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영의 궁극적인 비난은 마태복음 7장 22-23절과 누가복음 13장 22-30절에서 발견된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종교성이 강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한결 같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롬 10:2).  이들은 장시간 기도하고(막 12:40), 더 많이 성경을 연구하며(요 5:39), 더 많이 금식하고(눅 18:12), 더 많이 메시아 오심을 간절히 소망했다(눅 2:25-37).  하지만 막상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가장 큰 대적자들이 되었다(마 12:14, 막 3:6, 요 8:40, 11:53).  이 사람들은 이방 종교를 믿는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한 종교성이 강한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irony) 한 것은 이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 역시 예수님을 믿지만 속으로는 주님을 죽이려는 살인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요 8:31-37).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한 마디로 종교적 신념에 세뇌된 사람들이다(눅 13:22-27).

Lloyd Jones 목사는 종교의 영을 ‘죽은 정통주의’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단 못지 않게 가장 위험하고 교리적으로는 정통이지만 전혀 생명이 없는 화석화된 박제 신앙을 말한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얼마나 교리적으로 정통인지 초신자들도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하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교회에 가면 목사로부터 늘 들었던 것이 “우리 교회는 정통”이라는 소리일 것이다.  다른 교회와 다르다는 것을 지겹도록 들었는지 모른다.  이단이나 사이비가 아닌 이상 복음주의 목사들은 교리적으로 잘 가르치는 것이 이미 정평이 나있다.  입만 열면 사도 바울 못지 않게 해박한 성경지식과 신학적으로 건전한 것 같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성경을 해석할 정도면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 교수들도 울고 간다.  왜 그렇게 목사들은 아는 것이 많은지 모르겠다.  무엇이든지 물어보면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  칼빈주의 목사나 신학자들은 이미 높은 경지에 올라간 사람들이다.  감히 이들에게 도전할 사람이 있는가?  날카로운 개혁주의 칼날에 다른 신학들은 비명을 지르며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미련한 양들은 경지에 오르다 못해 절벽 끝에 서 있는 아슬아슬한 그런 목자를 믿고 따른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엘리트 교회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목사가 박사 가운을 입고 절제된 경건 속에 신학적 용어를 섞어가며 설교하면 시력(분별력)이 약한 양들은 그 메세지를 들으면서 자신이 엘리트 교회에 소속된 것을 뿌듯하게 생각한다.  한 마디로 이들이 가르치는 교리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처럼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 같다(갈 3:3, 4:6).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이런 현대교회들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른다.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마 23:3).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의 선생이라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바를 행하고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그들이 올바른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 기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주님이 여기까지만 말씀하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모세의 자리에 앉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르친 교훈들과 정면충돌을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신랄하게 비판하실 뿐 아니라(마 12:1-14, 15:1-20, 19:3-9), 그들의 가르침을 주의하고 경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마 16:6-12).  여기서 ‘행하고 지키라’는 명령은 바리새인들이 제시하는 율법 해석이 아니라 그들이 소리 내어 읽는 율법 자체를 가리킨다.   쉽게 말해 그들의 해석과 행동을 본받지 말고 율법 자체의 가르침만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5:19).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말씀은 그다음 구절이다.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3).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구약 내용 자체를 전달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 가지 율법에 수천 가지 규례를 만들어 낸 그들의 해석(마 15:9)과 그에 따른 행동에는 문제가 많았다(마 23:5-7).  이들은 무거운 규례의 짐을 사람들 어깨에 지우지만 정작 사람들이 그 짐을 지고 나르는 데에는 자신들의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마 23:4).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보일 수 있는 행동에만 열중했고(마 6:1, 5 16), 입만 살아 있어 대접을 받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문제가 오늘날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선생으로 살지는 못하지만 랍비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었던 것처럼(마 23:7), 오늘날도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목사와 신학자들, 그리고 중직을 맡은 직분자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대형 교회 목사들은 거의 회사 회장급 이상이다.  한 번 만나려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사전 예약을 하고 비서를 거쳐 철옹성 같은 문을 통과해야 만날 수 있다.  담임목사를 맹신하는 교인들을 보면 불쌍한 마음까지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 속담에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다.  이들 역시 자신이 배운 신학이나 소속된 교단의 전통을 배경삼아 성경을 해석한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 해석에서 문제가 많았던 것처럼 이들에게도 성경 해석에는 자신이 갈고닦은 신학과 교단의 전통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해 확증편향과 인지왜곡이 난무한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자신이 배운 신학과 틀리면 거침없이 이단이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이들에게 많은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이단으로 낙인을 찍히다 못해 삼단(?)까지 오른다.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단’이란 말은 더둘로가 종교적 분파를 뜻하는 용어로 바울에게 사용한 적이 있었다(행 24:5).  나를 본받으라고 말한 사도 바울도 이단 소리를 들었다면(빌 3:17), 우리들도 이단사냥꾼/이단제조자들에게 이 소리를 들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신학교 교육과 특정 교단 신학을 평가절하하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나 역시 이름 있는 신학교에서 탁월하고 쟁쟁한 교수들의 가르침과 많은 토론을 통해 학문적인 훈련을 받았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신학 교육이 학문적 유익이 있는 반면 부작용도 있다는 것이다.  요점이 무엇인가?  틀린 것과 다른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틀렸거나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목사가 성경 말씀만을 가지고 평생을 가르치고 전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문제는 교수인지, 교주인지 한 사람의 신학 사상에 맹신하는 목사들이다(딤후 4:3).  이들은 입만 열면 그 사람의 신학사상을 팔아먹기에 여념이 없다.  목사가 입을 열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어떤 특정 신학이나 어느 신학자의 조잡한 이론을 가지고 마치 그것이 성경적인 것처럼 주장한다면 나는 단언한다.  그것은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고 말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전하는 모든 사람에게 저주받을 것을 선포한다(갈 1:6-9).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사람 앞에 존경을 받는 목사(눅 16:15), 만담 수준의 설교를 통해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목사(갈 1:10), 진리의 말씀보다 인간적인 아부를 통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목사(눅 6:26)는 이미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고후 11:4).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미움(혐오와 증오)을 받는다.  더 나아가 이성에 넘어가고, 돈을 사랑하고, 명예에 정신이 나간 사람들도 있다.  모든 목사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목사들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종교의 영은 얼마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마음속에 생각을 집어넣을 수 있고, 그분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목사가 종교의 영향력 아래 지배를 받으면 그와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역시 종교성이 강한 사람으로 길들여지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한다(약 1:17).  목회를 하면서 느낀 것은 양들은 목자를 닮아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는데 왜 교회 담임목사를 닮아가는 것일까?  이 문제를 가지고 깊은 고민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기도하면서 깨달았다.  목사가 입만 열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벧전 4:11), 그분만을 자랑하는 중매쟁이 역할을 해야 하는데(고후 11:2),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목사 자신의 의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주님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양들이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히 12:2), 삼시세끼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아프면 약 먹고, 피곤하면 자빠져 자는 담임목사를 무슨 대단한 인물인 것처럼 바라본다면(행 3:12), 그런 교회는 ‘이가봇’ 교회가 된다(삼상 4:21).    

