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24.03.31 부활
  2. 2024.03.24 웨슬리와 예정
  3. 2024.03.17 칼빈과 예정 1
  4. 2024.03.10 예정
  5. 2024.03.03 선택

부활

십자가와 부활 2024. 3. 31. 11:01

기독교의 등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 가마리엘이 관찰한바처럼, 지도자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 보통 어떤 운동이든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행 5:5:34-39).  부활만이 유일하게 논리적이며 실로 믿을 만한 설명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전부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느냐 아니야에 걸려 있다.  여기에는 교회 내의 소위 급진파들에게 주는 경고가 나온다.  부활의 특질이 결여된 설교는 지금이나 앞으로나 사람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의 설교가 아니다.  하지만 이 경고의 말은 급진파들만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성경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목사들 중에서도 마음으로는 부활의 진리에 동의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교와 믿음의 핵심으로 삼지 않는 자들이 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는 경축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경축하지 않는다.  물론 십자가가 없이 부활만 전파하면 그릇된 승리주의로 이끌 수 있다.  그러나 부활 없이 십자가만 전파하면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한다.  즉 ‘막다른’(dead) 골목이다.

Mahatma Gandhi는 인도의 한 선교사 단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여러분은 대단히 열심히 일합니다. 장미는 결코 누구에게도 자신의 냄새를 맡도록 초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장미가 향기롭다면 사람들은 그 냄새를 맡기 위해 정원을 건너오고 가시를 참아낼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부활하신 주 예수의 향기로 가득 차 있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전파하는 메시지에 끌린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말하는 바를 통해서 증거 하는 만큼이나 사는 방식을 통해서도 증거 한다.   

Paul Beasley Murray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Wesley는 Calvin 신학에서 신학적 원리로 제시한 단일 예정(single predestination)과 이중 예정(double predestination) 중에서 어느 것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Augustine과 Luther를 따르는 신자들은 성경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단일 예정을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739년 4월 29일 주일 아침, 그의 전체 설교 사역 가운데 한 획을 긋는 한 편의 설교를 한다.  이 설교는 로마서 8장 32절에서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이며, 제목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다.  『Free Grace. A Sermon Preached at Bristol. By John Wesley』에서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불변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예정에 따른 결론은 대다수의 인류가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망 가운데 속해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 외에 아무도 구원할 수 없으며, 하나님도 그들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절대적으로 구원하지 않을 것을 작정했다고 믿는다. 이는 그들을 멸망당하도록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영원한 죽음을 명하시면 저주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이든, ‘간과’이든, ‘단일 예정’이든, ‘영원한 멸망’이든, 아무리 부드럽게 표현하고 무엇이라 부르건 간에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이다” 

Wesley는 신학적 언어로 어떻게 표현되든지 간에 Calvin의 모든 신학적 변주(變奏)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이 모든 술어들이 뜻 하는 것은 분명하다.  Calvin의 주장은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계획에 따라 구원에 이르도록 결정하신 자들과 한편 멸망으로 내어 맡길 자들을 정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 중의 누구라도 저주를 받는 사람은 없다.  이 말의 의미는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무슨 죄를 짓더라도 지옥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저주받기로 예정된 사람 중의 누구라도 구원받게 되는 사람도 없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를 믿고 싶어도 저주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믿는 것과 상관없이 지옥에 갈 수 받게 없다는 것이다.       

Herbert Boyd McGonigle는 Wesley가 증거 한 설교, 『Free Grace』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 설교는 신학적인 대작이다. 예정에 대한 이 첫 번째 설교와 출판물은 Wesley가 교리적으로 반칼빈주의(anti Calvinism)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Calvin과 Calvinist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설교에서 대상으로 삼은 것이 Calvin의 무서운 결정, 즉 ‘잔인한 작정 교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  Wesley는 이 설교를 한 다음 날 “난 잔인한 작정 교리를 공식적으로 반대한다”라고 선언했다. 

