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언약

행위 언약 2022. 3. 27. 18:59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대해서 똑같이 고차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왜 한 부류는 인정하고 다른 한 부류는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왜 어떤 목회자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 세대주의적(문자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언약 신학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고집스럽게 장로교회 정치를 옹호하는 반면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회중교회적 형태를 완강하게 고집하며 옹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는 신학자들 중에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성령세례의 결정적인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방언의 은사는 더 이상 참된 은사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감히  묻고 싶다.  ‘꼰대’ 같은 교단 신학이 무엇인지, 왜 그리도 많은 의견과 주장이 존재하는지 말이다.      

성경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우리들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이견(異見)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피곤하고 끔찍한 일이다.  물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딤후 3:16) 통일된 진리의 말씀이 과소평가돼서는 안 된다.  나 역시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닌’ 것을 믿는다(벧후 1:20-21).  하지만 정경인 성경 66권이 글로 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신학적인 견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신학자의 말이 가장 성경적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문제다.  성경이 가장 권위가 있는 책이라고 서로 나팔을 불어대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다.   

간혹 자신은 자기가 비평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중증 환자 같은 사람들이 있다.  영적인 우월감, 혹은 관종에 가까운 교만한 비평을 밥먹듯이 하는 목사나 신학자들 말이다.  이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미덕(美德)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고집스러운 부정주의(negativism)는 자만심을 잘 자라게 하는 대단히 영양가 높은 음식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치 돼지가 ‘도살의 날’를 위해 교만을 살찌게 만든 것과 같다(약 5:5).  지금 이 시대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형제를 향한 사랑과 용서이지 비평과 판단과 정죄, 더 나아가 논쟁을 통해 내 견해와 주장이 맞다는 얼빠진 소리를 하는 시대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이 이러한 몹쓸 병에 걸린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C. S. Lewis의 말을 인용하면 교만한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지를 전혀 모른다.  정신병원에 있는 조현병 환자가 자신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헛소리 하는 것과 같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보호 앞에 스스로 겸손하지 않는다면, 이런 위험에서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자기 스스로 성경을 읽다가 혹은 성경을 해석하다가 생기는 많은 의문들을 허용하게 되면 마음에 심리적 동요가 일어난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이다.  내면적으로 안정감을 잃을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배운 신학과 전통을 내던져 버리지 못하는 심각한 금단 현상이 나타난다.  증세가 조금 더 심각한 사람은 본인 스스로 성경 본문에 나와 있는 뜻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자만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석의’ 가 아닌 ‘자기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어 자신도 모르게 전통적인 해석에 성경의 권위를 이전시켜 해석한다.  이런 문제는 그 전통적인 해석에 맹목적일 정도로 확실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자기 입맛대로, 혹은 교주(?)가 시키는 대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가령 성경을 해석하거나 석의할 때 그렇게 많은 함정들이 숨어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해서 가르치고 있다는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내가 성경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고 있을지 모른다는 심적인 부담감이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것들을 신자들의 양심에 바리새인처럼 제멋대로 얹어 놓거나(마 15:1-6, 눅 11:52), 혹은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그것을 무시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넘어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양심에 찔리는 부담감을 어떻게 떨쳐버릴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양심에 화인을 맞는 사람은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그냥 넘어간다.  요지가 무엇인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지와 무식 그리고 꼰대 같은 신학과 서튼 석의로 얼마나 많은 영혼들에게 피해를 입혔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선생들이 무서운 심판을 받는 것인가?(약 3:1).  교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마 23:15).

