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서 자라고(마 2:23), 또래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셨지만 언제나 그들보다 훨씬 뛰어나셨다.  심지어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성전 뜰에서 모임을 가지고 있던 학자들을 놀라게 하셨다(눅 2:46-47).  다른 유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관례적인 교육을 받으며 부모에게 순종하고 그 지혜가 자라났다(눅 2:51-52).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지니신 분이지만 보통 인간과 동일한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거쳤음을 보여준다.  성장 과정에서 우리와 같은 단계를 밟아 나갔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과연 예수님에게 있어 목회 사역의 원천은 무엇이었는가?”  아마 그분에게 있어 학문적인 지혜도 중요하셨다.  하지만 그것이 꼭 필요하거나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주로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부르셨기 때문이다(행 4:13).  세상 기준으로 보면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권력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다(고전 1:26).  한 마디로 ‘가방끈(?)이 짧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회적 정체성의 근거를 학문적인 교육에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분의 목회적 정체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유능한 목회자가 되신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집착하는 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늙은 바리새인의 신학 강의나 골빈 사두개인이 개최하는 설교 세미나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지만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고(눅 2:39-40), 목수 일을 하셨던 예수님께서는(막 6:3) 어느 날 갑자기 무인가 신학교를 거쳐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로 변신하신 것도 아니다.  목자장으로서의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성경의 계시라는 약속의 땅에서 자라났다.  그분은 매일매일 성부를 의존하는 가운데 자신의 삶과 사역에 대해 규정한 구약의 약속들과 예언들을 받아들이고 숙고하셨다(창 3:15, 사 53장, 슥 12:10, 말 3:1).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분의 사역을 절대적으로 결정했다(요 5:19, 30).  관계의 역학은 교육적인 요인들보다 목회적 유효성에 더 중요한 토대가 된다.  즉 목회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학교 교육과 학위 취득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다.  

Helmut Thielicke는 세상에서 가장 별 볼일 없고 보잘것없는 자들에게 사역의 초점을 맞추는 예수님의 경향에 대해 논하며 『Beyond Pushing and Producing』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은 그들이 쓸모없고 뛰어난 점도 없고 중요한 인물도 아니며 단지 하늘 아버지께서 잃어버린 불행한 자녀들이라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 듯하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귀하게 여기며 그들을 구원하셔야 했다. 그러한 자들에 대한 사역에 있어서 그분은 ‘절대적인 공평함’에 의거해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소위 ‘세속사적 관점들’을 무시하신 듯하다”  오늘날  목회 사역의 회복을 논함에 있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에 유의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목회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목회적 소명에 대한 확고한 원천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세속사적 관점들을 무시하듯 날마다 성부 하나님께 의지할 때 활성화되는 성경의 약속이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는 살벌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나사렛에서 죽음을 직면하셨을 때, 전에는 이웃이었지만 이제 검은 색안경을 끼고 성난 폭도로 변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 가운데로 지나서 자기 길을 가셨다(눅 4:22-30).  도대체 나사렛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어떠한 행동이 그런 미친놈들만 모여 있는 평상 마을 시위처럼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는가?  그분은 단지 자신의 성경의 약속의 현신(現身) 임을 선언했을 뿐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오실 성령의 기름부음 받는 자에 대한 이사야의 약속의 성취라고 밝히셨다(사 61:1-3).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펴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눅 4:18)라는 구절을 읽으셨다.  약속이 사람이 되었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마귀와 치열한 접전을 펼치신 후, 그분은 ‘성령의 권능’을 덧입으셨다(눅 4:14).  다시 한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의 근거를 정확히 어디에 두셨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목회 비전’ 말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유능한 목사가 되기 위해 남들이 알아주는 훌륭한 신학 교육과 뛰어난 언어 소통술 그리고 화려한 경력들, 예를 들어 본인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들먹거리며, 눈이 빠질 정도로 성경을 수 백독 하고, 새벽기도를 많이 한 것처럼 천식 걸린 목소리, 그리고 공업용 본드 같은 끈끈한 ‘인맥’을 최우선 순위로 둘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갖추기보다는 먼저 성경의 약속이라는 영원한 기초와 성령의 능력에 뿌리를 내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예언된 소명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학문적인 지혜의 축적이 아니라 계시의 약속인 성경(사 11:1-5)과 소유하신 성령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사 61:1-3).  Douglas Webster 박사는 『A Passion for Christ』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주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자신의 정신과 감성과 영혼이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도록 훈련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지금 이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의 근거를 두신 곳에 목회자들도 자기 정체성의 근거를 두는 것만큼 시급한 일은 없다고 말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라는 바울의 질문에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에베소의 제자들이 대답한다.  에베소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들었다면 분명 성령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이다(요 1:32-34).  하지만 이들은 약속된 성령(행 1:4)을 이제 그들도 받을 수 있다는 것(행 2:17)과 성령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삼상 10:6, 고후 5:17).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 제자들과 똑같은 상태에 있는 것 같다.  이들도 성령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저 교회 안에서 하는 전형적인 얘기라고 치부해 버리거나 자신들처럼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사는 사람에게 해당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성령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시당하고 있는 성령의 사역을 기술하기 위해 성경은 여러 가지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위에서 임하시고, 인치시고, 채우시고, 세례를 주시고,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고, 내주 하시고, 가르치시기도 하는데, 이러한 다양한 역사는 인격적인 그분의 측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는 면만 알기보다는(요 16:8-9), 병을 고치시고(눅 5:17, 행 10:38), 예언의 말씀을 주시며(고전 12:10-11), 동시에 거룩하게도 하시고(살후 2:13),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도 있다(롬 8:26-27). 뿐만 아니라 능력도 주시고(눅 24:49), 거듭나게 하시고(요 3:3-5),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증거해 주시며(갈 4:6), 삶 속에 아홉 가지 열매도 맺게 해 주신다(갈 5:22-23).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성령의 다양한 사역을 다 알기 전에 그분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의 사역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가설(假說)에 가까운 어떤 신학적 주장을 내세운다면 아마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교만하고 무지한 사람일 것이다(고전 8:2).  성령의 사역은 주님 앞에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조금씩 알아갈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이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 것만을 알 수 있기에(요 14:26), 그분이 영적 세계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엡 1:17-19).  문제는 목사나 신학자들 중에 성령의 한 부분만 바라보고 얻은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성령을 안다고 속단해 버리는 경우다.  예를 들어 성령은 “이러한 분이시고 이런 분은 아니야”, “이런 일을 하시지만 저런 일은 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이들은 종종 스스로 계신 하나님과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제멋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성령의 내주 하시는 사역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시고 성숙하게 세워 가시는 데 있어 그 방법이 감정적이지 않고 경험적이지 않다고 가르친다.  이런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은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의 전부라고 생각해서 성령의 다른 사역이 나타나면 무조건 의심하고 이단이나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을 보듯 판단하고 비판한다.  반면에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 운동을 접한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 사역에만 초점을 맞추는 신비주의적 경향이 있다.  이런 교회들은 치유와 예언과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 초자연적인 능력, 영분별, 귀신 쫓아내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은 오직 능력 사역에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다른 신자를 바라볼 때 과연 저들 마음속에도 성령이 계실까 라는 의구심을 가진다. 그 결과 교회의 머리 되신 한 분 예수님을 두고(엡 4:15), 같은 지체인 그리스도인들끼리(고전 12:12-27), 두 파로 나누어져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며(갈 5:15),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나팔을 불어댄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교회가 너무 많이 여러 파(派)로 나누어져 있다(고전 1:12).  마치 ‘쪽파’, ‘실파’, ‘양파’, ‘대파’ 같이, 당시 고린도 교회의 분열된 그룹들이 각기 다른 이유들을 내세워 각각 다른 설교자들을 추종하고 있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신데, 이들 말에 의하면 과연 어느 교파가 믿는 예수님이 진짜일까 궁금하다(고전 1:10-13).  사도 바울은 육신의 혈통으로 맺어진 형제자매보다 훨씬 더 깊은 유대감을 나누어야 할 그들에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라고 간절히 호소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어두움 세상 속으로 가져가는 그들의 사명이었다.  ‘내부 총질’로 인해 불신자들에게 교회가 손가락질과 조롱을 당하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롬 2:24).