Wesley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설교를 조금 더 들어보자.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설교하는 것이 모두 다 공허한 일이 된다. 이미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는 설교가 필요 없다. 설교를 듣던지 아니 듣던지 간에 틀림없이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설교는 유기된 자들에게는 헛된 일이 된다. 선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설교가 소용없다. 그들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설교와 상관없이 그들은 틀림없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설교하는 것도 헛된 일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Calvin의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리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솔직하게 말해 Calvinism 입장에서 보면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은 단지 예정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복음을 증거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눅 15:3-5), 즉 선택받지 못한 사람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지겹도록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만일 정당한 또는 명백한 불평이 있다면 그것은 예정에 적용된다. 내가 이런 말(예정)을 한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서 후손이 멸망할 거을 예견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 이는 장차 있을 일을 모두 예견하시는 것이 그의 지혜의 일부분인 것 같이, 그의 손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며 주관하는 것은 그의 권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Wesley 역시 Calvin의 이러한 주장에 논박한다.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헛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명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성화를 직접적으로 소멸시킨다. 그 교리 자체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성화를 추구해야 함을 파멸시키는 뚜렷한 경향을 띠고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교리는 성결함을 따르고자 하는 맨 처음 동기들을 전적으로 없애 버리기 때문이다… 자기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고 믿는 자에게는 인생의 싸움을 경주하게 할 아무런 동기가 되지 못한다. 자기가 영생이든, 사망이든 둘 중의 하나로 이미 판결이 났다고 믿는다면 성화를 이루기 위해 애쓴다는 것이 불합리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예정의 교리는 성화의 몇몇 특별한 가지들, 즉 온유함과 사랑과 같은 덕목들을 잘라 버리는 경향이 있다   

Wesley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Calvin은 하나님의 다른 특성들, 즉 사랑(요일 4:16), 거룩하심(시 99:9), 의로우심(계 15:3), 공의(사 5:16), 선하심(시 34:8)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있었다.  Wesley는 말라기 3장 6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불변성을 믿었다.  이것이 성경적 사실이라면, 영생의 선물(요 1:12)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불변한 사랑(약 1:17)과 선하심(시 86:5) 역시 포함된다고 그는 믿었다.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서 나오는 Wesley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명령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 명령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다. 즉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그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는 것이다”(막 16:16).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죄에 남아 있기로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있다.  예수님 당시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지니셨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이 사람들은 영적인 자살을 범하고 있었다(요 8:21-24).  Wesley는 예정(predestination)과 선택(election)과 관련해서 개인의 삶에 영향력을 가지고 저항할 수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의지보다는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의지라는 차원으로 이해하였다.

'칼빈과 웨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중 예정  (1) 2024.04.21
칼빈과 예정  (1) 2024.03.17
예정  (0) 2024.03.10
선택  (0) 2024.03.03
작정과 섭리  (1) 2024.02.2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예정(predestination)이란 용어는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들을 이미 정해 놓았고, 인간의 다른 조건들도 이미 하나님이 정했다는 차원으로 이해되었다.  즉 하나님이 미래에 일어날 어떤 것의 원인을 정하심이라고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세계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돌보심의 차원에서 ‘섭리’(providence)로 알려졌다. 섭리는 하나님이 온 우주와 사람들을 위하여 명하신 것을 반드시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 전에’(엡 1:4) 이미 주어진 명령이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그러한 명령은 예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섭리’라는 단어가 성경에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물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요약하는 의미로 사용되어 온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먼저 이 땅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주장한 Calvin의 말을 『기독교강요』에서 들어 보자.  “우리는 하나님을 멀고 먼 영원으로부터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지혜로 작정하시고 일단 작정하신 것을 지금은 권능으로 수행하시는 만물의 지배자요 통치자로 삼는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과 땅과 생명이 없는 피조물뿐 아니라 사람의 계획과 목표에서 시작하여 예정된 목적까지 하나님의 섭리가 주관한다고 선언한다”  Calvin은 하나님의 섭리(God's providence)가 자연적인 사건이든 인간의 결정이든 상관없이 모든 일의 발생을 세밀하게 명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세심한 섭리’(meticulous providence)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원한 선택과 유기에 대하여 말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조건에서 창조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어떤 이들은 영생을 얻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저주를 받기로 미리 정해졌다.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 결과를 얻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얻거나 죽음을 얻는 것이 예정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과 저주받을 사람을 미리 정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Calvin신학만이 보여주는 성격이다.   

