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부음

기름부으심 2022. 11. 13. 16:21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행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직무를 행할 사람, 즉 제사장(출 29:7, 30:30, 40:15)과 선지자(왕상 19:16), 그리고 왕(삼상 10:1, 16:13-14, 단 9:4)을 세울 때, 그들을 불러 거룩하게 구별시키고 기름을 부었다.  다른 하나는 성막에서 사용될 평범한 물건들을 거룩하게 구별할 때 기름을 발랐다(출 40:9-11).  여기서 기름을 부는 것과 바르는 것은 이 물건은 하나님의 것이며, 이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것으로 온전히 받쳐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사용하는 기름은 아무 기름이나 붓거나 바르지 않았고, 아주 특별한 기름을 만들어 사용하게 하셨는데 그것을 ‘관유’라고 부르며, 그 의미는 “붓는 기름”이라는 뜻이다(출 30:31).  물론 물건이나 사람 몸에 붓는 기름 자체에 어떠한 특별한 신비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사실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단지 이것이 기름일 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은 기름을 만드는 방법을 비밀에 부치지 않고 누구든지 다 알도록 공개하셨다(출 30:22-25).  만약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알리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은 마치 그 기름 자체에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신비스러운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기름부음을 통해 나타내는 의미는 아주 특별했다.  그것은 “이제부터 이 물건이나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인을 치시는 것이기에( 1:13)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8:10-12).  이렇게 하나님께서 몇몇 물건과 사람들에게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지만( 4:11) 그들을 특별하게 불러서 은혜의 방편으로 사용하기 위한 표시로 기름을 부으신 것이다.  쉽게 말하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과 물건들은 구별되었기에 다른 용도로 사용할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맥락이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구별하셨다.  물론 여리고 성에 기름 부으신 것은 아니지만 죄의 상징이었던 이 성을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사용하기를 원하셨기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모든 물건에 손대는 자는 똑같이 받쳐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말씀대로 성은 완전히 멸망을 당했고 물건에 손댄 아간과 그의 식구들도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6-7).   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절대로 손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구별시킨 것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고 오직 그분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8:10-12).

그렇다면 기름부음이 없는 장막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만약 기름부음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의 천막에 불과할 것이고 증거궤를 비롯해서 상, 등대, 분향단, 번제단, 물두멍과 받침대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람에 대해서도 만약 기름부으심이 없다면 그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28:41, 29:7-9).  달리 말하면 기름부음이 교회 안에 없으면 분명히 교회는 교회인데 살아 있는 교회가 아니라 사데 교회처럼 죽은 교회라는 것이다( 3:1).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바르게 하신 후에야( 30:26-29), 그것을 사용하셨고, 제사장이 직무와 사명을 다할 수 있었던 것도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부터였다(출출 30:30).

여기서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을 중요시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구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세례와 성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성령께서 그것을 사용하셔서 우리 안에 용서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16:8).  설교도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기에 종교개혁자들은 강대상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불렀고, 거기서 선포되는 말씀이 성경과 일치하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였다(살전 2:13).  이렇게 기름부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기름부음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실 때( 3:17, 1:11, 눅 3:22)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다 (마 17:5, 9:7, 눅 9:35).  훗날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있었던 사건을 생각하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지극히 큰 영광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한다(벧후 1:17).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1:35), 궁금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적인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2:10), 지상 사역을 감당하셨느냐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사역을 감당하셨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으심을 받으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신데( 1:1), 누가 감히 하나님에게 기름 부을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9:5).  그러나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4:27).  하나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부어주셨다(행 10:48).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을 인간으로서 사역을 행하시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다( 4:18-19). 성경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께서 신적 속성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2:6-11).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놀라운 능력과 영광을 다 내려놓으시고 인간으로서 성령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12:28).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을 가지고 병자를 고치신 적이 없었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인성의 한계를 받아들이셔서 자신의 신적 능력을 빌어 치유하거나 사역하시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이사야서의 말을 인용하면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왔으며 성령은 메시아의 인성에 은혜와 지혜와 기적적인 능력들을 넣어주셨다고 말한다( 11:1-5).  즉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신적 능력의 완전성을 가능케 하는 거룩하신 성령의 영향을 필요로 하셨고, 또한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히 받으셨다(마 3:16, 눅 2:40, 4:1, 14, 18, 요 3:34).  Calvin은 이 구절의 교훈은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에서 철저하게 성령을 힘입어 일을 행하셨지( 61:1-3), 성령이 없이 아무것도 스스로 행하신 적이 없었다( 5:30).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고( 3:34), 예수님은 언제나 병자를 고치실 성령의 능력으로 고치셨으며( 5:17), 귀신을 쫓아내실 때도 성령을 힘입어 쫓아내셨다( 12:28, 눅 11:20).  예수님에게 있어 성령의 기름부음은 지상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충분히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2:49-50).  또한 예수님은 번도 스스로의 선택으로 일을 행하신 적이 없고( 5:19), 언제나 아버지가 가르쳐 주시고 원하시는 대로만 일을 하셨다( 8:28).  만약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다면 예수님은 보통 인간에 불과했을 것이고 다만 인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분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4:15).

오늘날 사람들은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을 특별한 위치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역에 있어서는 특별하게 사역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일도 하리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14:12).  만일 주님의 사역이 특별한 위치로서 한 것이라면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그 사람 안에 기름부음이 있고(요일 2:20, 27),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권세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막 16:17-18). Calvin의 말을 다시 인용하고자 한다.  “그가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그는 영의 은사를 받아 우리에게 그것을 베풀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기름부음이요.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유래했으며 그 이름을 그가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         

이렇듯 기름부음은 믿는 자 안에 있는데(고후 1:21-22),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 하나는 진리의 말씀을 아볼로처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다(행 18:24-26).  본인들은 잘 배웠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말씀을 배워도 한쪽으로 치우쳐 배웠기 때문에 기름부음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이다.  믿는 자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이 곧 기름부음(요일 2:27)이라고 ‘주야장천’ 나팔을 불면서 오늘날 기름부음의 사상은 신기를 부르거나 접신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성도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이 기름부음인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요일 2:20).  반쪽짜리 답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으로 세뇌를 당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분만이 기적과 치유를 행할 수 있지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라는 고정관념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것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렇게 가르쳐 온 목사와 신학자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마치 돌나라 한농복구회 교주 박명호 밑에 있는 사람들이나 사이비 전광훈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보면 종교적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들은 정신질환의 일종인 복합적 망상장애를 가진 ‘광신도’에 가깝다.  내 경험상 이 고정관념이 깨지려면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육신적인 소경보다 영적 소경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요 9:40-41).  보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 말이다(마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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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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