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중요한 두 가지 권한을 가지고 있다.  즉 말씀 선포권과 치리권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고유 권한 가운데 교회가 치리권을 행사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다.  첫째,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함이며, 둘째,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범죄 한 자를 회개시키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범죄 한 성도에 대하여 먼저 신앙의 형제들이 훈계할 것이며, 그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가 권고할 것이며, 그 말도 듣지 않을 경우에는  치리권을 행사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8:15-16).  또한 그분께선 그 범죄자가 회개하거든 기꺼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눅 17:4).  그러면 교회는 어떤 경우에 치리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  첫째,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 성도가 방탕한 생활을 할 때이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치리권을 행사하기 전에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까닭(고전 4:21)도 바로 이런 면에서이다(참조, 고전 4:6, 5:1-3).  둘째,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거짓된 사상과 가르침을 유포시키는 자에 대하여서이다(참조, 딤전 1:20, 딤후 2:17-18).  그런데 교회는 이러한 치리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사랑의 정신에 입각하여서 할 것이지 원수 대하듯이 하여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고후 2:6-8, 살후 3:15).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지주의 (Gnosticism)  (0) 2021.07.18
만인 구원론(萬人救援論)  (0) 2021.07.11
복음송 (Gospel Song)  (0) 2021.06.27
기독교의 물질관  (0) 2021.06.19
연옥 (煉獄)  (0) 2021.06.1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요한계시록 5장에는 하늘나라에 있는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새 노래’로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장면이 나온다(8-10절).  그런데 요즈음 뭇 성도들 간에서 불리어지고 있는 복음송도 기존 찬송과는 그 형식이 다른 새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복음송의 역사는 19세기 초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800년, 미국 켄터키 주에서 일어났던 대부흥 운동은 집회 시 회중들이 부르기 쉬운 곡에 가사를 붙인 복음송을 창출하였다.  이후 1840년경에는 주일 학교 학생들을 위한 찬송가에도 이 같은 형식의 찬송이 수록되기 시작하였는데 부흥사 무디(D.L. Moody, 1837-1899)와 그의 음악 담당자 생키(I.D. Sankey, 1840-1908)의 활동은 복음송이 온세계의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복음송은 구원에 대한 메시지와 성도들의 신앙적 간증, 하나님께 대한 찬양 등을 어린이들도 이해하고 따라 부를 수 있는 쉬운 가사와 곡에 붙인 것으로서 전도를 목적으로 갖는 부흥 집회에서 가장 효과적이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서는 인간의 감정만을 자극하는데 치중하는 저속한 복음송이 양산되는 듯한 느낌이 있는데 이는 엄히 삼가야 할 일이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인 구원론(萬人救援論)  (0) 2021.07.11
교회의 치리권(治理權)  (0) 2021.07.04
기독교의 물질관  (0) 2021.06.19
연옥 (煉獄)  (0) 2021.06.13
천사(天使)  (0) 2021.06.0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성경이 부정 축재나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에 대하여 엄히 경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왕하 5:20, 약 5:1-5) 그렇다고 해서 물질이나 부, 재물에 대한 소유권 자체 등을 악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누구든지 자신이 수고한 대가를 취득하며 근검절약을 통하여 남보다 많은 부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올바른 성경적 원리이기도 하다(잠 6:6, 11, 마 25:26).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무엇 보다도 다음과 같은 점을 명심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곧 내가 갖고 있는 물질이 맡아서 잘 관리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것이라는 점이다.  이 세상의 삼라만상은 하나님의 것이다(학 2: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창 1:1-3).  그런데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하나님 자신의 뜻을 좇아 사용하도록 사람들에게 맡기셨다(1:26-3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과는 다른 물질관을 가져야 하는데, 곧 물질은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에게 봉사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이다(마 25:31-46, 약 2:14-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거나 축적하기에 급급한데 이는 잘못된 태도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의 필요를 위해 재물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필요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렇지만 필요 이상의 사치나 낭비를 일삼는 것은 정녕 하나님의 소유물을 내 마음대로 횡령, 남용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의 물질이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 아님을 직시하여야 한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때가 되면 썩어지고 없어질 것들에 불과하다(벧후 3:6-12).  우리는 재물을 축적하는데 의의가 있지 않고 그것들을 잘 사용하는데 의의가 있음을 깨달아할 것이다.  일찍이 예수께서는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한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대답하셨다(마 19:16-22).  이 같은 예수님의 명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동일한 명령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기신 재물을 가지고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딤전 6:18)가 되기를 힘써야 하겠다(참조, 벧전 4:9-11).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의 치리권(治理權)  (0) 2021.07.04
복음송 (Gospel Song)  (0) 2021.06.27
연옥 (煉獄)  (0) 2021.06.13
천사(天使)  (0) 2021.06.06
무라토리 단편 (Muratorian Canon)  (0) 2021.05.3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연옥 (煉獄)

연구자료 2021. 6. 13. 15:14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에서는 인간이 죽은 후 거하는 중간 처소로 연옥(Purgatory)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곳은 순교자와 같은 일부 성도들을 제외하고는 성직자들 조차 가서 거하게 되는 곳으로 이 세상에서 지은 죄가 완전히 씻겨질 때까지 고통과 연단을 받는 정화(淨化)의 장소라고 한다.  이곳에서 받는 고통의 정도와 그 기간은 지은 죄의 경중에 비례하는데, 이곳에서 자신의 죄를 완전히 보상한 후에야 비로소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연옥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죄를 보상할 수 있는가?  연옥에 있는 자들은 그곳의 불꽃 중에서 고통당할 뿐 스스로는 자신의 죄를 보상하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다만 지상에 있는 그의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이 그를 위하여 드리는 미사(Missa)나 헌금, 각종 교회 봉사 등에 의해서만 그의 죄는 점점 보상되며 마침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성화된다.  이같은 연옥 교리는 그 기원을 마르시온(Marcion)에게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주장하기를 예수께서 죽으신 후 연옥에 가셔서 그곳에 있는 영들에게 전도하여(벧전 3:19) 천국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한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연옥 사상은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분의 공로를 힘입음으로써만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에 이를 뿐 인간적 공로에 의해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롬 3:23-28).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자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가 그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상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송 (Gospel Song)  (0) 2021.06.27
기독교의 물질관  (0) 2021.06.19
천사(天使)  (0) 2021.06.06
무라토리 단편 (Muratorian Canon)  (0) 2021.05.30
사형 제도의 존폐(存廢) 문제에 대하여  (0) 2021.05.2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천사(天使)

