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골프 선수가  한 가지 종류의 골프채 만을 가지고 18홀 정규 코스를 돌면서 골프를 친다면 좋은 성적을 거두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골프를 치는 사람에게 있어 어떤 골프채를 특별히 선호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사용하는 골프채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골프를 잘 치게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문제들에 있어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게 사역과 거룩한 삶을 위해 여러 가지 능력과 책임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즉 성경과 예배와 세례, 그리고 성찬과 친교, 더 나아가 기도라는 놀라운 특권과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가령 성령의 나타나는 표적을 통해 주님을 믿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놀라운 기적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훈련과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탐구하는 방법을 갖추지 못한다면 다른 형제들을 도와주어야 할 현실적인 필요성이 발생했을 경우에도 오직 한 가지 골프채만을 고집하게 될 것입니다.  요지는 말씀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방식에 대한 편견을 깨고 그분의 나타나심을 환영하는 가운데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Jack R. Taylor의 말을 인용한다면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이 아닌 죽은 말씀만을 강조하는 사람들, 특히 성령의 은사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이지 성령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의 저자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수십 년 동안 방언을 하다가 거짓방언을 미화하는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방언은 성경의 방언과 무관하다고 확신하며 수련회에서 받았던 방언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은사에는 방언기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누군가 방언을 하면 사탄에게 속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 분이 영분별의 은사가 있거나 축귀사역에 경험이 있으면 귀신방언이 어떤 것인지 쉽게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 2 때 방언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 분별력 없이 귀신이 주는 방언을 성령이 주시는 방언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분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방언 이야기가 전혀 없었던 학생회 수양회에서 마지막 날 혼자 산 속 바위 옆에서 기도하다가 방언을 했으므로 ‘내가 받은 방언은 성령이 주신 참 방언이다’라고 굳게 믿었다.  이 글을 읽고 생각나는 것은 교육전도사 시절에 중고등부 학생들이 수련회에 가면 믿음도 없는 상태에서 겁없이 혼자서 기도하다가 귀신이 들리거나 헛소리하는 아이들을 많이 보아온 나로서는 처음부터 이 분이 정상적인 방언을 받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William Sargent가 『Battle for the Mind』에서 이야기 했듯이 자기도취에 빠져 심리적인 현상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성령이 주신 방언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 분 말대로 “성령의 은사에는 방언기도가 없는가?, 그리고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은 사탄에게 속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많은 은사들을 나열하면서 그 중에 방언과 방언통역함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고전 12:10), 이 방언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송이며(고전 14:2, 15, 28), 통역이 없으면 골방에서 개인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덕을 세울 수는 있지만(고전 14:3),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고전 14:11-13), 마음이 아닌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로(고전 14:14-15), 얼마든지 자제력이 가능하고(고전 14:27-28), 모든 신자가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고전 12:30),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말합니다(고전 14:39).  달리 말하면 신약정경이 완성됐다고 해서 은사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일시적으로 주신 것들 중 하나가 방언의 은사라는 것입니다(고전 13:10).  더 나아가 고린도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바울이 그들을 향해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사람 중에( 10:9), 누군가 방언을 한다면 그 사람 안에 역사하시는 분은 귀신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고전 12:7). 

 

그러나 이창모 목사는 현대교회의 방언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는 사탄에게 속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속단합니다여기서 나에 대한 신앙고백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셨고(17:5),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 1:3)에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2:7).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고( 28:19), 특별히 제2위 성자(聖子)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명칭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었는데( 3:22), 이 명칭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성자의 신분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하는 모든 구원받은 자의 구주되심을 보여줍니다( 5:31). 또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여호와’란 명칭은 오직 절대자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고유명사이지만( 3:14), 이 명칭이 그리스도에게도 직접 사용된 것은( 26:4), 이는 예수님께서 영원 자존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시고( 22:13),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언약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처음과 마지막’이시며( 1:17), ‘알파와 오메가’이신 구속사역을 완성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9:12).  그렇다면 이러한 진솔하게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무조건 방언기도를 한다고 해서 사탄에게 철저하게 지배를 받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고 싶은 것은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스스로 헷갈려 알지도 못하는 헬라어와 영어를 들먹거리고 횡성수설 하며 말에 핵심이 없는 것을 볼 때 방언기도를 하는 나로서는 이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사실 기도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나의 연약함과 초라함, 그리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 안타까움에 대한 회개가 알아듣는 기도보다 방언으로 기도할 때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마귀의 주술에 걸렸거나 귀신에게 미혹을 당해 옹알거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은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목사들 중에 누가 방언에 대해 말만하면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로 병적인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단이 아닌 이상 성경이 진리의 말씀인 것을 부정하는 이단적 사상을 가진 정신나간 목회자는 없습니다.  반쪽짜리 메마른 말씀(골프채 하나)만을 강조하면서 방언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은 성경은 복음을 통해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1:16),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다 고치셨다라고 증거하고 있는데( 8:16), 왜 하나님의 말씀은 지겹도록(그토록) 강조하면서 교회 안에 귀신에게 눌리고 병든 자들이 많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4:18).  사족이긴 하지만 가 그것을 알리가 없겠죠?  자기가 게거품을 물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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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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