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들

하고 싶은 이야기 2021. 11. 21. 16:18

지금으로부터 50-60년 전에 가장 인기를 끌었던 여성 사역자는 Kathryn Kuhlman인데, 이 사람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 Benny Hinn이었다.  그가 텔레비전에 나와 사역을 할 때마다 치유 사역자들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어 늘 부정적인 관점으로 이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내 눈에 그가 입은 기생오라비 같은 하얀 양복이 우선 마음을 들지 않았고, 달변에 가까운 말솜씨와 요란한 몸짓과 손짓, 그리고 잔잔한 음악 속에서 극적인 연기를 연출해 내며 군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볼 때, 마치 사람들의 눈을 기만하는 마술사 시몬처럼 보였다(행 8:9). 

내가 무엇보다도 비위가 상했던 것은 엘리야의 겉옷을 가지고 엘리사가 요단 언덕에 서서 물을 쳤던 것처럼(왕하 2:13-14), 자신의 양복 상의를 가지고 사람들을 향해 휘두르는 행동을 보일 때였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저것이 과연 성령의 역사인가, 정말 하나님은 저렇게도 역사하시는가, 귀신에게 이용당하거나 사람의 눈을 속이기 위한 최면술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다.  오래전에 Hinn의 그러한 행동을 보고 나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러한 인상은 나로 하여금 성령의 사역자들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과 등을 돌리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쪽팔리는 이야기이지만, 그때는 교인들 앞에 서기만 하면 광경병에 걸린 개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비판하는데 열중했다.  이 정신 나간 목사가 복음을 증거 했어야 하는데 신앙성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을 영혼 구원에 힘쓰지 못한 것에 대해 얼마나 후회하고 회개했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러한 경험들이 오늘날 나로 하여금 더 진리의 말씀에 기초한 성령의 사역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말이다.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비위가 상하겠지만 목사가 강단에서 성도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지 않고 전하는 모든 말, 특히 신학적 논쟁은 프린스턴 대학교의 철학과 명예교수인 Harry G. Frankfurt의 저서 『On Bullshit』에서 말한 것처럼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짓말보다 무서운 것이 개소리이기 때문이다.  Harry의 말에 따르면 개소리는 헛소리나 거짓말과는 다르다.  거짓말은 참인 것을 일부러 틀리게 말하는 것이다.  이 명제에 대한 사실은 누구나 진실의 값을 들이대면 된다.  그러나 개소리는 자기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목적을 위해 말 같지 말을 해대는 것이다.  나중에 허위임이 밝혀져도 누구나 개소리로 치부해버릴 뿐이다.  도덕적인 책임과 민형사상의 소송도 필요 없다.  특정한 사실을 뒤받침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Harry의 말대로 ‘뻔뻔함’, 속된 말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으면 된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하면 ‘듣는 자로 하여금 유익이 하나도 없고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 ‘개소리’라는 것이다(딤후 2:14).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만 가르침을 전하시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자기 자신을 그 나라에 바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밝혀질 것이지만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질 것이라고 대답하셨다(마 13:13).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이사야 6장 9-10절을 인용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한 증거, 즉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자 귀신은 나가고 벙어리 되었던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 하였음에도 불구하고(눅 11:14), 자신들의 고정관념 깨기를 거부하며 짐짓 소경으로 남아 있으려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던 적이 있었다(마 13:14-15).

