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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4.21 이중 예정 1
  2. 2024.04.14 꿀 먹은 벙어리들 1
  3. 2024.04.11 우리의 선택
  4. 2024.04.07 그리스도인의 책임 1
  5. 2024.03.31 부활
  6. 2024.03.24 웨슬리와 예정
  7. 2024.03.17 칼빈과 예정 1
  8. 2024.03.10 예정
  9. 2024.03.03 선택
  10. 2024.02.25 작정과 섭리 1
  11. 2024.02.18 원죄 2
  12. 2024.02.11 Trip
  13. 2024.02.08 Street Food
  14. 2024.02.04 Seoul
  15. 2024.02.01 Osaka
  16. 2024.01.31 Kyoto
  17. 2024.01.28 Japan
  18. 2024.01.21 주권과 자유 2
  19. 2024.01.14 보편 속죄 1
  20. 2024.01.07 형벌 대속 1
  21. 2023.12.17 웨슬리와 성경 1
  22. 2023.12.10 칼빈과 성경 1
  23. 2023.12.03 알미니안주의 2
  24. 2023.11.26 카더라 통신 먹사들 1
  25. 2023.11.19 웨슬리는 누구인가?
  26. 2023.11.12 칼빈은 누구인가? 1
  27. 2023.11.05 영적 체험
  28. 2023.10.30 직통 계시 1
  29. 2023.10.08 선지자 1
  30. 2023.10.01 계시의 지속성 1

이중 예정

칼빈과 웨슬리 2024. 4. 21. 16:09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8)는 말씀처럼 Wesley는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중심성을 확고히 인정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을 강조한 것이다(엡 2:8).  여기까지는 Calvin의 주장과 같이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어떻게 인간에게 작용시키느냐에서는 다른 차이를 보였다.  이 차이는 머리카락 하나의 차이지만, 그 응용에서는 대단한 의미와 차이점을 드러낸다. 

Calvin은 은혜의 작용을 ‘이중 예정’ (double predestination) 교리로 설명하였다.  그리스도의 구속과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는 오로지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선택(election) 받아 구원으로, 또 다른 이들은 유기(reprobation) 즉, 영원한 멸망에 이르도록 정해졌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구원에 이르도록 결정하신 자들과 멸망으로 내어 맡길 자들을 정하셨다는 것이 Calvin의 불변적 입장이었다.      

반면에 Wesley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그리스도의  속죄(atonement)에 연관시켜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대속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주장하였다.  즉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셨으니’(롬 3:21)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롬 3:24)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에게’(롬 3:26)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Wesley는 Calvin의 예정 교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성화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막고, 선을 행하기 위하여 열심을 내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킨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성모독적인 내용 때문에 “나는 예정 교리를 혐오한다”라고 말했다.  『Free Grace. A Sermon Preached at Bristol. By John Wesley』에서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인류의 대다수는 하나님께서 사망으로 예정하셨으며, 그런 사람들에게 은총은 값없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하시며, 그들은 때어나기도 전부터 영원한 사망으로 예정되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절대적으로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육신과 영혼이 함께 지옥에서 멸망당하도록 태어났다”  이 말의 의미는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싶어도 저주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지옥에 갈 수 받게 없다는 것이다.           

Wesley는 이 설교를 하고 나서 Calvin의 예정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것이 바로 그 가공할 만한 무서운 예정의 교리에 담긴 신성모독적인 내용이다. 여기서 내 입장은 확고하다. 이 점에 관한 한 나는 이 교리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의견을 달리한다. 예정 교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악마보다 악한 것으로 더 거짓되고 더 잔인하고 더 불의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런 신성모독적인 내용 때문에 나는 예정 교리를 혐오하는 것이다”

이렇게 Wesley가 예정론을 신성모독적인 교리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모욕하는 결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만큼 그 예정을 아실 터인데(마 9:2-7, 막 2:6-8, 눅 6:8, 요 1:47-51, 4:18, 11:11-15, 행 1: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3) 즉, ‘부활이요 생명이신’(요 11:25) 자신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시니 말이다(요 6:40).  구태여 예정된 사람에게 꼭 이렇게 말씀하실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Calvin의 입장에서 보면 창세 전에 선택받고 예정된 사람이라면(엡 1:4-5) 죽기 전에 구원받는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창세 전에 누가 선택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Wesley 이런 근본적인 차이점에 대해 언급하며 Calvinist에게 말했다.  “Calvinist들은 예정을 붙들지 않으면 자유의지를 붙들게 되어 인간의 구원 속에 있는 영광의 하나님께 누가 될까 두려워한다”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 나온 이 말은 짧지만 강력한 말이었다.  Wesley의 책들을 읽어보면 그는 은혜의 수위성을 강조하는 여러 종교 개혁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 가능한 것으로 설명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때, 그는 Calvinist들과 서로 다른 자리에 서게 된다. 

이러한  입장을 Harold Lindstrom는 『Wesley and Sanctification』에서 잘 요약하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Wesley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 개념을 거부한다. 즉 은혜는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양태로는 작용하지 않는다. 은혜의 효과성은 인간의 협력에 달려 있다. 이런 기본 사상에 동조하면서 그는 무조건적인 견인 교리를 반대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배교할 수 없는 자들로 간주되지 않는다”    

성경은 이 문제를 가지고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참포도나무의 가지인 신자들(요 15:4-6), 즉 거룩함을 입은 자들(벧전 2:9)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얼마든지 타락할 가능성이 있고(히 4:1-2), 영원히 멸망당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롬 11:22).  교회에서 물세례를 받고 중생한 가운데 거룩한 삶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타락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히 3:12).  

Wesley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결국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나오는 많은 구절들을 제시한다(마 7:21-23, 10:33, 12:31-32, 24:13, 눅 8:13-15, 요 8:31-59, 15:4-6, 고전 3:11-17, 9:27, 15:2, 갈 5:4, 살후 2:3, 딤전 4:1-2, 5:15, 딤후 2:12, 히 2:1, 3:6-14, 6:4-8, 10:26-39, 12:14, 약 2:14-26, 벧후 2:20-22, 3:17, 요이 8절, 계 3:5, 15-16, 22:19).

무엇보다도 Wesley는 저항할 수 있는 은혜가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킨다고 믿지 않았다.   이 말이 상당히 모순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한 ‘하나님의 주권’이란 인간 스스로 내리는 어떤 선택이든 이를 얼마든지 함께 고려할 수 있으면서도 결코 손상을 입지 않는 차원의 주권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Wesley는 자신이 Calvinist들보다 더욱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 여긴다고 실제로 믿었다.  스스로 제의를 거절할 수 없는 누군가를 구원한다고 말하는 것이 사전에 정해져서 저항할 수 없는 작정에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Wesley의 입장에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인간이 상급을 받거나 벌을 받을 수도 없는 단순한 기계로 만들어 버리는 결핍된 인간론을 낳는다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잘못 이해하면서 동시에 인간론을 바르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그는 주권적 창조주 개념을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공의로운 통치자라는 개념을 추가했다.  Wesley의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Allan Coppedge는 『John Wesley in Theological Debate』에서 이런 추가로 인해 인간의 결정이 끼어들 자리 및 가능성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과 순종을 통해 구원의 메시지에 응답하기를 바라신다고 말한다.   

성경은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통치로 인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화를 이룬다고 Wesley는 주장한다.  또한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prevenient grace)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응답할 책임이 있고(막 16:16), 또한 영적 흑암에 빠져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전도할 필요성을 강조한다(마 28:19-20).  마태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 4: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지(foreknowledge)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감춰져 있는 만큼 Calvin의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도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지 설명해 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Wesley는 사랑의 하나님은 자유를 박탈하는 대신 은혜를 베풀어 제대로 누리게 한다고 확신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배타적으로 구원을 받거나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은혜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추후에 다시 논의하겠지만 인간이 어떤 노력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처럼 무식하게 떠들어대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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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왕이 제 멋대로 제사를 드리고 죄를 범했을 때,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 면전에서 그를 책망하였다.  죽을 때까지 여자 문제가 많았던 다윗 왕이 간음죄를 짓고 간접 살인죄를 저질렀을 때, 나단 선지자는 비유를 들어가며 다윗 왕을 혹독하게 책망했다.  악한 왕의 대명사로 불리는 아합 왕과 남편 못지않게 악녀로 불리는 이세벨이 사악한 죄를 저질렀을 때, 엘리야 선지자는 그들에게 살벌한 예언적 죽음을 선포했다.  갈릴리의 통치자 헤롯 안티파스가 간음과 근친상간을 동시에 범했을 때,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은 공개적으로 그를 신랄하게 책망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특별히 대형 교회 목사들과 교계에 이름난 지도자들 말이다.  입틀막을 당한 것인지, 입틀막을 당할 것이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압수수색이 무서워 말 한마디로 제대로 못하고 있는 꿀 먹은 벙어리들이 되었다.  교회 안에서는 온갖 난리부르스 치듯 성령 충만한 것처럼 요란하다.  문제는 입에 게거품을 물듯 설교로 떠들어 대지만 막상 세상 밖으로 나가면 무엇이 불의이고 잘못된 것인지 말 한마디 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만큼 교회가 썩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대통령을 만드는 데 충견 노릇을 했던 목사와 교인들은 회개해야 한다.    

성경은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런데 기독교를 무당 종교로 만들어 버리고, 안수를 남발하는 한국 교계의 지도자들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누가 알았으리요?  그 사람이 손바닥에 ‘왕’이란 글자를 쓰고 나올 줄 말이다.  개나 소나 안수하고, 개나 소나 안수받는 이 더럽고 패역한 시대, 누구 한 사람 나단 선지자처럼 행동하는 목회자가 없다.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할 교회는 권력에 눈치를 보는 기생충 같은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 같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특권은 어디 갔는가?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노동자의 삶과 인권이 유린당할 때, 가장 먼저 정부를 향해 쓴소리로 비판하고 시국 기도회를 열었던 사람들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도대체 이들의 담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털어도 나올 것이 없기 때문에 담대한 것 같다.  반면에 충견 노릇했던 회칠한 바리새인 같은 교계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책 잡힐 일이 없으면 담대하겠지만 무엇인가 뒤가 구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을까 하는 것이다.  교인들 앞에서는 하나님을 시인하는 자들이지만 세상에서 행위로 부인하는 가증한 자들이다.    

미신을 정치적으로 확신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권위주의적인 통치형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미신을 확신하는 사람이 정치권력을 잡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똥이 삼 년 묵힌다고 된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 마디로 개소리다.  영적인 시야가 가려 똥과 된장을 구분할 줄 모르는 꿀 먹은 벙어리 목사들이 한국 교회에 너무나 많다.  국가의 중요한 위기 때마다 교계 지도자들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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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소리는 곧 하나님의 소리다.

-탈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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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가 없는 나라

인권 후진국 한국의 미래를 위해

단 한 번의 선택은 5년을 좌우한다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고전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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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십자가와 부활 2024. 3. 31. 11:01

기독교의 등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 가마리엘이 관찰한바처럼, 지도자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 보통 어떤 운동이든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행 5:5:34-39).  부활만이 유일하게 논리적이며 실로 믿을 만한 설명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전부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느냐 아니야에 걸려 있다.  여기에는 교회 내의 소위 급진파들에게 주는 경고가 나온다.  부활의 특질이 결여된 설교는 지금이나 앞으로나 사람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의 설교가 아니다.  하지만 이 경고의 말은 급진파들만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성경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목사들 중에서도 마음으로는 부활의 진리에 동의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교와 믿음의 핵심으로 삼지 않는 자들이 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는 경축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경축하지 않는다.  물론 십자가가 없이 부활만 전파하면 그릇된 승리주의로 이끌 수 있다.  그러나 부활 없이 십자가만 전파하면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한다.  즉 ‘막다른’(dead) 골목이다.

Mahatma Gandhi는 인도의 한 선교사 단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여러분은 대단히 열심히 일합니다. 장미는 결코 누구에게도 자신의 냄새를 맡도록 초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장미가 향기롭다면 사람들은 그 냄새를 맡기 위해 정원을 건너오고 가시를 참아낼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부활하신 주 예수의 향기로 가득 차 있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전파하는 메시지에 끌린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말하는 바를 통해서 증거 하는 만큼이나 사는 방식을 통해서도 증거 한다.   

Paul Beasley Mur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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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ley는 Calvin 신학에서 신학적 원리로 제시한 단일 예정(single predestination)과 이중 예정(double predestination) 중에서 어느 것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Augustine과 Luther를 따르는 신자들은 성경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단일 예정을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739년 4월 29일 주일 아침, 그의 전체 설교 사역 가운데 한 획을 긋는 한 편의 설교를 한다.  이 설교는 로마서 8장 32절에서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이며, 제목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다.  『Free Grace. A Sermon Preached at Bristol. By John Wesley』에서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불변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예정에 따른 결론은 대다수의 인류가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망 가운데 속해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 외에 아무도 구원할 수 없으며, 하나님도 그들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절대적으로 구원하지 않을 것을 작정했다고 믿는다. 이는 그들을 멸망당하도록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영원한 죽음을 명하시면 저주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이든, ‘간과’이든, ‘단일 예정’이든, ‘영원한 멸망’이든, 아무리 부드럽게 표현하고 무엇이라 부르건 간에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이다” 

Wesley는 신학적 언어로 어떻게 표현되든지 간에 Calvin의 모든 신학적 변주(變奏)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이 모든 술어들이 뜻 하는 것은 분명하다.  Calvin의 주장은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계획에 따라 구원에 이르도록 결정하신 자들과 한편 멸망으로 내어 맡길 자들을 정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 중의 누구라도 저주를 받는 사람은 없다.  이 말의 의미는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무슨 죄를 짓더라도 지옥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저주받기로 예정된 사람 중의 누구라도 구원받게 되는 사람도 없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를 믿고 싶어도 저주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믿는 것과 상관없이 지옥에 갈 수 받게 없다는 것이다.       

Herbert Boyd McGonigle는 Wesley가 증거 한 설교, 『Free Grace』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 설교는 신학적인 대작이다. 예정에 대한 이 첫 번째 설교와 출판물은 Wesley가 교리적으로 반칼빈주의(anti Calvinism)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Calvin과 Calvinist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설교에서 대상으로 삼은 것이 Calvin의 무서운 결정, 즉 ‘잔인한 작정 교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  Wesley는 이 설교를 한 다음 날 “난 잔인한 작정 교리를 공식적으로 반대한다”라고 선언했다. 

Wesley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설교를 조금 더 들어보자.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설교하는 것이 모두 다 공허한 일이 된다. 이미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는 설교가 필요 없다. 설교를 듣던지 아니 듣던지 간에 틀림없이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설교는 유기된 자들에게는 헛된 일이 된다. 선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설교가 소용없다. 그들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설교와 상관없이 그들은 틀림없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설교하는 것도 헛된 일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Calvin의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리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솔직하게 말해 Calvinism 입장에서 보면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은 단지 예정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복음을 증거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눅 15:3-5), 즉 선택받지 못한 사람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지겹도록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만일 정당한 또는 명백한 불평이 있다면 그것은 예정에 적용된다. 내가 이런 말(예정)을 한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서 후손이 멸망할 거을 예견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 이는 장차 있을 일을 모두 예견하시는 것이 그의 지혜의 일부분인 것 같이, 그의 손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며 주관하는 것은 그의 권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Wesley 역시 Calvin의 이러한 주장에 논박한다.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헛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명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성화를 직접적으로 소멸시킨다. 그 교리 자체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성화를 추구해야 함을 파멸시키는 뚜렷한 경향을 띠고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교리는 성결함을 따르고자 하는 맨 처음 동기들을 전적으로 없애 버리기 때문이다… 자기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고 믿는 자에게는 인생의 싸움을 경주하게 할 아무런 동기가 되지 못한다. 자기가 영생이든, 사망이든 둘 중의 하나로 이미 판결이 났다고 믿는다면 성화를 이루기 위해 애쓴다는 것이 불합리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예정의 교리는 성화의 몇몇 특별한 가지들, 즉 온유함과 사랑과 같은 덕목들을 잘라 버리는 경향이 있다   

Wesley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Calvin은 하나님의 다른 특성들, 즉 사랑(요일 4:16), 거룩하심(시 99:9), 의로우심(계 15:3), 공의(사 5:16), 선하심(시 34:8)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있었다.  Wesley는 말라기 3장 6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불변성을 믿었다.  이것이 성경적 사실이라면, 영생의 선물(요 1:12)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불변한 사랑(약 1:17)과 선하심(시 86:5) 역시 포함된다고 그는 믿었다.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서 나오는 Wesley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명령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 명령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다. 즉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그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는 것이다”(막 16:16).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죄에 남아 있기로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있다.  예수님 당시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지니셨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이 사람들은 영적인 자살을 범하고 있었다(요 8:21-24).  Wesley는 예정(predestination)과 선택(election)과 관련해서 개인의 삶에 영향력을 가지고 저항할 수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의지보다는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의지라는 차원으로 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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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predestination)이란 용어는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들을 이미 정해 놓았고, 인간의 다른 조건들도 이미 하나님이 정했다는 차원으로 이해되었다.  즉 하나님이 미래에 일어날 어떤 것의 원인을 정하심이라고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세계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돌보심의 차원에서 ‘섭리’(providence)로 알려졌다. 섭리는 하나님이 온 우주와 사람들을 위하여 명하신 것을 반드시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 전에’(엡 1:4) 이미 주어진 명령이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그러한 명령은 예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섭리’라는 단어가 성경에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물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요약하는 의미로 사용되어 온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먼저 이 땅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주장한 Calvin의 말을 『기독교강요』에서 들어 보자.  “우리는 하나님을 멀고 먼 영원으로부터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지혜로 작정하시고 일단 작정하신 것을 지금은 권능으로 수행하시는 만물의 지배자요 통치자로 삼는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과 땅과 생명이 없는 피조물뿐 아니라 사람의 계획과 목표에서 시작하여 예정된 목적까지 하나님의 섭리가 주관한다고 선언한다”  Calvin은 하나님의 섭리(God's providence)가 자연적인 사건이든 인간의 결정이든 상관없이 모든 일의 발생을 세밀하게 명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세심한 섭리’(meticulous providence)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원한 선택과 유기에 대하여 말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조건에서 창조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어떤 이들은 영생을 얻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저주를 받기로 미리 정해졌다.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 결과를 얻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얻거나 죽음을 얻는 것이 예정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과 저주받을 사람을 미리 정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Calvin신학만이 보여주는 성격이다.   