성경에는 ‘이중 예정’(double predestination)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 용어가 하나님께서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를 같은 방법으로 실행함으로써 이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그 다지 좋은 용어가 아니다.  그런데 Calvin은 ‘이중 예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신학 곳곳에서 이러한 개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강요』에서 나온 말을 다시 한번 들어보자.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으로 포용하시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진노를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예정하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무차별적으로 구원을 선언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조명해 주신 사람들만이 그의 자비를 구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예정하신 사람들만 조명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버림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하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나의 주장은 여전히 확고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을 빼앗긴 자들은 저주를 받을 일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한 생명으로 창조된 사람들, 즉 선택받고 예정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반면에 영원한 멸망으로 창조된 사람들, 즉 처절하게 버림받는 유기자들이 있다는 관점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였다.  이렇게 미리 선택받은 사람들과 진노받을 사람들을 정한 것을 Calvin의 추종자들은 ‘이중 예정’이라고 명명하고, 그들의 개혁신학의 내용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온건 칼빈주의(moderate Calvinism) 자들은 이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지면 관계상 생략하겠지만, 극단적 칼빈주의자(Hyper Calvinist)와 다르게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무조건적이되,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조건적이라고 믿었다.

Calvin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구원받을 사람들을 따로 선택하셨다는 Augustine과 Luther의 신학 전통을 따랐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책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Calvin이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이 저주받을 사람들을 선택했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신학적 입장은 때로 ‘단일 예정’ (single predestination)으로 불렀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자를 선택하셨으나 선택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운명에 관해서는 아무런 적극적 의지를 표현하지 않고 ‘간과’(preterition)해 버렸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간과’라는 말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저주받을 사람들을 방치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Calvin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응답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닌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인도하고, 다른 사람은 지옥에 가는 것으로 예정되었다는 교리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작정 교리는 잔인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여기에서 ‘잔인한 작정 교리’란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주장하면서 설명한 유기의 교리를 가리킨다.  Calvin은 하나님께서 유기의 창시자라는 생각에 큰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이 생각을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것이 잔인하고 무서운 결정이란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서 후손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

이러한 예정에 관해서 Calvin 자신도 하나님의 예정은 참으로 두려운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가 아니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교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영혼의 문제에 관해 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예정을 굳게 믿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다. 

'칼빈과 웨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중 예정  (1) 2024.04.21
웨슬리와 예정  (0) 2024.03.24
예정  (0) 2024.03.10
선택  (0) 2024.03.03
작정과 섭리  (1) 2024.02.2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예정

칼빈과 웨슬리 2024. 3. 10. 11:25

『What Love Is This?: Calvinism's Misrepresentation of God』의 저자 Dave Hunt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성경 안에서 예정(predestination)과 선택(election)은 서로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는 동의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정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있을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답을 주지만 선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개념 간에 미묘한 차이는 이것이다. 선택은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행위인 반면 예정은 최종적 운명을 위해 그렇게 선택된 이들을 미리 선정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다. 이 두 단어가 의미상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  요약하면 선택과 예정은 자기 개념 속에 서로 함축하고 있는 상호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Reformed 전통에서 ‘예정’은 상당히 폭이 넓은 단어로 사용된다.  이 용어는 수여자(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신자를 위한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과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는 완전히 구원에서 제외된 불신자를 위한 ‘유기’(reprobation)의 양면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선택과 유기의 대상이 모두 죄인이라는 것이다.  영생으로서의 ‘선택’은 하나님의 자비, 즉 죄인들이 행한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호의에 근거한다.  반면에 영원한 정죄로서의 ‘유기’는 하나님의 심판, 즉 죄인들이 행한 것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그리 쉽지 않다.  지난 2천 년간 학자들 사이에서 이 문제를 놓고 살벌하게 논쟁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Louis Berkhof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작정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선택이든 유기이든 간에 하나님 자신이 직접적으로 모두 일으키신다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의심할 바 없이 세상에 죄가 개입되는 것을 확실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거룩함으로 예정하시는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죄로 예정하셨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죄의 조성자가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Systematic Theology』에서 나오는 Berkhof의 말이 사실이라면 Calvin의 예정론을 비판하다 Geneva에서 추방된 Jerome Hermes Bolsec의 주장이 틀린 것 같지 않다.  그는 회중 앞에서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 만들었다며 Calvin을 고소했던 사람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Calvinism 신학에서 타락 후 선택론(Infralapsarianism)과 타락 전 선택론(Supralapsarianism)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Calvin의 추종자들 보기에 이것이 좋은 전통이라고 자부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좋은 전통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중 예정’이 다른 신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면 성경적이지 않을뿐더러, 이 용어가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는 논쟁의 소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Reformed Theology에서만 가지고 있는 골치 아픈 전통이다.         

