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료'에 해당되는 글 157건

  1. 2020.11.01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사랑
  2. 2020.10.25 성경의 문학적 특성
  3. 2020.10.18 가난한 자와 가난(poverty)에 대한 성경적 고찰
  4. 2020.10.10 섭리(攝理)에 대하여
  5. 2020.09.27 낙태에 대한 기독교인의 입장
  6. 2020.09.13 구약 성경에 나타난 죽음과 관계된 음부(陰府)의 제 개념(諸槪念)
  7. 2020.09.06 하나님의 고유 명칭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8. 2020.08.30 하나님과 하느님의 명칭에 대한 논의
  9. 2020.08.23 구약에 나타난 여성과 그 지위
  10. 2020.08.16 창부(娼婦)에 대하여
  11. 2020.08.09 일부 다처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12. 2020.08.02 저주와 복수
  13. 2020.07.26 번개와 뇌성
  14. 2020.07.19 구약에 나타난 복(福)의 의미
  15. 2020.07.12 물(水)에 대한 성경적 이해
  16. 2020.07.05 구약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영광
  17. 2020.06.28 언약적 축복으로서의 아침과 저녁
  18. 2020.06.20 장수(長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9. 2020.06.14 성경에 나타난 이(齒)
  20. 2020.06.07 재난에 대처하는 다윗과 욥의 태도 비교
  21. 2020.05.31 구약의 토지법
  22. 2020.05.24 원죄(原罪)와 고범죄(故犯罪)
  23. 2020.05.16 장막에 대하여
  24. 2020.05.10 의인 욥의 고난
  25. 2020.04.26 유대의 애국자 느헤미야
  26. 2020.04.19 축복의 방편으로서의 고난
  27. 2020.04.05 성경에 나타난 잠(睡眠)의 의미
  28. 2020.03.29 라합(Rahab)과 용(Dragon)
  29. 2020.03.22 하나님의 보존 섭리(保存攝理)
  30. 2020.03.14 성경과 부(富)

아가서의 묘사된 남녀가 서로 지극히 사랑하는 모습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예표하는 것이다.  아가서에 그려진 대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뜨겁고도 아름다운 것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사랑 역시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제 아가서의 주제인 이와 같은 사랑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용어(用語)

사랑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히브리어는 <아하바>인데, 그 동사형 <아헵>숨쉬다’, ‘애착을 갖다’, ‘기뻐하다등의 뜻을 갖는다.  그 외에 자주 쓰인 단어는 <헤세드>로서 (참조, 7:12, 삼상 20:8), ‘친절’, ‘충의’, ‘자비’, ‘자애등을 의미한다.  헬라어로서 사랑을 나타내는 말은 <아가페><필리아>, <에로스>가 있다.  <아가페>는 보통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3:16)  ②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사랑(살후 3:5, 요일 2:5)  ③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15:10)  ④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고후 5:14)  ⑤ 이웃이나 친구에 대한 영적인 사랑(13:7, 5:14) 등을 나타낸다.  그리고 <필리아>는 우정의 차원에서 사랑하거나 기뻐하고 동경하는 사랑을 의미하며 <에로스>는 남녀간의 열정적인 갈망, 즉 성적인 사랑을 가리킨다.

 

2. 속성(屬性)

사랑은 본래 추상적인 개념이므로 단 몇 마디로 설명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 중의 하나이므로(요일 4:8, 16),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을 알게 되며 따라서 사랑의 정의(定義)도 내릴 수 있게 된다.  사도 바울이 고전 13장에서 표현한 것 같이 사랑은 온유하고 오래 참으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작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약하고 불의한 것들을 기뻐하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기뻐하는 것이다(고전 13:4-7).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랑의 속성이 진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게 된다(비교, 3:16, 5:2).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 항에서 다루어진다.

 

3. 하나님의 속성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성품을 생명’(1:4), ‘’(요일 1:5), ‘진리’(요일 1:6),  사랑’(요일 4:8) 등으로 묘사하였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들은 서로 연관이 되는데 가장 근본된 성품은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참조, 4:37), 그들을 보살피시며(11:4), 구원하신 것은 모두 그분의 사랑에 근거한 행동이셨으며, 또한 죄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5:8, 3:3-4).  이제 이같은 사실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① 언약과 사랑 : 하나님께서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참조, 15, 7:7-8).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많은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언약들을(15:18, 19:5, 30:1-9, 삼하 7:14-19), 기억하시어 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사랑을 베푸셨다(106:45).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며 자신의 약속을 번복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분과의 언약은 영원한 효력을 지니게 되며 따라서 그분의 사랑도 영원한 것이 된다(대하 5:13, 3:11, 106:1, 117:2, 33:11).  그러므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자들은 그 사랑에 근거한 소망을 갖게 되며(130:7),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소망을 가진 자들을 보호하신다(33:18, 22).  이러한 언약과 소망, 사랑과의 관계는 그리스도를 믿어 새 언약 안에 들어간 신자들에게도 적용되는 원리이다(2:11-20, 10:11-12).  이제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최후의 심판시 긍휼과 진리로 말미암아 의롭게 인정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참조, 85:10, 19:1-16).  

② 진리와 사랑 : 본래 사랑은 '관계성'의 개념이다.  일방적인 사랑은 완전할 수 없으며 상호간의 교호(交互작용이 있어야 그 사랑은 사랑으로서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관계성으로서의 사랑은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인 율법을 지켜야 할 사랑의 의무가 지워진 것이다(신 27:9-10, 29:29-30).  그리고 신약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관계성은 마음과 몸을 아끼듯이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렇듯이 기독교는 사랑을 받고 또한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랑의 종교이다.

 

4. 결론(結論)

사랑이 단지 관념적인 사고(思考)에 그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또한 명령에 의해 강제 되어진 사랑도 참다운 사랑이 아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명령 없이도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할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의무와 차원을 넘어선 주께 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20:6, 5:10, 1:5, 9:4).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셨던 물음(21:15-17)을 기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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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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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참으로 위대한 문학서라고 할 수 있다.  일찌기 Thomas De Quincey는 문학을 깨우침을 주는 지식의 문학감동을 주는 힘의 문학으로 구분하였는데, 성경은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독자들에게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성경은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성령의 감동 감화시키시는 역사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경을 하나의 문학서로 간주할 때, 그것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 특성은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본고(本稿)를 통해 이를 간략히 살펴보려고 한다.

 

1. 성경의 일반적인 문학적 특성

① 보편성(universality) : 성경의 일반적인 문학적 특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보편성이다.  성경만큼 온갖 상황 속에서 생활하는 각양 각색의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책은 없다.  지식이든 무식자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남자든 여자든, 모든 사람들이 사이에서 성경 말씀은 차별이 없이 동일하게 읽혀지고 있다.  이 같은 성경은 1980년 통계 기준하여 볼 때 276개 언어로 성경 전권이 번역 되었으며, 신약 성경만은 759개 언어로, 쪽성경은 1811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② 숭고성(sublimity) : 성경의 일반적인 문학적 특성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사상 및 표현에 있어서의 숭고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숭고성이란 책자체가 지니고 있는 위대성과 연결된 문학적 특질을 가리킨다.  위대한 시인이자 비평가이기도 한 Samuel Taylor Coleidge이사야서나 히브리서 등을 읽은 후 HomerosVergilius의 작품은 매우 단조로운 것으로 생각되었고, John Milton의 작품은 심심풀이로나 읽을만한 것으로 생각되었다라고 말하였다.  사실 Longinus가 말한 것처럼 숭고성이란 위대한 영혼의 메아리이니, 만일 성경이 참으로 숭고한 책이 아니라면 이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이처럼 성경이 숭고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모세와 다윗, 이사야, 사도 요한, 사도 바울 등과 같은 성경 저자들이 숭고한 영혼들을 소유한 자들이었던 탓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기 때문이다(딤후 3:16).

③ 완전성(integrity) : 여기서 말하는 완정성이란 기술상(記述上)에 있어서의 정직성을 의미한다.  비록 성경의 표현 방식이 다양하기는 하지만, 결코 거짓을 진실로 가장하여 표현해 놓은 부분은 없다.  성경은 아브라함(12:10-20), 모세(20:7-13), 다윗(삼하 11:1-27, 24:1-25), 베드로(2:11-13)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의 죄에 대해서까지도 솔직 담백하게 기술하였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 행위의 내면적인 동기를 가장 윤리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는 단지 외적 현실에 상응하는 형식적인 것이 아닌 영혼과 심중(心中)의 진리가 되는 것이다.

 

2. 성경의 특수한 문학적 특성

① 신중심적(theocentric) : 성경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1:1)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있기를 비는 기원(22:21)으로 끝난다.  구약은 그 초점이 메시야의 도래(到來)에 맞혀져 있으며, 신약은 메시야의 재림(再臨)에 맞혀져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대상 28:9, 32:17)과 인자하심(대상 16:34),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비롯된 인간 구원의 역사(3:21, 3:16) 등을 증거하면서 사람이 마땅히 여호와를 찬양해야 한다고 교훈하였다.  이처럼 성경의 핵심이 신중심적인 까닭은 성경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록(自己啓示錄)이기 때문이다.

