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17.10.31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도들의 승리와 영광의 예표가 될 수 있는가?
  2. 2017.10.28 기적이 필요한 이유
  3. 2017.10.27 어떤 공식이 아닙니다
  4. 2017.10.26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 가지신 세 가지 직임은 무엇인가?
  5. 2017.10.25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을 지니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6. 2017.10.24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도들이 하늘나라를 소망해야 한다는 근거가 되는가?
  7. 2017.10.21 이단사냥꾼의 말로
  8. 2017.10.20 듣기의 달인이 되라
  9. 2017.10.19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10. 2017.10.18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우리의 믿음에 어떤 유익이 있는가?
  11. 2017.10.17 승천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높아지신 신분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12. 2017.10.14 온전한 것이 올 때
  13. 2017.10.13 쉽다고 생각하는가?
  14. 2017.10.12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자격 요건을 종합하여 볼 때 중보자는 어떠한 존재이어야 하는가?
  15. 2017.10.11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6. 2017.10.10 그리스도께서는 왜 이 세상에 계속 계시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셨는가?
  17. 2017.10.07 한 번 구원 받은 사람
  18. 2017.10.06 진짜와 가짜
  19. 2017.10.05 자격 요건의 하나가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20. 2017.10.04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임을 부인하는 것에는 어떤 위험이 있는가?
  21. 2017.10.03 그리스도의 승천은 하늘나라가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완전히 성취하시고(요 19:30, 히 10:12), 하늘에 오르셨다는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행 1:11)은 주님을 믿으므로 구속에 동참하는 성도의 승리를 나타냅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승천하시기 전에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성도들을 영접하여 주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4:3).  따라서 그리스도의 승천은 재림의 전 단계이며 재림 이후에  성도들이 주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의 시민권자( 3:20)인 피조물로서는 너무나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먼저 하늘 나라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영광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오래 전 어느 동영상을 통해 하늘에서 보석이 떨어지고 손바닥과 얼굴에 금가루가 생기면서 아말감으로 메운 썩은 이가 금니로 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두고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는데 주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현상은 비성경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마귀가 인간의 영혼을 미혹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반대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 중에 간혹  자신의 이를 금니로 변화시킬 수 있든지 손 안에 금가루를 뿌려주고 그것이 금인지 아닌지 성분검사를 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참고인 입회하에 어떤 조건으로 내기할 것을 제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비판할 근거를 찾기 위해 기적을 구하는 회의적인 사람에게는 평생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적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헤롯이 기적을 보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그의 질문조차 대답하지 않으신 것처럼( 23:8),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기드온처럼 기적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책망하지 않지만( 6), 마술사 시몬( 8:18-24)이나 바리새인처럼 기적을 구할 때 책망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16:1-4).  여기서 비판적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권사나 서리집사라는 직분이 성경적인가?”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일학교나 주보, 혹은 설교하기 전에 종치는 것이 성경에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금니나 금가루 현상을 바라볼 때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라는 의문보다는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기적을 통해 무슨 일을 행하실까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내에 일부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예배 중에 무슨 특별한 기적과 현상들이 나타나면 자신만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해서 놀라운 표적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런 과대망상증에 걸린 말씀에 깊이가 없는 영이 잘못된 사람들이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금니나 금가루와 같은 것은 하나의 표적일 뿐이지(고전 1:22),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기에다가 어떤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3:16)과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벧전 2:24).  이보다 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초자연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왜 이러한 기적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처럼 한 번도 기적을 체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고( 5:37), 다른 하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기적의 은사들도 사라졌다고 확고하게 믿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기적을 볼 수 없다면 우리가 확실히 유도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단지 우리가 기적을 체험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기적의 은사를 철회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고백했던 야곱과 같을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28:16).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주님은 자신이 행하신 기적들에서 교훈을 유도해 내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 그것이 말랐을 때 제자들이 이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 기적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21:18-22).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기적에 대한 응답 역시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 위해 기적들을 행하시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구원적 목적이라고 부릅니다.  이 구원적 목적들을 다시 세 가지의 범주로 나누면 첫째,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고, 둘째는 불신자 전도를 위해 기적을 행하시며, 마지막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확증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기적적으로 고기를 잡게 하셨을 때 그 기적은 베드로 자신의 죄성을 깨닫게 했을 뿐 아니라 그를 회개하도록 이끌었습니다( 5:1-11).  사실 시몬은 장모가 병에서 고침받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고( 4:38-39), 주님의 가르침도 이미 들은 적이 있었지만( 5:3), 그 분의 말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획량은 자신의 삶에 직접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기적은 그에게 있어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로 인해 그분 안에 내재한 거룩하심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고백했습니다.