연구자료 2021. 6. 6. 15:18

천사(angel)란 하나님께서 부리는 영(靈)으로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섬기는 자이다(히 1:14). 그런데 성경에는 이 같은 천사가 언제 창조되었는지에 관한 언급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천사들이 함께 기뻐하였다는 욥기 38장 6-7절에 의해 우리는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천사가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천사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지정의를 소유한 존재이다.  그들은 비록 전지(全知)한 존재는 아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와 총명을 부여받았다(삼하 14:20).  그러기에 그들은 선과 악도 능히 분별할 수 있었다(삼하 14:17).  그리고 그들이 기쁨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눅 2:13) 등은 분명히 정감(情感)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과는 구별되는 영적 존재들로서 죽지도 않으며 종족 번식을 위한 결혼도 하지 않는다(눅 20:34-36).  이러한 천사의 수효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에 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천만 천사’(히 12:22), ‘일천 천사’(욥 33:23)와 같은 성경상의 언급으로 미루어 보아 그 수효는 무수히 많은 것 같다.  이 같은 천사들에게는 가브리엘(단 8:16), 미가엘(계 12:7), 스랍(사 6:1-3), 그룹(창 3:22-24) 등이 있는데, 이들의 사역은 다음과 같이 매우 다양하다.  첫째, 이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간에게 전달한다(창 18:9-10).  둘째, 하나님의 백성들을 수호한다(마 18:10). 셋째, 하나님의 심판을 보좌한다(행 12:23, 계 19:17-18).  이외에도 천사는 항상 하나님 곁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쉬지 않고 있는데(계 4:8) 이는 뭇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 할 일이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의 물질관  (0) 2021.06.19
연옥 (煉獄)  (0) 2021.06.13
무라토리 단편 (Muratorian Canon)  (0) 2021.05.30
사형 제도의 존폐(存廢) 문제에 대하여  (0) 2021.05.23
신약 시대의 편지 양식  (0) 2021.05.1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일명 ‘무라토리 정경’으로도 불리는 이것은 1740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발견된 신약 성경의 라틴어 사본이다.  그런데 이를 가리켜 ‘무라토리 단편’ 이라고 이름하는 까닭은 이것이 중간 부분은 떨어져 나간 채 첫 부분과 끝 부분만이 남아 있는 단편(also called the Muratorian Fragment) 일뿐만 아니라 무라토리(L.A. Muratori, 1672-1750)가 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박물관에서 발견하였는데, 이 단편에는 누가복음을 비롯한 신약 성경 및 지혜서와 같은 유대 외경서 그리고 몇몇 책에 대한 비평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무라토리 단편의 기록 연대 및 기록 장소에 대하여서는 전통적으로 A.D. 180년 내지 190년경 로마나 로마 근처에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어 왔었다.  그러나 최근의 학자들은 이 같은 전통적 견해에 반대하여 4세기 초, 동방에서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이 무라토리 단편은 학자들 간에서 아주 중요한 문헌으로 취급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이 단편이 당시 교회에서의 예배 시 ‘헤르마스의 목자서’(the Shepherd of Hermas)가 회중에게 낭독되지 않고 있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헤르마스의 목자서는 A.D. 140년경 로마의 예언자 헤르메스(롬 16:14절에 나오는 허메와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함)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전해지는 묵시 문학서로서 제1차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 이전까지만 해도 많은 교부들에 의해 영감 된 저서로 취급받았었다.  그런데 무라토리 단편이 저술되던 당시 이 헤르마스의 목자서가 교회로부터 별 가치 없는 묵시 문학서로 취급받았는데 이는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무라토리 단편이 4세기 초에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더욱 확실시해 준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옥 (煉獄)  (0) 2021.06.13
천사(天使)  (0) 2021.06.06
사형 제도의 존폐(存廢) 문제에 대하여  (0) 2021.05.23
신약 시대의 편지 양식  (0) 2021.05.16
인자(人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0) 2021.05.0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현대에 이르러 사형 제도의 존폐 문제는 세계적으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를 반대하는 자들은 인도주의적인 견지에서 인간의 생명은 가장 고귀한 것으로 국가나 타인이 개인의 생명을 빼앗을 권한이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이를 찬성하는 자들은 죄와 벌의 평형 원칙을 들면서 범죄자가 타인과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을 끼쳤을 경우에 한해선 그에 상응하는 최고의 벌을 가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에 관한 성경적 견해는 어떠한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 규범적인 측면에 있어서 만큼은 사형 제도를 인정하고 있다 하겠다.  구약 시대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에도 사형 제도를 시행되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사형당하신 것만 봐도 그분께서 친히 사형 제도를 인정하셨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의 질서 유지와 성도들을 보호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이 세상에 권력자를 세우셨다(롬 13:1).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통치자와 국가 법에 마땅히 순응하여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형 제도가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일개인의 사리사욕과 이해관계로 인해 무고한 생명이 사라져 버린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이를 방치하시겠는가?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선 그에게 반드시 보응하실 것이다(렘 17:10).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사(天使)  (0) 2021.06.06
무라토리 단편 (Muratorian Canon)  (0) 2021.05.30
신약 시대의 편지 양식  (0) 2021.05.16
인자(人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0) 2021.05.09
순종이 모범이 된 이삭  (0) 2021.05.0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신약 성경은 총 27권 중 21권이 서신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까닭에 신약 시대 초기의 편지 양식 및 기타 사항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은 신약 성경을 이해하는데 다소 도움이 될 것이다.  신약 시대 초기의 편지들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사적인 편지인가 공적인 편지인가에 따라, 또한 편지의 용도에 따라 몇 가지 양식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이러한 기준에 의해 신약 서신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①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부탁한 빌레몬서는 청원서이면서 천거서(薦擧書)이다.  ② 갈라디아서는 그릇된 유대주의에 대항해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는 변증서이다.  ③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보낸 편지에 대한 바울의 답신서이다.  ④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인들이 보내 준 헌금에 대하여 감사한 감사 편지이다.  ⑤ 데살로니가전서는 성도들이 계속해서 신앙 가운데 자라 가기를 권하는 권면서이다.  이외의 나머지 서신서들도 이와 유사하게 분류될 수 있다.  한편 초대 교회 당시에 자신이 친히 편지를 쓰지 않고 대필자를 시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런 경우 편지 말미에 자신의 서명을 부기하여 그 편지의 내용을 서명자 자신의 것임을 나타내었다(참조, 고전 16:21, 골 4:18).  그리고 편지의 내용을 비밀로 할 경우 대개 그 편지를 접거나 둥글게 말은 후 그 위에 개인의 도장을 찍어 봉하였다(참조, 계 22:10).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라토리 단편 (Muratorian Canon)  (0) 2021.05.30
사형 제도의 존폐(存廢) 문제에 대하여  (0) 2021.05.23
인자(人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0) 2021.05.09
순종이 모범이 된 이삭  (0) 2021.05.02
구스(Cush)  (0) 2021.04.2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신약 성경에는 ‘인자’ (人子)라는 용어가 약 90여 회가 나온다.  이중 대부분의 경우는 예수께서 스스로를 가리킬 때 사용하신 것이다(마 8:20, 막 14:41, 눅 6:5, 22, 11:30, 요 3:13).  인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인데 여자적(如字的) 의미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인자’라고 칭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인자’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이심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다니엘이 이상(異像) 중에 본 ‘인자’가 장차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였던 점에 의해 뒷받침된다(단 7:13).  둘째, ‘인자’라는 용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관계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 말은 곧 그가 하나님이면서 인간의 형체를 입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신 것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인자’라는 용어는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 즉 신성(神性)과 인간의 몸을 입으심, 즉 인성(人性)을 동시에 시사해 준다.  이처럼 진정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진정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죄로 인해 멀어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실 수 있다(참조, 딤전 2:5-6).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형 제도의 존폐(存廢) 문제에 대하여  (0) 2021.05.23
신약 시대의 편지 양식  (0) 2021.05.16
순종이 모범이 된 이삭  (0) 2021.05.02
구스(Cush)  (0) 2021.04.25
히브리인들의 가정 교육  (0) 2021.04.18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1. 약속의 자손 이삭

이삭은 그의 이복(異腹) 형 이스마엘이나 세례 요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출생 전에 이미 그의 출생이 예고되었고, 그의 이름이 먼저 확정되어 있던 자였다.  하나님께선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나타나셔서 이삭 탄생에 대하여 예고하여 주셨다.  그리고 이삭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란 큰 민족이 일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 17:19, 18:10).  그러나 이 같은 약속에 대하여 두 사람은 웃음으로 일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였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져 있었으니 다시금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창 18:11).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고 그 일로 인하여 이제 그들은 기쁨의 웃음을 웃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창 21:6).  이처럼 웃음과 관련하여 이삭의 출생은 ‘그가 웃을 것이다’라는 뜻인 ‘이삭’이라는 이름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아무튼 이러한 에피소우드를 지니고 있는 이삭 출생은 큰 민족 이스라엘의 형성을 위한 역사의 첫걸음이 되었다. 

 

2. 순종의 모본이 된 이삭

단 하나뿐인 독자 이삭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브라함과 사랑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귀하게 성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이삭은 아브라함을 따라 모리아 산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여행의 목적을 물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러 간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제물로 사용할 어린양이 없다는 사실에 이삭은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모리아 산에 도칙한 아브라함은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은 뒤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얹혀 놓고 번제를 드리고자 했다.  이러한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을 것이고, 아브라함은 다만 그 같은 명령을 준행하기 위한 행동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삭은 반항이라고는 전혀 없이 묵묵히 되어가는 모든 일을 순종함으로써 받아들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순종의 결과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하나님께선 이삭의 목숨을 온전히 보존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삭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22:12, 18).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건으로서 이삭의 순종하는 자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그의 결혼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의 늙은 종 엘리에셀을 시켜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구하여 주었다.  당시에는 부모가 자녀들의 배필을 구하여 주는 것이 통례이긴 하였지만 아브라함의 경우에 있어선 분명한 의도를 좇아 취해진 행동이었다.  즉 아브라함은 이삭이 자기 동족인 셈족 계통의 처녀와 결혼함으로써 혈통적 순수성을 보존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창 24:1-4).  이삭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정해진 자기 배필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를 제기함이 없이 그녀를 인도하여 장막으로 들이고 아내를 삼아 사랑하였다(창 24:67).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좇아 온전히 순종하는 아들로서의 신실한 이삭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자기 마음대로 이방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부모를 상심시켰던 에서의 태도와는 무척 대조적이다(창 26:34-35).  이러한 순종 가운데 결혼한 이삭이었지만 무려 20년 동안이나 자녀를 갖지 못하였다(창 25:20, 26).  그러나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과는 달리 인간적인 해결책을 쓰지 아니하고(창 16장), 하나님께 오로지 간구함으로 말미암아 결혼한지 20년 만에 자녀를 갖게 도는 놀라운 신앙을 소유하였다(창 26:21).  아무튼 이삭은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도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삶으로써 ‘주 안에서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엡 6:1)는 교훈과 이울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3:37).는 계명에 있어서도 성도들의 본이 되었다. 

 

3. 이삭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예표적인 형상

이처럼 순종의 모범이 된 이삭도 인간적인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 그는 아브라함과 똑같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을 행하였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이방인에게 책망을 받았다(창 26:6-11).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이 잘못을 범할 때에는 세상 사람들을 통하여서라도 경책 하시고, 그 같은 죄에서 돌이키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좇은 아브라함의 신앙적 행위를 죽기까지 묵묵히 순종하려 한 이삭의 태도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 제물로서 자신을 기꺼이 죽음에 내어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사 53:4-7).  그러한 예표적인 형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자신의 외아들인 이삭을 아무런 저항이나 불평도 없이 기꺼이 제물로 드리는 아브라함(창 22장)과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속하는 대속 제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롬 8:32, 히 10:1-10).  ② 자신이 제물이 될 줄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며 순종한 이삭(창 22:9)과 자기를 낮추사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시며(빌 2:8)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기를 원하셨던 그리스도(마 26:39-42, 막 14:36, 눅 22:42).  ③ 자신을 불태울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간 이삭(창 22:6)과 자신이 못 박힐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신 그리스도(요 19:17).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우리는 왜 이삭의 순종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예표하는가를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약 시대의 편지 양식  (0) 2021.05.16
인자(人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0) 2021.05.09
구스(Cush)  (0) 2021.04.25
히브리인들의 가정 교육  (0) 2021.04.18
기혼 샘(the Spring of Gihon)  (0) 2021.04.1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구스(Cush)

연구자료 2021. 4. 25. 13:59

성경에 나오는 구스, 즉 에티오피아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와는 다르다.  현대의 에티오피아(Ethiopia)는 한때 Abyssinia로 불리었던 나라로서 수도가 Addis Ababa이다.  그러나 구스는 애굽 남방(삿 1:10), 수에네(Syene)의 남쪽에 위치했던 나라이다(겔 29:10).  수에네는 현대의 Aswan으로서 나일 강 첫 번째 폭포에 위치한 애굽의 중요 도시이다.  그러므로 구스는 북수단과 최남단 애굽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오늘날의 Nubia 지방을 저들의 영토로 삼았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구스는 애굽 군주 Sesostris 1세 (B.C. 1971-1930)의 치세 하에 예속되어 있다가 B.C. 1000년경에 독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이 구스 왕조는 B.C. 715년부터 B.C. 663년까지 애굽을 통치하기도 하였는데, 애굽인들은 이를 자신들의 제25 왕조(누비아 왕조) 역사로 취급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구스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것은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했다는 기록이다(민 12:1).  아마도 모세는 본처인 십보라가 죽은 후 구스 여인과 재혼한 것 같다.  또한 압살롬이 죽은 후 그 소식을 제일 먼저 다윗에게 전해 준 자도 구스인이다(삼하 18:31-33).  그리고 예레미야서에는 대적자들의 모함으로 인해 구덩이에 갇혔던 선지자 예레미야를 구해 낸 에벳멜렉 역시 구스인이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렘 38:7-13).  이뿐 아니라 사도행전 8장 27-39절은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혹자는 그가 유대교로 개종한 자였든지 아니면 유대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빌립의 가르침을 받고 세례를 받았었다.

