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Global Awakening에서 주최한 Randy Clark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영적으로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준비하는 가운데 참석해서인지 시작하기 전부터 은혜가 밀려 왔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2박3일 간의 기간 동안 놀라운 은혜를 주셨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는 설교, 찬양, 실습, 강의, 치유, 간증은 나에게 많은 도전을 주었고, 그날 일어난 사건들은 내 마음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나는 성령이 역사한 누가복음 4장18-19절의 살아 있는 실제를 끔찍한 속박 속에 있는 사람들이 구속의 역사를 경험하는 동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확인했다.     

Clark 목사가 아르헨티나의 복음 전도자 Carlos Annacondia를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 적이 있다.   “부흥성회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의 수가 북미보다 남미에서 훨씬 더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북미에서는 죄를 용서 받기에 충분할 만큼 복음이 선포되지만 남미에서는 자유를 체험하기에 충분할만큼 복음이 선포됩니다”  이삼백만 명의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회복시킨 성회에서 Annacondia는 회중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단상 앞으로 불러내어 영접기도를 시킨다.  그러나 그는 결신자들이 영접기도 후 곧장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이후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이들에게 다가가 필요한 정보를 얻어낸다.  그리고 Annacondia는 이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끼쳤던 더러운 영들을 대적하며 강력하게 기도하기 시작한다.  곧 수많은 사람에게서 귀신의 발작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몸을 떨고, 또 다른 사람은 바닥에 꼬꾸라진다.  비명을 지르거나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고, “난 절대 안 나갈 거야!” 귀신의 절규를 발하는 사람도 있다.  스태프들은 이러한 현상을 보이거나 이와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가려내어 따로 마련된 축사사역 장소로 이동시킨다.  그곳에서 이들은 훈련된 평신도 사역자들에게서 축사사역을 받게 된다.  사역이 끝나면 피사역자들 대부분 치유되고, 압제로부터 해방감을 만끽하며 축사사역 장소를 나선다.

흥미롭게도 남미에서는 더 이상 “과연 크리스천도 귀신들릴 수 있는가?” “병 고치는 은사는 지금도 있는가?” 라는 것이 신학적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귀신들림의 현상들이 너무도 많이 또 자주 나타났고, 많은 사람들이 치유 받았기 때문이다.  축사와 치유사역의 필요성이 현격해졌을 뿐 아니라 축사와 치유가 남미 신학 일부로 자리 매김될 정도였다.  어느 누구도 “그것은 귀신의 장난이야?” 말하는 사람이 없다.  새신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 곧바로 회개, 치유, 축사사역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남미의 사역은 참으로 놀랍다.  반면 북미의 경우에는 한 달 동안 새신자의 수가 백 명이 넘지 않는 교회들이 다수다.  그중 한 달 내내 단 한 명의 결신자도 심지어 몇 개월에 걸쳐 한 명의 결신자도 얻지 못하는 교회가 대다수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 동산에서(창 2:8), 뱀이 하와를 유혹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로 충돌은 인간 관계의 특징이 되어 왔다(창 3:1-10).  다툼과 싸움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반목(反目)이라는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결과다(창 3:15).  고린도 교회처럼 두세 사람만 모여도 서로 신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고전 1:10-13).  인간 상호간의 다툼, 즉 자유의지 간의 충돌은 타락한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지역 교회 역시 고린도교회 처럼 예외일 수 없다(고전 3:3, 11:18).  지나간 일이지만 나는 이러한 싸움에 정면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실제적인 싸움이 존재하는 영적 세계에 대해 무지하리만큼 아는 것이 없었다.  한 마디로 영적 소경이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장12절에서 사용한 ‘씨름하다’(wrestle)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그것은 바울이 자신의 저서에서 단 한 번 사용한 단어다.  우리가 그 구절을 생각할 때 ‘씨름하다’라는 말은 언뜻 보기에 문맥상 매우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 씨름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전쟁을 위해 무장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씨름 선수는 전신갑주를 착용하지 않는다.  씨름 선수의 싸움은 실제 전쟁처럼 대대(大隊)나 연대(連帶) 등 무리를 짓지 않는다.  오늘날과 같이 바울 시대의 씨름 대회는 속된 말로 일대일 ‘맞짱’을 뜨는 것이다.  요점은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교전 지역처럼 보인다.  그것은 세상이 교전 지역이기 때문이다.  ‘영적 전쟁’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로 성도들 삶의 도덕적 갈등을 묘사하는 목회적, 신학적 용어다.  그리스도인의 씨름은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 권세를 잡은 악의 영들과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을 상대하는 것이다(엡 6:12).  실제적이고 매우 활동적인 영적 세계가 존재한다(살후 2:9-12).  기억하라.  목회는 바로 이 세계를 사역의 장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이 처음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마귀와 일대일로 싸우신 것처럼 말이다(마 4:1-11).  목회자들은 신자들에게 영적 전쟁의 개인적 성격을 명백히 알려주며, 각각의 성도들에게 그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기술을 연마시켜야 한다.  하지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못하는 것처럼(마 15:14), 영적인 눈이 먼저 떠져야 이 전쟁이 무슨 싸움인지 안다.       

