 멈추는 정신 나간 기관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도 달리는 기차를 보고 개처럼 짖어대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누군가 방언에 대해 적대적인 글을 쓰거나 ‘방언무용론’을 강력하게 주장할 때, 만약 하나님이 주신 방언의 은사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개 짖는 소리에 놀라 기차를 세우는 줏대가 없는 사람일 것이고(사 26:3), 마음이 한결같고 은사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믿음의 사람은 무슨 소리를 듣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늘나라 갈 때까지 방언기도를 할 것입니다.


갓난아이를 목욕시키고 난 뒤 목욕물이 더러워졌다고 해서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 부모가 없듯이 방언에 몇 가지 조심할 점이 있다고 해서 방언 자체를 포기하거나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신자들에게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교훈하면서(고전 14:39),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당부하고 있는데(고전 14:40),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은 ‘경건’ ‘조심’ ‘절제’ 만을 강조한다면 교회는 “성령이 없는 죽은 정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Lloyd Jones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부흥』에서 이렇게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실질상 죽은 정통은 이단만큼 나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죽은 정통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정통’, 분명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복음적인 사람들 각자에게도 가장 큰 위험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죽은 정통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합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는 것입니다(딤후 3:5).  사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듯이 예배를 거의 장례(?)식 수준으로 경건하게 아니면 예비군 훈련이나 정신교육 받듯이 드렸는데, 무엇인가 빠진 것 같은 허전한 느낌과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 없이 드려질 때 생기는 심각한 영적질병입니다.  한 마디로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빌 3:3).

 

Lloyd Jones는 『성령세례』에서 고린도교회가 은사문제로 혼란해진 것을 핑계로 현대교회가 은사문제를 회피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에 대해 책망을 하면서 현대교회는 은사의 혼란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교회에 은사가 나타나지 않음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와 동시에 많은 교회가 이런 역동성 없이 마치 공동묘지의 적막함과 같은 고요가 지배하고 있다고 탄식하면서 이렇게 ‘조심’과 ‘경건’이 지나쳐서 ‘죽은 정통’ 신앙이 되는 것을 극히 경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이런 문제를 놓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세 장을 할애하여 성령의 은사들과 은사 활용의 가장 큰 동기인 사랑에 대해 논하면서 비록 많은 은사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전부 하나님에게서 나오며(약 1:17), 사랑 안에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고전 12:4-7), 이 성령의 은사들 중 하나가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2:10).  여기서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신약에 등장하는 전문 용어인데 이것은 학습을 통하여 습득한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Gordon Fee가 말한 것처럼 성령으로 감동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방언은 성령이 주신 은사(고전 12:11)로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고 영에서 시작하는 것으로(고전 14:14), 다른 일상적인 언어사용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 더 감정적일 수도 있고 덜 감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방언 말하기가 엑스터시적인 현상이거나 절제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방언은 초대교회에서 흔한 현상이었지만 때로는 혼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방언에 대해 균형 잡힌 견해를 갖도록 도와주었는데(고전 14장), 그의 교훈은 오늘날 방언을 둘러싸고 일부 교회들에서 생기는 혼란을 해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이 방언에 대해 Gordon Fee는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논란이 많은 것으로 바울의 논증 배후에는 고린도교인들이 특별히 방언을 선호했다는 것이 깔려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인가?”  그리고 “성령충만 하면 반드시 방언을 말해야 하는가?”라는 것인데, 이 문제를 놓고 어떤 사람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충만의 증거라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지만, 사실 성경의 증거와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런 견해를 지지하기가 힘든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 방언은 성령의 감동과 능력이 나타나도 때로는 방언을 말하지 않는 경우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이나(행 10:45-46),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방언하고 예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행 19:6), 이들이 다 방언을 했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고, 어쩌면 일부의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지 않고 대신 기쁨으로 충만하여 그들의 일상적인 모국어로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예언을 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방언하는 것이 반드시 성령충만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행전 2장4절의 경우에서 성령충만이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지만 이것은 구원받을 때 신자가 조용히 성령을 받는 것(고전 12:3)과 달리 성령께서 신자의 사명 감당을 위해 능력으로 임하실 때에는(눅 24:49), 가시적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행 4:31).  사실 성령의 ‘내주사역’과 ‘능력사역’을 이해한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닌데 Lloyd Jones는 이것을 ‘일반사역’과 ‘특수사역’ 혹은 ‘간접사역’과 ‘직접사역’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모든 신자들은 방언을 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성경은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는 예수님의 말씀과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전 14:1)는 사도 바울의 교훈을 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즉 모든 교회가 성령의 은사들을 사모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고전 14:39).  따라서 성령은 신자들 각자에게 교회 유익을 위해 서로 다른 은사들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고(고전 12:7), 무엇보다도 교회 전체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어(엡 4:12), 모든 은사들이 교회에서 나타나고 사용되도록 힘써야 하고(롬 12:5-13), 만일 신자들이 공동체에서 특정 은사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신령한 은사들을 받기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해야 하며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고후 1:11).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엡 4:7),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엡 4:7, 약 1:17).  여기에는 물론 방언의 은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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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와 사역에 대해 알지 못했을 당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언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신령(?)한 예언자가 어떤 사람을 놓고 예언을 하면서 그 사람이 병으로 일찍 죽을 거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상태인지라 그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가 정확하게 예언을 한다고 믿었고 혹시 의심을 하고 판단하면 성령을 대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덫에 걸리기 쉬운데, 이것은 사단이 성도들을 흔히 미혹케 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런 잘못된 예언을 들으면 듣는 사람의 마음에 평강이 사라지고 불안한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딤후 4:6), 그 죽음을 알리신 하나님의 음성이 오히려 그를 기쁘게 했고 평안이 가득했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의 말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절망과 두려움을 주지만(렘 1:16),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녀들에게는 힘을 주고 소망을 불어넣어 주신다는 것입니다(딤후 1:7).  그러므로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에게는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약 3:17, 빌 4:6-7, 요 16:33).

 

 

먼저, 우리는 예언적 계시를 받을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유익함을 온전히 받기 위해 따라야 할 단계가 있는데, 이 예언이 실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란 통로를 통해 오기 때문에 이것이 정말 주님의 음성인지 시험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요일 4:1).  다시 말해 예언의 말씀은 항상 하나님께로만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의 상상일 수도 있고(겔 13:17), 어떤 예언은 사단이 속이려고 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렘 23:13), 그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반드시 분별해야 합니다(고전 14:29, 살전 5:20-21).  이 문제를 놓고 Lloyd Jones『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비판적인 능력을 행사할 것과 예언을 분별하고 시험할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예언을 멸시함으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모든 예언을 다 믿어서는 안 되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만을 취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Wayne A. Grudem은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에서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예언은 비록 하나님의 계시로 촉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언어로 선포되어… 예언자가 틀린 수도 있고, 해석을 잘못할 수도 있으며, 아무 때나 도전받고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한마디로 Graham Cooke이 말한 것처럼 “분변하지 않고 예언을 허용하는 것은 신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것이고, 잘못된 예언은 성령의 은사에 관련된 주제에 많은 해악을 끼쳐왔기 때문에 신중하게 분별해야 한다는 R. T. Kendall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실 예언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어떻게 내가 들은 음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줄 아느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들은 음성을 시험하는 기본적인 몇 가지 중 하나는 먼저 성경으로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들은 말씀이 성경과 모순이 된다면 하나님은 성경에 하신 말씀과 배치되는 예언을 주시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예언자가 정확한 예언을 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에 벗어나서 하면 듣지 말아야 합니다(신 13장).  두 번째는 믿음이 일어나는지를 통해 시험하는 것인데,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예언적인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일어나고 소망이 생깁니다(롬 10:17).  다시 말해 그 예언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솟아나게 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대상 17장).  세 번째로 확인을 통해 받은 예언을 시험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딱 한번만 주시지 않고(욘 1:2, 2:1), 보통 다양한 방법으로 반복해서 주시는데(창 41:32), 예를 들어 성경을 읽을 때 받은 말씀을 확신시켜주는 구절이 가슴에 와 닫는 것이 있고, 또 꿈과 환상을 볼 수 있으며(행 2:17-18), 개인적으로 주신 말씀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됨으로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행 21:1-14).  마지막으로 경건한 지도자를 통해 시험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른 사역자의 증거, 즉 바른 예언자가 우리가 들은 것에 대해 동의하는 것으로 만약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 예언자는 미가야처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대하 18장).

 

 