성경에는 ‘이중 예정’(double predestination)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 용어가 하나님께서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를 같은 방법으로 실행함으로써 이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그 다지 좋은 용어가 아니다.  그런데 Calvin은 ‘이중 예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신학 곳곳에서 이러한 개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강요』에서 나온 말을 다시 한번 들어보자.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으로 포용하시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진노를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예정하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무차별적으로 구원을 선언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조명해 주신 사람들만이 그의 자비를 구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예정하신 사람들만 조명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버림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하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나의 주장은 여전히 확고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을 빼앗긴 자들은 저주를 받을 일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한 생명으로 창조된 사람들, 즉 선택받고 예정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반면에 영원한 멸망으로 창조된 사람들, 즉 처절하게 버림받는 유기자들이 있다는 관점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였다.  이렇게 미리 선택받은 사람들과 진노받을 사람들을 정한 것을 Calvin의 추종자들은 ‘이중 예정’이라고 명명하고, 그들의 개혁신학의 내용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온건 칼빈주의(moderate Calvinism) 자들은 이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지면 관계상 생략하겠지만, 극단적 칼빈주의자(Hyper Calvinist)와 다르게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무조건적이되,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조건적이라고 믿었다.

Calvin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구원받을 사람들을 따로 선택하셨다는 Augustine과 Luther의 신학 전통을 따랐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책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Calvin이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이 저주받을 사람들을 선택했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신학적 입장은 때로 ‘단일 예정’ (single predestination)으로 불렀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자를 선택하셨으나 선택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운명에 관해서는 아무런 적극적 의지를 표현하지 않고 ‘간과’(preterition)해 버렸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간과’라는 말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저주받을 사람들을 방치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Calvin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응답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닌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인도하고, 다른 사람은 지옥에 가는 것으로 예정되었다는 교리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작정 교리는 잔인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여기에서 ‘잔인한 작정 교리’란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주장하면서 설명한 유기의 교리를 가리킨다.  Calvin은 하나님께서 유기의 창시자라는 생각에 큰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이 생각을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것이 잔인하고 무서운 결정이란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서 후손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

이러한 예정에 관해서 Calvin 자신도 하나님의 예정은 참으로 두려운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가 아니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교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영혼의 문제에 관해 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예정을 굳게 믿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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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

칼빈과 웨슬리 2024. 3. 10. 11:25

『What Love Is This?: Calvinism's Misrepresentation of God』의 저자 Dave Hunt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성경 안에서 예정(predestination)과 선택(election)은 서로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는 동의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정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있을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답을 주지만 선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개념 간에 미묘한 차이는 이것이다. 선택은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행위인 반면 예정은 최종적 운명을 위해 그렇게 선택된 이들을 미리 선정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다. 이 두 단어가 의미상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  요약하면 선택과 예정은 자기 개념 속에 서로 함축하고 있는 상호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Reformed 전통에서 ‘예정’은 상당히 폭이 넓은 단어로 사용된다.  이 용어는 수여자(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신자를 위한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과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는 완전히 구원에서 제외된 불신자를 위한 ‘유기’(reprobation)의 양면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선택과 유기의 대상이 모두 죄인이라는 것이다.  영생으로서의 ‘선택’은 하나님의 자비, 즉 죄인들이 행한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호의에 근거한다.  반면에 영원한 정죄로서의 ‘유기’는 하나님의 심판, 즉 죄인들이 행한 것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그리 쉽지 않다.  지난 2천 년간 학자들 사이에서 이 문제를 놓고 살벌하게 논쟁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Louis Berkhof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작정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선택이든 유기이든 간에 하나님 자신이 직접적으로 모두 일으키신다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의심할 바 없이 세상에 죄가 개입되는 것을 확실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거룩함으로 예정하시는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죄로 예정하셨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죄의 조성자가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Systematic Theology』에서 나오는 Berkhof의 말이 사실이라면 Calvin의 예정론을 비판하다 Geneva에서 추방된 Jerome Hermes Bolsec의 주장이 틀린 것 같지 않다.  그는 회중 앞에서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 만들었다며 Calvin을 고소했던 사람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Calvinism 신학에서 타락 후 선택론(Infralapsarianism)과 타락 전 선택론(Supralapsarianism)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Calvin의 추종자들 보기에 이것이 좋은 전통이라고 자부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좋은 전통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중 예정’이 다른 신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면 성경적이지 않을뿐더러, 이 용어가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는 논쟁의 소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Reformed Theology에서만 가지고 있는 골치 아픈 전통이다.         

예정(predestination)이란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Calvinist 입장에서 예정의 근거 본문을 비스름하게 제시할 수 있는 구절들이 있다.  그것이 창세기 6장 8절, 12장 1절, 신명기 10장 15절, 14장 2절, 예레미야 1장 5절, 말라기 1장 2-3절이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정확하게 여섯 번 정도 나온다(행 4:28, 롬 8:29, 30, 고전 2:7, 엡 1:5, 11).  특별히 로마서와 에베소서에 사용된 경우에는 모두 사람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예정하다’로 번역된 동사는 헬라어의 ‘프로오리조’(proorizo)다.  전치사 ‘프로’는 ‘~전에’, 또는 ‘~앞에’라는 뜻이 있고, 동사 ‘오리조’는 ‘제한하다’ 또는 ‘결정하다’라는 뜻이 있다.  이 둘은 합쳐진 합성동사로 문자적인 의미는 ‘앞서 결정하다’, ‘미리 경계를 정하다’가 된다. 

영어로 ‘예정하다’(predestine)로 번역된 것은 ‘‘종국적인 운명을 결정하다’라는 뉘앙스(nuance)가 있지만 헬라어 원어에는 그 뜻이 담겨 있지 않다.  그럼에도 로마서와 에베소서에서는 영어의 뉘앙스가 담긴 의미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운명에 대한 미리 결정된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접두사 ‘프로’(~전에)는 에베소서 1장 4절과 요한계시록 17장 8절 말씀에 비추어 보면 결정이 일어난 시점이 창세전인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구원과 관련해서 예정은 영생을 주려는 특별한 목적에 따라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유기는 비택자들을 영원한 정죄에 처하도록 정하시는 것을 말한다.  

Calvin에게 있어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 of God)이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을 그의 뜻에 따라 미리 정한 것을 예정(豫定)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정론에 관한 교리를 설명할 때 Bernard와 Augustine, 그리고 Melanchthon의 글을 인용해서 설명했다.  이러한 신학자들이 예정을 주장하고 강조한 부분들을 인용해서, Calvin은 하나님의 주권을 핵심이 되는 조직 원리로 삼는 예정 교리를 완전히 체계화했다.  그러면서 『기독교강요』에서 말한 것처럼 예정의 교리를 반드시 성경에서만 찾아야 된다고 강조했다.  이 주장은 Calvin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Calvin의 추종자들 역시 이 입장을 끝까지 고수한다. 

그러면 Wesley는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Calvin의 절대 예정론을 하나도 믿지 않았다.  Wesley는 『The Works of John Wesley』에서 주장한 것처럼 ‘조건적 예정’(conditional predestination)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Wesley가 말하는 조건적 예정은 예지(foreknowledge)를 기초로 한 예정이다.  즉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또 보시고 구원받을 자격이 있음을 아시고 구원으로 예정하신다는 것이다(롬 8:29).  예정에 대한 Wesleyan의 핵심은 바로 예지의 역할이다.  그러면서 그는 『The Works of John Wesley』에서 말하기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이 질문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 모두 다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명 Calvin과 Wesley는 성경이 가르치는 예정을 믿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된 명령의 성격과 범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Calvin의 관점에서 보면 구원의 소유가 하나님의 작정(예정)의 토대에 의존한다고 본다.  즉 예정이 무조건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구원이 어떤 이들을 구원으로 선택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며, 무조건적인 선한 기쁨에 기초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른 이들이 아닌 이들을 선택하심에 있어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으신 것은 전혀 없다.   

반면에 Wesley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택의 능력에 달렸다고 본다.  즉 예정이 하나님의 예지에 기초함으로 조건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충족시켜야 할 조건을 제공하셨다.  하나님은 이 조건을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충족시키시는지에 대해 예지 하시고 이를 기초로 해서 선택하신다.  따라서 선택은 조건적이 되는 것이다.  Wesley의 신학이 잘못된 것인가?  Calvin의 ‘예정론’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둘 다 성경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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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칼빈과 웨슬리 2024. 3. 3. 12:13

‘수다한 사람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고후 2:17).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물을 섞어 자신의 이득을 위해 교묘히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혼잡하게 하는 자들’이라는 말에 사용된 동사는 부정하게 ‘이윤’(利潤)을 얻기 위해 순수한 원액 포도주에 물을 넣어 희석시킨 포도주를 파는 행상인들에게 사용하던 단어였다.  당시 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은 자신들만이 유대 법과 연설법을 훈련받은 전문적인 설교자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적인 보화를 파는 ‘밀매인’(NRVS) 혹은 ‘장사꾼’으로 보았다.  우리말 성경에는 ‘혼잡게’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바울은 이 서신의 뒷부분에서 이들을 ‘거짓 사도들’이라고 불렀고, 그들이 ‘사탄의 도구’라고 말하고 있다(고후 11:13-13). 

성경 말씀을 완벽하게 해석하거나 다룰 자격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금의 문제는 장사꾼들이 돈을 벌기 위해 술에 물을 타는 것처럼 신학자나 목사가 개인의 명예와 탐욕으로 인해 성경을 신학적으로 묽게 만들어 ‘자기 해석’(eisegesis)을 한다.  만약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가르친다면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고전 4:6) 않는다면 말이다.  문제는 진리의 말씀 밖에 넘어가 신학적 용어와 신학자의 말을 끌어다가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자기 해석이 꼭 맞은 것 같이 기를 쓰며 주장한다. 

성경에 나와 있는 바울의 글을 읽어 보면 그가 다른 사람과 논쟁을 할 때, 신학자들의 말을 들먹이지 않았다.  심지어 철학적인 사람들이 살았던 아덴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도 신학적으로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고 복음 전파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피력했다(행 17:16-34).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볼로는 어떠했는가?  그 역시 학자이자 웅변가이지만 복음을 증거 할 때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통해 유대인들의 말을 이겼다(행 18:28).  다시 말해 어떤 신학적 이슈(issue)를 가지고 다 아는 것처럼 떠들어 대거나 같은 문제를 반복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것은 관종이나 할 짓이지 목회자가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고전 13:12) 해석할 뿐이다.  이번 글만큼은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지 않고,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적어보고자 한다.

성경은 ‘예정’(predestination)을 가르치고 있는가?(엡 1:5).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미리 예정하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들이 성경에서 나온다.  그중 하나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 누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에 대하여 강한 말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여기서 ‘작정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배치하다’ 혹은 ‘할당하다’를 의미하는 군사적 용어다.  하나님은 각양각색의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작정된 자’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유대인(신 7:7)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거기에는 인종차별이 없다(골 3:11). 

바울은 에베소서 첫 부분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기초를 두기 이전에 선택하셨음을 주장했다.  ‘곧 장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엡 1:4-6).  특별한 목적이나 운명을 위해 개인이나 공동체(community), 혹은 그룹(group)을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것은 선택교리(doctrine of election)의 기초가 된다.  가능한 신학적 용어조차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특별한 백성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선택하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반에 흐르고 있다(창 12:3, 신 7:6-8, 11).  즉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목적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의지(엡 1:5, 11)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엡 2:8).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해서만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가르친다(딛 3:5).   

또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그곳 신자들이 믿게 된 사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음을 알게 된 이유라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그들이 신앙을 가지자 바울은 결론 내리기를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가 복음을 증거 할 때 그들이 믿었다고 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살전 2:13).  그 외에도 바울은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에 관해 언급할 때(살후 2:13), 그것이 우리의 행위가 아닌(딤후 1:9)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 계획된 무조건적인 은혜때문임을 강력히 주장한다(롬 8:28-30, 9:11-13, 살후 2:13, 딤전 5:21). 

그렇다면 선택받은 사람은 복음을 전하든 전하지 않든 어차피 구원을 받는 것인가?  바울의 행적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바울은 세 번에 걸친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랫동안 머문 도시는 고린도였다.  고린도 도시에 선택받은 자들이 많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행 18:9-10), 바울은 그곳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심히 증거 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말씀을 전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할 것을 바울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롬 10:14, 17).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가 전하지 않는가에 달려 있었다(막 16:15-16).       

여기서 궁금한 것은 창세 전에 선택받고 예정된 사람(엡 1:4-5)은 복음을 들을 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선택받은 데살로니가의 신자들을 생각하면 그런 것 같다(살전 1:4, 2:13).  하지만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들이 다 영접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1:11).  오래전 이사야는 이 같은 불신앙을 이미 예견했다(사 53:1-3).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자기 땅’(His own/NKJV)은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작은 민족’(신 7:7) 그리스도의 소유였던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헬라어로 ‘그가 그 자신의 것들에게 오셨다’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메시아를 거부한 것이다(요 12:37-41).  당연히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가장 먼저 외면했다.  도대체 유대인들은 누구를 영접하는 것인가?  요한복음 5장 43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아닌 다른 메시아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사람, 그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된 사람’(엡 1:4)도 주님이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손길을 얼마든지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3장 34절 말씀은 어떠한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예수님의 연민과 사랑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어미 닭처럼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사랑의 날개 아래 모으려고 하셨다.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단 한 번만이 아닌 것 같다.  구약 성경의 몇몇 구절은 사랑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의 ‘날개’ 아래 보호하시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롯 2:12, 시 17:8, 36:7, 61:4, 63:7, 91:4).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기를 ‘원치 않았다’  그분의 사랑을 거부했다.  이스라엘은 과거에 선지자들을 배척하였듯이(마 5:12) 이제 메시아를 배척했다.  그들이 예수님께 오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영생을 거부하는 것이다(요 5:40).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의 제안을 거부한 예루살렘을 보시고 애통해하셨다(눅 19:41).  따라서 선택받은 사람들, 즉 ‘원 가지들’(롬 11:21)도 얼마든지 잘려 나갈 수 있다(롬 11:20).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우는 곳’(요 15:6)이 ‘가라지 비유’와 연결하면 ‘풀무 불에 던져 넣는’ 지옥이다(마 13:41-42).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을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반드시 논쟁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한 구절을 놓고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셨다(마 6:22-23).  이것은 제자들이 가져야 할 영적인 안목을 설명하신 것이지만, 세상에는 좋은 눈을 가진 사람과 나쁜 눈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어떤 눈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꺾이운 원가지들’이라는 구절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이 가지들이 구원을 상실한 참 신자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은 이 가지는 구원이 아니라 상급을 상실한 신자들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 거짓 신앙생활을 하던 자라고 주장한다. 

왜 이런 주장들이 생기는 것일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누구든지 신학적 관점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런 문제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서로 자신의 견해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나팔을 불어댄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이지(고전 1:12-13)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약 3:13-18).  도대체 어느 것이 가장 성경적일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처럼 성경 그대로 믿고 전하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행 2:14-42).  오히려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라는 고통스러운 회개의 반응이 나타난다(행 2:37).  더 나아가 세례를 받는 역사가 나타나고(행 2:41) 구원받은 신자들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으기를 힘쓴다(행 2:43-47).              

성경에서 말하는 택하심은 하나님만이 갖고 계신 ‘미스터리’(mystery)한 비밀이다.  이것은 우리가 신학공부를 해서 발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바울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엡 1:4-6)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누가 예정되었거나 선택을 받았는지 전혀 모른다.  처음에 잘 믿다가 나중에 세상으로 돌아간 데마 같은 사람도 있고(딤후 4:10), 평생 못된 짓만 하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 믿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눅 23:42-43).  이런 일은 우리의 능력 밖에 일이라 하나님 외에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욘 2:9). 

