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든 싫든 목사와 신학자들은 자신의 신학적 혹은 신앙적 견해를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알고 있거나 인지하고 있는 견해도 있는 반면에 자신에게 길들여진 문화적 환경에서 터득한 어느 한 사람의 신학적 견해도 없지 않아 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거나 다양한 견해를 검토하는 작업을 착수할 때, 누구도 예외가 없이 인간 본성에 관한 여러 가지 복합적인 선입견이 우리 주의를 맴돈다.  문제는 자신이 성경에서 파악하는 내용이나 성경과 조화된다고 주장하는 생각이 이런 견해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사실을 고집스럽게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은 어떠한 한 가지 해석을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집단적인’ 강령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단지 그것만이 진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희미하고도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 자신의 해석이 하나님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할 근거가 희박하게 된다.     

나는 엄청난 학비와 시간을 들여가면서 정식 신학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성훈련의 광범위한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영성에 관련된 책들을 읽으려면 언제나 부정적이고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것이 영성에 관한 책과 관계된 것이라기보다 교회 전통과 교단 신학에 짓눌려 내 영혼의 보잘것없는 초라한 상태에 대한 반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마치 Bill Hull 목사가 목회 말년에 쓴 『성령의 놀라운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에서 고백한 것처럼 “내가 깨달은 부끄러운 사실은 목사인 내가 교회에 임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걸림돌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이유는 내가 성령의 임재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내가 받은 신학 교육 어디에서도 신앙생활에서 은혜롭게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실습해야 하는 고전적인 영성훈련 과정들은 없었다.  특히 영성훈련을 전혀 해보지 않은 목회자들로부터 여러 번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라고 권고를 받았다.  또한 영성에 있어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경건한 생활과 전도, 그리고 하기 싫은 금식을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보다 다양한 영성훈련을 하라는 Dallas Willard나 Eugene Peterson, 그리고 내가 다녔던 대학교 영성신학 교수인 Richard J. Foster의 요청들은 지나치게 행위들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나는 종교 개혁가들이 특정 상황 속에서 주장한 진리의 법정적 paradigm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노력들을 은혜스럽지 않고 비신앙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제자 디모데처럼 성경을 읽고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며(딤후 3:14), 바리새인 같은 신앙을 갖지 않기 위해 골방에서 기도하고(마 6:1-15), 전도하는 것(마 28:18-20) 이외에 어떠한 영적인 지도를 받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균형 잡힌 신앙을 가진 좋은 mentor를 만나지 못했다.  처음으로 고독과 침묵, 순종과 섬김, 그리고 고백과 명상에 대해 읽었을 때 나는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갈 2:16)라는 말씀 같이, 이것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스스로 획득한다는 의미의 ‘행위 구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다시 고백하지만 나는 수년 동안 고전적인 대부분의 영성훈련들에 대해 무지하고 불순종한 채 죽은 전통과 메마른 신학에 얽매어 사역해 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가 가진 목회 비전의 꿈과 계획이 서서히 깨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왜 그리스도를 닮는 일에 열매를 맺지 못하고 생명력 없는 정체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성훈련의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가 친히 그 훈련을 하셨다는 점이다.  목자장이신 분은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따를 모범으로서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벧전 2:21) 하시려고 그것을 행하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영적 거장 Dallas Willard는 예수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분의 삶의 방식 자체를 신중하게 고려할 것을 깨우치는데 교회에 크게 공헌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영성훈련의 견실한 연습 표본이다.  나의 생각은 영성훈련 없이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었다(롬 8:2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닮게 만들고자 하신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성도들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도했고(갈 4:19),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8)라는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한 가지 신념으로 사역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라는 도덕적인 명령을 내린 사람은 바로 사도 요한이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이 말의 의미는 누군가 자신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며(벧전 2:9),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산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도덕적으로 예수님께서 걸으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벧전 2:21).  이 구절에 대한 Glenn Baker의 말을 인용한다면 “저자는 예수님의 행적을 완전히 닮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사신 방식대로 살기를 진지하게 요청하는 신적인 명령”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어떻게 사셨는가?”  복음서를 읽어 보면 그분이 어떻게 사셨는지 해답이 나온다.  예수님은 금식과 기도와 고독(마 4:1, 막 1:35, 눅 5:16), 순종과 헌신(마 26:36-46, 눅 22:42, 요 5:30, 13:4-5), 그리고 묵상(눅 15장) 같은 경건한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전달하기 위해 독창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시는 것은 그분이 깊은 영성 훈련을 하셨음을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목자장과 같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영성훈련을 해야만 한다(딤전 5:7).  이 진리를 부정하거나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훈련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벧전 2:21).  만약 예수님을 잊어버린 채 영성훈련을 한다면 우리는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신비주의자가 되거나 사마리아 여자처럼 율법주의자로 변할 수 있다(요 4:20-24). 

