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창조주시며 인간은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욥은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측량하겠느냐’(11:7)라고 하며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 하려는 인간 능력에 대하여 신랄하게 거부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은폐(隱蔽)하셨던 베일을 벗으시고 자신을 드러냈다.  즉 하나님께서는 여러 방법으로 인간에게 자신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셔서 이것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예배하며 그분과 교통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계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자연 계시(自然啓示)와 초자연 계시(超自然啓示)인데, 여기서는 자연 계시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계시의 양식과 대상에 따라 자연 계시외 일반 계시를 구분지으려고 하지만, 여기서는 거의 비슷한 것으로 여겨 같이 취급하려 한다.  자연 계시는 인간의 의식과 자연 현상을 통하여 전달된 계시로서 말씀에서 주어진 계시가 아니라 수많은 자연 현상을 통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 계시를 말한다.  물론 자연 계시도 하나님께로 온 순수한 계시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의 세상은 창조주를 반영하여 부분적이나마 창조주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자연 현상을 통하여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배울 수 있으며(36:27-32, 1:20), 또한 그분의 능력을 우러러 보고 찬송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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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의로우심을 표현하기 위해 욥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대하여 언급했다(9:5-11).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존재하심을 (a) 불과 연기의 구름(3:2, 33:9-11, 78:14, 99:7) 속에서와 (b) 세미한 음성(왕상 19:12) 속에서 나타내 보여 주셨는데,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증거인 것이다.  특히 구약에서는 삼위(三位) 가운데 제2위 되신 여호와의 사자의 현현이 두드러진다(16:13, 31:11, 23:2-23, 3:1).  이와 같은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들 가운데 인격적으로 임하셨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에서 최절정을 이루었다(1:14, 18).  본질적으로 인간과 구별되신 하나님께서 인간들 가운데 임재하신 것은 자신을 인간의 위치로 비하(卑下) 시킨 것으로서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이 드러나 있다(참조 요 1:1-3,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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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은 히브리어에서 유래된 말로 대적자’, ‘방해자’, ‘고소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이 같은 사탄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가 하는 활동은 어떠한 것인가?  혹자는 사탄의 존재 여부에 대하여서도 의문를 갖는데 과연 사탄은 존재하는가?  본고(本稿)는 이러한 의문점에 대하여 신구약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1. 사탄의 존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귀’, ‘악마’, ‘귀신등으로 부르고 있는 사탄은 과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가?  이에 대한 답을 우리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천국 복음 확장 사역을 방해하는 훼방자로 사탄이 있음을 주지하셨으며(13:39), 이러한 사탄도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은 자들 앞에선는 굴복당하고 만다는 사실을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10:18-19).  이뿐 아니라 욥기에서도 욥을 시험하는 사탄의 활동상(1)이 기록되어 있으며, 많은 신구약 성경의 저자들이 사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니(대상 21:1, 3:1-2, 4:1-11, 13:16, 고후 2:11, 12:9, 20:2), 사탄의 존재는 부인될 수 없다 하겠다.

 

2.  사탄의 대한 제 고찰(諸考察)

a. 사탄의 명칭 : 사탄에게 붙여진 명칭은 여러 가지인데 그 중에는 상징적인 것도 있으며 그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도 있다.  신구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명칭들로는 다움과 같은 것들이 있다.  바알세불(12:24), 벨리알(고후 6:15), 아불루온(9:11/일명 아바돈), 계명성(14:12 / 일명 루시퍼), 공중권세를 잡은 자( 2:2), 온 천하를 꾀하는 자(12:9), 형제를 참소하는 자(12:10), 시험하는 자(살전 3:5), 악한 자(13:19), 살인한 자(8:44), 거짓의 아비(8:44/일명 거짓말장이), 이 세상 임금(12:31), 이 세상 신(고후 4:4), 원수(13:28) 등이 그것이다.

b. 사탄의 기원 : 사탄은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천사였다(28:14).  그는 천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영적 존재였다.  그런데 그는 지고(至高)하신 하나님과 동등시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품음으로써(14:13-14),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말았다(14:12-15).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대자로 화하여 세상 사람들을 미혹케 하며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미혹케 하려고 하는 악한 존재가 된 것이다(24:24). 

c. 사탄의 활동 : 사탄은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존재이므로 하나님처럼 전지 전능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영적인 존재이다(1:13-19).  이러한 능력을 지닌 그는 감히 그리스도를 시험하려 하기까지 하였다(4:1-11).  그는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게 하며(고후 4:4), 인간을 이용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한다(13:2).  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의 연약성을 이용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며(고전 7:5),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시켜 성도들을 미혹케 한다(고후 11:14-15).  그리고 이러한 그의 활동이 여의치 않으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성도들을 박해 하기까지 한다(16:33, 13:15-17).   이처럼 사탄의 활동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어그러뜨리며 그분을 대적하는 것에 초점이 맞혀져 있다.

d. 사탄의 운명 : 이러한 사탄도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이미 사탄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하셨다(3:14-15).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의 시험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사탄은 그리스도께 굴복했으며(4:1-12),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은 결정적인 참패를 당하였다(19:30).  이처럼 이미 심판을 받은 사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사용하여 참성도와 거짓 성도를 구분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 종말시까지 그의 활동을 허용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는 천년동안 옥에 갇히게 되며(20:1-3), 그 후 잠시 놓임을 받았다가 최후에는 그의 추종 세력들과 함께 불못에 던지워져 영원토록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20:10). 

 

3. 성도들과 사탄

비록 사탄이 공중의 권세잡은 자(2:2)로서 이 세상 임금 노릇을 하지만(12:31), 그것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한도내에서일 뿐이다(1:12, 2:10).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는 약속을 주시었다(16:20).  그러므로 사탄이 하나님을 제치고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사탄은 스스로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시킬 정도로 간교하며 틈만 있으며 성도들을 삼키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돌아다닌다(벧전 5:8).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근신하며 깨어 있어 악에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이기셨듯이 성도들도 승리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할 것이다(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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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

연구자료 2020. 2. 16. 15:52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에 대한 고찰에서 먼저 전제되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영(Spirit)’이시라는 점이다(4:24).  이 말은 그분의 본질을 정확하게 묘사한 말로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형상을 지니고 계시지 않으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성경 여러 곳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나 있다(12:8, 4:16, 17:15).  따라서 본고는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자기의 형상(image)을 따라 자기의 모양(likeness)대로 지으셨다(1:26-27).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첼>인데 그림자를 뜻하며, ‘모양이라는 말은 <데무트>으로서 닮은 것을 가리킨다.  인간이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가시적인 형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의 속성인 의() 진리와 거룩함을 받았으며( 4:24), 인간의 영적, 도덕적 본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동질, 동등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23:19, 삼상 15:29).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그분의 여러 속성들을 나타내는 표현임을 있다( 3:10). 

한편 다른 측면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자기계시(自己啓示) 관계된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종종 인간의 모습을 띠시고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 18:1-15, 5:13-15).  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영이신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감각적인 이해를 위하여 친히 가시적(可視的) 육체적 형상을 취하시고 인간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신약 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볼 있다( 1:15, 1:3).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독생자로서의 영광을 보며( 1:14),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12:45, 14:9).  이는 인간이 복음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원래 모습으로 회복되는 (고후 3:17) 의미한다( 4:22-24, 3:10).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형상이란 결국 영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며, 인간과 하나님의 형상과의 관계는 계시와 회복의 관계임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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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는 히브리인들의 일상생활 및 종교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순수한 자연수를 구하기 어려웠던 히브리인들은 식사 때나 연회(宴會) 때에 포도주를 음료수로 사용하였으며(14:18, 2:1-9), 하나님께 전제(奠祭)를 드릴 때엔 제물로 삼기도 하였다(29:40), 23:13).  그런 반면에 성경에는 포도주를 과다 섭취할 때에 따르는 폐단에 대하여 엄히 경고하고 있는 귀절들도 많이 나온다(28:7, 20:1, 23:20-21).  그러면 이러한 포도주로서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과연 몇 종류나 될까?  이에 대하여 히브리어를 따라 분류될 수 있는 포도주의 종류를 살펴보자. 

(1) 야인 : 이 히브리어는 발효된 포도즙을 가리키는 상용어로서 성경에 140여 회나 나온다(9:21, 10:9, 28:7, 22:13, 56:12, 60:3, 1:5).  일반적으로 RSVKJV에서는 이 단어가 포도주’(wine)로 번역되어 있다.  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헬라어는 <오이노스>이다(1:15). 

(2) 티로쉬 : 이것은 묵히지 않은 비교적 신선한 포도즙(grape juice)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개혁 성경은 이 단어를 보통 포도주로 번역하고 있기는 하지만(27:28, 7:13, 62:8), 때로는 새 포도주’(13:5, 4:7, 4:11, 1:10)새 포도즙’(24:7, 3:10)으로 번역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를 사용한 성경 귀절들은 대개 이 새 포도주를 무절제하게 마시면 그것이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고 경고하고 있다.     