요지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으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는 것이다(빌 2:12).  그 이유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히 9:27).  어떠한 심판을 받는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로 우리가 심판을 받는 것이다(마 16:27, 고전 3:12-15, 벧전 1:17, 계 22:12).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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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ley의 입장은 확고했다.   Calvin이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죄에 대하여 책임 있는 분으로 만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Calvin은 주야장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예정된 원리’ (determinative principle)라고 일관되게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강요』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의지는 만사의 원인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모든 계획과 일에 대한 결정적 원리로 삼는다. 하나님의 섭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선택자에게서 그 힘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유기자(reprobate)를 복종케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조금 섬뜩하게 성경을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빛과 어두움을 지으시고 평안과 환난을 지으신다고 말씀하신다(사 45:7). 그리고 자신이 시키지 아니하시면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암 3:6). 그러나 모세가 가르친 대로 우연히 자루에서 빠진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시킨 대로 되어진 것이었다(신 19:5)”.  이 난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조금 더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그런데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이 세상적으로 보면 재수 없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Calvin은 도끼를 휘두르다가 도끼머리로 맞아 죽은 사람도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Calvin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2004년도 일어난 Indian Ocean Tsunami 역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의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마 10:29).  참새는 시장에서 팔리는 가장 싼 종류의 새다.  세상에서 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참새에게까지 관심을 갖고 계시기에 하나님의 동의가 없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참새에게까지 이 정도로 관심을 갖고 계신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인간이 귀한 것(마 10:31)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인도양 쓰나미 희생자는 3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 죽은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누구든지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멸망당한다는 것이다(눅 13:4-5).

최근의 실례를 들어보자.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 이루어진 것인가?  Calvin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것 같다.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탄과 모든 불경자들은 하나님의 지배와 주권하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어떠한 목적에도 저들의 악을 지도해 나아 가신다. ….저들은 그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허용’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속임수로 그 난점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명백한 말씀으로 자신이 그 일을 하신다고 주장하심으로써 그러한 핑계를 거절하신다. …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시고 자신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결정하신 것 이외에도 저들이 무슨 일을 결정해도 인간으로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명백한 증거들이 입증해 주고 있다”  여기서 ‘허용’이 아니라 ‘의지’라는 말과 ‘작정’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한다.

그러면서 시편 115편 3절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 시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전쟁과 평화의 참된 조정자라고 한다면 그리고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다면, 누가 감히 인간은 하나님 모르게 혹은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동안 맹목적 충동에 따라 닥치는 대로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만 불경자들이 전쟁의 자극을 받는다”(습 2:1-3 참조).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주권자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직접 진두지휘 하신다는 것이다(렘 33:2).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겠는가?(삼상 2:6-7). 

여기서 궁금한 것은 모든 사건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죄와 상관이 없으신 분이신가 하는 것이다.  『기독교강요』에서 나온 Calvin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압살롬은 근친상간으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추악한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자신의 처사라고 말씀하셨다. 곧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에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 12:12).  예레미야는 갈대아 사람들이 유대에서 행한 잔인한 살육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고 말하였다(렘 1:15-16, 7:14, 50:25-27).  이러한 이유로 느브갓네살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려졌다(렘 25:9). …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무너짐은 하나님 자신이 하신 일이라고 하셨다(사 28:21).  …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여(삼하 16:10)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내버려 두라’(삼하 16:10-11)”. 

그러면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발생하는 사건마다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자주 발견한다.  … 성경을 적절하게 배운 사람이라면 내가 많은 증거들 가운데서 다만 몇 개의 증거만을 제시한 것이 바로 간결을 도모한 때문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몇 개의 예증만으로도 하나님의 섭리의 자리에 단순한 허용이라는 것을 대치시키는 자들이 얼마나 불합리하게 지껄이고 있는가를 매우 명백하게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은 망대에 앉아서 우발적인 사건들을 기다리고 있는 분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인간 의지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누구든지 허용’이고, ‘나발’(삼상 25:25)이고, 불합리하게 지껄인다면, 그것이 바로 ‘개소리’라는 것이 Calvin의 입장이었다. 

Calvin의 글을 읽어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작정(Decrees of God)과 예정(predestinate)을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Calvin이 주장하는 것은 허용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이 그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라면 Jerome Hermes Bolsec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을 죄에 대하여 책임 있는 분으로 만든 것 말이다.  오늘날도 누군가 Calvin이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면 이단으로 찍힐 수 있는가?  Harry Frankfurt 교수의 말대로 ‘ 개풀 뜯어먹는 소리’다.  나는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은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신다’(욥 34:10)라고 성경은 말한다.  바울 역시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고 주장한다(롬 9:14).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냥 속 편하게 시편 구절에 나와 있는 대로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또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엡 1:11)이라는 말씀을 믿고 표현의 자유가 없는 나라, 인권 후진국 한국처럼 ‘입틀막’ 해야 하는가?  논쟁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 여기까지만 하겠다.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둘 중에 하나이다.  다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부주의로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안에서 일어난 일인가?  선택과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그런데 Wesley는 Calvin의 예정론이 숙명론적(fatalistic)이라고 반대했다.  Calvin의 성경해석과 신학방법론, 즉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모든 사건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신학적 논리에 하나도 동의하지 않았다.  Wesley는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을 확인하기 위해, 혹은 인간이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이미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신학적 설명을 잘 준비해 왔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와 예정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여전히 신비(mystery)로 남아 있는 것으로 분명했다.  그러기 때문에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우리의 지식은 다른 교리적 문제들을 다루는 구절들에서 추론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 아는 것 같이 나대거나 관종처럼 때로는 하나님의  마지막 대변인인 것처럼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Wesley는 인간이 전적인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쳤다(창 3장).  즉 인간의 원죄,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은 ‘원시적 오염’(original pollution)을 인정하였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는 죄성을 가지고 있으며(창 6:5),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30)라고 말한 빌립보 간수처럼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롬 3:23).  그러나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Calvin과 의견이 엇갈렸다.  Wesley의 입장에서 보면 Calvin의 주장하는 신학적 논거들, 특별히 예정론은 성경적이지 않았다.  Wesley의 책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Calvin의 예정론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Calvin의 추종자들 보기에는 ‘야마’(山)가 도는 일이다.   

Wesley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서 어느 정도 인간에게 책임을 허용하고 또한 가능케 하신 것을 믿었다.  즉 인간은 타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의적인 존재라고 강조했다.  이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응답하고(롬 8:14)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엡 2:8)을 받아들일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막 16:16).  하지만 얼마든지 성령을 거스를 수도 있고(행 7:51),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칠 수 있다’(갈 3:3).  인간이 멸망을 당하는 것은 아담의 죄보다는 그들의 실제적인 죄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겔 18:30-32).  그러므로 인간의 죄성은 그들의 선택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 18:19-20), Calvin이 주장한 것처럼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 이미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작정과 예정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Wesley의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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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칼빈과 웨슬리 2024. 2. 18. 11:30

성경에 의하면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기 전’(시 90:2),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무에서 창조하셨고(창 1:1), 자기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만드셨다(창 1:26-27).  Calvin과 Wesley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라고 믿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증거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자유의지(free will)다.  자유는 인간이 소유하는 절대적 가치이며 가장 소중한 권리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반드시 유익이 있는 반면 책임이 동반된다.  즉, 자유를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잘못된 선택, 하와(고후 11:3)처럼 어리석고 악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Calvin과 Wesley는 인간이 창조를 통하여 주어진 특권적인 지위에서(창 1:28) 타락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창 3장)를 범했다고 믿었다.  두 사람 모두 이렇게 유전된 영향(롬 5:12)을 ‘원죄’(original sin)라고 불렀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죄는 인간의 영혼 모든 영역에 퍼져 있는 유전적 타락이고 본성의 부패로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게 하고, 다음으로 성경이 경고하는 육체의 일(갈 5:19)을 우리 안에 행하도록 한다.  … 아담으로부터 벌이 우리에게 왔으며 또한 그가 전염시킨 것이 우리 안에 있어서 이것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원죄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노아의 홍수 때 지면에서 쓸어 버릴 정도로 인간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부패하고 타락하였다고 믿었다(창 6:5-12).  Calvin의 입장에서 보면 타락의 성격이 집중적이기보다는 광범위하다고 보았다.  죄는 인생의 전반적인 모든 차원에서 나타난다. 

그러면 Wesley는 원죄의 교리에 대해 어떠한 주장을 하였는가?  그는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라고 믿었다.  『The Works Of The Rev. John Wesley, A.m.: Original Sin』에서 나온 말을 들어보자.  “성경은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으며,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단언한다. 즉 하나님의 생명과 형상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타락하고 죄로 가득 찬 아담은 자신과 똑같은 아들을 낳았다. … 결과적으로 우리는 본래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고, 희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이 세상을 살았던 자들이다” 

그리고 『The Image of God』에서 확실하게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의 조상이 물려준 원죄는 타락이며(롬 5:1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반드시 필요하다(행 4:12)”.  그는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창 1:27)이 죄를 범함으로 파괴되고, 또한 주어진 자유와 행복이 무너진다고 보았다(창 3:16-19).

Wesley는 원죄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성경적 기독교의 전체적 구조를 부인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의 초대 학장 John Taylor 박사는 ‘원죄에 관한 성경 교리’(The Scriptural Doctrine of Original Sin Proposed to Free and Candid Examination)라는 논문을 통해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 입장에서 원죄론을 강하게 부인하였다.  그러자 Wesley는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According to Scripture, Reason, and Experience』이라는 논문을 써서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습니까? 인간의 영혼은 전적으로 부패한 것입니까?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할 뿐입니까? 이 질문들에 그렇다고 긍정한다면 당신은 그만큼 진정한 성도이며, 부정한다면 당신은 아직까지도 불신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서 결론짓기를 “우리는 이 사실을 부정하려는 자를 이교도라고 분명히 규정할 수 있다”  원죄의 교리는 기독교와 이교도(異敎徒) 사이를 구분 짓는 중대한 ‘기독교의 교리’라고 강조한 것이다. 

Calvin은 인간의 책임(responsibility)과 의무(duty)를 이야기했다.  인간은 자기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 안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을 주해하면서 나온 그의 말을 들어보자.  “원죄는 육신의 출생에 의하여 부모로부터 유전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예정으로 우리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부패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강요』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아담이 죄에 전염되었을 때에 감염이 인간성에 잠입했다고 상정(想定) 하는 것은 조금도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다. …. 전염은 육이나 영혼의 본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염은 처음 사람(아담)이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후손을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천품(天稟)을 가지며 또 잃어버리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다” 

결국 피조물인 인간은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엡 1:11) 하나님의 예정대로, 그러나 자기의 잘못으로 인하여 타락했다.  Calvin에게 있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일어나지만(창 1:3),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즉 인간은 자기 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命題)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Calvin은 이것이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스러운 계획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진 연약한 존재인 동시에 하나님의 호흡으로 살아있는 존귀한 존재임을 감안할 때(창 1:26-28), 인간의 죄성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alvin의 관점에서 보면 죄는 언제나 인간의 잘못이었다. 

이러한 죄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지 사람에게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Calvin이 살았던 시대에 크게 일어났다.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Calvin의 예정론과 은총론을 신랄하게 비판한 Jerome Hermes Bolsec이었다.  그는 회중 앞에서 자신의 반대 의견을 과감히 내세우며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 만들었다며 Calvin을 고소했지만 결국 기소되어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다.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와 예정(predestination)에 대한 Calvin의 관점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Calvin과 Geneva 사람들은 그러한 도전을 살벌하게 배척하였다.  지금도 이러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The Five Points of Calvinism에 반하는 주장을 하거나 다른 견해를 가지면 Reformism  목사들로부터 비판과 공격을 받는 패역하고 부패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Wesley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삶을 마음대로 조정하여 결과적으로 범죄 하여 타락하게 했다고 믿지 않았다.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고(창 1:27) 은혜로서 창조 이전이나 이후에 참된 자유의지(free will)를 실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인간이 조종받는 Robot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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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evangelicalism)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라고 말한다(욥 42:2).  하나님에게는 자신의 피조물을 다스릴 주권과 능력 모두가 있다고 주장한다(시 135:6).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욥 2:1) 간에 모든 천사를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다스리신다(빌 2:10).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이미 일어났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잠 21:1),  즉, 앞으로 존재하게 될 모든 것과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인도해 주신다(출 9:16).  따라서 그분은 마음에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엡 1:11).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일을 정하실지는 그분의 선하신 기쁨과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엡 1:5). 

성경에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에 대하여 수많은 구절들이 드러나 있다(시 115:3, 잠 16:9, 단 4:34-35).  이미 충분한 성경구절들을 위에 열거했지만, 에베소서 1장 11절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경적 이유를 조금 더 제시하겠다.  먼저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해 주고 있고 기본 주제는 영원 전부터 계획된 우리의 구원이다(엡 1:4).  이 구절에 따르면 신자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에 따라 구원받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엡 1:9).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목적과 뜻을 따라 구원에 대한 예정(predestination)을 포함하여 자기의 계획을 실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때에 그것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God's sovereign rule)와 인간 구원에 대한 선택(choice for salvation)을 말해 주고 있다.

먼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계획)에 따라’(11절)라는 구절에 관하여 주석가들이 제시한 바에 따르면 제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한글 성경에서는 ‘뜻’과 ‘계획’을 중복하여 번역하고 있지 않고, 두 개 중 하나만을 선택해서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혹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런데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뜻’(Thelema)은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게 의도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을 말한다.  반면에 ‘계획’(Boule)은 목적을 위해 사려 깊게 생각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획’을 나타낸다.  따라서 11절의 정확한 해석은 John Eadie의 말대로 ‘심사숙고하여 세워 놓은 계획’을 가리킨다.      

Brooke Foss Westcott는 『St. Paul's Epistle to the Ephesians』에서, 이 구절의 근본 핵심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가장 현명하게 이루어지도록 숙고(熟考) 한 후에 선택(choice)을 하신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Charles Hodge가 말한 것처럼 일어난 사건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일이라는 것(롬 8:29)과 하나님의 선택(요 15:16)은 예견된 행동이나 인간의 공로 등과 같이 하나님의 무관한 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반드시 이루어지고 이루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렘 33:2).

하나님의 생각은 완벽하고 절대적이며 자신이 목적과 뜻을 따라 모든 것을 신중하게 선택하시고 성취하신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어떻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어 내실까 하는 것이다.  물론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생각해 보면(창 1:3), 다른 행위자를 사용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능력 하나로 충분히 그리고 단독적(stand-alone)으로 모든 것을 수행하시는 일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인간(요 15:16)과 천사(히 1:14) 등의 대리(代理)를 통하여 이루어 내신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피조물에게 발휘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속이라는 특별한 문제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구원 방법인 예수님 조차도(행 4:12)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가 되었다’(행 2:23).  의사 누가는 ‘할당하다’, 혹은 ‘배치하다’라는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라고 진술하고 있다(행 13:48).  사도 바울도 ‘원하는 자로 말미암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롬 9:16).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게 하신다’(롬 9:18).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모든 구문(構文)들 중 최고로 강한 구문이다.  성경은 인간 사건을 포함하여 우주 전체를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것을 증거 한다.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분명 Calvinist들은 열광할 것이다.  Calvin이 Geneva에서 살벌하게 목회하던 것처럼 TULIP에서 벗어난 모든 신학과 신앙을 이단(異端)으로 규정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망나니 같은 서슬 퍼런 신학적 칼 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나팔을 불어댈 것이다(요 16:2).  바울이 가장 좋은 본보기다.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 가졌던 신학은 ‘카타르시스’(Catharsis)다.  이 병이 무서운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응어리’를 밖으로 분출할 때 쾌감과 희열을 느끼는 데 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을 통해 성취감을 가진다(행 9:1-2).  심각한 것은 그 일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이다(행 26:9-11, 갈 1:13-14, 빌 3:6).  이 증세에 대한 의학적 판단은 정신 질환의 일종인 사이코패스(Psychopath)다.              