예정(predestination)이란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Calvinist 입장에서 예정의 근거 본문을 비스름하게 제시할 수 있는 구절들이 있다.  그것이 창세기 6장 8절, 12장 1절, 신명기 10장 15절, 14장 2절, 예레미야 1장 5절, 말라기 1장 2-3절이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정확하게 여섯 번 정도 나온다(행 4:28, 롬 8:29, 30, 고전 2:7, 엡 1:5, 11).  특별히 로마서와 에베소서에 사용된 경우에는 모두 사람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예정하다’로 번역된 동사는 헬라어의 ‘프로오리조’(proorizo)다.  전치사 ‘프로’는 ‘~전에’, 또는 ‘~앞에’라는 뜻이 있고, 동사 ‘오리조’는 ‘제한하다’ 또는 ‘결정하다’라는 뜻이 있다.  이 둘은 합쳐진 합성동사로 문자적인 의미는 ‘앞서 결정하다’, ‘미리 경계를 정하다’가 된다. 

영어로 ‘예정하다’(predestine)로 번역된 것은 ‘‘종국적인 운명을 결정하다’라는 뉘앙스(nuance)가 있지만 헬라어 원어에는 그 뜻이 담겨 있지 않다.  그럼에도 로마서와 에베소서에서는 영어의 뉘앙스가 담긴 의미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운명에 대한 미리 결정된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접두사 ‘프로’(~전에)는 에베소서 1장 4절과 요한계시록 17장 8절 말씀에 비추어 보면 결정이 일어난 시점이 창세전인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구원과 관련해서 예정은 영생을 주려는 특별한 목적에 따라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유기는 비택자들을 영원한 정죄에 처하도록 정하시는 것을 말한다.  

Calvin에게 있어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 of God)이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을 그의 뜻에 따라 미리 정한 것을 예정(豫定)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정론에 관한 교리를 설명할 때 Bernard와 Augustine, 그리고 Melanchthon의 글을 인용해서 설명했다.  이러한 신학자들이 예정을 주장하고 강조한 부분들을 인용해서, Calvin은 하나님의 주권을 핵심이 되는 조직 원리로 삼는 예정 교리를 완전히 체계화했다.  그러면서 『기독교강요』에서 말한 것처럼 예정의 교리를 반드시 성경에서만 찾아야 된다고 강조했다.  이 주장은 Calvin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Calvin의 추종자들 역시 이 입장을 끝까지 고수한다. 

그러면 Wesley는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Calvin의 절대 예정론을 하나도 믿지 않았다.  Wesley는 『The Works of John Wesley』에서 주장한 것처럼 ‘조건적 예정’(conditional predestination)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Wesley가 말하는 조건적 예정은 예지(foreknowledge)를 기초로 한 예정이다.  즉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또 보시고 구원받을 자격이 있음을 아시고 구원으로 예정하신다는 것이다(롬 8:29).  예정에 대한 Wesleyan의 핵심은 바로 예지의 역할이다.  그러면서 그는 『The Works of John Wesley』에서 말하기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이 질문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 모두 다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명 Calvin과 Wesley는 성경이 가르치는 예정을 믿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된 명령의 성격과 범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Calvin의 관점에서 보면 구원의 소유가 하나님의 작정(예정)의 토대에 의존한다고 본다.  즉 예정이 무조건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구원이 어떤 이들을 구원으로 선택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며, 무조건적인 선한 기쁨에 기초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른 이들이 아닌 이들을 선택하심에 있어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으신 것은 전혀 없다.   

반면에 Wesley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택의 능력에 달렸다고 본다.  즉 예정이 하나님의 예지에 기초함으로 조건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충족시켜야 할 조건을 제공하셨다.  하나님은 이 조건을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충족시키시는지에 대해 예지 하시고 이를 기초로 해서 선택하신다.  따라서 선택은 조건적이 되는 것이다.  Wesley의 신학이 잘못된 것인가?  Calvin의 ‘예정론’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둘 다 성경적인가?

