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교육에 뒤따를 수 있는 약간의 부작용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나는 학문적인 훈련의 네 가지 유익점을 간략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신학 과목들에서 타인들을 철저하게 교육하고자 하는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진리의 말씀에 대한 사모이다.  어느 누구도 말씀에 대한 깊은 사모함 없이 성경학이나 신학을 배울 수 없다.  다음은 교회사에 대한 식견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 역사하신 방식에 대해 조망하는 것은 큰 자산이 된다.  그리고 개인학습의 훈련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게으른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잠재력을 충분히 개발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강제적인 책임과 규칙적인 구조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신실한 교수들과의 만남이다.  성경의 진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스승들로부터 흘러나올 때 참된 목회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  이와 같은 학문적인 유익 외에 다른 유익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경험했던 신학 교육에도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차례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가방 끈이 짧은 제자들은 공식적인 신학이나 수사학을 배운 적이 없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이다(행 4:13).  한 마디로 '스펙'(한국식 잘못된 영어 표현)이 없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있어 목회적 자격을 증명해 주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목회자로서 목회관을 형성하거나 수행해야 할 필수적인 기초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요즘처럼 개나 소나 대통령이 되거나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처럼, 그 흔한 대형 교단 안수 증명서나 유명무실한 신학교 박사학위 증서가 아니다.  사실 눈먼 교인들은 중심을 보지 못하고(삼상 16:7),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모 즉 교육 배경이나 사회적 신분을 가지고 판단한다(약 2:1).  이것은 패역한 이 시대에 가장 슬픈 현실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동역자인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종교성이 강한 엘리트 집단인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 4:13).  이 구절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마가복음 3장 14절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되어 계속해서 그분과 함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자들의 목회관(행 4:19)과 깜짝 놀랄 만한 용기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나왔다.  이 친밀감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성령의 충만함과 담대함이다(행 4:8, 31, 9:27-28, 13:46, 14:3, 18:26, 19:8, 26:26, 28:31).  한마디로 어떤 신학적 배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예수님과는 아무런 친밀감이 없으면서도 세상적인 학위를 북한의 장성들이 갑옷 입은 것처럼 훈장을 주렁주렁 많이 달고 있으면 능력 있게 쓰임을 받느냐는 것이다.  물론 세상적으로 보면 유익한 것도 있다.  분별력이 없는 교인들로부터 칭송을 받거나 대접받는 것 말이다(마 23:7).  하지만 ‘모세의 자리’에 앉아 마귀의 새끼들처럼 십자가의 원수 역할을 할 때가 더 많다는 것이다(마 23장).      

내가 학교 교육과 어느 특정 교단 신학을 평가절하하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학문적인 훈련을 통해 말씀에 대한 사모와 개인 학습 그리고 교회사에 대한 식견과 이름난 쟁쟁한 교수들과의 만남은 나로 하여금 학문적 교육에 큰 유익점이 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이름 있는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탁월한 교수들의 가르침과 수많은 토론을 통해 교육과 훈련받은 것에 대해 늘 감사를 하고 있다.  지나간 일이지만 그 당시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 졸업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강의 시간에 성령의 은사 문제로 교수와 살벌한 논쟁을 벌여 학교 전체를 시끄럽게 한 적이 있었지만, 이 사건을 빼놓고는 모범 학생으로 생활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우리가 배운 교육은 학문적 유익이 있는 반면에 부작용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학문적인 훈련이 목회 사역에 있어서 원천도 기초도 아님을 확신한다.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보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라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던 예수님(막 6:3)과 그분의 제자들은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고전 1:26).

심지어 신학 교육의 부작용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는 교만과 소원(疏遠)이다.  자신이 배우고 습득한 성경 지식과 주경학적인 기술들이 마치 목회의 능력을 제공하거나 성경적인 것처럼 생각할 때 우리는 방자한 생각과 교만한 마음에 빠진다.  물론 지식과 기술도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매일매일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서 신학적 지식을 남용한다면 그것들은 목회의 도구가 아니라 형제들 간의 분열과 논쟁만을 일으키는 교만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고전 8:1).  이런 도구와 기술과 같은 부차적인 것이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그는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고’(딤전 6:4-5),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이단(異端)들처럼 목회를 타락시킨다. 

솔직하게 말해 신학적 논쟁을 일삼는 목사 치고 목회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있는가?  영혼 구령의 불타는 마음이 없으니까 이 짓거리를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관종’이라고 부른다.  놀라운 것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박수 엘루마처럼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함으로’ 사람들을 혼란시키고(행 13:10),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위적으로 혼잡스럽게 만들거나 잘못된 성경해석을 통해 하나님과 구원의 관계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조차 믿음을 파괴시킨다(딤후 2:18).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눅 11:52),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도 막는다’(마 23:13).  한 마디로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하는 독사의 새끼들이다(마 23:33).  왜 이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불렀을까?(마 12:34).  이들이 받은 형벌은 게헨나, 즉 지옥과 그곳의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들은 구원받을 희망에서 이미 제외된 자들이기 때문에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끝없는 신화와 족보’(딤전 1:3-4) 이야기,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딤전 4:7), 즉 신학적 논쟁은 신앙생활에 유익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듣는 자로 하여금 멸망으로 이끄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딤후 2:14).  