 

또한 기적은 전도의 문을 열 때 사용 되었는데( 5:20), 복음서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기적이 일어난 후에 그 기적에 대한 소문은 온 땅에 퍼졌고( 9:26),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말씀 듣기를 원했다고 말합니다( 9:31, 5:15, 4:30, 42, 6:2, 12:9-11, 17-19).  이와 동일한 일이 빌립의 사역 속에서도 일어났고( 8:6), 베드로가 중풍병자 애니아를 일으켰을 때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으며( 9:32-35), 도르가를 죽음에서 살려냈을 때에도 동일한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9:42).  더 나아가 기적은 복음의 메시지를 확증해 주었는데( 5:36), 주님께서도 친히 자신의 기적들을 확증하는 가치에 직접적으로 호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제자들에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기적들을 보이면서너희가 나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내가 행하는 기적들의 증거에 근거해서 믿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14:11).  사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실제로 믿음으로 이끌어 내기도 했지만( 11:45), 이런 기적이 항상 믿음으로 인도한다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생기게 했으나( 12:11), 또 다른 사람들, 즉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 표적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주님을 믿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11:48), 정작 자신들은 예수님을 믿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주님과 나사로를 같이 죽일 것인가에 대해 살인을 공모하기도 했습니다( 11:53, 12:10).

 

이렇게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시고(1:29-34), 사도들( 3:1-10)과 다른 제자들이 행한 기적들이( 8:4-8), 1세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를 확증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면 이러한 기적들은 오늘날에도 동일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12:28).  달리 말하면 성령에 힘입어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증하는 기능을 가졌었다면 왜 그것이 오늘날에는 그러한 기능을 갖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런 기적들을 체험해 본적이 없는 잘못 가르치는 목사들에 의해서 혹은 신학교에서 잘못 배운 조직신학에 의해 강요된 한계들 때문에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기적과 하나님 나라는 뗄 수 없듯이 기적을 확증하는 가치에 있어 지리적이거나 연대기적인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하고, 신학적으로 어떤 궤변을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성경도 메시야가 영적이고 육체적인 치유가 행해질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적이 있는데( 35:6-7, 61:1), 이것은 다가오는 메시야의 나라는 나이, 성별, 지위에 상관없이 요엘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짐은 결국 꿈과 환상과 예언하는 것이( 2:28-32), 어느 한 세대의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어 있는 구약시대와 달리 이런 기적적인 현상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주의 백성들 전체에 걸쳐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뜻인 것입니다.

'논쟁거리 > 기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적을 구할 때 주님은 기뻐하시는가?  (0) 2017.09.30
기적을 구하는 것은 잘못인가?  (0) 2017.07.22
기적은 사도들만 행한 것인가?  (0) 2017.04.29
기적의 은사  (0) 2017.02.1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하나님의 음성을 아는 것의 열쇠는 어떤 공식이 아닙니다.

어떤 방법이라서 당신이 따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아는 것은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합니다( 8:47).

당신은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올바른 공식도 옳은 방법은 아닙니다.

 

모세의 경우와 같이 불붙는 떨기나무를 본 사람이 또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공식을 숙련공처럼 사용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당신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갖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오직 그분만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어떤 방법이나 공식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당신은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정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그것이 25년이 되더라도 말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고도 받은 것처럼 얘기하면

당신은 거짓 선지자로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18:21-22).

구약성경에서 거짓 선지자에 대한 벌은 사형이었습니다( 18:20).

그것은 분명히 아주 무서운 벌입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받는 일을 가볍게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친밀한 관계를 갖기 원하십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할 때,

하나님은 오직 당신이 그분만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님의 음성 듣기를 배우고

그분의 뜻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당신이 들을 수 있는 열쇠입니다.

'평신도 훈련 > 경험하는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점을 찾기 바랍니다  (0) 2018.04.06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0) 2017.12.22
종을 통해 일하십니다  (0) 2017.08.17
인생을 조정해야 합니다  (0) 2017.05.03
순종할수록 더 알게 됩니다  (0) 2017.01.1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첫째는 선지직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하십니다( 13:57, 4:24).  둘째는 제사직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사람들의 요구를 대신 간구드리는 제사장이 역할과 희생 제물의 역할을 수행하십니다( 4:14, 5:5).  셋째는 왕직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물과 성도들을 통치하는 권세를 위임 받아 다스리는 역할을 수행하십니다( 16:28).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이는 예수님께서 신()으로서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1:18).  