영적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목사와 신자들이 내 말에 반발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치 성적인 문제들(변태, 동성애, 자위행위, 간음, 근친상간, 매춘)이나 감정적인 문제들(증오, 분노, 공포, 우울증, 걱정, 불안감), 그리고 육체적인 질병에 의해 시달릴 수 있는 것처럼 종교의 영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억압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가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구절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자녀는 마귀가 손을 못대”라고 핏대를 올리는 종교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을까 심히 염려스럽다.  목회 사역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교인들은 본인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에 충실히 하고 있다고 말한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 피곤하지만 비몽사몽 간에 나오는 새벽기도, 남들이 내기 어려운 십일조와 각종 헌금들을 드리는 이들의 믿음은 정말 대단하다.  하지만 거짓된 신앙, 즉 종교적인 외양을 가져다주는 영에 의해 속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나는 이단과 사이비 모두 합쳐도 기독교 역사에 끼친 악영향이 교회에 침입한 종교의 영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삭이 필 때까지 곡식과 구별할 수 없는 잡초가 가라지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누가 곡식인지, 누가 가라지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종교의 영 배후에는 사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종교성이 강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주님의 말씀은 이들이 사탄을 섬겼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섬겼다.  그렇다면 그들의 아비 마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위해 믿음대로 산다고 자부했지만, 실제로는 사탄의 목적을 이루는데 도구로 이용당했던 것이다.  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종교성이 강한 이 집단적인 존재들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역사의 전진 과정에 중요한 방해물들이며 십자가의 원수 같은 역할을 한다(빌 3:18).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는 것이다’(마 13:29).  마지막 날 ‘꺼지지 않는 불’로 심판을 받을 때까지 참고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마 3:12, 13:30, 계 14:14-16).

우리가 이 종교의 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으려면 성령께 매우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성령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늘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고(롬 8:14), 민감하신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엡 4:30).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에서 발견되는 친밀한 사랑과 능력으로 이 종교의 영과 맞서야 한다.  이 싸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영적 전쟁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엡 6:10-12).  왜냐하면 종교의 영에게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 누군가가 변화를 시도하면 거칠게 반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의 영에게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엄청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바울을 생각해 보면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이었을 때 다소 사람 사울은 종교성이 강한 영에 의해 철저하게 지배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마약 중독자와 같이 종교의 영향력 아래 있어, 그가 종교적인 생활을 떠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나 열심이 종교생활을 했는지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 하고’(갈 1:13),  ‘사람을 죽이기까지’(행 22:4),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행 9:1).  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을 내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종교적인 영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성령 하나님의 새로운 일에 저항했지만,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는 다메섹에서 그가 바리새파의 영으로부터 자유케 하실 방법을 가지고 기다리셨다(행 9:3-19).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사울은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여태까지 미친 듯이 섬겼던 하나님은 누구인가?(갈 1:14).  나는 오늘날 회심이전의 사울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태반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 말에 게거품 물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이 세상은 바리새파의 영에 의해 길들여진 종교성이 강한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처럼 창궐하는 시기다(눅 18:8).  신앙생활에는 중간지대란 없다.  매 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사람(롬 8:14-16)은 종교의 영, 거짓의 아비 사탄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요 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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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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