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적 순종

행위 언약 2022. 2. 13. 18:56

오늘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이야기만 나오면 히스테리컬 반응을 보이는 병적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강조하면 이단이고 저주받을 자인 것처럼 공포감을 조성하는 목사들 말이다.  참으로 궁금한 것은 목사가 저주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저주하실까?(눅 6:27-29).  하나님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왜 하셨는지 모르겠다(마 5:43-44).  이것도 말세의 징조인가?(딤후 3:1-5).  하지만 그렇게 상대방을 싸잡아 비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은 주로 이단 사냥꾼과 목회에 관심이 없는 관종스러운 사람들이 하는 짓들이지 평신도들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주제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심고 거두는 법칙’이 성경에 종이가 남아 돌아서 기록된 글이 아니다(갈 6:7).  적(敵)을 많이 만들어 놓으면 항상 끝이 비참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능동적 순종을 거부하는 목사와 신학자를 이단사상을 가진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런 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생각한다.  그러나 『Synodicon in Gallia Reformata, or, the Acts, Decisions, Decrees, and Canons of those famous National Councils of the Reformed Churches in France / John Quick Volume 2』 책에 나와 있듯이, 프랑스 개혁 교회가 1603년 총회에서 Johannes Piscator의 주장을 다룰 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거부하거나 부인하는 자들에 대해 ‘혐오’을 표현하며 ‘오염된 자들’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왜 오염된 자들이라고 말을 했을까?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타 교단에 비해 논쟁과 분열의 역사가 하늘과 땅에 사무칠 정도로 많은 장로교단 안에는 능동적 순종 교리로 인해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다.  나는 이들이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이 다른 형제들의 믿음을 파괴시키는(딤후 2:17-18) 늙은 ‘교주(?) 신학’에 오염된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교회사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에 대한 논쟁은 기독교 역사 속에 여러 차례 있어 왔다.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가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신 것은 맞지만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 앞에 순결하고 완전한 제물이 되기 위해 드린 것이고, 우리를 속죄하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주장하다가 자신의 반쪽짜리 견해를 철회한 독일 루터파 신학자 Karg, Georg.  당시 종이 구하기도 힘든 시대에 왜 그리 많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불거진 그 유명한 사건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는 칭의의 공로적 원인이 될 수 없고, 오직 그분의 수동적 순종의 전가만이 칭의의 유일한 공로적 원인이라고 주장한 Piscator, Johannes.  그리고 Michael Servetus가 처형된 다음에 Calvin의 입장을 변호하고, 그의 신학을 계승한 후계자 Theodore Beza와의 논쟁이 그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날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신학자이고 Karg, Georg와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칭의는 오직 죄 용서’ 일뿐임을 강조하는 Federal Vision의 교부격인 Norman Shepherd.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바울신학에 대한 새 관점 학파들(NPP).  “인간과 맺으신 첫 언약은 하나의 행위 언약이었는데(갈 3:12), 생명은 거기서 아담에게 약속되었고, 그의 안에서 그의 자손에게 약속되었다(롬 10:5, 5:12-20), 그 조건은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이었다(창 2:17, 갈 3:10)”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행위 언약’에 대한 진술에 반발하면서 능동적 순종의 의가 전가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Federal Vision 열성분자들.  ‘망둥이가 뛰면 꼴뚜기도 뛴다’라는 속담처럼 행위 언약과 능동적 순종 교리는 신약의 가르침과 전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단 내의 패거리 목사들이 있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희생 제사를 드린 그분의 대속적 죽음의 필요성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만을 의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나도 인간의 죄 문제는 십자가의 죽음, 오직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피로 해결된다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롬 3:24, 5:9, 엡 2:13-14, 딛 2:14, 히 10:19, 요일 1:7).  물론 반쪽짜리 답이긴 하지만 말이다.      

솔직히 이런 예화까지 들어야 하는지 자괴감이 든다.  내가 짜장면을 좋아하면 다른 사람들도 짜장면을 좋아해야 하는가?  내가 짬뽕을 먹으면 짬뽕을 먹지 않는 사람들은 다 이상한 사람들인가?  이것은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미친 생각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금하고 있는 활동들, 즉 간음, 동성애, 살인, 절도 등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떤 추가적인 규범이나 규칙 혹은 제도나 법규를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의 법과 똑같은 비중을 두지 말아야 한다.  달리 말하면 개인적인 견해나 신학이 다를 경우, 같은 입장에 서 있지 않는 다른 사람을 향해 자신이 배운 신학을 가지고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롬 14:3).  우리들 중에는 다른 형제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전 8:12).  요지가 무엇인가?  내가 먹는 짜장면이나 짬뽕(신학이든, 주장이든) 가장 맛있는(성경적인) 것처럼 나팔을 불지 말라는 것이다. 