② 직관적(intuitive) : 성경은 그 사상 약식에 있어서 직관적이다.  비록 성경 곳곳에 페르시아적, 헬라적 사상과 유사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성경의 사상 형태는 그것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인간의 영혼에 대고 직접 말하고 깨닫게 하는 직관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므로 그 사고(思考) 형태가 이 세상의 철학에 입각한 사고와는 아주 다르다.  한편 인간의 마음속에는 일반적인 이성(理性)과는 다른 인식 능력이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며 그분에 대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 능력에 의해서이다.  이러한 능력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것으로서 신화적인 용어로 일명 신지식’(knowledge of God)이라고 한다.

③ 초월적(transcendent) : 성경에는 시문(詩文), 역사, 율법, 잠언, 비유, 묵시, 예언, 서신, 지혜 문학 등과 같은 다양한 문학 양식이 사용되었지만, 성경이 전달하려고 하는 메세지는 그러한 문학 양식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초월한다.  한 예로 시가서의 형식을 띤 욥기는 그 어떤 극시(劇詩)도 갖지 못한 심오한 영적 진리를 안고 있다.  신약의 저자들은 사랑’(, 아가페), ‘말씀(, 로고스), ‘생명’(, 조에) 등과 같은 세속적인 단어를 하나님과 관계된 영적인 의미로 바꾸어 놓았다.  이처럼 성경은 일반 문학과는 다른 초월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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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어 해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주요 술어로서 가난한 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에는 서너 가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빈번하게 쓰이고 있는 단어는 <아니>이다.  이 단어는 주로 가난하고 궁핍하여 다른 사람의 밭이나 포도원에 가서 이삭을 주우며 포도를 따먹는 자들을 의미한다(19:9-10).  또 다른 단어로는 <에비욘>이 있는데 재물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자를 가리킨다(참조, 15:11).  그리고 <><딸라>라는 말은 고달픈 생활을 하다는 뜻인 <따랄>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 중 <>은 학대를 받아 핍절케 된 자(22:16, 20:19)를 가리키며, <딸라>는 바벨론 포로 시대 동안에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가장 가난한 계층의 이스라엘인들을 가리킨다(왕하 25:12). 

그리고 <미스켄>이라는 단어는 전도서에만 나오는데거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전도서의 기자는 거지와 같이 가난한 자가 뭇 사람들보다 더 지혜로울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9:15-16).  이외에도 <로오스>는 궁핍하여 가난한 자들의 부류에 속한 자(삼하 3:39, 30:3)를 가리킨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헬라어로서 가난이나 가난한 자를 의미하는 단어는 몇 개 안 되는데, 그중 <프토코스>는 가장 일반적으로 쓰인 단어이다.  이 단어는 거지를 뜻하기도 하였고(16:20), 물질적으로 부유치 못한 자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19:21, 13:29).  그러나 때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 자라’(5:3)고 하여 비유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페네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자(고후 9:9)를 의미하며, <엔데에스>는 초대 교회 안의 가난한 자들, 즉 다른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나누어 준 덕택에 생활해 나가는 자들을 의미한다(4:34).

 

2. 가난한 이유

사람들이 가난하게 되는 몇 가지 이유를 성경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의 행동에 따른 결과이다.  게으름(6:6-11), 향락 추구(21:17), 술 취하고 탐식하는 것(23:21), 다른 사람의 훈계를 저버리는 것(13:18) 등은 사람을 가난하게 만든다고 성경은 기록하였다.  둘째, 타인의 부당 행위 때문이기도 하다.  압제(1:13), 사기(5:11), 고리 대금(28:8), 탐욕(삼하 12:1-2), 부정과 부패(10:2, 5:28, 22:13) 등의 행위는 이웃을 가난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세째, 가뭄, 홍수, 질병과 같은 천재지변(10:5, 50:38)과 전쟁은 수입 요인을 상실케 만들기 때문에 가난의 원인이 되었다.  네째, 특별한 경우로서 하나님께서 가난하게 하신 때도 있다(삼상 2:7, 1:21, 2:6-19).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난을 허용하시는 것은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 시키는 한 방편이기도 하다.  다섯째, 스스로가 자원하여 가난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하시기 위하여 스스로가 가난하게 되셨다(고후 8:9, 2:5-7).  초대 교회의 사도들도 이런 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였다(고후 6:10).   

 

3. 가난한자에 대한 성경적 이해

모세도(15:11),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어느 사회든 간에 땅에는 항상 가난한 자가 있게 마련이라고 말씀하셨다(26:11).  그러면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만 한다는 의무를 강조하셨다.  물론 부()는 덕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며, 가난은 그 반대의 형벌일 수도 있다(10:15-16, 15:6, 1:1-3, 112:1-3).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욥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다(1:6-22).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하기에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더 우월 할 수는 없다(22:2).  성경은 언제나 사람들이 자기 이웃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라고 명한다.  심지어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 가운데서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곳에 거할까보냐’(요일 3:17)라고 반문하였다.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규례가 제도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즉 가난한 자에게서 이식(利息)을 취하지 못하였으며(22:25, 25:36), 안식년에는 가난한 자들에게 빛 독촉을 할 수도 없었다(15:1-4).  뿐만 아니라 노예로 팔려간 자는 6년 후에는 자유로운 몸이 되도록 규정되었다(15:12-18).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규정들은 법적 강제성을 지니지 못했으므로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가난한 자들과 경제적으로 나약한 자들을 곤경에 빠트린  사회적 악덕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10:1-2, 5:12). 

신약 시대에 와서도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돈궤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13:29).  사도 바울도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여 염려하였고(2:10),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을 권장하였다(15:26).  결론적으로 우리는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치 아니하겠는 고로라는 말을 잊지 말고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핌한 자에게 네 손을 펄지니라’(15:11)는 권고의 말씀을 직접 실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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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는 인생의 헛됨과 세상 일의 덧없음을 반복적으로 서술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만이 찬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7:24, 1:2, 8:17).  그래서 본고(本稿)는 전도서 기자가 찬양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 정의(定義)

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 만물의 위대한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언행심사(3:34,35; 135:6; 17:25-28; 38-41)를 보존하시고(1:3), 감독하시고, 처리하시고, 통치하시되,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하시며(10:29-31),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하여(15:3; 104:24; 145:17), 그의 무오한 예지(豫知)와 그 자신의 의지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결정을 따라서 하신다(1:11; 33:10-11). 이로써 그의 지혜, 능력, 공의, 선하심, 그리고 자비의 영광을 찬미케 하신다(63:14; 3:10; 9:17; 45:7; 145:7).

② 루이스 벌코프 (Louis Berkhof) : 섭리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며 세상에 발생하는 모든 사건 속에서 활동하시며 만물을 정해진 목적에 맞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와 같이 정의를 살펴볼 때, 우리는 섭리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포함한 피조 세계 전체를 자신의 무한한 권능과 지식으로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활동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섭리의 범위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머리털까지 헤아리신다고 기록하여(10:30),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세세한 것에까지 미치는가를 설명하였다.  또한 인간들이 제비를 뽑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작정 아래 있다고 하여(16:33), 인간이 보기에는 우연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뿐만 아니라 보통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사건들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과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이다(참조, 14:21, 2:1-11, 고후 12:12).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못적을 실현하시는 활동은 자연 법칙과 함께 초자연적인 역사가 모두 동원되며 세세한 일에서부터 우주의 운행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광범위한 것이다. 

 

3. 섭리와 기도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작정 안에 이미 계획되었다면 신자는 왜 구태여 기도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 질문에 대하여서는 기도와 그 응답 과정까지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두 예정되어 있다고 답변할 수 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성령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성도가 자유스럽게 기도하는 것도 사실은 성령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8:26).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는 응답을 받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도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간구하셨으며(26:39), 기도문을 가르치실 때에도 먼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간구하는 기도를 가르쳤다(6:10).  결론적으로 성도들에게는 기도할 의무가 있으며(6:6, 살전 5:17), 믿음 안에서 한 그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경우 응답받게 된다(비교, 고후 12:8-9).