물론, 이 네 가지 시험을 다 거쳤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확신해도 좋겠지만,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예언과 예언을 해석하는 능력은 결코 하룻밤 사이에 체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벧후 1:20).  사실 성숙하고 바른 예언사역자 한 사람이 나오려면 오랜 세월 동안 다듬어져야 하고 아무리 노련한 예언사역자라도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것만 예언하기 때문에(고전 13:9), 스스로 전문가인양 행동하려는 교만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오늘날 주의 자녀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고(행 2:17-18), 무엇보다도 주님의 음성을 듣거나 예언하는 사람은 항상 지도자의 권위 아래 이루어져야 함을 꼭 기억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역대상 25장2절에 보면 사람들이 아삽의 지휘 아래 예언을 하고 아삽은 왕의 지휘 아래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위계질서를 세우셨기 때문에(롬 13:1), 예언은 지도자(목회자)의 권위 아래서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14:32-33, 40).  그리고 신약의 예언은 반드시 분별을 받아야 하며(고전 14:29), 물론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린 마음이 없는 목회자는 거부반응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이제 예언을 배워 나가는 사람은 경험 많은 사역자나 출석하는 지역 교회 목사에게 순복하여 성경으로 검증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그 예언의 은사는 예리하게 되어 많은 사람에게 크게 도움을 줄 것이고(고전 14:3), 진리의 말씀 위에서 바르게만 증거 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며 믿음이 성장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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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문제가 아닌 사역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금식기도원에 들어온 지 거의 2주가 되어갈 무렵, 아침예배를 드리고 숙소로 돌아와 힘이 없어 드러누운 상태에서 눈을 감고 속으로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위와 식도 부분이 아프고 따끔거리며 통증이 오면서 운동할 때 근육통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파스를 바른 것처럼 화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증상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혹시 금식을 잘못해서 위나 식도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반면에 이것이 육체의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께서(출 15:26), 이런 방식으로 만지시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기도 하면서 순간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몸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기도원에서 위장병을 치료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고질적인 질병을 일방적인 은혜로 말끔하고 깨끗하게 고쳐주신 것이었습니다.  사실 위궤양과 만성위염으로 인해 거의 25년 이상 위장약을 복용했지만 약을 먹을 때만 효과가 조금 나타나는 것 같았고 먹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똑같은 증상이 계속 일어났는데 기도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증상이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라기 2장2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육체의 질병을 말끔하게 고쳐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치유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고치실 때 항상 즉각적으로 고치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막 1:42), 성경에서 말하는 치유(고전 12:9)란 항상 즉각적이지만은 않고 때로는 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  먼저 성경에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낫는다고 하신 말씀은(막 16:18), 병자가 금방 나을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병의 힘이 끊어지고 급속한 회복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를 받고 곧 바로 고침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마 8:3, 눅 5:13), 믿음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에 즉각적으로 회복되지 않아도 병세가 더 호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약 5:16).  예를 들어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시는 장면에서 처음에는 일부분만 고치셨을 때 그 소경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무로 보인다고 말했는데(막 8:24), 이것은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어 단번에 완전하게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눅 5:17), 아마도 제자들에게 생생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믿음이 없는 소경에게 완전한 치유를 얻기 위해서는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도록 점진적으로 고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안수하실 때 그 소경이 온전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막 8:25-26).

 

 

또 한 가지 치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치유가 항상 영구적이라고 믿는 것인데, 오늘날 병 고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고 나서 다시 재발된 적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교회 안에 행해지는 치유사역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언제나 완벽하게 고치셨다고 말하면서 병이 재발되거나 부분적으로만 고치시지는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 행해지는 치유기도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치유가 항상 영구적이지만은 않다고 가르치고 있고, 언제든지 밑에 깔려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육체의 질병은 다시 재발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우리는 그 해답을 요한복음 5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삼십 팔년 된 병자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하셨는데(요 5:14),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만약 다시 죄를 지으면 깨끗하게 고침 받은 질병이라도 얼마든지 다시 재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2장45절에서도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다음에 더 많은 귀신들이 찾아오지 않도록 주의를 주신 적도 있는데, 이것은 치유가 영구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해줄 뿐 아니라 죄 짓는 것에 노출이 되면 그만큼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치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병원치료에 관한 것으로 신자들 중에 육체의 질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병원이나 의사에게 가는 것을 꺼리고 믿음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문제는 끝까지 병원에 가는 것을 거부하거나 혹은 사이비 치유사역자를 만나 병이 더 악화되어 열 두해 혈루증에 걸린 여자처럼 위험한 지경에 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막 5:25-27).  사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인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병든 자가 의사를 찾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씀하셨고(눅 5:31),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말하는 치유란 병원치료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눅 10:34)이나 의술(사 1:6)을 사용하여 치료를 하시기에 의학적인 방법으로 고치는 것도 그분이 사용하시는 다양한 방법 중에 하나이라는 것입니다(사 38:21).  그러므로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방법이 안수기도인가(막 5:23), 아니면 명령/선포/대적기도인가(눅 4:39), 혹은 단순한 기도인가(마 8:16), 라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무엇보다도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가 병자에게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또는 아버지께서 병자를 향하신 뜻인 무엇인지에 따라 치유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질병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고(사55:8-9), 만약 누군가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개인의 권능으로 치유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통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행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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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채플의 교인들은 나의 아내 루이스가 겪은 심각한 기침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거의 3년간 지속되었다.  한번은 루이스가 기침으로 인한 시각장애로 런던에 있는 성토마스 병원 응급실로 갔다.  안과 전문의는 아내가 기침을 멈추지 않으면 망막이 분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끔찍한 날들이었다.  우리는 아내를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런데 아내의 병은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의 기도로 치유되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그와 그의 아내가 친절하게도 루이스를 기도해 주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채플로 찾아왔다.  당시 루이스는 기침 때문에 거의 잠을 한숨도 못 잤지만 이렇게 말했다.  “저분의 기도를 받고 싶어요.”  그녀는 간신히 교회에 도착했다.  대대적인 광고나 예배도 없었고,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라는 강조하는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 부부는 아내에게 대략 5분 정도 손을 얹고 방언으로 기도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놀랍게도 아내는 즉시 나았다.  이것은 1994년 12월의 일이었다.  우리가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성령의 역사를 어렵지 않게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루이스의 치유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치유가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끔찍했던 기침은 다시는 재발하지 않았다.  이 간증은 R. T. Kendall 목사의 진솔한 고백으로 당시 루이스가 전혀 모르는 사람을 통해 치유기도를 받던 날은 거의 혼수상태에 있었다고 말하는데, 물론 방언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무척 거스리거나 비위를 상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시고 계신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은사 중지론자들은 이런 은사가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강변하는데, 이들의 말에 의하면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정경의 마지막 말씀을 기록할 때까지 복음의 진리와 함께 하며 그 진리가 이미 입증됐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그런 은사들을 나타낼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성경 그 자체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대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성경 기자도 기록된 성경이 표적과 기사 등의 실체를 대신하거나 어떤 의미에서 대체했다고 주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과거에는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는데 필수적이었다면(롬 15:18), 지금 불신 세상에서는 더더욱 필요할 것이고(막 16:20),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도 사역을 입증하고 확증하기 위해 성령의 초자연적인 현상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는데(요 14:11), 만일 이것이 주님에게 필수적이었다면 지금처럼 타락하고 패역한 이 시대에는 얼마나 더 필수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은사를 배제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논리일 뿐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말살시키려는 행위라고 볼 수 있고(마 12:22-37), “은사들은 대한 모든 보고는 허위적이거나 마귀적인 활동의 열매이거나 심리적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라는 D. A. Carson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모호한 신학적 추론들이나 단순한 주장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경의 진술에 의해 답을 찾아야 하는데, 먼저 고린도전서 12장7절 말씀처럼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각각의 은사는 교회를 강화시키고 세우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고(고전 14:4), 이렇게 각 신자에게 성령이 나타나시는 방식, 즉 눈으로 볼 수 있는 영광을 산출하는 것이 그분 뜻대로 각 사람에 주시는 은사인데(고전 14:11), 이 은사의 주된 목적은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익’이란 다른 지체들을 돌봄으로써(고전 12:25),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골고루 세워 나가는 공동의 유익을 말하는 것으로(엡 4:16),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은(엡 4:12), 결국 은사들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개인을 세워주는 것도 은사의 목적으로 볼 수 있지만(고전 14:4), 사도 바울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고 말한 것처럼 은사의 다양성(고전 12:14)과 통일성(고전 12:20)을 생각해 본다면 모든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데 종속적인 목적이 있습니다(고전 12:4-6).  즉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 중에 필요치 않은 은사는 하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인(엡 4:1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른 사람은 단 한명도 없기에 주님 오실 때까지 은사는 우리에게 더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다른 은사들과 달리 가장 논쟁이 심한 은사가 방언인데, 궁금한 것은 이 은사가 신자들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왜 성령 하나님은 고린도교회 모임에서 방언이 사용되도록 통역의 은사를 주셨느냐는 것입니다(고전 14:26).  또한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왜 사도 바울 자신은 은밀히 홀로 기도할 때 그 은사를 사용했느냐는 것입니다(고전 14:18).  사실 통역이 없을 때에는 교회에서 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지만(고전 14:29), 확실한 것은 그가 고린도 신자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방언기도로 보냈다는 것입니다(고전 14:18).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방언에 대해 권장하지 않았을 것이고(고전 14:5), 무엇보다도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자신의 영적생활과 믿음을 강화시키는데 있어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고전 14:39).  더 정확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라고 말한 것은 그 은사가 개인적인 강화뿐만 아니라 통역이 있을 때(고전 14:13), 교회에 유익이 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방언받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환언하면 방언을 비롯한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격려하고 가르치고 위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고(고전 14:3, 26), 이 은사들이 교회로부터 제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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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계시(예언)와 찬양과 방언을 할 만큼 영적인 은사들을 잘 활용하고 있었지만(고전 14:26), 종종 그 은사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과는(고전 14:12), 무관한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동시에 예언을 하기도 하고(고전 14:31), 통역 없이 방언으로만 메시지를 전하였는데(고전 14:28), 한마디로 은사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지혜와 질서가 결여되었던 것입니다(고전 14:40).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고 어떻게 해야 공적인 모임에서 은사를 조화롭게 활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가르치기는 했는데(고전 12-14), 그렇다고 해서 영적인 은사들을 추구하지 말라거나 과도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없었고(고전 14:39), 오히려 이미 은사들에 익숙해져 있는 교인들에게(고전 1:6), 사모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고전 14:1).  무엇보다도 고린도전서 1439절을 KJV으로 보면 예언의 은사를 ‘갈망’(Covet)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갈망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는 뜻으로 언제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너무나 갖고 싶어 어떻게 하면 그것을 가질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예언이 중요한 몇 가지 이유 중에 첫 번째이고, 이 예언의 은사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의 범주 안에서(고전 13:1-3),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사모해야 할 은사이기도 합니다.

