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의 언약이 아직도 유효한가 아니면 완전히 폐기되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학자와 목회자들 사이에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좁히지 못할 정도로 주목할 만한 견해 차이가 있다.  심지어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라’(히 8:13)는 말씀을 가지고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에 의하면 옛 언약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되었고,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고후 3:6)이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러한 말씀이 마태복음 5장 17-19절의 예수님의 말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부분에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왔다고 하셨다.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을 때 그가 의도하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예민한 이 문제(행위 언약의 유효성)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지만(롬 3:20), 만약 가능했다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롬 10:5)고 주장한다.  이 구절은 바울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가 담긴 레위기 18장 5절을 인용함으로써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 의로’라는 말을 첨가한다(RSV).  NEB에서는 ‘그것들로 인하여’라고 번역되었다.  이 말의 의미는 ‘그 뜻에 순응하는’, 즉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생명으로 인도했을 것이라고 했다(롬 7:10).  이 구절은 이미 70인 역을 따르고 있는 갈라디아서 3장 12절에서도 인용되었다.  이 두 서신에 있어서 강조점은 만일 살고자 하면 ‘행하라’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로마서 2장 13절에서 주장된 바 있다.  이러한 묘사의 어두운 측면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행위 언약의 형벌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롬 6:23).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3-14).  하나님은 아담이 이행하지 못했던 그의 책임(창 2:15-17)과 비슷한 책임을 인간에게 지우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아담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항한 고의적인 행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망이 죄의 결과라고 본다면 이 기간 동안 사망이 지배했다는 바로 그 사실은 사망의 원인이 되는 죄가 그 당시에도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즉 나타난 죄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죄이며(롬 5:12), ‘한 사람이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롬 5:15), 그의 모든 후손과 관련된 죄이다.  이 경우 ‘아담 안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고후 15:22), 사망은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 2:17)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떠난 모든 인간에게 있어 행위 언약이 아직도 유효함을 보여준다.   

바울은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넘어 본격적으로 긍정적인 측면으로 신명기 30장 11-14절에서 나오는 모세의 설교에서 또 다른 구절을 인용한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롬 10:6). 이 구절은 의를 획득하려는 율법주의적인 시도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순종하려는 태도를 전제하고 있다(신 30:6-10).  이 구절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도 손에 넣기 힘든 것을 열망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해 영적인 지식이나 승인을 얻기 위해, 혹은 율법을 손에 쥐어서 자신들이 무엇에 순종해야 할 것인지를 알기 위해 하늘에 오르거나 바다를 건널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데려오기 위해 음부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한 구원을 선포하시고(요 16:6), 또 이룩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셨고(요 1:14),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이다(고전 15:6).  이렇게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말함으로써, 이 말씀을 자기 세대 사람들에게 적용시킨다(롬 10:8-21).  즉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리가 이제 알려졌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이미 모세의 시대의 백성들에게 분명했던 것처럼, 그것은 우리를 포함한 바울 시대의 독자들의 입과 마음만큼이나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롬 10:8, 신 30:14).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부분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즉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한 영원한 제사’(히 10:12)를 드린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아담은 인류에게 저주를 가져왔지만 그리스도의 희생, 바울의 말대로 하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롬 5:18)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의 결과는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은 것’이다(롬 5:19).  빌립보서의 말을 인용하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빌 2:8 / 한글 흠정역).  여기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빌 2:8)라는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죽음이 예수님을 지배하는 어떤 권세를 지녔으므로 예수께서 죽음에 복종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다. 

이미 하나님의 계획은 확정되어 있지만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으시고 지상에 계신 동안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고뇌하며 자신과 씨름하셨다(마 26:36-46).  앞으로 닥칠 시련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는 자신의 헌신을 확인할 정도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셨다(눅 22:43-44).  인간의 성정을 지니신 예수님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로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시며 아버지의 뜻을 따라가고자 하는 선택의 행위를 끊임없이 하셨다(요 10:18-19).  그는 극심한 고통으로 고민하셨고, 순종의 길이 고난과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다(히 5:8).  이 구절의 뜻은 그의 온전하심이 테스트를 통해 확증되었다는 것이다(히 2:10).  그리스도는 항상 도덕적으로 온전하신 분이다.  그러나 순종함을 통해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신의 완전성을 증명하셨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위한 완벽한 희생제물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그들의 구원을 개척하셨다.  만약 이단들처럼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한다면, 전능하시고(마 28:18) 전지하시며(골 2:3) 영원하신(히 1:8-10) 하나님이 무엇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겸손히 배우셨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고통이라는 우리의 경험을 공유하심으로써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히 5:9)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시다(행 4:12).