그런데 하나님도 Calvinist들이 독선에 빠져 절대적 주권만을 강조할 것을 아신 것 같다.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인간의 책임을 균형 있게 강조하는 John Wesley를 준비하신 것을 보면 말이다.  먼저 J. I. Packer의 『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에서 나온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모두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인이 이 두 개의 사실을 모두 받아들여야 오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는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학적 ‘카르텔’(Kartell)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를 성경적으로 제시하겠다.  신구약 성경은 자유가 전제되어 있는 선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과 이브는 금단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로봇이 아닌 이상 순종할 것인가 불순종할 것인가는 이들의 선택이었다.  결과는 불순종이었다(창 3장).  아론이 범죄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슷한 선택을 제시했던 사람이 모세였다.  줄 한번 잘못 서서 죽음을 맛보아야 했던 사람들이 삼천 명이었다(출 32:25-29).  예배드리는 문제는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선 여호수아의 마지막 설교 속에는 선택이 있었다(수 24:15).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강력한 메시지다(마 6:24).  엘리야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사이에 머뭇거리지 말 것’을 재촉하였다(왕상 18:21).  혼합 종교가 판치는 시대에 하나만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통해 중요한 선택을 주셨다.  요한복음 5장 40절 말씀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선택을 잘못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한탄하셨다(눅 13:34).  예수님도 불가항력적 은혜(?)가 자유로운 선택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설득적인 것이지 강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요일 4:9-10).  C. S. Lewis의 말을 인용하면 “하나님은 강간을 못 하신다. 사랑을 호소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의지를 제압(制壓) 하는 건 하나님의 계획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상 명령을 통해서도 마지막 선택권을 주셨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의 심판을 받지 않기를 원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요 5:24).  하나님은 모두가 구원받기를 소망하시지만(벧후 3:9)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요 5:40).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눅 7:30)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들은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사실상 거절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성경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거절할 수 있으며 실제로 거절한다는 것이다.  주권적인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 앞에 이행할 의무를 펼쳐 놓지만 동시에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자유가 있도록 Remote control로 조종받는 Robot이 아닌 지, 정, 의를 가진 한 사람 인격체로 창조하셨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은 자유로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짜인 각본대로 결정된다면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엡 2:8)라면 우리가 구원받는 데 있어(롬 10:9-10)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주관(主管) 하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유가 있으며 이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가?  만약 두 개의 신앙 중 하나만을 믿는다면 구원이 주어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둘 다 믿어야 하는 것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 모두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관계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이것이 매력적인 주제이긴 하지만 특별히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절대적 주권과 자유의지의 문제는 Augustine과 Pelagianism 사이에서 살벌한 논쟁을 일으켰던 주제이다.  칼빈주의(Calvinism)와 네덜란드 개혁주의자(Dutch Reformist) 사이에서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못지않게 쓰디쓴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행 23:6-10).  이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Calvinist들이 심하게 논쟁하면서 영적으로 얻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딤 3:9).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딤후 2:23)을 위한 것이라면 이것도 없어져야 할 전통이다(딤전 4:7,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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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 속죄

칼빈과 웨슬리 2024. 1. 14. 11:25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가 모든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셨는가(요일 2:2), 아니면 그가 이미 알고 계셨던 구원받을 자들만의 죄 값을 지불하셨는가?(요 17:9)  이 부분에서 Calvin과 Wesley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Calvin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였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롬 8:22).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결국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 대속(vicarious)의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보았다(롬 8:33).  이것은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가 모든 사람(딤전 2:6)을 대신하지 않고 오직 선택(election)된 사람만(요 17:9)을 위해 죽었다는 뜻이 된다. 

『기독교강요』에 나온 Calvin의 말을 들어보자.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받는 사람들과 멸망당할 사람들을 오래전에 확정하셨다고 말한다.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서 이 계획은 그들의 인간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값 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멸망당하는 사람의 입장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고 정당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이 되고, 그 결과 생명의 문을 닫으셨다고 볼 수 있다” 

‘제한적 대속교리’라는 표현은 Calvin이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다.  하지만 후대의 Calvin 추종자들이 이 교리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Calvin의 신앙 체계 안에서 논리적 함의(含意)가 되었다.  지면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특별 구속(particular redemption) 혹은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교리는 Calvinism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는 매우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다.  왜냐하면 같은 개혁주의 진영 안에 전택설(Supralapsarianism)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과 후택설(Infralapsarianism)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신학적 견해를 가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가?”(사 55:8-9).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다음에 죄를 세상에 허락하셔서 그 죄로부터 선택받은 그들을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반면에 타락 후 선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죄를 세상에 허락하시고 그다음에 죄로부터 선택받은 일부를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이 신비를 해결하도록 하기 위한 자료나 뒷받침할 만한 성경구절들이 지극히 제한적이다.  양쪽 진영 모두가 옳은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사색적이고 그럴듯한 논리를 가지고 서로 잘났다고 나팔을 불어댄다.  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라지만, 추상적인 신학적 용어(타락 전, 타락 후, 수동적 순종, 능동적 순종)들을 가지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신학이 개혁신학인 것 같다.      

이 문제를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Calvin의 요한복음 3장 16절 주석에 기록된 말을 들어보자.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초대하는 것을 볼 때, 그가 온 세상에 대하여 호의적인 관용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은 과연 생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여기서 ‘모든 사람들을 예외 없이 초대하는 것을 볼 때’  이 말을 주목해야 한다.  내가 난독증이 걸리지 않은 이상, 이 말은 확실하게 무제한적 속죄(unlimited atonement)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저는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는 구절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로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의 죄 값을 지불하신 것이다(딤전 2:6).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문장에서는 Calvin은 또 다른 입장을 보여준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약속되어 있다. 하지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모든 이가 볼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그를 찾고 구하는 택함 받은 자들의 문만 열어 주신다”  Calvin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혼자 힘으로는 올바른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을 강조했던 학자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찾고 구하는 택함 받은 자들’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궁금한 것은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Reformed Theology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Calvinist들은 이에 대한 답변은 분명 이럴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아무런 조건 없이 구원을 위해 어떤 이를 무조건 선택하고 성령의 유효적인 부르심, 즉 항거할 수 없는 은혜를 그에게 적용시켜 구원이 일어나게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협력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님만의 주권적인 은혜로운 일이다”  이런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말꼬리를 잡고 물고 늘어진다면 쓸데없는 논쟁과 논란을 야기시킬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겠다.  솔직히 Calvin 자신도 이 문제를 가지고 오락가락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전자에서는 ‘보편속죄론’ (universal atonement)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최종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선택받은 사람들, 즉 ‘제한속죄론’(unlimited atonement)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Wesley는 대리 대속(penal substitution)이 어떤 식으로든 제한적(limited)이란 입장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인류에 대한 보편적 구속(universality redemption)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Calvin 추종자들, 특별히 극단적 칼빈주의자(Hyper Calvinism)들은 Wesley의 보편주의(universalism)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들이 거침없이 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공격은 Wesley의 선행은총(prevenient grace)과 구원의 수용과 거부에 대한 결정을 인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조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에서 나왔다.  마가복음 16장 16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구원을 제공하지만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자(요 12:32, 딛 2:11), ‘온 세상’을 위한 것이며(요일 2:2), 하나님의 구원은 조건적이다.  여기서 Wesley가 말하는 그 조건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다(요 3:15).  다시 말해 믿음에 의해서이며,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막 16:16).  지면 관계상 몇 군데의 성경구절을 인용하겠지만, 특별히 성경이 믿음에 의해 조건 지어진 구원을 가르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요한복음 3장 18절, 3장 36절, 사도행전 16장 31절의 구절들을 주목해야만 한다.   물론 Wesley의 이러한 주장에 Calvinist들의 답변은 뻔하다.  “만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온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을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Wesley는 그리스도의 복음(고전 15:1-4)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관해 말할 때, 성경은 우리를 기계적인 피조물이나 로봇으로 보지 않았다(계 22:17).  즉 복음을 수용하든지 거부하든지 간에 선택할 수 있는 인격적인 피조물, 즉 참된 인간으로 보았다(마 23:37).  달리 말하면 속죄 사역의 범위에 있어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지 않는 한 어떤 죄인이라도 구속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강조하기를 서슴지 않는다(요 5:40).  더 나아가 선악과에 관해 아담에게 하신 말씀 안에는 잘못된 선택(불순종)을 벌하시겠다는 약속을 잊지 말아야 한다(창 2:16-17).  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셨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사용하여 고의적으로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거나(히 10:29), 가지고 있는 양심과 믿음마저도 얼마든지 파선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딤전 1:19).

작금의 Calvinist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오직 하나다.  Calvinism의 5대 강령에 하나인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를 강조하는 것이다.  외적 소명(external call)이 아닌 내적 소명(internal call)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강력한 입장이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Calvinist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믿었다.  때문에 오직 하나님이 창세 전에 선택받은 사람들만 구원을 받아 영생의 유익을 누린다는 믿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교리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온건 칼빈주의자(Moderate Calvinist) Norman Geisler는 TULIP의 맨 마지막 항목만을 인정하는 신학자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  누구든지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믿으면 된다(롬 12:3).  궁극적으로 속죄에 관한 가르침은 신비를 포함하고 있다.  그 어떤 인간적인 유비(類比)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죽게 하시는 일의 비밀을 다 아는 것처럼 독선과 독단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Wesley의 말을 인용하면 “속죄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려 든다면 결국 목적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미로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 ‘미로’(迷路)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있다.  신학적 ‘카르텔’(Kartell)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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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는 우리에게 자격이 없는데도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다채로운 선물들을 가리킨다(약 1:1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명코 받아야 할 심판과 형벌을 자비롭게 유보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용서와 구원, 그리고 영생이라는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선물들을 허락하셨다.  우리에 대한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소송이 우리를 유죄(有罪)라는 필연적인 판결로 이끌어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요구한다.  구원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닌’ 것처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엡 2:9).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갈 2:16).  사람의 믿음 그 자체는 ‘행위’로 여겨져서도(갈 3:2), 누구든지 자랑할 근거로 여겨서도 안 된다(고전 1:29).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요 3:16).  하나님은 우리가 의로운 일을 행하여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자비하심 때문에 구원을 주셨다(딛 3:5).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딛 3:3)라는 구절을 생각하면 실제로 우리에게는 의로운 일을 행할 능력이 일절 없었다(롬 3:27).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나 선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딤후 1:9)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요 4:10).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원을 어떻게 준비하셨는가?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벧전 2:24)과 부할(롬 1:4)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분은 인류의 죄를 사하였고(요일 2:2),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요 14:6)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셨다(고후 6:16). 조금 더 보충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성경은 죄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의 표준 구절로 로마서 1장 18절-3장 20절을 제시한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 3:23).  이것이 형벌을 대속할 존재가 필요한 이유였다.  죄를 속하지 못하는 동물의 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히 10:4).  오직 그리스도의 피, 곧 그의 죽으심만이 우리의 죄를 없앨 수 있었다(히 9:25-26).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것 말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다른 길이 없었다(행 4:12).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징벌하심으로써 자신의 정의와 거룩하심을 충족시키신다(롬 3:25).  그와 동시에 그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의롭다 하심을 선포하신다(롬 3:26).  Justin Taylor의 말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에게로 향하지만 성자가 죄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가 그에게 쏟았진 것이다.    

교회사에는 이러한 대속(vicarious)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와 몇 가지 중요한 관점들이 등장하였다.  먼저 구속과 동의어로 쓰이는 대속(代贖)이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 남의 죄를 대신 받는 것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그 흘리신 보혈(寶血)로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을 가리킨다(히 9:12).  영어 어원으로 ‘한 번에 이루어진’ at-one-ment라고 부른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준비하시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정리하고 있다.   

사실상 신학자들 사이에서 속죄(atonement)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질문은 중요하면서도 이견(異見)이 많은 문제로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형벌 대속’(penal substitution)의 지위에 관한 문제는 종종 그 논쟁의 핵심으로 제기된다.  특별히 형벌 대속이라는 견해는 속죄에 대한 표준적인 개혁주의적 접근법의 특징을 이룬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복음주의 사상가들이 그런 접근법을 수용해 왔는데, 그중에는 Charles Hodge, William Greenough Thayer Shedd, Louis Berkhof, John Murray, Lean Morris, John Stott 같은 학자들이 있다. 

그런데 형벌 대속론의 뿌리는 John Calvin의 저작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Calvin은 역사적인 대속(atonement)의 교리를 확정하였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수는 죄의 결과로 희생 제물(sacrifice)이 되어(히 10:14) 무서운 심판(롬 5:16)과 영원한 죽음(롬 5:14)을 받아야 할 인간들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다(마 20:28).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을 통해 죄인들을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데 필요한 값을 치르셨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가 죄가 없는 판단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징벌을 받아야 할 죄를 범했지만, 그 죄가 하나님의 아들의 머리로 옮겨졌지 때문’이라고 말한다(사 53:12).  그러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 징벌(punishment)을 직접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Calvin의 대속교리는 인간의 행위를 대신한 예수의 객관적인 구원 사역에서 법적 측면을 강조했기 때문에 때때로 ‘형벌적 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theory)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대속적 희생을 가리킨다(막 10:45).  즉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마 20:28).  여기서 대속물(ransom)은 노예를 속박에서 풀어주기 위해 치르는 대가(代價)였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속전(贖錢)을 치르셨는데, 거기에 요구된 대가는 십자가의 죽음이었다(갈 3:13).  후에 베드로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였다고 기록했다(벧전 1:18-19).  이 희생으로 사람이 지은 죄의 형벌을 용서를 받게 하시고(롬 5:9), 의를 전가하시고(고후 5:21),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이 화목을 이루게 하셨다(롬 5:10).  예수 그리스도가 죽을 때 우리의 죄 값을 치렀다는 의미에서 형벌상의 사건이고,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의미에서 대리(代理) 대속이다.

그렇다면 Wesley는 징벌을 대신하는 대속의 관점에 대해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according to scripture, reason, and experience』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징벌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징계를 받으셨다”  특별히 Wesley의 설교들 가운데 그가 펠라기우스주의자(Pelagian)와도 구별되어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설교가 “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 Works (Bicentennial Edition)이다.  여기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요약했다.  “기독교 체계 내에서 속죄 교리는 가장 중요하다. 이는 이신론과 기독교 사이를 구별시켜 주는 중요한 점이다”  이 설교는 당시 만연하던 ‘선천적 의지론’과 자신의 견해를 절대적으로 구별하려는 그의 의도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개혁주의 전통 내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 Wesley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보았다.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믿음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며(엡 2:1-3), 그 진노를 달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히 10:12) 즉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로’(히 9:12)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히 10:14).  그리스도는 우리가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 우리 대신 죽으셨고 스스로 우리의 죄(고후 5:21)와 죄책(갈 3:10)과 형벌(요 1:29)을 짊어지셨다.   

이렇게 Wesley는 복음의 본질인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중심성을 확고히 인정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속이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유효한 가에 대해서는 Calvin의 주장과는 엇갈렸다.  다시 말해 Wesley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한 것’이지 단지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드시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대속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것’(사 53:6)처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있는 반면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막 16:16)이 있다는 것이 Wesley의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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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esley는 ‘값없이 주시는 은총’(Free Grace)이라는 설교에서 “결단코 사람에게 있는 여하한 능력이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며 오로지 하나님께만,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값없이 내어 주시고,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롬 8:32) 그런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또한 ‘성서적 구원의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칭의의 공로가 되는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다”  그는 구원이 인간의 선행이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천명(闡明)했다.

이러한 메시지를 증거 한 Wesley는 Calvin 못지않게 성서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Calvin이 보여준 것처럼 성경의 거룩한 감동(벧후 1:21)과 신앙적 권위(Authority) 그리고 신뢰성(Reliability)을 굳게 믿었다.  그의 『설교집』 서문에서 Wesley는 성경의 중요성(Importance), 특히 구원에 있어 성경의 유익함을 말했다.  여기에서 그는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라는 표현을 자신에게 적용하였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알기 원한다.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낮아지셔서 그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분은 한 책(성경)에 이 일을 기록하셨다. 하나님의 책을 위해서라면 나는 어떠한 대가도 지불할 것이다. 나는 그 책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한 책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평생 성경 한 권만 읽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메시지를 증거 하는데 있어 성경 말씀에는 생명을 걸었다.

Wesley는 신앙과 실천의 문제에서 성서의 권위에 우선성을 강조하는 개신교회의 입장에 반대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이백 년 후에 활동했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개신교회와 Roman Catholic Church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Wesley는 『The character of a Methodist』에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과 실천의 유일하고 충분한 규율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Roman Catholic Church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고(벧후 1:21), 정경화(Canonization) 되고 전파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성령은 성경을 통하여 사람들을 인도하는 길(딤후 3:16)을 원칙적으로 안내하고 있다고 믿었다.  『The Letters of the Rev John Wesley, A.M.  Vol. 2』 에서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성경은 가장 중요한 인도자이지만 모든 면에서 규율(規律) 대로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는 규율이 된다. 조금 어렵게 표현하면 성령을 안내자로 부를 때 그것은 지적인 존재를 의미하고, 성경을 규율이라 부를 때 그것은 지적인 존재가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Wesley는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A Clear and Concise Demonstration of the Divine Inspiration of the Holy Scriptures, Works』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만드셨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네 가지 크고 놀라운 증거가 있다. 바로 기적(miracles)과 예언(prophecies), 교리의 완전함(good of the doctrine) 그리고 성서 기자들의 도덕성(moral character of the penmen)이다”

Wesley는 성서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 엄청난 독서의 사람이었다.  단순하게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교회론(Ecclesiology)과 신학의 발전을 포함하여 400여 종이나 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또한 교회사에 능통한 Oxford University 교수였다.  영어는 말할 필요도 없고,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외에도 다른 외국어에 능통한 그는 많은 책들을 읽고 편집하고 집필하였다.  이미 16세기 개혁주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서양의 고전으로 시작하여 논리학(logic)과 수사학(Rhetoric)을 성서와 함께 읽을 것을 권면했다.    