 

예언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언을 통해 방향을 제시하시기 때문인데, 사실 하나님께서 AD 95년까지만 말씀하시고 그 이후로는 침묵하시고 계시다는 개혁주의 신학을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나로서는 신앙생활을 해오는 동안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문제일 경우에는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문제가 잘 풀렸는데, 예를 들어 살인이나 도적질에 대한 것은 성경에서 찾아보면 명백한 답을 얻을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살인이나 도적질에 대해서는 성경이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3-15).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개인적인 방향을 결정할 때에는 성경을 아는 것만으로 도움이 안 될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가령 “내가 A B라는 사람 중 누구와 결혼을 해야 하는지?, “이사를 가야 하는데 이곳으로 갈 것인지 저 곳으로 갈 것인지?, “직장을 옮겨야 되는데 이 직장과 저 직장 중 어느 곳을 택해야 하는지?” 등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일생에 구체적이고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2:13), 우리의 결정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인데( 6:66-69),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이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려니 하는 추측으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보다는 개인의 생각이나 정욕으로 행할 때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4:13).

 

사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선한 뜻을 알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물어보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고(삼하 2:1), 그들의 발걸음을 환상( 18:9), ( 2:13), 예언의 말씀을 통해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예언적인 꿈을 통해 결정을 내리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혹시 잘못되거나 미혹되지는 않을까 생각해서이지만( 24:11), 성경을 보면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받는 가장 흔한 방법 중에 하나였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첫 두 장만 봐도 하나님은 예언적인 꿈을 통해 다섯 번이나 방향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1:20, 2:12, 13, 19, 22).  무엇보다도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무슨 특별한 공식에 의지하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노아는 신앙상담을 통해 방주를 지어야 한다는 것을 안 것이 아니었고( 6:13-22), 호세아가 창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한 것은 성경의 원리를 적용한 결과가 아니었으며( 1:2), 바울이 사도의 사명을 발견한 것도 성경공부를 통해 얻은 것은 아닙니다( 9:3-7).  한마디로 이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시대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변함없이( 13:8), 자기 자녀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인도하시기 위해 여전히 말씀하시지만( 10:27),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3:15), 바리새인처럼 불순종하고 마음이 완악해서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5:37).

 

예언이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예언은 진리를 전달할 뿐 아니라 능력이 있는데, 구약성경에 보면 에스겔은 마른 뼈의 환상을 보고 예언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가 예언을 하자 뼈들이 서로 맞춰지고 힘줄과 살이 생기고 생기를 불어넣자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37:7-10).  이것은 예언이 단지 깨달음과 정보만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예언을 통해 생명과 능력이 풀어 놓아지고 처해진 상황에 엄청난 변화가 다가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도 바울 역시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예언을 지도했으며(딤전 1:18-19),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원수나 삶의 환경들과 싸우기 위해 예언의 말씀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우리는 그 예를 구약성경에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아람 왕의 침략으로 유다의 모든 백성들이 절박한 상황 속에 있을 때,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 레위사람 하시엘에게 임하여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예언하자 여호사밧은 그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받고 극적으로 원수들을 물리칩니다.  쉽게 말하면 아람군대 앞에 울부짖고 두려워하고 전멸을 예상한 오합지졸과 같은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시엘에게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용사들로 즉각 변화되어 노래를 부르며 전투에 임하여 승리를 했던 것입니다(대하 20:14-23).  이런 것을 볼 때 우리는 예언의 능력을 과소평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Wayne A. Grudem은 “예언의 은사가 억제되거나 의심스럽게 여겨질 때에는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의 기대를 유린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은사에 대한 많은 잘못된 견해와 생각은 예언이 무엇이며, 어떻게 역사하며,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누군가 예언을 하면 신경이 예민해져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잘못되거나 신비주의적 성향을 띠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벧후 2:1-3), 그래도 주님께서 바르게 쓰는 사역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완전한 성경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언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도 기도할 때마다 기적이나 치유의 은사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온전하고( 4:12),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것인데( 5:18), 예언은 치유와 새롭게 되는 과정을 돕는 훌륭한 동반자로서 신자들의 영혼을 회복시키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 영을 소성시켜 주는 소중한 은사인 것만은 사실입니다(고전 14:3).  따라서 예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고 구해야할 은사이고(고전 14:1, 39), 성경은 이 은사에 대해 일시적이지 않고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폐하지 않으며(고전 13:10), 또한 멸시치 말고 그것을 자세히 분별하여 좋은 것으로 취하라고 말합니다(살전 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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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치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고(출 15:26, 호 7:1), 그분은 인간의 요청이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치유하시기에(삼상 2:6, 시 72:18, 103, 3, 136:4), 사도행전에서 스테반(행 6:8)과 빌립(행 8:5-8), 그리고 베드로(행 3:1-10)와 바울(행 14:8-10)이 기적을 행한 것에 대하여 증거 할 때(행 5:12), 그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대리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 10:1, 눅 10:1-20).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는 결코 치유자로서 명성을 얻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으며(행 행 3:12), 이것에 대해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자주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치유하시는 것으로 묘사하거나(행 2:43, 5:12), 단지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행하게 하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4:3, 15:12).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 병 고치시는 사역(마 4:23-24)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은 예수님께서도 어떤 여건 하에서 치유가 자유롭지 않으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데(요 5:19), 예를 들면 가버나움의 중풍병자에 대한 이야기 시작 부분에서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마 3:17)조차도 항상 임의대로 치유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요 8:28).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막 9:7)의 신적인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막 2:10), 그분에게 질병을 고치는 능력이 과연 필요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성경을 찾아보면 사복음서에 기록된 많은 경우에 예수님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고(마 8:16), 여러 번 “그는 그들 모두를 다 치료하셨다”(마 12:15)라는 말을 우리는 접할 수 있지만(눅 6:19), 유독 베데스다 연못가에서는 삼십 팔년 된 병자 한 사람만을 고치셨습니다(요 5:1-15).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연못가 주변에 있는 다른 병자들을 무시하고 오직 한 사람만을 고치셨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삼십 팔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직후 종교지도자들과 신학적인 논쟁에 개입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5:15-18), 이 논쟁 도중에 예수님은 연못가에서 “왜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그날 연못가에서 한 사람만을 고치신 이유가 하나님께서 삼십 팔년 된 병자만을 고치시기 원하셨기 때문이고(요 5:30), 만약 아버지께서 그 병자를 치료하시길 원하지 않으셨다면(요 12:49), 아마 예수님 자신도 병자를 고치실 수 없었고(요 14:10),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일을 행하신 적이 없었고 언제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고 원하시는 대로만 일을 하셨습니다(요 8:28).

 

이렇게 예수님께서 모든 여건 하에서 마음대로 치료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또 다른 사건이 고향 나사렛에서 일어났는데, 주님은 그곳에서 아무런 권능을 행하시지 않고 소수의 병자만을 고치신 것을 마가는 증거하고 있고(막 6:5), 마태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13:58).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어떤 경우에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아들의 치유사역이 제한하도록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 자신도 임의대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독립하여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자신의 전능하심(마 8:3)이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복종을 통해 철저히 제한하셨다는 것입니다(빌 2:5-11).  이렇듯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행하셨다면 사도들은 더 말할 나이가 없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요 15:5), 주님은 동일한 것을 자신에게도 적용시키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다시 말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행할 직무를 위임하셨지만(요 5;22), 아들은 자신의 권위에 따라 독자적으로 심판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요 8:28).

 

