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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1.04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생애의 빛 월간지를 발행하는 안식교 출신 손계문 목사, 구약의 율법적인 음식물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혼합율법주의자인 노우호 목사, 한국교회의 대안으로 목사가 없는 교회를 주창하면서 집사 직분을 늘 달고사는 신성남 집사,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방언할 줄을 모르면서 방언에 대해 많이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들이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를 어떻게 잘 아는 것처럼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의 말을 빌려 말하면 자신이 왜곡한 사실을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는 공상허언증에 걸린 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잡설(雜說)에 가깝고, 한국 속담으로 표현하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목사는 이미 논할 가치도 없는 영이 잘못된 사람들이지만, ‘랄랄라 현상과 방언장사라는 글을 통해 현대방언은 거의 가짜라고 주장하는 신 집사의 글입니다.  사실 시간이 아깝지만 이 분의 글을 10편 정도 읽어보는 가운데 한 결 같이 느끼는 것은 마음이 비틀어져서 그런지 아니면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인지 돈키호테처럼 교회개혁에 앞장 선 조폭(?)해결사 같이 쓴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나만 느끼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 분의 글을 읽다 보면 목이 곧고 눈에 할례를 받지 못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교회와 목사를 비판만 하려고 했지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골병든 글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비판적인 글을 계속 읽는다면 머지 않아 영혼이 병들고 믿음이 파선될 것입니다.   

 

“뜻 모를 이상한 말을 쏟아내며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교리를 주장하는 신흥종교 단체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되었다. 아주사 스트리트의 다 쓰러져 가는 건물 안에서 연일 집회가 열리고” 이 글은 1906 418일 수요일자 Los Angeles Times에 실린 기사로 The 100 Most Important Events in Christian History』란 책에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부정적인 언론보도는 오히려 사람들을 집회로 끌어들이는데 도움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침례교 목사 그것도 방언을 유난히 강조하다가 쫓겨난 William J. Seymou를 사용하여 아주사의 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방언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Stanley H. Frodsham은 『With Signs Following』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보거나 배워보지 못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용했고, 노르웨이의 학자이며 『성경문고』의 국제판 편집자인 Thoralf Gilbrant 1985년 세계 오순절 대회에서 이탈리어를 하나도 모르는 자신의 할머니가 유창한 이탈리어로 이탈리아 선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간증합니다.  물론 방언의 은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육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릴 것입니다(고전 1:14).  사실 오랜 세월에 걸쳐 방언은 지나치게 논란이 되어왔기 때문에 모든 은사들 가운데 방언만큼 가장 큰 관심을 끄는 은사도 없었고 반대 의견도 가장 많았던 은사이기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먼저 “오늘날 각종 방언 말함이 과연 성경적인가?(고전 12:10)라는 것에 대해 Gordon Fee는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방언은 사도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논란이 많은 것으로 바울의 논증 배후에는 고린도교인들이 특별히 방언과 방언통역을 선호했다는 것이 깔려있는데 바울이 말한 방언은 성령에 감동된 발언이고(고전 12:7), 화자(話者)가 몰아지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있으며(고전 14:27-28), 통역되지 않는 한 화자(고전 14:14)나 다른 청자(聽者)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이지만(고전 14:16),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언어이므로(고전 14:2, 14-15, 28), 통역되는 내용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하는 신비들이었다.”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Richard Gaffin과 Robert Reymond는 방언의 은사는 교회 창설적 성격을 띤 것으로 이미 중지된 계시은사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은사들이 계속된다고 할 때에 교회로 하여금 공상적인 각종 주장들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것 이외에 성경 교훈과의 모순을 유발한다는 문제를 지적합니다.  Anthony A. Hoekema 역시 Tongues and Spirit-baptism』에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외에 신약의 어떤 서신에도 방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방언이 교회 안에 계속될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고 AD 100년에서 1900년까지 교회사에 방언이 거의 전적으로 부재한 것은 하나님께서 방언을 교회 안에 계속 시키실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는 주장과 거의 양립될 없다.


그러나 Michael Green은 『I Believe in the Holy Spirit』에서 방언의 종료 문제에 관해 “성령은 교회 밀실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다. 사도시대가 끝났다고, 신약의 정경이 완성됐다고 해서 예언과 방언이 소멸된 것이 결코 아니다. 방언은 인간의 언어라기보다는 사람과 천사가 속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자유함 가운데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게 해주는 성령의 언어이다.”라고 말합니다.  D. A. Carson도 방언의 은사가 계속된다는 측면에서 방언 논쟁에 있어 관건되는 몇 가지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는데, 먼저 방언에 ecstasy(황홀경)이 포함되느냐는 여부에 대해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Walter J. Hollenweger는 『The Pentecostals』에서 정신이완이 고양된 상태에서의 뜨거운 방언과 화자(話者)가 정신적으로 깨어서 통제할 수 있는 상태인 '차가운 방언을 구분하여 전자는 ecstasy가 포함되고 후자는 ecstasy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는데, Carson은 현대의 압도적 다수의 방언하는 사람들이 차가운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의 방언이 '실제(외국어)의 언어'인가 혹은 인간 언어와 동일시 될 수 없는 언어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Carson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실제적인 언어들, 즉 사람들의 언어들이건 천사들의 언어들이건 간에 인식적인(cognitive) 언어들의 은사라고 말하며, 현대 방언에 대한 언어학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현대의 방언현상 수천 건을 테이프에 담아 분석한 언어학자들 간에 그것이 어떠한 인간 언어가 아닌 보편적인 합의가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학자들의 여러가지 견해가 있는 반면 주로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줄기차게 내세우는 말은 교회사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은 방언을 하지 않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사도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주후 4세기의 성경주석가였던 John Chrysostom은 방언은 이미 그쳤으며, 5세기의 Augustine도 방언은 초기의 표적으로 사라졌고,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도 은사들은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다고 가르쳤습니다.  Calvin 역시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 247문』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 즉 방언기도는 유희(遊戱)와 같은 것에 불과하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46절을 주해하면서 로마서 1129절의 말씀과 상반되게 하나님께서 과거에 허용하셨던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빼앗아 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강요』에서는 고린도전서 1415절 말씀을 가지고 또 다른 주장을 펼칩니다.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 사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외가 있다면 마음속에 감동되는 힘이 부족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압도적이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느낌이 격동된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제네바 교리문답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은 Calvin 자신도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Lloyd Jones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서 방언은 우리가 주도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원하는 대로 방언을 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방언'이 아니라 '심리적인 방언'이라고 말하면서 은사는 성령이 통제하는 것이지(고전 12:11), 사람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가짜와 진짜의 구분은 여기에 있고 모든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 좋은 것을 붙잡으라고 말합니다(살전 5:21).  이렇듯 오늘날 방언이 논쟁이 심한 것처럼 고린도교회의 문제도 방언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고(고전 14:23), 그 당시 그들은 방언을 최고로 생각했으며(고전 12:30), 누구나 다 방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고전 12:30), 자랑하려다가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은사 목록에서 의도적으로 방언을 마지막에 둔 것(고전 12:8-10)은 고린도교인들이 그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또한 그들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 방언보다는 예언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고전 14:5).  사실 방언은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정령주의자들도 흉내낼 수 있지만 우리 믿는 자에게 있어 방언의 은사를 주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에(고전 12:7), 성령이 하시는 일을 금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통역이 없는 방언을 회중 예배 때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고(고전 14:28), 교회 내에서 질서 있게 관리만 잘한다면(고전 14:40), 방언기도만큼 개인의 덕을 세워주는 소중하고 유익한 은사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아야 합니다(고전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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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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