한편 구스인들은 그들의 왕 Zerah의 주도하에 리비아인과 연합하여 남유다를 침공하기도 하였는데 아사 왕에 의해 격퇴당하였다(대하 14:9-15).  그리고 이사야서 37장 9절과 왕하 19장 9절에는 구스 왕 디르하가가 앗수르 왕 산헤립의 팔레스틴 침입을 저지하려고 시도한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앗수르인들은 디르하가를 ‘상한 갈대’라고 조롱하였으며(왕하 18:21) 그를 Eltekeh에서 격파하였는데, 이러한 사건은 이사야 20장 3-6절에 예언되어 있다.  이외에도 이사야 45장 14절, 시편 68편 31절, 스바냐 3장 10절은 구스인들의 개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 중에 포함될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자(人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0) 2021.05.09
순종이 모범이 된 이삭  (0) 2021.05.02
히브리인들의 가정 교육  (0) 2021.04.18
기혼 샘(the Spring of Gihon)  (0) 2021.04.1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0) 2021.04.04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히브리인들의 교육의 기본 단위는 가정이었다.  종교 교육과 도덕 교육은 거의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가정은 곧 학교였다.  잠언에는 이러한 가정 내에서의 교훈을 반영한 부분이 많아(잠 1:8, 2:1, 4:1-4, 7:1, 31:1) 그들의 가정교육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본고(本稿)는 히브리인들의 가정 교육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 후 그리스도인들의 가정교육에 대하여 언급하려고 한다.   

 

1. 가정 교육의 특징

히브리인들의 가정교육은 하나님 중심적이며 실제적인 교육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앙에 실제 생활을 연결시킨 독특한 교육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들의 교육은 ‘들으라’(히, 쉐마)로 시작하는 문장에 잘 반영되었다(잠 1:5, 8:33, 12:15).  신명기에 언급된 <쉐마>는 민족 전체를 상대로 교훈이었지만(신 6:4-9) 잠언의 쉐마는 자녀 교육의 형태와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들의 교육 관념을 잘 나타내 준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른 인간의 기본 집합이었기에(참조, 창 2:18-24), 가정에서의 교육은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물론 이같은 상황은 현재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가정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어린 인격체를 신체적, 이성적, 신앙적으로 성숙하게끔 교육하는 가장 기본 된 기관이다.

 

2. 가정 교육의 내용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신앙으로 인해 그들의 가정은 실제적인 삶의 교육뿐만 아니라 신앙을 가르치는 장(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 교육은 곧 ‘여호와를 알도록’(잠 1:7, 9:10) 가르치는 일이었다.  신앙 공동체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신앙 교육은 곧 선민(選民)으로서의 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기본 교육이었다.  또한 히브리인들은 자녀들에게 양을 치고, 천을 짜며, 음식을 만드는 일 등의 실제적인 생활을 가르쳤다.  물론 아이들의 어렸을 때에는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놀지만(렘 6:11, 슥 8:5) 조금 나이가 들게 되면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게 된다.  아버지가 자녀를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였다(출 13:8, 신 6:7, 20-25).  결국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신앙을 배우고 율법적인 여러 교훈들을 배우며 또한 선민으로서의 삶의 지혜도 익히는 것이다.   

3. 가정교육의 방법

히브리인들의 교육 방법은 상당히 많았다.  탈무드(Talmud)에 보면 다양한 교육 이론이 나타나 있지만 여기에서는 몇 가지로 요약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① 훈계 : 이는 가장 보편적인 교육 방법이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자신들의 가치관이나 경험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했다.  이러한 말씀의 교육은 언약에 근거한 것으로서(창 17:7, 시 74:20, 105:8-9) 권위를 지녔기 때문에 자녀들은 당연히 부모께 순종해야만 했다(레 20:9, 신 21:18). 자녀들은 가정에서 듣는 부모의 훈계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신앙인의 면모를 갖추어 가는 것이다.

② 징계 : 성경에서도 체벌은 긍정적으로 보았다(잠 13:24, 22:15).  이는 잘못된 행동을 교정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반드시 사랑 안에서 행해야지 격한 감정으로 징계하는 것은 도리어 역효과를 초래한다(잠 13:14, 23:13-14).  잘못에 대한 징계를 받는다는 것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비교, 히 12:5-8).

③ 암기와 대화 : 오눌날에도 많이 사용되는 교육 방법으로서 그 효과는 크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억하는 것은 평생 동안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제동 작용을 한다(참조, 신 6:6).  그리고 자녀와의 대화를 통한 말씀의 교육은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했다(신 6:20-25).

④ 의식의 참여 :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의식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생생한 신앙적 체험을 주었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와 어른들이 드리는 제사와 각종 절기 의식들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중심의 생활, 속죄, 안식, 상벌 등의 개념을 체득할 수 있었다.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의 의식은 가장 직접적이고도 실천적인 신앙 교육이었던 것이다.

 

4.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히브리인들의 가정교육은 현대에서도 적용될 부분이 많다.  오늘날 성 윤리의 붕괴와 가정의 해체는 어린 인격체에게 큰 상처를 주기 쉬우며, 이러한 상황을 겪으면서 성장한 사람은 사람과 사회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와 극도와 된 이기주의, 잔인성, 배타성 등의 비뚤어진 성향을 갖기 쉽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우선 가정에서부터 실천하여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올바로 키우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바른 신앙을 교육 받으면서 자란 사람은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역시 올바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나 국가보다 먼저 가정을 만드신 것은 가정의 중요함을 잘 설명해 준다.  가정에서의 교육은 그만큼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신앙에 입각한 가정교육은 어린아이의 평생을 좌우하는 귀중한 일이므로 부모들은 사랑과 모범을 통하여 그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종이 모범이 된 이삭  (0) 2021.05.02
구스(Cush)  (0) 2021.04.25
기혼 샘(the Spring of Gihon)  (0) 2021.04.1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0) 2021.04.04
임마누엘 원리(Immanuel Principle)  (0) 2021.03.28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이사야 7장 3절에 나오는 ‘윗못 수도’(水道)는 예루살렘의 기드론(Kidron) 골짜기에 있는 ‘기혼 샘’과 그곳에 설치되어 있는 수도 시설을 뜻한다.  예루살렘에는 구약 시대부터 두 개의 주요 수원이 있었는데 하나는 기혼 샘이고 또 하나는 엔로겔 샘(the Spring of Enrogel)이다(참조, 수 15:7). 이중 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던 샘은 기혼 샘이다.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이 샘 때문에 시온 산성이 오벨(Ophel) 언덕에 세워질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샘은 시온 성 밖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다윗이 이 지역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이곳 원주민들은 적의 공격으로 인해 물 공급이 차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오벨 언덕의 바위 밑으로 굴을 뚫어 기혼 샘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이었다.  아마도 다윗은 바로 이 수구(水口)를 통하여 성 안으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쉽게 시온 성을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참조, 삼하 5:6-9).  훗날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기혼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후계자로 삼는 의식을 행하였는데(왕상 1:32-39), 이는 다윗 자신이 시온 성의 주인된 것이 기혼 샘 수로(水路) 덕분이었음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이처럼 기혼 샘은 전략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사야 7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북이스라엘과 아람 동맹군이 남유다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아하스 (Ahaz, B.C. 742-725) 왕이 제일 먼저 이곳 수도 시설을 점검하려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참조, 사 7:3). 한편 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Hezekiah, B.C. 725-697) 왕은 앗수르 왕 산헤립(Sennacherib)의 침공에 대비하여 기혼 샘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이는 새로운 수로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실로암’(Siloam) 수로이다(참조, 대하 32:1-4, 30).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스(Cush)  (0) 2021.04.25
히브리인들의 가정 교육  (0) 2021.04.18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0) 2021.04.04
임마누엘 원리(Immanuel Principle)  (0) 2021.03.28
당대(當代)의 의인 노아  (0) 2021.03.2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1. 아브라함의 생애

‘아브라함(Abraham)’이란 이름의 뜻은 ‘열국의 아비’(창 17:5)이다.  그의 이름은 본래 ‘아브람’(Abram)이었는데 그의 나이 99세 되던 때에 아브라함으로 바뀌었다.  그는 셈의 후손인 데라(Thera)의 아들로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였던 갈대아 우르(Chaldea Ur)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의 나이 75세가 되던 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다(창 12:1-5).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헤브론(Hebron)에 정착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손 번성의 축복과 함께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을 약속하셨다(창 15장).  이로써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이 되었으며, 그 증표로 할례 의식이 제정되었다(창 17:9-14).  이후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Sarah) 간에는 약속의 자손인 이삭이 태어났는데 그때 아브라함은 100세였다(창 21:5).  그 후에도 아브라함은 75세를 더 향수(享壽) 하였으니 사라를 상처한 것 외에는 비교적 순탄한 노년기를 보내다가 일생을 마치었다.  그의 주검은 사라가 묻혀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창 25:7-10).

 

2.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결코 인간적으로 완전한 자가 아니었다.  그는 바람직한 결혼 형태인 일부일처(一夫一妻) 제도를 거스려 첩을 둠으로써 가정 불화를 초래하였으며(창 16:1-6), 똑같은 거짓말을 두 번이나 반복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였었다(창 12:10-20, 20:1-8).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움을 받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모든 일에 즉작적으로 순종한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가문에서 출생하였다(참조, 수 24:2).  그렇지만 그는 ‘너희 본토 친적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믿음으로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었다’(히 11:8).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친히 나타나셔서 점차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보다 명확히 계시하여 주셨다. (창 12:7, 17:1-8, 18:1-33).  그리고 이러한 계시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선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셨다(창 15:6).  그 결과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었으며, 이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대하(20:7, 사 41:8, 약 2:23)으로, 하나님께선 ‘아브라함의 하나님’(출 3:15, 마 22:32)으로 일컬음 받았다. 

또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림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그의 경외심 때문이었다.  그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 및 경외심은 자신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칠 정도로 하나님께 순종한 그의 믿음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났다(창 22:1-18).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서 그분이 ‘천지의 주재시며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창 14:22)이신 줄 알고 경외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느 곳에 가든지 먼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릴 때마다 찬양과 기도를 올리는 것을 잊지 아니하였다(창 12:8, 13:4).  즉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기도였던 것이다.  이 외에도 아브라함은 도량(度量)과 사랑이 풍부한 자였다.  그는 길 가는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여 극직힌 대접할 줄 알았으며(창 18:1-8) 거주지를 정함에 있어서 자기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택하라는 아량을 베풀 줄 알았으며(창 13:1-12) 죄악으로 인해 멸망당하게 된 소돔 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재 기도를 드리는 것을 잊지 아니하였었다(창 19:22-33).  결국 이러한 모든 점들이 그의 인간적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믿음의 조상이란 존호(尊號)를 얻을 수 있게 한 것이다.       