제자들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문’이라는 불리는 성전 문 앞에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치도록 베드로를 사용하셨을 때(행 3:1-3), 성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제자들을 바라보았지만(행 3:11),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들이 이 치유로 인해 자신들을 높일 것을 두려워하여 병자가 고침 받은 것은 자신들의 사도적 능력이나 거룩함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밝힌 적이 있었는데(행 3:12), 한 마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적 의지에 의한 결과라는 것입니다(롬 9:16).  이와 동일한 원리가 사도 바울의 삶속에서도 하나의 기적에 의해 예증되는데, 그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때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한 사람이 설교를 듣다가 고침을 받는 사건에서 저자 누가는 바울은 그에게 치료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고침 받았다고 기록합니다(행 14:8-10).  여기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치료받을 수 있을 만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셨다면 바울은 예수님처럼 그 치유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마 9:27-30).  또 다른 예증은 제자들이 간질병이 든 소년을 고치지 못한 경우인데(마 17:14-21), 이 사건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이미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귀신을 쫓는 것과 모든 질병에 대한 권세를 받은 후에 발생했기 때문에 그 의미가 있는데(마 10:1), 이것은 치유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군가 마가복음 16장17-18절과 야고보서 5장 14-16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강력한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믿음으로 기도할 때마다 병든 자가 다 고침을 받는가?”라고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치유의 은사는 개인이 임의대로 원하는 장소나 시간에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이 사이비가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신실한 사역자라면 그는 실제로 어떤 종류의 치유가 일어날 것인지 혹은 어떤 종류의 지식의 말씀이 치유를 위해 주어질 것인지에 대해 말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5장19절 말씀의 원리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누가 고침 받을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시고, 또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의 종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사역자는 누가 치유될 것인가를 결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분의 음성(지시)에 귀 기울이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 사역자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여자처럼 간절히 고침(마 15:21-28)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임의대로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이비 사역자를 찾거나 또는 찾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과 사도들조차도 임의대로 고칠 수 없었다면 오늘날 치유사역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이들이 대단한 능력의 종인 것처럼 자랑하거나(고전 1:29), 높이지 말아야 하고(눅 16:15), 만약 누구든지, 언제나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와 오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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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모스크바를 처음 방문했을 때 코스탸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러시아에서 큰 오순절 교회를 섬겼는데 내가 거기에 있는 동안 여러 번 나를 크게 도와주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목사님과 깊은 우정으로 맺어진 것을 알았지만 항상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목사님은 영어를 전혀 못하고 나는 러시아어를 거의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목사님의 부인인 헬레나가 영국식 발음이기는 했지만 영어를 매우 잘했습니다.  1993년 선교여행 중에 처음으로 주일에 모스크바 방문 일정이 잡혔고 목사님은 나를 자기교회에서 설교하라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아직도 강단에 낫과 망치가 걸려 있는 큰 강단이었는데… 예배가 시작되자 목사님은 마이크로 다가가 양손을 들고 또렷한 미국 본토발음으로 “성령님 오늘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가 계속되었고 나의 벌어진 입은 닫히지 않았습니다.  소련 사람을 만나본 분은 아시겠지만 몇 년 동안 훈련과 연습을 거치지 않으면 소련인이 미국식 본토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물며 목사님은 영어를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배가 끝난 후 나는 헬레나에게 “저는 코스댜 목사님이 영어를 전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완벽한 영어로 기도하시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내 남편은 영어를 못해요. 그것은 방언기도입니다. 뭐라고 기도했는지 목사님도 모르고 계십니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방언으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것을 본 것이었습니다.  코스탸 목사님이 영어로 방언하는 것을 들으면서 사도행전 2장에서 군중들이 다락방에 성령이 임할 때 타국인들이 자기들 본토 방언을 하는 것을 듣고 느꼈을 감정을 조금 맛보았습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방언도 하지 못하는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었고 신학교에서는 방언의 부당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 결과 목사가 되어 사역할 때 교인들에게 방언의 부당성을 가르쳤고 처음 십 년간은 오늘날 방언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라고 일 년에 몇 번씩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특별히 찾지도 않았는데 성령께서 저와 아내에게 방언을 주셨고, 문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의 임재가 제 가정을 덮었습니다.  처음에 나로서는 이 경험을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반대 입장을 가르쳐왔던 내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쉽게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나의 방언 체험을 사람들한테 말했는데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하는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안 방언만큼 그분께 나를 더 가까이 이끌어 준 것이 없습니다.  지난 십 사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방언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기 전에, 개인기도 시간에, 운전하면서도 방언기도를 합니다.  방언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위의 간증은 『Experiencing the Spirit』에서 나오는 것으로 Dallas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하고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활발하게 사역하면서 헝가리와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소재하는 Messianic Jewish Bible Institutes에서 초빙교수로 섬기고 있는 Robert Heidler 박사의 고백입니다.  물론 이러한 글을 접할 때마다 두 부류의 사람들로 갈라질 수 있는데, 한 부류는 마귀의 주술에 걸려 자신도 알지 못하고 옹알거리는 귀신방언을 한다고 말할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지금도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입니다.  사실 방언기도를 오랫동안 해왔지만 한 번도 후회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방언을 허락해 주신 성령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데(고전 12:11), 여기서 항상 궁금한 것은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내가 과연 마귀에게 조종 받아 시간만 되면 기도실에 들어가서 옹알거리는 것일까요?  그리고 어떤 목사는 방언기도를 많이 하면 전두엽을 손상시켜 좀비가 된다고 장황스럽게 궤변을 늘어놓는데 왜 아직까지 나는 방언기도를 많이 했어도 좀비(?)가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방언기도를 전혀 경험해 보지 않는 사람이나 하다가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어 포기한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인 방언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R. T. Kendall의 말을 인용한다면 “진짜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이 가짜에 관해 논할 자격이 있는지 참으로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궤변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성령이 주신 은사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솔직히 이들이 받은 은사가 정말 하나님께로 왔다면(고전 12:11), 데마가 주님을 버리고 떠난 것처럼(딤후 4:10), 그 은사를 그렇게 헌신짝처럼 내다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는 부모가 없듯이(마 7:9),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은사)들 중에 나쁜 것은 하나도 없는데(약 1:17), 안타까운 것은 그 받은 은사가 성령께로부터 온 확신이 얼마나 없었으면 쉽게 포기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마귀가 보통 영악하기 그지없다는 것이고(고후 11:3), 사실 영적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중상모략에 뛰어난 마귀(욥 1:9)가 주로 사용하는 무기, 즉 하와를 충동질한 것처럼 사람 마음속에 끊임없이 의심을 심어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창 3:4-5).  심각한 문제는 한 번 의심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이런 말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개 눈에 똥만 보이는 것”처럼 계속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마다 의심이 일어나는데(눅 24:38), 이것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처럼(약 1:6), 미혹의 영 마귀에게 충동질을 받아 나타나는 증상입니다(계 12: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심지가 견고한 사람을 평강으로 지켜주시는 것이고(사 26:3),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확신한 것처럼(행 27:22-26),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그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성령 하나님께서 또 다른 은사들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눅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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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방언에 대해 말할 때에 “방언하는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그 기도가 어떻게 덕을 세울 수 있는가?”라고 의구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방언기도의 주된 목적은 내 영이 하나님과의 긴밀한 소통을 하는 데에 있습니다(유 20절).  즉, 방언은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로 성경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말하는데(고전 14:15), 이 말의 의미는 마음이 기도의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통 기도는 입술을 열고 마음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목소리를 통해 전달을 하는 반면 영으로 기도할 때는 기도 내용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 내 영으로부터 나오는데 이때에 말하는 것은 내 의지이고 마음도 깨어 있습니다(고전 14:27).  하지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는 말씀처럼 열매는 없기 때문에(고전 14:14), 이때 하는 말을 비록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고전 14:9), 우리의 목소리는 영혼의 표현으로 우리의 영이 마음의 제한과 미혹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직접 의사소통을 하는 것입니다(고전 14:2).  만약 여기에 통역이 있으면 교회에서 덕을 세우게 되는데(고전 14:12-13), Gordon Fee는 이 문제를 놓고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때때로 마음을 뛰어넘는 성령에 의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믿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14-15절에서 그는 자신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마음과 영, 모두로 기도할 것이라고 논증한다.”

 

Michael Green 역시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못할 때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 그분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안에서 중보하시고 비록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른 이 기도를 아버지께서 받으신다.”라고 말하는데, 이들이 말하는 요지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아는 말로 기도하는 것과 알지 못하는 말(방언)로 기도하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고전 14:15), 그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서 들으실 뿐 아니라(행 10:31), 덕을 세우는데 있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고전 14:4).  다시 말해 만약 방언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면(고전 12:7), 성령은 우리에게 개인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통역이 있으면 교회에 덕을 세우는(고전 14:5, 13, 26), 이 귀한 선물을 허락해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방언기도는 우리의 영을 강건케 할 뿐 아니라 기도를 강력해지도록 만들어 주는데, 예를 들어 기도해야 된다고 느낄 때가 많지만 마음이 너무 피곤하거나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집중하기 어려울 때, 그리고 정확히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를 때(롬 8:26), 성령께서 돕는 이 기도(유 20절)를 통해 어떠한 것도 제한 받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방언을 ‘영으로’ 축복하는 일로 묘사한 적이 있는데(고전 14:16), 바울이 이 똑같은 용어를 에베소서 6장18절에서도 사용하면서 기도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때 방언이 영적전투를 수행하는 한 방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한 가지 “방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용된 인간의 언어인가?”라는 질문인데,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방언과 관련해서 이 은사가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인간의 언어에만 한정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증거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행 10:44-46, 19:1-6).  물론 오순절 날 방언을 시작으로 복음의 길이 열린 것은 사실이지만(행 2:4), 이 은사가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설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Harold Horton는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and The Gifts of the Spirit』에서 “초대교회 사도들이 외국어의 형태로 방언의 은사를 받아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성경에 의하면 오순절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베드로 한 명이었고 그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아람어나 헬라어로 복음을 전했다.”  한 마디로 제자들이 한 방언은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각 나라 방언으로 전해진 내용 ‘하나님의 큰일’(행 2:11)은 복음이 아닌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말하는 것으로(고전 14:15),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그것을 들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행 2:12), 그 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하루에 삼천 명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는데(행 2:37-42), 이날 이들이 구원받은 것은 베드로의 설교에 의한 것이지(행 2:14-36), 외국어/방언을 듣고 구원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은사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예루살렘 교회(행 2:1-13)와 고넬료 가정(행 10:44-48),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서 나타난(행 19:1-6) 방언만이 진짜방언이고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난 방언(고전 12-14장)은 백퍼센트 가짜방언이라고 독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거나 쓰기도 어려운 헬라어를 인용하면서 tongue(단수)‘알려지지 않은 언어’(고린도 방언), 즉 사람도, 하나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기 때문에 거짓된 방언이라고 주장하고 반면에 tongues(복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사도행전 방언) 즉, 외국어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헬라어와 영어를 대조시켜 KJV(한글)만이 완벽하게 번역된 것처럼 강조(우상시)하는 Peter S. Ruckman(말씀보존학회)의 추종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한글성경과 영어성경은 서너 개 빼놓고 거의 ‘방언’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유독 KJV 만큼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번역자들이 단수에 원본에 없는 unknown을 추가해서 an unknown tongue으로, 복수는 with tongues으로 번역하면서 단수는 ‘알려지지 않는 언어’이고 복수는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 구분합니다.  사실 이런 해석이 잘못된 것은 가령 나무(단수)를 나무들(복수)로 표현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듯이 단수나 복수로 사용한다고 해서 그 뜻이 달라져 하나는 ‘진짜방언’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방언’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불신자)에게 하는 것”(고전 14:22)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은사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하나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솔직히 이 한 구절만 가지고 해석한다면 맞을 수도 있겠지만 성경을 ‘여호와 증인들’처럼 해석할 것이 아니라 앞뒤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분명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라는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이 방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외국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것이 사람의 언어인 외국어라면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기는데, 하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라면 “왜 통역의 은사를 구해야 하는가?”(고전 14:13)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 기도했다면 “왜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가?”(고전 14:14)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여러 나라말을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도 의문이 생기는 것은 만일 방언기도가 오순절 때와 같이 알려진 외국어라면 왜 사도 바울은 교회 외에 사적인 공간에서 고린도교회 신자들보다 더 많이 기도했느냐는 것입니다(고전 14:18). 즉, 고린도교회 방언은 알려진 인간의 언어(외국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고전 14:5)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이들의 주장대로 번역하면 ‘외국어로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으로 되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는 말씀도 ‘외국어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로 됩니다.  여기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알려진 외국어로 덕을 세우기 위해 통역하는 것과 인간에게 이미 알려진 언어라면 그 언어를 가지고 복음 전하는 것을 금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스스로 헷갈려 알지도 못하는 헬라어를 인용하면서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위해 횡성수설 하거나 말에 핵심이 없는 것을 볼 때 방언기도를 하는 나로서는 이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이 쓴 글에서 무지와 억지, 그리고 D. A. Carson이 말한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으려는 소름끼치는 자의적 성경해석(벧후 1:20-21)이 난무하고 방언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여기서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방언은 성경이 증거 하듯 성령이 주신 귀한 은사인 것만은 확실합니다(고전 14:39).  무엇보다도 방언기도를 하고 있는 신자들이 전 세계적으로 수도 없이 많은데 현대 방언을 거짓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들 모두가 귀신에게 미혹을 당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약 방언기도가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귀신에게 속아 옹알거리는 거라고 주장한다면 솔직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이들이 말하는 악령(?)에게 더 강하고, 더 세게 다스림 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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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4:33).  여기서 ‘어지러움’이란 말은 ‘무질서’를 의미하는데 고린도전서 14장 마지막 절에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지금 현재 예언에 대해 배워가고 있는 중이지만 많은 교회들이 회중적이든 개인적이든 그들 가운데 주어지는 예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예언을 올바르게만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교회 공동체에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가령 잘못 해석해서 사용하게 될 경우에는 엄청난 혼동과 함께 교회의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가장 심각한 것은 어떤 사람이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예언을 남발하는 것이 문제인데,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라.’(마 7:16)고 말씀하셨듯이 성령의 은사가 나타날 때 그 은사에 사랑이 있는지(고전 13:1-3), 덕을 세우는지(고전 14:12, 26), 질서가 있는지(고전 14:33, 40),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지를 보고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고전 10:31).  만일 이것에서 하나라도 벗어난다면 그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사가 아니라(살후 2:9-10),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것이라고 판단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고후 11:13-15).