 

4. 성경의 예()

성경에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많은 일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창세기 3718-28절에 나오는 대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팔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발생되고 전개된 것이다(45:8).  또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데리고 나오려고 할 때, 바로의 마음이 재앙 가운데에서도 강퍅해졌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7:3, 8:19, 22, 9:12, 14).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하러 베들레헴에 갔다가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는데, 이는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BC 27- AD 14)가 내린 명령으로 말미암아 미가서 52절의 예언을 성취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다(2:1-7).  마찬가지로로 유대의 관원들과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실도 실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응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한 결과였다(3:18).  이와 같이 성경의 모든 사건들은 역사와 개인의 모든 사건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5. 섭리와 그리스도인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 아래 움직여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의무는 자신에게 맡겨진 각자의 소명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4:11).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5:17).  그러나 근대로부터 이 섭리의 교리를 무효화시키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어 왔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지나치게 의지하는 실증주의’(實證主義), 그리고 합리주의’(合理主義)와 같은 움직임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사상들은 역사의 표면에 드러난 사실들을 이성과 과학으로 분석하여 판단하려고 하지만 인간의 타락한 이성과 불안전한 과학으로는 온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의문과 혼란만을 되풀이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지식과 이성에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되며, 온갖 현상(現象)들을 신앙의 안목으로 바라보며 이 모든 것들이 합하여 선을 이룰 줄 아는’(8:28) 믿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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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63-4절에서는 사람이 육신적인 향락을 아무리 누린다 할지라도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낙태된 자보다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낙태는 자연스러운 태아의 죽음을 뜻하지만,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인공적으로 태아의 생명을 끊는 잔인한 일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더구나 교회에서는 이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밝히지 않거나 심지어는 묵인하는 일까지도 있다.  이처럼 혼탁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인공유산’(人工流産)은 때로는 정당화되고 때로는 정죄되기도 하는데, 본고(本稿)는 이렇게 가변적이고 상황 윤리적인 인공유산을 성경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1. 낙태

국어 사전에는 낙태’(落胎)달이 덜 찬 태아가 죽어서 나옴이라고 풀이하였다.  이를 인위적으로 실시하는 것을 인공 유산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공 유산이 행해지는 이유의 대부분은 자녀 수가 많다든가, 생활이 어렵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아들 선호 사상으로 말미암아 태아가 딸로 판명되었을 때, 혹은 혼전 성 관계로 말미암은 임심일 때에 인공 유산이 많이 행해진다고 한다.  물론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에 낙태 죄에 관한 처벌 규정이 있지만 사문화(死文化) 되었으며 낙태수술은 공공연히 이루어 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수술은 산아 제한의 한 방편이 되기도 하지만, 요즈음은 쾌락을 즐기는 결과에 따르는 하나의 작은 희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늘어가는 풍조도 무시할 수 없다.

 

2. 낙태 수술의 후유증

이러한 임심 중절 수술에는 위험한 후유증이 따르기 쉬운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이러한 수술을 여러 번 하게 되면 습관성 유산이나 조산(早産)을 하게 될 위험이 있다.  ② 정상적인 임신과는 달리 낙태 후에는 자궁외 임신이 될 확률이 약 4배가 높다.  ③ 수술의 뒤처리가 깨끗하고 완전치 못하면 불임을 초래할 수도 있다.  ④ 수술 후에 하복통이나 요통, 월경 불순 등의 증상이 따르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많은 후유증이 있지만 보다 위험스러운 것은 수술 중에 산모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험 부담이 크고 막대한 정신적, 신체적 상처를 주는 임신중절수술을 상기(上記)한 이유들 때문에 행해야만 한다면 이는 너무도 무모하여 자신에 대한 무책임한 행동이다.   


3. 성경적 입장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임신은 하나님의 축복이다(127:3).  인간은 잉태된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생명을 부여하신 존재로서의 삶을 시작한다(11:5, 138:13-16).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복중에 생기기 전에 이미 아시고(1:5), 그 생명체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거룩한 존재로 키워가신다.  원래 인간은 특별히 생령으로 창조되었으며(2:7),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고, 그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피조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릴 책무를 진(1:27-28) 거룩한 존재이다.  따라서 잉태한다는 것은 귀하고 축복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아의 생명을 빼앗는 수술이 여러 가지 핑계로 합리화될 수 있다면 이는 너무도 큰 죄악이다.  어떤 사람들은 태내(胎內)의 핏덩이는 아직 완전한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에 임신중절수술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이와 같은 주장을 배척한다.  생명을 주장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며(16:22, 27:1), 인간은 그 같은 일을 할 자격이 없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라 할지라도 낙태 수술은 살인일 수 밖에 없다.  

 

4. 결론

낙태는 근본적으로 생명 경시의 풍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쾌락주의에 편승하여 살인을 합리화시키는 현대적 이기주의(利己主義)의 극단적인 상황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너무 지나친 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오늘날의 현상을 직시한다면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1978년도의 통계에 의하면 가정 주부 전체의 58%가 낙태 수술의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여기에 최근의 성 개방 풍조에 물든 미혼녀들의 경험을 합친다면 그 수는 엄청나게 증가될 것이다.  아무튼 임신중절수술은 태아와 산모를 둘 다 위협하는 위험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성폭행을 당했다든가 혹은 근친 상간에 의한 임신은 참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성경은 분명히 생명의 존엄성을 제시했으므로 우리는 그 기준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제 낙태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분명하게 밝혀졌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은 타인들이 그러한 죄를 범하도록 권유하거나 방조해서는 안 되며, 특히 기독교인 의사들은 이 일을 막는데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신체적 어려움을 겪는 미혼모들이나 경제적인 이유로 낙태 수술을 받으려는 하는 사람들을 달리 돕는 방법을 폭 넓게 모색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성()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아름답고 귀중한 성()을 바르게 가르치는 데 힘써야 한다.  이러한 교육과 사회 사업은 태아 살인이라는 범죄를 미리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처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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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는 음부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데, 대개 죽음이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삼하 22:6, 18:5).  그러면 구약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음부란 무엇을 뜻하며 그것과 죽음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하여 본고(本稿)는 음부와 죽음을 구분하여 살펴 본후 결론을 맺으려 한다.

 

1. 음부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여겨진 장소는 스올’(sheol)이다.  이것은 헬라어로는 <하데스>라고 한다.  개역 성경에는 스올이 음부’(37:35), ‘무덤’(28:1), ‘멸망의 웅덩이’(26:6)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면 음부는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이에 관해서는 성경 상의 언급이 없으므로 알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은유적, 시적 성경 귀절들이 음부를 땅 밑의 어떤 장소로 묘사하고 있다(7:9, 55:15).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이곳을 죽은 인간의 혼이 머무는 곳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도 하나님의 통치력과 권능이 여전히 미치는 것으로 여기었다(26:6, 139:7-8).  그런데 구약의 음부와 신약의 지옥간의 의미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음부는 죽은 사람들 모두가 필연적으로 가서 머무르게 되는 장소라는 점에 반해 지옥은 사후(死後), 악인의 영혼이 고통받는 형벌의 장소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한편 구약 성경에는 음부가 마치 땅 밑(16:30)이나 땅 밑의 물 속(26:5)에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곳은 어둡고 침울한 세계(114:3)이며 살아 있을 때의 삶에 대하여 거의 의식할 수 없는 장소이다(9:5-6).  이처럼 음부는 적막한 장소이며 존재 의미가 없는 세계이다(94:17, 115:17).

 

2. 죽음

구약 성경에 사용된 죽음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마윁>이다.  그런데 <마윁>은 죽음이란 뜻과 더불어 종종 음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30:23, 38:18).  구약 성경은 인간의 사후(死後)세계에 관해 거의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혼이 음부에 내려가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긴 잠을 자는 것으로 생각하였다(51:39).  그러나 이방 민족들은 과 개념이 약간 다른 망령’(, 레파임)이 음부에 가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여기서 망령이란 살아 있을 때의 인간의 형체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存在)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 되어진다.   아무튼 이러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구약 성경에는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개념이 나타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죽음은 인간의 죄와 불순종에 대한 벌이다( 2:9-3:19).  ⓑ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육체적 죽음과 영적 죽음 그리고 영원한 죽음으로 구분지어 이해하는데 반해 구약 성경에서는 대개 죽음을 육체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왕상 17:21-22, 78:50).  ⓒ 히브리인들은 죽음에 대하여 몸시 두려워 하였으며(6:1-5) 할 수만 있으면 죽음을 면하려고 하였다(10:17).  ⓓ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인간이 죽음을 겪지 않을 수도, 죽은 상태에서 다시금 살아날 수도 있다고 믿은 것 같다.  구약 성경에는 에녹과 엘리야가 죽음을 겪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기사가 나와 있다(5:24, 왕하 2:11).  ⓔ 신약 성경에서처럼 확실치는 않지만 구약 성경에서도 부활 사상이 나타난다.  죽음은 종종 열조(列朝)에게로 돌아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49:33), 개인의 부활에 관한 소망이 언급되어 있다(17:15, 6:2). 