Dallas Willard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는 일” 같은 용어를 사용할 때 복음주의적 완전성을 유지할 것을 강조한다.  Willard는 자신의 저서 『In Search of Guidance』에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성경 이외의 여러 가지 수단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견해를 훌륭하게 옹호한다.  물론 개혁주의자들에게는 비위가 상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결코 성경에 모순되는 것들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입증되는 것들이다.  성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한 친밀한 관계 속으로 인도한다.  사실 개인적이고 영적인 훈련이 없는 신학 교육은 치명적이고 박제(剝製)화 될 수 있다.  교육과 인격, 능력과 경험, 그 어느 것도 목회적 완전성과 권위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결코 대신할 수 없다.  영성훈련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으로 들어가는 통로다.  때때로 이 만남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거나 성경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고 침착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시키고, 그것을 일깨우고 우리로 하여금 목회를 위한 그분의 풍성하신 권능을 덧입게 하기 위해 이 만남을 계획하셨다. 

우리는 바리새인 같이 주관적인 경험에 극단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반응은 오랫동안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해왔던 구분을 무시하게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음성’ 사이의 구분이 된다.  A. W. Tozer는 『The Pursuit of God』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진술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이다.  따라서 그것은 잉크와 종이와 가죽 등의 필수적인 용품들에 의해 한정되고 제한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절대자이신 그분께서 자유로우신 것처럼 살아 움직이며 자유롭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들은 영이며 생명이다’ 생명은 선포되는 말씀 안에 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우주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상응될 때에만 능력을 가진다. 기록된 말씀을 전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현재적인 음성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책 표지에 갇혀 잠들어 버린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끊임없이 대화하셨다.  인간으로서 그분은 사역을 하기 전에 기다리셨고(요 5:19),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고(요 8:28), 성부께서도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셨으며(빌 2:9-11), 성령께서 그 전 과정에 권능을 덧입히셨다(눅 4:18).  이사야서 50장을 살펴보면 마가가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 이유를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고독, 침묵, 경청하는 기도, 순종, 사역의 수용, 이 모든 것들은 날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행적의 일부였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면(갈 2:20), 우리는 그분이 하신 대로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사신 방식대로 살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마 25:21), 목회자가 되는 길은 결코 없다.

Dallas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였던 Howard Hendricks는 학생들에게 철저히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여러분이 사람들과 항상 함께 있다면 여러분은 그들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Hendricks는 학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단독적으로 만나는 일의 귀중함을 아셨던 분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목회자들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대인 관계의 장점이 때때로 큰 약점이 되기도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목회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역자로 쉽게 변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실망시키는 올무인지 알고 있다. 

고독 훈련은 역설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도들에게 영향력 있는 목사가 되고, 주님 앞에서 ‘충성된 종’이 되려면 목회자들은 성부 하나님과 단독으로 만나기 위해 성도들을 떠나야 한다.  Eugene H. Peterson도 성도들로부터 물러남이라는 이 필수적인 개념을 ‘바쁘지 않은 목회자’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목회하는데 있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질문보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질문에서 보다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이사야서 50장 4-5절과 마가복음 1장 35절의 말씀은 모든 목회자들에게 두 가지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영성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로부터의 의도적인 고립과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적인 만남이 절대 필요하다.   

한 가지 더 붙이고 싶은 것은 개신교의 영성을 ‘거짓 성령운동’이라고 치부하거나, ‘영성훈련’이라는 단어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영성훈련을 하지 말고 성령께 순종하기를 힘쓰라”라고 주창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영성훈련을 전혀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성령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런 특정 신학과 오염된 교리, 바리새인 같은 종교적 자긍심에 얽매여 있는 무경험자들이 끔찍한 교만과 살벌한 편견 속에서 성령을 길들이려는 시도를 지금까지 해왔다고 생각한다.  확신컨대 이렇게 굳게 닫힌 마음으로 산다면 하나님께서 이들의 편견을 깨시는 일은 드물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교만의 편견을 침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나의 고찰이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대다수 ‘골빈’ 신학에 묶혀있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과 편견의 정당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면서 바리새인처럼 스스로 소경 되기 원하며 죽어갔다는 것이다(요 9: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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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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