이렇듯 교만은 소원을 수반하듯 자신이 배운 신학이 다른 교단 신학보다 높게 해 준다는 헛된 망상에 사로 잡혀 있는 신학자와 목사들이 있다.  자신이 배운 신학을 갖지 못한 자들을 비방하거나 배척하려고 하는 유해한 정신은 이미 예수님 당시 저주받은 지옥의 자식 바리새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마 23:33).  이들은 빈정거리는 말투로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요 7:48-49).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개혁주의 신학을 가지고 다른 교단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목회자가 예언과 방언을 인정할 수 있어?” 오늘날 이런 골빈 소리로 찌껄이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 교회를 다니는 같은 부류에 속한 눈먼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 인간과 이웃이 되고자” 성육신 하신 지혜자이시라면(요 1:14), 참된 목회 지식과 기술들은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목시킨 것처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중간에 막힌 담(교단신학)을 무너뜨리고 서로에게 다가가게 할 것이다(엡 2:14-16).  예수님께서는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계셨지만 결코 자신의 지식과 기술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의 사이를 소원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 역시 최고의 신학교육을 받았고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빌 3:5-8),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골 1:5-6).  자신이 배운 가마리엘 신학을 가지고 소모적 교리 논쟁을 일삼지 않았다는 것이다(딤후 2:23). 

목회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을 나타내려면(고전 15:41), 자신의 삶 속에서 성령을 통해 깨달은 진리의 말씀(요 14:26)을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전함으로써(딤후 4:2), 잃어버린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사람이다(단 12:3).  그 삶에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주님을 닮고자 하는 진실하고 부단한 노력이 있을 뿐,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없다(딛 3:9).  다시 말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전 1:13)라고 말한 것처럼 바울 신학, 아볼로 신학, 베드로 신학, 그리스도 신학을 가지고(고전 1:12), 서로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자신이 배운 신학만이 뛰어난 것처럼 나팔을 불거나 교조주의적인 태도를 갖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가?  책 한 권 만을 읽은 사람이다.  성경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오직 자신이 읽은 책 한 권을 절대적인 지식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성경해석 능력이나 성경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지식과 추종하는 교주(敎主)로부터 받은 신학적 체계를 믿고 있어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심각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상호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연합하려는 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문제는 자기의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이 신학의 틀을 가지고 다른 신학을 비판하면서 당을 지어 자기편에 속한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편에 선 사람에게는 입에 게거품을 물듯 무자비한 모습으로 마녀 사냥하며 몰아세운다.  심리학 용어로 확증편향(確證偏向)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이런 목사다. 이런 목사를 만난 교인들은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먹는 것과 같다.  마치 돌나라 박명호 밑에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노를 사서 Pope Gregory XIII에 의해 사라질뻔한 책 『The Table Talk of Martin Luther』에서 Luther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가 겸손해야 할 수많은, 진정 셀 수 없는 증거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토록 거만하고 자신만만해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Craig S. Keener는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임재하신다는 참된 표징을 겸손이라고 말했다(엡 4:2-3).  오늘날 목회자들은 비록 자신의 성경 해석과 견해에 대해 옳다고 믿더라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실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겸손히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심각한 문제는 목사가 입만 열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보너스다.  양심이 화인을 맞은 목사의 특징이 무엇인가?  바리새인처럼 위선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교인들 앞에서는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딤전 4:1-2).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20세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아버지 James W. Sire는 『Scripture Twisting』에서 말한다.  “우리들은 쉽게 오류에 빠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날마다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며, 우리가 이해한 것에 순종하고 새로운 통찰력이 주어졌다면 이전에 읽었던 내용을 다시 수정해야 한다”   

Luther 역시 “하나님 앞에 나를 가르치소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말하는 겸손한 목회자만이 성경에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알듯이 성경을 알아가는 것은 평생에 걸친 작업이다.  이 길에는 지름길이나 왕도(王道)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가능한 안전장치들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편견을 섞는 일 없이, 성경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을 받아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벧전 1:20-21).   나는 목회자들이 성경을 왜곡시키지 않으려고 주관주의와 싸우면서 터득한 성경 지식은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 덕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주관주의와 싸우지 않고 객관적인 근거나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신학자 한 사람으로부터 전수받거나 성경에 자신의 생각을 과도하게 부과하는 자기 해석을 고수한다면 신자들은 이런 무지한 목사를 만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만 가르침을 전하시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자기 자신을 그 나라에 바치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밝혀질 것이지만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마 13:13), 감추어질 것이라고 대답하신 적이 있다.  그러면서 이사야 6장 9-10절을 인용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눅 11:14-23), 자신의 고정관념 깨기를 거부하고 짐짓 소경으로 남아 있으려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다(마 13:14-15).  요지가 무엇인가?  신학적 박스 안에 갇혀 소모적 교리 논쟁만을 일삼지 말고 밖으로 나와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기 위해 시야를 넓히라는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물론 잘못된 고정관념이나 그릇된 교회 전통과 제도, 그리고 박제(剝製)와 같은 신학으로 인해, 이러한 폐쇄성을 나타낼 수 있는 바리새인 같이 소경으로 남아 있으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이다(요 9: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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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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