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義)의 전가

행위 언약 2022. 3. 13. 17:59

Calvin은 칭의를 논할 때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죄 용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명인 십자가의 죽으심(수동적 순종)을 통해서(롬 5:8),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능동적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전가됨으로(롬 5:19), 이 두 가지 순종을 구분은 했지만 결코 분리시키지 않았다.  Berkhof의 말을 빌리면 죄인이 의인으로 선포하는 칭의에서 “수동적 칭의는 능동적 칭의를 기초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십자가의 죽으심’과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글 속에는 능동적 순종 교리의 구성에 필요한 개념과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는 것’이 수동적 순종이라면, ‘의를 전가하는 것’은 능동적 순종이라고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글(능동적 순종)에서 밝혔듯이 행위 언약의 유효성은 여러 가지 주요한 일면에서 여전히 그 효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것이 있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히 4:15) 행위의 언약을 완벽하게 지키시기 위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행위 언약을 완전하게 지키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 해답은 의의 전가(Imputation of Righteousness) 교리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인 로마서 5장 19절에서 나타난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두 대리자(agent)인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되는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아담의 실패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용어는 ‘순종치 아니함’이다.  이 말은 아담이 지은 죄의 자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이것에 필적하는 말이 ‘한 사람(그리스도)의 순종’이다.  앞 구절과는 대조적인 의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도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의 결과는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9),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것이다.   

Calvin은 이 구절을 가지고 로마서 주석을 통해 말한다.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진술한 경우, 우리는 이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만족시켜 드림으로 해서 우리를 위하여 의를 획득하셨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의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속성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만 고유하게 속해 있는 것이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이다.”  3장에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율법에 대한 완전하고 절대적인 순종만이 의로 간주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실 필요가 있다. 이는 의로우신 그분만이 우리에게 그 자신의 의를 전가시켜 주심으로서 우리를 의롭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오게 되면 먼저 그 안에서 율법의 정확한 의(the exact righteousness of the law)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 의는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된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열납 되고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의의 전가 교리를 지지하는 구절로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과 의가 되셨다는 것이다.  Calvin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것과 율법에 대한 온전하고 적극적인 순종만이 의로 간주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개념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강요』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었느냐고 물으면 바울도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라고 대답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그의 육신에서 의가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순종에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Calvin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의의 전가만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으로 인정” 된다는 표현이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4장 주석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을 주시려고 친히 율법 준수의 책임을 지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율법의 멍에에 순복한 것은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구절을 가지고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를 율법 하에 두신 것은 우리가 치를 수 없는 것을 그가 치르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따라서 바울이 논하는 바와 같이(롬 4장) 행위가 없어도 의를 돌려주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만이 우리의 의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Calvin의 글들을 요약하면 그는 명시적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하는 것은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신자들의 의의 기반으로서 그들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Martin Luther의 견해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책을 읽어 보면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구분하여 이해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우리들에게 의로서 전가된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Luther의 순종의 개념 안에는 분명히 능동적 순종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갈라디아서 주석』의 말을 인용하면 “성령은 시편 40편에서 그리스도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 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12절, 시 41:4, 69:5 참조).  여기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말씀하고 계시고,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죄가 있다고 선언하신다. 이 증언은 무죄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말이 아니다. 바로 모든 죄인의 인격을 직접 취해 온 세상 죄의 죄책을 자기 몸에 짊어진 고난의 종 그리스도에 대한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죄를 자신이 담당하셨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율법의 참된 기능은 내게 죄에 대해 알려 주어 나를 낮아지게 함으로써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율법은 죄인들에게 지옥을 비롯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여준다. 이것이 율법의 참된 기능이다. 여기서 요점은 죄인들을 율법이 자기들이 죄를 알려 주어 자기들을 낮춤으로써 자기들이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고소하고 괴롭힘으로써 자기들을 구주와 보혜사이신 그리스도께 이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Luther는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그리고 율법의 참된 기능이 무엇인지를 나열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율법을 지키셨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일을 겪으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속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순종으로 율법 아래에 있던 자를 구속하실 수 있었다. 율법에 관해서는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행위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율법의 정죄를 감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셨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 어떤 공로인가, 우리의 공로는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율법 아래 들어가심으로써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를 속량하셨다.”  Luther의 말을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순종은 율법 아래에 있던 자들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고, 죄를 위해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위한 구속의 수단이며 공로가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의 글 속에서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개념마저 없는 것이 아니다.  