(3) 헤멜 : 이 단어는 발효시키다’(to ferment)라는 뜻을 지닌 어근(語根)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것은 포도주를 의미하는 일종의 시적(詩的) 용어인데, 신명기 3214절에는 포도즙의 붉은 술로 번역되어 있다. 

(4) 야시스 : 이 단어도 새 포도주를 뜻하는 시적 용어로서<티로쉬>와 동의어이다(1:5, 3:18, 9:13).  그러나 이 단어는 짓부수다’(to crush), ‘압착하다’(to press)라는 뜻의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5) 샤칼 : 이 단어는 보통 독주’(hard/strong liquor)로 번역 되었는데(삼상 1:15, 28:7, 5:11, 20:1, 2:11), ‘취하다’, ‘취하게 되다라는 어근에서 나온 말이다.  이 단어는 처음에는 포도주를 포함한(28:7, 14), 모든 과실주나 곡주를 의미하였으나 후에는 포도주를 제외한 취하게 하는 술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모세의 율법에는 제사장들이나 나실인들이 이 독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10:9,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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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amusements)은 복잡하고 따분한 생활에서 벗어나 기분전환을 하기 위한 활동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에 대한 이전의 기독교의 입장은 약간 청교도적인 색채가 있어서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더라도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한 예로 음악만 들더라도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과 같은 클래식(classic)은 좋은 것이며, 비틀즈(Beatles) 따위의 팝송(popular song)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왜곡(歪曲)된 사고는 결국 그리스도인의 취미 생활과 오락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까지 발전했던 것이다.  물론 잔인하고, 음란하고 폭력 적인 것을 내포하는 취미나 오락은 멀리해야 한다.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오락 문제는 그 취미의 대상이 악한 본능을 자극하여 죄로 유도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혼이 주 안에서 안식을 얻듯이 육신 역시 건전한 오락을 통해 피로를 푸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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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Zion)

연구자료 2020. 1. 21. 17:43

시온의 뜻은 요새또는 성채이다.  시온은 본래 기드론(Kidron)과 두로베온(Tyropoeon) 두 골짜기 사이에 솟은 절벽으로 된 봉우리였다.  그런데 이것이 후대에는 예루살렘 동남쪽에 위치한 다윗 성을 의미하게 되었으며(왕상 8:1, 대하 5:2) 보다 후대에 이르러선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1:8, 26-27, 10:24).  그 뿐 아니라 이 용어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幽囚)와 관계하여 예루살렘 성의 거민이나 전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51:35, 1:17).  한편 시온은 성경상에서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주요 단어이기도 하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셔서 원수를 정복토록 할 시대를 예기하였다(110:2).  그는 구원이 시온에서부터 나오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번영과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실 그날을 위하여 기도하였다(14:7).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한 돌 곧 시험하는 돌을 시온에 두어 인간 구원의 기초로 삼으실 것을 예언하였다(28:6).  이러한 시온은 하나님께서 좌정하셔서 영원토록 자기 백성을 다스리실 터전으로도 묘사되어 있는데(33:20),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관련하여 시온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비유하고 있기도 하다(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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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인간 구원의 종교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어디까지 개인구원을 의미하는 것이지 사회 개혁 측면에서  오늘날의 진보주의 신학자들이 주창하는 것과 같은 사회구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복음의 진리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시인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순전히 인간 개인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사회 구원이라는 측면에서는 그 어떠한 활동도 할 수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 땅에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구하고 있기 때문이다(6:10).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섭리와 역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사역에 주의 자녀들을 부르셔서 자신의 일군으로 삼으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8:19-20)는 하나님의 명령에 성실히 준행해야 한다.  둘째, 진리가 왜곡되는 암담한 사회에선 공의를 부르짖음으로써(5:14-15),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5:13-16).  바로 이러한 우리의 활동이 곧 개인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사회구원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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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성경에서 오른손또는 오른편은 특별한 의미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오른손은 능력과 힘의 상징이자(45:4), 축복을 가져오는 특별한 기능의 상징이다(21:22, 1:16-17).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하나님의 오른손’(20:6, 44:3, 60:5)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41:10, 15:6).  하나님께서 그의 오른손으로 우주를 창조하셨으며(48:13), 자기 백성들을 원수로부터 구원해 내셨다(17:7).  한편 오른편이란 단어 역시 오른손과 마찬가지로 힘을 상징한다(30:12).  게다가 오른편은 존귀와 영광, 그리고 위엄을 상징하기도 한다(왕상 2:19).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분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26:64, 2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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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선이 가장 잘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는 로마법에는 시민들이 부당한 처벌을 당하지 않도록 법적으로 보호하는 장치가 제도와 되어 있었다.  즉 로마법에는 항소권에 대한 법령이 발달되어 있었는데, 로마인이면 로마시 경계 밖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일지라도 언제나 항소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생명과 관계된 문제이거나 중요도가 높은 문제일 경우에는 로마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이 재판은 황제가 직접 심리(審理)하거나 아니면 원로원 또는 칙명 재판소가 심리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인들간에서는 로마인이면 가이사에게 호소하라는 말이 유행하여 속담으로 굳어지게 되기도 하였다.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바울이 총독 벨릭스의 심문을 받는 장면이 언급되어 있는데, 바로 이 같은 것이 이에 속하는 경우이다.  한편 바울이 항소를 신청한 것은 단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25:10, 21).  이는 그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권리였다(22: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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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워야단’ (, 리웨야탄)맞붙이다’, ‘연합하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에서 파생된 괴물 이름이다.  이 이름은 원래 우가릿(Ugarit) 문헌에 나오는 로탄’(Lotan), 즉 바알(Baal)에게 죽임을 당한 바다 괴물과 같은 말이다.  그 문헌에 의하면 이 리워야단은 일곱 개의 머리를 가졌으며, 그 몸의 형태가 꼬불꼬불한 뱀과 같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개역성경에는 리워야단이 꼬불꼬불한 뱀으로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27:1).  그러나 욥기 38, 411, 시편 7414, 10426절에는 이 단어가 악어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고대 문헌에 나오는 리워야단은 오늘날에도 그 존재 여부가 밝혀지지 않은 채 신화적 영물(靈物)로만 받아들여지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리워야단이라는 말이 통일성 있게 다루어져 있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인데, 성경에서는 이 말이 단지 시적, 상징적인  의미로만 쓰여지고 있다. 

고대 가나안인들의 신화에는 리워야단이 무질서와 혼돈을 상징하는 바다 괴물 로탄의 변형체로 나타나는데, 결국은 질서의 신들에게 정복 당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성경 기사가 곧 시편 7414절인데, 거기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악어의 머리를 깨뜨려 부수는 자로 나와 있다.  이 기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시에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던 그 크신 능력(7-12, 14)을 증거하고 있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리고 시편 10426-27절에는 리워야단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그분의 뜻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동물로서 묘사되어 있다.

한편 이사야 271절에는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종말론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 중 일부분이다.  여기서 뱀과 용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사탄의 세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보다 좁은 의미에 있어서 용은 애굽을, 뱀은 앗수르와 바벨론을 상징하는바, 이들은 모두 틈만 있으면 이스라엘을 집어 삼키려 한 적대 세력이다.  마지막으로 욥기 38절에는 리워야단을 격동시켜 세상의 질서를 혼돈케 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 같은 존재는 사탄을, 리워야단은 그에게 속한 악의 세력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리워야단이나 용과 같은 존재 외에도 성경에는 라합’(Rahab)이라는 존재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 역시 바다 괴물로서 하나님과 맞서는 악의 세력을 의미한다(51:9, 26:12).  그러므로 우리는 리워야단, , 라합은 실존하는 짐승이 아니라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성경상의 개념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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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하나님이 마치 인간의 모습처럼 묘사된 곳이 많다.  이러한 묘사는 아주 자세하여 하나님이 때때로 화를 내시고(34:2), 질투하시며(34:14), 후회도 하시는(삼상 15:11) 분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육신을 지닌 것처럼 하나님의 발(24:10), 여호와의 손(62:3), 여호와의 얼굴(6:25) 등의 표현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여러 모습을 인간의 형상이나 감정 상태로 묘사한 것을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性同形論)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개념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면서 그 타당성과 의미를 알아보기로 하자.