왜 유독 장로교가 타 교단에 비해 교리적 논쟁과 분쟁이 자주 일어나는가?  다른 것을 인정할 줄 모르는 ‘꼰대’ 같은 신학, 즉 단편적인 신앙 지식을 가지고 서로 잘났다고 주절주절 찌껄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한번 솔직하게 말해 봅시다.  우리들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신학과 신앙에 있어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지 않는가?  지식은 사람들 교만하게 만드는데(고전 8:1) 알면 얼마나 아느냐는 것이다.  천년이 하루 같은 주님 앞에서(벧후 3:8) 티끌 같은 인생들이 고작 몇십 년 동안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고전 4:3), 누가 누구보다 더 우월하고 탁월한 신학을 가졌다고 자랑질할 수 있겠는가?(고전 4:7).  이런 것들은 다 육신의 속한 자에게 나타나는 열매들이다(고전 3:3).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틀리다’와 ‘다르다’를 구별했으면 한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이미 심각한 인지장애의 초기단계이다.  나하고 다르면 다 이단인가?  듣기 거북하겠지만 Harry G. Frankfurt교수의 말대로 ‘개소리’다.  나하고 다르다고 해서 다 틀린 것이 아니다.  다르면 다른 것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사실 종교 개혁자들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1560년대 이전에는 이 용어가 사용된 적이 없었다.  물론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가 성경에 등장하지 않은 것도 확실하다.  사용해도 그만, 사용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사용하고 싶은 사람은 그 용어를 사용하고, 싫으면 사용하지 않으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문제는 그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이단이거나 저주받을 자인 것처럼 비판하는 것이다.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고전 4:3-5).  꼭 기억하길 바란다.  우리들은 율법의 준행자이지 재판자가 아니다(약 4:11).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지 않는 용어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혹은  “능동적 순종 교리를 주장하면 그것은 이단 사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가”  개가 초식동물이 아닌데 풀을 먹는다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처럼 목사가 입만 열면 복음을 전해야지 ‘개 풀 뜯어먹는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교회사적으로 능동적 순종 교리의 구성을 위해 필요한 자료들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교리에 필요한 개념(槪念)과 모든 요소(要素) 들이 성경에는 수도 없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개념과 요소들이 있다면, 이 교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논리적 서술(敍述)을 통하여 상호 연관성을 밝히며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적절한 용어와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합리적인(reasonable)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용어 자체가 없다고 해서 그 개념이나 요소가 없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우겨대지 말라는 것이다. 

한 번 예를 들어보자.  성경에 담긴 중요한 주제를 논리적이고 체계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서술한 학문이 조직신학인데, 왜 목사와 신학자들은 ‘조직신학’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데 그것을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식하게 보이는가?  그리스도가 죽을 때 우리의 죗값을 치렀다는 의미에서 형벌상의 사건이고,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의미에서 대속을 말하는 ‘형벌 대속론’이란 용어도 있다.  그다지 좋은 용어가 아닌 ‘이중 예정론’은 주로 개혁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다.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자발적이고 의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으로 말씀하시는 ‘유효적 소명’도 있다.  그 외 ‘천년왕국’, ‘제한 속죄론’ ‘타락 전/후 선택설’, ‘삼분설’, ‘하나님의 속성’, ‘신인 협력설’ 등등, 여기서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만약 이런 것들이 잘못된 것이고 사용할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렇게 많은 용어들을 만들어 냈는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특별히 칼빈주의자들이 입만 열면 나팔을 불어대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영원한 안전’ 말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성경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신학 용어들을 신학자들이 조어(造語) 하여 성경의 내용을 정리하며, 그 성격을 규명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도 개혁 신학을 공부했지만 난독증이 걸린 것인지 아직도 위에 열거된 단어들을 성경에서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이 단어들을 찾아서 알려준다면 나는 그날부로 목사직을 반납하고 평신도로 돌아가겠다.  종교가 타락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성직자들이 급증하는 것이다.  그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말이다.  요즘같이 개나 소나 목사/신학자 되고, 성직자의 이미지가 바닥을 기는 수준으로 전략한 이 시대에 나 한 사람이라도 일반인 되고 싶은 심정이다.  

행위 언약을 수용하는 Louis Berkhof의 말을 인용하면, 삼위일체’ 용어가 없다고 해서 성경에 삼위일체 교리가 없다는 식으로 무식하게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용어 자체가 없거나 사용되지 않았더라도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 혹은 ‘완전한 순종’, 즉 '모든 순종' 안에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개념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순종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이 성경에 언급되어 있고, 이 구절들을 통해 얼마든지 추론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은 다 추론해 내면서 왜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는 히스테리컬 한 신학적 망상을 가진 목사들이 그렇게 많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성경에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같지만 갈라디아서 1장 23절은 ‘복음의 교리’를 의미하고, 로마서 14장 23절은 ‘어떤 행동이 옳다고 믿는 주관적인 확신’을 가리키며, 디모데전서 5장 12절은 ‘참 과부로서의 명부에 올릴 때(딤전 5:9)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 서약’을 뜻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한 단어가 늘 똑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만은 아닐뿐더러 그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율법 준수(능동적 순종)의 전가’’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교리를 지지하는 구절들이 성경 안에는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가 성경을 위협할 정도의 위험한 교리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모든 순종’이라는 단어의 용법이 다양한 가능성의 넓은 범주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전혀 모르는 목사다.  이런 사람은 한 단어의 전체 의미 범위가 얼마나 넓은 지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단어의 의미론적 범위를 고집스럽게, 때로는 무식하게 제한하는 오류를 범한다.  따라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이 ‘온전한 순종’이나 ‘모든 순종’을 두 가지 측면으로, 혹은 하나의 순종 안에 분리되지 않는 두 가지 특성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 말을 염두에 두지 않고 글을 읽으면 ‘개소리론’으로 나팔을 불어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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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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