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목회 사역의 정체성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요 1:12), 예수님께서 부끄러움 없이 사랑하시는 그분의 형제(히 2:12)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목회적 소명은 주님의 목회 사역을 권능 있게 하는 성령의 동일한 능력을 덧입는다.  성경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 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요 14:12)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예수님보다 더 큰 역사까지도 수행할 것을 그들에게 기대하신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기대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능력 밖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생 동안 팔레스타인 경계선 밖으로 나가 여행해 보신 적이 없으셨지만 제자들은 팔레스타인을 벗어나 전 세계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할 것이다.  더 나아가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더욱 큰 기적들을 행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나타나는 모든 능력의 원인(막 6:53-56)을 단지 성육신하신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격으로서의 그분의 실재에만 돌린다면 우리는 신학적이며 목회적인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요일 5:20)과 인성(마 1:25)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복음주의적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존재한다는 신비가 인간의 이성으로 이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렵지만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증언하기에 나는 조금도 의심 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목회적 삶을 관찰하고 그분의 말씀과 능력이 단지 ‘처음과 나중’(계 1:17)이며, ‘알파와 오메가’(계 22:13)되신 전능하신(사 9:6) 그분의 신성에만 기인한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된 귀감이라는 희망을 전혀 가질 수 없고, 그분을 목자장으로서 따르며(요 10:1-5), 선생님으로서 그분과 같이 되기 위해 훈련하는 것은 헛된 수고가 되고 만다.  다시 말해 그분의 목회 사역이 전적으로 ‘모든 사람의 주’(롬 10:12) 되신 그분의 신성에만 기초했다면, 우리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에게 하신 말씀처럼 ‘나를 따르라’(마 4:19)는 그분의 부름대로 살고자 하는 희망을 결코 품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요한복음 14장 12절 말씀은 예수님의 ‘실언’(失言)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이 지상 사역을 하시기 위해 성령의 능력이 필요했는가?(사 11:2, 42:1).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드시 필요했다.  먼저 누가복음 4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이사야서 61장의 약속에 근거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 약속은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가?  그것은 사도행전 10장 38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성령의 권능을 덧입음을 포함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눅 4:14),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청중들에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눅 4:18).  더 나아가 사랑받는 의사 누가(골 4:14)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병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지금 누가가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분이 하나님이신데(요 1:1) 굳이 병 고치는 능력이 함께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뒤에서 또 말하겠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음(롬 9:5)에도 불구하고 인성의 한계를 받아들이셔서 자신의 신적 능력을 빌어 병자를 치유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자신에게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는 권능을 주실(행 10:38) 때 민감하게 반응하셨다.  Gerald Hawthorne은 『The Presence and The Power: the Significance of the Holy Spirit in the Life and Ministry of Jesus』에서 이같이 말했다.  “명백히 누가에게 있어 성령은 예수님과 구별되어야 하는 예수님 바깥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 능력은 예수님에게 임하여 그분 곁에 있으며,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역사하고, 그분에게 영감과 권능 모두를 덧입힌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는 자신의 사명을 성령의 권능과 더불어 감당하며 성령의 권능 가운데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계속 나가신다.”   

Hawthorne의 말을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격으로서 자신의 존재에 기초해 초자연적인 사역을 감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분의 사역은 성령의 권능 안에서 이루어진다(눅 11:20).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영접할 때 권능을  받는다(막 16:17-18).  바로 그 성령의 위격과 사역이 성품과 능력으로써 그리스도인들, 즉 권능을 덧입은 교회가 예수님을 닮는 일을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가르쳐준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한 바람으로 불같이 오셨을 때(행 2:1-4),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요약하면서 그분을 이렇게 증거 했다.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행 2:22).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매우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베드로의 눈에 주님은 하나님의 권능을 덧입은 분으로 비쳤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말씀(요 1:14), 즉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격이라는 사실을 평가절하하거나 그분의 신성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위격으로 영원히 결합된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요 10:30), 또한 완전한 인간이다(빌 2:8).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 사역에 대한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눅 11:20), 즉 하나님의 권능을 덧입었다고 단언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손은 출애굽기 8장 19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애굽이 마술사들이 애굽에 재앙이 내리도록 한 모세의 행위를 ‘하나님의 손’이 역사한 것으로 설명하는 구절이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신성을 지녔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성령의 권능을 덧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신다성경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께서 신적 속성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고 가르쳐준다(빌 2:6-11).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 한 인간으로서 사역을 행하시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다(눅 4:18-19).