'칼빈과 웨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웨슬리와 예정  (0) 2024.03.24
칼빈과 예정  (1) 2024.03.17
선택  (0) 2024.03.03
작정과 섭리  (1) 2024.02.25
원죄  (2) 2024.02.18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선택

칼빈과 웨슬리 2024. 3. 3. 12:13

‘수다한 사람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고후 2:17).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물을 섞어 자신의 이득을 위해 교묘히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혼잡하게 하는 자들’이라는 말에 사용된 동사는 부정하게 ‘이윤’(利潤)을 얻기 위해 순수한 원액 포도주에 물을 넣어 희석시킨 포도주를 파는 행상인들에게 사용하던 단어였다.  당시 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은 자신들만이 유대 법과 연설법을 훈련받은 전문적인 설교자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적인 보화를 파는 ‘밀매인’(NRVS) 혹은 ‘장사꾼’으로 보았다.  우리말 성경에는 ‘혼잡게’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바울은 이 서신의 뒷부분에서 이들을 ‘거짓 사도들’이라고 불렀고, 그들이 ‘사탄의 도구’라고 말하고 있다(고후 11:13-13). 

성경 말씀을 완벽하게 해석하거나 다룰 자격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금의 문제는 장사꾼들이 돈을 벌기 위해 술에 물을 타는 것처럼 신학자나 목사가 개인의 명예와 탐욕으로 인해 성경을 신학적으로 묽게 만들어 ‘자기 해석’(eisegesis)을 한다.  만약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가르친다면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고전 4:6) 않는다면 말이다.  문제는 진리의 말씀 밖에 넘어가 신학적 용어와 신학자의 말을 끌어다가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자기 해석이 꼭 맞은 것 같이 기를 쓰며 주장한다. 

성경에 나와 있는 바울의 글을 읽어 보면 그가 다른 사람과 논쟁을 할 때, 신학자들의 말을 들먹이지 않았다.  심지어 철학적인 사람들이 살았던 아덴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도 신학적으로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고 복음 전파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피력했다(행 17:16-34).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볼로는 어떠했는가?  그 역시 학자이자 웅변가이지만 복음을 증거 할 때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통해 유대인들의 말을 이겼다(행 18:28).  다시 말해 어떤 신학적 이슈(issue)를 가지고 다 아는 것처럼 떠들어 대거나 같은 문제를 반복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것은 관종이나 할 짓이지 목회자가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고전 13:12) 해석할 뿐이다.  이번 글만큼은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지 않고,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적어보고자 한다.

성경은 ‘예정’(predestination)을 가르치고 있는가?(엡 1:5).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미리 예정하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들이 성경에서 나온다.  그중 하나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 누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에 대하여 강한 말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여기서 ‘작정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배치하다’ 혹은 ‘할당하다’를 의미하는 군사적 용어다.  하나님은 각양각색의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작정된 자’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유대인(신 7:7)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거기에는 인종차별이 없다(골 3:11). 

바울은 에베소서 첫 부분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기초를 두기 이전에 선택하셨음을 주장했다.  ‘곧 장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엡 1:4-6).  특별한 목적이나 운명을 위해 개인이나 공동체(community), 혹은 그룹(group)을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것은 선택교리(doctrine of election)의 기초가 된다.  가능한 신학적 용어조차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특별한 백성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선택하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반에 흐르고 있다(창 12:3, 신 7:6-8, 11).  즉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목적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의지(엡 1:5, 11)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엡 2:8).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해서만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가르친다(딛 3:5).   

또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그곳 신자들이 믿게 된 사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음을 알게 된 이유라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그들이 신앙을 가지자 바울은 결론 내리기를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가 복음을 증거 할 때 그들이 믿었다고 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살전 2:13).  그 외에도 바울은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에 관해 언급할 때(살후 2:13), 그것이 우리의 행위가 아닌(딤후 1:9)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 계획된 무조건적인 은혜때문임을 강력히 주장한다(롬 8:28-30, 9:11-13, 살후 2:13, 딤전 5:21). 