 

3. 아브라함의 위치

아브라함은 약 4000년을 걸쳐 내려오면서 전세계의 종교에서 독특하고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오고 있다.  즉 그는 유대인들의 세계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조상으로, 이슬람교 세계에서 있어서는 위대한 선지자로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에서는 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인의 중의 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흔히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야기된다(시 105:5, 롬 4:13).  아브라함의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라는 사실은 구약 전체를 통해서 수차 강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참조, 집회서 44:19-21).  탈무드에는 아브라함이 한 사람의 뛰어난 천문학자 또는 점성술사로서 동서양의 왕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가르쳐 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계시(창 13:15-16, 15:13-16)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아주 본질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아브라함을 이신칭의(以信稱義)의 표본적인 인물로 설명한다(롬 4:1-16).  결국 이와 같은 모든 사실에 비추어 보아 아브라함은 뭇 백성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함 받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God with us)는 의미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 곧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원리를 보여 준다.  족장 시대뿐만 아니라(창 21:22, 28:20), 출애굽 한 후의 광야 생활에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출 14:21-22, 15:19)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 함께 하셨으며 곧이어 성막을 통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다(출 40:34-38).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건축된 성전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심의 상징이었다(참조, 대하 7:16, 시 11:4, 합 2:20).  신약 시대에 와서 그리스도는 곧 임마누엘이셨으며(마 1:23)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오신 성령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증거인데, 특히 성령은 그 임재가 ‘영원하다’는 특성을 지녔다(요 14:16).  물론 평강의 하나님(롬 15:33, 빌 4:9)과 주 예수의 은혜(롬 16:20, 갈 6:18)가 성도들과 함께 계시는 것도 사실이다(참조, 빌 4:23, 살전 5:28, 살후 3:16-18).

이상과 같은 임마누엘의 원리가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떠나거나 방치해 두지 않는다(신 31:6, 대상 28:20).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된다(참조, 창 24:27).  ②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을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신 31:8, 대하 20:17).  그래서 그 백성들은 강하고 담대할 수 있게 된다(신 31:23).  결국 오늘날에도 임마누엘의 혜택을 받는 성도들은 평강과 안식을 소유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보호와 관심하에 있기 때문에 다윗의 노래처럼 기쁨과 감사를 고백하게 된다(시 23:4).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혼 샘(the Spring of Gihon)  (0) 2021.04.1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0) 2021.04.04
당대(當代)의 의인 노아  (0) 2021.03.21
히브리인들의 정결의식(淨潔儀式)  (0) 2021.03.14
성경에 나타난 피(血)의 개념  (0) 2021.02.2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노아’(Noah)라는 이름의 어원은 불확실한데, 그 이름의 형태가 70인역(LXX)에는 헬라어 <노에>로 나와 있다.  ‘노아’라는 이름의 뜻은 ‘휴식’, 안위(安慰)’, ‘구원을 가져오다’이며,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창 5:29)는 말과 관련 지워져 있다.  노아는 아담(Adam)의 9대손인 라멕(Lamech)의 아들이었다.  노아 당시의 세상은 너무도 부패하였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 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창 6:5-7)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노아는 하나님께로부터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인정을 받은 자이다(창 6:9).  그러므로 라멕은 노아가 태어났을 때 인간이 죄악으로 인한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며 위로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노아가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의인’ 또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일컬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지(창 6:8), 자신의 공로는 결코 아니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요일 1:10).  이러한 사실은 비록 노아가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일컬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훗날 포도주에 취하여 자신의 아들에게 보여서는 안 될 치부(恥部)를 드러내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창 9:18-29).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지(엡 2:8-10) 인간 공로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롬 3:23-28).  한편 노아는 하나님께로부터 부패한 인류를 향하여 임박한 심판에 관하여 경고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의 임무는 방주를 짓는 것(창 6:14-16)과 의(義)를 전파하는 것이었다(벧후 2:5).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노아는 한편으로는 방주를 지으며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장차 임할 대홍수에 관하여 증거 하면서 죄악으로부터 돌이켜 회개하므로 구원을 얻으라고 권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롯의 사위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창 19:14), 노아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며 이를 무시하였다.  결국 때가 이르러 노아의 나이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면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다’(창 7:11-12).  이 같은 홍수를 피하여 노아와 그의 아내 그리고 세 아들 및 세 자부(子婦)는 방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을 제외한 전 인류는 지구를 덮은 대홍수로 말미암아 멸절되고 말았다(창 7:21-22).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영적 의미를 추출해 낼 수 있다.  대홍수는 말세에 있을 심판의 예표이다(계 20:12).  노아의 가족들은 성도들을 예표한다.  그리고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므로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심판의 때에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뜻하고 있다.  이윽고 홍수의 기간을 끝이 났다.  601년 2월 27일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에서부터 밖으로 나왔다(창 8:13-19).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그토록 무서운 심판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창 8:20).  이때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다시는 이와 같은 심판을 되풀이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창 8:21), 노아의 가족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라’고 명하였다(창 9:7).  그리고 이 같은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증표로 삼으셨다(창 9:12-17).     

이와 마찬가지로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게 될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3-4).  이후 즉, 홍수 이후에 노아가 다른 자손들을 낳았는지 안 낳았는지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노아에게는 함(Ham)과 셈(Sem), 야벳((Japheth)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고, 이들로 말미암아 다시금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게 되었으며(창 10-11장), 노아는 전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홍수 후에도 노아는 350년이나 더 삶을 영위(營爲)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의 노아의 생에 관하여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창세기 9장의 기록에 의하면 홍수 후 노아는 농사짓는 일에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때에 맞추어 그는 포도를 재배하였고 전술(前述) 한 것처럼 어느 날 그는 포도주를 마시고 이에 취하여 벌거벗은 채 그의 장막 안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창 9:20-21). 그런데 이 같은 노아의 실수로 인하여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창 9:25).  아무튼 노아의 조그마한 실수가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음을 볼 때 우리는 자신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삼가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완전치 못하던 노아가 ‘의인’이라 칭함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향후(向後) 노아는 950세를 끝으로 일생을 마친다(창 9:2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성경상에 나타난 히브리인들의 정결과 부정 개념은 단순히 위생학적 측면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측면과도 중요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특히 거룩하며 완전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도덕적, 물리적인 부정은 종교적 의식을 통한 정결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제정된 것이 곧 모세의 율법에 명기되어 있는 제반 정결 의식이다(레 4:22-26, 5:2-10, 12:1-8).  그러나 본고(本稿)에서는 도덕적 정결 의식과 관계되는 속죄제(贖罪祭)와 속건제(贖愆祭) 같은 제사 제도에 관해서는 다루지 아니하고 물리적, 육체적인 부정과 관계된 정결 의식에 관하여서만 살펴보려고 한다.      

물리적, 육체적 부정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정결 행위는 모세의 율법이 제정되기 이전부터 있었다(창 35:2, 출 19:10, 14-15).  그러나 몸을 깨끗하게 하고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는 의식적인 규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세움을 입게 됨과 더불어 생겨났다.  이러한 규례에 의하면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죽은 시체와의 접촉으로 인한 부정을 씻기 위하여 의복 및 기구들을 깨끗게 하여야 했다(민 19:1111-16).  그리고 여인들은 월경 이후(레 15:19-23)와 출산 이후(레 12:1-8)에 유혈(流血)로 인한 부정으로부터 반드시 자신의 몸을 깨끗케 하여야 했다.  이 외에도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은 그 병이 완치되었을 때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의 병 나음을 보이고 의식적 정결을 받아야 하였으며(레 14:1-20), 부정한 짐승의 사체를 만지 자는 물로 몸을 씻고 의식적 절차를 밟아야 했다(레 11:1-47). 

결론적으로 말해서 히브리인들의 이 같은 정결 의식에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이러한 의식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으로서 각종 죄악과 부정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여 거룩하게 한다는 의식(意識)을 지니게 된 것이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마누엘 원리(Immanuel Principle)  (0) 2021.03.28
당대(當代)의 의인 노아  (0) 2021.03.21
성경에 나타난 피(血)의 개념  (0) 2021.02.21
제사(祭祀)에 대한 기독교 입장  (0) 2021.02.14
죄의 기원  (0) 2021.02.0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종교적 의미에서 피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중 하나는 ‘생명’을 나타내는데(레 1711, 14), 이는 구약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피에 대한 속죄(히 9:14-22)의 개념을 갖는 ‘죽음’이며 이는 신약적인 사고(思考)라고 할 수 있다.  전자(前者)의 의미에서 볼 때 피는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피를 흘릴 경우 분명한 하나님의 복수를 일으킨다는 보복적 개념과 더불어(민 35:3234), 제사에 있어선 반드시 희생 제물의 피로 속죄하고(출 8:29), 거룩하게 하여야 한다는 개념이 형성된다.  후자(後者)는 구약적인 피의 개념이 더욱 확대 발전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중심으로 설명된다(롬 3:24-25).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 피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는 제물이 되었으며(골 1:20), 인간들은 그의 피의 효력을 동참(同參) 하기 위해서 그 피를 마셔야만 한다(요 6:53-56).  이것이 바로 성만찬이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피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정점(頂點)으로 하여 전개된다(참조, 히 9:22, 10장).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대(當代)의 의인 노아  (0) 2021.03.21
히브리인들의 정결의식(淨潔儀式)  (0) 2021.03.14
제사(祭祀)에 대한 기독교 입장  (0) 2021.02.14
죄의 기원  (0) 2021.02.07
구약에 언급된 용사(勇士)  (0) 2021.01.3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죄의 기원

연구자료 2021. 2. 7. 15:45

최초의 죄는 낙원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 결과로 세상에 들어왔다(롬 5:12).  이 최초의 죄는 뱀의 형태로 가장한 사탄의 시험에 의해 발생된 것으로 사탄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불신의 씨를 뿌렸다.  결국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것을 범함으로써 하나님과 맺은 행위 언약을 파기했던 것이다(창 3:6, 호 6:7).  따라서 인간은 그 행위 언약을 파기함으로 지적인 면에서는 불신앙과 교만을, 의지면에서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을, 감정면에서는 금지된 실과를 먹으려는 호기심을 나타내었다.  그 결과로 인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전적으로 타락하여 사망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말았다(창 3:19, 롬 5:12, 6:23).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에 나타난 피(血)의 개념  (0) 2021.02.21
제사(祭祀)에 대한 기독교 입장  (0) 2021.02.14
구약에 언급된 용사(勇士)  (0) 2021.01.31
구제의 성경적 의미  (0) 2021.01.24
지혜(智慧)에 대하여  (0) 2021.01.1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용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에는 힘센 자를 의미하는 <엘레>(15:15, 41:25), 특이하게 강하고 용감하거나 키가 큰 자를 의미하는 <깁보르>가 있다(6:4, 1:14, 6:2, 8:3, 10:7, 5:13, 삼상 2:4, 삼하 1:19, 23:8, 왕상 1:10, 왕하 5:1, 16:14, 33:16, 42:13 ).  그런데 구약에서 용사라 하면 보통 <깁보르> 또는 그 복수 형태인 <깁보림>을 말한다.  성경에서 <깁보림>이란 단어가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62절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사람의 딸들의 자식, <네피림><깁보림>으로 불리워졌다. 