그런데 Wesley는 오직 성서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자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Minutes of Several Conversations』이라는 글에서 오직 성서연구만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감리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성서의 연구는 최고의 열정이다. 만일 성서 외에 다른 책이 하나도 필요하지 않다면 여러분은 사도 바울 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하지만 바울도 다른 책들을 필요로 했다. 그는 ‘책들을 가져오라. 특별히 양피지에 기록된 두루마리를 가져오라’고 말했다(딤후 4:13). 그러나 나는 그 책들을 읽어도 마음속에 아무런 감동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책들도 읽어 그 맛을 보기 바란다. 그러나 곧 다시 돌려주도록 하라”  성경이 확실하게 좋고 유익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앞뒤가 꽉 막힌 목사가 되지 않으려면 다른 책들도 보충자료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신학과 영성과 사역이 성경을 통하여 역사하는 성령의 위격과 역사를 넘어서는 방대한 자료들을 배제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Wesley는 평생 Church of England의 서품 받은 사제(Priests)로 살았으며, 흔들림 없이 그 전통에 신학적 뿌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이들은 영국의 개혁자(British Reformers)들이었다.  그들은 Roman Catholic Church과 대륙의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중도의 길’(middle way)을 모색하는 자들이었다. Anglicans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을 주어 성서와 교회 전통 가운데 신앙적인 권위를  분별할 수 있게 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신앙적 권위의 우선성(Priority)과 함께 전통(Tradition)과 이성(Reason)에도 합리적으로 이차적인 권위를 부여할 것을 강조하면서 ‘오직 성서’만을 절대적인 ‘신조’(信條)로 내세운 대륙의 종교개혁자들과 차별성을 가졌다. 

Wesley는 성서와 신학, 그리고 사역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은 인문주의(Humanism)와 명목주의(nominalism)를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Luther와 Calvin의 교육과정에 깊이 퍼져 있던 일반적 사상의 흐름이었고, 그들의 신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달리 말하면 Luther와 Calvin이 오직 성서만 의지했다고 믿는 것은 착하고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믿고 있다면 잘못 배운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빈틈없이 세밀한 신학자로 이성의 능력을 신봉하는 당시의 흐름을 이미 숙지(熟知)하고 있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말이 ‘오직 성경’이지, 이것저것 필요한 자료들을 충분히 이용했다는 것이다.  다른 자료 없이 ‘오직 성경’ 한 권 만을 연구하는 가운데 살았던 것처럼 믿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배경을 아는 것이 개신교회의 다양한 신학 전통들을 알아 가는데 절대적인 도움이 된다.

Wesley는 교회 전통과 비판적 사고를 자신의 신학과 사역에 유용한 도구로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서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Anglican Church의 중도의 길 방법론을 수용하였다.  그는 이 방법론(methodology)이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서’(Sola Scriptura)의 원칙과 대립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Wesley는 항상 성서의 권위(Authority)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신학과 사역에서 성서의 권위를 높게 부여하였다.  설교와 논문을 모은 『Works』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전집에서 나는 진지하고 솔직한 독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완성된 사상을 보여 주고자 한다. 나의 신학적 견해가 성서와 이성, 그리고 초기 기독교 전통에 부합하기를 바란다”  그의 생각은 초기 기독교가 가장 성경적이고 순수한 시대의 교회 가운데 초대교회의 신앙을 대표한다고 믿었다.

Aldersgate에서 성령을 체험한 Wesley는 하나님과 인간의 구원을 현실에서 멀어져 있는 추상적인 것이 아닌 생생한 실제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 실재를 구체적으로 느꼈고, 이는 성경의 약속을 비현실적으로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신앙의 올바른 근거로서 체험을 확신하면서 감정의 변화와 체험을 분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A Farther Appeal to Men of Reason and Religion, Part 1』에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성경 본문들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원하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이 본문들을 통하여 앞으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계시(고전 2:10)와 성령의 감동(벧후 2:21) 그리고 예수의 영(행 16:7)이 그들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시는 것을 느끼는 신자들의 감정을 분명하고 이성적으로 발견할 것이다”

Wesley는 성령의 임재(계 1:17), 즉 성령의 증언(롬 8:15-16)을 느끼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Calvin은 성경의 유효성이라는 관점에서 성령의 증언(요 14:16)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Wesley는 신자의 삶의 여러 차원들 속에서 성령의 역사와 임재의 경험적인 유효성 역시 중요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유효한 확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비록 이차적일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성령의 체험(행 9:1-19, 고후 12:1-10)이 성서의 우선적인 권위와 함께 전통과 이성의 차원에서 신앙의 근거가 된다고 믿었다. 

추후에 다시 논의하겠지만 그는 성서(Scripture)와 전통(Tradition), 이성(Reason)과 체험(Experience)을 신앙의 권위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 네 가지를 가리켜 ‘Wesley의 사변형’, 혹은 ‘Wesley의 사중표준’(Quadrilateral)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감리교 신학자 Albert C. Outler가 처음 사용했던 용어로, Wesley의 신학방법론을 비유적으로 잘 설명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졌다.  물론 Wesley는 이러한 표현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Calvin이 ‘오직 성서’(Sola Scripture)라는 신조를 직접 사용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제는 Wesley와 결합된 용어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 유익하다고 생각한 관점들, 즉 ‘사변형’을 제시하였고, 이 네 가지는 오늘날까지 감리교회의 중요한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성경이 궁극적인 원천이며 모든 신학의 일차적인 것이고, 나머지 세 가지는 이차적인 동시에 성경을 위한 보충 자료로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운 비판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Wesley의 사변형이 신화(myth)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만약 이렇게 따진다면 Calvin이 말한 적이 없는 ‘오직 성서’도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신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단 사냥꾼처럼 얼마든지 꼬투리 잡고 물고 늘어질 수 있지만 유익이 없기 때문(딤전 6:3-5, 딛 3:9)에 여기까지만 하겠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신화는 성서의 권위에 관한 탁월한 강조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유익한 신화다.  ‘사중 표준’과 ‘오직 성서’라는 방법론은 두 사람의 신학적이고 방법론적인 관점 차이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Calvin과 Wesley모두 하나님의 궁극적인 권위를 굳게 믿었다.  또한 두 사람은 성경이 감동으로 기록되고(벧후 1:21), 권위가 있으며(시 119:33-34), 신뢰할 만(잠 3:3) 하다고 믿었다.  특별히 두 사람은 성서의 권위에 대한 탁월한 연구와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 Calvin은 종교개혁의 구호가 된 ‘오직 성서’를 주장한 인물로 알려졌다.  반면 Wesley도 성서적 권위가 우선적이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차적이라 할지라도 그는 신학적으로 다른 권위들도 근거가 될 수 있다고 강변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성경적 기독교와 성도의 삶 속에서 일하는 성령의 지속적인 역사를 확인하는 올바른 체험의 가치를 중시하였다.  그런데 Wesley는 ‘오직 성서’만을 강조하는 것이 목회적 관점에서 신자들의 매일 삶을 힘들게 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궁금하다.  진리의 말씀을 증거 하는데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일까? 

성경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니다(히 4:12).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셨기때문이다(8:16).  신자가 병들었을 때, 혹은 자살의 충동을 느끼거나, 삶의 어려운 문제에 빠졌을 때, 목사가 ‘오직 성경’만을 강조하고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면 결과가 무엇인가?  그것은 죽고 메마른 말씀을 전한 것이다.  비위가 상하겠지만 이것은 목사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사례비를 위해 강대상 위에서 원맨쇼를 보인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친 것이 ‘오직 말씀’(마 8:5-12)이라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말 궁금하지 않은가?  삼 년 동안 말씀으로 훈련받은 제자들에게 무엇이 부족해서 능력을 받으라고 명령하신 이유 말이다(눅 24:49).   그 당시 이미 기록된 성경이 있었다.  작금의 개혁주의자들처럼 주야장천 ‘오직 성경’만 강조하면 되지 않을까?  듣기 거북하겠지만, ‘오직 말씀’만을 강조하면서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닌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롬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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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신자들에게 통치하는 창조주(창 1:1)이며 구세주이신 하나님(사 43:3)을 가르치고 인도하기 위하여 성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성경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경’(眼鏡)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시력이 약한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책 한 권을 내보이면, 어떤 종류의 책인지는 겨우 알 수 있겠지만 겨우 두 낱말도 해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안경을 쓰면 똑똑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혼란한 지식을 우리 마음에서 바로잡고 우리의 우둔함을 쫓아 버리며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는 성경이 선지자(행 3:21)와 사도(행 1:2)와 그리스도(히 1:2) 통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보았다(벧후 1:21).  완전함(시 19:7)과 영원함(시 119:10) 그리고 능력 있는 권위(행 20:32)는 오직 성경 밖에 없고 다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Calvin의 성경 이해는 Roman Catholic Church의 성경관과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Catholic Church는 정경화 과정(canonization process)을 포함하여 교회의 권위(authority)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성경을 포함하였다.  즉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 지도자들과 공의회(councils) 그리고 교회의 결정을 통하여 역사하고 정경(canon)의 내용을 정했다는 입장이다.  초대교회가 성경을 성문화하였기 때문에 역사적(historically)으로나 신학적(theologically)으로 교회가 성경의 권위보다 우선하다고 믿었다.  이것은 교회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경이 교회에서 나온 것처럼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Calvin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성경의 감동과 권위만을 인정하고(벧후 1:21), Catholic Church의 입장에는 일절 동의하지 않았다.  『기독교강요』에 기록한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고수하자.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자증(自證)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증거나 이성(理性)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성경이 마땅히 지녀야 할 확실성은 성령의 증거에 의해서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 믿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교회의 모든 권위가 성경에서 나오기 때문에 교회는, 특별히 Catholic Church 은 제멋대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는 권한이 일절 없다는 것이다.   Calvin에게 있어 성경의 단순성(simplicity)은 성령의 감동과 권위 그리고 신뢰성을 확증한다.   

Calvin은 요한계시록을 빼놓고 성경  대부분에 대한 주석서를 집필하였다.  그는 성경해석, 즉 전문적인 성서해석(biblical interpretation)의 이론(theory)과 실제(practice)를 연구하는 해석학적(hermeneutic) 접근에 서투르지 않고 노련했다.  당대의 최고의 학문과 인문주의 학문(humanistic studies)을 배운 그의 성경 해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기억할 것이 있다.  Calvin은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이 일어난 19세기 이전 사람이라는 것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그의 성경해석학을 후대의 발전된 차원과 비교하는 것은 낡고 뒤떨어진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고대와 중세 교회 성서해석의 실재적인 유산과 함께 당대의 뛰어난 해석가들, 즉 종교개혁가 Martin Luther와 인문주의자 Desiderius Erasmus, 그리고 Luther와 함께 종교개혁에 힘썼던 Philip Melanchthon과 1.5세대 종교개혁가라고 부르는 Martin Bucer 등의 해석학을 인지(認知) 하고 있었다.

그는 성경연구에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능숙했다.  성경을 해석하는 네 가지 방법, 즉 literal(historical) 역사적 문헌과 allegorical(symbolic) 상징적 비유 그리고 topological(moral) 윤리적 유형과 anagogical(metaphorical) 비유적 유추의 방식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Commentaries and Prefaces』에서 Raymond A. Blacketer는 Calvin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Calvin 당시의 다른 주석가들과 비교할 때 추상적인 주석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본문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영적 감각을 중보적으로 사용하는 ‘사두마차’(Quadriga) 즉, 네 가지 방법론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성서해석 방법론을 자주 비판하였다. 본문에 대한 본능적(Instinctive) 느낌과 문헌적(literary), 그리고 역사적(Historical)이며, 직설적인(Straightforward) 의미 파악에 중점을 두었다” 

Calvin은 Luther의 주장처럼 성경의 명료성(clarity)은 사람들이 스스로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난해하거나 숨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Catholic Church는 성경의 해석이 전적으로 교회의 권한에 두었다.  하지만 Calvin은 각 사람에게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고 보았다.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생래적(生來的)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Calvin의 말을 들어보자.  “사실상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知覺) 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아무도 무지를 구실로 삼아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신선한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신다”

더 나아가 그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미신적으로, 때로는 광신적으로 수용하는 현상을 비판하였다.  예를 들면 현재에 대한 예언을 하나님께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였다.  그의 비판은 하나님이 성경보다 교황(Pope)과 주교(Bishop)들에게 가르치는 권위가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Catholic Church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Calvin은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Calvin은 성경의 가르침을 뛰어넘는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당대의 사람들의 주장도 배격하였다.  이것은 교회와 정부 간 관계의 고리를 끊고, 교회 모델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Anabaptist 사람들을 지적한 것 같다.  Calvin은 아버지의 성령(마 10:20)이 성경을 초월하여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아직 들어 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용인’(容認) 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는 데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록된 말씀 밖에’(고전 4:6) 넘어서는 계시(啓示)라는 주장들로부터 지켜주는 확실한 안전장치다.

Luther는 그리스도의 믿음과 실천을 결정하는 성서의 권위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Calvin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종교개혁의 첫 번째 원리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차용(借用)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Calvin은 이 짧은 어구를 『기독교강요』에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러나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에 담긴 본질은 그의 저서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Luther는 1521년 Diet of Worms에서 열린 이단 재판에서 황제와 제국의 대표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자신의 주장이 성경에 의하여 오류라고 입증되지 않는 한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면서 ‘이성적 판단’과 ‘양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들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성서’라는 명제 아래 성경 외에 다른 어떤 자료나 요소들은 기독교 안에서 절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나팔을 불어대는 벤뎅이 소갈딱지 같은 ‘고답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History of the Church, vol. 5』에 기록된 최종 변론 마지막 부분에서 나오는 Luther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성서의 증언이나 뚜렷한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제 양심은 말씀 안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그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양심에 반하는 행동은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의지했던 것은 오직 성경이었다.  Luther는 성경의 권위를 대체하려는 Catholic Church의 교황권과 교권의 권위에 강경하게 맞서는 입장을 견지했다.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은 Calvin의 저서 전체를 꿰뚫고 있었다.  또한 성경의 충분성(Sufficiency)을 강조하고(갈 1:8-9), 기독교의 최종적 표준(딤후 3:16)과 규범적인 기준(계 22:18-19)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선언했다.  그는 『기독교강요』 에서 이렇게 말했다.  “율법과 예언서에 다음에는 사도들의 글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거나 교회 내에서 자리를 내줘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서 인정된 교수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지시와 표준을 따르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교회 안에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권위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는 것이다.

Augustine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했던 것처럼 Calvin은 성서의 권위를 이해하면서 다른 한편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무비판적인 문자주의(Literalism)에 빠지지 않았다.  더 나아가 Calvin 역시 치밀하게 교회사에 나타난 교부들의 문헌들과 신학적 판단에 필요한 자료와 요소, 그리고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를 성경을 보충하는 2차 자료(Secondary Sources)로 사용하였다.  그가 보여준 정교한 논리와 사고방식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Protestant 전통에서 제외된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성경 외에 다른 권위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종교개혁자들에게 심한 냉대를 받았던 Anabaptist를 들 수 있다.  이들에 대해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Luther는 Anabaptist를 ‘광신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Calvin은 한걸음 더 나아가 ‘미친개들’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였다.  그들을 혐오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Calvin은 자신의 기독교 처녀작 『Psychopannychia』에서 Anabaptist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일어날 일도 모른 채 비판 정신만 살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Calvin이 하이델베르크 논쟁(Heidelberg Disputation)에 참석해 Luther의 영향을 받은 Martin Bucer의 중매로 Anabaptist 출신이며, 아이 둘 있는 과부 Idelette de Bure와 결혼을 했다.  주례는 Geneva에 종교개혁 운동을 정착시킨 William Farel이다.  Calvin은 아내를 무척 사랑했다.  그런데 첫째 아기가 태어난 지 2주 만에 죽었다.  그에게는 너무나 큰 아픔이었다.  그리고 3년 후 딸이 태어났지만 둘째 역시 죽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세 번째 아기가 태어났지만 이 아이도 죽었다.  사랑하던 아내 역시 결혼생활 9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신학적 논쟁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지만 삶은 그다지 평탄하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란 참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 같다(약 4:14).  왜 그렇게 하셨는지 하나님도 침묵하셨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몰라서 침묵하셨는가?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성경구절을 생각하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마 10:29).  François Baudouin은 Calvin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후손을 남기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비참한 이야기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적이 많으면 삶이 평탄하지 않다는 것이다.  복음을 증거 하기보다는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기에 혈안에 되어 있는 자, 기도 하기보다는 비판 정신만이 살아 있어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자들 말이다.  주변을 살펴보면 이런 목사들이 꼭 있다.  나는 이런 자들이 목회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요지가 무엇인가?  “귀는 길어야 하고 혀는 짧아야 한다”(전 5:2).        