다시 말하면 이것은 나사렛 예수께서( 1:46), 바로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1:1-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도들이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궁극적인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함을 교훈합니다(고후 5:1-2).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이 지상에서 다윗 왕국을 재건하여야 할 메시야로 보았으나( 1:6), 그리스도께서는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고( 18:36), 오히려 이 세상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으셨으며 마침내 하늘나라로 가셨던 것입니다(행 1:11).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자 하신 것이 이 세상의 질서 회복을 통한 이상 국가의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므로 완전한 의로움과 사랑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성도들 마음 가운데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12:28).  그러나 완전하게는 장차 천국 즉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질 것인 바( 13:30, 38-43), 성도들은 이미 천국 시민권을 가진 자임을 확신하고( 3:20), 이 땅에서 비록 고난이 있을 것이나(롬 8:17), 이를 극복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는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4:1-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정치에 관심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최순실 게이트 국정농단 2차 청문회를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되었는데, 그때 인상 깊었던 것은 검사출신 김경진 의원이 김기춘을 향해 “당신은 죽어서 천국가기는 힘들 것이다”라는 말을 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김기춘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찾아 보았는데, 이 분은 유신헌법의 초안자로서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 세워 그의 가족들에게 평생 고통을 안겨다 준 인물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거쳐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올랐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조작의 달인이었고 무고한 시민을 하루 아침에 간첩으로 만들어 내는 탁월한 기술을 소유한 사람이었는데,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40년 만에 재심 신청자 모두가 무죄판결을 받은 재일교포(학생들) 간첩단 사건을 들수 있습니다.  이 조작된 사건을 통해 피해자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40년 동안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생활해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계 내에서도 허위 사실을 진실인양 주장하기 위해 교묘하게 왜곡하고 거짓으로 조작하여 교회와 개인을 공격하는 이단 제조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문제는 누가 진짜 이단 연구가이고 가짜 이단 연구가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전문성과 자질이 검증되지 않은 사이비 이단 연구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이 현실입니다.  이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보면 한결 같이 돈에 관련되어 있고 양심이 화인 맞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종교의 발행인이며 이단 감별사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故 탁명환 소장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 교회에 만연한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들에 대한 문제점들을 과감하게 파헤쳐 피해를 막은 공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반면 일련의 부도덕한 행동들이나 불의와 타협한 전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평가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이 분은 고소/고발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한국 개신교 역사상 목사와 장로 100 여명 이상을 명예훼손 혐의로 집단 고소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연구 초기와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어떤 교회로부터 경제적 지원이나 협조가 없으면 그 교회를 이단/사이비로 몰아가기 위해 기사와 사진들을 조작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걸려든 사람이 지금 윤리와 도덕적 문제로 심하게 몸살을 앓고 있는 성락교회의 김기동 목사와 통일교 사과문 게재로 인해 후원을 중단한 대성교회(현 평강제일교회)의 박윤식 목사라고 합니다.  여기서 탁 소장이 이단/사이비 종교 연구가로서의 자질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결정적인 증거는 이미 세간에 알려진 대로 박윤식 목사를 불륜으로 몰아가기 위해 사진을 합성하여 사용한 사건입니다.  그는 심상용 목사의 책 제목처럼 마피아적 목사이며 삼위일체 삼신론을 내세워 자신이 속한 총회에서까지 외면당한 최삼경 목사와 함께 박윤식 목사가 L.A부흥회를 가서 세 명의 여신도들과 찍은 사진을 두 명의 여신도와 찍은 것처럼 사진을 합성해서 불륜으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보도된 자료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이 이단 제조술이 빛을 발한 대표적인 사건은 1991년 「목회와 신학」 2월호에서 ‘대성교회 이단 시비의 초점’ 이란 제하의 글을 통해 통일교 출신인 변찬린이 주장했던 “하와가 뱀과 성관계를 맺어 가인을 낳았다”라고 말한 내용을 박윤식 목사가 말했다고 백퍼센트 허위 거짓으로 조작하여 기사로 실은 것입니다.  사실 삼신론월경잉태설을 주장하다가 한기총으로부터 가장 악한 이단 사상을 가진 자로 판결 받은 최 목사는 2008 7 3일 서울고등법원 406호 법정 증인 심문 과정에서 "원고 박윤식이 직접적으로 하와가 뱀과 성관계를 맺어 가인을 낳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아니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재판 과정을 통해 '하와가 뱀과 성관계를 맺어 가인을 낳았다'라는 말은 박 목사를 모략하는 자들의 날조된 거짓말이었음이 만 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사실 탁 소장에 대한 이단 연구가로서의 자질 시비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1991 3 30일자 크리스챤 신문에 보도 되어 있듯이 당시 새문안 교회(김동익 목사)의 모든 신자들에게 배포된 사진을 통해 아는 것처럼 여자 문제에 대한 시비로 이어졌고 두 달 후 녹취록(탁 소장과 김모 여인의 전화통화 내용)이 교계에 유포되었지만 당사자인 그는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허위 조작극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그는 새문안 교회를 떠났지만 여자 문제에 대한 소문은 계속 교계에 맴돌았고 그것의 진실성 여부에 대한 확인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탁 소장 사후 검찰 측이 작성한 살해범 임홍천 씨에 대한 공소장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즉시 자신의 차로 되돌아가 뒤따라 출발하여 위 승용차를 미행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그곳에서 약 2Km 떨어진 같은 구() 중화3 307-1 소재 태릉시장 입구의 제일플라자빌딩 앞에 잠시 정차하여 ○○○은 내리고 탁명환 혼자 차를 운전하다가 하차하여 부근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는 다시 차를 운전하여 같은 구 묵2 249-2 소재 중랑경찰서 앞 노상에 이르러 성명 미상의 30대 여자를 조수석에 태워 같은 구 중화 2 326-33 소재 4층 건물의 2층에 있는 중국음식점 대왕각으로 들어가 약 1시간 30분 동안 머물다가 다시 나와 차를 운전하여 1Km 가량 떨어진 같은 구 중화3 332-28 앞 고수부지의 외진 곳으로 가서는 차를 세우고 위 여자와 함께 뚝 밑으로 내려가서 서로 포옹을 하고 애무하는 것을 보게 되자 소위 이단 사이비 종교를 척결한다는 의로운 사명감은 동인(탁 소장)이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에 불과할 뿐 사실은 비윤리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는 파렴치한이라는 생각에 동인을 살해할 뜻을 더욱 굳히고.... "  사실 임홍천의 살해 동기는 박윤식 목사의 비판하는 글을 보고 증오감이 깊어져 살해했다고 밝혀졌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분이 단 한 번의 휘들린 칼로 인해 급소를 맞아 과다출혈로 죽었는지 아니면 다발성 자창에 의한 죽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파트 근처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놓고 탁 소장을 좋게 평가한 사람들은 그를 순교자로 볼 것이고 반면에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은 그를 질 나쁜 인간으로 생각하면서 그의 죽음을 기뻐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비단 지나간 과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얼마 전 웨슬리에 대한 책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고 스스로 말한 정이철 목사(바른믿음)가 거의 교주(?)에 가까운 서철원 교수의 말을 무슨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듣고 웨슬리를 이단이라고 사악한 궤변을 늘어 놓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의 무지와 무식함이 드러났지만, 더 파렴치한 것은 자신이 써놓은 글의 출처 조차도 적어 놓지 않고 그것이 마치 웨슬리가 주장한 것처럼 왜곡시키는 것을 볼 때 양심이 화인을 맞지 않고서는 목사로서 할 수 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솔직하게 장기영 교수와 일면식은 없지만 이 분이 Facebook과 불로그를 통해 정중하게 사과를 요구하였으면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목회자의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그런데 장 교수에게 이제 더 이상 날을 세우고 싶지 않아 자제하고 조심하는 중입니다.”라고 답글을 써놓은 것을 볼 때 참으로 목사로서 자질를 의심할 따름입니다.  물론 정이철 이 분이 구요한 목사(글로리아타임스)에게 한 것처럼 공갈과 협박에 가까운 형사가 범인을 취조하듯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늘날 자칭 이단 감별사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이단을 바르게 연구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단 사냥질 하는 사람은 가룟유다처럼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입니다.  