나는 어느 개혁주의자들 못지 않게 본문에서 벗어나지 않는 강해설교에 충실했던 목회자다.  많은 목회자들은 현대교회의 침체 원인 중 하나를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는 강해설교 부족이 상당한 부분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많은 훌륭한 강해설교의 필요를 주장하지만, 교회의 타락의 상당 부분이 영적 전쟁에 대한 진지하고 실재적인 대처 방법들의 부족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로마 카톨릭 사제이자 신학자인 Hans Küng은 사탄과 귀신에 대한 믿음을 시대에 뒤떨어진 중세 사상의 한 부분이라고 무시해 버린다.  사탄이나 영적 전쟁의 문제들을 다루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원수 사탄이 자신과 자신의 교활한 음모들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현실 도피적인 대응에 얼마나 기뻐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Lloyd Jones 박사는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대한 논의에서 영적 전쟁의 문제들이 거의 취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 통탄하며 『The Christian Warfar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룩과 성화에 대한 많은 가르침 가운데 사탄이나 어둠의 주관자들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그 문제는 단지 몇몇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제안된 많은 해결책들은 전혀 적절하지 못하다”  이 문제를 가지고 Lloyd Jones는 후임 목사 R. T. Kendal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회 안에 귀신들린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데도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까?”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물리적 수준에서 지상적 권세와 싸우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분의 싸움은 하나님의 목적에 반대하고 창조계 안에서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타락한 권세와 상대하는 것이었다(골 2:14:15).  유감스럽게도 목회자들 중에는 마귀에 대해 신경을 쓰거나 이야기 하지 말고 오직 말씀에만 집중하라고 경고한다.  『The Prince of Darkness』의 저자 Jeffrey Burton Russell은 ‘이 세상의 신’(고후 4:4), 온 천하를 꾀하는 자로 묘사되는 마귀(계12:9)와 그의 귀신들은 신약에서 성령보다 거의 두 배 가량 많이 나온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성경이 사탄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령의 권능을 덧입은 목회자는 보이는 것 이면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통찰력이 있다.  이런 목회자는 원수 사탄과 악한 영들과 싸우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그들은 영적으로 무장을 시킬 것이다. 

『Setting Your Church Free』를 쓴 공동 저자 Neil T. Anderson과 Charles Mylander은 이렇게 말했다.  “목회자들은 영적 투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며, 자기 자신이 대적 사탄의 목표물이라는 것을 분별한다. 이유없는 말다툼, 육체의 질병, 재정적인 문제, 친한 동료들과의 싸움, 무력감은 자주 목회자들을 괴롭힌다.  무서운 것은 이것들이 합리적인 설명을 마비시키며 너무 자주 그리고 명백한 이유 없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목회자들은 원수 사탄의 목표물이다.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 가운데 사탄이나 영적 전쟁의 문제들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셨는가?”(요일 3:8).  특정 신학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은 귀신들과의 영적 전쟁이 아니라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고전 4:6).  나는 지금도 궁금한 것은 오늘날 현대교회가 지겹도록 말씀을 전하는데 왜 귀신에게 눌린 사람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셨다(마 8: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말한다(히 4:12).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고전 4:16).  그렇다면 진리의 말씀을 무시하는가?  말씀을 주야장천(晝夜長川) 외쳐도 성경의 정경을 최종적으로 선택한 이후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나팔을 불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사탄이나 귀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셨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이 영적인 세계에서 악의 영들과 싸울 수 있도록 어떻게 무장시키셨는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탄과 귀신들이라 불리는 악한 영적인 존재들에 대해 시작하신 싸움의 실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메시야 소명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셨던 요단 강 세례 사건 직후(마 3:13-17),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이끌려 그곳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이 세상 임금(요 12:31), 기능적 ‘주’(functional Lord)가 되는 사탄(요 16:11)과 일대일 대결을 펼치셨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첫째 아담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범하도록 시험을 받으셨지만 첫째 아담과 달리 성령의 검, 말씀으로 무장한 하셨기에 사탄을 물리치셨다(눅 4:1-13).  

