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의 언약이 아직도 유효성(有效性)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아담이 타락할 당시 완전하게 폐기되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과거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어졌던 행위 언약 전부가 인간 타락 이후 폐기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행위 언약으로 영원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여부가 우선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그 효력은 상실되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하나님 율법에 대한 순종이 지금도 요구되고 있으며, 이를 어길 때에는 저주와 형벌이 임하는 반면 이를 순종하면 생명을 얻는다는 원칙이 현재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유효하다(레 18:5, 갈 3:12).  반면에 실제적으로는 타락으로 인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결과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본고(本稿)는 내 개인의 편견과 감정을 쏟아내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개인적인 편견이 개입되었을 것이다.  먼저 밝히고 싶은 것은 나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교리를 부인하는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도 아니고, 능동적 순종 전가 교리를 부정하는 율법폐기론자도 아니다.  행위 언약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행위 언약을 부정하면서까지 은혜 언약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엡 2:8)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위 언약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셨듯이(레 11:44), 신약에 와서도 신자들에게 여전히 거룩한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벧전 1:16).  한 가지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긍정하던 부정하던 상관하지 않지만, 나의 신앙과 신학에 있어 최고의 권위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딤후 3:16) 성경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남들보다 흠이 많고 죄가 많은 인간이긴 하지만 ‘복음을 적당히 왜곡시켜 팔고’(현대어 성경) 다니는 삯꾼이 아닐뿐더러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고전 4:6) 진리를 전하는 자가 아닌 것만을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있다.   

먼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행위 언약 사상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가 Calvin에게 없는가” 하는 것이다.  Herman Bavinck는 언약은 개혁 신학의 핵심이기 때문에 언약을 모르면 개혁신학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만약 Bavinck의 말이 사실이라면 Calvin은 개혁 신학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Calvin이 쓴 책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신학의 가장 큰 틀인 ‘행위 언약’, ‘은혜 언약’, ‘구속 언약’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난독증이 걸린 것인가?  아무튼 Calvin에게는 행위 언약에 대한 신학이 없다.  그에게 있어 행위와 율법 그리고 공로 사상이, 창조와 은혜에 대한 자신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종교 개혁 이전에는 언약 교리가 발전하지 못했지만 종교개혁 시대에 들어와서 언약 신학이 시작되었고, 후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저자이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지지한 Zacharias Ursinus부터 언약 신학이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Binding of God』의 저자이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총장인 Peter Lillback 역시 Calvin 신학에는 행위 언약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Calvin 주석 창세기 2장 16절을 근거로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을 언급하면서 그가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모세는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과 함께 인간이 이 세상의 통치자라는 것을 가르친다. 율법은 인간의 복종의 표시로 부여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느 과실이든지 마음대로 먹었다 해도 하나님에게는 전혀 차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단의 나무는 순종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이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신성을 경외하는 일에 익숙하도록 계획하셨다”  이 인용구에서 Calvin은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언약적 개념의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

Calvin의 대작 『기독교강요』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영생의 보증으로서 생명나무를 주시고 그 열매를 먹는 동안은 영생을 확신할 수 있게 하셨다(창 2:9, 3:22). 또 노아와 그 후손들을 위해서 무지개를 두시고 홍수로 땅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표를 삼으셨다(창 9:13-16). 아담과 노아는 이런 것을 성물(성례)로 생각했다. 그 자체로서는 영생을 줄 수 없는 생명나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며, 반대쪽에 있는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 불과한 무지개가 홍수를 막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생명나무와 무지개에 표를 새겨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증명과 인이 되었다”  여기서 Calvin이 생명나무와 무지개, 이 둘을 언약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행위 언약이라는 명칭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Calvin은 하나님이 이들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여러 성격과 요소를 가지고 언약적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 언약 사상이 Calvin과는 무관한 이론이며, 그가 가지고 있던 언약 개념이 아닌 것처럼 막무가내로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는 구절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어지기 전까지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사람들이 로마서 1장 19-20절과 2장 14-15절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려는지 궁금하다.  분명 확증편향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exegesis(석의)가 아닌 eisegesis(자기해석)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금이라도 구약의 역사와 유대교에 관한 책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 그 율법을 지켰다는 사실은 랍비(Rabbi)들의 가르침 가운데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이방인 중에는 모세의 율법과 규례에 대한 것을 단 한번 들어보거나 소유하지 못한 불리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율법의 요구를 ‘본성으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모세의 율법에서만 요구하는 특별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인류가 널리 인정되고 존중되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요구 사항들이다.  수많은 작품을 남긴 유대인 학자이며 철학자인 Philo of Alexandria는 율법과 본성 사이의 일치를 가르쳤다.  그는 모세가 그 제정된 법령이 본성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그가 세상 창조에 대한 기록을 맨 앞에 놓음으로써 “세계가 율법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이로써 충성된 시민이 되어 전 세계 그 자체가 통치되는 조화 속에서 본성(Nature)의 목적과 의지에 그의 행동을 통제한다는 것을 시사하였다”라고 주장한다『On the Creation, 3』.  