'이단사냥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이비 이단제조자  (0) 2018.02.03
이단사냥꾼들  (0) 2016.06.04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소귀에 읽기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무어라 아무리 말을 해도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의 답답함을 담아내고 있는 말입니다.  혹시 우리는 지금 누군가에게 이런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대상일지 모릅니다.  타인의 말을 들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리더가 없습니다.

 

1. 마음으로 듣고 있는가?

누군가 이야기를 할 때 흥을 돋워 주고 장단을 잘 맞추어 주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격식을 갖출 필요가 없는 잡담에 있어서는 타인의 말을 듣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다지 경청의 기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생각과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이럴 때는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 여부가 그 사람과의 관계의 수준을 결정짓기 까지 합니다.  듣기 방법의 가장 이상적인 단계는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으로 듣는 것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상대방을 위해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나의 척도가 아닌 상대방의 척도로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척도란 그 사람 입장에서의 사고방식이나 사물을 보는 관점을 가리킵니다.  자신을 위해 듣는 사람은 자신의 척도만을 가지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오로지저 사람이 지금 하는 말이 내 척도에 맞는 거야, 안 맞는 거야?”라는 생각에만 집착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위해 듣는 사람은 말하는 이의 척도를 가지고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해 집중합니다.  결국 상대방을 위해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상대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을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상대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귀만 아니라 마음도 동원해야 합니다.  “정말 저 사람이 하고자 말이 무엇일까? 어떤 심정으로 이 말을 하고 있을까?”라는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2. 듣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