 

우리는 성경을 배우는 것처럼 예언적으로 사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전히 유익함을 받고자 할 때 꼭 밟아야 할 단계가 있는데, 먼저 성경의 메시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읽고 공부하는 가운데(행 17:11),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해야 하고(느 8:8), 마지막으로 듣고 배운 말씀을 삶속에 반드시 적용해야 합니다(요 14:21).  즉,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적용해야 신앙생활에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마 7:24-27).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것은 말씀은 받았지만 해석하는 것과 삶속에 적용하는 것에 실패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성경지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약 1:22).  마찬가지로 예언적 계시를 받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유익함을 온전히 받기 위해 따라야 할 단계가 있는데 예언의 말씀을 듣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고(요 10:27), 아니면 우리 마음의 상상일 수도 있으며(겔 13:17, 렘 23:26), 또 어떤 예언은 원수가 속이려는 것도 있습니다(렘 23:13).  사실 예언은 실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란 통로를 통해 오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면 반드시 시험해 보아야 하고(고전 14:29, 살전 5:20-21), 그런 다음 예언의 말씀을 해석하고 어떻게 삶 속에 적용해야 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언의 말씀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분별하고, 해석하고, 적용을 해야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2:7).

 

가령 어떤 사람들 중에 자신에 대해서 굉장한 예언을 받으면 그것이 곧 바로 이루어지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예언이 이루어지려면 때로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은 가능성을 선포하는 것이지 필연성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하고 누군가 예언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언이 주어질 때는 반드시 분별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위대한 예언을 탁월한 예언사역자에게 받았을지라도 그 예언의 말씀은 물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요셉이 꿈을 꿀 때 그것이 하나님께로 왔지만 해석과 적용을 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는데 성경은 그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말씀이 요셉을 시험했다고 말하고 있고(시 105:17-19), 그가 처음 꿈을 꾸고 나서(창 37장), 그 예언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무려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창 42:6).  또한 열국의 아비의 가능성을 지닌 아브라함도 그의 첫 아들 이삭을 얻기 위해 무려 25년 이상을 기다렸으며(창 21:5), 다윗은 왕이 되리라는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 15년 이상을 광야에서 보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나갔습니다(삼하 5:3).  그러기 때문에 예언을 받았을 때는 거기에 맞게 예언을 받은 사람이 분별하고, 해석하고, 삶속에 적용해야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예언은 조건적이며 그것을 받은 사람의 반응을 요구하고 있으며 개인적 예언에는 도덕적인 규범이 따르는데 만일 예언을 받은 사람이 서투르게 반응하고 사울 왕처럼 불신앙에 차있거나(삼상 13:13, 15:11), 이스라엘 백성처럼 계속적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삶을 산다면(히 3:15), 그 주어진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그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협력할 필요가 있으며 만약 반응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빼놓고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가던 중에 끝나는 것처럼 예언이 성취가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민 14:30).  뿐만 아니라 예언은 상징 속에 가려져 있을 때가 많아 반드시 해석을 필요로 하는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환상을 주시면서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는 “한 광주리에는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렘 24:1-3).  여기에 예언해석에 대한 일반원칙이 있는데 모든 해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즉, 예레미야는 그 무화과의 의미를 알기 위해 이곳저곳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무화과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지 않았고 직접 하나님께 물어 그 뜻을 알아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이나(창 41장), 다니엘처럼(단 2, 4장), 해석의 은사가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뜻을 알 수도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하기를 원하시고 있고, 만약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주시면 그 예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찾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말씀이 장래에 꼭 필요한 말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뜻을 쉽게 찾지 못하도록 계시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해석을 구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길과 말씀을 갈망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계발되길 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결국 그 예언을 해석해 주십니다(렘 29:13).  또한 예언적 계시를 받을 때 그 뜻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느냐가 중요하고 하나님이 왜 이 계시를 주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언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하느냐는 왜 그 예언이 주어졌는지를 기억하면 되는데 고린도전서 14장3절에 예언을 주시는 목적이 쓰여 있듯이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며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예언을 주셨을 때 적어도 세 가지 중에 하나는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새로운 믿음과 비전을 줌으로 주님 안에서 덕을 세워주고, 또한 그들의 소명에 확실한 용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풀어놓아 상처받은 자를 위로하고 치료합니다.  쉽게 말하면 신앙이 성장하도록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거나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오늘날에만 적용되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언에 관한 모든 해석은 진리의 말씀으로 걸러내야 하는데 왜냐하면 성경은 삶의 기초이자 예언의 기준선이기 때문입니다(딤후 3:16-17).  다시 말해 교훈이란 미명하에 사람의 입에서 나온 예언의 메시지를 기록된 말씀보다 우위에 두거나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성경 66권의 말씀보다 예언의 메시지를 더 높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베드로가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벧후 1:19).  이 말의 의미는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을 직접보고 듣고 또한 변화산의 확실한 체험을 가진 장본인이지만(마 17: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체험보다 훨씬 더 믿을 만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벧후 1:16-21).  한마디로 예언적 계시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근간은 성경 외에는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 무엇이며, 어떻게 역사하며, 지역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해서 목회자들 중에 성경 66권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언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에 주어진 예언과 완성된 성경에 대한 차이를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에는 계시(예언)와, 방언과 통역과 찬송과 말씀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고(고전 14:26), 사도 바울도 신약의 성도들에게 예언을 사모하고 구해야할 은사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4:1,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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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왼쪽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면서 손으로 만져보면 무슨 딱딱한 것이 있다고 해서 아내와 같이 만져보니 탁구공보다 약간 작은 종양(tumor)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아프면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 저희 가족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기에 매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와 함께 딸에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이 종양을 제거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요 14:12), 그분이 하셨던 것처럼 아픈 곳에 손을 얹고 깨끗하게 고침 받을 것을 명령했습니다(눅 4:39).  물론 기도를 해도 고쳐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눅 5:17, 고전 12:11), 금방 나을 것 같았는데도 무려 2년이란 세월이 흐르도록 여전히 종양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 하던 대로 기도만 하고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하루는 큰 딸이 “아빠, 종양이 없어졌네!” 그러기에 손으로 만져보니까 깨끗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종양을 제거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는데 이 일을 통해 한 가지 느낀 것은 내 자녀가 종양 때문에 신경을 쓰고 손으로 누를 때마다 아프다고 할 때 사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 질병(종양)으로 인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사 53:5), 신약에 와서 마태는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주님이 우리의 연약한 육체의 질병을 다 짊어지셨다고 기록했으며(마 8:17), 베드로 역시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고 증거합니다(벧전 2:24).  실제로 예수님 자신도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 삼분의 일은 병자와 축귀사역에 시간을 보내셨는데(마 4:23), 만약 병자를 고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사역이 아니라면 승천하실 때 마지막 지상명령에 치유와 축귀사역을 포함시키지 말아야 하고(막 16:15-18), 무엇보다도 병든 자들을 위해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약 5:14-16).  그리고 요엘서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욜 2:28-29)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오순절 날 베드로는 이 말씀이 성취됐음을 선포했습니다(행 2:16-18).  이렇듯 구약시대와 달리 이제는 성령의 능력이 주의 백성 모두에게 임하게 되어 병 고치는 것과 귀신 쫓는 것, 그리고 예언과 주님의 음성 듣는 것과 환상과 꿈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막 16:17-18, 행 2:17-19).  만약 이러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비틀어진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아직도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고전 2:14).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성령의 능력이 남녀노소 모두에게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칼과 방패는 들었지만(엡 6:16-18), 전혀 사용할 줄을 모르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더라도 마음에 기쁨이 없이 무엇인가 눌려(행 10:38),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평강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하는데(벧전 2:9), 왜 같은 예수를 믿으면서 이러한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데 한사람은 영혼만 구원받고 육체는 질병으로 고생하며 생활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건강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어느 사람이 영육이 강건한 사람입니까?  만약, 온 몸에 각종 질병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예수님이 채찍을 맞으실 필요가 없을 것이고 성경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하신 것을 고치시고…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 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마 4:23-24), 이렇듯 예수님은 다양한 종류의 병과 여러 가지 유형의 질병들을 이미 고치셨기 때문에(마 9:35, 10:1, 막 1:34), 우리는 더 이상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목회자들 중에 이사야 53장5절 말씀을 오직 영혼구원으로만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치유란 육체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원어에는 온전함으로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치유란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 삶의 모든 분야가 회복되는 것을 말하며 성경은 하나님께서 육체와(출 23:25, 신 7:15), 감정과(시 147:3, 사 61:1-3), 영이(렘 3:22, 호 14:4), 모두 회복하기를 바라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즉 헬라어 ‘소조’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110번 이상 나오는 단어로 ‘영혼구원’만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장8절에 나오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소조’로 사용하고 있고, 의사를 잘못 만나 돈을 탕진하고 몸을 망친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온갖 고통을 당한 여자가 예수님께 고침 받을 때 사용된 단어도 ‘소조’이고(마 9:21), 거라사 지방에서 평생을 귀신들려 벌거벗은 몸으로 집에 거하지 않고 무덤 사이에 살면서 고통을 당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귀신에게 완전히 놓여남을 받을 때 사용된 단어 역시 ‘소조’입니다(눅 8:36).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소조)은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에서의 고침과 귀신에게서의 자유함을 얻는 “전인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환언하면 신약성경 요한삼서2절 말씀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영혼구원뿐만 아니라 육신의 형통함과 육체의 건강까지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 중에 자녀가 질병으로 고생하며 사는 것을 원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아마 모든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자식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서 사회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가 자녀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한결같은 마음일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한 마음도 똑같으실 것입니다(마 7:9-11).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요한삼서 2절).  만약 자신이 낳은 자녀가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데 그것을 마음 아파하지 않는 부모가 있다면 아마도 그 자녀를 사랑하지 않거나 아니면 자신이 낳지 않은 자녀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육신의 아버지 이상으로 우리가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병들어 살 수도 있겠지만(요 11:4),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요 9:3). 우리 모두가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막 3:1-6).  가령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이나 백부장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지만 이들이 주님께로 나아가면 고쳐주실 것을 믿었을 때 예수님은 이들의 질병을 깨끗하게 고쳐주셨는데(막 7:24-30, 마 8:5-13), 하물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놀라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주의 자녀들이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 받기를 원한다면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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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졸업할 때쯤 어느 날 저녁 9시경에 다급한 목소리로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전화 한통이 학교 기숙사로 걸려왔는데 빨리 교회 사무실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올 때 혼자 오지 말고 기도를 많이 하는 학생 두 명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기에 다른 두 명의 학생과 함께 교회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놀라운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자 집사님이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있었는데 얼마 전에 교회에서 보았던 집사님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순간 ‘엑소시스트’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고 사무실에는 담임목사님과 장로님, 나이 드신 여자 전도사님과 귀신들린 집사님의 남편이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것 같아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많은 시간을 귀신들과 영적전쟁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말로만 듣던 귀신들린 사람을 보았고 너무 놀라 가슴이 뛰었고 여자가 남자 목소리를 낼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무릎을 끊고 눈을 감고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담임목사님께서 “김전도사! 눈을 감지 말고 기도해! 지금 귀신들과 영적전쟁을 하는 거야!”라고 소리를 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머리카락이 ‘삐쭉’ 솟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득이나 겁이 나는데 ‘귀신들’이란 말에 더 놀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일곱 명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기도하고 귀신과의 영적싸움을 저녁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치렀고 결국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떠나가고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당시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교회 안에서 벌어진 축귀사역은 경험이 없는 나에게 있어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었는데, 하나는 귀신들린 사람이 방언을 흉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귀신을 쫓는데 있어 방언기도가 강력한 도구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은사를 사모는 했지만 그렇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인지 ‘주시면 받고 안 주셔도 할 수 없고’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교회에서 방언기도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고 방언에 대해 더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고 졸업식 하는 날 합심기도를 할 때 혀가 자연스럽게 말리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방언)이 내 입을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이렇게 방언을 받자마자 마음속에 감사의 기도가 흘러 나왔고 이때로부터 시작한 방언기도는 지금까지 하고 있지만, 처음 얼마 동안은 의심이 들기도 해서 방언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는데 믿음으로 의심을 이기고 잘 극복한 후부터 지금까지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마귀의 주술에 걸렸거나 귀신에게 미혹을 당해 옹알거리면서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눅 1:35)과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벧전 2:24),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행 2:24), 승천해서(행 1:9), 하나님의 보좌 우편(행 7:55)에 계신 것을 조금도 의심 없이 확실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10:9-10).  쉽게 말해 고린도전서 12장3절 말씀처럼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이지 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이 은사중지론 입장에 서있는 사람이나 아예 처음부터 방언이 없다는 은사부정론을 내세우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헛소리 같이 들릴 것이고 마귀에 주술에 걸린 것이 확실하고 백 퍼센트 가짜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또 어떤 목사가 방언을 하는 사람은 전두엽을 손상시켜 좀비로 만든다는 황당무계한 궤변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사실 성령의 은사인 방언(고전 12:10)에 대해 귀신방언이라고 독설을 퍼붓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잘 알지도 못하는 헬라어 단어를 들먹이면서 자신의 주장이 매우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통시적(diachronic)해석/역사 비평적 방법론(historical critical method)까지 동원하고, 심지어 방언이 없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순환논법(循環論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은사를 체험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 방언에 대해 사족(蛇足)을 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현대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헬라 교부들의 모국어 능력과 그 말의 뉘앙스에 가까이 접근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기 때문에 지금 원어를 가르치는 교수들조차 헬라 교부들이 보기에는 초보수준에 불과할 것이고, 그래도 신학자/목사들 중에 “내가 얼마나 헬라어를 많이 아는데”라고 교만을 떠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고전 8:1), 이렇게 자신의 주장을 과신하면서 다른 형제의 신학/신앙을 단죄하려는 태도를 가진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지 못한 자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마 7:1-5).