그렇다면 성경은 Philo의 주장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바울은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들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여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하여 자기의 마음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의 행위를 보여 준다’(롬 2:14-15 / 바른 성경).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제정한 법이 아니면 그 어떠한 법이든 간에 그 법은 사람들에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레미야 31장 33절과 히브리서 8장 10절에 묘사된 마음에 새겨진 율법에 대한 새 언약의 약속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즉 율법의 기본적 요구사항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저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을 간략하게 집고 넘어가고 싶다.  율법이란 신구약을 망라한 성경의 모든 행위 규범 규정 및 인간 양심에 내재한 하나님의 신적 의지까지 다 포괄하고 있는데(롬 7:7-9), 이것을 조금 더 구분하면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기본적 율법’(Elemental Law)이다.  이것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엡 1:11) 즉,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자체 안에 심어 놓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가리킨다(신 29:29).  이는 그 대상이 비이성적인 피조물인가, 이성적인 피조물인가에 따라 자연율과 도덕률로 구분된다.  먼저 자연율(Nature Law)이란 비이성적인 피조물에 내재(內在)한 고유한 특성을 가리킨다(롬 1:19-21).  반면에 도덕률(Moral Law)은 자유 의지를 갖는 이성적 존재로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의 본성에 내재(內在)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으로 ‘이성과 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롬 2:14-15). 

조금 더 살펴보면 도덕률은 이성적(理性的) 피조물 내부에 선천적(先天的)으로 심어준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무지(無知)나 몰이해(沒理解)가 있을 수 없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知覺)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아무도 무지를 구실로 삼아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이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무언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생래적(生來的)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Calvin은 요한복음 1장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린다.  “부패한 성품 속에 남아 있는 그 빛 가운데는 두 가지 주요 부분이 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가 뿌려져 있고, 또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그들의 양심에 새겨져 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겪게 되는 죄책감은 누가 가르쳐 주어서 알았던 것이 아니다.  이미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하나님의 신적 의지의 표현이 이성과 양심으로 반영된 것이다(창 4:13). 

뿐만 아니라 이는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을 강압적으로 심어준 것이 아니라 신적 지혜에서 비롯된 조화로운 것이므로 그 대상도 도덕률의 내용이 합리적임을 인식한다.  또한 시간의 흐름이나 어떤 상황과 변화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변(不變) 하시는 속성(민 23:19-20, 삼상 15:29)의 반영(反映)이므로 그 내용 및 원리(原理)가 영원하다.  더 나아가 성문적 율법이 외부적으로 널리 알려진 법인 반면 도덕률은 인간성 내부에 존재하는 기본적 율법으로, 이는 시간이 제한을 받지 않음과 마찬가지로 공간적 제한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다른 하나는 ‘성문적 율법’(Enactive Law)이다.  기본적 율법이 창조 시부터 모든 피조물 내부에 심어진 하나님의 의지인 반면 성문적 율법은 그 후에 특별 계시(초자연 계시)의 방법으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의지로써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만을 대상으로 한다.  이는 다시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기본적 율법 가운데 도덕률을 요약하여 성문화 한 ‘도덕법’(출 20:1-17)과 모세에 의해 주어진 제사법과 같은 종교적인 ‘의식법’(레 3:1-50), 그리고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성결한 사회생활 유지를 위해 주어진 ‘시민법’(레 25:39-41)이다.  이처럼 율법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고, 이러한 율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정의하면 “모든 피조물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실행을 위한 강제력이 뒷받침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Hodge의 말을 인용하면 하나님의 법의 기관으로서의 양심 그 자체는 마음에 기록된 법을 함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 5:13) 구절을 가지고 모세 이전에는 율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궤변을 늘어놓지 말아야 한다.  한 마디로 율법이란 용어가 꼭 성문화(成文化)된 율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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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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