니므롯도 역시 영걸로 번역되어 있으나(10:8), 원문에서는 <깁보르>인데, 이는 세상에 처음으로 뚸어난<깁보르>였다.  그리고 가나안의 엣 거인족(2:11, 3:11, 12:4, 13:12, 15:8, 17:5, 18:16), 팔레스틴 서남 지방의 거인들(삼하 21:16-22)과 권능있는 자들도 <깁보림>이라고도 불리워졌다.  그렇지만 구약에서 가장 활약이 컸던 <깁보림>은 다윗과 그를 따르는 30인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적용된 <깁보림>이란 명칭은 뚸어나게 강한 무사, 즉 영웅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30인의 <깁보림> 외에 다웟은 목숨을 걸고 충성하는 600인의 <깁보림>을 두었으므로 재위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발휘 할 수 있었다(참조, 삼하 17:8, 23:8-39).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도 영적인 싸움에 있어서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용사들인 <깁보림>, 즉 십자가의 정예병(精銳兵)들이 되어야 한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사(祭祀)에 대한 기독교 입장  (0) 2021.02.14
죄의 기원  (0) 2021.02.07
구제의 성경적 의미  (0) 2021.01.24
지혜(智慧)에 대하여  (0) 2021.01.17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가정  (0) 2021.01.1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잠언 11장 24-25절에서는 구제를 좋아하는 자가 풍족하게 되며 부하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구제는 부하게 되는 지름길이지만 그보다는 먼저 성도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인 것이다.  따라서 본고(本稿)는 구제의 의미와 대상, 범위와 축복 등에 관한 사항들을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 할 구제 의무에 대하여 논하려 한다. 

 

1. 구약에서의 구제

구약에서는 가난한 자와 과부, 고아를 돌보는 자선적인 성격의 구제가 요구되었다.  율법에서는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추수하지 말고 남겨 놓으며,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고 감람나무나 포도나무도 한 번 떤 후에 남은 열매를 줍지 말고 그대로 두어 가난한 자나 고아, 과부, 나그네들이 취할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19:9-10, 23:22, 24:19-22).  또한 가난한 사람이나 배고픈 사람이 길을 가다가 밭이나 포도원에서 배를 채우는 것도 허락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3년마다 소득의 10분의 1을 바쳐 레위인이나 나그네, 고아와 과부를 돕는 일에 사용하였다(14:28-29).  그리고 밭은 7년마다 갈지 않고 남겨 두어 백성 가운데 가난한 자들이 소산물을 먹을 수 있게 하였다(23:11).  이와 같이 가난한 자와 배고픈 자, 또한 사회적으로 나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노릇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들을 출애굽시키신 하나님의 자비를 상기하는 의미가 있었다(24:22).

 

2. 신약에서의 구제

신약 시대에 와서도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는 여전히 강조되었다(13:29).  그러나 그 의미는 보다 확장되고 영적인 것이 되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구제의 행위 자체보다는 그 동기의 순수성과 영적인 의미를 강조하셨던 것이다(11:41).  그리스도의 구제관은 구제 행위는 그리스도 자신을 돕는 일이며(25:42-46), 하늘에 각자의 보물을 쌓는 것(12:33)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구제는 은밀하게 또 자진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6:3).  또한 초대 교회에서도 자발적인 구제는 강조되었으며(4:32-35, 12:13), 사도 바울도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4:28)고 말하여 구제와 그리스도인의 선한 노동 사이에 관계를 밝혔다.  교회의 첫 직분자가 임명된 것도 구제 사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다(6:1-6).  이와 같은 구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13:16)이었으며, 자신의 신앙이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믿음의 표현이었다(2:14-17, 요일 3:16-18).

 

3. 구제와 전도

구제는 영적인 동기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11:41, 12:33).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구제에 힘쓸 때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다.  결국 구제와 전도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둘은 사랑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 지는 것이다(고전 13:4).  복음의 전파가 주의 명령이듯이 구제도 주께서 명하신 일이므로 성도들은 구제를 통한 은혜의 실천에 힘써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구제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성도의 의()가 되기도 하며(10:4, 31), 보상이 약속된(참조, 58:7-8) 행위이기도 하다.  결국 구제는 전도와 병행되거나 혹은 선행되어야 할 성도의 귀중한 덕목 가운데 한 가지이다. 

 

4. 구제의 내용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은혜의 실천적 행위라면 구제의 내용은 당연히 삶의 전영역을 포함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육 사업이나 의료 사업 등도 모두 구제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부당하게 억압받거나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자들을 위하여 변호하는 일도(31:8-9), 구제에 포함된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외치는 모든 것이 구제가 될 수 있으며, 이때에 성도들의 자기 희생적인 봉사는 곧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5:13-16).

 

5. 결론

구제는 사랑에 근거한 행위이다.  따라서 사랑이 없이는 참된 구제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논리에서 볼 때 현대 교회에 구제가 차츰 무시되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적극성이 메말라 가는 현상을 반증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각성해야 한다.  교회의 헌금은 보다 사회적인 자선 사업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  물론 예배당을 훌륭하게 짓고 교인들 사이의 사랑을 나누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병든 자들을 돌보고 자라나는 세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며 고아원과 양로원을 세우고 재난을 당한 자들에게 신속하고도 적절한 도움을 제공하는 일도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교회는 세상을 선과 사랑으로 정복할 의무가 있다(12:21).  교회와 세상은 결코 이원적(二元的) 인 것이 아니다.  세상도 역시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으며,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을 선포하고 증거할 사명이 있는데, 이 사명은 선교와 구제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참조, 딤후 4:7, 벧전 3:13).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의 기원  (0) 2021.02.07
구약에 언급된 용사(勇士)  (0) 2021.01.31
지혜(智慧)에 대하여  (0) 2021.01.17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가정  (0) 2021.01.10
히브리인들의 혼인 절차 및 풍습  (0) 2020.12.2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일반적으로 신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 호크마>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 말씀대로 지키며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9:10)이며, 이 지혜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이다(2:6).  이는 인간의 삶을 의미 있고 영화롭게 해준다(4:8).  물론 인간의 경험과 지성(知性)으로 얻어지는 처세(處世)나 단순한 문제의 해결에 관한 인간적인 지혜도 있으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참되며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값을 알지 못할’(28:13) 정도로 귀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지혜를 진주(8:11)나 금보다(16:16) 보배로우며 생명을 보존케 하고(7:12) 능력 있게 하며(7:19) 장수하게 하는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9:11).

 

1. 지혜로운 사람들

현자(賢者)는 개역 성경에서 지혜자’, ‘술객’, ‘박사’,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이 범주에는 박수’, ‘점장이’, ‘갈대아 술사등이 모두 모함된다.  성경의 뛰어난 인물 가운데 환상과 꿈을 해석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다니엘도 자신의 능력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 때문임을 말하였다(1:20, 2:30).  또 히브리인으로서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된 요셉도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이었다(7:10).  이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힘입는 자들은 그 삶이 경건했고 능력이 있었다. 

 

2. 구약에서의 지혜

구약에 나타난 지혜의 개념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뜻대로 사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의 지혜는 역사(歷史)를 통한 이스라엘의 체험과 신앙에서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다.  즉 그들이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은 신앙이지만 이는 곧 지헤였으며 하나님은 그들의 간구와 호소에 응답하셨던 것이다.  또 잠언에 많이 나타난 음녀와 음란<, 포르네아>를 피할 지혜를 촉구하는 경고도 결국은 신앙의 정절을 지켜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영적인 의미를 지닌다(2:16, 5:15, 7).  왜냐하면 음란이라는 단어의 원어적(原語的) 의미에는 우상 숭배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여러 선지서에 나타난 음란은(23:17, 3:8, 2:5)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며, 지혜는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고 바른 신앙을 지키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3. 신약에서의 지혜

① 언어적 관찰 : 지혜<, 소피아>라는 말의 원어는 능력’, ‘지식’, ‘재간이라는 뜻도 있다.  신약에서는 지혜가 이러한 동의어들과 함께 쓰여 지혜와 능력’(5:12, 7:12), ‘지혜와 지식’(2:3), ‘지혜와 총명’(1:9) 등과 같은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 같은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 지혜란 파동적이며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지는 것이 아니고 역동적(力動的)이며 능력 있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② 사도 바울과 지혜 : 바울은 세속적인 지혜를 비판하면서 지혜를 십자가의 구속 사건에만 연관시킨다.  즉 세상의 지혜는 단지 지식에만 그칠 뿐이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3: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들을 구원하셨는데 이를 믿는 것이 곧 영적인 지혜라는 것이다(고전 1:18-31).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관한 지혜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지혜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4. 신자와 지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미 성령의 선물로 지혜를 받았다(1:8, 17).  따라서 신자들은 지혜롭게 행동하도록 노력해야 하며(5:15, 4:5) 만일 지혜가 부족할 경우에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된다(1: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성경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간에서 형성되는 여러 관계에 대하여 종종 언급하고 있다(5:18, 15:20, 22:6).  이 같은 언급들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사랑과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제시해 주는 규범인데 이러한 말씀들은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이 해체되고 이로 말미암아 인격적, 정신적 결함을 지닌 자녀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환경에서 성장하며 심하게는 사회에의 부적응 상태에 빠지게 되는 사례가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은 대다수가 다시 결혼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은 결국 성경적인 가정관이 정립되지 못한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본고는 이러한 사회 병리 현상의 원인이 되는 가정의 분열과 해체를 막고 나아가서는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가정상을 제시하여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갖는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재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려고 한다. 