먼저 글(의(義)의 전가)에 이어 행위 언약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제 그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요구 조건, 즉 언약의 요구 사항들을 완전히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실제적인  율법 순종이 아닌,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시고’(엡 2:15) 그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역(갈 3:13)을 통해 구원의 혜택을 값없이 누린다(엡 2:8).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교인들처럼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영생을 얻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롬 10:2-3), 이는 자신을 구원의 소망에서 끊어 버리고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갈 3:10).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하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힘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겸손히 깨닫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행 4:12)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행위에 기초하여, 즉 우리의 공로와 성취에 근거해 나아가는 것이다.  불행히 이 방식은 율법의 기준을 이용하여 심판으로 이끌고 결국 정죄를 받게 된다.  그 이유는 자신을 율법 아래 놓는 자들은 자신의 영혼을 저주 아래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갈 3:10).  한 마디로 율법은 구원할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갈 2:16).  또한 그것은 저주를 돌이키게 할 수도 없다(롬 3:20-24).  그러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전적으로 자신이 지셨다(신 21:23).  그가 그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형벌을 지고 갈 필요가 없다(요 1:29).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원의 유일한 방법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골 1:20-23).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구원은 몸의 부활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부활도 같이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즉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려’(갈 1:4),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 것이다(요일 1:7).  다 끝난 것인가?  아니다.  예수님은 죄 문제뿐 만 아니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부활을 하셔야만 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를 넘어 부활이 완성이기 때문이다(롬 6:5-10, 8:11, 10:9, 고전 15:7, 21-22, 벧전 1:3-4).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고전 15:13),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고전 15:17) 있게 된다.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의 사역으로(히 9:22), 부활은 구속의 완성으로(고전 15장), 이 둘은 동전의 양면 같이 복음의 핵심이다.  한 마디로 십자가만을 줄기차게 강조하여 복음을 반쪽짜리로 만들지 말고 그리스도의 부활도 똑같이 증거 하라는 것이다.    

A. A. Hodge는 행위 언약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그는 어떤 의미에서 행위 언약은 완전히 철폐되었고, 또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이 언약은 아담에 의해 깨뜨려졌으므로 그의 자연적 후손들 중의 한 사람도 그 조건들을 성취할 수 없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그 조건들을 모두 성취하였으므로 구원은 이제 신앙의 조건 하에서 제공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둘째 아담에 의해 성취된 행위 언약은 복음 하에서 폐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불변적 공의의 원리들에 기초되고 있으므로, 여전히 그리스도의 의에서 제공된 피난처로 피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얽매이고 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자는 그 의로 살리라’(롬 10:5)와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법은 남아 있으며 또한 사람들의 불의의 결과로 그들을 정죄하며 그들이 그것을 절대적으로 성취할 수 없는 무능성의 결과로 그것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오는 몽학선생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실패한 그 조건과 아담이 초래한 그 형벌을 동일하게 성취하셨으므로, 그는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이 언약의 마침이 되셨다. 따라서 믿는 자는 그 안에서 언약을 성취하고 그 약속된 보상을 받을 공로가 있는 자로 간주되고 취급되는 것이다’    

Hodge의 말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은 지금도 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하고(갈 3:10),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 즉 율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영생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행위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다(롬 10:5).  그 이유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롬 6:23).  그러나 인류의 조상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롬 5:12)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롬 3:11-18)이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게 하는 율법(롬 4:15)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갈 2:16)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롬 3:28).  즉, 율법 아래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지만(갈 5:4)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갈 5:18). 

따라서 행위 언약의 유효성은 부분적으로 지나간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이 언약의 완전한 순종 요구가 부분적으로 아직도 유효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만이 이 법적 요구를 완수하셨기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받은 성도들은 이 언약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한 마디로 불신자들에게 유효하지만 신자들에게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적으로 회개하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새 언약’(히 9:15) 혹은 ‘더 좋은(은혜) 언약’(히 8:6)에 속하게 됨으로 행위 언약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간의 죄에 대한 무서운 형벌을 십자가에서 다 감당해 주셨다는 ‘수동적 순종’,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애 전체 즉, 율법의 요구에 완전하게 응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 주실 뿐 아니라,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셨다는 ‘능동적 순종’.  이 교리는 성경적 근거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고전적 입장에 있어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인정받는 충실하고 소중한 교리다.  물론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들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적대적인 마음을 품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들의 반쪽짜리 믿음을 존중한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만약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기주장만을 내세우지 말고 상대방의 견해에도 귀를 기울이면서 좋은 것은 받아들이는 가운데 형제의 신앙과 신학을 존중해 주는 넓은 아량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단이 아닌 이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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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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