 

3. 결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갈 점은 아브라함과 모세, 사무엘과 같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사후에 어디로 갔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관하여 분명한 답은 제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음부에는 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지옥도 아니고 낙원도 아닌 별개의 장소로서 의인과 악인이 함께 공존하는 음부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신구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이다(18:23, 25:46).  성경에는 음부라는 말이 종종 사후 세계가 아닌 실제적인 인간의 무덤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35:20).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의 음부라는 말은 인간의 죽음과 그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단어로 이해되어져야만 할 것이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다.  죽음은 침묵의 세계요 어두움과 무의식의 세계이다.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상태를 음부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개념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37:35, 10:21-22, 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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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 성경에서 하나님의 고유 명칭을 맛소라 본문에 따라 여호와로 음역한 반면 공동 번역이나 대부분의 히브리어 학자들은 야훼또는 야웨로 읽는다.  그렇지만 영어 번역 KJV, RSV, NIV, NEB, TEV, Living Bible 등은 히브리어 <아도나이>를 번역할 때처럼 ’(the Lord)로 번역했다.  이 명칭의 독법이 문제시된 것은 (a) 맛소라 본문 이전에 쓰여진 어떠한 본문도 모음 표기가 없었다는 점과 (b) 베벨론 유수(B.C. 586) 이후에는 하나님의 고유 명칭을 부르는 것이 불경죄를 범하는 것으로 여겼던 점이다.  그 후 맛소라 학자들이 기존의 자음으로 된 본문에 모음을  붙이면서 <아도나이>에 표기한 모음을 그대로 고유 명칭에 사용하여 여호와로 읽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명칭의 어원을 고려해 볼 때 여호와로 읽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출애굽기 314절을 볼 때 이 고유 명칭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동사 <하야>에서 유래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동사의 어원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하야>가 단순한 (칼 형)의 어간일 경우 : 이 동사를 칼 형의 어간으로 보면 나는 있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에 따라 출애굽기 314절의 나는 있는 자’(, 아쉘 에예)는 창조주 되신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임하실 수 있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행동하심에 있어서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으시고 주권적 자유에 따라 활동하심을 의미한다(33:19).  그러므로 하나님의 고유 명칭은 그는 존재한다란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야훼가 적합하다.

2) <하야>가 사역형(히필 형)의 어간일 경우 : <하야>란 동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단순형일 때는 존재적인 의미였지만 사역형일 때는 천지 만물의 동인(動因)임과 동시에 원인(原因)이란 뜻이 된다.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존재하게 한다란 의미를 나타낸다.  이를 근거로 출애굽기 314절의 원문을 재해석해 보면 나는 존재하게 될 것을 존재하게 한다란 표현이 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의 창조자 되심을 잘 나타낸 것이다(참조, 2:10).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고유 명칭은 그 이름의 뜻에 따라 야웨또는 야훼가 적합하다.  그렇지만 앞에서 열거했던 여러 영역본들처럼 ’(the Lord)로 읽든지 여호와로 읽든지 독음상의 문제는 별로 의미가 없다.  만일 이것이 큰 문제라면 헬라어에서 예수로 발음되는 것을 영어로는 지저스’(Jesus), 중국에서는 耶蘇’(야소)로 읽는 것도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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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명칭에 대한 논란은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중대한 사건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 논란은 신교와 구교 공동 번역 성경 위원회가 구교의 천주님과 신교의 하나님이란 명칭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일 때 절정에 달했다.  그래서 본고는 이 명칭에 대한 찬반의 의견을 서술한 후 성경적인 입장에 입각하여 그 명칭의 가부를 논의해 보려고 한다.

 

1. ‘하느님으로 주장하는 견해

대한성서공회 구약공동번역 위원이었던 곽노순씨의 견해에 따르면(기독교사상 19713월호) 하나님의 명칭이 처음 55년 동안은 형태소(形態素)하늘에 연결해서 읽었으며 다음 15년 동안은 하늘이나 하나에 연결시켰는데, 그 후에는 하나에만 연결시켜 하나님으로 읽게 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하늘’(heaven)에 형태소 을 연결해서 하나님또는 하느님으로 통일시켜 혼란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2. ‘하나님으로 주장하는 견해

하느님이란 명칭을 반대하는 이들의 공통된 견해 중의 하나가 하느님은 불교나 유교의 문화권에 살았던 우리 민족의 범종교적(汎宗敎的) 용어라는 것이다.  옛날 우리 민족들은 일반적으로 우주 만물의 지배자나 생사 화복의 주재자에 대한 개념을 하늘에 두었다고 한다.  그 한 예로 인명재천 (人命在天)지성감천’(至誠感天) 등의 사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불특정 절대자에 대한 신앙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늘에는 하나님 한 분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들도 있으므로(10:7, 6:12, 12:7-9), 유일하신 창조주의(20:3-7, 6:4, 10:11, 2:10, 6:9, 4:6) 칭호를 다신적인 뜻이 포함되어 있는 일반 관용어로부터 유래된 하느님으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창조주와 잡신들의 구별이 없이 통용되고 있는 한자어 귀신 ’() 자도 유일하신 창조주에 대하여 사용해서는 안 된다.

 

3. 다른 나라에서의 하나님 명칭

한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a) 영어, 독일어, 일본어 성경 :  이들의 언어에는 창조주와 잡신(雜神)을 구별하는 명칭이 따로 따로 없다.  즉 영어에는 God, 독일어에는 Gott, 그리고 일본어에는 가미’(かみ)라는 단어만이 있다.  비록 성경 번역상 귀신들과 구별하기 위해 대문자로 표기한 것만 다를 뿐이다.  b) 초기 성경 번역에 사용된 헬라어와 라틴어 : 하나님은 헬라어로 <데오스>, 라틴어로는 <데우스>로 불리워진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그 당시 초월자에 대해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것들이므로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4. 하나님의 명칭에 대한 성경적 접근

구약 성경에 언급된 성호(聖號)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여호와>(3:14), <>(7:21), <엘로힘>(1:26), <엘 샤다이>(6:3), <엘 엘리온>(14:18), <엘 올람>(22:23), <엘 로이>(16:13), <엘 엘로헤 이스라엘>(33:20), <아도나이>(3:11).  그런데 고대 근동의 이방인들도 자신이 섬기는 신을 <>이라고 불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히브리인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이방 잡신과 같은 분으로 여겼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데오스>도 헬라인들이 자신의 신에 대하여 사용했던 호칭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 말을 사용하셨으니(3:16), 우리는 이 말이 성경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로 굳어졌음을 알 수 있다.

 

5. 결론

하나님의 명칭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여러 각도에서 살펴본 결과 우리는 유일하신 창조주를 반드시 하느님또는 하나님으로 호칭해야 한다는 것은 독단임을 알 수 있다.  ()이란 명칭을 불교나 유교에서 사용한다면 유일하신 창조주시며 섭리주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될 것이다.  Gottfried Wilhelm Leibniz가 유일하신 창조주를 단자’(monad)로 표현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이와 반대로 Aristotle가 최고의 이데아’(idea)를 신으로 묘사했다고 해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나 하느님이란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성호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용어를 통일시켜 사용할 필요는 있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의 명칭 문제로 교회끼리 혼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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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말하기를 성경은 남성 중심적인 책이며 남성 우위 사상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도리어 성경은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뚜렷하게 부각시켜 남자의 동반자로서의 모습을 확고히 해주고 있다.  잠언 32장만 해도 여성은 가정을 잘 살피고(27) 자녀를 교육하는 일에 협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본고는 오늘날 성경과는 달리 왜곡되어 있는 여성상을 바로 잡으며 나아가서 사회 속에서의 여성의 바른 지위와 역할을 제시하려고 한다.

 

1. 잠언에 나타난 여성상

잠언 31장에 묘사된 여성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훌륭한 내조자로서의 아내의 모습이다.  즉 자녀를 지혜롭게 교육하며(1-9), 가정을 알뜰하게 보살피는 여성의 모습(10-13)을 칭찬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은 남편을 잘 내조(內助)할 뿐만 아니라 성실하고 근면하며 가난하고 어려움을 겪는 자들을 돕는 자상함도 겸비하였다.  여성이 남자의 성()적 대상으로 표현된 곳은 잠언 515-19절인데, 이곳에서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을 강조하므로 이 귀절을 ()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표현한 곳으로 볼 수는 없다.  결국 여성의 지위를 살펴보면 여성은 자녀를 갖기 위한 상대, 혹은 단순한 성적 대상자가 아니며 독자적으로 감당해야 할 역할을 가진 주체적 인격체로 나타난다.  이러한 여성은 결코 남자에 종속되거나 구속을 받는 존재가 아니며, 도리어 가정의 유지나 자녀의 교육에 남자와 공동 노력하는 동반자의 모습을 보여준다(11:16, 14:1).

 

2. 창세기 1-3장에 나타난 여성상

남성 우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여자보다 남자를 먼저 창조하셨고 여자의 창조는 남자의 갈빗대로 말미암았으며 심지어는 여자의 약한 품성 때문에 인류가 타락했으니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깊이 없는 단견(短見)이며 편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창세기 128절에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세상을 다스릴 권한과 책임을 공동으로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뱀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으려고 유혹할 때도 너희라는 복수 대명사를 사용했으니(3:1-5), 인간의 타락이 여성 때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죄의 결과로 남성은 여성을 다스리게되었다(3:16).  비록 이러한 불평등과 차별이 있었기는 해도 여성이 가진 가정 내의 역할과 자녀를 낳는 일은 존중 받았으며 훌륭한 여인은 남편을 칭송받게 했다(12:4).  여성의 종속이 죄의 결과라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이루어졌으므로 종속동등으로 회복되어야 마땅하다.