 

1. 문제점

하나님의 행동을 인간의 모습이나 감정 상태로 표현했을 경우에 일어나게 될 오해는 당연하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이라고 했는데(1:17, 6:17), 자신이 이미 결정한 일에 대하여 왜 후회하고(삼상 15:11), 근심하여 한탄하시는가?(6:6-7).  또 '하나님은 영'(God Is Spirit)이라고 했는데(4:24), 어떻게 손과 발이 있으며 거니실 수 있는가(3:8)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다.  더우기 성경은 하나님을 신체적인 모습으로 묘사하면서도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40:18)고 말하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율 배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2. 의미

우리는 이상과 같은 문제점들에 집착하여 성경에 모순이 있다고 단정짓기 전에 성경의 성격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주어진 책이라는 점이다(딤후 3:15-17).  따라서 죄를 짓고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활동과 의도를 인간 편에서 인간들의 용어로써 표현하셨으며, 바로 그 길 만이 비록 타락하기는 했어도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들을 이해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은 영이라고 선언하시면서 자신의 활동을 신적인 용어(물론 그 용어 자체가 인간적인 수단의 하나이기는 하지만)로만 나열하신다면 그것이 인간과 어떤 연관이 있겠는가?  결국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산물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해야 하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존엄성으 훼손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히 성경 내에서 사용되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감사의 내용인 것이다.

 

3. 결론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후회하시고’, ‘근심하며’, ‘한탄하셨다는 등의 표현은 인간의 이해 수준에 입각한 하나님의 심정 묘사이다.  즉 이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자상하신 배려로서 이러한 표현이 인간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또한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은, 이 표현이 갖는 타당성과 아울러 그 효과를 인정하신 것과 다름 없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을 쓰실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하여 개탄을 금치 못하는 동시에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시면서까지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시며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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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 서신은 전통적 유대주의 사상에 빠져 있던 교사들로 말미암아 갈라디아 교회 내에 전파된 유대주의의 모순에 대항하여 기독교적 입장을 표명한 일종의 신앙 변증서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기독교와 유대교 간에는 어떠한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는지에 관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1. 기독교와 유대교 간의 연속성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유대교와 본질적인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유대인들이 조상 적부터 섬겨 왔던 창조주 하나님을 기독교인들도 믿고 섬긴다는 점이다.  그리고 유대교의 주요 경전 곧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모세오경)을 오늘날의 기독교인들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딤후 3:16)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선 구약 성경에 예언되었던 오실 메시야이셨으며, 육적(肉的)으로 유대인의 혈통을 좇아 세상에 오셨다는 점에서도 기독교와 유대교는 끊을 수 없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예수님의 명령을 좇아 세계 도처에 돌아다니며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던 초대 교회 사역자들이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다는 점도 기독교와 유대교 간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2. 기독교와 유대교 간의 불연속성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유대교 간에는 현격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그러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에 있어서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리고서 아직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18:15, 9:6-7, 11:1-10)를 대망(待望)하고 있다.  사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던 1차적인 목적은 자기 동족을 구원하려는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10:1-6, 15:21-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끝내는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기까지 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의 이러한 태도는 자연히 율법 준수 문제에 있어서조차 기독교와 유대교 간의 불연속성을 낳게 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기독교인들은 이제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예수의 대속 사역을 믿고 그 의를 힘입음으로써이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님을 주장한다(3:10-14, 3:19-22).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율법 준수의 도덕적인 측면, 즉 사랑의 정신에 입각한 율법 준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갈라디아 교회 내의 유대주의 교사들처럼 이방인들까지도 육체적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절대적인 율법 준수 강요(5:11-12)에 대하여선 이의를 제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이다.  왜냐하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5:4)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의 연약성을 친히 담당하시고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는데 다시금 율법 아래 매인다는 것은 곧 그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와 유대교 간에는 불연속성이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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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같으신 신()이 오직 한 분 뿐이시라는 사실은 신구약 성경에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 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릴 적부터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4-5)는 가르침을 받는다.   이 점은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 8:4)고 말하며,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딤전 6:15)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하나님 밖에는 하나님과 같으신 분이 없음을 가리켜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단수성’(singularity)이라 정의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단수성과 관련하여 생각하여야 할 점이 한 가지 있으니 곧 하나님의 단순성’(simplicity)이다.  여기서 뜻하는 단순성이란 하나님은 합성적(合成的)이거나 복합적(複合的)인 존재가 아니라 곧 불가분적(不可分的)존재하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면 이 같은 개념은 삼위일체(trinity) 교리와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단순성 개념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뜻할 뿐이지, 하나님의 삼위(三位)를 부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얘기할 때, 우리는 그분의 단수성과 단순성을 동시에 생각하는데, 이 두 개념을 하나로 묶어 하나님의 유일성’(唯一性)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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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 있어서 대부분의 인물사들이 그러하듯이 성경에 언급된 인물들 역시 가부장적인 전통에 따른 이스라엘의 인물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여인들은 남성들의 그늘에 가려 아주 미미한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편견과 불평등 가운데서도 에스더를 비롯한 몇몇의 여성들은 결코 어느 남성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사역을 담당함으로써 성경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인들 중에서 여성으로서의 제반 약점을 극복하고 오직 믿음으로서 자신의 삶을 승리로 장식한 몇 명의 여인을 선정하여 그들의 신앙적 결단력과 용기, 그리고 생애와 업적에 대해 간단히 고찰해 보려고 한다.

 

1. 신앙의 여인 룻

한갖 이방 모압의 여인에 지나지 않았던 룻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기까지에는 국경을 초월한 그녀의 효성과 사랑,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신앙심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남편과 시아버지를 잃은 후 혼자 남게 된 시모 나오미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조국과 동족을 섬기는 그모스 신을 버리고 시모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할 만큼 신앙적 결단력과 용기를 보여 주었다.

한편 그 당시의 상황과 그녀의 입장을 고려해 볼 때 이방인, 더구나 나약한 여인의 몸으로서 그런 결단을 했다는 것은 룻의 행위가 전적으로 자기 희생적인 사랑과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잘 나타내 준다.

이러한 그녀의 헌신적인 신앙과 삶을 통해 결국 룻은 이방 여인으로서 상상할 수도 없었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다.  즉 그녀는 보아스와 결혼하여 오벳을 낳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며(4:17-22, 1:5-16), 나아가서는 룻기의 주인공이 되는 명예를 누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룻은 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여성도들의 귀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유 부단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에게도 신앙의 결단을 통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모범을 보였다.

 

2. 죽음을 초월한 여인 에스더

룻이 이방 여인으로서 유대 남자와 결혼했던 반면 에스더는 유대 여인으로서 이방 남자인 바사의 아하수에로 왕과 결혼한 여이었었다.  그녀는 원래 베냐민 지파에 속한 아비하일의 딸로 태어났으나 어릴 때 고아가 되어 그녀의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의 양녀로 입적되었다.  그 당시 바사의 수도 수산 성의 한 관리였던 모르드개는 후일 그녀가 왕비로 추천될 수 있도록 중개 역할을 했다.

이러한 경위로 바사의 왕비가 된 에스더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려는 하만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먼저 3일간 금식 기도를 드린 후 죽으면 죽으리이다’(4:16)라는 단호한 각오로서 왕 앞에 탄원을 올렸다.  이처럼 자신의 동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에스더의 신앙적 결단과 용기로 인해 결국 유대인들은 하만의 흉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오히려 살인극을 획책한 하만은 자신이 준비해 놓은 사형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 사건이 있었던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갖게 되었는데, 바로 이날이 부림절의 기원이 되었다(( 9:26).  이런 에스더의 행적을 통해 우리들은 자신의 목숨까지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신앙적 용기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9)는 역설적 진리를 배울 수 있다.

 

3. 복음사역의 일군 브리스길라

일명 브리스가’(딤후 4:19)라고도 불리우는 브리스길라는 룻이나 에스더와 같이 성경에서 두드러지게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신약시대에 사도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로서 복음사역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한 여인이었다.  한편 그녀는 남편 아굴라와 함께 소개 되고 있으나 항상 남편보다 그녀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어질 만큼 어느 남성 못지 않게 훌륭한 신앙과 업적을 보였다(16:3, 딤후 4:19, 고전 16:19).  그녀는 당시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방랑자 생활을 하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 바울을 극진히 섬겼으며, 심지어는 바울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할 만큼 헌신적인 자세와 용기를 가졌다(16:4).  이와 같이 브리스길라는 비록 화려한 영예는 누리지 못했지만, 그녀의 신앙심과 복음사역을 위한 열정은 오늘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겸손한 평신도들, 특히 여성도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된다.

