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언약

행위 언약 2022. 1. 23. 19:00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참된 지식(창 2:19-20, 골 3:10)과 의와 거룩함(엡 4:24)을 지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란 내부적 특권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체결할 수 있는 외형적 특권까지 부여하셨다(출 19:5).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창 1:26-27, 5:1, 9:6) 인간 외에는 그 어떠한 피조물도 창조주 하나님과 언약을 맺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인간에 대한 그분의 각별한 관심을 보여준다(창 9:9-16).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만(창 1:27)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교류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교류가 언약(Covenant)이란 형태로 표출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고(창 2:15-17, 레 18:5), 언약의 약속은 영생이며(느 9:29), 언약의 조건은 순종이고(겔 20:11), 언약의 형벌은 죽음이었다(창 3:19).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약속(롬 10:5)과 여러 가지 요구사항들로 결정되었다.  이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최초 언약으로서(창 2:16-17), 인간 역사의 최대 비극인 죄의 기원과도 관계를 가지며(창 3장, 롬 5:12), 이후에 있을 여러 언약의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구약에서 언약이란 용어는 히브리어 ‘베리트’(berith)로 쓰였는데(창 6:18), 이는 제물을 쪼개어 바치는 제사 관습에서 기원된 것으로 본다(창 15:10, 17).  즉 언약의 당사자 중 어느 한쪽이 언약을 어기면 희생 제물과 같은 처지에 놓인다는 엄숙하고 엄격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렘 34:18-20).  또한 신약에서 언약이란 용어는 헬라어 '디아데케'(diatheke)로 쓰였는데(갈 3:15-16), 어떤 번역의 형태가 이 단어의 가장 적절한 번역인가 하는 점에서 많은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흠정역 가운데 절반은 ‘언약’으로(겔 16:62), 그리고 절반은 ‘유언’(遺言)이란 뜻으로 번역되었다(히 9:16-17, ARV).  이와 같이 언약의 개념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짐승을 죽여 제물을 바치는 제사 행위(레 1:3-9)와 법적 효력을 지니는 유언과 관련된다(히 9:16-17).  따라서 성경의 입장에서 볼 때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구속력을 가진 법적 협정(legal agreement) 즉, 죽음을 걸고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적 약속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먼저 언약의 구분을 살펴보면 계약의 주체로서 양 당사자(當事者)가 있고, 그 계약 내용이 당사자의 의견 일치에 의해 성립되는 것을 쌍무 언약(雙務言約이라고 한다면, 성경의 언약은 당사자 사이의 의견 일치를 필수로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기원하였으며(창 2:16-17), 하나님이 조건과 약속을 정하셨고(출 19:5-6),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렘 31:33)에 인간이 하나님과 협상하거나 언약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의미에서 편무 언약(片務言約)이다.  물론 이 언약이 다른 언약에 의해 대치될 수도 있지만(호 2:23, 슥 8:8), 한번 세워지면 내용을 추가할 수도 없고, 그 내용의 일부가 무효화되게 할 수도 없으며 변경되거나 바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시 105:8-10, 갈 3:15).  인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 언약의 의무를 받아들이거나 깨트리는 것이다(렘 22:9, 겔 16:59).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하나님이 너무 불공평하신 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고려함이 없이 아담에게 일방적으로 행위의 언약을 맺으시는 것이 불합리하지 않는가?  이 질문의 답은 간단하다.  노아나 아브라함의 경우 이들이 언약을 맺을 때 동의하고 수납했다는 기록이 성경에는 없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술에 취해 자식들 앞에 나체쇼를 보인 노아(창 9:18-25)나, 첩을 둠으로써 가정불화를 일으킨 아브라함(창 17:1-21)과 더불어 언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왜 타락하지 않은 아담과 더불어 언약을 체결할 수 없으셨겠는가?”  얼마든지 창조주에 의해 피조물에게 그의 의지를 고려함이 없이 자신의 주권적 정체(constitution)를 적용시킬 수 있고(겔 16:62-63), 동시에 인간과 언약 관계 들어가실 때 언제나 조건을 설정할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렘 1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는 것은 언약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축복하기 위해 체결하신 것이기 때문이다(신 5:1-3).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언약이지만 은혜로운 언약이었다(말 2:5).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맺으신 모든 언약이 그렇듯이(민 18:19), 그 중심에 있는 본질 요소는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렘 31:33).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일방적 조건의 제시와 이에 대한 결과를 약속한 것을 언약으로 볼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사실 성경에는 직접 행위 언약(行爲言約)이란 용어가 실제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언약의 교리를 구성하게 될 모든 요소들이 있고, 두 당사자가 확실하게 정의되어 있으며(창 2:16), 그 관계의 상태를 정해놓은 법적인 조건과 규범들이 있었다(창 2:17).  또한 순종을 위한 축복의 약속(신 28:1-19) 및 그와 같은 축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제시되었다(신 5:33).   이것은 후에 있을 새 언약(히 8:5-8)과 대비된다는 점에서나 성경 자체가 이를 언약이라 불렀다는 점에 있어(시 106:45), 그리고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호 6:7)라는 호세아의 말 같이 분명한 언약임을 틀림없다.  이 구절에 의하면 아담은 타락 이전에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있었다(롬 5:12-21).     

