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시대는 어떠했는가?  신약시대 역시 종교는 예수님께로부터 가장 신랄하게 질타를 받았고, 종교라는 관념이 바리새인들에 의해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통해 종교가 얼마나 하나님 나라를 대적했는지를 알 수 있다(마 23장).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세리들과 창녀, 그리고 죄인들과 자주 식사를 하셨고(막 2:13-17), 심지어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자에게 값없이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요 8:11).  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미래에 당할 지옥 형벌의 심판을 선언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아’(마 12:34), 마귀의 자식(요 8:44),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 23:33), ‘화 있을진저’,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 말은 한 번도 아닌 일곱 번을 사용하셨다(마 23:13, 15, 16, 23, 25, 27, 29).  혹독한 말투를 사용하신 것을 보면 조금 살벌한 느낌이 든다.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 화를 내신 이유 말이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리를 외적인 겉치레에 집중하는 제도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며, 성경을 연구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율법을 지켰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더 잘 믿는다고 자부했다(눅 18:9-14).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모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 5:46-47).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이것이 바로 종교적인 영에 의해 지배를 받을 때 나타나는 실체이다.  그들은 입술로는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마 3:7, 요 8:37)이라고 나팔을 불어댔지만 삶(행위)으로는 철저하게 부인했던 종교성이 강한 사람들이었다(딛 1:16).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이미 썩어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마 23:25-28).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  우리들 역시 바리새인 못지 않게 교회당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면서 수요예배, 금요철야, 새벽기도, 주일 오전 예배, 주일 오후 예배 등등 많은 예배를 드린다.  솔직히 말해 한국사람처럼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민족도 많지 않다.  나는 지금도 궁금한 것은 한국교회나 한인교회는 왜 그렇게 예배가 많은지 모르겠다.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무속 신앙에서 영향을 받은 송구영신예배는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인 교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예배 말이다.  도대체 이렇게 많은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다고 자부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열심히 교회당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고 생각한다.  예배를 받지 않는다면 그렇게 많은 예배를 드릴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실 것을 믿고 드린다.  비록 세상에 나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마 5:13-16),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을지언정(롬 2:24), 예배만큼은 드려야 뭔가 마음에 불안감이 없어지는 것 같다.       

회심하기 전에 바울의 신앙생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성공을 했고, 육신적인 자랑거리가 많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놀라운 말을 한다.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표현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광신에 가까울 정도로 교회를 핍박했고(행 9:1-2, 26:9-11), 외적인 의를 치중했던 가장 높은 서열의 바리새인이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을 정도로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아주 세심하게 자기를 살피고 주의를 기울였던 사람이다(빌 3:5-6).  바리새파 부모 밑에서 성장할 뿐 아니라 위대한 가마리엘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행 22:3), 가장 엄격한 종파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유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갈 1:14).  당시에 이스라엘의 선생 ‘바리새인’이라는 명칭은 비난의 명칭이 아니라 명예로운 명칭이었다(마 23:7, 요 3:10).     

나는 학식과 의로움과 종교적 열심으로 인해 명성을 얻었던 바울이 자신이 몸 담고 있었던 바리새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아그립바 앞에서도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했다’고 변명한다(행 26:5).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종교성에 의해 지배받아 왔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딤전 1:13)라고 말한 것은 그만큼 그의 종교적 바리새주의는 다른 어떤 죄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그의 결론은 무엇인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놓쳐버리고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종교적인 의식과 제도에 중독되어 버린 자신의 왜곡된 신앙이 가장 나쁜 죄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의 영에 영향력 아래 있는 자들은 밀밭에 심긴 가라지와 같다(마 13:25).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려 죽이고’ 그 성장을 가로막기 위해 세상에 심겨진 악한 자들이다.   

여기서 종교의 영에게 지배를 받을 때 나타나는 증상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나타나는 증상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외적인 형식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마 6:1-4, 23:1-7).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심장을 가지고 있다.  정작 두려운 것이 있다면  사람들의 평가다.  두 번째 증상은 예배나 기도를 정한 시간이나 정한 장소에 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처럼 마음에 부담감을 느낀다(요 4:20-24).  주일날 오전 11시 정각에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히스테리컬 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여기에 속한다.  세 번째 증상은 자기 노력과 수양을 통해 의로움을 얻으려고 한다(갈 3:1-14).  이 증상에 속해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육에 속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네 번째 증상은 관습과 전통과 제도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막 7:1-13).  반드시 주보에 나와 있는 순서대로 예배를 드려야 직성이 풀린다면 비록 그 교회가 정통이라고 자부할지라도 성령을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증상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바로 잡아주도록 주요한 임무, 즉 하나님의 나라의 파수꾼의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마 23:13-15).  가르치는 선생들 중에 과대망상증을 가진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뭔가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마지막 증상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하고 싶다.  주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목사와 신학자, 그리고 교회 직분자들이 많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죄에 대해 영적으로 무디지만 신앙적 미숙함에서 오는 다른 형제의 부족한 점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문제는 덮어주거나 바로 세워주지 못하고 무거운 연자맷돌을 목에 매달어 준다(마 18:6).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깊은 바다에 빠졌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목이 곧고 할례 받지 못한 눈을 가지고 있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영적인 현상을 심하게 거부하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행 7:51-58).  평신도 앞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을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데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명색이 목사인데 쪽팔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은 쪽팔림의 문제가 아니라 정직함에 관련된 문제이다.  특히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자신이 하나님께서 하고 계신 일에 선봉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치명적 망상은 상대방과 비교하여 자신이 진리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심한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한결같이 종교의 영이 ‘순교자 증후군’(martyr syndrome)을 마음 속에 심어주면 그 사람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엄청난 고난을 받는 것으로 착각한다.  바로 한국의 사랑 제일교회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증상이다.     

특별히 신학적 논쟁이나 이단 사냥질을 목회보다 더 잘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이미 종교적인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딤전 6:4).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종교성이 강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 그런 일들이기 때문이다.  Sébastien Castellion가 말한 것처럼 누군가 다른 세계관(해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거품을 물고 미쳐 날뛴다면 그는 성령이 아닌 종교의 영에게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논쟁과 사냥질 속에는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어(약 3:14-15), 듣고 보는 자들로 하여금 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딤후 2:14).  교인 하나가 생기면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든다는 것이다(마 23:15).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만을 증거 하라고 했지(마 28:18-19, 갈 1:8), 무익하고 헛된 신학적 논쟁이나 이단 사냥질을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딛 3:9).  만약 이것들 중에 하나 이상 발견하거나 혹은 이 다섯 가지 증상들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을 인색하고 사랑이 없는 비판적인 사람들로 정형화한다면 이미 그들에게 종교의 영이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물론 “나는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나팔을 불어대며 종교의 영 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착각하는 소경 된 목사나 교인들도 있지만 말이다(요 9: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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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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