 

4. 믿음으로 승리하는 생활

이상과 같이 3명의 여인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들은 모두 귀족이나 특권층 출신이 아니라 모두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자들로서 오직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으로 자신의 난관을 극복했던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들이다.  특히 이들은 나약한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적 용기와 결단력은 어느 남성에 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모든 여성들도 결코 사회적 편견이나 자신의 나약함에 굴복하지 말고 이러한 여인들의 믿음을 본받아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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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성경 KJV를 따라 개역 성경에도 수산’(Shushan)으로 번역되어 있는 수사’(Susa)는 본래 엘람(Elam) 문명의 중심지로 엘람제국(the Elamite Empire)의 고대 수도였다.  B. C. 3000년대부터 왕조사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는 수메르’(Sumer) 왕의 목록에 엘람과 그 문명의 중심지인 수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대부터 수사는 이교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엘람의 신인 인 수시낙’(In Shushinak)을 신봉하던 고대 종교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수사는 수메르의 우르 제3왕조 시대(the Ur III Period)에 술기(Shulgi, B. C. 2095-2048) 왕의 침략을 받아 정복되었다.  이때 이곳에는 천문대로 사용된 점성술 사원인 지구라트(Ziggurat)가 건립되었는데 오늘날까지 그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수메르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엘람인들은 수사를 탈환하였으며 수트룩 나훈트(Shutruk Nahhunte) 왕은 B. C. 1174년에 바벨론의 카시트 왕조(the Kassite Dynasty)를 멸절시키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수사의 왕들은 티그리스 강 서편 지역의 통제권을 상실하게 되고 이로써 한때는 방대하였던 수사 중심의 대제국은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후 수사는 B. C. 639년에 앗수르의 앗술바니팔(Ashurbanipal, B. C. 669-633), B. C. 596년에 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2(Nebuchadnezzer II) 등의 침략을 받아 거의 황폐되었다가 페르시아 제국의 발흥과 더불어 수도로 지정되어 새롭게 재건되었다.

페르시아 왕 다리오 1(Darius I, B. C. 522-486)B. C. 521년 수산에 왕궁을 건립하였는데, 그 왕궁의 장엄함과 화려함은 고대 문헌에 설명되어 있는 대로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1:6).  한편 이란 정부의 도움을 받아 19세기 중엽부터 발굴 작업을 하던 프랑스 고고학 연구단은 이곳에서 다리오의 비문을 발견함으로써 그의 왕궁 건축과 관계된 여러 가지 생생한 자료들을 얻는 개가를 올렸다.  이 비문에는 왕궁 건축에 사용된 자재들과 그 자재들이 수집된 외국의 국명들이 기록되어 있었으며 아울러 다리오 왕이 말하노니 수사에 가장 웅장한 건물이 건축되도록 명령을 내렸고 이제 그 건물이 완성되었으니 아후라마스다(Ahuramazda) 신은 나와 내 부친 히스타스페스(Hystaspes) 및 내 국가를 보호하소서라는 글이 부기되어 있었다.  이러한 수사의 왕궁도 한때는 마게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 당하여 B. C. 324년에는 그곳에서 헬라 관리들과 페르시아 왕녀들 간의 합동 결혼식이 거행되기도 하였으나 빈번한 외국의 침략으로 인해 결국 중세에 이르러 멸망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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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스디’(Vashti)란 이름의 뜻은 아름다운 여인또는 총애받는 자이다.  그녀는 페르시아의 왕 아하수에로(Ahasuerus, B. C. 486-464)의 아내로서 한 때 남편과 더불어 서남 아시아 전역을 통치했던 왕비였다.  혹자는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아메스트리스(Amestris)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와스디는  아닥사스다 2(Artaxerxes ll, B. C. 404-359) 의 아내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분명치는 않다.  일설에 의하면 그녀는 소아시아 반도 서부에 있었던 나라인 리디아(Lydia)의 왕 알랴트(Alyalt)의 딸이었다고 한다. 

에스더 1장에는 이러한 그녀에게 불행을 안겨다 준 비극적인 사건이 기술되어 있다.  그 사건은 아하수에로의 잔치와 관련된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하수에로는 즉위한 지 제 3년에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1:3).  이 잔치는 180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연이어 왕은 수산 성내의 백성들을 위하여 또 다시 7일간의 잔치를 베풀었다(1:5).  이러한 와중에서 취기가 오른 아하수에로는 왕비 와스디에게 엉뚱한 명령을 내렸는데, 그것은 곧 잔치석에 나와 그녀의 아름다움을 뭇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라는 것이었다(1:11).  그러나 그녀는 이 같은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잔치석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술 취한 자들의 눈을 만족시키는 구경거리 역할을 함으로써 여성으로써 마땅히 지녀야 할 정숙한 자세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한 그녀로서는 왕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부당한 것이기에 단호히 거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와스디에게서 외면적인 아름다움은 차치(且置)하고라도 그녀의 이름에 부합되는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와스디가 조금이라도 자유 분방하고 여성 특유의 허영심을 지닌 여자였더라면 그녀는 왕의 명령을 좇아 사람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지 않았으니 가히 진주에 비결될 만한 현숙한 여인이라 하겠다(31:10).  하지만 왕의 명령에 불복종한 와스디는 술에 취해 분별력을 잃은 왕의 진노를 샀으며, 그 결과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되는 불행을 겪게 된다(1:13-22).  이후 그녀의 뒤를 이어 에스더(Esther)가 아하수에로의 비()가 되었으니(2:17),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섭리에 대하여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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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과 주일

연구자료 2019. 8. 4. 17:45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후에 율법의 준수를 촉구했다.  이는 느헤미야의 2대 사역인데, 특히 그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백성들에게 강조했다.  나라를 잃고 어지러운 상황 가운데 전전(轉轉)하던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잊고 주어진 현실에 끌려가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러한 그들이었기에 안식일에도 아무 거리낌 없이 노동을 하고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를 하였다(15:22).  거룩한 분노를 느낀 느헤미야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가르쳤다.  본고는 이 같은 안식일이 어떠한 날이며, 그 의미는 무엇이고, 또 오늘날 성도들이 지키는 주일과는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주일을 지키는 우리들의 바른 주일관(主日觀)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한다.

 

1. 안식일

어원(語源) : 히브리어로 <샤바트>이며 그 동사형은 쉬다’, ‘중단하다’, ‘끝나다등의 의미를 지닌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난 후 안식하신 것에서 그 기원을 찾으며(2:2-3), 이스라엘에게는 정규적인 율법으로서 안식을을 지킬 것이 요구되었다(20:8-11, 5:12-15).

의의(意義) :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진 것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별되었다는 깊은 뜻이 있다(31:13).  또한 출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뜻도 있다(5:15).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거나 장사를 하는 것은 자신의 거룩한 신분을 망각한 행동이었기에 안식일을 범한 자로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31:14-17, 15:32-36).  뿐만 아니라 신적 기원을 갖는 안식일은 인간을 위하여 만들진 것이기에(2:27), 안식일을 범한 자는 하나님의 언약(31:16)과 은혜를 저버리는 죄를 짓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안식일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중요하게 강조되었던 것이다(58:13-14, 17:19-27, 22:8-15).  마지막으로 안식일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구약의 안식일은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안식의 예표라는 점이다(4:4-11).

 

2. 주일 (Lord’s Day)

주일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한 주간의 첫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리스도께서 한 주간의 첫날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20:26), 성령을 보내신 것도 바로 주간의 첫날에 이루어진 사건이었다(2).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계시록 110절에 단 한 번 나온다.  그렇지만 초대 교회에서는 이 날이 예배를 위한 특별한 날로 구별되어졌다(20:7, 고전 16:2).  오늘날도 기독교인들은 주간의 첫날 곧 일요일에 예배를 드린다.  이 같은 주일이 안식일의 성취라든가, 안식일이 주일의 모형이라는 언급은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그래서 A. D. 364년의 라오디게아 교회 회의 (Synod of Laodicea) 에서는 주간의 첫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확정하여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이 아닌 주일에 휴식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주일을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관된 특별하고도 은혜스러운 날로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3. 안식일과 주일

안식일과 주일을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은 절기를 지키는 자들의 범위이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구별되어 지키는 언약적인 절기였으나, 주일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다.  또한 안식일에는 모든 노동이 금지되고 심지어는 하루에 걷는 거리까지도 제한되었다(1:12).  그러나 주일에는 완전한 휴식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일을 하면서 휴식을 취한다.  여기에서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성도 간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안식일과 주일은 모두 나머지 6일과 관계가 있다.  즉 안식일은 6일간 노동에서 벗어나 휴식을 갖는 날이지만, 주일은 나머지 6일 간의 생활이 연장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날이다.  이 같은 주일은 한 주간 가운데 하루를 주께 바치는 안식일 보다 더욱 포괄적이고도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그것은 주일을 지킴으로써 다른 날들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았음을 인정하며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살아나갈 힘과 은혜를 공급해 주시기를 원한다는 성도의 신앙이 반영된다는 것이다.