우리의 목자장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을 끼쳐 모두가 따라야 할 방식으로 목회적 사명을 기꺼이 감당하셨다(벧전 2:21).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을 때(빌 2:7), 목회’라는 운동장을 고르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영역으로 들어오셨으며(히 2:1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고 목회하도록 공급하는 동일한 자원들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사셨다(갈 2:20).  그분은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에 의지했으며(요 5:19, 12:49, 14:10), 언제나 초자연적인 권능, 즉 성령에 의존하셨다(마 12:28, 눅 4:18, 롬 1:4).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요 5:30).  Hawthorne이 말했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령께 의존하셨는데 이것은 그분의 인성의 진정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예수님께서는 지상 사역 기간 내내 성부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복종하셨다(요 8:28).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목회 비전을 품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분이 소유하셨던 동일한 성령의 권능을 덧입으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가?

성령의 권능을 덧입는 일은 치유의 은사들을 포함한다(행 3:1-12).  나는 특별한 경우 성령께서 나에게 ‘병 고치는 은사’(고전 12:9)를 부여하신다고 믿는다.  치유자는 아니지만 병자를 놓고 손을 없고 간절히 기도할 때 질병으로 고통받는 그들이 치유를 받으면서 예수님과 협력하는 특권과 은혜와 기쁨을 누린 적이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성도 한 분이 청력 상실에서 고침 받을 때였다.  이것을 개혁주의 신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성령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때에 치유의 은사들을 의도적이며 주권적으로 베푸신다(고전 12:11).  이것은 나와 같은 목회자나 장로들이 기도하기만 하면(약 5:14-16), 언제나 치유의 역사가 발생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베푸시는 주권적이며 동정 어린 ‘치유의 은사들’ 관점에서 우리는 치유를 구하는 담대함과 기쁨이 넘치는 자유를 소유한다(막 11:24).  비록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그분께서는 고통과 근심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여전히 애정과 온전한 지혜와 사랑으로 병든 사람들을 대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성령께서는 목자장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예수님을 기름 부어 세우셨다.  성경은 증거 한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부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그 동일한 성령께서 목회자와 성도들에게도 나타나신다.  Jonathan Edwards는 『신앙감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실 때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 같이 내려오셨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로 내려오신 성령은 그 지체들에게도 똑같이 내려오신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비둘기처럼 내려오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는다.”  Andrew Murray 역시 『The Spirit of Christ』에서 “신자가 성령을 한번 받았다 해서… 더 이상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롭게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 날마다 필요하듯이… 그 축복도 늘 성령의 충만함을 가지신 분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살아 있는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날마다 받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물론 고착화된 교리를 가지고 Edwards를 폄하하는 사람 중에 말 바꾸기, 거짓말, 주작(做作)의 달인으로 소문난 인품이 좋지 못한 천방지축,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목사가 있다고 한다.  확증평향에 사로잡혀 있고, 건설적인 대화, 즉 서로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신학적 의견 차이가 무엇이며, 그 차이를 어떻게 표현하거나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무경험자인 목사가 Edwards에 대해 논평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개가 웃을 일이다.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끝까지  우기는 정신 나간 사람과 비슷한 것 같다.  나는 Edwards가 냉철하고 지성적이며 합리적인 성령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의심 없이 믿는다.  앞뒤가 꽉 막힌 벽창호가 아니란 말이다.  그는 히스테리에 기만당하기 쉬운 그런 유의 사람이 아니다.  폐일언하고 우리가 성부 하나님께 성령이 권능을 덧입혀 달라고 간구할 때, 그분은 분명 우리의 삶을 더 큰 성령의 권능으로 채워주실 것이다(막 11:24).  나아가 권능을 덧입은 목회 사역을 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그분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배워야 한다(마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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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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