누가복음 11장 14-23절에 기록한 사건과 유사하지만 별개의 사건일 가능성 있는 마태복음 12장 22-45절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셨다.  23장 33절에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하신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독사(serpents)들이 많아 그런 말을 사용하신 것인가?  한국과 미국은 개(Dog)들이 많은데 바리새인 같은 신학자와 목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지 궁금하기도 하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에게(요 8:1-11)도 온유함과 사랑으로 대하시던 예수님께서 유독 바리새인들에게는 한 번도 아닌 일곱 번 저주를 퍼부으시면서(눅 11:37-52) ‘소경들’(마 23:19), ‘회칠한 무덤’(마 23:27), ‘독사의 자식’(마 12:34), ‘뱀들’(마 23:33), ‘마귀의 자식’(요 8:44), ‘독사의 새끼들’(마 23:33)이라고 책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귀신 들려 눈이 멀고 벙어리 된 자가 치유를 받기 위해 예수님께 이끌려 왔다(마 12:22).  헬라어 어법은 눈이 멀고 말을 못 하는 것이 귀신 들림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한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치유가 되는 것을 보았을 때 무리들은 놀랐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되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엑시스타노’(existano) 즉, ‘깜짝 놀라다’가 이곳에서만 사용된 유일한 경우다.  이 단어는 강한 의아심과 놀라움의 의미를 띠고 있다.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겠는가”라고 반신반의하는 것이다.  즉 예수가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표적들을 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33절).  그러므로 예수가 권능으로 병을 고친 것은 무리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이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는데, 이는 그분이 실제로 귀신들을 쫓아냈기 때문이었다(마 4:24, 9:32-34).  그래서 예수님의 권위와 백성들에게 받는 인기를 훼손시키기 위해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사탄으로부터 온 능력을 소유했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판한 내용이 조금 특이하다.  왜냐하면 유대 문헌이나 문학에서 나타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알세불’이라는 이름은 신약에만 나타나는데(마 10:25, 12:24, 27, 막 3:22, 눅 11:15, 18-19), 헬라어로 이에 해당하는 단어는 베엘제불(beelzeboul)이다.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70인 역(Septuagint)과 시리아 역본은 이 단어를 에그론의 신(god)인 베엘세붑(Beelzebub, 왕하 1:2-3, 6, 16)으로 바꿈으로써 이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고자 하였다.  아마 종교 지도자들이 두 히브리어 단어, 즉 가나안 지방의 풍요의 신을 상징하는 바알(ba’al, ‘주’, 호 2:16)과 제불(zebul, ‘고귀한 집’ 혹은 ‘거룩한 처소’, 왕상 8:13)을 합성하여 이 단어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단어가 사탄, 즉 귀신의 왕(지도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이 바알세불은 신약에서는 마귀의 왕으로서 사탄과 동일한 존재로 간주된다(마 12:24-27, 막 3:22-26, 눅 11:18-19).  따라서 예수님을 고의적으로 바알세불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메시아를 사탄으로 전략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끔찍한 모독이었다.  이런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신 것이다(마 12:34).   

사실 그들이 새로운 관점에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한다면, 그들의 눈은 봄으로 그들의 귀는 들음으로 그들의 마음은 깨달음으로 돌이켜 고침을 받을 수 있었다(마 13:16).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적인 영역에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고집스럽게 마음의 문을 닫을 경우에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볼 수 없었던 이유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고의적으로 거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고(마 12:22-37),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이나 그릇된 교회 전통과 균형 잡히지 않은 가분수(假分數) 신학, 더 나아가 교단 안에서의 패거리 목사들과 어느 특정 신학자들의 잡설로 인해 그러한 폐쇄성을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런 것으로 인해 바리새인들처럼 짐짓 영적인 소경으로 남아 있으려는(요 9:39-41),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아니면 진정한 실재인 그분을 인식하는 데 있어 가장 걸림돌의 역할을 하는 몇 가지 요인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Blaise Pascal이 말한 대로 세속화된 세계관의 막대한 영향이다.  이 세속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통한 치유사역을 거부하거나 은사에 대해 항상 적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현대 세속주의의 초석을 이루는 있는 두 가지 사상 중 하나는 ‘물질주의’이다.  즉 이 세상에는 물질 이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합리주의’이다.  이 사상은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세계관이 지난 2세기 동안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는 무엇을 집중해야 하며 사물들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에 관하여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유형들을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문제는 이것들을 기초해서 우리가 형성하는 사고방식과 관점에 의해 소위 우리의 세계관과 고정관념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관, 즉 전통과 고정관념에 사로 잡힌 사람들은 바리새인처럼 새로운 체험이나 정보를 접하게 될 때(막 3:1-6), 확증 평향적 증상을 보인다.  거의 언제나 자신이 배운 것만을 받아들이고 배우지 않는 영역에 있어서는 그 어떠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귀신의 역사로 치부하거나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막 3:20-30).