그렇다면 선택받은 사람은 복음을 전하든 전하지 않든 어차피 구원을 받는 것인가?  바울의 행적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바울은 세 번에 걸친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랫동안 머문 도시는 고린도였다.  고린도 도시에 선택받은 자들이 많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행 18:9-10), 바울은 그곳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심히 증거 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말씀을 전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할 것을 바울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롬 10:14, 17).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가 전하지 않는가에 달려 있었다(막 16:15-16).       

여기서 궁금한 것은 창세 전에 선택받고 예정된 사람(엡 1:4-5)은 복음을 들을 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선택받은 데살로니가의 신자들을 생각하면 그런 것 같다(살전 1:4, 2:13).  하지만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들이 다 영접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1:11).  오래전 이사야는 이 같은 불신앙을 이미 예견했다(사 53:1-3).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자기 땅’(His own/NKJV)은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작은 민족’(신 7:7) 그리스도의 소유였던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헬라어로 ‘그가 그 자신의 것들에게 오셨다’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메시아를 거부한 것이다(요 12:37-41).  당연히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가장 먼저 외면했다.  도대체 유대인들은 누구를 영접하는 것인가?  요한복음 5장 43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아닌 다른 메시아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사람, 그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된 사람’(엡 1:4)도 주님이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손길을 얼마든지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3장 34절 말씀은 어떠한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예수님의 연민과 사랑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어미 닭처럼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사랑의 날개 아래 모으려고 하셨다.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단 한 번만이 아닌 것 같다.  구약 성경의 몇몇 구절은 사랑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의 ‘날개’ 아래 보호하시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롯 2:12, 시 17:8, 36:7, 61:4, 63:7, 91:4).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기를 ‘원치 않았다’  그분의 사랑을 거부했다.  이스라엘은 과거에 선지자들을 배척하였듯이(마 5:12) 이제 메시아를 배척했다.  그들이 예수님께 오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영생을 거부하는 것이다(요 5:40).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의 제안을 거부한 예루살렘을 보시고 애통해하셨다(눅 19:41).  따라서 선택받은 사람들, 즉 ‘원 가지들’(롬 11:21)도 얼마든지 잘려 나갈 수 있다(롬 11:20).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우는 곳’(요 15:6)이 ‘가라지 비유’와 연결하면 ‘풀무 불에 던져 넣는’ 지옥이다(마 13:41-42).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을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반드시 논쟁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한 구절을 놓고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셨다(마 6:22-23).  이것은 제자들이 가져야 할 영적인 안목을 설명하신 것이지만, 세상에는 좋은 눈을 가진 사람과 나쁜 눈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어떤 눈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꺾이운 원가지들’이라는 구절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이 가지들이 구원을 상실한 참 신자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은 이 가지는 구원이 아니라 상급을 상실한 신자들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 거짓 신앙생활을 하던 자라고 주장한다. 

왜 이런 주장들이 생기는 것일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누구든지 신학적 관점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런 문제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서로 자신의 견해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나팔을 불어댄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이지(고전 1:12-13)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약 3:13-18).  도대체 어느 것이 가장 성경적일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처럼 성경 그대로 믿고 전하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행 2:14-42).  오히려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라는 고통스러운 회개의 반응이 나타난다(행 2:37).  더 나아가 세례를 받는 역사가 나타나고(행 2:41) 구원받은 신자들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으기를 힘쓴다(행 2:43-47).              

성경에서 말하는 택하심은 하나님만이 갖고 계신 ‘미스터리’(mystery)한 비밀이다.  이것은 우리가 신학공부를 해서 발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바울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엡 1:4-6)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누가 예정되었거나 선택을 받았는지 전혀 모른다.  처음에 잘 믿다가 나중에 세상으로 돌아간 데마 같은 사람도 있고(딤후 4:10), 평생 못된 짓만 하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 믿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눅 23:42-43).  이런 일은 우리의 능력 밖에 일이라 하나님 외에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욘 2:9). 

요지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으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는 것이다(빌 2:12).  그 이유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히 9:27).  어떠한 심판을 받는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로 우리가 심판을 받는 것이다(마 16:27, 고전 3:12-15, 벧전 1:17, 계 22:12).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칼빈과 웨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빈과 예정  (1) 2024.03.17
예정  (0) 2024.03.10
작정과 섭리  (1) 2024.02.25
원죄  (2) 2024.02.18
주권과 자유  (2) 2024.01.2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