 

4. 결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을 감사와 기쁨 가운데 맞이하고 보내야 한다.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4:11),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이 된다(1:27-28).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주간의 한 날을 주일이라고 하여 지킬 때에는 그날만이 하나님과 성도가 교제를 나누는 날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그분이 모든 날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며 기뻐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안식에 많은 일을 행하셨던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아(12:1-8, 4:33-37, 13:10-17, 5:5-18), 주일 뿐만 아니라 다른 날에도 주의 일을 하는데 힘써야 한다.  이처럼 주일은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날의 대표요, 감사와 기쁨, 주의 일로 이루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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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경

오늘날 사용되는 성경은 구약 39, 신약 27권 전 66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66권만이 성경으로 인정되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문, 즉 어떤 책이 성경에 속하는가를 결정하는 문제가 곧 정경의 문제이다.  정경을 의미하는 헬라어 <캐논>은 본래 길이를 재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과 관련되어 쓰일 때는 그 영감성과 권위에 대한 판단을 거쳐 인정을 받은 책들의 집합을 가리키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기억하여야 할  사실은 성경 각 권은 그것이 정경으로 확증되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인 정경이었다는 점이다.  다만 교회나 공의회는 그 같은 책들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성경이라는 한 책 속에 모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근거로 정경을 확정했는가?  첫째, 성경 자체의 내적 증거, 즉 본문 스스로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내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둘째, 저자의 권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성경 기록자는 각계 각층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기록하였다.  셋째, 정경으로 승인하는 교회의 일치된 확증을 필요로 하였다.  내용상에 있어서 오류가 발견 책은 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승인되지 못하였으나 그러한 책이 바로 외경(外經) 및 위경(僞經)인 것이다.

 

2. 정경 형성의 역사

그렇다면 정경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언제 성립되었는가?  이에 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성경이 기록된 것과 정경으로 공인된 것은 별개의 일이며, 그 사이에는 많은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정경은 성경 각 권이 기록됨으로써 형성되기 시작하여 마지막 책의 기록이 끝남으로써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경의 형성이란 사실상 교회에 의한 정경의 승인을 의미한다.  한편 정경 형성의 시기에 대하여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구약의 모든 정경이 B.C. 5세기경 에스라(Ezra)에 의해 수집되고 인정을 받아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의 체제는 오늘날의 것과는 다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구약이 모두 24권으로 이루어 졌으며 그것은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로 나뉜다.  그리고 성경의 제일 첫 권은 창세기이며 마지막 권은 역대기이다.  또한 오늘날의 구약 성경이 39권인데 반해 히브리 성경이 24권인 이유는 히브리 성경에 있어서 사무엘상, 사무엘하와 열왕기상, 열왕기하,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소선지서 12권이 각 1권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성된 구약 정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도 승인을 받았는데, 그분께서는 아벨에서부터 사가랴까지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들을 죽인 죄에 대해 서기관들을 정죄하심으로써 구약 정경의 범위를 확정하셨다(11:51).  물론 아벨의 죽음은 창 4장에 언급되어 있으며 사가랴의 죽음은 대하 24:20-21절에 언급되어 있다.  

한편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인정한 공의회는 A.D. 397년의 카르타고 회의였다.  그러나 일부 책들은 이보다 앞서 사도들 사이에서 성경으로 인정을 받았었으며(참조 벧후 3:16), A.D. 363년의 라오디게아 회의에서도 역시 복음서, 바울 서신, 베드로전서, 요한일서 등과 같은 여러 책이 성경으로서 인정을 받았다.  아무튼 27권의 신약 성경은 오랜 기간 동안 그 정경성 여부를 심사 받은 끝에 정경으로 확정된 것이다.  이러한 경위에 따라 신구약 성경이 정경으로 일대 집대성(集大成) 되었는데, 오늘날처럼 구약이 39권으로 분류된 것은 70인역(LXX)의 편집 체계를 본땄기 때문이다.

 

3. 정경 본문의 전승

구약 성경의 원본은 B.C. 1450년경 (모세 시대)부터 B.C. 400년경 (말라기 시대)까지 주로 양피지(羊皮紙)나 파비루스(papyrus)등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원본은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낡아져 자연적으로 소실되었으며 사본만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가장 오래된 사본으로는 1947년 쿰란(Qumran)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이 있는데, B.C. 2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원시 마소라 본문사마리아 수정본등을 참고하여 만든 A.D. 9세기경의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t / 오늘날 유대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경의 기초가 되는 히브리어 성경)사해 사본과 비교해 본 결과 맛소라 본문이 대단히 정확하다는 점이다.  

한편 신약 성경은 오늘날 5,000개 이상의 사본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시내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및 약 75개의 파피루스 단편들도 있다.  시내 사본A.D. 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신약 성경 27권의 내용이 모두 수록되어 있는 귀중한 사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우리들에게 전승된 성경은 수 백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오늘날 온 세계 땅끝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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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성경에는 감람나무가 자주 언급되어 있다(6:11, 128:3, 3:12).  히브리어로 <자이트>라고 하는 이 나무는 사철나무로서 지중해 전지역에 걸쳐 널리 분포되어 있다.  팔레스틴에서는 특히 베들레헴, 헤브론, 나블루스(Nablus) 등과 같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거의 물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감람나무와 그 열매는 식료품, 연료, 기름 및 의약품, 목공품 등 일상 생활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사용된다.  감람유는 구약 시대에 성막 안의 성소를 밝히는 등유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성경에서 이 감람나무는 우의적 표현이나 시적 비유 또는 상징들과 관련하여 흔히 언급되고 있다.  요담(Jotham)은 세겜인들에게 아비멜렉(Abimelech)이 불의하게 왕위를 찬탈한 것에 대하여 경고하기 위하여 감람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 그리고 가시나무 비유를 들려 주었다(9:1-21).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같은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사실을 돌감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진 것으로 비유하기도 했다(11:3-24).  뿐만 아니라 노아의 홍수시에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를 물고 노아에게로 돌아온 사건은 이 나무가 평화를 상징함을 암시한다(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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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에 대하여

연구자료 2019. 7. 6. 17:42

본고는 성경에 나타난 세금 제도를 살펴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세금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족장시대-

원래 세금은 지방이나 정부, 국가의 운영을 위해 일정한 금액을 의무적으로 납부하는 제도이다.  성경에서 이러한 세금 제도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활동하던 족장시대(族長時代)에는 어느 정도 조직된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요셉이 장기간의 흉년을 대비할 목적으로 애굽 전지역의 소산물의 5분의1을 징수한 것이 그 최초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참조 창 41:25-42-5).  그러나 출애굽(Exodus)과 가나안 입주(入住) 이후 사사 시대까지도 이스라엘 사회를 위한 자제적인 장세 제도나 수납 기관이 없었다. 

 

-다윗 시대-

다윗 시대에는  전리품과 정복한 민족들로부터 받는 조공으로 국고를 유지하였다(참조 삼하 8, 대상 27:25-31).  이스라엘에서 처음으로 국세를 만들어 낸 사람은 솔로몬 왕이었다.  그는 성전과 궁전 건축을 위해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동원하여 강제 노역을 시켰고, 열 두  관장을 두어 각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도록 했다(왕상 4:7).  이외에 또 다른 세금 제도로서 상인과 객상들에게 거두는 통행세, 외국에 의존하는 조세와 공물들이 있었다(왕상 10:14-29, 대하 9:13-28).  남북 왕국의 분열 이후에는 외국의 군주들에게 조공을 받쳤는데, 그 가운데 바사 치하에서의 세금법은 지방 출신의 관리 책임 아래 두었던 종전의 징수 방법과는 달리 각 지역의 속주(屬州)로 파견된 바사 출신 총독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당시의 세금 종류는 왕실의 경비라는 명목으로 조공과 잡세와 부세(賦稅)’가 있었고(4:13), 제사장과 레위인들, 노래하는 자들, 성전 문지기들에게는 면세 혜택이 주어졌다(7:24).  또한 총독의 눅()’ 이라는 세금이 있었는데 식량과 포도주와 매일 은 40세겔을 바치는 것이었다(5:14-15).  후에 헤롯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농작물과 매매되는 모든 상품에 판매세를 부과했다. 

 

-로마 제국 통치기-

로마 제국 통치기의 유대인들에게는 4-5가지 종류의 세금이 있었는데 현물이나 돈으로 내는 토지세, 인두세와 개인 재산에 대한 재산세(22:17), 항구와 성전에서 거두는 출입세, 예루살렘내의 가옥세 등이었다.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B. C. 23- A. D. 14)는 조세를 위해 로마 속국의 전지역에 호적 명령을 내린 적도 있었다(2:1).  그러나 이와 같은 이방 세력에게 바치는 세금 외에도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는 매년 반 세겔을 성전세로 바쳐야 했다(17:24).  이 일에 종사하는 유대인 출신의 관리를 세리(稅吏)라고 불렀다.  그들은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세금을 징수하였는데,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는 세금을 거두는 세무소도 세워졌다.  로마의 압제 상황아래서의 세리들의 활동은 유대인들의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세리들은 자신의 동족에게서 과다한 세금을 부과한 뒤 착복하여 부()를 축적하였기 때문이다(참 마 9:10, 11:19, 21:31, 2:15, 5:30). 

