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데(롬 1:17), 그치지 않고 실제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고후 5:17 엡 4:22-24), 존 웨슬리는 주장하였는데, 그는 칭의와 성화 사이에서 성경적 균형을 잡는 것이 자신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 신학에서는 전자를 ‘의인’이라고 하고(롬 3:24), 후자를 ‘성화’라고 구분하여 취급하는데(엡 1:4, 살전 5:23-24), 웨슬리는『The Works of the Rev John Wesley, AM, Volume VI』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객관적/율법적으로 보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결과로 우리가 죄책에서 용서받은 상태적인 변화를 말하며, 성화는 주관적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결과로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성질에서의 자유를 얻은 실제적인 변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웨슬리는 성화에는 두 가지 체험이 있는데 하나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적인 체험 즉 '초기의 성화'와 다른 하나는 그 후에 오는 또 다른 체험, 곧 '온전한 성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초기의 성화는 불신자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얻은 순간적인 체험이라고 한다면 온전한 성화는 신자가 자신의 무능과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 체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웨슬리는 이러한 체험을 『The Letter of the Rev John Wesley』에서 '제2의 축복' 혹은 '온전한 구원'으로 신자의 생활이 보다 높은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기독자의 완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사용한 두 번째 축복은 중생 다음에 체험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서 흔히 '성결의 체험'이라고 불러지기도 합니다.  그에 의하면 이 체험을 통하여 신자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으며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고 말하면서 온전한 성화의 체험이 최종 목표가 아니며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도 성도로서 승리할 때까지(엡 3:16-19), 계속 '기독자의 완전'에로 나아가라고 권고합니다(고후 7:1).  물론 여기서 말한 기독자의 완전이라는 단어는(웨슬리가 말하는 완전은 절대적 완전이 아닌 상대적 완전으로 신자가 사랑 안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관계를 말함) 당시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용어로서 오늘날에도 논쟁의 불씨가 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기독교의 완전 교리를 가장 중요시하였고 온전한 성화를 가리켜 '종교의 진수'라고 말하면서 '기독자 완전성별'과(벧전 1:15-16), '온전한 성화'(살전 5:23), 그리고 '온전한 사랑'을(마 22:36-40), 신자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얻을 수 있는 완전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The Works of John Wesley, 3rd』에서도 “우리는 이 둘(칭의와 성화)을 각자의 자리에 놓아야 하고 똑같이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둘을 함께 묶어 두셨고 사람들이 갈라놓을 수 없다. 따라서 똑같은 열정과 성실함과 한편으로는 값없이 완전한 현재적인 칭의 교리를 다른 한 편으로는 마음과 삶이 다 같이 성화되는 완전한 성화 교리를 고수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웨슬리 신학을 오랫동안 연구한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그에 대한 특징이 “오직 믿음”과 “거룩한 삶”을 끝까지 붙들었던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중요한 교리적 문제들,(예를 들어 구속 같은) 특히 성령 교리에 대해서는 그리 자세하게 설명을 발전시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웨슬리의 성령론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성화와의 긴밀한 상호 관련 속에서 보는 것인데 그의 설교 『The Witness of the Holy Spirit』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시는 사랑이 우리의 영혼에 깃들이게 되면 하나님의 두 번째 은혜, 성령의 능력이 그 가운데서 드러나게 된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의 의미하는 것은 두 번째 축복,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하셔야(겔 36:26-28), 우리가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롬 8:4).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볼 때 19세기 일어났던 성결운동은 예외 없이 성화를 '성령세례'로 보고 오순절을 두 번째 은혜의 역사의 패러다임으로 보는 것이 웨슬리주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미국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부흥 운동을 이끈 설교가들 역시 완전성화가 성령세례라고 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완전성화는 즉각적이면서 동시에 회심에 뒤이어 일어나는 '두 번째 은혜'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오순절 성령세례 교리의 뿌리가 웨슬리주의 신학에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것으로 Mildred Bangs Wyncoop은 “많은 용어 중에 웨슬리는 완전성화라는 말을 사용했지 한 번도 성령세례나 다른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처럼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웨슬리주의자들에게는 완전성화를 의미하며 '새로 거듭남', '후속적으로 경험되는 채워짐' 그리고 '인격의 변화'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을 이끌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친구인 John Fletcher도 '성령을 받는다'라는 표현을 완전성화를 대체할 수 있는 용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완전성화와 성령세례를 동일시했다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웨슬리는 성령세례와 완전성화를 제2의 축복, 즉 동일한 체험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웨슬리의 성령세례에 대한 주장은 복음주의자들, 특히 개혁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장10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외에는 아무것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라고 결심할지는 몰라도, 오늘날 성령사역의 다양한 국면들에 대한 폭넓은 견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에는 완성되지 않는 먼 미래의 물결이지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Dunning, H. Ray는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두고 “나는 칼빈보다 칼빈주의의 몇몇 형식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웨슬리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은 마음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에 주는 유산의 일부인 모든 은혜와 은사들을 포함하여(고전 12:7, 엡 4:7), 성령의 가장 주된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지(빌 2:5, 벧전 2:21), 서로 신학과 신앙에 대해 비방하는 것이나 자신들만이 옳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견해 차이로 인해 서로 간의 일상적인 교제가 불가능한 문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대의 속에서의 존중과 사랑과 협력은 여전히 경계를 넘어 필수적인 기독교 교리의 다른 영역에서 동일한 귀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로 계속 흘러 넘쳐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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