Calvin의 저작들 곳곳에서 Jerome과 Augustine, Chrysostom과 같은 교부들을 인용하고, 자신의 신학과 사역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기초라고 주장하였다.  Calvin의 사상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Augustine이다.  그의 책을 가장 많이 인용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과 인간의 자유 (Free Will) 관계를 논하면서 그랬다.  추후에 논의하겠지만 Calvin은 예정론에 관한 교리를 해설할 때, Augustine 외에도 Melanchthon과 Bernard의 글도 자주 인용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예정을 주장하고 강조한 부분들을 인용해서 그는 예정론을 체계화시켰다.  Calvin은 개신교회의 규범(規範)과 신조(信條)들을 만드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성서와 그의 책들은 후대 칼빈주의 추종자들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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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herlands에서 Protestant 개혁교회 전통에 함께 속해 있던 Calvin과 Arminius의 후예들이 크고 살벌한 논쟁을 벌였다. Netherlands 국회가 소집한 이 회의는 여러 지방 교회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United Kingdom, Scotland, Germany의 Calvinism 교회의 대표들이었다.  France는 초정을 받았으나 Louis XII가 금지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교회 회의는 ‘항론파’(Remonstrant) 견해가 Calvinism 신앙고백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 소집되었다.  국회는 자문위원으로 신학 교수 5명과 위원 18명을 선출하였다.  정규 대표 수는 56명이었다.  Arminian파에 속하는 ‘항론파’ 그룹은 The Synod of Dort 당시 지배적인 세력을 점하고 있던 Calvin파와 정당한 토론을 기대했다.

1609년에 Arminius가 죽자 1610년에 Arminian파들은 ‘항변서’를 발행하여 무조건적 예정을 주장하는 정통파를 반박하였다.  논쟁에는 예정 외에도 다른 쟁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정치 쟁점들이 신학적 열기와 맞물림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대해 1611년 Calvinist들은 반항변서(Counter  Remonstrance)를 발행하여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 정통파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그 결과 1619년 The Synod of Dort에서 Arminian파의 신앙이 정통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항론파 목사들은 강단에서, 항론파 지도자들은 나라에서 추방당하였다.   

‘Arminianism의 5대 강령’에 답변한다는 점에서 공식화된 ‘Calvinism의 5대 강령’, 즉 영어 표현에서 다섯 항목의 첫 글자를 따서 ‘TULIP’으로 불린다.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사실 ‘The Five Points of Calvinism’라는 명칭은 오해를 낳기 쉽다.  왜냐하면 Calvinism은 다섯 가지 교리만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Calvin이 5대 교리의 제창자도 아니다.  추후에 논의하겠지만 TULIP이 Calvin의 입장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The Synod of Dort에서 논의된 중요한 내용들은 Calvin의 저작들을 살피는 과정에서 하나하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금의 Calvinist들은 다른 교단에 소속된 그리스도인들과 구분하는 기본적인 기준으로 ‘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입만 열면 Calvin 신학을 신앙의 잣대로 사용하여 비판하고 논쟁하는 무기로 쓴다.  더 웃긴 것은 서철원이가 무슨 대단한 개혁주의 신학자인 것처럼 Calvin 신학과 같은 레벨에 놓고 용을 쓰며 떠들어 댄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겠지만 이들의 공개 토론과 수많은 글들을 읽어 보았다.  솔직하게 말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하나님 나라에 아무런 보탬이 없는 조잡한 토론과 유치한 강의, 이런 것을 듣고 은혜를 받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을까?  정이철의 입장에서 보면 Calvin과 서철원을 빼놓고 나머지는 거의 이단 아니면 사이비들이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개나 소나 신학자가 되거나 대통령이 되는 시대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알았으면 한다.  나의 솔직한 심정은 이단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진짜 이단(異端)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고난의 삶은 그분을 따르는 신자들을 위한 본이다(벧전 2:21).  조류과에 속한 것처럼 주둥이만 나불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마 7:21).  예수님처럼 이단 소리를 들어야 한다(행 24:5).  다른 것은 다 입으로 나팔을 불어 대면서 왜 이단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Reformism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TULIP에 따라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 신학적 얘기만 하면 Calvin을 들먹이지만 한 마디로 속 빈 강정이다.  간혹 간덩이가 부은 사람 중에 자신은 Arminian들과 다르게 TULIP을 따라 사는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고 떠들어 대는 자들도 있다.  솔직히 말해 Calvin 추종자들이 ‘Calvin의 5대 강령’을 실제로 지키지 않으면서 여전히 자신을 Reformist로 자처하는 것은 망상 장애를 가진 조현병 환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짓이다.  이것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 6:44)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Lip Service 즉, ‘입에 발린 말’에 불과하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Calvin의 신학적 관점과 신앙체계에 대한 신학적 진술의 논리적 연결성을 근거로 삼아 주제를 풀어나갈 것이다.    

Wesley는 어떠한가?  그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Calvinism의 5대 강령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 같으면 두 개나 세 개 정도는 인정했을 덴데, 그는 Calvin 신학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Calvinism의 5대 강령을 Wesley 신학과 비교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먼저  Wesleyan Arminian이 아닌 Calvinistic Arminian 신앙이 유럽의 개혁교회 전통 안에서 시작된 논쟁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Wesley를 신학적으로 Arminian 전통에 있다고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만약 이렇게 믿고 있다면 잘못 배워도 한참을 잘못 배운 것이다.  ‘바이든’이 ‘날리면’으로 들리지 않는 것처럼 ‘카더라’ 통신을 가지고 가짜 뉴스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들린다면 청각처리장애(APD)를 가진 자폐증 환자다.

Wesley 신학 배경은 Luther와 Calvin의 종교 개혁이 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유럽 대륙의 신학에 영향을 일절 받지 않았다.  Calvin 신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들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Wesley에게는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문제인 것 같다.  Wesley의 사역을 형성한 신학과 신앙은 오히려 사제 서품을 받은 Church of England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Church of England(성공회)는 Catholic Church와 Orthodox Church, 그리고 Protestant를 포괄하는 기독교의 Catholicity(보편적) 전통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신학을 유럽의 종교개혁보다 초대교회(Early Church) 전통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아 형성된 ‘Anglican Catholicism’(성공회적 가톨릭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역사 속에서 ‘Catholic’이라는 말은 기독교의 한 지류를 가리키는 명칭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전 세계적인 교회를 의미한다.  이 용어가 특별히 개신교 정통교회를 Catholic Church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상당히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Catholic(보편성)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대표적인 경우가 4세기에 작성된 최초의 기독교 신조인 니케아 신조(Nicene Creed)이다.  이 단어는 교회에 대한 속성인 단일성(unity)과 거룩성(holiness), 그리고 사도성(Apostolicity)과 함께 제시되었다.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하겠다.      

간혹 목사들 중에 ‘Catholic’ 용어만 나오면 무식하리만큼 무조건 이단이라고 떠들어대는 몰상식한 자들이 있다.  목사가 무식하면 양들이 힘들고 피곤해진다.  입 다물면 중간이라도 가는데 너무 설치거나 무식한 주장으로 떠들어 대는 것은 꼰대질이다.  외식(外飾) 하지 않는 목사의 특징이 무엇인가?  교인들 앞에서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거나 알지 못한 것을 우겨 가면서 절대로 다투거나 논쟁을 하지 않는다(딤후 2:23-24).       

내가 Wesley 신학을 공부한 것은 학위를 쌓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라 그가 끼친 영향력과 신학을 조금 더 광범위하게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Reformed church이나 심지어 Arminian 기독교의 대표적인 신학용어와 교리들을 Wesley에게 무식하리만큼 억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Calvin과 Wesley가 살았던 시대는 이백 년이라는 시간 공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몰상식하게 빗나간 시도들은 Wesley의 신앙적 가치와 실천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낳고 말 같지 않은 부정확한 설명, ‘카더라’ 통신이 된다.  이것은 서철원이가 “Wesley는 이신칭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했고….  그의 교리와 신학에 있어 Pelagius와 완전히 동일하며…..   Wesley 신학은 이단으로 단정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라고 주장한 것과 같다.  이것은 정말 ‘개소리’다.  관상이 과학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가 들을수록 품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持論)이다.

Wesley는 인생의 마지막 무렵 자신의 신학적 관심이 Arminian 전통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Wesley 신학이 Arminian 신학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신학적 용어 하나를 가지고 서로 머리 터지게 싸우는 Calvinist들과의 논쟁에서 그러한 입장을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옳고 그른 것을 성질 더러운 동물도 아닌데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개신교회 신학을 종교개혁 전통(Reformed), 특히 Calvin 신학으로 재단할 수 없다.  이 말의 의미는 기독교 안에서 누구든지 다른 의견이나 다른 신학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하나님은 은사적(고전 12:12-27), 구성원적(골 3:11), 인종적(계 5:9), 다양성을 좋아하신다는 것 말이다.

무엇보다도 Calvin은 하나님의 마지막 대변인(spokesman)이 아니다.  그저 삼시세끼 배고프면 밥 먹고, 병들면 골골하고, 피곤하면 자빠져 자는 인간에 불과하다.  오죽했으면 Calvin을 가리켜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는 말이 나와겠는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발람의 나귀처럼 잠깐 사용하신 것뿐이다(민 22:28).  우리들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누구든지 사람을 높이면 그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 가증스러운 것이다(눅 16:15).  신학적 꼰대짓 하는 사람을 높이지 말고 말에나 일에나 예수님만 높여야 한다(벧전 4:11).

그런데 Calvin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느낀 점도 있었다.  Calvin 신학의 장점은 신앙의 기본 요소들을 하나하나씩 정확하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단히 조직적이고 이성적이다.  모든 주제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잘 정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준다.  반면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Arminian 신앙의 영향을 받은 신학 전통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허접쓰레기 같은 신학으로 취급하는 것 말이다.  그렇다고 신학의 깊이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Calvin의 5대 강령에 필적하는 권위를 가진 만큼 훌륭하고 조직적이며 세련된 문자들로 정리한 표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인정해 주고 싶다.  성경을 아주 상세하게 푸는 Calvin의 능력을 능가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작금의 신학자나 목사들은 R. C. Sproul이 말한 것처럼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흉내만 내는 거의 짝퉁들이다.  자칭 개혁주의자인 것처럼 떠들어 대지만 신학자나 목사로서 품위와 인격을 갖춘 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따라서 갑(甲) 질 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것은 ‘쪽’ 팔리는 일이다.  나는 Calvin과 Wesley에게서 좋은 것은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목사다(살전 5:21).  그런데 하나 기억할 것이 있다.  Arminius와 Wesley를 포함하여 Calvin의 등장 훨씬 이전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은 Calvin의 가르친 사상에 전혀 관심도 없을뿐더러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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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과 Wesley 모두 그들의 신앙과 가치(價値), 그리고 실천의 근거가 성경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공표(公表)하였다.  “무슨 소리야!  Calvin이 더 성경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이 더 성경적이었는가 하는 것은 질문 자체가 되지 않는다.  이 단어가 표준어라 자주 사용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질문은 한 마디로 ‘개소리’다.  두 사람 모두 성경에 정통했고 그 바탕 위에 그들의 Theology을 날카롭고 공정하게 수립하였다.  Calvin과 Wesley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차이점보다 공통점(common ground) 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교리적(doctrinal) 내용을 다루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들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가치와 실천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아는 범위 내에서 시간이 되는대로 논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두 사람에 대한 2차 자료(Secondary Sources)보다는 원자료들(Primary Sources)에 우선적인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다.  만약 2차 자료를 끌어다가 사용하면 누군가 게거품을 물고 아니라고 우겨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워낙 많은 저서를 남겼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도 어렵거나 첩첩산중의 문제는 아니다.  두 사람이 쓴 저서를 가지고 논하는 데 있어 누군가 ‘지적 장애’를 갖지 않는 이상 논쟁적으로 나오지 않을 것을 믿고 있다.  물론 여러 가지 비교하는 데 있어 필요에 따라 2차 자료를 참고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역사적 상황(historical situation)과 배경(background)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경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논쟁의 불씨를 없애기 위해 나의 모든 관심과 초점은 Calvin과 Wesley의 1차 자료에 있다. 

먼저 두 사람의 시대 이후에 이상하게 발전된 ‘Calvinism’와 ‘Wesleyanism’의 진행과정을 논하는 것은 여기서 가능한 피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금의 두 사상은 너무나 많이 퇴색(discolor)되었기 때문이다.  지겨운 일이지만 우리는 Calvin 본인에 대한 이야기보다 Calvinism와 Reformism 전통에 대하여 더 많이 듣고 배우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Wesley 본인에 대한 이야기보다 Wesleyanism과 Methodist Church 전통에 대하여 듣고 배우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파편적(fragmentary)이고 조각난 진술들은 Calvin과 Wesley에 대하여 정확하고 올바른 정보와 자료를 주지 못한다.  더 나아가 두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거나 아예 개념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제멋대로 부각(浮刻)시킨다.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하거나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신학적 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Calvin과 Wesley의 추종자들이 두 사람의 신학사상을 잘못 전달하거나 아예 왜곡하고 확증편향적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이비 가짜 정보들이 두 사람을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비판 정신을 만들어 내고, 올바른 정보가 아니기 때문에 ‘카더라 통신’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 ‘개’(Dog)가 되지 않도록 두 사람의 신학적 성경 해석 방법보다는 그들의 신학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저작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추후에 말하겠지만 Calvin이 살아 있는 동안 몇 가지 살벌한 신학적 논쟁이 발생했다.  Wesley도 예외는 아니다.  Calvin의 생전에는 단순히 영적으로 경고하는 것을 넘어 무조건 판결로 논쟁을 처리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출교와 추방, 심지어 사형까지 시행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만약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종교 개혁의 원칙과 일치하고자 한다면 Calvin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강력히 파문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하였다.  그런데 당시 Bourgeoisie들이 장악하고 있던 정부 측은 이는 아무 근거 없는 율법주의라면서 Calvin의 주장을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Calvin는 끝까지 자기의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였으므로 Geneva에서 축출당하였다.

오늘까지 Calvin과 Wesley에 동의하지 않는 주제들을 둘러싼 ‘카더라 통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두 사람의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맹목적 추종자들로 인해 만들어진 쓸데없는 문제들이다.  이 결과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엄청난 분쟁과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주로 Calvin의 비판정신의 피가 흐르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이 짓을 한다.  마치 서철원이가 바지 목사 정이철을 내세워 Wesley를 이단이라고 나팔을 불어댄 것처럼 말이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서철원이는 무엇을 믿고 Wesley를 이단으로 낙인을 찍었는지 모르겠다.  치매의 초기 증상인가?  Wesley 신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그쪽 계통에 있는 교회에서 신앙생활도 한 것도 아니고, 책 서너 권을 읽고 Wesley를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신 나간 소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보기에는 Wesleyan들은 이단이다. 하지만 우리들을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고전 4:5).  주님이 오실 때가 ‘설레발’ 치거나 예단(豫斷) 하지 말아야 한다.

두 사람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밝히는 일은 현대적 유효성을 무시하고 진행하는 과거의 유산(遺産)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미련한 양들, 특별히 신학자나 목사들이 입만 열면 무슨 주옥같은 진리의 말씀이나 탁월한 학문인줄 알고 무조건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어리벙벙한 교인들과 맡겨진 목회는 관심도 없고 비판과 논쟁을 일삼는 ‘카더라’ 통신 특파원(목사)들을 위한 것이다.  이런 비교 작업을 통해 그들은 신학적 논쟁에서 ‘이슈’(issue)가 되는 것에 대한 정보를 보다 많이 알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섣불리 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과제들이다.  밑도 끝도 없는 ‘카더라’ 통신 특파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믿음과 실천에 대하여 Calvin과 Wesley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백내장의 초기 증상이나 삐딱한 눈으로 본다면 때로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처럼 희미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는 ‘갈라치기’는 되도록 피하고자 한다.  지도자 하나를 잘못 뽑은 한국 정치를 생각하면 이 단어는 대단히 더럽고 역겨운 용어다.  보통 ‘검정 아니면 흰색’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두 사람의 관점을 양극화하고 오히려 손상을 입을 수 있다.  마치 이스라엘의 정치적 위기와 양극화 현상이 Benjamin Netanyahu 총리가 만든 작품인 것처럼,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 된 바둑 용어가 변해 정치적 용어로 쓰이는 ‘갈라치기’를 두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나는 석사과정으로 Wesley Theology와 박사과정으로 Calvin Theology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진정한 비교를 위하여 두 사람의 관점을 공정하게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의 저서에 대해 논의하는 부분에서 고의적으로 왜곡하거나 혹은 빗나간 점이나 ‘카더라 통신’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바로 잡을 의사와 사과할 용기가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이단 사냥꾼 골빈 목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기회주의자처럼 입에 게거품을 물고 말 바꾸기에 변화무쌍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는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의도하고자 하는 것은 가능한 정확하고 공정하게 두 사람을 비교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나는 Calvin과 Wesley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지 Brain Fog 증상을 가진 맹목적 추종자는 아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는 평범한 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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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esley는 1735년 5월 24일 Aldersgate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였다.  Wesley는 그곳에서 자기의 인생을 변화시킨 경험을 『The Works of John Wesley Volume 18: Journal and Diaries』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어떤 사람이 Luther의 Romans 주석 서문 낭독을 읽고 있었다. 듣는 동안 나의 심장이 이상하게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한 분만을 의지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가 다른 이들이 아닌 나의 죄를 없이 하셨으며, 죄와 죽음의 율법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 체험을 힘입어 더 이상 자기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고 본격적인 전도에 착수하였다.  먼저 Wesley는 독일의 Hernhut에 소재한 Moravian 공동체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  그러나 Moravian파의 신비주의와 은둔주의는 자기의 성격과 사회적 관심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는 그동안의 받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Moravian 교도가 되지 않기로 결정했다.