 

3. 율법하에서의 여성

이때의 여성은 성적인 대상이며 자손의 번식의 수단이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그 지위가 현저하게 낮았으며(참조, 27:2-7), 남성에게 절대 복종이 요구되었다.  또 남성은 창녀와 상대할 수 있었지만 여성은 자기 남편 이외에 다른 남성과는 성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재산 상속은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딸들은 아들이 죽고 없을 때에만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27:6-11).  그리고 수혼 제도(참조, 4)도 역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것이었으며 여성의 위치는 고려 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성차별은 당연시 되었으나 여성이 어머니의 위치에 있을 때에는 남편과 등등하게 대접받았다.  이는 남편과 한 몸’(2:24)이 된 여성의 역할이 무엇인지 시사해 준다. 

 

4. 신앙과 여성

구약 성경에 나타난 몇몇 여성들의 뛰어난 신앙은 당시의 여성의 지위에 대하여 많은 힌트를 준다.  성경상에 나타나는 여선지자로는 훌다(왕하 22:14, 대하 34:22), 미리암(15:20) 같은 여성들이 있었으며 룻,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같이 깊은 신앙을 가졌던 여성들에 대한 기록도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비록 여성이지만 큰 믿음을 가졌으므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존중을 받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이스라엘 문화 체계가 신앙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신앙 안에서는 남녀의 큰 구별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5. 결론

1975년은 UN이 정한 세계 여성의 해였다.  현대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성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여권 신장을 주장하며 남녀간의 동등한 대우를 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성경은 결코 여성이 열등하게 창조되었다든가 남성의 일을 보조하는 것이 여성의 역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오늘날의 남성들이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무지할 뿐이다.  남성들은 남성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의무와 신앙적 책임이 있으며,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양자의 역할과 기능이 조화를 이룰 때 가정과 사회는 제대로 움직이게 된다.  물론 사회에는 남녀 누구가 맡아도 수행 가능한 영역이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의 성 차별은 철폐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남녀는 평등하나 그 본질과 역할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참조, 5:25, 딤전 3:11, 벧전 3:1, 7).  남녀는 서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의 존엄성을 인정하여 서로가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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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부는 히브리어로 <조나> 또는 <크데샤>라고 하는데, <조나>는 대개 자리를 옮기며 윤락 행위를 하는 창녀(娼女)를 가리키며(34:31, 6:26).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창부(prostitute)들은 허락되지 않았고(19:29, 22:21), 레위인과 창부와의 결혼이 금지되었으나(21:7-14), 창기의 번 돈을 헌금으로 드리는 것이 금지된 사실(23:18)로 보아 당시에 이스라엘에도 윤락(淪落) 행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우기 성경에 의하면 당시에는 이런 여자들의 매춘(賣春) 행위 뿐만 아니라 남창(男娼)들도 있어서 남녀간의 더러운 성() 행위가 이루어졌었음을 알 수 있다(참조, 14:24, 15:2, 36:14).  창부들은 상대자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감추기 위하여 면박(面帕)을 했으며(38:14), 또한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하여 화려한 장신구로 몸을 장식하였다(16:10-13).  한편 성경에는 우상 숭배의 악함과 더러움을 지적할 때, 이런 창부들과의 관계를 뜻하는 행음하다’, ‘매춘행위를 하다라는 표현을 썼다(참조, 3:6,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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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의 기자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행한 모든 일과 수고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무익한 행위임을 고백했다(1: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물질 만능주의와 향략주의가 판을 치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에 미혹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성 윤리의 혼란을 성의 해방을 표방하므로 사람의 지위를 하등 동물로 격하시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적인 성 윤리라는 관점에서 일부 다처제를 고찰해 봄으로써 성경적인 결혼관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1. 일부 일처제를 반대하는 입장

고대 사회에서 일부 다처제가 허용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도 이러한 풍습이 나타나고 있음이 사실이다.  심지어 이슬람교는 일부 다처제를 성문화하여 허용하고 있다.

a) 사회주의 : 베벨과 같은 학자는 일부 일처제가 남자의 합법적 상속이 가능한 사유 재산 제도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생산 수단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게 되면 일부 일처제는 폐지되고 자유 연애가 실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사유 재산 제도가 무너지고 사회주의화 될 때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소련은 러시아가 공산화된 후 이와 같은 이론을 실제적으로 행동화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192711일에 다시 혼인법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동일하게 혼인법이 실시되고 있다.  이것은 사유 재산 제도가 폐지될지라도 국가가 혼인에 대한 통체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b) 낭만주의 : 남여간의 사랑은 파도와 같이 굴곡이 있으므로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만 동거할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Ellen Key, Hans Bruher).  이러한 견해는 남녀 상호간의 책임을 배제한 자유 연애 내지 계약 결혼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불안전 하고 모순된 감정을 자유로 방임 하면서 인격성또는 인격적 결합을 내세우는 이들의 주장은 단순하고 무책임한 개인주의에 불과하다.

 

2. 사회적 차원에서 일부 다처제가 갖는 폐단

일부 다처제는 특히 자본주의 국가에서 상속권과 관련해서 많은 문제를 파생시켰다.  뿐만 아니라 왕정 시대에 있어서 축접 제도는 상속이나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형제간의 유혈극을 빚기도 했다.  성경에서도 축접 제도를 도입함으로서 큰 고통을 겪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람, 야곱, 다윗 그리고 솔로문이다.  이외에 만일 우리 기독교인들이 일부 다처제를 허용하게 되면 창기나 주위의 여자들과 동침하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게 된다.  나아가 자유 연애의 사상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사생아의 문제와 성병의 오염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강간이나 간통의 죄는 성립될 수도 없게 된다.

 

3. 일부 다처제에 대한 성경적 입장

구약 성경의 몇 군데에서 이를 허용하는 듯한 기록들이 있다.  앞서 언급한 아브라함, 야곱, 다윗 그리고 솔로몬 외에 율법에서도 그러한 인상을 준다(참조 신 21:15-17).  그러나 이것은 고대 근동의 결혼 목적이 종종 번식에 있었던 사회적 배경에 기인한 것이지, 결코 그러한 결혼관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한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의 돕는 배필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근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창조 후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2:24)라고 명령하셨으며,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더욱 간경한 어조로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5:31-32)고 말씀하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사실과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심으로써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배우자 이외의 어떠한 사람과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은 간음 행위임을 강조하셨다.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제자들은 결혼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했는데, 이는 결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얼마나 강경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4. 결론

세상의 온갖 부귀와 영화 그리고 향락을 누렸던 전도자가 자신이 행한 그 모든 일을 무익한 것으로 돌리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한 것은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미적 실존(aesthetic existence)이나 윤리적 실존에서 종교적 실존으로 도약한 상태라 할 수 있겠다.  한 남자가 한 여자의 남편이 되는 것이 감독과 집사의 직분에 합당하다면(3:2, 12), 이와 같은 원리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용되어 지켜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세상의 풍조에 밀려 다니면서 세속적인 열락(悅樂)에 빠진 자는 종교적 실존, 즉 신령한 하늘나라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그러므로 전도자의 고백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처와 첩을 많이 두어 쾌락을 누리는 이 모든 것이 무익한 행위임을 깨닫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경건의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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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와 복수

연구자료 2020. 8. 2. 15:46

시편 145편에는 악한 자들이 벌을 받기를 원하는 내용의 복수와 저주의 시들이 있다(참조, 7, 35, 58, 137, 140).  이러한 시들은 이웃(19:17-18)과 원수(23:4-5)를 사랑하라는 율법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우리는 과연 이런 시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성결(聖潔)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조그마한 죄나 악이라도 결코 그냥 넘기는 분이 아니시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닫고 체험하여 바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웬만한 죄나 악에 대해서는 묵인 내지는 합리화시켜 그것을 악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악인의 멸망이 선의 승리라는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악과의 공존이나 타협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의()의 절대적인 승리만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임을 잘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복수와 심판은 하나님께 하시며(참조, 9), 인간들은 단지 공의가 실현되기를 기도할 뿐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께서 악인과 원수들을 징벌해 주시기를 간구했던 것이다(7:8-11, 58:6-9). 