 

1. 가정에 대한 성경적 근거

가정의 기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연유한다.  창세기 218-24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돕는 배필, 즉 여자를 지으시고 두 사람을 하나되게 하셨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서 가정은 신적 기원을 갖는 귀한 결합체가 되었다.  가정은 남녀간의 결혼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결혼은 성경에서 귀하고(13:4) 축복받은 것(18:22)으로 인정된다.  결혼은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며(19:5), 자녀를 얻는 합법적인 수단이자(1:28, 127:3) 정당한 성생활을 갖는 길이다(5:15-19, 고전 7:2-9).  한편 성경에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부부관계로 묘사되어 있으며(54:4) 그리스도와 교회가 남편과 아내로 표현되어 있다(5:23-25).  이는 결혼으로 인해 맺어지는 가정이 얼마나 성스러운 결합인가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예이다.

 

2. 남편과 아내

가정의 최소 단위는 부부이다.  부부는 가정을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고 기쁨을 주며 평안을 주는 장소로 가꾸어 나가야 할 책임을 진다.  또한 남편과 아내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과 의무를 지는데 그 바탕은 신앙과 사랑이다.  즉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과 관용을 베풀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주며(참조, 5:28, 3:19)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기까이 수고할 수 있어야 한다(3:13).  그리고 아내는 집안 일을 잘 보살피고(31:27) 남편에게 순종하여(5:22, 벧전 3:1) 가정의 평화와 화목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이렇게 서로간에 사랑과 봉사의 책무를 지는 것은 결혼에 수반되는 의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는’(2:5) 배려라고 할 수 있다.

 

3. 부모와 자녀

결혼한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가정은 보다 복합적이고도 깊이 있는 규범을 필요로 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녀를 기르는 일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엄한 개체를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도록(4:13-15) 교육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먼저 부모는 자녀를 양육할 때에 주의 교양과 훈계로 교육해야 한다(6:4).  어린 자녀는 아직 미성숙하여 그 영혼과 인격이 상처받기 쉽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걸고 부모의 기대에 부흥하도록 강요하는 행위, 부모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자세, 혹은 자녀의 입장과 개성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편애(25:28, 27:3), 무관심 등은 자녀로 하여금 분노와 비통, 낙심을 불러일으키기 쉽다(참조, 3:21).  따라서 부모들은 자녀가 자신들의 소유물이 아니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귀한 개체라는 사실을 인식하여 올바른 신앙 인격을 지닌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도록 교육하고(22:6) 권면하고(살전 2:11-12) 징계하며(13:24, 19:18) 기도해야 한다(17:15, 7:26).  한편 이와 마찬가지로 자녀들에게도 부모에 대한 공경과 순종의 의무가 있다(6:1-3, 3:20).  또한 자녀들은 바른 품행과 정직함으로써(20:11) 부모를 그쁘게 해드려야 한다(10:1, 15:20, 23:24).

 

4. 사랑, 대화, 관심, 책임

현대의 복잡한 생활, 특히 인터넷과 휴대폰은 가족간의 유대를 늦추어 놓았다.  그래서 가정의 소속원들은 저마다의 일에 쫓기어 가정에 쏟아야 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빼앗기고 있다.  당연한 결과로 가족은 서로 무관심해지며 청소년 범죄는 증가하고 성적인 문란이 보편화된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런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부터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서로가 사랑 가운데 관심을 갖고 작은 일에서 큰 일에 이르기까지 대화를 나누며 의논하고, 다른 가족에 대한 자신의 인격적 책임을 다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가정이야말로 신뢰가 있으며 기쁨과 안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상과 같은 바람직한 가정을 갖는 것은 작게는 한 가정의 기쁨이며, 크게는 타락한 세상에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기쁨을 전하는 귀한 일이 된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제의 성경적 의미  (0) 2021.01.24
지혜(智慧)에 대하여  (0) 2021.01.17
히브리인들의 혼인 절차 및 풍습  (0) 2020.12.27
시대별로 살펴본 히브리인들의 혼인  (0) 2020.12.20
기독교인의 보증(保證)  (0) 2020.12.1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1. 약혼(約婚)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약혼은 법적 구속력을 지니고 있는 혼인 약속(20:7)으로서 결혼 전에 체결되었다.  약혼은 대개 결혼 계약서나 돈을 처녀의 아버지에게 줌으로써 성립되었다.  이렇게 하여 약혼한 여자는 기혼녀(旣婚女)로 간주되었으며 약혼한 여자를 강간한 사람은 강간죄로 돌에 맞아 죽었다(22:23-27).  그리고 약혼한 남자는 병역 의무를 면제 받았다(20:7).

 

2. 혼인식(婚姻式)

약정하였던 약혼 기간이 끝나면 실제적인 혼인식이 거행된다.  혼인식을 거행할 신랑과 신부는 특별한 치장을 하였는데 신랑은 머리에 사모(紗帽) 썼으며( 3:11, 61:10), 신부는 화려하게 수놓은 옷과 보석, 등으로 치장하며( 45:14-15, 61:10), 면사포를 썼다( 4:1-3, 6:7).  면사포는 신방에서 신랑에 의해 벗기워진다.  신부는 친구들의 호위를 받으며 신랑에게로 인도된다( 45:15).  그러면 하객(賀客)들은 신혼 부부를 위해 연가(戀歌) 부르고 축하하며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해 준다.  그런데 가지 특이한 것은 히브리인들의 혼인 예식이 밤에 거행된다는 점이다(참조, 25:1-13).

 

3. 혼인 잔치

혼인식이 끝나면 곧바로 혼인 잔치가 거행된다.  이 잔치는 대개 신부의 집에서 거행되는데 때로는 신랑 집에서도 거행되었다.  이 잔치는 일주일간이나 계속되는데 이때 히브리인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브르며 흥겨웁게 논다.  이러한 혼인 잔치가 끝나는 저녁에서야 비로소 신랑과 신부는 첫날밤을 보내게 되는데 신부는 그녀의 부모에 의해 신방(新房)으로 인도된다(29:21-30, 15:1-2).  한편 면사포(面紗布)를 신부는 혼인식에 썼던 이때까지 계속 쓰고 있어야 한다.

 

4. 신분의 처녀성 확인

혼인 첫날밤을 보내게 되면 신부의 부모는 딸의 처녀성을 증명하는 표적으로 성 관계를 가지면 생기는 혈흔(血痕)이 묻은 시이트를 보존한다.  그리하여 신랑이 신부의 처녀성을 의심할 경우에 이 시이트를 제시하여 처녀성을 증명해 주어야 했다.  만일 이때 신부의 처녀의 표적이 없으면 그 신부는 주민들에 의하여 돌로 쳐죽임을 당하게 된다(22:13-21).  이러한 관습은 오늘날에도 히브리인들 간에서 지켜져 오고 있는데, 이와 유사한 의식을 일부 회교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히브리인의 혼인식이 두 남녀의 결혼을 얼마나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 풍조는 두 남녀의 결합을 가볍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희(遊戲)로까지 취급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크게 각성해야 할 문제이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1. 바벨론 포로 이전 시대 (B.C.586이전)의 혼인

족장 시대에는(B.C.2160-1870)에는 근친 결혼’(consanguineous marriage)이 행하여졌었다.  아브라함은 그의 의붓 누이인 사라와 결혼하였으며(20:12), 야곱은 외삼촌의 두 딸과 결혼하였다(29:16-30).  비교적 고대에는 이러한 근친 결혼이 지리적, 문화적 여건으로 인해 불가피하였는데, 족장 시대 당시의 히브리인들은 순수한 여호와 신앙의 전수를 위해 이러한 결혼 형태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채택하였다(참조, 24:4, 29:18-30).  그러나 모세 시대에는 더 이상 근친 결혼이 필요치 않게 되었으며, 그보다 한 가정의 성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결혼을 금하셨다(18:1-18).  아들이 없이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기 위하여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부인과 결혼하는 계대 결혼 (繼代結婚)은 족장 시대와 마찬가지로(참조, 38) 족장 시대 이후에도 계속 시행되었다(참조, 25:5-10). 

한편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는 일부일처제 (一夫一妻制)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상적인 결혼 제도임을 불구하고(2:18-25), 성경에는 여러 아내를 거느렸던 자들이 나오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25:1) , 야곱(29-30), 다윗(삼하11:26-27, 20:3), 솔로몬(왕상11:3)이다.  뿐만 아니라 모세 오경에도 이같은 중혼’(重婚)을 허용하고 있는 듯한 구절이 나온다(21:15-17).  그러나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이같은 중혼이 종족 번식을 중요시 여기던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서 허용되었던 것이지 결코 보편화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당대의 올바른 사회상(社會像) 및 가치관을 지시해 주고 있는 지혜서에 일부다처제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또한 사사 시대와 왕국 시대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에도 일반 서민층 사이에서 중혼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확인될 수 있다.   