수동적 순종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강하게 부인하고 오직 십자가의 죽음만을 강조하려고 한다.  이들의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믿는다고 생각한다(롬 12:3).  하지만 여기서 ‘죽기까지’란 십자가의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출생부터 수난에 이르기까지, 그 어떠한 저항도 없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Gerald F. Hawthorne이 말한 것 같이 “그의 전 생애는 자기 부인과 자기 헌신과 자기희생으로 특징” 지어졌다.  즉 그리스도의 죽기까지 온전한 순종 안에는 율법의 요구에 완전하게 응하신 그분의 삶도 포함되어 있다.   Louis Berkhof의 말을 인용하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그의 수동적 순종이 하나님께 받음직하게 되도록, 곧 하나님의 열납 대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조금 더 집고 넘어가고 싶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인가?  아니다.  우리의 의(義)를 위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순종의 삶을 사셔야만 했다.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은 십자가의 죽음만을 가지고 한정 지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에 오해가 없길 바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구속 사역을 행하실 때 아들에게 세상에 가서 그저 죽기만 하면 백성들의 모든 죄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죽어 우리의 죗값만을 치르셨다면, 나는 지금도 궁금한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기 전에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말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조차도 자신들의 죄악 됨과 회개의 필요성을 고백해야 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죄를 인정하실 필요가 없었다.  그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범죄할 가능성과 유혹을 받으셨지만(요일 2:16), 죄가 없으며(히 4:15), 책잡을 만한 일이나(눅 23:13-25), 행위에서 전혀 악을 발견할 수 없었다(벧전 2:22).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단지 무죄성(히 4:15, 고후 5:21, 요일 3:5)만이 필요했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는’(히 5:8) 온전한 복종의 삶이 전혀 필요치 않았다면 그분이 “33년간 이 땅에 사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정신 나간 헤롯이 무고한 아이들을 살해할 당시(마 2:13-18), 베들레헴을 벗어나서 애굽까지 도망갈 필요가 없이, 그때 우리의 죄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리스도의 무죄성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면 말이다.     

Saint Athanasius는 『On the Incarnation』에서 말한다.  “그분은 이 땅에 오시지 마자 모든 사람을 대신해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만약 이 땅에 오신 즉시 자기 몸을 죽음에 내어 주고 다시 살아나셨다면 그분은 더는 우리 지각(知覺)의 대상이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고, 몸안에 머물며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하시면서, 자신이 인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함을 보여주는 행동을 하시고 표적을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있는 신성만을 강조하지 말고 인성도 똑같이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피곤하셨지만(마 4:2, 막 15:21, 요 4:6) 전능하셨다(마 8:26-27, 골 1:17, 히 1:3).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시지만(요 10:30) 종말의 시간에 대해서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셨다(마 24:36).  특별히 병자를 고치실 때는 자신의 신적인 특권을 사용하시지 않고 철저하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셨다(눅 5:17).  만약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전 생애를 통하여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셨다면 Berkhof는 말한다.  “그의 인성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에 미달되었을 것이며, 그는 타인을 위해 속죄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오직 인간에게 부과된 형벌만을 받으셨다면, 그의 사역의 열매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타락 전 아담의 위치에 남았을 것이다”    

세대주의 목사인 John F. MacArthur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다.  하지만 이 견해만큼은 Sproul과 같은 입장에 서 있는 것 같다.  R. C. Sproul은,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기만 하셨다면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주고 하나님 앞에서 무고한 상태가 되겠지만 의로운 상태는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의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데(창 18:19, 출 15:26, 사 56:1, 미 6:8), 우리는 그 법에 복종하기 위해 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영원한 생명을 취하도록 하는 순종의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 의를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분의 완전한 순종은 십자가 위에서의 완전한 속죄만큼이나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중전가(double imputation)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셨으니’(고전 1:30)라고 말할 때, 바로 이런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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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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