결론적으로 시편 145편에 표현된 저주와 복수의 시들은 의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을 표현한 것으로서 결코 지나치게 잔인하거나 무자비한 시가 아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의로움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있어야 하며 선으로써 악을 이기는 삶을 사도록 힘써야 한다(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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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와 뇌성

연구자료 2020. 7. 26. 15:35

성경에 나타난 번개와 뇌성은 그 경이로움과 놀라움 때문에 신적인 사건을 설명할 때에 많이 인용되었다.  시편 1446절을 보면 번개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징벌하시는 수단으로 타나났다.  본고는 이와 같은 번개와 뇌성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 번개(Lightning)

히브리어로는 번개불을 의미하는 <바자크 / 1:14>번개가 번쩍임이라는 뜻의 <바라크>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144:6, 10:13, 10:6, 9:14).  번개는 하나님의 크고도 놀라우신 영광과 위엄을 상징하며(4:5, 11:19), 그리스도의 갑작스러운 재림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24:27, 17:24).  또한 악인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 번개로 묘사되기도 하였다(9:14, 8:5, 16:8).

 

2. 뇌성(Thunder)

뇌성은 번개(28:26), 우박(9:23), (삼상 12:17) 등 폭풍의 다른 현상들과 함께 사용되었다.  또한 뇌성은 하나님의 크고도 강대하심을 나타내기도 했다(26:14).  뿐만 아니라 여호어ㅏ의 음성도 이러한 뇌성으로 표현되어 그 능력과 위엄을 상징하기도 하였다(29:3-9, 5:22, 5:5, 12:28-29).  또한 뇌성은 번개와 함께 쓰여 하나님의 보좌의 위엄을 나타내기도 했다(4:5).

 

이러한 번개와 뇌성은 고대로부터 인간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자연 현상을 이용하셔서 자신의 신성과 능력을 인간들에게 나타내셨다(8:1, 19:1-2, 1:20).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자연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인간들에게 알기 쉽게 자신의 속성을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의 자상하심을 보여 준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도 하늘 나라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실 때에 자연의 많은 현상들을 인용하셨다(6:26-28, 3:8, 15:1-5).  그러므로 우리들도 자연을 통하여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폭풍우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능력을 깨달으며 미풍(微風)과 따스한 햇살, 맑은 공기 등을 통하여서는 그분의 사랑과 자애로우심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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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특히 구약에 나타난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번영과 행복이라는 뜻이다.  즉 인간의 번영과 행복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며, 행복과 불행은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128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친다(1).  이러한 복이 구약에서는 장수, 많은 자녀, 현숙한 아내, 많은 재산, 주위 사람들의 존경과 신임 등으로 표현되었다(23:35, 28:1-14, 왕상 3:14). 

그러나 신약에서는 복의 개념이 영적인 의미로 승화되어 구원, 믿음 가운데 갖는 기쁨과 평안, 그리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5:3-11, 3:25, 벧전 3:14).  이 같은 차이점이 복의 개념이 이원적(二元的) 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구약 시대 사람들의 비교적 낮은 영적 수준으로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시적(可視的)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였을 것이다.  단지 그 같은 축복의 전제로 여호아를 경외하는 자라는(128:4), 단서를 붙임으로써 신앙과 축복의 연관성을 주지(周知)시켰다. 

오늘날도 이러한 축복관, 즉 올바른 신앙을 가진 자는 물질적인 축복을 누린다는 저차원적이며 어린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악한 세상을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도리어 가난하게 살 경우가 많다(참조, 6:20-21, 벧전 3:14, 4:14).  그러므로 성도들은 물질적인 복보다는 영적인 복을 누리는 데에 더 큰 기쁨을 느끼는 성숙한 신앙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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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단지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역할 외에도 신체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유지시켜 주며 나아가서는 인간의 모든 사람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특히 성경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는 중동 지역은 대부분의 토양이 사막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물이 그들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성경에서 물에 대한 기사가 많이 언급된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물은 그들에게 있어서 식수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고, 또한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는 상징물로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식수로서의 물 : 21:14, 15:27, 20:11, 15:19, 왕상 13:19, 1:12, 9:41.

2) 특수한 용도 : 안수(30:18-20), 성결례)40:7-32), 성결(19:10), 세례(행 행 8:36-39), 성화(5:26).

3) 상징적 의미 : 불안정(49:4), 비겁(7:5), 영적 성장(1:3), 평화(23:2), 괴로움(43), 박해(124:4-5), 음행(9:17), 복음(11:9), 구원(55:1), 성령(47:1-12), 영생(22:17), 그리스도(4:10-15), 거듭남(7:37-38).

이상과 같이 물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육체적 갈증은 물을 마심으로써 해소될 수 있지만 영혼의 갈증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해소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수가 성 여인처럼 예수님께 나아감으로써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 곧 영생의 생명수를 마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4:4: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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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 거룩하심, 신성(神性), 권위, 존엄 등을 밝히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영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여러 단어들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이고 많이 사용된 단어는 <카보드>로서, 그 뜻은 어려운’, ‘존귀함’, ‘무게’, ‘명성, ‘명예’, 등이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여러 신적인 특성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같은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도 존엄하여 누구든지 그분의 얼굴을 본 자는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었다(33:20).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방식은 불(24:16-18), 구름(29:43, 44:4) 등이 있었으며 때로는 심판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참조, 2:10, 19, 21).  즉 심판은 하나님의 존귀와 거룩하심을 탈취하려는 교만하고 악한자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방어이다(참조, 12:23).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의()와도 관련이 있다(참조, 40:4-5, 60:1-3).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이나 인간에게  돌려서는 안되며(42:8), 더우기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4:15).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책임이 있으며(고전 10:31), 그러한 책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만 진정한 기쁨과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96:8).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고 산 몸이므로(고전 6:20, 1:20), 자신의 자랑과 영예를 추구해서는(3:27, 2:28-10), 안 되는 것이다(참조, 벧전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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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58절에 나타난 주께서 아침이 되는 것과 저녁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라는 구절은 창세기 822절의 내용과 관계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후에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의 증거로서 땅에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는 것과 무지개를 제시하였다(9:13).  따라서 시편 65편에서 아침과 저녁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이러한 언약이 계속적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음을 기뻐한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즉 파종과 추수가 가능하고 계절이 순환되며 아침과 저녁이 계속 반복되는 것은 오늘날도 이 언약이 준수되어 오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무심코 보내기 쉬운 하루하루와 계절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과 함께 이 같은 언약을 계속하여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배울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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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수명

창조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로 지속되어 왔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떤 첨단 과학과 의술로도 풀 수 없는 영원한 수수께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러한 의혹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로 주어진 영원한 형벌이므로(6:23), 결코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제한된 수명 밖에 살 수 없는데, 이는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90:10)고 읊은 모세의 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최장수자 므두셀라를 비롯해 몇 백년을 살았던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으며 또한 장수의 비결도 제시되어 있다.

 

2. 성경에 나타난 장수의 비결

성경은 질병을 예방하거나 퇴치시켜서 장수하도록 꾀하는 의학과는 달리 하나님 안에서 합당한 삶을 살 때 그 축복으로서 장수가 주어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30:20), 지혜가 있는 자(3:16), 여호아를 경외하는 자(10:27), 탐욕을 미워하는 자(28:16), 부모를 공경하는 자(20:12) 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장수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3. 기독교인들이 취하여야 할 장수관(長壽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장수하는 것도 물론 커다란 축북임에 틀림없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육체적 생명 뒤에 있을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풀의 꽃’(40:6)과 같은 육체적 생명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장차 누릴 영생에 대한 산 소망(벧전 1:3)을 가지고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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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이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번 나온다.  사자같이 짐승을 잡아 먹는 동물의 이에 대한 언급이 있는가 하면(32:24, 4:10, 58:6, 1:6, 6:8), 노여움을 못이긴 사람이 이를 가는 이야기도 나온다(35:16, 37:12).  또한 이을 잃은 것을 불행한 일로 여기는 히브리인들의 습성에 의거해 모세 오경에는 이는 이로 갚으라는 규례도 나온다(21:24, 24:20, 19:21).  반면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31:29)고 할 수 없는 점을 들어 사람은 자신의 죄값으로 인해서만 하나님을 징벌을 받을 뿐임을 교훈하였다.  또한 아모스에는 장차 임할 기근의 재난이 이가 한가하게 될 것’(4:6)으로 비유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잠언에는 자비심이 없는 사람들이 앞니는 장검(長劍) 같고 어금니는 군도(軍刀) 같은 자로 묘사되었다(30:14). 

한편 성경에 나오는 동물의 이는 직접적이든 상징적이든 주로 찬탈자, 또는 약탈을 일삼는 강대국을 의미하며(39:17, 7:5, 9:7), 드물게는 원수를 의미하기도 한다(57:4).  이 같은 비유는 동물에게 있어서 이란 발톱과 더불어 목표물을 공격하는 강한 무기라는 사실에서 연유한 듯하다.  마지막으로 이와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교훈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일군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맡은 바 모든 일에 충성을 다함으로써 훗날 게으르고 무익한 종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과 같은 비극을 맛보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참조, 24: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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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재난이 닥치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반응한다.  어떤 이들은 불평하고, 어떤 사람들은 원망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수긍하기는 하지만 체념해 버린다.  이외에도 갖가지 모습으로 인간들은 재난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재난은 닥친다.  과연 그럴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본고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다윗과 욥의 태도를 비교하여 보기로 한다.