다른 하나는 신학적인 것으로, 예를 들어 세대주의 신학으로 성경 전체를 주석한 『Scofield Reference Bible』은 영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표적’과 ‘기사’의 은사 중단 이론을 일반화시켜놓았다.  특히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주장하듯이 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된 후, 즉 감독들이 모여 신약성경의 내용을 확정했던 주후 397년 카타르고 회의 이후에는 표적과 기사의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Calvin의 글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다 좋아하지는 않는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만을 받아들인다’(살전 5:21).  개혁주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한 사람인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자기 멋대로 주장한다.  “한 동안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치유의 은사는 다른 모든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선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 치유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이것이 Harry G. Frankfurt 교수가 말한 대로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마치 Donald Trump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선거 유세에서 “오바마가 IS를 창설했다. 사기꾼 힐러리는 공동 창설자다”라고 나팔을 불어댄 적이 있었다.    한 마디로 증명할 길이 없는 개소리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제는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적이나 치유, 혹은 그 어떠한 체험을 근거로 한 그리스도의 신앙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이들만의 생각이지 나를 비롯한 성령을 환영하고 인정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생각은 아니다.  이런 균형 잡히지 않은 치매 걸린듯한 신학과 신앙은 세속주의의 초석이 된 물질주의와 합리주의에 적응한 결과를 반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Martin Luther는 초기에는 “특별한 어떤 기적이나 계시가 필요지 않다”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런데 그 후 그의 저작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기적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라고 말을 바꾸어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그런데 Luther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도 한 때 마귀에게 충동질 당해 ‘개소리론’에 대해 나팔을 불어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또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적대적인 마지막 요인은 아마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기질이 작용하는 것 같다.  만약 성령의 은사에 대해 체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이나 은사들(고전 12:4-11), 특히 누군가 ‘예언’이나 ‘방언’, ‘지식의 말씀’, ‘치유’에 대한 간증을 하거나 말을 할 때 지나칠 정도로 과민반응이나 히스테리 증상을 보일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본인 자신이 알지 못하며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교인들 앞에 명색이 목사인데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교인들 앞에서 영적 소경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목사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모른다고 하면 얼마나 쪽팔릴까!       

나는 목사나 신학자들이 하나님과 신자들 앞에서 솔직했으면 한다.  사실 이런 부류 사람들 중에 허언증 환자들이 많은 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에 대해 체험해 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 은사에 대해 많이 아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말 ‘염소가 하품할 일’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음식을 맛보지 않고 누구에게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책에 나와 있는 그림이나 글을 읽고 음식의 맛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식당에 가서 그 음식을 직접 맛보지 않고 말이다.  오늘날 이러한 바리새인 정신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개소리론’을 가지고 나팔을 불어대는지 모른다.           

비판적인 태도를 지닌 보수적인 사람과 낙관적인 태도를 지닌 자유주의적인 사람이 어떤 변화에 대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듯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기질은 때로는 진정한 실재를 인식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때가 많은 것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고 TV에서 몇 번 본 것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성령의 사역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어떤 직접적인 체험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박스 안에 갇혀 있는 ‘고정관념’과 다양성을 포용할 줄 모르고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이 맞다고 우겨되는 ‘꼰대 같은 신학’,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늘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비판적인 성격’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의 사역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 배후가 사탄의 세력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목사와 신학자들 중에 자신은 진리의 말씀에 충실하고 견고하며, 단단한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별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이미 이천 년 전에도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틀림없이 자기들이 ‘소경’에 속하지 않는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요 9:36-41).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으니깐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시각을 찾는 사람과 대조적으로 이들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41절).  소경임을 인정한 사람은 시력을 찾아볼 수 있었지만, 자기들이 본다고 생각한 자들은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머물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학자 니고데모는 어떠한가?  이스라엘 선생이었지만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그 역시 소경이었다(요 3:1-10).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요 9:28).  이것은 예수님과 그들이 벌인 논쟁의 핵심이었다.  그들이 정말로 헌신하고 있는 대상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전통과 그 전통의 핵심인 모세 율법이었다.  자기들이 모세에 충실하다는 것을 완강히 옹호하고 있었다.  이 구절을 알아듣기 쉽게 해석하면 나는 칼빈주의자야!’ ‘우리 교회는 전통이야!’ 라고 나팔을 불어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인가 아는 것처럼 나대지 말고 스스로 소경됨을 인정하여 시력을 되찾으라고 말씀하신다(요 9:41).  여기서 '죄가 그저 있다'라는 말은 지금 이들이 무시무시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해준다.  결론이 무엇인가?  현대판 바리새인들은 ‘개소리론’은 집어치우고, ‘우리도 소경인가’(요 9:40)라는 구절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시고 소경 된 눈을 밝혀주시면 누구든지 쉽게 인정하고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엡 1:17-18).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런 것들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때로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집스럽게 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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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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