신약 성경 가운데 공관 복음서에는 그리스도와 유대인 사이에 이 문제에 대한 대화 장면이 나온다(참 마 22:15-22).  물론 유대인들이 유독 세금 문제를 들고 나온 데에는 이 문제가 당시의 신앙과 정치상의 미묘한 관계에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유일신 여호와를 섬기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그들의 전통적인 신앙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렇다고 예속 상태에서 납세를 거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로마 제국과의 불화와 위기를 불러 일으키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세속 군주에 대한 백성으로서의 임무를 이행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께 대한 신앙적 의무도 지킬 것을 말씀하셨다(22:22). 

 

-초대교회-

한편 사도들도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초대 교회가 설립된 이후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세속적인 통치 질서와 제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그들의 고민이었다.  이에 대한 사도들의 주장은 거의 일관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에 대한 징벌의 대행자로서 세속 통치자와 관리를 세우셨고, 여러 종류의 제도와 법규들을 설정하셨는데 세금 제도는 이러한 광법위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포함된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이에 전적으로 복종하야 한다는 것이다(참조 롬 13:1-7, 벧전 2:13). 

이러한 사도적 권면을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적용하려 할 때 몇 가지 검토해야 할 부분이 있다.  첫째, 사도들의 권면에는 세속정부나 국가의 통치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될 경우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나 통치자가 악을 행할 경우()의 대응 방법이 결여 되어 있다.  둘째, 그러므로 납세 제도가 부의 균등한 분배 원칙에 벗어났을 경우 그리스도인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인 발언과 시정을 건의해야 한다.  셋째,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특정한 정치적 이익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이웃 사랑과 정의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넷째,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은 납세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자 세상 국가에 속한 시민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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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발랏’(Sanballat)이란 이름은 월신(月神)이 그에게 생명을 주었다라는 말인 바벨론어 <신 우발리트>에서 유래된 것이다.  느헤미야 210절에 호론’(Horon) 사람이란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는 에브라임 지파 남쪽 지역인 벧호론’(Beth-horon)에서 출생한 듯하다(참조 수 10:10).  느헤미야 1328절에는 그의 딸이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Joiada)의 한 아들과 결혼한 것으로 나와 있다.  산발랏은 느헤미야 시대 당시 사마리아를 통치하던 총독이었는데, 암몬 사람 도비야(Tobiah) 및 아라비아 사람 게셈(Gesham) 등과 더불어 느헤미야를 대적하며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를 방해하였다(4:7-8).  이처럼 그가 느헤미야를 적대시한 이유는 느헤미야가 바벨론에서 팔레스틴으로 돌아와 유대인들의 지도자가 됨으로써 사마리아와 유다 지방에 대한 산발랏 자신의 통치권이 약화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성벽 재건 공사를 방해하려던 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산발랏은 느헤미야를 살해하려 하였다(6:2).  그러나 그것마저도 실패하자 산발랏은 느헤미야가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는 역모죄를 씌워 그를 처단하려 하였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느헤미야는 그러한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6:5-9).  한편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그리심산(Gerizim Mount)의 사마리아 성전은 이 산발랏이 만든 것으로서 산발랏은 자기의 사위인 므낫세를 성전의 대제사장으로 세워 모든 것을 주관하도록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역사적 사실성 여부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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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술에 관한 기록이 총 387회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직접적인 관계 귀절이 212, 간접적인 관계 귀절이 175번 나온다.  성경의 배경이 된 팔레스틴 지역에 있어서 술은 일반적으로 대추야자나 석류로도 만들어졌지만 거의가 포도즙을 발효시켜 만든 포도주였다.  이와 같은 술은 히브리인들의 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술은 성경에서 칭송을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술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성경을 통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긍정적인 면-

팔레스틴에 있어서 물은 비교적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포도주가 오늘날보다 더 널리 사용되었다.

1. 일상생활에서의 용도 :  포도주는 매 식사시에 음료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14:18, 27:25), 연회시엗 사용되었다(2:1-9).  이런 일면은 연회잔치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미수테>음주’(飮酒)를 의미하는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또한 포도주는 아비가일과 시바가 다윗에게 포도주가 담긴 가죽 부대들을 선물한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삼상 25:18, 삼하 16:1), 상급자에게 바치는 선물이나 예물로도(12:17, 14:23, 18:12) 이용되었다.  한편 무역 상품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포도주는 솔로몬이 성전 짓는데 필요한 목재들을 공급하는 대가로 두로 왕 히람의 종들에게 다른 물품들과 더불어 주기도 했다. 

이외에도 포도주는 의약품으로 사용되었다.  즉 현기증을 일으키는 사람을 회복시키고(삼하 16:2), ‘비위와 자주 나는 병에 대한 처방으로도(딤전 5:23), 그리고 상처를 소독하는 약으로도(10:34) 사용되었다.

2. 제물로서의 용도 :  포도주가 생산되는 곳에서는 그 어디를 막론하고 이 포도주가 제사에 사용되었다.  예배자들은 성전을 향한 순례길에 오을 때면 언제나 포도주가 담긴 가죽 부대를 가지고 갔으며(삼상 1:24, 10:3), 어린 양과 고운 가루와 기름, 혹은 이러한 것들의 혼합물과 함께 하나님께 받쳤다(29:40, 23:13, 15:7-10, 28:14).

 

-부정적인 면-

알콜 중독이 고대의 주요한 사회악 중의 하나였다는 증거가 성경에는 많이 있다.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몹시 취하여 자신의 장막에서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듣 결과로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 비극적인 사태를 일으켰다(9:20-27).  이외에도 롯(19:33-35), 나발(삼상 25:36), 암몬(삼하 1:18), 엘라 (왕상 16:9), 수리아 왕 벤하닷과 동맹한 32인의 왕들(왕상 20:16) 등을 술로 인해 수치를 당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정도를 벗어난 술취함은 언제나 개인 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 방종과 수치와 패망이라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이사야는 술이 마음을 혼미케 하며(28:7), 영웅 심리에 빠지게 한다고 선언하면서(5:22), 당시 독주로 인해서 비틀거리고 옆걸음 치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맹렬히 비난하였다(5:11, 56:11-12).  선지자 미가도 백성들이 포도주와 술취함에 대하여 좋게 말하는 거짓 선지자를 원한다는 사실에 불평을 토로하였다(2:11).  뿐만 아니라 잠언 저자도 술취함의 폐단으로서 싸우기를 좋아하고 떠드는 버룻이 있으며(20:1, 23:19-32), 자기들의 직무를 소홀히 하며(31:4-5), 가난하게 되고(21:17, 23:20-21), 결국은 재앙과 슬픔으로 그 인생을 마치게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23:29-32).

이와 같은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술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 술을 이용하는 인간들이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술 또한 인간에게 유익한가 해로운가가 결정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내에서는 술을 먹는 것이 죄인가 아닌가라는 문제가 심심치 않게 논란의 대상이 되곤한다.   물론 이런 요소는 한국에 복음을 가지고 온 초기 선교사들이 당시 외세의 침략에 기울어 가는 구한말(舊韓末) 나라의 형편을 보면서 좌절과 공호감에 빠져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내는 백성들을 그러한 도탄에서 건져내는 급선무가 술을 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회내에서 금주 운동을 강력히 전개한 사실로부터 기인된다. 

여기서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술을 먹는 것이 정죄(定罪)의 대상이어서가 아니라 건덕상(建德上)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술을 먹고 난 이후에 발생하게 될 여러가지 폐단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실수하지 않을 정도로만 혹은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먹으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로서, 이 문제의 해답은 각자의 양심과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여야 한다(12:3).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술이 인체의 면역성을 파괴하고 정신을 혼미케 하는 등 정신과 육체 건강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며 성도의 덕을 떨어뜨리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술취함을 방탕과 생활의 염려 등과 같은 차원에서 말씀하시면서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셨다(21:34).  또한 사도 바울도 술취함을 음란, 호색 등과 같이 어두움의 일로 간주하였고(13:13), 사도 베드로 역시 술취함을 구습을 버리지 못한 옛 사람의 자취라고 설교하였다(벧전 4:3).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교회의 금주의 전통은 성경의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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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비

연구자료 2019. 6. 5. 16:52

자비(慈悲)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로서 그분의 동정, 인내, 용서, 사랑, 친절, 구원 등을 의미한다.  특히 자비는 용서 및 긍휼히 여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경에는 자비의 갖가지 특성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용어가 나와 있는데, 본고(本稿)는 그 용어들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의 여러 속성을 알아 보고자 한다.

 

구약에서의 자비

1. <라함> : ‘자비의 뜻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용어로서 원래는 자비의 대상에 대하여 느껴지는 동정이 물리적으로 차지하는 장소를 의미했다(43:30), 왕상 3:26).  성경에서는 주로 동정의 뜻을 나타냈는데(13:18, 42:12), 구속받은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기도 한다(103:4). 