마음을 대해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말하는 상대로 하여금정말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몸의 방향, 높이, 그리고 각도가 그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신뢰할 수 있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얼굴을 상대 쪽으로 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상대가 열심히 말을 하고 있는데 당신은 다른 쪽에 시선을 두고 있다면 상대는 당신에게저 사람은 내 얘기를 듣지 않는구나!” 라는 좋지 않은 인상을 주고 맙니다.  다음으로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얼굴의 높이를 상대와 같은 눈높이에 맞추어야 합니다.  말하는 이보다 눈높이가 너무 높으면 강압적인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눈높이가 너무 낮으면말해서 뭐하나!” 라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상대 쪽으로 약간 기울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자세는 서로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만약 턱하니 뒤로 으스대는 자세로 듣고 있다면 상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때 닫힌 자세 팔짱을 낀다거나 다리를 꼰다거나 하지 말고 열린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일부러 과장된 미소를 지을 필요는 없지만, 만약 당신의 표정이 경직되어 있거나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면 상대는 분명 흉금을 터놓고 말을 꺼내기 힘듭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표정이 최상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시선입니다.  시선이 우왕좌왕하면 상대는 당신에게 좋은 인상을 갖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너무 똑바로 응시한다면 오히려 상대는 말을 꺼내기조차 힘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따뜻한 눈길입니다.  당신이 상대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듣고 있다는 것을 얼마나 온몸으로 표시할 수 있느냐가 포인트입니다.  근육을 단련하듯 경청에도 단련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지만 상대를 향한 따뜻한 마음과 배려하는 자세가 습관이 되면 우리도 듣기의 달인이 될 수 있습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11:27, 17:1),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의 법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간의 죄를 담당하사( 20:28),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나심으로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습니다( 2:14-15).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시되(2:5-8), 전혀 죄가 없으신 인간이신 것입니다( 4:15).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라’(딤전 2:5)고 했던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첫째는, 확고한 믿음 위에 서게 됩니다.  사실 성경에는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이미 반석 위에 선 굳건한 믿음인 것입니다(11:6).  둘째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5:8).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고난 당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2:14-18).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수모를 자원하셨던 것입니다( 12:2).  셋째는, 이 세상에서 당하는 우리의 고난에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고난 당하신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4:15), 우리가 시험받을 때 능히 도우시므로( 2:18),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게 됩니다.  죄인된 우리는 덧 없는 인생을 한탄하며 인간 됨의 가치를 소홀히 여겨왔습니다( 90:3-10).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목적이 되어야 하지만 수단의 가치로 취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스스로 인간이 되심으로( 2:7), 인간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가장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16:2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믿음이 없고 패역하며 죄가 넘쳐나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고( 17:17),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본래의 신분을 회복하여 더 이상 죄가 없는 하늘나라에 거하시게 되는 것은 분명 높아지신 신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천국 시민권을 가진 성도들이( 3:20), 비록 현재에는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으나 장차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될 것을 보여 준다는 면에서도( 22:30),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 높아지게 될 것을 반영하는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신분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바울은 교회 내에서 은사의 다양성에 대해 육체의 비유를 통해 말하고 있는데(고전 12:12-31), 그의 요점은 한 육체의 모든 지체들이 몸의 건강을 위하여 모두 필요한 것처럼 모든 은사들은 교회의 건강을 위하여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면서(고전 12:7),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7).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성령의 은사들을 주님의 다시 오심과 연결시켜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당시의 고린도교회 신자들과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은사들이 교회를 성숙하게 세워 나아가는 데 있어 귀중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4:11-13).  또한 바울은 단순한 암시를 넘어 성령의 은사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철회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면서 현재 예언(고전 12:10)과 방언(고전 12:10), 그리고 지식(고전 12:8)은 부분적이고 불안전하지만(고전 13:8-9), 온전한 것이 와서 그것들을 대처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고전 13:10).  그러면서 바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장성한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생각과 말을 버려야 한다는 비유를 들면서(고전 13:11), 현재 우리의 지식과 이해는 직접적이지 못하고 불완전하지만 언젠가는 완전해지고 직접적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3:12).  결론부터 말하자면 은사들은 교회를 충분하고 완전한 완성으로 이끌기 위하여 주어졌고 이것이 완성되었을 때 은사들은 더 이상 필요치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논쟁이 되는 구절인 ‘온전한 것이 올 때’란 언제이냐는 것입니다(고전 13:10).  이것에 대해 Robert L. Reymond는 성령의 은사계속설은 계시 은사들의 중지라는 장로교 교리와 배치된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후 『What about Continuing Revelations and Miracles in the Presbyterian Church Today』에서 온전한 것은 계시과정의 결과인 신약정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만들어 내는 ’완성된 계시의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성경의 정경이 완성될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미성숙하고 불안전의 단계에서 사용했던 계시의 수단들인 예언과 방언과 지식은 중지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Richard Gaffin은 계시 은사의 종결을 주장하지만 고린도전서 13 8-13절에 대한 해석에서는 Reymond와 다른 입장을 취하였는데, 그는 『Perspective on Pentecost』에서 ‘온전한 것’과 ‘그 때’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주님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말하면서 온전한 것을 신약정경의 완성을 가리킨다는 입장은 성경 주해상 신비성이 없다고 반박합니다.  그러면서 예언과 방언의 중지 시기는 이 본문에 관한한 “하나의 열려진 문제”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언과 방언이 교회 창설적 성격을 띤 것으로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Gaffin이지만, 만약 그의 말처럼 ‘온전한 것이 올 때’가 주님의 재림을 가리킨다면 예언이나 방언의 은사들은 그 때에야 중단될 것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그 때까지는 이 은사들이 교회 시대를 통해 지속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D. A. Carson 역시 ‘온전한 것’을 재림과 직결하면서 이것을 정경완성과 연관시키는 해석에 대해 『Showing the Spirit: A Theological Exposition of 1 Corinthians, 12-14 』에서 다음과 같이 정당한 비판을 가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한 것을 성경기록의 종료와 관련하여 생각할 것을 기대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구절이다. 바울은 ‘그 때’에 전지의 단계에 이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 때의 그의 지식은 하나님이 현재 자기를 아는 지식을 닮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의 것이 될 때에는 예언, 지식, 방언 등 은사들은 사라질 것이다. 거울로 보는 것과 대면하여 보는 것은 70인경에서는 거의 ‘신현’에 대한 공식이므로( 32:30, 6:22), 그것은 거의 확실하게 재림으로 도래될 새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정경 이전의 교회의 미숙과 정경 이후 교회의 성숙을 11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유아와 성인으로 대비하는 것은 역사적인 넌센스다.  이렇게 볼 때  Gordon Fee가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ICNT』에서 말한대로 그리스도가 오실 때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최종 목적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 시점에는 현시대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은사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가 정경 종료와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때 현시대적 본질을 가진 은사들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을 신약성경 정경의 완성으로 보는 입장을 고집한다면 그 문맥에서 바울의 의도와 상충될 것이고, 만일 주후 90년경을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이 기록된 때로 본다면 성경 저술의 완성은 바울이 주후 55년 고린도전서를 기록하고 나서 약 35년 후의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Wayne Grudem의 말을 인용 한다면 다음과 같은 논리가 설득력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은 떨어지지 아니할 줄로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35년 이상 지속될 줄을 알기 때문이다.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맥을 보면 바울은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을 비교하면서 사랑이 영원토록 계속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주님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그분을 완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누가 진정으로 주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바울의 지식과 경험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주님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벧전 1:8).  Lloyd Jones도 『Prove All Things』에서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볼 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는 당신과 내가 진리에 관해 우리가 바울을 포함한 다른 사도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알거나 월등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입장을 묘사하는 유일한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말이다.