 

그리고 간혹 방언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 중에 방언의 은사에 대해 풍자적으로 묘사해서 어떤 용어를 사용하여 방언을 폄하하는데 이런 말은 은사를 허락해주신 성령 하나님을 심히 모독하는 일일뿐 아니라(마 12:31-32), 그분을 근심시키는 행위(엡 4:30)로 듣는 자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4:29).  사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인데(딤전 4:12), 만약 겉과 속에 다른 바리새인같이 행동을 한다면(마 23:27), 하나님 앞에서 외식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약 1:22).  물론 양심이 화인을 맞아 자신이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자칭 신학자/목사가 있기는 하지만(딤전 4:2), 이런 사람은 사울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고(행 9장), 무엇보다도 방언을 하지 않거나 혹은 해본 적이 없다면 방언에 대해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하고 혹시 누군가 물어보면 그냥 체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대답해 줄 수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잠 13:3, 마 12:36-37).  아무튼 방언은 논쟁이 심한 은사이긴 하지만 이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덕을 세우는 소중한 은사이고, 만약 통역이 있다면 교회에 덕을 세우는 놀라운 은사인 것만은 확실합니다(고전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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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장10절에 기록된 ‘영들 분별함’이란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 나오는 단어로 신자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데, 사도 요한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시험할 것을 말했고(요일 4:1), 사도 바울 역시 이 은사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이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끌려갔음을 알았습니다(고전 12:2).  성경에 의하면 이 영들 분별함은 벙어리 되고 듣지 못하게 하는 영(막 9:25), 질병을 가져다주는 불구의 영(눅 13:11), 사술에 매여 점을 치게 하는 영(행 16:16), 믿음을 파선시키는 미혹케 하는 영(딤전 4:1),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는 미혹의 영(요일 4:3-6), 불결하고 가증한 더러운 영(계 18:2), 그리고 거짓말 하는 영(왕상 22:22)과 귀신의 영(계 16:14), 등등 여러 종류의 악령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해주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신학자나 목회자들 가운데 악의 영들에 대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엡 6:12), 사실 무당이나 강신술을 접한 불신자들도 악령의 존재에 대해 믿고 있는데, 만약 그리스도인들 중에 악한 영이 존재하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상당한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고전 2:13-15).  그러나 어떤 현상이나 행동을 보고 그냥 분별력 없이 진단에 의해 좋은 추측을 만들 수는 있지만, 만일 신자에게 있어 성령 하나님께서 그런 면에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축귀사역을 해오던 Francis MacNutt 박사는 교회가 건강하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 중의 하나인 영들 분별할 수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분별력은 어떤 경우에 악한 영이 있는지를 아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며, 이 은사는 누군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구별할 수 있는 것으로 그가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인지, 자연적이고 인간적이며 심리적인 현상인지, 사람의 눈을 속이는 악령에 의해 생겨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Deliverance from Evil Spirits』에서 이런 주의를 줍니다.  “성령의 모든 은사와 같이 영들 분별함도 시험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특정 악한 영이 나타나는 것을 분별한다고 내게 말하는 모든 사람을 믿을 필요는 없다. 어떤 이는 예언, 치유, 혹은 영분별의 강한 은사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편견과 자기 욕심, 그리고 종교적 배경의 요소로 인해 은사를 오염되게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분별의 은사를 갖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역하는 사람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은사들(약 1:17), 특히 영들 분별함에 있어 사역자는 자신의 마음과 욕망으로 인해 그분이 주신 것을 잘못 판단하거나(행 10:10-17), 자신의 생각이 혼합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역자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그의 말을 무조건 믿거나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능력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선과 악(요일 4:6), 그리고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빌 1:10),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14절에서 영적이지 않은 사람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지만(고전 1:18), 성령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주시는 은총의 선물(약 1:17)을 깨달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이 진리이며 거짓인지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고전 2:15).  사도 요한 역시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갖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요일 2:20, 2:27), 이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믿는 자의 영혼에 비춰주시고 거짓 교사와 이단적인 교설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 말하는데(고전 2:10-13),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분별의 능력(요 14:17)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마귀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롬 8:32).  반면 악령들의 정체를 분별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부여되는 일반적인 분별의 능력과(고전 12:3)는 구분되는 영들을 분별할 수 있는 은사로서 Calvin과 Peter Wagner가 말한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을 수 있는 은사가 아니라(고전 12:29-30),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의 기능은 악령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요일 4:1), 어떤 사람의 영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읽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모습 뒤에 감추어진 거짓과 불순한 동기를 판단할 수도 있는데(요 4:2-6), 이것에 대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분별의 능력에 관하여 흥미로운 묘사를 남기고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통해 그분을 믿었지만(요 11:45),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마음을 주거나 몸을 맡기지 않으셨는데(요 2:23-24), 그분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들의 얼굴과 겉으로 드러난 행동 뒤에 감추어진 영혼을 꿰뚫어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요 1:48, 5:42).  이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은 표면적인 현상 내부의 근원적인 실체를 파악하는데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 바울이 엘루마라는 마술사와 대결하는 이야기는 영들 분별함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주는 좋은 실례로 유대인 거짓 마술사 엘루마는 바울과 바나바가 총독 서기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훼방하려고 할 때 바울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그 마술사의 영을 분별하였습니다(행 13:4-12).  따라서 이 은사는 객관적인 관찰이 가능한 사실들과 아울러 악의 존재로 인한 영적이고 감정적인 불편을 모두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신령한 사역자인 것처럼 사람을 볼 때마다 “귀신이 곁에 붙어있다”, “좋지 못한 기운이 감싸고 있다”, 더 심하면 “뱀이 온 몸을 징징 감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공포감을 조성하거나 불안감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은 영분별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 점치는 귀신에게 조종을 받거나 아니면 너무 쓸데없는 이상한 집회만 쫓아다녀 영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환청에 시달리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은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은사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덕을 세우지 않거나(고전 14:3), 사랑에 기초하지 않으면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고전 13:1-3).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영적체험 중 일부는 잘못된 것에서 올 수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숙하고 경험 많은 사역자라면 자신이 체험한 것 중에 절반은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신자는 영적분별력을 계발할 수는 있지만 이 능력은 성령의 은사로서(고전 12:10), 모든 신자가 다 행하는 것이 아니고(고전 12:29), 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에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겸손한 자세로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영적인 혜안(慧眼)을 지닌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판단의 유혹을 받기 쉬우므로 자만심과 교만한 태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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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0년 후반에 홍콩에서 재키를 만났다.  당시 나는 그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말씀을 들었는데 쉼 없이 방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다소 불편했지만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마침 홍콩에 말씀을 전하러 갔을 때 그녀가 나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재키는 자신이 홍콩 거리에서 헤로인 중독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들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라고 말해주는 것이 그녀의 전도법이었다.  그리고 헤로인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날마다 방언으로 기도했다.  홍콩 시가 재키가 선교사역을 할 수 있도록 넓은 땅을 주었다. 그들은 길거리의 마약중독자들을 성공적으로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재키라는 것을 인정했다.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 중 소수의 사람들이 옛 생활로 돌아갔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켰고 헤로인 중독에서 완전히 자유케 되었다.  그들은 건강을 회복하여 직업을 갖고 선한 일을 하는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약 중독자들은 문자 그대로 해방시킨 놀라운 재키의 사역은 방언을 통해서였다. 이것이 바로 내가 비판했던 것을 보호해야하는 이유였다.  방언은 이상한 불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간증은 1956년 2월 운전을 하던 중 예상치 못하게 즉홍적으로 방언이 터지는 일을 체험한 R. T. Kendall 목사의 고백입니다.