 

1. 고난 당하는 다윗

시편 38편은 고난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과 도움을 호소하는 다윗의 심정과 신앙이 잘 나타나 있다.  다윗은 먼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재난 당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4).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은 슬픔을 느꼈으며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어 주시기를 간구했다(15).  이러한 다윗의 태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신앙의 자세이다(참조, 3:2).  이미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공의와 자신의 죄에 대한 혐오감 등을 모두 깨닫고 있었으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비를 소원하며 거기에만 소망을 두는 올바른 신앙의 자세를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약간 비약적이긴 하지만 다윗은 고난을 통해서 더욱더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기를 가질 수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2. 재난 가운데서의 욥

욥이 당하는 고난은 이유가 없는 재난이었다.  욥은 자녀와 재산을 한꺼번에 모두 잃고 몸에 악창까지 발병했다.  주위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욥은 졸지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병든 거지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친구들은 하나같이 욥을 거짓말장이로 매도하면서 욥에게 죄를 고백할 것을 강요하였다.  욥은 이러한 처지에 놓인 자신과 이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였다(21:4).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여건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허락된 것이며, 또한 자신이 재난에서 벗어나는 것도 하나님께 달린 것을 인정하여 그분께만 소망을 두고(23:10),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을 인정해 주실 것을 희구(希求)하였다.

 

3. 비교 및 결론

두 사람의 자세는 유사한 점이 많다.  먼저 그들이 재난을 당하자 주위 사람들이 떠나갔다(38:11, 2:9).  그리고 그들은 재난이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구원의 소망을 주께만 두었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욥은 자신의 처지를 원망했지만(참조, 31:30),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더욱 애통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재난에 굴하지 않고 굳건한 소망의 신앙을 지킨 것은 이들의 공통된 훌륭한 점이다.  자신의 결백을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공의로운 판결을 기다렸던 욥에게는 놀라운 축북이 주어졌지만(42:10), 무엇보다 큰 축복은 신앙의 성장이었다(42:5).  마찬가지로 고난을 이겨 낸 다윗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왕상 15:5).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로부터 고난 중에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신앙(4:8)을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어려움이 닥치면 낙심하거나 좌절하기 쉬우며 특히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에 대하여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3:19)을 믿고 주어진 재난에 수긍할 때(비교, 14:14)에 신앙의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참조, 26:1, 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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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토지법

연구자료 2020. 5. 31. 16:59

시편 2513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자손이 땅을 상속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이 같은 상속 관념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땅의 상속’, 즉 토지 재산에 관한 개념은 지금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본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토지 소유의 개념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백성들 전체의 기업으로 간주되었다(15:17, 21:19).  그래서 토지는 영원히 양도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25:23-24), 만일 토지가 팔린다 해도 원래 소유자나 그의 근친(近親)이 그 팔린 토지의 값을 무르면 도로 찾을 수가 있었다(참조, 25:25, 32:6).  또한 팔린 토지라 할지라도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jubilee year)에는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주어야 했다(27:16-24).  이 같은 규례의 근본 사상은 땅은 여호와의 것이며(25:13),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여호와로부터 땅을 분배받았다는 생각에 기인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억지로 타인 소유의 땅을 탈취하려고 하거나(비교 왕상 21:1-3), 이웃의 토지 경계표를 옮기는 일(19:14)은 용납되지 않았다.  이러한 토지 소유의 여러 규칙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팔아버린 토지의 값을 주고 토지의 원래 소유자에게 되돌려 주는 무르는 자’(, 고엘)의 역할이다.  그런데 이 <고엘>이란 말에는 자기의 백성을 구출하시는 여호와(118:35, 50:34)의 모습과 구속자의 임무를 수행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개념도 내포되어 있다(참조, 20:2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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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란 인류의 대표적인 아담이 범죄하여 그 죄의 책임과 더러움이 인간의 혈통을 따라 계속 유전되어 가는 죄를 말한다(5:12).  이 죄는 인간 본성 전체를 부패시켜 인간으로 하여금 조그마한 영적 선이라도 행하지 못하게 한다(2:3).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때때로 선행을 해도 그것은 타락한 본질에서 나오는 불안전한 행위에 불과한다.  고범죄(19:13)는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범하는 죄를 가리킨다.  따라서 원죄는 하나이지만 고범죄는 여러 종류이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모든 죄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항상 고범죄를 범할 우려가 있는데, 그 이유는 성도들도 아직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의식적인 고범죄를 짓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참조 요일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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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에 대하여

연구자료 2020. 5. 16. 17:33

1. 거주지로서의 장막

히브리어 <오헬>의 번역어인 장막(tent)은 유목민들의 임시 거주지로 사용되었던 이동식 가옥으로서(4:20, 25:27, 8:11) 동물의 가죽이나 검은 모직천(주로 염소털로 직조된 천)으로 만들어졌다.  장막의 모형은 원추형을 비롯 난형(卵形), 장방형 등 여러 가지 유형이 있었으며 내부는 중간 버팀목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 쳐진 휘장에 의해 2등분 되었다.  그리고 양분된 장막 중 뒷부분은 통상 여인의 침실로 사용되거나 아니면 가축들을 가두어 두는 축사로 활용되었다.  한편 여러 채의 장막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한 자들이나 족장들은 부인 및 여종들의 장막, 손님 접대용 장막, 가축용 장막 등을 따로 분류해서 사용하기도 했다(31:33).  이와 같이 장막은 비록 임시적인 거주지이긴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몸담아 살았던 삶의 요람이었다.

 

2. 상징적 의미로 사용된 장막  

a. , 거처, 거주지를 나타내는 대명사로 사용됨(참조, 16:9).

b. 하나님께서 지상에 임재하시는 장소의 상징으로 사용됨(25:8, 왕상 8:10-11, 1:4).

c. 바벨론, 예루살렘, 유다 등의 지명에 대한 상징적 비유로 사용됨(13:20, 33:20, 10:20).

d. 육체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됨(고후 5:1, 8:2, 벧후 1:4,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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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욥의 고난

연구자료 2020. 5. 10. 17:43

욥기서는 흔히 왜 선한 사람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가?” 혹은 왜 의인이 고통을 받는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는 책으로 생각되어 왔다.  물론 우리는 욥기서를 통하여 그러한 교훈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고(本稿)는 뚜렷한 이유없이 고난을 받는 평범한 욥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욥기서의 또 다른 교훈, 즉 신앙인들이 고통 가운데 지녀야 하는 자세에 대하여 논하려고 한다.

먼저 욥은 자녀와 재산을 모두 잃었을 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몸에 악창(惡瘡)까지 나자 자신이 태어난 것을 원망하여 생일을 저주하고(3:1,11), 하나님을 원망하였다(21:4, 23:2).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인정받은 자였으나(1:8), 재난을 당하자 불평과 원망을 토로(吐露)하였다.  결코 그는 타고난 의인이 아닌 평범한 신앙인에게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의 뛰어난 점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7:12), 하나님과 관계를 통하여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 했던 점이다.  즉 그는 세상의 모든 만물과 현상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으며(9:4, 10, 15), 인간들이 볼 때엔 불합리한 점이 있더라도 거기엔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인간의 죄값으로 고통과 재난이 임한다는 욥의 친구들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주장이 욥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욥은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친구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는 약한 일면을 보이기도 하였다(7:21, 13:23, 23:28).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하면서(10:2-22), 자신의 호소가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12:5, 30:34).  이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욥의 교만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중심이 하나님을 떠난 적이 결코 없었다는 욥의 솔직한 고백을 볼 수 있다.  아무튼 그는 고통 중에서도 감각을 못 느끼는 인형이 아니라 때로는 호소하고 때로는 원망과 불평(9:17)을 늘어놓으며 그러다가도 하나님께 간구하는 지극히 평범한 의인이었다.   