『Westminster Confession』의 저자인 A. A. Hodge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그는 먼저 그리스도의 완전한 만족이 어떻게 그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각기 우리의 칭의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둘 다 포함하고 있는가를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비록 사람이기는 하셨지만 신적인 인격이셨다. 신적 인격으로서 그는 자발적으로 ‘율법 아래 놓여지셨으며’ 또한 인간적 조건들 하에서의 율법에 대한 그의 모든 지상적 순종은 그의 고난과 마찬가지로 대리적이었다. 그의 ‘능동적 순종’은 대리적 순종으로 간주된 그의 전 생애와 죽음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수동적 순종’은 대리적 고난으로 간주된 그의 전 생애와 특히 그의 희생적 죽으심을 포함하고 있다. 아담은 원래적인 은혜스러운 행위 언약 하에서 인류를 대표하였다. 그는 타락하여 순종이 조건부였던 ‘영생’을 상실하고 불순종이 조건부였던 죽음의 형벌을 받았다.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아담이 남겨놓았던 것과 똑같이 그의 선택한 백성을 위하여 언약을 떠맡으신다. 그는 ‘형벌’(그것을 범하는 자는 죽으리라)을 받으시고, ‘보상’(이것들을 행하는 자는 그것들에 의해 살리라)을 획득하신다. 그의 전체 대리적인 고난적 순종이나 순종적 고난은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수동적 수종’으로서 그것은 율법의 형벌적 요구를 만족시킨다. ‘능동적 순종’으로서 그것은 우리를 위해 중생에서 영화까지 영생을 획득케 한다. 이 의로움이 우리들에게 전가된 것은 우리의 칭의이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만족이 그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포함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의 언약적 의무들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이것들이 첫 아담에 타락에 의해 남겨졌기 때문이다. 그 언약의 인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는 ‘이것들을 행하는 자는 그것들을 의해 살리라’(레 18:5, 롬 10:5, 갈 3:12, 마 19:17)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형벌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다만 죽음의 형벌만을 받으셨다면 그리고 아담에게서 요구된 언약적 순종을 이행하지 않으셨다면,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의 조건들을 개정하시고 요구된 조건이 없을 경우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거나, 혹은 우리가 그것이 결핍된 채로 영원히 계속해야만 하거나, 혹은 우리가 아담이 그의 배교 이전에 행하였던 곳에서 시작하고 우리 자신의 인력들에서 행위 언약의 조건들을 성취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 나중의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에 의하여 우리들을 위해 그것들을 성취하실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입증되고 있다. 성경은 그가 형벌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 ‘아들의 양자’ 그리고 ‘영원한 기업’을 확고히 하셨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갈 3:13-14, 4:4-5, 엡 1:3-13, 5:25-27, 롬 8:15-17). 그는 그의 순종과 그의 고난에 의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명백히 언급되고 있다(롬 5:18-19).

더 나아가 Hodge는 율법의 계율에 대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의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행위 언약의 조건은 완전한 순종이었다. 첫 아담의 손에서 실패된 언약은 둘째 아담의 손에서 성취되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은혜 언약에서 그리스도는 행위 언약 하에서의 그의 백성의 모든 이행되지 못한 의무들을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고난은 형벌을 면제하지만, 그의 능동적 순종은 조건들을 성취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무상적(無償的)이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비록 그리스도가 여자에게서 태어나심으로써 율법 하에 놓여지시고 또한 그의 피조된 인성의 수행에 있어서 그 율법에 순종하셨지만, 그는 그 자신을 위해 그와 같이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그 공로들이 그의 백성들에게 전가될 수 있도록 무상적으로 그와 같이 하셨다. 왜냐하면 율법의 요구들은 자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들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가 불의한 자를 위해 의로운 자로서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그는 율법의 주체 대신에 율법 수여자로서 순종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돌려진 두 가지 결과를 제시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의 의는 율법의 형벌과 행위 언약의 적극적 조건들(율법에 대한 순종)을 만족시킨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로의 의의 전가는 형벌의 사면과 죄들의 용서, 그리고 신자를 언약이 성취되고 그 모든 약속들과 유익들이 법적으로 적용된 자로 인정하고 취급하는 사실을 확고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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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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