 

Gordon Fee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에 영적싸움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에 더 온전하게 의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유 20절), 사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에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로 하는 기도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고전 14:15).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말’, 즉 방언으로 기도할 때 유익한 것은 먼저 고넬료 가정처럼 이전에 알지 못했던 깊이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행 10:46), 또한 로마서 8장26절의 말씀에서 방언기도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방언기도는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안에서 중보해 주시고(롬 8:27), 영적전쟁에 있어 성령께서 방언기도를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하는데(엡 6:18), 무엇보다도 이 은사의 또 다른 가치를 찾는다면 다른 은사와 달리 개인의 덕을 세울 수 있는 귀중한 은사라는 것입니다(고전 14:4).  물론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거나 방언기도가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은사의 목적(고전 12:7)은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고전 14:12, 26), 어떤 은사도 개인의 건덕을 위해 이기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 은사를 받는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라고 명백하게 말하는데, 문제는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자신을 세우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숙지해야 할 것은 모든 은사는 어떤 식으로든 은사의 사용자에게 유익이 있을 뿐 아니라(고전 12:7), 이것이 자기 교화(敎化)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 한 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공부를 하는 것(딤후 3:14)은 이단적 교리들을 잘 대처하고 분별하기 위한 것이고(딤후 2:15),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딤후 3:17).  즉, 말씀을 배우면서 우리가 더 성숙하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더 잘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입니다(벧후 1:5-7).  만약 이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면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행 17:11).  다시 말해 기독교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활동들(전도, 기도, 봉사, 선교, 예배, 찬양, 성경공부, 등등)은 자기 교화의 효과적인 수단이고 더 나아가 방언기도를 통한 자기 교화도 마귀의 주술에 걸려 헛소리 하거나 잘못되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공동의 유익이라는 사실은 각각의 은사 현상이 다른 이차적인 효과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방언의 사용을 장려했던 것입니다(고전 14:5).

 

그리고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고린도전서 14장4절에서 사용된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NLT에서는 ‘strengthened’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고, BBE에서는 'may do good', GWT에서는 ‘grow', 그 외에 수많은 번역본에서는 ‘build up’이라는 단어보다는 ‘edifie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사실 원어에서는 ‘덕’이라는 말이 없지만, 이 헬라어 동사로 쓰인 ‘오이코도메오’는 근본적으로 ‘짓다’ 혹은 ‘세우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쉽게 번역하면 “방언으로 자기를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 헬라어 단어를 ‘교화(敎化)하다’ 혹은 ‘강화(强化)하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의 뜻은 신앙성장에 유익을 위해 영적으로 강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를 세운다는 것은 사고 능력이 아닌 영의 교화로 영적으로 강하고 믿음이 견고하게 한다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유다서 20절의 말씀처럼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방언)를 통해 개인의 삶에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 중에 유익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약 1:17), 한 마디로 개인의 영적성장에 매우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말은 집을 짓듯이 자신을 건축하여 영적으로 성장하고 올바른 믿음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워진다는 것은 바로 교회 공동체가 간접적으로라도 필연적으로 강화가 된다는 것입니다(엡 4:12-14).

 

