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 중에 어느 목회자가 성경을 백독 이상을 하면 굉장히 신령하거나 영적인 세계를 잘 알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는 주의 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남들이 알아주는 이름난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흔한 박사학위를 받으면 그 신학적 배경과 그 목사가 하는 말을 거의 진리인 것처럼 대단하게 여기는 분별력 없는 사람들도 없지 않나 있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는 것은 성경을 수 백독 하거나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유명무실한 신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성경에 대해 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려운 일이지만 개중에는 거듭나지 못한 신학자와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가?       

성경적인 예를 들어보자.  바리새인들은 평생 성경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지만(요 5:39), 영적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했고(요 3:7-10), 성경을 곡해(曲解)하며(마 15:9), 죽은 전통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막 7:1-10),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다(요 8:44).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지만(마 3:9),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고(요 3:3), 마음속 깊은 곳에 가인의 살인적인 미움의 피가 흐르는(창 4:8), 예수님의 말씀대로 독을 뿜은 독사의 새끼들이었다(마 23:33).  다시 말해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달달 외우거나 원어성경을 막힌 없이 좔좔 읽어 내리고 남들이 알아주는 신학교를 졸업했어도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 아닌 마귀의 자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신학자나 목사가 어떤 신학적인 주장을 내세운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마지막 대변인이 되는 것처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Lloyd Jones는 오늘날 교회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일어날 것을 예측했던 것 같다.  그는 자기 고향인 South Wales 지방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개탄하면서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가지고 있는 학위로 그 사람의 말을 평가하는 경향을 유감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  Iain H. Murray의 『Life of Martyn Lloyd Jones』에 나오는 글을 인용한다면 Lloyd Jones는 웨일즈가 낳은 복음 전도자들 Daniel Rowland, Howell Harris, William Williams, John Elias 등의 예를 들면서 이들이 무슨 이름이 있거나 알아주는 학위를 가지고 있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성경에서 나오는 제자들은 어떠한가?  사도 바울을 빼놓고(행 22:3), 다른 제자들은 신학교 근처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행 4:13).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인 학위를 많이 가진 사람들보다는 공식적인 훈련이나 사회적인 품위를 갖추고 있지 않는 소외되고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다(고전 1:26).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부르신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고(사 43:7, 마 5:16),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신학적/신앙 배경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택하신 것이다(고전 1:29).  반면에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보면 세상적인 지위나 높은 학위를 가진 사람들은 자랑할 것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이들은 바리새인처럼 모세의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있고(마 23:2),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마치 성경에 가장 근접한 진리인 것처럼 어떤 골빈 주장을 강력히 내세울 수 있다.  

