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벨론 포로 이전 시대 (B.C.586이전)의 혼인

족장 시대에는(B.C.2160-1870)에는 근친 결혼’(consanguineous marriage)이 행하여졌었다.  아브라함은 그의 의붓 누이인 사라와 결혼하였으며(20:12), 야곱은 외삼촌의 두 딸과 결혼하였다(29:16-30).  비교적 고대에는 이러한 근친 결혼이 지리적, 문화적 여건으로 인해 불가피하였는데, 족장 시대 당시의 히브리인들은 순수한 여호와 신앙의 전수를 위해 이러한 결혼 형태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채택하였다(참조, 24:4, 29:18-30).  그러나 모세 시대에는 더 이상 근친 결혼이 필요치 않게 되었으며, 그보다 한 가정의 성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결혼을 금하셨다(18:1-18).  아들이 없이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기 위하여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부인과 결혼하는 계대 결혼 (繼代結婚)은 족장 시대와 마찬가지로(참조, 38) 족장 시대 이후에도 계속 시행되었다(참조, 25:5-10). 

한편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는 일부일처제 (一夫一妻制)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상적인 결혼 제도임을 불구하고(2:18-25), 성경에는 여러 아내를 거느렸던 자들이 나오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25:1) , 야곱(29-30), 다윗(삼하11:26-27, 20:3), 솔로몬(왕상11:3)이다.  뿐만 아니라 모세 오경에도 이같은 중혼’(重婚)을 허용하고 있는 듯한 구절이 나온다(21:15-17).  그러나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이같은 중혼이 종족 번식을 중요시 여기던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서 허용되었던 것이지 결코 보편화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당대의 올바른 사회상(社會像) 및 가치관을 지시해 주고 있는 지혜서에 일부다처제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또한 사사 시대와 왕국 시대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에도 일반 서민층 사이에서 중혼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확인될 수 있다.   

 

2. 바벨론 포로 이후 시대의 혼인

바벨론 포로 생활이 히브리인들의 가정 생활에 여러 가지 변화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극소수의 예외자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계속하여 일부일처제를 준수하였다(참조, 외경 토비트).  그리고 당시의 사회는 여전히 가장이 집안의 모든 문제를 관장하는 가부장적 사회였으므로 배우자를 선택한다든가 그밖에 혼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는 일은 부모에 의해 결정되고 추진되었다. 한편 당시의 생활 풍속을 살펴볼 것 같으면 신부(新婦)는 돈이나 간단한 결혼 계약서(Kethubah)에 의해 살 수 있었으며, 동거 생활에 의해서도 얻을 수 있었다(참조, Elephantine의 파피루스).  이때 신부를 사기 위하여 지불되는 돈은 ‘mohar’라고 불리웠는데, 바벨론 포로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 돈은 처녀의 아버지에게 지불되었다(참조, 34:12, 22:16-17, 22:19).  한편 동거 생활에 의해 약혼할 경우에는 먼저 남자와 여자가 개인의 침실에 들어가서 저들의 약혼 의사를 표시하여야 했다.  그래서 저들의 의사가 합치된 후에야 비로소 동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B.C. 3세기에 이르자 율법 학자들에 의해 이러한 비공식적이고 비합법적인 혼인 형태가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그 범법자들은 대중 앞에서 매질을 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3. 신약 시대의 혼인

초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는 순결(純潔) 상태로서의 처녀성 개념이 성도들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물론 혼인을 하는 것이 교회 감독에 의해 정죄를 당하거나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순결의 서열에 있어서 혼인은 세번째 위치를 차지하였다.  첫 번째 순결은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처녀성이었으며, 두 번째 순결은 결혼한 후에나 배우자가 죽은 후에 독신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교부들에 의해서도 장려되었다.  Jerome은 수도 생활의 아름다움을 역설하였으며, Augustin도 독신 생활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Clement나 안디옥의 Ignatius와 같은 교부들은 독신 생활보다는 혼인 생활에 있어서의 순결을 더 강조하였다. 그래서 Clement성결한 이미지로서의 혼인은 그것을 더럽히는 것들로부터 깨끗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상은 혼인(婚姻)을 하는 것보다는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으며,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는 혼인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한 바울의 사상(고전7)에 크게 영향을 입은 것 같다.  그러나 이같은 사상에도 불구하고 정통적인 유대주의자들 간에서는 결혼 생활이 계속적으로 장려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아내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로 믿었기 때문이다(참조, 117:3, 18:22).  심지어 A.D. 2-5세기에 집필한 유대인들의 탈무드(Talmud)에는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회중이 모여야 한다는 규정까지 나와 있다.  그러므로 많은 유대인 공동체들은 이러한 규정을 구속력이 있는 법규로까지 채택하였다.  한편 세월의 흐름에 따라 결혼식과 관계된 몇 가지 요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전통적으로 신부 집에서 혼인식이 거행되었던(참조, 25:1-13)과는 달리 10세기에 이르자 혼인식은 점차 회당(synagogue)에서 거행되기 시작되었다.  그리고 엄격하게 동족혼(同族婚)만을 고수해 오던 관습도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조금 관대하여져 유대인들은 외국인과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예배용 혼례 찬송의 도입이 눈에 띄게 된 것도 이 시대에 나타난 변화 중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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