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현대 교회가 범하는 큰 실수 중의 하나는 판매원이 소비자에게 재품을 파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상품화하여 제공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오시면 그분은 지옥에서 우리를 구해주시고 질병뿐만 아니라 결혼생활과 삶의 제반적인 문제들, 즉 좋은 직장과 차와 집을 주실 것이라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분명 죄인들을 지옥에서 구해주시며 다른 모든 일도 하실 수 있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 단계에서 더 진보하지 못하고 머무른다면 그 신앙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히 6:1-2).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실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오는 것이 꼭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만약 주님이 가정생활과 직장, 혹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로 잡아주시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주된 관심이 그분과의 친밀감이 아닌 주로 사람의 표면적인 문제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실 수 있는 일에 중심을 둔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할 때 우리는 그분을 떠나거나 상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와 우리를 위해서 행해 주시는 필요에 의해 예수님과 관계를 갖는다면 그분과의 우정은 서서히 멀어져 갈 것이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 안에는 두 가지 유형의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마르다 신앙을 가진 사람과 다른 하나는 마리아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예수님은 이 두 유형 중 어느 유형이 주님의 기뻐하는 유형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눅 10:38-42).  먼저 마르다는 헌신적으로 손님을 접대하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는 즉시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고(눅 10:38),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 솔선수범 하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봉사를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친 봉사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열심히 행하는 일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르다의 분주한 마음이었습니다(눅 10:40).  정신이 분산되면 좋은 일이 고된 일이 되는 것처럼 자신이 섬기는 주님에게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게 되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마르다의 마음이 분주한 것은 대단히 부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로 하여금 걱정하게 만들었으며 그러한 걱정은 기쁨으로 주님을 대접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눅 10:41).  분명 예수님은 마르다의 집에 같이 계셨지만 마르다는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벅찬 자신의 일에 부담을 가져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도 마음이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분주함은 성령의 임재를 망각하게 만들고 우리를 불필요한 염려와 근심의 영역으로 이끌어 가게 만드는데 사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이 그분을 섬기려고 할 때 우리는 마르다처럼 예수님께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수 있고(눅 10:40),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며 마르다가 주님에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 명령을 하는 오만함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마르다의 분노, 즉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약 1:20), 그녀 자신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게 했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동생 마리아까지 비판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때때로 열심히 일하다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의 목표 자체를 잃어버릴 수가 있고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거나 그분과의 친밀감이 없는 사람이 교회의 여러 부서에서 섬기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될 때 이때 하는 봉사는 마르다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을(롬 14:4), 교만한 마음으로 판단하는 표준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엘리야와 같이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왕상 19:12), 들을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마르다와 다르게 부엌에서 예수님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지도 않았고 그저 거실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당시 관습에 따르면 마리아는 남자들과 함께 거실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되고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부엌이었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제자들 곁에 앉아 있었다면 제자들은 그녀가 여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상기시켜 주었을지 모르겠지만 마리아는 제자들 곁에 앉아 있지 않고 주님의 발아래 앉아 그분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씀 듣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분명 마리아는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고 주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부엌으로 갈 수 있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녀는 하나님 아들의 발아래 앉아 그분의 말씀만을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눅 10:39).  지금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마리아가 선택한 ‘이 좋은 편’(눅 10:42), 즉 “예수님과의 교제”를 말하는데 이 친밀감은 우리 인생의 잔치상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유일한 것으로 만일 오늘날 주님께서 마리아를 닮은 사람을 발견하신다면 그 사람에게 마치 친구가 자기 마음의 모든 것을 터놓고 교제하는 것처럼 그 사람과 소중한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요 15:14-15). 그러나 주님의 친구가 아닌 사람은 성령의 임재를 떠나서도 교회를 다닐 수 있고 종교적인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 섬기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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