 

현재 우리의 마음은 거짓되고 부패해 있지만( 17:9),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그는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죄의 흔적과 사망과 아픈 것을 제거하실 것이고( 21:4),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며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여기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여러 번 사용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말로( 32:30, 33:11, 5:4, 34:10, 6:22, 20:35), 예수님을 대면하여 보게 될 때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고(요일 3:2), ‘그 때에는’은 10절에서 말한 ‘온전한 것이 올 때’를 가리키는데, 이 말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신자들은 예수님처럼 전지해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보나 오해 없이 주님을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 영적인 은사들이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시대 전반에 걸쳐 지속되고 활용되며 교회의 유익(고전 12:7)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4:12),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일시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2장과 13, 그리고 14장에 나오는 모든 은사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까지만 필요하고(고전 13:10), 그 이후에는 쓸모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간추려 요약하면 사도시대가 끝났고 신약정경이 완성됐다고 해서 이 은사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 26:64), 온전치 못한 것들인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전혀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난해한 문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0) 2018.01.06
성령을 받은 증거  (0) 2017.08.12
금단의 열매, 선악과  (0) 2017.05.0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거룩한 생활에 대한 가지 오해는

그것이 쉬운 승리, 낙승이라는 착각이다.

괴로움이 가득한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삶을 사셨던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쉽다고 말하는 사람은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이거나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쉽다는 인식을 퍼뜨리는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사탄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쉽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점검하는 다음의 7가지 테스트를 해보라.