수없이 많은 영적 전투의 이야기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인생을 멸망시키는 유일한 사명을 가진 귀신들과 대결하며 그들을 쫓아내신다.  그 전형적인 예는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군대 귀신을 쫓아내신 이야기다(막 5:1-20).  이 본문은 Neil Anderson은  ‘진리 대결’(Truth Encounter)이라고 말한다.  Alan Tippet가 사용한 선교학 용어로 ‘능력 대결’(power encounter)이라고 알려진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의 북동쪽의 바위 절벽에서 파괴적인 군대 귀신에 맞서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유일하고 근본적인 이유 때문(창 1:27)에 사탄의 공격을 받고 있는 한 사람을 해방시킨 것이다.  사탄이 우리를 미워하는 이유는 주님의 말씀처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20).  한 마디로 그가 예수님을 지독하게 싫어하기 때문이다.   

영적 전쟁에 대한 생각이나 논의를 피하는 것이 최상의 접근법이라고 여기는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나는 그들이 과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알고는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  예배시간에 주기도문을 주문처럼 외우는 것이 아닌지 의심도 든다.  마태복음 6장13절, 이 한 구절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적 전쟁이 발생하는 전쟁터로 들어가게 하신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예배 때에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하고, 그의 나라의 뜻을 바라며, 용서받고 용서하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공급받는다.  이제 다 끝난 것인가?  아직 시험과 악이 남았다.  Ed Murphy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적은 이미 패배했지만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영적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이다(계 12:12).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직접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것에 대해 기도하라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영적 전쟁을 위해 사람들을 무장시키기도 하셨다.  열 두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하늘의 권세를 주셨다(마 10:1).  이들 뿐만 아니라 파송된 칠십 명의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이렇게 보고한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누가는 칠십 명의 제자들을 파송하는 이야기를 임박할 추수기의 문맥에 배치시킨다(눅 10:2).  누렇게 된 들판과 같이 사람들은 추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추수라는 측면에서 영적 전쟁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치유와 축사의 모든 사례를 하나님 나라를 전진시키고 사탄의 나라를 약화시키는 전쟁 행위로 여기셨다.  베드로는 이 주제를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고넬료에게 선포한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부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들을 고치셨으니’(행 10:38).  우리의 적은 Walter Wink가 말한 것 같이 어떤 원형적 이미지나 역사에 나타나 인간 상상력의 모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격체이다.  이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엡 2:2)의 목적은 하나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다’(요 10:10).     

목자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원수 사탄과 그의 세력들을 두려움 없이 효과적이며 당당하게 싸울 수 있는 영적 권위를 부여하셨다(막 16:17-18, 요 14:12).  두려움이 없는 것은 사탄과 그의 군대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영적 전투의 능력을 갖추었다는 의미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논할 때마다 은사중지론자들이 hysterical 한 반응을 보이듯이,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할 때 귀신들은 사시나무 떨듯 떤다(약 2:19).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영적 세계의 전쟁을 할 수 있도록 교회를 무장시킨다.  ‘영분별’과 ‘능력행함’의 은사들과 귀신에 저항하며 그를 쫓아낼 교회의 책임과 권위는 상관관계가 있다.  교회는 영적 전쟁에 임하며 그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수행할 것을 명령받는다(막 16:15-18).  그리고 제자들처럼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는다(눅 24:49).         

오늘날 교회 안에서 정신적, 육체적, 영적으로 잘못되거나 고통을 당하는 신자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생겨난 현상인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이나 미국에 사는 한인들만큼 교회당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열정적으로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민족도 많지 않다.  비록 그 말씀이 설교 원고지를 가지고 읽어내리는 메마른 말씀이 될지언정 신자들은 은혜가 되지 않더라도 수면제(?)와 같은 설교를 듣는다.          

문제가 무엇인가?  영적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경험자들이 가르치는 신학에 있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야고보서 5장14절에 나타난 치유에 대해 해석하기를 “주께서 잠시 동안 나눠주기를 기뻐하신 기적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오직 사도들과 관련이 있으며 우리와 관련이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치유의 능력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단정짓는다.  이것을 이어받은 현대판 계승자들도 신적 능력을 나타내는 필요성이 Athanasius of Alexandria가 성경의 정경을 최종적으로 선택한 이후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멈추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신학이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이 귀신에게 눌리거나 고통당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나는 평신도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는 목회자를 만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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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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