 

2. 바벨론 포로 이후 시대의 혼인

바벨론 포로 생활이 히브리인들의 가정 생활에 여러 가지 변화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극소수의 예외자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계속하여 일부일처제를 준수하였다(참조, 외경 토비트).  그리고 당시의 사회는 여전히 가장이 집안의 모든 문제를 관장하는 가부장적 사회였으므로 배우자를 선택한다든가 그밖에 혼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는 일은 부모에 의해 결정되고 추진되었다. 한편 당시의 생활 풍속을 살펴볼 것 같으면 신부(新婦)는 돈이나 간단한 결혼 계약서(Kethubah)에 의해 살 수 있었으며, 동거 생활에 의해서도 얻을 수 있었다(참조, Elephantine의 파피루스).  이때 신부를 사기 위하여 지불되는 돈은 ‘mohar’라고 불리웠는데, 바벨론 포로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 돈은 처녀의 아버지에게 지불되었다(참조, 34:12, 22:16-17, 22:19).  한편 동거 생활에 의해 약혼할 경우에는 먼저 남자와 여자가 개인의 침실에 들어가서 저들의 약혼 의사를 표시하여야 했다.  그래서 저들의 의사가 합치된 후에야 비로소 동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B.C. 3세기에 이르자 율법 학자들에 의해 이러한 비공식적이고 비합법적인 혼인 형태가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그 범법자들은 대중 앞에서 매질을 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3. 신약 시대의 혼인

초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는 순결(純潔) 상태로서의 처녀성 개념이 성도들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물론 혼인을 하는 것이 교회 감독에 의해 정죄를 당하거나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순결의 서열에 있어서 혼인은 세번째 위치를 차지하였다.  첫 번째 순결은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처녀성이었으며, 두 번째 순결은 결혼한 후에나 배우자가 죽은 후에 독신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교부들에 의해서도 장려되었다.  Jerome은 수도 생활의 아름다움을 역설하였으며, Augustin도 독신 생활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Clement나 안디옥의 Ignatius와 같은 교부들은 독신 생활보다는 혼인 생활에 있어서의 순결을 더 강조하였다. 그래서 Clement성결한 이미지로서의 혼인은 그것을 더럽히는 것들로부터 깨끗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상은 혼인(婚姻)을 하는 것보다는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으며,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는 혼인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한 바울의 사상(고전7)에 크게 영향을 입은 것 같다.  그러나 이같은 사상에도 불구하고 정통적인 유대주의자들 간에서는 결혼 생활이 계속적으로 장려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아내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로 믿었기 때문이다(참조, 117:3, 18:22).  심지어 A.D. 2-5세기에 집필한 유대인들의 탈무드(Talmud)에는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회중이 모여야 한다는 규정까지 나와 있다.  그러므로 많은 유대인 공동체들은 이러한 규정을 구속력이 있는 법규로까지 채택하였다.  한편 세월의 흐름에 따라 결혼식과 관계된 몇 가지 요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전통적으로 신부 집에서 혼인식이 거행되었던(참조, 25:1-13)과는 달리 10세기에 이르자 혼인식은 점차 회당(synagogue)에서 거행되기 시작되었다.  그리고 엄격하게 동족혼(同族婚)만을 고수해 오던 관습도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조금 관대하여져 유대인들은 외국인과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예배용 혼례 찬송의 도입이 눈에 띄게 된 것도 이 시대에 나타난 변화 중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구약 성경 잠언 6장에서 지혜자는 사고가 생길 때 실제적인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보증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데, 이것은 경제적인 무절제와 만용을 경계한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본고는 성경에 언급된 보증의 의미를 파악함과 동시에 기독교인이 경제 활동을 함에 이어서 갖추어야 할 보증 이행의 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보증의 의미

성경에서 언급된 보증에 대한 단어는 보증물’(guaranty)의 의미도 포함한다.  이것은 채무자가 빚을 질 때 그 보증으로 채권자(債權者)에게 넘겨 주게 되는 담보물 또는 재산상의 물건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채무자(債務者)가 빛을 지불할 만기일이 되었을 때, 지불 능력이 없는 그를 대신해서 보증인이 중간에 나서서 해결해 주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보증인은 채무자의 지불 이행의 책임을 지며 때에 따라서는 채무자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책임지는 대리 채무인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할 경우가 있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물로 하시어 그를 믿고 회개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약속, 곧 구원의 약속을 받게 해주셨다(7:22).

 

2. 구약에서의 보증 행위

구약 성경에서는 보증 행위에 대하여 잠언 외에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참조, 17:3, 119:122).  그래서 우리는 보증과 유사한 저당 또는 담보를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히브리 사회에서 채무자는 채무 이행의 보증으로 여러 종류의 담보물을 채권자에게 저당 잡히게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유대인 채무자들은 채무 불이행으로 인해 자신의 자녀들까지 채권자에게 노예로 넘겨 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왕하 4:1-7).  하나님의 백성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되지 못한 것이었다(참조, 5:1-13).  또한 채무자가 채무 불이행으로 인해 보증인이 망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잠언에서는 자기 능력을 능가하는 보증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았다(11:15, 17:18, 20:16, 22:26, 27:13).

 

3. 결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보증을 잘못 서서 망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결코 아무도 보증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신뢰와 사랑이 무너진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가능한 보증을 서지 말아야 하겠지만(22:26), 만약 보증 행위를 한다면 무절제와 만용을 피하여 자기 능력에 맞는 보증 행위를 해야 한다.  아울러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되어 주신 사랑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디르사라는 말은 즐거움이란 뜻의 히브리어 <티르차>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이 도시는 본래 에브라힘 산지 북쪽에 있던 가나안의 왕도였으나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시에 여호수아에게 정복당하였다(12:24).  그 후 분열 왕국 시대에 이르자 디르사는 오므리(Omri, B.C. 885-874) 왕이 사마리아로 환도(還都)할 때까지 잠시나마 북왕국의 수도가 되었다(왕상 16:23-24).  즉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 1(Jeroboam, B.C. 931-910)가 디르사에 거주한 이래(왕상 14:17) 엘라(Elah, B.C. 886-885), 시므리(Shimri, B.C. 885)와 같은 자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던 것이다(왕상 16:8-10).  

이러한 도시인 디르사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적으로 요단 계곡으로 들어가는 Wadi Farah의 내리막 길목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길은 요단 강 동편에서 에브라힘으로 가는 길 중 제일 좋은 길이며 서쪽으로 연결되어 벳라간 사마리아, 도단 등을 지나 이스르엘 평지에 닿는다.  이 주변의 경치는 대단히 아름다운데 특히 디르사가 위치한 계곡은 석회석을 깍아 내고 거기에 좋은 흙을 덮은 것 같아 주변과는 독특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아가서에서도 언급되고 있어서 저자는 연인의 아름다움을 디르사에 비견(比肩)하였다(6:4).

한편 디르사의 역사는 비극적으로 끝나는데 성경에 나타난 그 개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므리가 엘리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므리를 왕으로 세운 후 디르사를 탈환하러 나섰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본 시므리는 왕국에 불을 놓고 자살하였다.  그로부터 6년 후 오므리는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겼다(왕상 16:8-24).  이로 인해 디르사는 일개 지방으로 전락하고 점차 그 명성을 잃어 갔던 것 같다.  그런데 1946년부터 이곳에서의 발굴 작업을 진행하였던 도미니카 수도회의 신부 Pere de VauxSteve는 이곳에서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크기의 엣 도시 터를 발견하였다.  이처럼 디르사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도 북왕국의 수도라는 명성에 걸맞도록 개발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지혜 문학’(Wisdom literature)이란 저자가 잠언, 우화, 수수께끼, 강화 등의 형식을 빌어 자신의 종교관이나 인생관 또는 세계관과 같은 사상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는 문학 양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학은 B.C. 3000년경부터 근동 지역에서 발생하였는데,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는 B.C. 1000년경에 이르러서야 두드러진 지혜 문학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그 후 신약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생명력을 잃지 아니하였다.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읽혀지는 히브리인들의 지혜 문학서로서 대표적인 것들로는 서너 가지가 있는데, 구약 성경 중의 잠언, 전도서, 욥기 그리고 시편(19, 37, 104, 107, 147, 148)과 신약 성경의 야고보서, 외경 중의 솔로몬의 지혜서(Wisdom of Solomon), 일명 집회서라고 하는 벤시락의 지혜서(Wisdom of Ben Sirach)등이 여기에 속한다.

 

1. 잠언(proverbs)

본서에는 고대의 많은 격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2217-2314절의 내용은 고대 이집트의 지혜 문학서인 Ameneope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본서는 주로 젊은이들에 대한 훈계와 권면, 교훈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므로 일명 젊은이의 책’(the Young man's book)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잠언서 1-9장에는 자신의 어리석음이 대조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는 인간이 자신의 모든 생활에서 지혜롭게 행하도록 교훈해 주고 있다.  10-24장은 솔로몬의 격언을 모아 놓은 부분이다.  솔로몬은 3,000의 잠언과 1,005의 노래를 지은 자이다(왕상 4:32).  25-29장도 역시 솔로몬의 잠언인데, 이 부분은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하였다.  30장은 야게(Jakeh)의 아들 아굴(Agur)의 잠언이며, 31장은 르무엘(Lemuel) 왕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에게 훈계한 잠언을 모아 편집한 기록이다.

 

2. 전도서(Ecclesiastes)

본서의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아니하고 다만 전도자라는 필명을 내세우고 있다(1:1).  이 전도자는 세 가지 것을 지극히 사랑하였는데 첫째는 생명이었다.  비록 그가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라고 말을 하긴 하였지만(4: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실제로 좋은 것이었다(참조, 3:13).  둘째, 그는 정의를 사랑하였다.  그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았으며(4:1), 인류의 잔인한 행위와 어리석음을 심히 염려하였다.  셋째, 그는 진리를 사랑하였다.  그는 우주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했었지만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결론만을 얻게 되었다(1:13-17).  이러한 논리를 좇는 그는 독자들에게 궁극적인 귀결점을 제시해 줌으로써 전도서를 끝맺고 있다.  그것은 곧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

 

3. 욥기(Job)

본서는 모든 지혜 문학서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본서의 등장 인물인 욥은 이 책에서 인간이 겪는 고난을 죄의 결과로만 볼 수는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참조, 1).  즉 그는 인간의 신앙을 연단시키려는 목적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4. 시편(Psalms)

몇 편의 시편도 지혜 문학서에 속하는데 19, 104, 147편은 자연을 주제로 한 시로 평가 받고 있다.  시편 기자가 자연 세계에 대하여 경이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곧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참조, 19).  37편에는 악인과 선인이 궁극적으로 받게 될 형벌과 보상이 증거되고 있으며, 107편에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찬양되고 있다.

 

5. 야고보서(James)

구약의 지혜 문학서처럼 본서도 여러 작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서가 외경인 벤 시락의 지혜서(Wisdom of Ben Sirach)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사실 야고보서에는 악에 굴복하지 말고 이에 대항하여 이기라는 벤 시락의 지혜서와 같은 내용의 교훈이 주어져 있다(3:13-5:6).