Wesley는 대학을 졸업하고 1725년 4월 5일부터 Diary(일기)를 쓰기 시작해서 1790년 10월 24일까지 자신의 일기를 마지막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1791년 2월 23일 Leatherhead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다.  Wesley는 Calvin보다 이 백 년 후에 살았던 인물이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교회적 상황은 여러 가지 면에 있어 서로 극적인 차이가 있었다.  두 사람을 비교할 때는 반드시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영적 갈등에 관해 거의 글을 남기지 않았던 Calvin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Roman Catholic Church에 저항하며 Geneva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심전력을 했다.  그러나 Wesley는 Church of England를 갱신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목적은 분명했다.  “국교회를 개혁하고, 성경적 성결을 전국에 전파하는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영국을 복음화하라는 독특한 사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도적 사명을 띤 사람으로 알았다. 

Wesley는 Anglican Church 즉 Church of England가 영적인 생명력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적 성장을 위해 실천적인 신앙을 전파하고 복음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낳고 보존하고 증가시킨다는 한 가지 관점을 가지고 노력했다.  반면에 Calvin은 종교 개혁 전통을 지키고 분명하게 밝히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였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성서적 전통에 굳게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영적 건강을 위해 노력했으며, 믿음의 가치와 실천을 전파하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있었기에 최선을 다했다.

Wesley는 1720년 6월 24일에 University of Oxford의 기독교 대학에 입학하였다.  학교로부터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고, 대학을 졸업하고 1726년 University of Oxford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1725년 부사제 안수를 받았으며, 그로부터 3년 후에 Episcopal Church of England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Wesley는 대학 Professor이며, 안수받은 Anglican Church Priest였다.  그리고 1729년 동생  Charles Wesley와 또 다른 몇 사람과 함께 신앙단체인 Holy Club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때 그들은 사람들이 야유하는 의미로 Methodists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이들은 이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겨 Methodist Church 운동을 시작하였다. 

Methodist Church 운동은 영국인들과 신대륙에 정착한 미국인들을 깨운 기독교 갱신 운동(Christian Renewal Movement)이었다.  감리교회 소속 신자들은 주중에 모였고, 속회와 신도반을 통하여 경건한 생활과 목회를 지향하는 소그룹(Small Group)으로 성장해 갔다.  Wesley는 국교회의 전통적(traditional) 방식을 뛰어넘어 개혁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평신도를 적극적으로 사역에 활용하였고, 공중 예배 때 찬송을 부르는 일, 그리고 서로 간에 죄를 고백하고 권면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여성 지도자가 이끄는 여성들만을 위한 분단을 설치함으로써 Methodist에서는 처음부터 여성들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또한 순회 설교자(itinerant preacher)를 세워 Methodist Church 운동을 전하게 하였고, 전도와 선교, 그리고 다양한 사회 선교에 힘을 쏟았다.  더 나아가 학교와 고아원 설립과 감옥제도 개혁과 노예제도 폐지(abolition of slavery)에 앞장섰다.

“전 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외쳤던 Wesley는 Methodist Church를 세운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400여 종이나 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독서의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대어(ancient language)를 비롯하여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아랍어, 불어, 이태리어, 서반아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그리고 영어에 능통했고, 그가 저술한 큰 책만도 25종이나 된다.  목회자로서 수많은 설교문을 작성한 Wesley는 150편 이상의 설교를 묶어 『Explanatory Notes upon the New Testament』을 펴냈다.  후에 이 책은 Methodist Church의 안내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아울러 50년 동안 사역하며 작성했던 편지와 글들을 모아 『A Christian Library』라는 서른 권짜리 시리즈를 출판하였다.  이 시리즈는 English로 출판된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글들 중 가장 정제된 내용을 담고 있는 축약본(abbreviated version)이다.

어떠한 사상도 Wesley 안에 들어오면 그중에서 성경적인 것과 비성경적인 것이 구분되어 성경적인 것은 Wesley의 것이 되고 비성경적인 것은 단순한 지식의 창고에 보관되는 것이었다.  신비주의(Mysticism)와 개혁주의(Reformism) 사상도 외에는 아니었다.  그는 이미 16세기 개혁자들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의 해석에 있어서 Luther나 Calvin이 철학과 사색을 버리고 역사적이며 경험적인 방법에 의존하였다는 점에서 이들에게 동의하였다.  이런 면에 있어 Wesley는 Calvin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Calvin이 교회 내의 그릇된 신비주의를 배격했다는 점과 기독교 믿음의 역사적 해석과 경험적 해석을 좀 더 분명하게 실제적으로 추론해 내었기 때문이다.  Calvin이 복음을 좀 더 실제적으로 현실 생활과 밀착시켰다는 점에서 Wesley는 Calvin의 사상에 많은 공감을 하였다.

Wesley 신학은 다양하고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신학사조들을 모두 성경 제일주의라고 하는 하나의 원리로 연결시켜 주었다.  또한 중세와 종교 개혁의 신앙을 종합하여 후대에 전해주는 교량의 역할을 했다.  사실 Wesley는 Calvin처럼 체계적인 신학을 저술하지 않았다.  못 배웠거나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대신 『The Works of John Wesley, Sermons vol 2』에서 말한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고의 기술을 좋아하거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미래의 행복에 필요한 진리들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일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방식”으로 선포하였다. 

예정론에 관해서 자신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고백한 Calvin은 피조물인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하지만 Calvin에게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상대적으로 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와 무능력(Total Inability)을 강조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외면했다.  그러나 Wesley에게 있어서는 신앙과 이성이 아무런 모순 없이 조화를 이루었다.  또한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과 인간의 책임(Human Responsibility)이 서로 충돌됨이 없이 일관된 원리로써 존재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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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의 종교개혁자 John Calvin은 전 시대에 걸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독교 위인이다.  그의 회심(回心)에 관하여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대학생 시절에 그가 Protestant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자주 접촉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정보가 있다.  1532년 4월에 그 당시의 전형적인 인문주의(Humanism) 학자였던 그는 고대 Rome의 철학자 Seneca의 『De Clementia』 관한 주석을 자신의 첫 번째 저서로 출판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Calvin은 종교개혁 운동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그 운동은 그의 관심을 성경 연구에 집중하게 하였다.

Calvin은 16세기 유럽 대륙에서 기독교의 영적 부흥을 선도(善導)한 기념비적 인물이다.  그는 Swiss church의 주무대였던 Geneva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던 뛰어난 문필가였으며, Protestant 교회의 변증가(dialectician)였다.  그의 저작들은 Roman Catholic Church의 정치적 권위에 맞서 종교개혁이 확장되는데 일조(一助)하였다.  Calvin은 이단이라는 판단이 들거나 성경적 기독교의 이해에 위협으로 여겨지는 새로운 기독교 사상이나 행위들을 반박할 때는 이상하리만큼 논쟁적으로 변모(變貌)했다. 

친구 Nicolas Cop이 University of Paris학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Calvin은 Cop이 1533년 11월 1일에 행할 학장 취임 연설을 준비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 연설은 교회를 비판하고 Martin Luther가 옹호한 논선에 따라 개혁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반(反) Protestant 감정이 폭발하여 Calvin과 Cop은 파리를 떠나야 했다.    

Calvin은 1534년 자신의 기독교 처녀작 『Psychopannychia』를 출판하였다.  그것은 죽음 이후에 영혼이 잠잔다는 Anabaptist 교리를 비판한 책이었다.  그 후에 1535년 Calvin이 서문을 쓴 Olivetan의 French Bible이 출판되었다.  이것을 번역한 사람은 Calvin의 사촌 Pierre Robert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저술은 1536년 3월에 Basel에서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여섯 장으로 이루어진 책이었다.  그 책에는 Francis I of France에게 보낸 편지가 서문으로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비방하는 사람들을 반박하여 Protestant들을 옹호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다섯 차례에 걸쳐 개정하면서 각 장의 분량을 확대하기도 하고 새로운 장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최종본은 1559년 출판되었는데, 네 권의 책은 여덟 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다.  원래의 Latin version을 French로 번역하였고, 그런 작업을 통하여 Modern French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 신앙을 짧게 요약한 이 책은 그 저자인 Calvin이 실제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에 새로운 교리들에 대한 뛰어난 해설이자 솔직한 변증으로서 Protestant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오늘날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여전히 인기 있는 책이다.   

지난 오백 년 동안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변화하는데 말할 수 없이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서 Calvin은 자신의 신학적 신념과 도덕적 가치 그리고 목회적 실천의 토대를 완벽하게 정리하였다.  정통성을 가지고 사용할 수 있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기독교강요』야 말로 종교 개혁의 시대에 있어서 Protestant 조직신학의 최고봉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 성경 외의 책으로 개인이나 교회, 혹은 종교 개혁 신학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출판물을 찾는다면 『기독교강요』가 가장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Calvin은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펴내면서 신자들에게 자신이 쓴 성서주석을 연구하고 공부할 것을 권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모세오경과 모든 선지자들을 포함한 구약성경에 관한 23권의 주석서들과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신약성경 전체의 주석서들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도 그는 설교와 소논문들을 출판하였고, 신자들의 예배와 영적 성장을 위한 찬송을 짓기도 하였다.  인문주의적 학문과 신학적 지식이 바탕이 된 Calvin의 저서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교회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오랫동안 부도덕으로 유럽에 소문난 도시 Geneva를 개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Calvin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자신의 과업을 시작하였다.  그의 첫 번째 과제는 Geneva 시의 법률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교회의 행정 체계를 마련하고 자신이 작성한 Strasbourg 전례와 찬송가를 개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교인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기 위하여 기독교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는데,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학교와 고등교육을 실시하는 Academy를 세웠다.  이 모든 일을 통한 커다란 목적은 Geneva를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거룩한  모범 도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엄격한 때로는 오늘날 칼빈주의들조차도 납득하지 않으려고 하는 가혹한 Church discipline(교회권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Calvin은 신자들의 신앙과 가치, 그리고 실천에 관하여 판결하는, 더 나아가 징계와 파문, 중대한 경우에는 이단으로 판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교회 법정을 이끌면서 Geneva 시평의회를 감독하였다.  막강한 권력이었다.  Geneva 시와 시민들을 개혁하려는 그의 노력은 자연히 내부 갈등으로 이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칼빈주의자는 아니었으며 심지어 Calvin과 의견을 같이하는 일부 사람들도 Calvin이 자신의 엄격한 요구사항들을 지나치게 밀고 나간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Calvin을 Geneva 시에서 쫓아내려는 폭동과 소요가 간간이 일어났다. 

결국 Calvin이 Geneva에서 2년 동안 사역한 후에 추방당한 이유가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지나친 열정이 미성숙한 신앙인, 즉 훈련받지 못한 사람들을 주님의 사랑과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Calvin은 많은 사람들에게 엄격하고 현세에서의 즐거움을 억제하는 전형으로 여겨져 왔다.  경건한 삶이 아니라 금욕적인 삶을 추구했던 것 같다.

그러나 Calvin의 영향력이 Geneva 시의 한계를 훨씬 넘어섰던 것만은 사실이다.  기독교 울타리를 넘어선 영역들에서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  정치, 과학, 역사, 미학(美學) 분야에서 그의 많은 사상들이 서구 사상과 밀접하게 서로 얽혀 있었다.  그를 위대한 지성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양의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의 형성 요인들 가운데 하나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Calvin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과 비판 정신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Calvin이 Geneva에서 주장했던 경건성의 잔재(殘滓)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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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초자연적인 역사와 은사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기도생활 속에서 성경적인 방언의 은사(고전 12:10)를 사용하고 있는 다른 형제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방을 한다.  이들은 방언하는 자들을 향해 기만을 당했거나 최악의 경우 다른 잘못된 영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어떻게 성도의 교제를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엡 4:16).  또 다른 문제는 교회의 많은 지체들에게 있어(고전 12:12), 고린도교회처럼 신자들 사이에 인위적으로 서로 다른 영적 수준을 설정하거나 다른 사람의 영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고전 12:4-31).

사실 교회 안에서 어떤 표적과 기사(행 14:3)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여부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있거나(롬 12:3), 아니면 각자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하지만 소위 계몽주의가 오랫동안 득세하던 기간이 있었고, 또한 현대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현상적인 진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성적인 성향으로 변화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 중에 대다수가 현대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에 때때로 현실적이지 못한 이유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사도시대에 국한된 것으로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고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과 인류 가운데(모든 사람에게) 그와 같이 행하사…’라고 말씀하고 있다(렘 32:20).  이 구절은 출애굽 시대부터 포로기까지 표적과 기사의 예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례미야가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애굽에 징조와 기사를 베푸셨고(신 4:34), 지금도 이스라엘 땅과 세계 모든 나라에서 그와 같이 행하심으로(히 13:8),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한 분만이 역사의 참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신다(신 4:34-39).  사도 요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을 뿐 아니라(요 20:30), 낱낱이 기록하기에는 불가능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요 21:25).

이러한 것을 볼 때 표적과 기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오늘날 성령의 역사에 대한 지나친 폐쇄성을 초래한다.  전 세계적으로 보고 되는 기적들에 대해 부당한 회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올바른 신앙관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물론 기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 영혼을 온전히 구원할 수 없고, 구원에 이르는 능력은 오직 복음을 통해(롬 1:16), 역사하시는 성령 안에 있다(고전 12:3).  하지만 누군가 초자연적인 능력이 복음을 희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롬 15:19),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적대적이고 바리새인처럼 생명력이 없는 죽은 말씀만을 강조한다면(마 23:15), 그 역시 올바른 믿음이 아닌 반쪽짜리 병든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살전 1:5).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개인적인 가치를 스스로 가진 은사로 평가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전 1:6-13).  예를 들어 누군가 더 크고 눈에 띄게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난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런 은사를 가진 사역자를 높이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끊임없이 책망했고(고전 4:7), 이러한 책망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일차적인 초점이 은사가 아니라 그 은사를 허락해 주시는 분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전 12:11).  모든 신자들이 우선적으로 은사를 사모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먼저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마 24:37-40).  그 다음 은사를 사모해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전 14:39). 

우리가 성경을 통해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경험과 놀라운 체험을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사역을 확증하는데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람을 안다고 고백했는데(고후 12:2), 그것은 자신의 사역에 있어 중요한 원천이 되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어떻게 덮어두어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즉, 부활의 능력을 통해(요 6:40), 그러한 황홀하고 신비한 체험보다는(행 10:10),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롬 6:5),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현재의 삶에 있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빌 1:27).

모세의 개인적인 체험은 어떠했는가?  그는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이러한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3:1-5).  모세가 유일하게 있었던 것은 오직 그분과의 만남에 대해 백성들에게 간증하는 것이다( 3:13-15).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의 백성들에게 모세에게 말씀을 주신 이가 그들 조상의 하나님 자신이셨음을 증명할 있다.  모세가 경험한 것은 다른 사람이 경험할 없는 모세 개인만의 독특한 영적 체험이다.  따라서 개인이 받은 성령체험을 너무 자주 자신의 사역과 영성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해 내세우는 것은 아주 잘못된 행동이다.  설사 그러한 체험을더라도 그것은 사적인 것이라서 장려하거나 과시할 만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체험한 것을 가지고 상대방의 신앙을 판단하거나( 14:4), 자신만이 체험한 어떤 경험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키려 한다면 이런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8:14), 마귀에게 충동질을 받고 있는 것이다(눅 22:31).  Jonathan Edwards 개인적인 체험을 유난히 강조하는 사람들에 대해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사람이 비상한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가증스러울 있다. 영적이고 영원한 영혼의 생명은 성령의 특별은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 안에 있다”  그러면서 성령의 두 종류의 영향력, 즉 ‘일반적이고 은혜로운 영향력’과 ‘영감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주시는 특별한 영향력’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오직 사랑하시는 자녀들과 그분의 은총을 입은 자들에게만 베푸시는 성령의 은사는 후자가 아니라 전자라고 말한다.  

Edwards는 발람과 사울과 가룟 유다, 그리고 히브리서 6장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와 마태복음 7장 22절에서 나오는 거짓선지자의 예를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장 위대한 특권은 그들이 영감을 받고 이적을 행한 것에 있지 않고 그들의 뛰어난 거룩성에 있었다. 그들 마음에 있었던 그 은혜야말로 이적을 행하는 그들의 은사들보다 천 배나 더 큰 그들의 존귀요 명예였다. 사도 바울은 다른 모든 사도보다 환상과 계시와 이적적인 은사가 풍부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귀신들이 그들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사도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그들이 받은 은사들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은혜였다”  

요약하여 말하면 개인의 독특한 체험을 강조하기보다는 주님께 받은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은사를 사모하되(고전 14:1), 은사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고전 12:11, 12:28, 엡 4:7-11)을 더욱더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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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통 계시

계시 2023. 10. 30. 12:26

John Piper, 그리고 John MacArthur와 같은 신앙 라인에 서있는 R. C. Sproul는 장로교 개혁주의 신학자다.  그는 흔히 정통 장로교 신자들에 대한 문화적 이미지는 영적자발성(spiritual spontaneity)을 조금만 암시해도 미간(眉間)에 내 천(川) 자를 그리며 찌푸리는 자로 묘사했다.  그러면서 『The Mystery of the Holy Spirit』에서 이런 예화를 들었다.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세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교회는 감리교회, 두 번째 교회는 침례교회, 세 번째 교회는 장로교회였다. 그가 귀향해서 상급자들에게 이런 보고를 했다. 감리교회를 방문했더니 신자들 모두가 ‘불! 불! 불!’ 소리만 지르고, 침례교회를 방문했더니, 그곳 신자들 역시 ‘물! 물! 물!’ 소리만 지르고, 장로교회를 방문했더니, 그들도 ‘질서! 질서! 질서!’ 소리만 질렀다”

Sproul은 이 예화를 소개한 뒤 장로교 그리스도인들을 꼬집으면서 말하였다.  이들은 고린도전서 1장부터 16장까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다 생략하고, 오직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고린도전서 14장 40절 말씀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다.  이 예화가 주는 의미를 장로교 사람들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  특별히 칼빈주의 신앙을 가지고 자신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마음판에 새겨야 한다.  이들의 문제는 바리새인처럼 너무 교회질서와 전통만을 따지기 때문(막 7:1-5)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허락한 은사(고전 12:7)를 무시하므로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이다(살전 5:19).

