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가 한 번은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때에 런던의 Clapham이라는 동네에서 한 집을 쳐다보았는데 문패에 George Jeffeys라고 적혀 있었다. 그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John Wesley 이후로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부흥 전도자라고 여기는 자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가 물었다. 그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거기서 그는 나와 함께 기도했는데 성경적 표현을 쓴다면, 그것은 마치 그의 겉옷이 내 위에 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거의 기름부음을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한다. Jeffeys를 만나고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해 준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바로 그날은 내가 하나님의 전임 사역자로 일하기 위해 Swansea에 위치한 바이블 칼리지를 떠났던 날이었다. 하나님은 나를 그분의 사역으로 부르시면서 이처럼 나를 덮으시는 특별한 경험을 주신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아프리카 복음 전도자 Reinhard Bonnke의 『Mighty Manifestations』에서 나오는 간증이다.  누군가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나 역시 이 말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심한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낸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 영적 상태는 ‘영적 소경’을 넘어 ‘영적 귀머거리’로 중증환자에 가까웠다.  사실 기름부음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수 있고, 때로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성령께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을 열어 주시기까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마 13:14). 

Bonnke의 글을 접하면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기름부음’ 즉,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고후 1:21) 것이 과연 성경적이냐는 것이다.  진정한 부흥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열매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기름부음의 전이가 성경적인가?”  혹은 “귀신들의 장난이 아닌가?”  같은 질문들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광범위한 주장들과 함께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성경을 보존하는 일보다 더 높은 우선수위는 없다고 말하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분명 성경적이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사도 운동과 연관시키거나 아니면 이단으로 몰아세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Bonnke는 기름부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철저히 성경적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자들은 기름부음을 받아야만 했다.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으로 대치되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안수함으로 기름부음을 주겠다고 제안할 때에 우리는 그렇게 심하게 반대할 필요가 없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일회성의 기름부음(An Anointing)과 같은 것은 없고, 오직 그 기름부음(The Anointing)만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신학적 개념, 즉 성령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움이나 능력을 구하는 기도의 의미로 사용된다면 우리는 용어의 사용에 관해 너무 엄격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한다. 

Bonnke가 말한 모든 것이 다 맞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견해는 비판이나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Hyena 기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될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목회에 충성하기보다는 먹잇감(신학적 논쟁)을 찾아다니는 목사들은 누군가 기름부음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면 거침없이 이단이라고 떠들어 댄다.  내가 목회자로서 지금까지 들은 것들 중 가장 끔찍했던 것은 이단 사냥꾼들이 떠들어 대는 골빈 소리들이 아니다.   정말 소름이 끼치고 두려운 것은 “성령께서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를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하는 일들의 90퍼센트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성령 하나님의 개입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적 활동만을 해대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계 3:1)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런 교회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케 하는 능력을 가진 성령의 ‘기름부음’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개인이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는 것에 관한 원칙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기름부으심은 어떤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들 또는 성령의 충만한 능력이었을 수 있다.  Reinhard Bonnke와 R. T. Kendall은 기름부음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하면서 요한일서 2장 27절 말씀을 인용하여 ‘기름부음’은 성령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 즉, “처음 분과 같은 다른 보혜사’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요 14:16).  이것은 예수님이 첫 번째 ‘보혜사’이시고(요일 2:1) 성령께서 그와 같은 ‘보혜사이실 것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신비이긴 하지만 기름부음은 신자 각자의 삶 속에 계신 성령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요일 2:20). 

‘은사’와 ‘기름부음’은 때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구약에 나오는 사울 왕이 버림을 받았으나(삼상 16:1) 그는 여전히 기름부음 받은 자(삼상 24:6)로 불렸던 것처럼 기름부음이라는 말은 한 가지 의미 이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듯이, 이러한 기름부음이 안수를 통하여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의 전이를 받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다리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중남미에서 ‘임파테이션’(Impartation)이라는 영어 단어의 가장 좋은 번역을 찾는다면 ‘기름 부음의 전이’이다.  이 개념에 관련된 첫 번째 근거를 민수기 11장 16-17절에서 볼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모세가 장로들에게 안수를 했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기름부음의 전이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Philip J. Budd는 이 구절을 가지고 열왕기하 2장 9-10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모세가 받은 유산(endowment)은 양적인 것으로 생각되며 장로 칠십 인에게 나누어지도록 되어 있었다”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임파테이션이 외적인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표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성령의 본성에 일치하는 방법으로써 내면적으로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구절에서 증명되는 원칙은 기름부음의 전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다.    

모세의 후계자에 대한 신명기의 마지막 증거인 34장 9절 말씀은 성경의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데 필요한 과도적 단계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도 임파테이션을 찾아볼 수 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게 임하였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안수는 기도에 수반되는 행동으로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으로 선발하여 그를 위해 공개적으로 특별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이미 모세는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민 27:18).  그것은 마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는 모세의 기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인해 성령 충만했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듯하다. 

또 다른 사례는 열왕기하 2장 9-15절에서 찾을 수 있다.  엘리야의 기름부음이 엘리사에게 전이된 것을 기록한 구절이다.  이 말씀은 기름부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당신이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고 간청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께 직접 구하지 않고 엘리야에게 구했는가 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약 5:17).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엘리야의 인간적 영력(靈力)을 구한 것이 아니라 스승을 통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신(神)을 구하였던 것이다.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라고 말할 때(왕하 2:15), 그것은 문자 그대로 엘리사가 엘리야라는 인간의 영적 능력을 전수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에게서 보았던 능력이 매우 비슷한 역사를 하나님의 성령께서 엘리사를 통하여서도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기름부음의 전이는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것이며,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사건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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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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