 

6. 지혜서(Wisdom)

솔로몬의 지혜서의 저자인 익명의 인물은 독자들에게 지혜를 추구할 것을 훈계하고 있다.  집회서(벤 시락의 지혜서)는 형태에 있어서 잠언과 비슷할 뿐 아니라 그 내용상에 있어서도 잠언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이 책은 외경 중 가장 분량이 많고 중요한 지혜 문학서이다.  두 책은 모두 지혜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인의 보증(保證)  (0) 2020.12.13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디르사(Tirzah)  (0) 2020.12.06
올바른 성 윤리(性倫理)  (0) 2020.11.20
성경의 문학적 쟝르(genre)  (0) 2020.11.08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사랑  (0) 2020.11.0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1. 서론

급변하는 세계 정세 가운데 현대인들의 성 윤리관은 개방적인 쪽으로 치우쳐 가고 있다.  사람들은 점차 성()에 대하여 도덕 지향적인 태도를 갖기 보다는 쾌락 지향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성의 상품화’ 라는 물결을 맞이하고 있다.  영화나 신문, 잡지, 소설, 그리고 안방을 점령하고 있는 TV의 내용들은 대부분 성적 충동을 자극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상품을 팔기 위한 광고 역시 사람들의 성적 심리에 호소하고 그로부터 관심을 촉발하는 것들 일색이다.  더우기 놀라운 것은 이러한 풍조가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도 은영중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나간 세계 역사를 돌이켜 보자.  어느 사회이건 간에 그릇된 성 윤리에서 비롯된 성적 타락의 결과는 사회의 붕괴와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소돔 고모라의 멸망(19)과 로마 제국의 몰락이 극도의 사치와 성적 방탕의 결과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 사회가 그릇된 성 풍조에 휩쓸리지 않도록 경성(警省)해야 한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본고는 성경이 가르치는 성 윤리를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기독교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지녀야 할 올바른 성 윤리관이 어떠한 것인지를 재정립해 보려고 한다.

 

2. 성경적 가르침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성경적 성 윤리관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태 의연한 것이라고 부정해 버리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까닭은 그들이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성의 본질을 오해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면 성경은 성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① 하나님께서는 성()에 관한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셨으며 사람들이 구속(救贖)의 기쁨과 아울러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셨다(참조, 9:9, 5:18-19, 3:29).  즉 성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많은 축복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② 이러한 의미에서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며 이로써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여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첫 걸음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서 결합이란 정신적 결합 뿐만 아니라 육체적 결합까지도 의미하는데, 육체적 결합은 곧 성 관계 (sexual intercourse)를 뜻한다(2:18-25).

③ 따라서 사랑하는 부부간에는 자연히 보다 깊은 사랑의 감정을 체험하기 위한 성적 욕망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욕망 자체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남녀간의 성적 욕망은 결혼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야 하며, 그 외의 방법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리는 범죄 행위가 된다는 점이다(참조, 18:6-23, 고전 7:2-5). 

④ 그러므로 성교(性交)는 단순히 쾌락만을 위한 유희거리가 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취급되어도 안 된다.  성경에서 성교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히브리어 <야다>안다’(know)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은 곧 두 남녀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 안에서 가장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⑤ 간음은 결혼 관계를 깨뜨리는 범죄 행위이다.  이것은 첫째,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선서한 신성한 계약을 위반하는 행위이며 둘째, 비정상적인 성교라는 점에서 죄이다(참조, 19:3-9).  여기서 비정상적인 성교라는 말은 타인과의 불법적인 성 행위, 즉 혼외(婚外)의 성 관계나 상대편의 인격을 무시하고 행하는 성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부부간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인격과 요구를 무시한 일방적인 성 행위는 옳지 않는 것이다.   

⑥ 한편 음행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제누트>인데창녀 같은 행위를 한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헬라어로는 <포르노스>, <포르네이아> 등이 있는데, 모두 더럽고 저질스러운 성 행위를 의미한다.  오늘날 무단으로 방영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포르노 비디오 (porn video)도 바로 이 같은 말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⑦ 이러한 뜻을 지니고 있는 음행이라는 말은 본래 남자와 창녀 간의 성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참조, 5:32, 15:20, 2:21).  특히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던 음행에 대하여 경고하였는데, 그 음행이란 자식이 아버지의 아내 즉 어머니(계모로 추측됨)와 성 관계를 가졌던 것이다(고전 5:1).

⑧ 이상과 같은 가르침을 좇아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순결한 생활을 하여야 하는데 특별히 성도들은 이러한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 하기오스)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따라 살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고전 1:2).  이러한 성도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권면의 말을 잊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살전 4:3-6).   

⑨ 위에서 살펴 본 것에 덧붙일 점은 음행한 연고가 아닌 기타의 연고로 인한 이혼이나 동성 연애와 같은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는 범죄 행위로 간주되며 어떠한 사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참조, 24:1, 5:32, 19:3).  이혼과 동성 연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물의와 부작용을 초래하게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도 이혼을 승인하기에 앞서 화해를 종용하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동성 연애 행위를 제재하고 있는 것이다. 

 

3. 결론

멸망 직전의 로마 사회에서는 순결 자체를 찾아볼 수 없었으며, 이혼이란 제도마저도 쓸모가 없었다.  William BarclayDemosthenes(B.C. 384-322)의 말을 인용하여 당시 로마의 사회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우리는 쾌락을 위하여 창녀들을 가지고 있으며, 몸을 돌보기 위하여 가정부를 가지고 있으며, 집을 충실히 관리하기 위하여 아내를 소유하고 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남편이 아내와 가족들을 부양하는 일에 성실할 것 같으면 다른 여자와 성 관계를 갖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행위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서구 사회가 바로 이 같은 로마 사회의 양상을 답습하고 있으며 우리의 사회까지도 침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를 우려하여 사회 일각에서는 청소년들에 대한 성 교육 실시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는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강단에서 성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꺼려 왔다.  그러나 이는 마땅히 지양해야 할 자세로서 교회는 뭇 사람들에게 성경에 입각한 올바른 성 윤리관를 제시해 주어야 하는 사명도 지니고 있다.  외설스러운 잡지나 그릇된 서적 등을 통하여 배우는 성 지식 및 윤리관은 오히려 개인의 앞날을 그르치며 사회의 장래를 어둡게 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교회내에서도 한시바삐 성경적인 성 교육을 실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육은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성 윤리의 붕괴는 사회 붕괴의 전조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짓는 것’(고전 6:18)이라는 말씀도 잊지 말자.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것으로 더 이상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여야 할 것이다(고전 6:19-2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성경의 문학적 위대성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성경 기자들이 똑같은 문학적 재능을 지녔던 것은 아니며 또한 성경의 모든 부분이 똑같은 문학적 가치를 지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성경 기자들의 다양한 재능들을 한데 어우러지게 하시며, 각종 아름다운 문학 쟝르들을 사용하시어 기록된 성경 말씀을 산출해 내셨다.  이러한 성경에 나오는 쟝르들로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대충 꼽아 보아도 산문과 운문, 역사, 드라마, 비유, 상징, 격언과 시가(詩歌), 묵시, 서간(書簡) 등이 있다. 

성경에는 이상과 같은 쟝르 뿐 아니라 그 외의 쟝르들(예를 들면 레위기, 신명기와 같은 법전, 욥기와 같은 변론)도 아주 뚜렸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쟝르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쟝르로 기록된 성경의 여러 책을 올바르게 해석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상 상징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글을 읽고 그 상징의 뜻을 해석해 내는 것은 일반적인 평서문(平書文)을 읽고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바로 여기서 성경을 읽는 독자들이 성경에 나타난 각종 쟝르들을 이해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각도에서 성경에 사용된 몇몇 쟝르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기로 하자.

 

1. 도덕적인 교훈을 주기 위하여 사용된 예화가 있다. 

이러한 예화 가운데 하나로 어느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가장 소중한 한마리 어린 양을 빼앗아 간 사건에 대하여 선지자 나단이 다윗 왕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삼하 12:1-4).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그 같은 사람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매우 분개했는데, 이때 나단은 당신이 그러한 사람이라고말함으로써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살해한 다윗의 죄를 깨우쳐 주었다.

 

2. 신약 성경에는 깊은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는 여러 비유가 있다.

가라지 비유(13:24-30), 달란트 비유(25:14-30),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10:25-37), 탕자 비유(15:11-32) 등과 같은 각종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에게 진리를 증거하실 때 즐겨 사용하시던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같은 비유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어찌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대답하셨던 말씀은 참으로 의미 심장하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13:10-11).  바로 이것이 신약 성경에 나타난 여러 비유가 지니고 있는 특별한 의미이다.  천국의 비밀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발견하거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비밀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려 하신다(참조, 딤전 2:4).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거부하고 스스로 마음을 완악케 함으로써 이러한 천국 비밀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참조, 13:14-15, 7:15-53).

 

3. 특별하게 언급할 쟝르는 법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명기에 나타나는 법문(法文)이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신정 정치를 위한 일종의 헌법이다.  이 헌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종주권 언약(宗主權言約)이다.  그래서 신명기에는 종속자인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할 의무 조항(4-26)과 의무의 이행 여부에 따른 처벌과 축복 조항(28)이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법전은 상징성이 배제된 사실 간명한 문장과 직설적인 문체로 기록되어야 함이 일반 상식이다.  그러기에 시가서나 예언서 그리고 복음서나 서신들과는 달리 신명기는 법문(또는 법규)으로서의 간결한 문체로 기록된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쟝르는 드라마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아가서는 남녀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희곡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조금만 각색을 하면 훌륭한 극이 창출될 수 있는 극적 요소를 많이 지녔다.  아가서의 주인공인 두 남녀의 사랑의 노래는 독자들이 꽃을 피고 새가 우는 푸른 풀밭으로 끌어들인다(2:10-14).  그리고 연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대목은 독자들의 가슴을 터질 듯하게 만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4:1-5, 5:10-16).  그러나 이러한 사실적인 의미, 즉 남녀간의 사랑의 아름다움과 그에 따르는 낭만적인 감흥을 주는 것만으로 아가서의 역할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가서는 독자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선민(選民)들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간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또한 어떠해야 하는지를 은유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신구약 성경 전권은 사실 하나의 주제하에 엮어진 한 편의 장엄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인간의 타락, 하나님의 구원 사역 및 메시야 예언, 오신 메시야, 다시 오실 메시야와 새 하늘과 새 땅의 순서로 전개되는 한 편의 드라마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사랑의 노래도 들어 있으며,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묵시도 들어 있다.   아무튼 각양 각색의 극적 요소와 여러 가지 쟝르로 구성되어 있는 성경은 독자들에게 한 편 한 편이 색다른 감흥을 안겨 주면서도 전체적인 통일성을 잃지 않는 위대한 드라마로 오늘날 이 세상 땅 끝까지 전파되고 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