한편 욥기서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지 불의(不義)라고는 말하지 않았다(1:22).  물론 그의 고통을 고려해 보더라도 욥의 원망은 충분히 납특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욥은 재난을 당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욕하거나 저주하지는 않았으니(31:30), 이것이 고통 가운데 그의 기쁨이 되었다(6:10).  따라서 우리는 욥을 결코 완전한 사람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면서 현실의 고통을 이겨가는 평범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  오늘날의 신앙인에게주는 욥기서의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수고와 고통을 감내하는 성도가 곧 의인이다.  욥은 고통을 이겨낸 후에 갑절의 축복을 받았다(42:10).  많은 재산, 여러 자녀, 주위의 위로와 인정 등 이 모든 것들이 축복이었지만(42:10-14), 무엇보다도 가장 큰 축복은 그의 신앙이었다.  왜냐하면 시험을 거친 욥의 신앙은 더욱 폭이 넓고 깊이가 깊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욥이 시험을 통하여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신뢰를 두텁게 했으며 신앙이 더욱 성장했듯이 오늘날의 성도들도 연단을 통하여 강해지고 보다 성장하게 된다.  생활을 하다보면 성도들도 고통을 당할 때도 있고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원수같이 되어’(2:5) 보일 때가 있다.  그때에 우리는 그러한 고통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욥의 친구들은 재난의 원인이 인간 편에서 찾았으나 욥은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고통에 이유와 그 해결책을 하나님 편에서 찾았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사고(思考)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욥은 바로 그러한 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과 위로, 축복을 받았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기때문(1:11)에 인간들에게 자신의 목적이 명백히 전달되지 않더라도 굳이 이에 대하여 자신의 뜻을 밝히실 필요가 없으시다.  그리고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그분의 길이 우리의 길과 다르다는 것(55:8)을 인정하고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끝내는 그것이 선을 이루게 된다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8:18).  욥은 자기에게 닥친 재앙이 끝나고 나면 자신이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23:10).  따라서 우리도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 고통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거나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고통을 통하여 성숙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결국 욥기서는 선한 사람에게 생기는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이유없는 고통 가운데에서 성도들이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를 제시하는 책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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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Nehemiah)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불쌍히 여기심이다.  그는 유대의 명문 출신으로 하가랴의 아들이다(1:1).  그의 형제 중 한 사람은 수사(Susa)에 간 공식 사절단의 한 사람이었는데(1:2), 훗날 그는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되었다(7:2).  느헤미야와 그 부친의 이름에 하나님을 가리키는 ’(jah)라는 말이 들어 있음을 보아 그의 가족들이 유대의 정통 신앙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의 팔레스틴 침공시 포로로 잡혔다가 페르시아 치세하에서 아닥사스다 1(Artaxerxes) I, B. C. 464-423)의 술 맡은 관원으로 일하였다(1:11).  이처럼 페르시아의 관원으로 있던 그는 앞에서 밝힌 사절단의 일원으로 수사에 온 그의 형제로부터 팔레스틴에 있는 동족들의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1:3).  참담한 소식을 전해드린 그는 너무나도 슬퍼서 울며 금식하는 가운데 동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무엇인가를 하기 위하여 팔레스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일단 그러한 결심을 한 그는 지체하지 아니하고 왕께 자기의 간곡한 소원을 아뢰었으며 허락을 받았다(2:5-10).  이러한 느헤미야의 태도에서 우리는 가식이 없는 동족애와 애국심을 읽을 수 있다. 

한편 B. C. 444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먼저 페허가 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주력하였다(3).  성벽의 재건은 적의 침입을 막고 그곳에 사람들을 다시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기는 하나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이러한 성벽 재건 작업은 에스라가 주도한 이스라엘 부흥 운동(3)의 한 부분이었다.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는 중에서도 성벽이 완공되자(6:15),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죄악상을 통렬히 비판하고 그들간에 만연해 있는 악습을 척결하기 시작하였다(13).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유대 백성과 하나님 간의 관계를 회복시켰는데, 이 길만이 진정 조국(祖國)을 살릴 수 있는 길이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비록 조국의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독립 운동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여 조국과 동족을 사랑하며 애쓴 애국자 느헤미야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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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연단하시기 위하여(8:5, 119:67), 죄를 회개하도록 만드시기 위해서(1:20), 그리고 더 큰 축복을 하시기 위해서 고난(고통)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신다.  구약 욥기 전체를 통해 볼 때도 욥은 의인이면서 고난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참조, 24:18, 고전 4:11, 고후 6:5, 11:23, 12:7, 살전 3:3).  그러나 그는 이 고난을 통하여 갑절이나 되는 재물의 축복과 자녀의 축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42:12-17), 더욱더 심오한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다(23:10).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믿음의 고난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고 했으며(벧전 1:7), 그 고난당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고했다(벧전 4:12).  왜냐하면 우리에게 오는 그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증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3:12).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닥쳐오는 고난을 두려워 하여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기쁨으로 맞이해야 한다.  고난이 축복의 한 방편임을 아는 성도는 원숙한 신앙을 소유한 자이며 이들은 범사(凡事)에 감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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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있어서 은 단지 육체적인 수면 상태를 가리키는 원래적 의미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다른 의미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용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육체적인 수면 상태: 2:21-22, 28:16, 삼상 28:16, 3:5, 4:8, 127:2, 3:24, 6:22, 렘  31:26,                20:9.

2. 게으름을 상징함: 6:4, 10:15, 20:13, 23:21.

3. 영적 태만 상태: 56:10, 13:36, 13:11, 5:14, 살전 5:6.

4. 육체적인 죽음을 상징함: 삼하 7:12, 왕상 2:10, 11:43, 22:10, 대하 21:1, 14:12, 13:3, 9:24,           7:60, 고전 15:51.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우리들은 피로 회복을 위한 육체적인 수면도 소홀히 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장차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항상 영적으로 각성해야함을 깨달을 수 있다(참조, 26:19, 51:17, 52:1, 고전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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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합이란 바다 괴물’(sea monster) 또는 용을 가리키는 말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대 세력을 의미한다.  이 말은 자만하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라합>이나 휘젓다’, ‘책동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카드어<라아부>에서 유래된 듯하다.  이 라합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만 나오는데, 그것도 만물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귀절과 관련해서만 나타난다.  즉 하나님께서 힘으로 대결하여 라합을 이기셨다는 것이다(26:12, 9:13, 89:10, 51:9).  이러한 귀절들은 모두 바다를 제어(制御)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관련이 있으며 대적할 자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나타내 준다.  그런데 이 중 이사야 519절에 나오는 라합이라는 말은 이어 나오는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51:10)라는 말을 통하여 애굽을 가리키는 시적(詩的), 은유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당시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 군대의 추격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신 사건을 지적하는 것이다(참조 출 14). 

한편 히브리어 단어로 <탄틴>으로 불리는 은 대체적으로 사탄을 의미하는데(12:13, 16, 20), ‘’(serpent)이라고도 일컬어진다(20:2).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리워야단(Leviathan), 히브리어로 <리웨야탄>이라 불리우는 짐승도 등장하는데, 개역 성경에서는 리워야단’ ‘꼬불꼬불한 뱀’(27:1), ‘악어’((3:8, 41:1, 74:14, 104:26)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리워야단과 용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권능에 굴복당하고 마는 것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참조 사 27:1, 20:1-10) ‘라합’, ‘’, ‘리워야단은 실재적인 짐승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을 의미하는 여러 상징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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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보존하시는 섭리에 대해 언급된 구절들이 욥기에 가끔 나온다(1:10, 36:7).  보존은 만물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역인데, 세상은 만물을 존재케 하시고 활동케 하시는 신적 권능의 계속적인 행사를 통하여 유지된다(9:6, 136:25, 145:15, 17:28, 1:7, 1:3).  비록 세상이 죄로 오염되어 자멸해 버릴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존하시기 위해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셔서 적극적이며 계속적인 활동을 하고 계신다.  이러한 보존의 섭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큰 힘이 된다.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결국 선()을 지향(指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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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부(富)

연구자료 2020. 3. 14. 16:59

1. 구약에서의 부()

구약에서 나타난 부는 곧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아브라함(13:2, 14:23)과 솔로몬(왕상 3:13) 등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증거로 많은 부를 누렸다.  또한 신명기 281-14절에서는 언약을 지킨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물질적인 풍성함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시대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해되어야 한다.  즉 당시에는 영적 축복이 물질적인 풍요로 표현되었다.  아브라함은 물질적인 축복을 약속 받기 이전에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영적인 축복을 받았다(12:2).  또한 솔로몬이 의로운 통치를 위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흡족히 여기신 나머지 물질적인 부를 부수적으로 허락하신 것이다(왕상 3:11-13).  그리고 신명기 281-14절의 축복도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적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표현이지 부 그 자체의 축복이 아닌 것이다. 

 

2. 그리스도와 부()

그리스도께서는 부를 얻는 방법보다는 재물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더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얻는 길을 배우러 왔던 부자 청년도 재물을 나누어 주라는 말씀을 듣고는 예수님을 떠나갔다(19:21-24).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참조, 욥기 41:11, 24:1), 물질적인 축복을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선한 사업을 할 것을 강조하셨다(12:33-34).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물질도 역시 하나님을 위하여 쓰여질 것(12:41-44)과 속임수와 불의를 통하여 부를 누리기 보다는 깨끗한 양심으로 가난하게 살 것을 요구하셨다(참조, 5:3, 12:15).

 

3. 결론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의 궁극적인 소유주이시며 인간들에게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셨다(8:18).  따라서 인간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정직하게 노력하여 얻은 재물은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단지 재물만을 추구하는 마음가짐과 재물을 너무 귀하게 여긴 나머지 그것을 숭배하는 자세가 재물에 관한 죄악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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