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날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세례에 대한 논쟁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 사이에는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먼저 로이드 존스는 성령세례에 대해 『The Sovereign Spirit』과『성령세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서도 거듭난 신자가 될 수 있다(고전 12:3).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면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세례를 받은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 발생하는 것은 즉각적이며 이것은 이론이나 신앙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행동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현,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며 실제로 우리의 체험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우선적이고 필수적으로 "능력세례"이며 그 목적은 진리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능력과 확신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령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된 것은 동시적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로이드 존스는 이미 중생한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역을 증언할 수 있도록 능력으로 무장시키는 것이(눅 24:49), "성령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 스토트는 성령세례에 대해 『성령세례와 충만』에서 다른 견해를 제시합니다.  “사도행정 2장에 있는 베드로의 설교와 고린도전서 12장13절에 나오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찾고자 했던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선물"과 같은 것으로서 그것은 새 언약의 독특한 축복 중 하나이며 또한 시초적인 축복이기 때문에 그 언약에 참여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축복이다. 그것은 새 시대에 소속된다는 것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새 언약의 중보이시며 그 복의 수여자이신 주 예수님은 그분의 언약에 들어오는 모든 자에게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둘 다 주신다.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말할 때 그것은 단회적인 선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을 말할 때 우리는 이 선물이 지속적이며 갈수록 더 많이 충당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성령의 세례는 중생 이후에 받게 되는 뒤따라오는 축복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스토트는 로이드 존스의 견해와 상반되게 성령세례는 회심 이후에 뒤따르는 후속적 경험이 아니라 중생과 일치되는 "제1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세례와 중생을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본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중생과 성령세례를 동시에 강조하는 대표적인 사람들, 벤자민 B. 위필드, 리차드 개핀, 제임스 던, 월터 C. 카이저, 프레드릭 D. 부루너, 존 스토트는 성령세례가 회심 때 일어난다고 공통적으로 주장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견해를 달리하는데, 예를 들어 제임스 던은 성령세례의 경험은 받는 자가 알 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에 개핀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성령세례에 대한 바울과 누가의 신학이 같다는 점에 있어 공통된 의견을 갖습니다.  반면에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사람들 중에 D.L. 무디, 찰스 피니, R.A. 토리, A.J. 고든, F.B. 마이어, 앤드루 머레이, 로이드 존스는 구원받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때 죄로부터 구원 얻는 것은 아니라는데 동의하면서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통해 죄를 이길 힘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를 받고 난 후에야 죄를 이기며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놓고 서로간의 의견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공통된 한 가지 견해는 성령의 주된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일임에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사실 19세기 이전에는 성령세례에 대한 이러한 신학적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각각 나름대로 성령을 받는 방식과 성령을 받는 시기에 대해 해석을 했지만 일치된 성령론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의 일치된 교리가 없다고 해서 성령의 역사나 체험마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Eduard Schweizer는 “성령은 교리의 주체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고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중생을 성령세례로 보고 그 후에 받는 것을 성령의 충만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성령세례가 중생 이후에 체험하는 성령충만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성령으로 세례 받는 사건에 관한 일곱 구절들을(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11:16, 고전 12:13),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에 얽매인 교회가 아닌 이상 성찬식 때 가운을 입을 것인가 정장을 할 것인가, 찬양할 때 드럼을 사용할 것인지 오르간을 사용할 것인가 라는 사사로운 것들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성령세례'에 대한 용어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깊이 성령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의 놀라운 역사와 임재를 충만하게 누리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습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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