Wayne A. Grudem은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에서 오늘날의 예언은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것으로 안위와 권면을 통해 교회의 덕을 세우고(고전 14:3), 회개와 전도를 하는 것이, 그 주된 기능이라고 강조한다(고전 14:25).  그러면서 그는 고린도전서 14장 29-30절에 나오는 ‘예언’과 ‘계시’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이 둘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고전 12:11).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성경에서계시’ 혹은 ‘계시하다’라는 말은 꼭 정확무오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말한’(벧후 1:21), 특별계시인 성경말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딤후 3:16).  

이 단어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구절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아는 것( 11:25)과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 1:18),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1:17), 더 나아가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하고자 하는 사람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것’( 11:27) 들이다.  모든 것은 기록된 성경과는 상관없는 사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전 14:26).  따라서 Grudem은 절대적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오류의 가능성이 일절 없는 성경말씀(벧후 1:20-21)과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사적인 계시를 구분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예언은 기록된 성경말씀과 같이 정확무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분별해야 한다고 말한다(고전 14:29).  또한 신약의 예언자들은 예언을 남용하거나 과신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D. A. Carson 역시 ‘계시’라는 말을 전문용어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Showing the Spiri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린도전서 14장 30절에서 예언의 은사가 계시에 의존한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정경의 완결성을 위협하는 권위적 계시형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개신교의 조직신학 용어와 성경저자들의 용어를 혼동하는 것이다”  또한 『Exegetical Fallacies』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어떤 해석자가 ‘계시하다’를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특별한 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늘 생각한다면 그는 빌립보 3장 15절을 해석하기가 힘들 것이다”  

사실 ‘계시’라는 말을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하는 것은 중단론 신학자와 목사들만이 가지고 있는 삐뚤어진 생각이다.  그러나 카리스마적 입장의 사람들은 성경이 기록된 이후의 신약의 예언이 성경과 동일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문제는 예언하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마치 종결된 성경의 기록에 무엇을 더하는 것처럼(계 22:18-19), 용서받지 못할 이단으로 막무가내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계시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데서 나온 신학적 편견으로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역사적으로 몬타누스와 같은 이단들이 자신의 사적인 계시를 기록된 성경의 계시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예언(계시)을 하면 곧 성경말씀에 무엇인가 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과민반응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예언을 하거나 환상을 보든지 아니면 꿈을 꾸는 사람들을(행 2:17), 신비주의자로 몰아세우고 정죄하거나 이단시하는 사람들 중 특히 개혁주의 신학에서 대표적인 사람으로 John MacArthur가 있다.  그리고 “성경은 모든 계시의 언약성과 구속역사성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두 줄기로 계시하시지 않는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Richard B. Gaffin 도 있다.  물론 이들이 가르치는 말씀에서 배울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이중계시관’ 즉 교회 전체에 대한 ‘정경적 계시’와 신자 개인을 위한 ‘사적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반면에 Grudem은 지금도 성령께서 주시는 예언의 은사는 계속된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2:10).  이 문제를 가지고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Vern Poythress 교수는 Grudem과 Gaffin의 견해를 비교 평가한 후에 “특별계시는 곧 성경말씀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기 때문에 Gaffin과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예언의 은사가 오늘날 필요 없다는 주장에 대해 “만일 사도들이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이런 은사가 필요했다면 오늘날 성경 반입이 금지된 오지의 선교사들에게도 이런 은사가 더더욱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Sam Storms 역시 초대교회의 탄생을 위해 영적인 은사들이 필수적이었음을 기꺼이 인정하지만, “왜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 은사들이 덜 중요하거나 덜 필요하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실수가 없으신 분이다(히 6:18).  그분은 우리에게 틀리거나 잘못된 예언(계시)을 주지 않는다(고전 14:3).  문제는 누군가 받은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 혹은 오랫동안 다듬어지는 훈련이 없이 은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실수할 때가 많은 것이다.  가령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고,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일지라도 받은 사람이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예를 든다면 피장 시몬의 집에서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서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던 베드로는 이 일이 세 번씩 반복될 때까지 자신이 본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슨 뜻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의심을 했다(행 10:9-17).  이것은 계시가 아무리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확실하다 할지라도(약 1:17), 그것을 받는 사람이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인해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군가 계시를 받으면 무조건 ‘직통계시’라고 판단해서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나 광신자로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모든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을 받아 들려야 한다(살전 5:19-22).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말하고 있다(요일 4:1).  또한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 해야만 한다고 증거 한다(고전 14:29).  요지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말도 무의미한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발설된 모든 말은 마음에 있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막 7:20-23).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마 12:36-37).  섣불리 판단하거나 함부로 이단이라고 비판하지 말고 기도하는 가운데 가마리엘처럼 신중해야 한다(행 5: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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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계시 2023. 10. 8. 03:12

구약시대에 이루어졌던 선지자들의 예언자적 사역의 예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에게 있어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전체 실례들은 커다란 단체를 대상으로 한 계시였다(사 6:6-8, 렘 11:6-7).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는 엄청난 책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선지자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말씀을 전하며 기록할 수 있었다(렘 1:9).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라고(출 9:1, 삼상 10:18), 선포한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같았다(신 18:19, 겔 33:7).  이렇게 선지자가 말로 메시지를 전한 것은 곧 계시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해석과 적용 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 그대로를 전하고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민 22:38).  

따라서 구약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했으며(신 18:18-20, 겔 2:7),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선지자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었다(삼상 8:7, 왕상 20:35-36).  이렇게 구약 선지자들이 주요 역사가이며 오류 없는 성경을 쓰는 사람들이었다면(대상 29:29, 대하 9:29, 12:15), 신약시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행 4:33), 성경을 기록되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행 1:2).  그들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처럼 불러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사도’라고 불렀다. 이들은 구약의 선지자에 준하는 사람들이지만(고전 2:13, 갈 1:8-12, 벧후 3:2), 신약 교회의 권위 구조상 구약시대의 이스라엘과는 달랐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도들에게 각각 영역에 대해 다른 권위를 주셨다.  베드로에게는 유대인들을 향한 권위가 있었고(벧전 1:1), 바울에게는 이방인을 향한 권위가 주어졌으며(롬 11:13, 행 9:15), 교회는 이들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신약의 사도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권위를 세우고자 할 때에 선지자란 호칭으로 호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자신을 사도라고 불렀다(롬 1:1, 고전 1:1, 고후 1:1, 갈 1:1, 엡 1:1, 벧전 1:1, 벧후 1:1).  또한 이들은 신약성경을 기록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엡 2:20).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직접 선포하신 말씀이고, 신약의 사도 또한 그러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오늘날의 선지자도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 같이 자신이 전한 말이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Wayne Grudem은 고린도의 예언자들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D. A. Carson은 『Showing the Spirit』에서 Grudem이 제시하는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예언은 계시를 전제하는데 구약 예언은 ‘여호와께서 이렇게 가라사대’라는 말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 인용의 형식을 취하지만, 신약은 이런 경우들이 드물다. 구약 선지자가 일단 참된 예언자로 인정되면 그 예언이 내용에 대해서 점검하는 일이 없었으나, 신약 선지자는 그 예언의 내용을 조심스럽게 점검받게 되어 있었다”

구약의 선지자와 달리 신약의 선지자는 자기 메시지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혼돈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예언을 일인칭으로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처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예언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고 있는 신구약 성경에 의해 테스트되고 확인되는 과정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신약의 선지자는 얼마든지 과오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행 21:10-12), 자신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른 지체들에게 겸손하게 확증받고 시정받을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14:29).

신약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일상생활에서의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자”라는 의미보다는, 그저 “초자연적인 지식을 소유한 자, 아니면 신적인 권위라는 의미가 함축되지 않은 대변인” 정도를 의미했다(요 4:19, 딛 1:12).  이 문제를 가지고 Helmut Kramer는 ‘선지자’라는 헬라어 단어는 단지 전하고 선포하는 ‘전달자’라는 공식적인 기능을 나타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의 의미는 신약의 선지자가 구약의 선지자처럼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두로에 있는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 것을 간곡히 간청할 때(행 21:12), 바울은 이 예언에 순종하지 않았다(행 21:17).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만약, 두로의 제자들이 말한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면 바울은 결코 그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9절에 분변 하라고 명함으로 신약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제시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다(살전 5:20-21).          

그러면 누군가 “예언자가 전한 계시를 바탕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기를 바라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면, 구약 시대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확실히 그랬다.  백성들이 그에게 유다에 머물러야 하는지 이집트로 탈출해야 할지를 물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유다에 남아 있는 자만을 지키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전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이집트로 갔다가 죽음을 당했다(렘 42장).   그러나 신약의 선지자들이 계시를 전함에 있어 예레미야나 구약의 선지자를 표준으로 삼고 따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4장 29-30, 36절에 나타난 대로 예언의 은사가 상당히 규제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약의 어떤 예언도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와 동등하지 않을뿐더러, Bruce Yocum이 말한 것처럼 신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전달하는 데 있어 얼마든지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예언자로부터 구약 선지자처럼 인도함을 구하는 것은 신약에서는 완전히 불법화된다. 이것은 구약에만 있던 중요 기능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들은 각자 스스로가 믿는 자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롬 8:14).  신약의 사람들은 인도와 방향, 삶에 대한 관리 등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딤후 3:16, 벧후 1:21)과 성령으로부터 받아야 한다(갈 5:18).  그렇다면 “신약의 예언자들이 믿는 자들을 도울 수 없는가?”라는 의구심이 생긴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향을 제시하여 예수님과의 개선된 관계로 나아가도록 권면의 말씀과 확신을 제공하기도 한다(고전 14:3).  하지만 신약의 어떤 선지자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다스리는 예언을 주거나 받지 않는다.  대신에 믿는 자들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해 줄 수 있다(고전 14:3). 

만약 신약의 선지자로부터 미래에 관한 예언적 말씀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들을 판단하고 분별하고 확인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요일 4:1).  바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을 통해(딤후 3:16), 옳게 분변 할 것을 권면했고(딤후 2:15), 베드로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라고 말하면서(벧후 1:19-20),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 모든 가르침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켰다(벧후 3:16).  그러나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두 명의 강한 예언자들이 남아있다(계 11:3-13).  학자들은 ‘두 증인’에 대해 각기 해석을 달리한다.  나머지는 각 사람이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믿으면 된다(롬 11:3).  그러나 이 세상 끝 날에는 예언자의 역할이 다시 살아난다.  이들의 권한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과 같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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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의 지속성

계시 2023. 10. 1. 09:59

Gordon Fee는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말한다.  “구약 예언자는 성령의 감동 하에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심판과 구원을 선포했다. 예언의 주류는 몰아지경이나 광증과는 별로 관계가 없으며 예언 속에 미래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말세에 성령의 부으심으로 요엘 2장 28절의 예언이 성취되었고, 결과 모든 신자들이 받을 있었다( 2:17-18). 바울 서신에서도 예언은 널리 퍼진 현상이고(살전 5:19-22, 12:6), 회중의 건덕과 격려를 위하여(고전 14:3), 집회시간에 구두로 전달된 성령에 감동된 자발적이고 알아들을 있는 메시지로 구성되었다(고전 14:26). 그러나 예언자들이 예언을 통제할 있었다”(고전 14:26-33).

예언은 성령의 계시로 알아들을 있는 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은사이다(고전 14:3).  이미 과거에 주어진 성경계시를 삶의 현장에 현재적으로 지혜롭게 적용하는 것과 미래에 대해 미리 말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무조건 받아들일 성질의 것이 아니라 분별해야 한다(고전 14:29).  신약의 예언은 성경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은사 중지론자들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이 기록된 이후에는 이것이 주의 백성을 위한 완전하고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의 근원이기 때문에 누군가 지속되는 예언적인 말씀을 더하는 것은 성경의 충분성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약시대의 회중 예언이(고전 14:26), 그 권위에 있어 구약의 예언이나 신약 사도들의 말씀과 동등하다면 은사 중지론자들이 제시하는 이의는 지극히 타당할 것이다.  만약 오늘날 선지자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는 말을 했다면, 이 말은 권위에 있어 성경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그와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성경에 기록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의 예언이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드는 그들만의 주장의 근거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 지속론자들은 예언을 그렇게 보지 않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George Mallone은 기독교의 주류에 있는 은사 지속론자들 중에 오늘날의 계시가 성경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강조한다. 

Mallone의 주장이 맞는 이유가 있다.  만약 신약교회에서 회중의 예언이 성경적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면 바울은 예언을 분변 하는 것(고전 14:29)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예언을 멸시치 말고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살전 5:19-21).  여기서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라고 했다면 예언에는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선지자의 말이나(신 18:19, 렘 1:9, 겔 33:7), 신약사도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서는(행 1:2, 엡 2:20, 3:5), 이렇게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언은 성경적 권위를 갖고 있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 가치에 있어 성경을 위협하거나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 및 회중의 성숙한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고전 14:29, 요일 4:1).

성경에서 ‘계시’ 혹은 ‘계시하다’는 단어의 용법은 다양한 가능성의 넓은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신약의 모든 경우에서 ‘계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혹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고, 이 계시는 놀라운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가령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계시하신 것으로(마 16:17), 베드로는 계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알려주실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또한 갈라디아서 1장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엔 에모이’, 문자적으로 ‘내 안에’, ‘내게’ 혹은 ‘나에 관해서’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의 회심을 두고 한 말로, 여기서는 시공적 역사 속에서의 객관적 자기 계시(하나님의 아들), 즉 성경의 공적인 기록에 의해서 널리 증거 되고 지금 입증된 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바울에게 개별적으로 계시한 것을 말한다(마 11:27, 고전 2:10).

에베소서 1장 17절 말씀 역시 개별적인 계시(중생시), 이후에 은혜와 성숙과 관련된 계시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빌 3:15).  이런 의미에서 예언의 은사가 계시에 의존한다고 할 때(고전 14:30), 계시는 정경의 종료를 위협하는 권위적 계시 형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 오늘날의 계시는 성경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경계시의 종료와 함께 예언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D. A. Carson이 말한 것처럼 개신교의 조직신학 용어를 성경저자들의 용어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언이 ‘계시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언자들의 권위가 절대적이라고 결론을 짓지 않았다.  아무리 탁월한 예언적 말씀이라도 사도적 전통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는 거절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이었다(갈 1:6-9).  D. A. Carson도 이러한 원리가 어떠한 예언(계시) 은사에서도 성경자체에 대한 위협을 발견하는 현대의 중지론자들의 경악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예언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계시종결과 함께 계시은사의 종결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 오류와 남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Donald Gee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개인적인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은사를 통한 메시지를 지나치게 사모하는 자들은 지난 세대를 통해 경고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Dennis와 Rita Bennett도 『The Holy Spirit and You』에서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예언은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성령운동에 많은 손상을 입혔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 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하고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예언을 받을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하며 예언이나 방언통역, 혹은 지식과 지혜의 말씀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원래 가지고 있던 계획을 무조건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라고 상기시켰다.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예언을 받을 때 신중하게 살펴보고 영이 하나님께 속해있나 분별하라는 것이다(요일 4:1).

John MacArthur 역시 계시의 지속성이 교회에 많은 이단 운동을 불러일으켰음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러나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무엇이든지 사용하는 데에는 남용이 있는 법이다.  은사의 바른 사용이 불가능하지 않는 한 은사의 남용을 우려하여 은사의 바른 사용을 금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충분성과 예언의 은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성경의 독특성을 보호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떤 것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은사 중지론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중지론자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일 경우에 거기에 따르는 하나의 위험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행하시는 일을 반대하고 그로 인하여 바리새인처럼 성령의 역사를 심하게 대적하는 위험이 바로 그것이다(마 12:28-32).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다.  또한 그 사역을 통해 영광을 받기 원하신다(사 43:7).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어(엡 4:12),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허락해 주셨다(고전 12:7).  따라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오류를 승인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실 것과 진실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약 1:17)을 대적하지 않도록 교법사 가말리엘처럼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행 5:34-39).  특별히 말을 조심해야 하며(마 12:34-37), 섣불리 판단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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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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