성경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보면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릇들은 무엇인가?  나는 모든 사역자들이 유능하든 무능하든, 큰 교회를 목회하든, 작은 교회를 목회하든,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은사중지론자든, 은사지속론자든, 심지어 유익이 하나도 없고 듣는 자로 하여금 믿음을 무너뜨리고 망하게 하는 거짓된 가르침을 열심히 전하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와 같은 가짜 선생이든 간에(딤후 2:16-18) 시몬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처럼(마 16:16), 자신의 신학적 울타리를 벗어나 위엄의 보좌 우편(히 8:1)에 계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히 12:2)를 바라볼 것을 거듭 요청하고 싶다.  다시 말해 교회의 썩어빠진 죽은 전통과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선한 목자’(요 10:14)로 지칭하시는 분을 바라보는 일보다 우리를 자유롭고 활력 있게 만드는 요소는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지혜로운 목회자는 자신의 눈을 단호하게 예수님에게 고정시킬 것이다(히 12:2).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보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발견하게 된다(마 7:3).  이러한 사람은 교리적이며 교단적인 차이점이 있을지라도 자신에 대한 냉철한 평가로부터 서로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까지 개발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엡 4:13), 그리스도 안에서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만약 교리적이며 교단적인 광범위한 차이점들이 진정으로 목회자들을 서로 헐뜯고 비방하거나 논쟁을 일으키며(롬 1:2-32), 당을 지어 편 가르기를 하지 않는다면(유 19절), 나는 그것들을 환영하고 존중한다.  목회자 상호 간의 비교와 비판과 근거 없는 신학적 판단, 그리고 시기와 종교적 분쟁 같은 더러운 짓들을 일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것’이고(롬 2:24),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신학교 교육을 받거나 교단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목회 사역을 시작하신 분이 아니다.  그분의 목회관은 당시의 어떤 고등 교육 기관에 의해 형성된 것도 아니다.  Everett Harrison은 『A Shot Life of Chri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공식 교육을 거의 받지 않으셨다. 대중적으로 종교 교사 또는 랍비라고 알려졌지만 그분의 명성은 어떤 전문 교육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사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목회 이력상에 학문적 자격증이 없기 때문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분의 삶과 메시지에 대해 가혹할 만큼 조소 어린 비판을 가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예수님께서 오늘날 목회를 하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것이다.  다른 교단들은 잘 모르겠다.  아마 장로교단 합동이나 고신에서는 분명 이단으로 낙인을 찍었을 것이다.  먹이 만난 하이에나처럼 길길이 날뛰는 관종스러운 이단 사냥꾼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문제를 조금 더 살펴보려고 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적이 있었다(요 9:1-14).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던지 간에 그는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온 자가 아니라고 재빨리 속 좁은 결론을 내렸다.  만일 하나님에게서 왔다면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요 9:16).  이들은 그 기적의 부당함을 골빈 신학으로 설명하려고 야단스럽게 부산을 떨었다.  그들이 게거품을 물듯 기를 쓰며 부정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명백한 해답을 전에 소경이었던 그 사람이 지적하자(요 9:25), 바리새인들은 그를 꾸짖으며 자기들 앞에서 쫓아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요 9:29).  여기서 소경이었던 자가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이 여긴 바리새인들의 빈정거리는 말속에서 우리가 주목할 대목이 있다.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이 말이 풍기는 뉘앙스가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지 않은가?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모세 신학에 충실하다는 것을 완강히 옹호했다.  골빈 목사들이 흔히 쓰는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칼빈의 제자야!!”라고 나팔을 불어댄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부정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이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문 교육을 받은 종교 지도자들은 경멸의 눈으로 예수님을 여전히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가?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말한다(빌 3:5).  이 구절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육신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다는 것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교육이 랍비를 존경받고 인정받는 ‘흠이 없는’ 중요한 인물로 만든다고 믿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그러한 교육과 훈련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승인된 발판을 마련해 준다고 여긴 것 같다.  우리들 역시, 어느 특정 신학을 큰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높이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목회자들 중에 이러한 위험스러운 바리새적인 정신세계에 빠져드는 것을 본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입만 열면 별 볼 일 없는 궤변주의 늙은 신학자의 말을 팔아먹는다. 

그렇다면 신학 교육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물론 교육이 중요하다.  나도 그 흔한 학위를 하나 갖기 위해 연방 정부 학자금을 빌려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 말씀에 비추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예수님께서 학벌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의존을 노골적으로 무시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smart 한 머리가 뜨거운 heart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머리가 똑똑해서 배운 것이 많아 천상 유수(靑山流水)처럼 말을 잘하는 자들은 많지만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목회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 머리로 배운 신학 교육보다는 더 강력한 원천이 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뜨거운 가슴에 있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Derek J. Tidball는 『Skillful Shepherds』 에서 신학 교육 과정에서 발생하는 목회 상의 결핍을 다음과 같이 확인시켜준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관심에서 교육을 받기 때문에 신약 성경의 목회 전략들과 목회적 가치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들은 목회 현장에서 신학교 시절 직면했던 것과 다른 문제들에 봉착한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배운 이론으로써 그 문제들을 대처한다. 그들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교리의 목회적인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며, 신약성경에 나온 목회 전략들이 자신들의 목회를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목회는 자주 신학적 기반으로부터 멀어지고 결핍된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다음과 같이 자문해보아야 한다.  “목회자로서 수행할 모든 것들이 영구적이고 필수적인 기초는 무엇인가? 신학 교육이 실제로 목회관을 형성하는 데 있어 확고한 말씀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가? 교육이 목회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걸림돌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신학 교육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 운동의 선두 역할을 한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평신도 사역자  Moody를 생각해 보면, 그것이 목회를 하는 데 있어 주된 기반이 아닌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다.  더욱이 예수님이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은 종교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에 의한 강력한 박해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핍박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가방 끈이 짧은 학력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행 4:13).  직업이 어부였던 베드로와 요한은 랍비 학교에서 공식적인 신학이나 수사학을 배운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우거나 자랑할만한 학위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목회적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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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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