예를 들면 누가복음에 ‘모퉁이의 머릿돌’(눅 20:17)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말의 의미는 돌 하나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 방식에 따라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엡 2:2-22), 예수님이 사용하신 은유로 그분의 희생을 가리킵니다(시 118:22).  마찬가지로 은사는 각 사람의 유익(고전 12:7)을 위해 주어진 선물이지만(약 1:17), 문제는 은사 받은 사람이 자신이 먼저 바로 세워지지 않고서는 다른 지체들을 세워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엡 4:12-16).  얼마 전 어느 여성이 전쟁이 난다고 예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예언은 맞지 않았고 오히려 격려를 받고 위로받은 것이 아니라(고전 14:3), 미혹의 영에게 충동질을 받아 사람들을 이리저리 방황을 시켰습니다.  왜 이런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성령의 은사를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분별력 없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고전 14:29).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한다면 은사가 성령의 의해 계발되고 성숙한 과정을 거쳐야 되는데, 이 여성은 처음 받은 은사가 받는 순간 완벽하게 주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한 문제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은사를 남용한 것입니다.  사실 성숙하고 노련한 예언사역자 한 사람이 나오려면 수 십 년이라는 기간 동안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처 성숙한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이 여성은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인지, 귀신의 속삭임인지, 성령의 내적인 감동인지 분별없이 받아들여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여기서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은사와 상관없이 영적으로 잘 다듬어지지 않고 성숙하지 않는 사람(목사를 포함해서)이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딤전 3:6).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아마 덕을 세우기보다는 교회 안에서 분쟁만 일으키지 않아도 다행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는데(눅 22:32), 사실 믿음이 없는 그가 갈대처럼 흔들릴 때 다른 형제들을 세워주지 못했고 심지어 칼을 들고 설치거나(막 14:47), 입으로 저주하고 맹세하며 주님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믿음이 없었습니다(마 26:69-75).  쉽게 말해 그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덕을 세우기보다는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교인의 한 부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련을 겪은 후에 다른 형제들을 굳게 한 것처럼(실제로 베드로전서는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위한 위로와 권면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음) 은사 받은 사람 역시 먼저 자신을 세우지 않고서는 다른 지체들을 세워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방언기도를 충실하게 했던 사람은 그 신앙의 년도에 따라 교회 안에 덕을 많이 세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적게 세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의 은사는 완벽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딤후 1:6), 은사 받은 사람의 실수를 가지고 눈에 할례를 받지 못한 독사의 자식 바리새인처럼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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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봄에 루이스가 몹시 아팠을 때, 나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짖었다.  절친한 친구의 아파트에 홀로 앉아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1956년 이후 그렇게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줄곧 방언기도를 해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26-27절에서 언급한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것이 방언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4장2절과 완벽하게 연결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이처럼 방언으로 기도할 때 한 가지 아주 분명한 사실은 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간증은 『Holy Fire』에서 나오는 것으로 남침례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R. T. Kendall의 고백인데, 그는 Lloyd Jones 목사의 후임으로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25년간 사역을 감당한 목사로 수 십 권의 책을 저술하고 성령의 역사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독특한 강해설교와 거리에서 전도할 때 공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유명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역자입니다.  이 분은 2002년 은퇴하고 나서 지금까지도 방언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Kendall 목사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마귀의 주술에 걸려 옹알거리면서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것을 부정하는 Palmer Robertson는 『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에서 “사적인 방언과 공적인 방언을 대조하는 언급은 없다. 이는 신약의 방언이 사적인 용도로 사용되기 위해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이 나누어 주는 다른 모든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방언은 전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오늘날 나타나는 절대 다수의 방언 현상은 신약의 방언과 다르다는 것이 애초부터 분명해 진다. 사적인 방언은 신약의 방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데 한마디로 신약의 방언은 개인이 사적으로 활용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28절의 말씀에 대해서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는 자가 없는 이상 자신을 자제하지만 동시에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자신 안에서 말한다”라고 모호하게 말하면서 결론짓기를 “어떤 사람이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방언을 사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는 이성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도 가운데 소리를 냄으로 긴장감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고 증언할지 모른다. 그가 사용한 기도언어는 그로 하여금 오늘날의 삶을 맞닥뜨려 헤쳐 나가도록 돕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다.”  사실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는데 유익하다는 것을 체험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것을 주장할 때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Richard B. Gaffin 역시 방언기도가 개인의 경건을 위해 사용되는 것에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공식모임에 방언의 공용성(共用性)을 주로 다루었다. 동시에 방언이 사적으로 행사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구절들도 있다(4, 18, 19, 28절). 그렇다고 해서 방언이 개인의 경건생활을 위한 것이라는 선입관은 근거가 없다. 대개 위의 몇 구절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방언은사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용(私用)으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용(共用)으로 주어진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용방언은 통역을 요구하는 공용방언과는 별도로 첨가되는 별개의 은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사용방언은 방언의 은사의 보조적이거나 주변적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서 Palmer Robertson처럼 애매모호한 결론을 내립니다.  “방언은사는 원래 계시기능을 지니고 있는데 이 은사를 받은 자는 방언을 개인경건을 위해 쓸 수 있는 혜택도 덧붙여 받는다.” Calvin도 『제네바 교리문답 247문』에서 방언기도는 유희(遊戱)와 같은 것에 불과하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기독교강요』에서는 고린도전서 14장15절 말씀을 가지고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라고 강조했는데, 솔직히 방언기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방언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John Stott도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가지고 『성령세례와 충만』에서 “바울이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은사는 좋은 것이며 사모할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은 그 자체로서는 덕을 세울 수 있는 특정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말하는 단 한 번의 유일한 예외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바울이 쓴 것은 분명 어느 정도 아이러니를 담고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문구는 그 말 자체로 거의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를 세우는 것은 결코 신약에서 말하는 덕을 세우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이 한 가지 은사만은 그 자체의 존립을 위하여 공동의 유익이 아닌 개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이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Stott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은사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이나 무엇보다도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과 하나님의 말씀 편(엡 6:17)에 서 있는 신학자나 목사들의 주장에 대해 무슨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들은 자신들도 성경을 기초로 해서 방언기도에 대해 바른 해석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Lloyd Jones는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우리는 오직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이 잠시 동안 성령에 의해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그를 영적인 세계로 끌어올리고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특별한 언어입니다. 비록 그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고린도전서 14장4절 말씀처럼 자신에게 덕을 세웁니다. 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압니다. 이것이 2절(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의 진정한 의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이 은사를 소유했다면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이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Gordon Fee도 『Paul, the Spirit, and the People of God』에서 “바울 자신이 그런 기도를 매우 자주했으므로 이 은사를 소중하게 여겼던 고린도 회중에게 그들 중 누구보다 자신이 방언으로 더 많이 기도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방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하는 말이다(고전 14:2, 14, 15, 28절). 그러므로 통역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해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한 비밀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방언을 개인 기도를 위한 은사로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고전 14:4, 5, 15, 17, 18절).  이들은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사용하는 은사로서의 방언에 대해서는 아주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Michael Green 역시 『I Believe in the Holy Spirit』에서 “방언은 말하는 사람의 덕을 세운다(고전 14:4).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리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방언이 제거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방언이 말하는 사람의 덕을 세운다는 것은 별로 놀랄 말한 사실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하는 사람의 덕을 세우는 방언과 교회를 세우는 예언을 세심하게 대조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해서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방언은 성령의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다”라고 강조하고 있고(고전 14:7), Wayne A. Grudem도 방언기도에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대로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든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고전 14:5, 15, 18, 39절). 기도로서 혹은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서의 방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옳다면 우리는 비록 방언하는 사람의 마음이 그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영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지라도 이 은사로 인하여 덕을 세우게 될 것을 기대함이 마땅하다.”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과 진리의 성령 편(요 16:13)에 서 있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자신들이 성경말씀을 토대로 해서 방언에 대해 올바른 해석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예를 들면 예배가 예언처럼 교회의 덕(고전 14:4)을 세워준다는 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의 기원을 찾는다면 창세기 4장부터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가 교회의 덕을 세워준다는 말이 일절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교회에서 방언기도가 개인의 덕을 세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분쟁하는 고린도교회(고전 3:3)나 물고 뜨고 싸우는 갈라디아교회처럼(갈 5:15), 예배를 드려도 그 예배가 공동체에 덕을 세워주지 못한다면 드릴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릴 것을 명령을 하셨습니다(시 29:2, 요 4:24).  그 이유는 먼저 그분이 우리를 통해 영광(사 43:7)과 찬양을 받기 위한 것이고(사 43:21), 다른 하나는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고(엡 1:17-19), 선포되어지는 말씀(살전 2:13)을 들을 때마다 믿음이 자라날 뿐 아니라(롬 10:17), 그 예배를 통해 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 40:31).  한 마디로 영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입니다(출 20:24).  그렇다면 다른 은사와 달리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운다고 말하는데(고전 14:4), 성령께서는 과연 필요하지 않는 은사를 허락해 주신 적이 있을까요?(고전 12:7).  확실한 것은 여러 가지 다른 은사들은(고전 12:4), 교회뿐만 아니라(고전 14:26),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 주신 것이지만(롬 15:18), 방언은 교회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귀중한 은사이기에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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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거부하고 납득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말씀하신다는 예언의 은사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갈등을 겪고 난 후에 뒤늦은 감이 있지만 현재는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에 대해 환영하고 인정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누군가 예언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현대교회의 현실이고 무엇보다도 ‘예언’한다고 하면 점쟁이가 점치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솔직한 고백은 나 자신도 오래 동안 그런 생각과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예언하는 사람을 만나면 미혹의 영에게 사로 잡혔던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예언을 한다는 사람들의 삶에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실망했기 때문인데(마 7:20), 여기서 한 가지 깨닫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사들 중에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약 1:17), 예언하는 사람의 열매 맺지 못하는 행동을 보고 하나님의 주신 은사까지(고전 12:7), 잘못된 것으로 바라보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잘못된 생각과 판단 그리고 성령의 은사(엡 4:7)에 대한 무지함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내 자신이 얼마나 성령의 은사에 대해 무지했는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강하게 새롭게 부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사도행전 2장17-18절에서 ‘내가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성령이 임한 결과 중 하나는 예언의 은사이고(고전 12:10),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롬 8:14),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요 10:27).  한 마디로 베드로처럼 예언의 말씀을 듣고 예언적인 꿈을 꾸며 환상을 보게 되는데(행 10:9-16), 예언은 성령께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계시를 적절한 때 교회에 적절한 방법으로 전하는 것을 뜻합니다(고전 14:24-26).  이 예언에 대해 Jack Deere“예언은 하나님이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라고 말하며, Peter Wagner“예언은 영적으로 감동된 발언”이며, Wayne A. Grudem“예언은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마음에 주신 것을 말함”이라고 정의하고, Calvin 역시 고린도전서 12-14장을 해석하면서 “예언은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계시하는 독특하고 탁월한 은사”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예언이란 Gordon Fee가 말한 대로 “회중의 건덕과 격려를 위하여(고전 14:3), 집회시간에 구두로 전달된 성령의 감동된 자발적이고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계시 받는 것이 가능한지를 문제 삼으면서 교회 안에 예언의 역할은 끝났다고 주장하는데, 물론 오래 전 개혁주의 입장에서 나 자신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이들의 고집하는 주장을 이해하겠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8-10절에서 ‘온전한 것이 올 때까지’ 예언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 구절에서 ‘온전한 것’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보듯 서로 알게 된다고 말하는데(고전 13:12),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Grudem은 얼굴과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구약적인 표현으로(창 32:30, 출 33:11, 신 5:4),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며,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말도 주님의 재림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Charles C. Ryrie 역시 온전한 것은 주님의 재림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더 이상 예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하게 되고 예수님이 우리를 아는 것만큼 우리도 주님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예언은 주님과 그 백성 사이의 중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이고(요 10:2-5), 성경은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믿는 자 모두의 일상적인 일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합니다(요 10:27).  한 마디로 양이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입니다(요 10:16).

 

그러면 여기서 오늘날에 하는 예언이 성경에 첨가돼야 하느냐는 문제가 남게 되는데, 사실 현재 주어진 예언적인 계시는 성경의 계시와 전혀 다르고 그 범주도 다르며, 이 예언의 말씀은 “현재의 말씀으로 특수한 상황에 대한 특별한 방향 계시”로 만나처럼 오늘에만 적용되는 반면 성경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로 모든 상황에 다 적용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예언은 신뢰적인 측면에서도 성경과 다를 뿐 아니라 이 예언은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의 그릇을 통해 주어지고 말하는 사람의 성품에 따라 오염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은 반드시 분변해야 하고(고전 14:29),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만을 취해야 합니다(살전 5:20-21).  이렇게 바울이 “분변하고,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다면 예언에는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는 것도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듣고 좋은 것을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의 말씀인데(딤후 3:16-17), 여기서 ‘영감’이란 하나님의 진리가 사람을 통해 주어졌지만 초자연적인 보호를 입어 혼탁함이나 오류가 전혀 없습니다(벧후 1:20-21).  즉, 성경의 원본에 적힌 글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을 정확히 적은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은 시험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1세기에 성경기록은 마감되었지만 하나님은 오늘날도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통해 계속 말씀하고 계시고, 만약 예언이 필요하지 않다면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전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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