오늘날 개혁주의에서는 말씀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인정하면 이단으로 정죄받기 쉽기 때문에 오직 말씀만을 강조한다.  진리의 말씀을 강조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 문제도 없다.  물론 전하는 말씀이 북어포처럼 메말라 있지만 나는 그것이 정확히 옳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은사주의에서는 성경 지식보다는 능력만을 강조할 때가 많다.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 문제도 없다.  이들이 남들보다 조금 시끄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언뜻 보면 복음주의자들은 자유를 두려워하는 것 같고, 은사주의자들은 질서를 불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복음주의에서는 내주 사역을 강조한 것이고, 은사주의에서는 능력 사역을 강조한 것으로 Lloyd Jones는 이것을 ‘일반 사역’과 ‘특수사역’, 즉 ‘성령의 간접 사역’과 ‘성령의 직접 사역’이라고 부른다.      

나는 대학원에서 웨슬리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두 진영에서 삼십 년이 넘게 있어본 경험자로서 말하고 싶다.  먼저 성령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유와 질서를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갈 5:22-24).  자유만 강조하거나(갈 5:1), 혹은 질서만 강조한다면(고전 14:33, 40),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게 된다.  신앙에 균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개혁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이 같은 교회 안에서, 혹은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화와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갈 수 없다면 이는 가장 큰 비극이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연약함과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잡도록 반대세력을 항상 일으키신다.  마치 Calvin이 독주를 막기 위해 Wesley가 등장한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 세대에는 말씀 운동을 넘어 은사 운동이라고 부르는 놀라운 운동을 일으키셨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께서 배우기를 바라시는 교훈을 은사 운동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이 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 된 사람들은 모두 한 ‘형제와 자매’가 된다(마 12:50).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이 편지의 마지막 단락에서 가족 용어를 다섯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12, 14, 25-27절).  요지가 무엇인가?  개혁주의(비은사주의)자들에게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19-20절)라는 경고의 말씀과 더불어 오순절주의(은사주의) 자들에게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희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12-13절)고 권면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두 가지 권고는 1세기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역을 하셨느냐는 것이다. 사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삶에서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사역이 균형이 잡혀 있고, 또한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우리의 목자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회적인 정체성의 원천을 성부께서 구체화시킨 성경의 약속에서 찾으셨다.  그분은 또한 자신의 목회적 소명의 원천을 성령의 권능을 덧입는 일에서 찾으셨다.  즉 목회적 정체성과 소명의 기초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분에게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성경 계시의 약속과 성부의 실제적인 현존에 근거를 두셨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그곳에 근거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수면제 같은 설교와 머리만 커지는 성경 공부만 하지 말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치유사역도 해야 된다는 것이다(약 5:14-16).  그 이유는 예수님만이 우리 목회 사역의 유일한 모델이 되시기 때문이다(마 4: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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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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