2. <헤세드> : ‘인자’, ‘확고한 사랑등의 속성을 나타내는 이 용어가 고대에는 언약 관계에 충실한 헌신이나 신실이라는 의미가 포함했으나(20:6, 2:12-14), 후대에는 이런 의무적인 요소가 없어지고 감정적인 내용만 나타나게 되었다(3:13, 7:9).

3. <하난> : 이는 은혜를 베풀다’, ‘호의를 보이다라는 뜻을 지닌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들에게 친절할 것을 명하실 때에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37:21, 14:21).

 

신약에서의 자비

1. <엘레오스> : 주로 동정심을 표현하는 데에 쓰인 단어로서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자비를 호소할 때 사용되었다(9:27, 15:22, 10:47, 17:13).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이나(23:23), 팔복 가운데 나오는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도(5:7), 이 단어와 관계 있다.  그리고 이 단어는 히브리어 <헤세드>와 같이 언약 관계에 충실하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9:13, 1:50, 54, 72, 78).

2. 이외에도 인자를 나타내는 <엘레모쉬네>, ‘호의’, ‘관용을 의미하는 <에피에이케이아>, ‘선량함’, ‘친절이라는 뜻의 <크레스토테스> 등이 사용되기도 했다.

 

결론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긍휼 <헤세드>에 근거하여 자기 민족을 위한 기도를 한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었다(1:5).  왜냐하면 하나님의 긍휼이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깊은 돌보심이기 때문이다(1:8-9).  오늘날의 성도들이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근거한 것이다(벧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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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Persia)

연구자료 2019. 4. 14. 18:25

페르시아는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다니엘서에 나오는 기사(記事)의 배경이 되는 나라이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바벨론 포로민이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을 재건하도록 허락했던 자이다(1:1-4).  그리고 느헤미야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였던 자는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인 아닥사스다 1세였던 것 같다(2:1-6).  한편 아하수에로는 에스더를 왕비로 삼았던 자이며 유대인들을 하만으로부터 보호했던 왕이다(2:17, 8:3-17).  이러한 인물사적(人物史的)인 배경 외에도 페르시아는 유대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으니 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러한 점을 중시하는 자들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 등의 대립적 사고 체계가 페르시아의 이원론적 개념에서 따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3:19-21).  또한 페르시아는 한때 서남 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여 대제국으로서의 위엄을 떨치기도 하였으나 후에 쇠퇴의 길을 걷다가 다시금 서서히 국력을 회복하여 오늘날에는 이란(Iran)이라는 이름으로 국명을 바꾸고 새로운 발전을 꾀하고 있다.  본고(本稿)는 페르시아의 국명과 위치와 역사, 그리고 문화의 순서대로 내용을 전개하려 한다.

 

1. 국명

페르시아(Persia)라는 국명은 개혁 성경에 바사로 번역되어 있다.  히브리어로 <파라스>, 구페르시아어로는 <파사>, 그리고 헬라어로는 <페르시아>, <페르세스>, <페르손> 등으로 불리웠던 이 국명은 현대에 이르러 Reza Shah Pahlavi, 1925-1941)에 의해 이란’(Iran)으로 개명되었다. 

 

2. 위치

서남 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는 페르시아는 지리적으로 매우 복잡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즉 그 국경은 북쪽으로 소비에트 연방과 카스피 해(Caspian Sea)를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페르시아 만과 호루므즈 해협(Strait of Hormuz), 오만 만(Gulf of Oman)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리고 서쪽 국경은 이라크(Iraq)와 터어키(Turkey)에 맞닿고 있으며, 동쪽 국경은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과 서파키스탄(West Pakistan)에 맞닿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란이라는 지명은 위에서 언급한 지역과 아울러 통상적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서파키스탄, 그리고 발루키스탄(Baluchistan)을 합한 지역을 일컫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3. 역사

대부분의 페르시아인은 코카서스 종족이며 그 외에도 유대 페르시아인 사이의 혼혈인 및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페르시아의 역사는 B. C. 6000년 이전부터 시작된 선사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본고는 B. C. 675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만을 간략히 살펴보려고 한다.  B. C. 675년에 페르시아의 왕이 된 Teispes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파르사의 왕으로 봉해진 Aritaramna와 안샨의 왕으로 봉해진 고레스 1세이다.  이 고레스 1세의 손자인 고레스 2세가 바로 에스라에 나오는 바사 왕 고레스’(1:1)인데, 그는 B. C. 539년에 바벨론을 멸망시켰다.  이후의 왕권은 Cambyses 2세를 거쳐 다리오 1세에게 전해졌으며, B. C. 486년엔 다시금 크세르크르스(Xerxes), 즉 아하수에로(Ahasuerus)에게 전해졌다.  혹자는 캄비세스(Cambyses) 2세가 아하수에로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리오(Darius) 1세와 아하수에로는 둘 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다(4:5-6, 1:1).  아하수에로는 집권 후 페르시아의 오랜 숙원이었던 헬라 정복을 단행하였으나 오히려 살라미스(Salamis) 해전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그 다음 나오는 왕은 아닥사스다 1세로서 에스라, 느헤미야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4:7-24, 7:1-26, 1:1, 2:10).  이후 헬라, 로마가 세계 패권을 차지하던 시대하에서 급속도로 국력이 쇠퇴하였던  페르시아는 A. D. 226년 사산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세력을 회복하게 되는데, 아닥사스다 1세 이후의 인물에 대해서는 성경적 언급이 전혀 없다.  사산 왕조의 통치하에서 페르시아에는 미드라교(Mithraism)와 마니교(Manichaeism)가 발생하였으며,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동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산 왕조는 자국 내의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다.  한편 7세기에 이르러 아라비아의 회교도들이 온 세계를 회교화하려는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때 페르시아도 회교도들에 의해 침략을 당했으며 결국 이슬람 제국의 일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1925년에 팔레비(Reza Shah Pahlavi)가 왕좌에 오른 후부터는 이란에 민족주의 성향이 대두되었으며 1979년에는 이른바 회교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왕이 축출되고 회교 지도자 호메니아(Ruhollah Khomeini)가 정권을 잡고 이란 회교 공화국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문화

페르시아의 예술과 문학, 그리고 과학은 유럽 셰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천문학, 건축, 조각술 등이 있다.  한편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성문집(聖文集)인 아베스타(Avesta)는 외경서와 같은 후기 유대교의 제반 문헌들에 끼친 영향이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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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연구자료 2019. 4. 5. 16:12

에스라 7장에 보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파사(Persis) 왕 아닥사스다 1(B.C. 464-424)는 왕의 냉탕고(內帑庫)를 지키는 사람에게 조서를 내려 귀환하는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모든 물자를 내주게 했다(7:11-21).  그 재물의 목록 가운데 특이한 것은 소금이다.  지금은 흔하지만 예전에는 귀중품 가운데 속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귀절이다.  먼저 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2:13)와 번제의 제물(43:24)에 뿌려졌다.  그리고 소금 구덩이같은 용어(2:9)는 황폐한 땅이나 폐허화된 땅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한 도시를 정복한 군대는 그 도시를 저주하여 황폐케 한다는 상징적 의식으로 소금을 뿌리기도 했다(9:45, 39:6, 107:4, 17:6).  선지자 엘리사는 좋지 못한 물에 소금을 던져 그 물을 좋게 만들기도 하였다(왕하 2:19-22).  오늘날의 아랍인들 관습에서도 친구 사이의 우정의 약속은 소금을 서로 선물함으로써 맺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소금이 약속 곧 언약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 같은 소금의 언약적 의미는 성경에도 나타나는데,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은 순결하게 체결되고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소금언약이라고 불리운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18:19, 대하 13:5).  이 소금언약이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물과 번제물에  필수적으로 소금을 넣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성경에는 어린아이에게 소금을 뿌린다는 말이 있는데(16:4), 이는 근동의 풍습으로서 어린아이의 피부가 정결하고 강해지도록 소금을 문지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위생학적인 처방은 오늘날에도 시행되고 있다.  한편 예수님께서도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면서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9:50).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언어가 지혜롭고 사려 깊어야 함을 소금으로 고르게 함 같이 하라고 권면하였다(4:6).  무엇보다도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이 가장 크다.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는데(5:13), 이는 오늘날의 신자들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지적하는 말씀이다(5:2, 살전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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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란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5:24), 하나님의 영광을 삶의 최대의 목표로 삼고 사는 자들이다(고전 10:31).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쁜 생활과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허탄한 길, 즉 육체의 소욕을 따라갈 가능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는 것이 또한 성도들의 삶이기도 하다.  본고는 구약에 나타난 신앙 선배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여 세상을 쫓아간 실수를 범하고 난 후 어떻게 신앙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한 단계 높은 신앙으로 승화되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신앙에 교훈과 도움을 얻고자 한다.