앞서 말했듯이 이 언약에 있어서는 반드시 둘 이상의 당사자가 필요한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고 명령하신 것으로 보아서는 두 당사자가 분명히 존재했다.  따라서 행위 언약은 삼위 하나님과 전 인류의 대표인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을 그 당사자로 한다.  여기서 삼위 하나님을 제1 당사자라 하는 것은 아담의 동의가 없이 세우신 행위 언약의 약속 및 조건의 제안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행위 언약은 하나님으로서는 의무 조항이 없는 주권적 조치로 볼 수 있다.  반면에 아담은 자연적인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를 가진다.  그리고 아담은 전 인류의 대표자이나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의존적이기 때문에 제2 당사자가 된다.  그러나 아담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인류의 법적, 혈통적 대표자로서 그가 맺은 언약의 효력은 모든 인류에게 미치게 된다.  이것은 아담에게 선고된 형벌 자체가 자연적 후손에게서 효력을 발생했다는 사실에서부터(창 2:17, 3:17-18), 죄와 죽음(롬 6:23) 그리고 모든 형벌적 악이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성경적 선언을 통해 알 수 있다(롬 5:12, 고전 15:22).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들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명령에 분명히 정의되어 있으며(창 1:28-30, 2:15),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먹지 말라’는 최초의 금지 명령에도 분명하게 나타난다(창 2:16-17). 

우리가 이런 관계를 언약이라고 규정할 때,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관해 아담에게 하신 말씀 안에는 순종할 경우 ‘영원한 생명’이(신 4:1, 롬 10:5), 불순종하는 경우 ‘정녕 죽을 것’(렘 11:2-3)이 약속되었다.  만일 불순종이 죽음과 연결된다면 순종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레 18:5, 느 9:29, 롬 10:5).  여기서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인간의 자연적 생명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영원한 행복과 끊임없는 영광의 상태로 지속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리킨다(계 21:1-4).  반면에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자연적 사망(전 12:7, 약 2:26)과 아울러 인간이 하나님과 영원히 격리되는 도덕적이고 영적(마 8:22, 요 3:3, 엡 2:1, 딤전 5:6, 계 3:1), 그리고 영원한 사망(계 20:6-14)도 포함된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17)는 제1 당사자의 적극적 명령은 행위 언약이 제2 당사자의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함을 보여 준다.  이는 이후에 나오는 모든 율법에 공통되는 것으로서 율법과 계명을 지켜야만이 생명이 있음이 강조되어 있다(신 30:15-16, 겔 20:11, 마 19:17).  나아가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킬 경우에는 더 큰 축복을 약속하셨다(신 7:8-9).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하자면 바울이 로마서 7장 10절에서 ‘계명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의 생명을 말한다(겔 20:13, 눅 10:28).  즉 행위 언약의 원리는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 18:5)는 말씀 같이, 이 계명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돕기 위해 주어졌다.  결코 아담을 속박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었다.  Charles Hodges는 이 구절을 가지고 주석하면서 말한다.  “율법은 원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갈 3:12).  이 점은 바울이 모세의 글인 레위기 18장 5절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는 로마서 10장 5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언약의 관계로 보는 것이 왜 중요한가?”  먼저 행위 언약 체결 이전의 자연적 관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은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와 같았다(사 29:16).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칙적으로는 어떠한 청구도 할 수 없으며 수동적으로 그분의 조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동등한  입장에서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적인 관계 안에서 절대적 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과 교통 할 수 있고 또한 언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과의 자연적 관계를 향상하기 위하여 능동적으로 자신을 인간의 수준까지 낮추어 인간과 법적인 계약을 맺으셨다.  다시 말해 아담으로 대표되는 인류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하나님 의지에 순종하는 길을 여심은, 물론 여기에 수반되는 순종의 방법을 통한 영생의 결과를 약속하심으로 인간에게 자연적 관계를 극복한 조건적 권리를 획득하도록 조치해 주신 것이다.  한 마디로 행위 언약은 인간을 축복하기 위한(창 17:2, 신 5:1-20),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 언약의 특징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은혜 언약은 하나님과 이미 타락한  인간 사이에 맺어진 것인데(렘 31:33, 히 9:15), 반해 행위 언약은 하나님과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과 맺은 언약이란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지닌다.  즉, 이후에 여러 차례 체결되는 은혜 언약들(창 6:18, 9:9-17, 17:7, 18-21, 출 19:5, 24:1-11)에게 있어서는 피조된 원래의 상태를 상실한 비자연적인 인간이 언약의 제2 당사자인 반면 이 행위 언약은 창조한 원래 모습을 간직한 자연적 인간이 언약의 제2 당사자라는 점에서 ‘자연 언약’이다.  또한 행위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쌍방 언약이나 실제로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율법으로서의 성격이 있다(출 19:5, 24:1-11).  즉, 후에 맺어진 은혜 언약들이 순종보다는 믿음에 치중하는 반면 행위 언약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율법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내용으로 구성된 이 언약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자기 성찰과 행동의 제한 내포하고 있으며, 이 언약의 준수 여부가 생명의 지속과 죽음이(신 11:26-28)란 결과를 낳는다는 측면에서 이는 ‘생명 언약’이다.  끝으로 신학적 의미에서 행위 언약은 이를 어긴 인간에게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후에 주어진 은혜 언약과 상대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행위 언약에 있어서도 순종의 의무가 당연히 있는 피조물 인간에 순종에 대한 상급으로 영생을 약속하고 있다는 점에서(겔 20:11), 이 역시 ‘은혜 언약’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행위 언약을 주신 것은 순종을 조건으로 인간의 거룩함을 고정시키고 영생을 확실케 하려는 은혜로운 조치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의 자발적 순종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은 그들과 영원히 거룩한 교류를 나누시기 위해 행위 언약을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행위의 언약이 아직도 유효성(有效性)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아담이 타락할 당시 완전하게 폐기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 민감한 문제를 놓고 신학자와 목사들 사이에는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드러내며 때로는 날카롭게 대립하기도 한다.

'행위 언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좋은 언약  (0) 2022.03.27
의(義)의 전가  (0) 2022.03.13
행위 언약의 유효성  (0) 2022.02.27
능동적 순종  (0) 2022.02.13
율법의 중요성  (0) 2022.02.0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