1. 원수가 굶주릴 먹일 있는가? ( 12:20)

2. 싫어하는 사람을 집으로 초대할 있는가? ( 14:12-14)

3. 남을 위해 리를 걸어갈 있는가? ( 5:14)

4. 상대방이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하는가? ( 2:3)

5. 다른 사람의 문제와 형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가? ( 7:12)

6.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그냥 지나친 적이 없는가? ( 25:35-36)

7.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가? ( 8:34)

'광야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하려면 거룩한 삶을 살라  (0) 2018.01.19
기다림이 필요하다  (0) 2017.12.15
무지가 성령의 불을 끌 수 있다  (0) 2017.08.10
둘 중에 하나이다  (2) 2017.06.08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라  (0) 2017.03.1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어야 하되 반드시 무죄한 인간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아담의 혈통으로나 자연인 가운데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의 자격을 갖춘 존재가 없습니다( 3:23).  그러나 한 특이한 방법,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의 몸을 통해 나심으로써( 1:18-23), 무죄한 한 인간이 계시니( 4:15), 그가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딤전 2: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만 계셨다면 인간 구원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인간의 대속적 죽음이 있어야 하는데, 인류의 시조 아담의 후손은 모두 죄인이므로( 5:12), 인간 구원을 위한 대속적 죽음을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원래 하나님이셨으나( 1:1),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죄 없는 인간이며( 4:15), 온전한 대속의 제물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10:12).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셨으나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2:6-8), 자기 생명을 대속의 제물(마 20:28)로 내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에  감격할 수 밖에 없습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인 구속사역을 완전히 이루셨으므로( 19:28-30), 더 이상 이 세상에 머무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땅에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후 장차 구원받게 될 성도들이 거할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기 위하여 하늘로 오르신 것입니다( 14:1-3).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기 위함이었고(행 4:12), 하늘로 오르신 것도 성도들에게 더 큰 은총을 베푸시기 위함이었습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고린도전서 8-10장에 보면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것이 그 우상 예배에 참여한 것이 되지 않는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음식 예비와 특별한 유대인의 절기 준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 어떤 이방인들은 특별한 날이나 음식 예비에 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내놓는 음식이 시장에서 팔리기 전에 우상에게 바친 것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고기들이 이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것은 매우 특별한 관심 사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로마서 14장에서 나오는데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이슈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는 음식 규제와 다른 하나는 특별한 날의 준수 문제였는데 사실 음식과 날의 준수는 할례 문제 다음으로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가장 큰 민감한 이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대화의 핵심 주제로 삼고 시도 때도 없이 밤낮 음식 규제인 고기 먹는 문제만을 가지고 교회를 나누고 서로 정죄하며 비판하는 가운데 싸웠습니다.  이렇게 만날 때마다 먹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자 사도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이런 말로 일깨워 줍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14:4).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남깁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오늘날에는 그 이슈가 다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는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데, 교회는 성경이 분명히 금하고 있는 죄들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되지만(고전 6:9-10), 추가 규범이나 규칙과 제도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법과 똑같은 비중을 두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 중에 간혹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개인적인 견해나 취향 혹은 문화적인 선입관에 근거하여 자신의 도덕적인 판단을 쉽게 내리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 간에 분쟁과 분열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면 중세에는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물에 파리가 빠지면 물이 오염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파리가 거룩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이 문제를 가지고 밤낮으로 논쟁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신앙의 유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문제만을 발생케 하는 내용을 가지고 헛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구원의 절대적이지 않는 이슈(성령세례, 칭의, 예정, 은사들, 천년왕국, 기름부음, 삼위일체)들을 가지고 거의 예외가 없이 자신의 신학과 신앙으로 고린도교회나 로마교회처럼 서로 비방하는데 온 시간을 보냅니다.  솔직하게 말해 이러한 논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주로 복음 전도에는 관심이 없고 편파적이고 단편적인 메마른 성경지식을 가진 목사와 신학자들인데, ’교리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에 대해 성경적인 부분에서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쓸모 없는 교리는 개나 돼지에게 던져주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택함 받은 사람의 믿음이나 선행에 대한 예지와 무관하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무조전적으로 선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중예정론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오직 택자들만을 위한 제한속죄인지 혹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충족하지만 제한된 수의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는 무제한속죄인지에 대해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의견 일치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6세기 스위스의 종교개혁자인 Calvin의 사상에 기원을 둔 강성 칼빈주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택자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한 번 구원 받은 사람”, 즉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19 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침례교의 다수의 견해가 되었던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전적인 타락과 견인론에 있어 완화된 견해를 수용하면서 칼빈주의 5대 논점TULIP의 다섯 가지 조항 중 가운데에 놓인 세 가지 논점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강성 칼빈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를 재해석합니다.  이들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올바른 확신과 안전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이 거져 주시는 은혜에 저항할 수 있는 회심 이전의 인간의 자유와,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개인의 영원한 안전(견인)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와 달리 알미니안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에 대해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될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이미 예정된 길을 따라가면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조종을 받는 로봇이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기에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믿음을 지키지 않는다면 타락하여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점에 대해 웨슬리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점을 조금 지적한다면 웨슬리주의자들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불신앙이나 고백하지 않는 죄, 즉 의식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짓는 죄로  인해 얼마든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배교는 갱신된 회개를 통해 다시 치료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신자가 죄로 인해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배교를 나타내는 결단적인 행위, 즉 불신앙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저버릴 때만 구원이 상실된다고 강조하면서 배교는 다시 회복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양쪽 학파들 모두 자신들의 논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요약하면 강성 칼빈주의자들과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 보존됨을 기뻐하고, 알미니안주의자들과 웨슬리주의자들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사실 견인(안전) 교리가 구원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겁게 논쟁을 일으킨 주제이기 때문에 오늘날 이러한 해석의 난점은 신학자와 목회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논쟁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 간의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견인 교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이지 피구원자인 인간이 확실하게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정권은 요나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 2:9), 하나님에 속한 비밀이기에 누가 예정되었거나 내적부르심을 입었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개혁주의 신학자 R. C. Sproul이 『Willing to Believe: The Controversy over Free Will』에서 한 말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자 사이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논쟁 속에 엉뚱한 그룹들이 종종 서로를 잘못 설명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들어 놓고 잘못된 이해를 근거 삼아 돈키호테들처럼 논쟁의 칼을 휘둘러 댄다. 나는 칼빈주의자로서 종종 그것이 진정 칼빈주의를 묘사한 것이라면 기꺼이 동의하겠지만 그것과 무관하기에 동의할 수 없어 그들로부터 비판을 듣는다. 따라서 나는 알미니안주의를 따르는 사람들도 피할 수 없는 동일한 상황을 겪으면서 똑같이 당혹스러워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 마디로 칼빈주의 신학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교리적 논쟁을 일삼는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스펙트럼과 해석하는 방법론에 있어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쟁거리 > 성도의 견인(안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까지 믿는 자  (0) 2018.06.23
거듭난 신자도 타락할 수 있는가?  (0) 2018.03.03
칼빈주의 v 웨슬리주의  (0) 2017.11.18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영화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장군과 타냐의 대화 장면이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린다.