 

1. 개인적인 신앙 회복 운동

A. 아브라함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벧엘에서 단까지 쌓은 그는(2:8), 가나안에 닥친 기근을 피하여 이방 땅 애굽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자기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다.  왜냐하면 사래의 미모가 출중한 연고로 사래를 아내라고 하면 그녀의 미모를 탐낸 애굽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12:11).  결국 이런 사실은 탄로나게 되었고 이를 질책하는 바로 앞에서 그는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처럼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바를 알지 못하고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중하고 나갔던 그가(11:8), 자신에게 닥친 기근이라는 환경적 시련을 피하기 위해 이방 땅 애굽으로 가는 잘못(31:1)과 또한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거짓말을 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한 육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한 대가로 돌아온 것은 이방인의 가혹한 질책뿐이었다.  이러한 스스로의 반성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은 믿음으로 인해 그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었고(17:5), 믿음의 조상으로 오늘날까지 칭송을 받게 되었다.

B. 다윗 : 통일 왕국의 2대 왕이기도 한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 뜻대로 살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불레셋 장수 골리앗을 이길 때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등(삼상 17:47), 그는 언제나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다.  그런 그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해 간음죄를 저질러 그녀에게 불륜의 씨앗을 가지게 하는 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우리아를 최전선에 내보내 죽여 버리는 극악한 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그가 이처럼 비열한 죄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숭고한 마음이 육체의 정욕에 굴복하였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그가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결코 성군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 데 있다. 즉 그는 그 상태에서 나단 선지자의 꾸짖음을 달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삼하 12:1-14).  이때에 그가 쓴 시가 구구절절이 회개의 자국으로 얼룩진 시편51편이다.  

 

2. 국가적인 신앙 회복 운동

A. 미스바 회개 운동 : 삼상 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로 모이는 사건이 나온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 상태에 있었지만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사무엘은 미스바 소집령을 내렸다.  그 목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 관계를 재수립하고 그 언약 관계를 가로 막고 있는 불레셋의 압제를 단호히 배격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미스바로 모이기 전에 사무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백성들에게 공포했다.  a.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 제하라.  b. 마음을 여호와께만 향하여 그만 섬기라.  이것은 곧 진정한 회개란 단순히 입술만의 회개가 아닌 생활 그 자체의 회개가 선행되어야 함을 교훈한다.  이러한 명령을 백성들은 그대로 지켰고 이로 인해 미스바의 회개 운동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산 제자가 되었으며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건짐을 받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B. 요시아 왕의 종교 개혁 : 남유다 왕국의 제16대 왕인 요시아는 26, 즉 그의 통치 18(B.C.621) 되던 해부터 유다 역사사 가장 철저한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개혁의 목적은 성전을 중심으로 유다 전역에 팽배해 있던 우상 숭배를 일소함으로 인해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자는데 있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열왕기 저자는 요시아와 같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왕은 요시아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라고 극찬하였다.  이러한 개혁의 출발점은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을 그가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과 백성들이 걸어온 길을 그 말씀에 냉철히 비추어 보면서 모든 일을 주의 뜻대로 준행한 데 있다(왕하 22:11, 23:24). 

이와같이 개인이든 국가이든 간에 타락의 길에서 신앙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비추어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자비의 은총을 베푸실 것이다(요일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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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헌식이 거행된  성전은(6:16), 성전 건축의 역사에 의거해 제 2차 성전이라고 불리우거나 또는 건축을 주도한 사람의 이름을 본따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불리운다.  이제 그 건축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바벨론에서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후 이스라엘인들은 예루살렘에 모여 바벨론에 의해 훼파되었던 솔로     몬의 성전 터 위에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다(3:1-6).  

2. 그 후 성전 건축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이에 성전의 기초가 놓여졌다.  전의 지대가 놓여지자 사람들은     기뻐하며 여호와께 찬양을 드렸다(3:7-13). 

3. 그런데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 같은 자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이(4:1-3), 성전 건축을 방해하였다     (스 4:1-5).  

4. 이후 성전 건축이 16년 동안이나 중단되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방해자들 때문이 아니고 사람들     이 열심을 잃고 게으름(1:2-8)을 피웠기 때문이었다(4:24).  

5. 이 작업은 다리오(Darius) 2년까지 중단 되었으나, 선지자 학개와 스라랴의 격려 및 다리오 왕의 조     서로 말미암아 재개 되었으며 4년 후(B.C. 515)에 완성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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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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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신앙은 유대인들에게서부터 비롯되어 온 인류에게까지 파급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 하나님께 대한 공중예배(公衆禮拜)를 드리지만 국가가 형성되지 않았던 시대의 유대인들은 개인적으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하였다.  그러던 것이 출애굽 이후 성막이라는 공중예배 처소가 생겨났으며 그것이 발전하여 성전으로,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회당으로 변천되었다.  이러한 변천 과정을 따라 여러 형태의 예배 처소 및 그에 따른 예배 형태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제단(祭壇)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형성되지 못하였던 족장 시대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예배 형태는 가족 예배였다.  물론 가족 예배는 그 이후 오늘날 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항상 행하여져 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공중 예배와 병행하여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족 단위로 생활하던 유대인들은 개인적으로나 족장 중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예배 처소는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아니하였으나 어느 곳에서든 돌로 쌓는 제단이 바로 예배 처소가 되었다(8:20, 12:7, 25:25).

 

2. 성막(聖幕)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 공중 예배의 체계가 세워진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와 더불어 비롯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제도에 관한 제반 규례를 주셨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다(40).  성막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의 3대 절기인 유월절과 칠칠절, 수장절을 지키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절기 행사에 참석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16:16).  이와 같은 성막 예배를 통하여 유대인들은 족장 시대부터 행해져 온 희생제사(犧牲祭祀) 제도를 보다 조직화 하였으며(1), 안식을 규례를 엄격히 정비하였다(23:1-3).  한편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부분은 언약궤인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이었다(37:1-9).

 

3. 성전(聖殿)

솔로몬 시대에 이르자 성막은 성전으로 대치되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이곳으로 옮기었다(왕상 8).  이로써 성전은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 있어서 예배의 본산지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각 지방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야 했다.  이로 인해 희생제사 제도는 더욱더 조직화되었으며 제사장 직분을 부여 받은 사독(Zadok) 자손들과 레위인들이 이 사역을 담당하였다.  한 편 성전 예배로 인해 파생된 것들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음악적 측면이다.  성전 예배에 있어 찬양을 맡을 찬양대가 조직됨(대상 25)과 아울러 찬송가로 사용될 시편집이 만들어졌으니(113-118, 120-134, 136) 이제 찬양은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한 요소가 되었다.

 

4. 회당(會堂)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불가피하게 예배 처소의 변모를 가져왔다.  바벨론 포로 이후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 예배를 회복시킬수 있었지만(6:13-22), 바벨론에 그대로 정착했거나 다른 나라에 뿔뿔이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새롭게 생겨난 예배 처소가 곧 회당인데, 회당(Synagogue)이란 말 자체는 회중(Congregation)이란 뜻이다.  이러한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마다 건립되어 그 수효가 급증하였는데, A.D. 1세기에는 예루살렘에도 480여개나 되는 회당이 설립되었다.  그런데 회당에서는 예배만 거행되었으며 예배를 주관하는 것도 제사장이 아닌 회당장이 맡아 하였다.  회당 예배는 기도에의 부름(6:4-9, 11:13-21 등을 낭독함)과 대표기도, 그리고 성경 낭독 및 말씀에 대한 해석과 축복 기도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세 번째 순서다.  한편 이같은 회당은 예배 처소였을 뿐만 아니라 교육 장소이기도 하였는데 어린 아이들에 대한 초등 과정으로서의 율법 교육이 이곳에서 항하여졌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러한 회당에서 종종 사람들을 가르치셨던 것을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13:54, 1:21).

 

5. 교회(敎會)

초대 교회의 예배 처소는 오늘날과 같은 외형을 지닌 건물이 아니었다.  다만 유대적 정통주의에 대립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따로 모임을 가졌던 곳이 바로 교회이니 처음에 그러한 예배 처소로서 다락방(1:13, 20:8)이나 개인의 집(1:2)이 사용되었다.  한편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구원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로서 장소가 아닌 모임 그 자체를 가리킨다(18:20).  근대식 교회의 건립은 기독교가 온 세계로 확산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는데 349년에 완공된후 17세기에 이르러 개축이 끝난 성 베드로 대성당은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한편 초대 교회는 말씀을 상고하며 성만찬 및 세례 예식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예전으로 받들어 행하였으니 이러한 예전(禮典)은 오늘날까지도 지켜 행해지고 있다(2:3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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