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의 기자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행한 모든 일과 수고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무익한 행위임을 고백했다(1: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물질 만능주의와 향략주의가 판을 치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에 미혹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성 윤리의 혼란을 성의 해방을 표방하므로 사람의 지위를 하등 동물로 격하시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적인 성 윤리라는 관점에서 일부 다처제를 고찰해 봄으로써 성경적인 결혼관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1. 일부 일처제를 반대하는 입장

고대 사회에서 일부 다처제가 허용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도 이러한 풍습이 나타나고 있음이 사실이다.  심지어 이슬람교는 일부 다처제를 성문화하여 허용하고 있다.

a) 사회주의 : 베벨과 같은 학자는 일부 일처제가 남자의 합법적 상속이 가능한 사유 재산 제도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생산 수단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게 되면 일부 일처제는 폐지되고 자유 연애가 실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사유 재산 제도가 무너지고 사회주의화 될 때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소련은 러시아가 공산화된 후 이와 같은 이론을 실제적으로 행동화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192711일에 다시 혼인법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동일하게 혼인법이 실시되고 있다.  이것은 사유 재산 제도가 폐지될지라도 국가가 혼인에 대한 통체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b) 낭만주의 : 남여간의 사랑은 파도와 같이 굴곡이 있으므로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만 동거할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Ellen Key, Hans Bruher).  이러한 견해는 남녀 상호간의 책임을 배제한 자유 연애 내지 계약 결혼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불안전 하고 모순된 감정을 자유로 방임 하면서 인격성또는 인격적 결합을 내세우는 이들의 주장은 단순하고 무책임한 개인주의에 불과하다.

 

2. 사회적 차원에서 일부 다처제가 갖는 폐단

일부 다처제는 특히 자본주의 국가에서 상속권과 관련해서 많은 문제를 파생시켰다.  뿐만 아니라 왕정 시대에 있어서 축접 제도는 상속이나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형제간의 유혈극을 빚기도 했다.  성경에서도 축접 제도를 도입함으로서 큰 고통을 겪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람, 야곱, 다윗 그리고 솔로문이다.  이외에 만일 우리 기독교인들이 일부 다처제를 허용하게 되면 창기나 주위의 여자들과 동침하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게 된다.  나아가 자유 연애의 사상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사생아의 문제와 성병의 오염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강간이나 간통의 죄는 성립될 수도 없게 된다.

 

3. 일부 다처제에 대한 성경적 입장

구약 성경의 몇 군데에서 이를 허용하는 듯한 기록들이 있다.  앞서 언급한 아브라함, 야곱, 다윗 그리고 솔로몬 외에 율법에서도 그러한 인상을 준다(참조 신 21:15-17).  그러나 이것은 고대 근동의 결혼 목적이 종종 번식에 있었던 사회적 배경에 기인한 것이지, 결코 그러한 결혼관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한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의 돕는 배필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근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창조 후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2:24)라고 명령하셨으며,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더욱 간경한 어조로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5:31-32)고 말씀하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사실과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심으로써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배우자 이외의 어떠한 사람과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은 간음 행위임을 강조하셨다.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제자들은 결혼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했는데, 이는 결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얼마나 강경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4. 결론

세상의 온갖 부귀와 영화 그리고 향락을 누렸던 전도자가 자신이 행한 그 모든 일을 무익한 것으로 돌리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한 것은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미적 실존(aesthetic existence)이나 윤리적 실존에서 종교적 실존으로 도약한 상태라 할 수 있겠다.  한 남자가 한 여자의 남편이 되는 것이 감독과 집사의 직분에 합당하다면(3:2, 12), 이와 같은 원리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용되어 지켜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세상의 풍조에 밀려 다니면서 세속적인 열락(悅樂)에 빠진 자는 종교적 실존, 즉 신령한 하늘나라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그러므로 전도자의 고백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처와 첩을 많이 두어 쾌락을 누리는 이 모든 것이 무익한 행위임을 깨닫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경건의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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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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