그때 장군이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하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한다.

사실은 아버지가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때 장군은 타냐에게 말한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 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거야.”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는다.

진짜 신과 가짜 신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좇고 있는 세상 명예의 신이나 물질의 신은

조만감에 우리의 손을 놓을 것이다.

 

평생이라는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다 기울였던

그 안개 같은 우리의 우상들은

코마로프가 불붙는 거리에서 어린 타냐를 떼어놓았듯이

얼마 뒤에 우리를 배반할 것이다.

그리고 허무한 우상들을 좇던 우리는 외로운 패배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그 가짜 신의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E. 스탠리 존스

'평신도 훈련 >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연 속에 계신 하나님  (0) 2018.03.30
미신과 신앙  (0) 2018.01.05
의심에 대한 대답  (0) 2017.08.09
믿음과 이성과의 관계  (0) 2017.07.05
불협화음  (0) 2017.04.1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 직후에 세우신 구속의 법을 믿고 회개하여 구원을얻기 위해서는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의 보증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피조물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법과 의지에 대하여 완전하게 보증할 만한 존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첫쩨, 성경이 영감(靈感) 되었으며 진실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리스도는 육체로 오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4:2).  둘째, 적그리스도의 영에 미혹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경고했습니다(요일 4:3).  셋째,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벗어나게 하신 것은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아니시라면 대속의 죽음은 불가능한 것이고 우리는 죄 가운데 멸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넷째, 기독교 존립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들은 거의 모두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육신을 부인되면 기독교 교리는 근본부터 와해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한 인간의 육체를 취하셨다는 사실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통하여 하늘나라가 확실하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1:6).  만일 하늘나라가 없다면 여러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리워 가신 그리스도는 어디로 가셨으며 지금 어디에 머물러 계실까요?( 2:34-35)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하늘나라는 반드시 현실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45:18).  하지만 우리는 하늘나라가 우주 공간 어디에 있는지 알지는 못합니다.  그 때문에 하늘나라를 신자의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정신 세계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이 분명히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장소의 이동이므로 하늘나라도 하나의 장소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